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소세요~ 오늘도 방문하심에 감사 드려요~
집시의 기도
장 금 (1949 ~ 2009)
- 충정로 사랑방에서 한동안 기거 했던 어느 노숙인의 詩
둥지를 잃은 집시에게는
찾아오는 밤이 두렵다.
타인이 보는 석양의 아름다움도
집시에게는 두려움의 그림자일 뿐……
한때는 천방지축으로 일에 미쳐
하루해가 아쉬웠는데
모든 것 잃어버리고
사랑이란 이름의 띠로 매였던
피붙이들은 이산의 파편이 되어
가슴 저미는 회한을 안긴다.
굶어죽어도 얻어먹는 한술 밥은
결코 사양하겠노라 이를 깨물던
그 오기도 일곱 끼니의 굶주림 앞에
무너지고
무료급식소 대열에 서서……
행여 아는 이 조우할까 조바심 하며
날짜 지난 신문지로 얼굴 숨기며
아려오는 가슴을 안고 숟가락 들고
목이 메는 아픔으로 한 끼니를 만난다.
그 많던 술 친구도
그렇게도 갈 곳이 많았던 만남들도
인생을 강등 당한 나에게
이제는 아무도 없다.
밤이 두려운 것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다.
50평생의 끝자리에서
잠자리를 걱정 하며
석촌 공원 긴 의자에 맥없이 앉으니
만감의 상념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뒤엉킨 실타래 처럼
난마의 세월들……
깡소주를 벗 삼아 물마시 듯 벌컥 대고
수치심 잃어버린 육신을
아무데나 눕힌다.
빨랫줄 서너 발 철물점에 사서
청계산 소나무에 걸고
비겁의 생을 마감 하자니
눈물을 찍어내는 지 어미와
두 아이가 "안 돼, 아빠! 안 돼"한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 해야지
교만도 없고, 자랑도 없고
그저 주어진 생을 걸어 가야지.
내달리다 넘어지지 말고
편하다고 주저 앉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날의 아름다움을 위해
걸어 가야지……
걸어 가야지……
***************************************************
서울 영등포 노숙인 쉼터 '행복한 우리집'의 식당 벽에 붙어 있는
시(詩)가 있다. 제목은 '집시의 기도',
부제(副題)는 '충정로 사랑방에서 기거했던 어느 노숙인의 시'다.
쉼터 관계자는 "이 바닥에서 아주 유명한 시"라고 했다.
'집시의 기도'는 화자(話者)가 노숙하는 신세를 한탄하다 '다시
일어서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노숙인 김모(68)씨는 "밥 먹을 때마다 (시를) 쳐다보는데
'이 악물고 어떻게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이 시는 10년 전부터 노숙인 관련 단체행사나 자료집에 자주
등장했다. 이걸 쓴 사람은 누구고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시인이 머물렀다는 '구세군 충정로 사랑방'은 2년 전 중랑구
망우동으로 이사 갔다.
구세군은 대방동·충정로·서대문을 거쳐 현재 망우동·서대문에
노숙인 쉼터 두 곳을 운영 중이다.
김도진 사무국장은 "'집시의 기도'는 1998년~2001년 4월까지
우리 시설을 오간 장금(1949년생)씨가 쓴 것"이라고 했다.
장씨는 1999년 봄 이 시를 썼다.
"98년 장씨가 사업이 망했다며 찾아왔어요.
160㎝ 정도의 키에 머리숱도 적고 이(齒)도 많이 빠진 왜소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그가 '집시의 기도'를 써냈어요.
모두들 글 솜씨에 놀랐습니다."
당시 '대방동 사랑방'에는 노숙인이 100명쯤 있었다.
그 중 30여명이 글을 끄적였다고 한다.
김 국장은 "장씨가 평소에도 한문이나 사자성어를 종이에다
쓰곤 했다. 이날도 장씨는 집시의 기도를 단숨에 써내려갔다"
고 했다.
사랑방은 10여 년 전 상담기록을 폐기해 장씨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남아있지 않았다.
장씨는 1999년 10월 대방동 쉼터가 충정로로 이사 갈 때
떠났고 2년 뒤 다시 충정로로 찾아와 한 달간 지내다
또 나갔다고 한다.
김 국장은 "장씨는 본인을 '집시'라고 한 것처럼 얽매이는 걸
싫어했던노숙인이었다"고 했다.
장씨는 쉼터를 떠나서도 남대문·서울역 등지를 돌아다니며
1년에 서너번 김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는데 4년 전 연락이
끊겼다.
장씨의 흔적은 영등포 행복한 우리집에서 3분 거리인 또 다른
쉼터에서 발견됐다. '햇살보금자리 상담보호센터'에는
작년 3월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있던 장씨를
고시원에 차린 응급구호방에 옮긴 기록이 있었다.
작년 4월 2일 밤, 이 센터 병원동행팀은 탈진한 장씨를 부축해
지하철을 타고 제기동역 근처 동부병원 응급실로 데려가기도
했다. 장씨는 4월 3일 119구급대에 실려 보라매병원으로 갔다.
이 센터의 마지막 기록은 다음과 같다.
'4/6 민윤찬 활동가가 김○○씨를 동행, 보라매병원에 다녀
왔다고 하네요. 장금씨를 찾아갔는데 의식 불명인 상태라고
합니다. 4/14 보라매병원에 입원해 계신 장금씨를 찾았으나
중환자실에 있기 때문에 면회 불가.'
마지막 면회를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는 동행팀 윤순택씨가
말했다. "장금씨가 '집시의 기도'를 썼다는 걸 모두 몰랐다.
그는 특별했다. 내게 가끔 아프리카나 세계평화 얘기를
해줬다."
그는 고시원 구호방에서 '노숙자라고 병원에서 천대받으면서
죽는 것보다 고시원에서 깨끗하게 죽고 싶다'는 뜻을
윤씨에게 전했다고 한다. 보라매병원에서 기저귀를 찬 채
누워있는 모습이 윤씨가 마지막으로 본 장금씨였다.
보라매병원은 작년 4월 29일 시립 성인남성 부랑인시설
은평의 마을에 장씨를 의뢰했다.
장씨는 작년 6월 1일 부천대성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은평의 마을 관계자는 "장금씨는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돼
벽제화장터로 갔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내용 증명을 보냈지만 아무 통보도 오지 않았다
고 한다. 김 국장은 "4년 전 통화 때 '부산으로 가 아내와
살겠다'고 해, 이 생활을 벗어난 줄 알았다"고 했다.
노숙 시인은 '집시의 기도' 한 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888 방랑객 編 888
첫댓글 방랑객 님 안녕 하세요? 반갑습니다 좋은 자료를
올려 주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감사 합니다 샬롬 !!
고은 한주 맛과 멋 향기로 보람 되시고...
항상 건강 하시고 편안 하시며 늘 웃는 삶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