군유쟁신(君有爭臣) - ③태시친쟁신(泰始親爭臣) 진무제 태시, 간언하는 신하를 가까이 하다.
이상호( 소소감 리더십 연구소 소장) 십상시들로 몸살을 앓던 후한은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시기를 겪으면서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대혼란에 들어갔다. 그 혼란한 정국을 평정하겠다고 나선 영웅들은 초기에는 난의 평정에 최선을 다했으나 후에는 천하를 가질 욕망을 드러냈다. 그래서 천하를 두고 치열한 싸움을 거듭했다. 그리고 판세는 ‘조조의 위, 유비의 촉한, 손권의 오’라는 삼국으로 정립하였다. 삼국의 국력은 위나라가 가장 강성했으며 촉한이 가장 약했다. 유비는 지략과 충성의 대명사인 29살 아래의 제갈량을 얻어 촉한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유비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아들인 유선이었다. 제갈량은 유선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장장 7년에 걸친 6차례의 북벌전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진중에서 죽었다. 지략의 대명사로 알려진 제갈량의 북벌전을 상대하여 막아낸 명장은 사마의였다. 그는 끝까지 촉의 공격에 응수하지 않고 지구전을 벌였다. 촉은 마침내 오랜 원정에 물자가 떨어지고 군사들이 지쳐 자멸을 초래했다. 263년 유비의 촉한은 위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오나라가 멸망함으로써 70년간 계속되었던 삼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통일되었다. 사마의는 각종 개혁에 성공함으로써 위나라의 최고 명문 가문으로 지위를 굳혔다. 그 사마의의 손자가 사마염(司馬炎)이었다. 조조의 후손인 조환은 위왕에 즉위하였으나 무능하였다. 이에 사마염은 부하들의 뜻을 받들어 조환을 겁박하여 스스로 옥새를 넘겨주도록 하여 왕이 되었다. 사마염은 왕이 되자 나라를 안정시키고 군사를 결집하였다. 그리고 오나라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그것이 바로 서진(西晉)이었다. (훗날 사마예가 건국에 건설한 동진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마염이 건국한 진을 서진이라 부른다.) 그래서 사마염은 서진의 초대 황제인 서진 세조 무황제(西晉 世祖 武皇帝 司馬炎, 236년 ~ 290년 5월 16일)가 되었다. 서진(265~316)은 사마염 시대에 가장 강성하였으나 사마염 이후 쇠퇴하여 건국 51년 만에 사마예의 동진(317~420)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한때 서진을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던 사마염은 지략과 기개뿐 아니라 호방하고 정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염은 신하들의 직언을 가까이 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사마염은 특히 직언을 일삼는 우장군 황보요(皇甫陶)를 신임했다. 서진 세조 무황제(西晉 世祖 武皇帝) 사마염은 강직한 대신들과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무제 8년(272)이었다. 황제 사마염은 우장군 황보요와 정사를 논하고 있었다. 황보요는 강직하고 솔직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무제와 토론하는 도중 무제와 의견이 엇갈리자 무제의 말을 가로막고 자기의 주장을 강력하게 역설했다. 무제도 물러서지 않고 황보요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런 과정에서 무제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무제는 한동안 침울했다. 이를 알고 있는 신기시랑 정휘(鄭徽)가 기다렸다는 듯이 황보요를 처단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휘에게 황보요는 정치적인 경쟁자였으며 황보요가 황제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려 눈 밖에 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상소를 다 읽고 난 무제는 화를 크게 내면서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 “이런 고약한 사람이 있나? 정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짐이 그대들에게 언제나 바라는 바이다. 그래야만 짐이 여러 가지 장점을 두루 살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짐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짐에게 듣기 좋은 말만 일삼는 신하들이다. 짐의 환심을 사려고 달콤한 말만 하는 것은 짐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무릇 군주의 우환은 아첨하고 칭송하는 말만을 일삼는 신하들 때문에 생기는 법이다. 정직하게 쟁론을 펼치는 신하들 때문에 군주와 나라를 망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정휘가 황보요를 처단하라는 주장은 근거 없는 잘못된 지적이며, 자기의 권한 밖의 주장이자 짐의 본심을 흐리려는 것이다. 오히려 정휘가 짐에게 죄를 지은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무제는 정휘의 관직을 박탈하고 쫓아내었다. 아첨하며 중신을 모함하는 신하는 황제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한다는 이유였다. 한참의 세월이 흘러 무제도 나이가 들었다. 남교에서 제천행사가 열렸다. 술을 얼큰하게 하여 기분이 매우 좋아진 무제가 느닷없이 대신인 유의(劉毅)에게 “그대는 짐을 한 대에 누구와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하고 물었다. 이에 유의는 “소신의 생각으로는 후한의 환제(桓帝)나 영제(靈帝)에 비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하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주위에 있는 신하들이 대경실색(大驚失色)했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환제와 영제가 누구인가? 십상시들의 농간으로 주색에 빠져 후한을 멸망으로 몰아간 황제들 아닌가? 무제를 이 두 황제와 비교한다는 것은 죽음을 부르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무제도 화가 나 낯빛이 바뀌었다. 그러나 늘 호방했던 무제는 한참 화를 참더니 말을 이었다. “짐을 나라를 환란에 빠뜨린 두 황제에게 비유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소. 비록 짐의 덕행이 명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짐은 욕망을 다스리고 정사를 잘 살피어 동오(東吳)를 평정하므로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유의는 직언을 계속하였다. “환제와 영제는 관직을 팔아 관고(官庫)를 채웠지만, 폐하께서는 관직을 팔아 사고(私庫)를 채우셨습니다. 하여 폐하께서는 환제나 영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황제를 크게 조롱하고 질책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무제는 웃으며 말했다.
“환제와 영제는 아첨하는 환관들만 가까이하여 이토록 날카로운 지적을 들은 바 없었는데, 짐에게는 두려움 없이 잘못을 말해주는 신하가 있으니 짐이 환제나 영제보다 못하진 않은 것 같소.” 간언하는 신하를 가까이하는 군주는 호방하면서도 정직하다. 호방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성격적인 특성도 있지만, 그만큼 자신감이 있고 꾸릴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군주가 정직하면 주변에 정직한 신하가 많기 마련이다. 군주가 바른말을 가까이하면 신하는 거짓과 음모를 함부로 할 수 없다. 이는 현대의 모든 통치 원리에도 통하는 말이다. 최고 통치자가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정치를 한다면 주변에 간언하는 정직한 참모가 많기 마련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최고 통치자가 자기의 주변에 어떤 인물을 두느냐에 따라 그의 정치적 판단과 결정이 달라진다. 특히 최고 통치자의 의사결정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여 격렬한 토론을 하므로 보다 신중한 정책 결정을 하도록 하는 참모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직면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런 참모를 둘 수 있음은 순전히 최고 통치자의 몫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최고 통치자는 그런 참모를 멀리한다. 권위에 도전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유명한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최고 통치자의 곁에는 항상 악마의 대변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악마의 대변인이란 어떠한 조직이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의견을 표명하는 자를 말한다. 이 악마의 대변인은 최고 통치자가 치우침 없는 바른 의사결정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이다. 유명한 케네디 대통령이 유명한 쿠바봉쇄 사건 때 이를 잘 활용했다) 건국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의 주변에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던 참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의 대통령 주변에는 악마의 대변인이 얼마나 될까? 대통령은 악마의 대변인을 둘 마음의 여유와 자신감이 있을까? 최고 통치자는 지나치게 호방하여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소심하여도 안 된다. 아첨과 간언을 구분할 줄 아는 균형 잡힌 판단력과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셀프 리더십(Self leadership)이 중요하다. 최고 통치자가 주변에 간언하는 참모를 두고 그 간언을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간언을 새겨듣고 자신을 성찰하며 합리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서진의 세조 무황제(西晉 世祖 武皇帝) 사마염의 일대기를 통해 이를 본다. *참고사항* 조조가 세운 위나라에서 사마염의 집안은 조부인 사마의 때부터 융성했다. 조부인 사마의는 정적인 조상을 물리쳐 실권을 장악했다. 그 후 사마씨 일족은 조조가 세운 위의 3대 황제 조방과 4대 황제 조모를 폐위하고 원제인 조환 때에 사마씨 일족의 수장인 대장군 사마소가 승상에서 진공(晉公)을 거쳐, 진왕(晉王)이 되었다. 이로써 조씨의 위나라는 사실상 끝이 나고 사마씨의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사마염은 왕세자가 되었다. 신하들은 사마소에게 황위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순리가 아니라며 황위에 오르지 않았다. 서기 265년, 사마소가 죽고 왕세자 사마염이 진왕을 승계했다. 사마염은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 조환을 겁박하여 선위를 요구했다. 조환은 사마염의 겁박에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스스로 옥새를 넘겨주었다. 사마염은 황위를 선위 받은 후 조환을 진류왕(陳留王)으로 봉하고 낙양에서 국호를 진(晉)으로 바꾸고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그리고 서기 280년, 명장 두예(杜預)와 왕준(王濬)을 시켜 손오(孫吳)가 다스리고 있던 동쪽의 오나라를 침공하게 했다. 사치와 방탕에 빠졌던 오나라 왕 손오는 상당수의 대신과 백성들이 진으로 귀순하는 바람에 겁에 질려 크게 싸워보지도 않고 진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70년의 삼국시대는 종료되고 새로운 통일 국가가 탄생했다. 이것이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이다. 말 그대로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은 호방한 풍운아였다. 그는 스스로 성군(聖君)을 자처하며 주변에 직언하는 신하를 두고 두둔하며 검소한 생활을 장려했다. 그의 정권 초기에는 그것이 통했다. 그러나 사마염의 생활은 이중적이었다. 그는 말로는 성군을 자처하며 호방하고 대신들의 칼날 같은 직언을 들었지만, 행동의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 말년의 그는 재물을 모으고 주색을 일삼으므로 부패와 향락에 빠졌다. 그는 아마 성군에 대한 자아도취에 빠진 모양이었다. 사마염 말년의 서진은 상당히 부패하고 혼란해졌다. 사마염 말년부터 서진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마염의 뒤를 이은 것은 사마충이었다. 사마충은 유약하고 올곧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정실 부인인 가남풍이 정권을 잡고 전횡을 일삼았다. 나라는 점점 피폐해졌다. 그래서 ‘팔왕(八王)의 난(亂)’을 초래하였다. 팔왕의 난으로 서진 왕조가 혼란할 때 북방의 오호[五胡-서북방에서 중국 본토에 이주한 다섯 민족인 흉노(匈奴)·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들이 침입하여 서진은 몰락했다. 이후 중국의 판도는 5호 16국 시대를 열었고 그 후손인 사마예는 동쪽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그것이 동진(東晉 317〜420)이다. 말년에 성군에 대한 자아도취에 빠진 사마염은 나라가 어지러운 것을 탓하며 신하들에게 “짐에게는 왜 공명 같은 신하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하들이 “지금의 폐하께는 공명 같은 신하가 열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말년의 사마염은 신하들의 직언을 들었지만, 자기 성찰의 도구로 삼지 않고 다만 직언을 듣는 것 자체를 두고 성군의 행세만 하였다. 그는 점점 사치와 행락에 빠졌다. 그래서 후세의 사가들은 말년의 사마염은 이미 후한 말기의 십상시들에 둘러쌓여 사치와 향락만 일삼았던 환제와 영제 못지않았다고 평가한다. 사마염은 직언을 듣기는 했지만 다른 귀로 흘려보내고 말았다. 어느 시대건 최고 통치자가 직언을 새겨듣지 않으면 나라는 기울게 되어 있다. ‘직언을 새겨 듣는다’는 것은 그 직언을 곱씹으며 자기를 성찰하고 정책 결정을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시대건 최고 통치자가 부패와 향락에 빠지면 나라는 기울고 민심은 동요된다. 그래서 최고 통치자와 그 주변 인물의 청렴과 정직 등 도덕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들은 능력을 내세우며 도덕성을 별것 아닌 것처럼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그 지지자들도 동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분명 자신들의 도덕적 결함을 가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팬덤화된 정치는 위험하다. 분명한 것은 그 어떤 능력도 도덕성을 상실하면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린 앞으로 대통령,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지방의원 할 것 없이 정치인들에게 도덕성을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성비위 문제, 뇌물 수수, 횡령, 친인척 부당 채용, 선거법 위반 등 심각한 도덕적. 법적 결함이 있는 자들은 정치적 지도자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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