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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새 하늘과 새 땅 전에 헌 하늘과 헌 땅>의 줄거리 :
새 하늘과 새 땅의 등장으로 어린 양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역사의 대미가 장식됩니다. 혹시 진정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십니까? 그냥 입으로만 새 하늘과 새 땅을 언급하는 것은 아닌가요? 새 하늘과 새 땅을 진정으로 소망하는가 하는 여부는 현재 살고 있는 헌 하늘과 헌 땅을 어떠한 태도로 상대하는가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전에 헌 하늘과 헌 땅
(요한계시록 21:1~8)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본문에서는 드디어 어린 양 예수님으로 인해서 시작된 역사의 대미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등장으로 마감되는 장면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진정으로 바라고 소망하신다면, 지금 여러분의 몸으로 살고 있는 헌 하늘과 헌 땅의 문제를 말끔하게 처리해야 됩니다. 몸으로 살고 있는 헌 하늘과 헌 땅에 대한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백 보좌 심판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5절을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계시록을 읽는 자들에게 주시는 촉구가 다시 등장합니다. 상황을 보자면 이미 세상이 다 끝났기에 더는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 태어날 인간도 없기에 기록해도 읽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을 읽게 되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요청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한다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몸으로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만물은 없어질 것들임을 의미합니다. 새롭게 대체되어 버릴 것들입니다. 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을 비교해서 말하자면, 헌 하늘과 헌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양 역사가 끝나고 백 보좌 심판까지 끝난 뒤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되어 버릴 헌 하늘과 헌 땅에 있는 헌것들을 마음에 담지 말라는 요청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5~8절에 걸쳐 언급됩니다. 헌것들을 마음에 담고 살던 사람은 죽은 뒤에 다시 깨어난다고 해도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헌 하늘과 헌 땅을 사는 동안에 도대체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어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먼저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의 어감 때문인지 많은 오해가 빚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의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앞선 20장 11절을 보면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헌 하늘과 헌 땅을 새롭게 고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시는 게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 29절에서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없어진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체가 사라져 버림을 의미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없어지니 지구도 남아있을 수는 없습니다. 또 베드로후서 3장 12~13절에서는 더 노골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은 헌 하늘과 헌 땅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불에 타서 없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 없어진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은 등장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있는 천국입니다. 하나님께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닙니다. 육체로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천국은 전혀 새로운 삶의 터전이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표현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살았던 것처럼, 천국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허락하시는 몸을 입고 살아야 될 삶의 터전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헌 하늘과 헌 땅은 육체를 입고 살던 곳이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새로운 신령한 몸을 입고 살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 제공된다는 뜻이지, 지금 살고 있는 헌 하늘과 헌 땅이 새롭게 고쳐진다는 뜻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2절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묘사하기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헌 하늘과 헌 땅에 살면서도 헌것들을 마음에 담지 않고 산 사람은,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성의 벽돌이 되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진과 성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성도로서 산다는 것은,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성의 벽돌들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십사만 사천 명이 하나님의 완전하고 충만한 예정을 상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예정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땅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어린 양 예수님과의 완전한 결합을 이루어 공생애의 삶과 천년 왕국을 살아갑니다. 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연합이 하늘에서는 마치 새 예루살렘 성을 건축해 가는 모습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 때에 예정하신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삶으로써, 어린 양의 신부로 언급되었듯이 온전히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성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늘에서 지어지고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벽돌들입니다. 그리고 그 벽돌들 전체가 이 세상에 있는 교회입니다. 하늘에서는 지상의 교회를 새 예루살렘 성이자 어린 양의 신부라고 여깁니다. 이 교회는 지역 예배당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언급에서 동서남북으로 문이 열려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진과 성을 이루는 성도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4절을 보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한 지붕 아래 사는 것과 같은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가 살 때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믿음의 유무입니다. 헌 하늘과 헌 땅에서 살 때는 오감 외에 여섯 번째 감각이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감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감하며 살았습니다. 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은 현미경을 닮았습니다. 현미경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을 보게 해주듯이,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해줍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믿음은 요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부대끼며 살 사람들이 천국 가족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육체로 살고 있는 헌 하늘과 헌 땅에서의 가족은 어쩌면 아무런 관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저도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들이 있고 조카들이 있으며 아들이 있고 집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진리이며 객관적 사실은 사실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육적인 관계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의 핏줄을 자부했지만 구원에서 제외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는 사람은 누가 어린 양과 결합할 것인가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앞서 살펴보았던 5절의 현재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촉구가 이어집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오려면 새롭게 대체될 헌 하늘과 헌 땅에 있는 것들은 절대로 마음에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명심하고 기억해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는 ‘헌’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옛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만,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어감에 맞추어 실감할 수 있기 위하여 ‘헌 것’이라고 해보겠습니다. 헌 것은 말 그대로 옛것이고 중고라는 뜻입니다. 남편을 봐도 그냥 남편이 아닌 헌 남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사람이라면 헌 하늘과 헌 땅에 있는 헌 남편을 마음에 담지 않습니다. 남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사람이라면 헌 하늘과 헌 땅에 있는 헌 아내를 마음에 담지 않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그야말로 새 사람이라고 부를만한 존재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헌 하늘과 헌 땅에서 태어났기에 갓 태어난 아기도 헌 아기입니다. 조부모의 입장에서는 손자가 태어났더라도 헌 손자입니다.
전도서 1장 9절을 보면 “…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헌 하늘과 헌 땅에서는 새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새로 차를 샀어도 ‘헌’을 붙여서 헌 새로 산 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헌 것을 담고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새로운 것으로 대체될 것들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헌 것을 담아서는 안 됩니다. 직장에 가면 사장님이나 부장님이 있지만 그들은 마음에 담을 수 없는 헌 사장님이고 헌 부장님입니다. 그들의 존재감을 마음에 담을 수 없고, 그들이 해주는 칭찬과 같은 것들을 마음에 담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시며 강력하게 촉구하시는 것은 그 조건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사람이라면 모든 것들을 새롭게 상대할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지금 몸으로 상대하는 것들을 절대로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없애버릴 헌것들을 마음에 담는다면, 하나님께서 제공하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아직 새 하늘과 새 땅은 임하지 않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랄 수는 있을지라도 아직 임하지 않았기에 마음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이로부터 6~7절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을 살다 보면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목마름이란 마음에 무엇인가를 담고 싶어 하는 것이고,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먹고 싶어 하는 것이고,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마시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증입니다. 사람들은 돈에 대한 갈증을 느낍니다. 건강에 대한 갈증을 느낍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갈증을 느낍니다. 사랑에 대한 갈증을 느낍니다. 승진에 대한 갈증을 느낍니다. 그 갈증 때문에 자꾸 헌 하늘과 헌 땅에 있는 헌 것들을 마음에 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로부터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헌 하늘과 헌 땅에서 살 때 갈증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을 제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주권자로서 역사의 마지막을 이끌어 가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나 개인과의 관계에서도 갖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내가 육체로 상대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헌 하늘과 헌 땅에 있는 헌것들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에 담지 말아야 할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 살 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음에 하나님만을 담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목마름이 없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6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7절의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기는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으로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갈증 때문에 무엇인가를 자꾸 가지고 싶습니다. 세상에 대해 갈증이 생겨서 애타게 찾게 됩니다. 그러나 헌것들을 마음에 담는 것은 결국 지는 것입니다. 헌 것들을 마음에 담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담아야 됩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하루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마음에 하나님을 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연합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이란 헌 것들로 둘러싸인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갈증으로 인해 그야말로 아무것이나 마시고 주워 먹는 하루를 살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이 세상 것들로 갈증을 해결하겠다는 시도를 중단할 수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입으로 자꾸 말한다고 해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고 싶다면 헌 하늘과 헌 땅에 있는 헌것들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헌 하늘과 헌 땅에서 사는 동안에 갈증이 있는 것을 분명히 아십니다. 그리고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어린 양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으로 갈증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준비된 모든 것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김이란 결국 마음의 갈증을 헌 것들로 채우지 않고 하나님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을 그대로 쫓아간다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갈증을 헌 하늘과 헌 땅에 있는 헌것들을 마음에 담음으로써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살아야 될 사람다움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어린 양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처음이고 마지막이신 하나님으로 갈증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내가 갈증을 느끼며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갈증을 해결한 뒤에는 전혀 하고 싶은 마음이나 느낌이 없습니다. 다만 그 일이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공생애의 삶입니다. 목마름은 이기느냐 지느냐를 결정합니다. 헌것들을 가지고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한다면 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몸으로 헌 하늘과 헌 땅을 사는 동안에도, 마음에는 헌 것들을 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완전히 밀착된 상태를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은 그저 입으로 ‘나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밀착됨이란 세상에서 헌 것들을 향한 목마름이 발생할 때마다, 세상에서 고개를 돌려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갈증을 해결하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룬 자들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갈증을 아버지를 먹고 마심으로써 해결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헌 하늘과 헌 땅에 사는 동안 마음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오직 아버지 한 분만으로 해결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만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준비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촉구를 담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에 곧바로 이어지는 이러한 촉구는 다소 새삼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촉구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지만 우리가 상대하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주에 있는 화성이나 토성이나 은하계를 상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만물이란 우리가 살면서 몸으로 상대하는 대상들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대체되어야 하는 헌것들입니다. 헌것들을 마음에 담는다면 하나님이 계시로 보여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는 동안에 생기는 마음의 갈증과 배고픔은 열망과 바람 혹은 희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밀착하게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아들로 여기시고 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만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밀착하여 모든 목마름을 하나님으로 해결하지 않는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8절을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워함과 믿음 다음에 나오는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은 결국 두려워하여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믿음이란 오감 다음에 여섯 번째 감각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감각을 통해 오감으로는 붙잡을 수 없는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붙잡기 위해서는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우리는 서로 진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제가 날마다 말씀을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외치며 저와 여러분이 연합하고 연대를 이루고 결속을 이루지 않고는 이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속에서 나오는 헌것들을 삼켜서 목마름을 해결하려는 죄성을 이기기 위해서는 진과 성을 이루기 위한 연대를 도모해야 합니다.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여러 차례 동서남북 모임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시도는 해봐야 할 것입니다. 헌 하늘과 헌 땅 안에 살면서 헌것들을 전혀 내 안에 받아들이지 않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이라는 여섯 번째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며 살기 위해서는 서로 연대하고 믿음을 발동시켜야만 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헌 하늘과 헌 땅에서 상대하던 헌 대상들이 있습니다. 헌 남편, 헌 아내, 헌 자녀, 헌 손자, 방금 구입한 자동차나 새로 산 옷에도 ‘헌’은 붙어야 합니다. 이러한 대상들을 마음에서 버리고자 하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깨부수고 새롭게 살기가 어렵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로 목마름을 해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한 사람들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과감하게 한 번 해봅시다. 깨부수고 나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헌 하늘과 헌 땅에서 아직 살고 있기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헌 것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들어갈 사람은 지금 살고 있는 헌 하늘과 헌 땅의 헌것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로 결정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신 다음에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을 해주신 아버지의 의도를 분명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헌 하늘과 헌 땅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강권적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