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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압바자르에서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점심식사를 하러 간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레기스탄 광장 주변 아리랑이란 한식당이다.
구르 아미르 묘에는“KOREA – Sharing Hope, Sharing Future”라는 문구가 적힌 한국 쓰레기통이 설치되어 있다. 이 쓰레기통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의 공적개발원조(ODA) 활동의 일환으로 사마르칸트 관광지 환경정비 및 쓰레기관리 시스템 지원사업인데, 한국이 제작지원한 공용 쓰레기통, 안내판, 벤치 등이 사마르칸트 주요 관광지(구르에무르, 레기스탄 광장 등)에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입장료를 내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정문이 나온다. "구르 아미르 Gūr-e Amīr"를 건축했을 때는 영묘 건물 우측에는 둥근 돔을 가진 건축물, 좌측에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공간, 그리고 앞에는 정문과 2개의 미나렛 Minaret이 있었는데 지금은 주변 건축물은 정문을 빼고는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정문 정면 벽에도 타일로 장식된 아라베스크 문양이 보이는데, 모두 도자기 등의 겉면에 무늬를 새기고 거기에 다른 재료 또는 색을 끼워 장식하는 기법인 상감기법을 사용했다. 미나렛에도 "무카르나스 muqarnas"와 "아라베스크 arabesque"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구르 아미르 정문 양쪽에는 푸른빛의 2개의 돔 천정에 벌집 모양의 종유석 장식이나 화려한 채색 타일, 금박 서예(코란 구절) 등 가장 비싸고 정교한 장식기술이 집약되는 천정 장식 이슬람 고유의 무카르나스 Muqarnas가 보인다. 구르 아미르는 1403년 티무르가 가장 아끼던 손자이자 후계자였던 무함마드 술탄이 요절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짓기 시작한 것으로, 티무르는 본래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고향인 샤흐리사브즈(Shakhrisabz)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1405년 명나라 원정 중 급사하자 이곳에 안장되었다. 이 때문에 구르 아미르는 티무르 왕조의 공식 영묘가 되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미르 티무르의 초상화가 있고 그 아래 그가 건설한 제국의 그림이 있는데, 징기스칸이 세운 제국 다음으로 큰 제국으로 로마제국보다 큰 제국이라고 한다. 동으로는 인도 북부, 서쪽으는 터키의 앙카라 북부는 아랄해와 카스피해 남쪽으론 이란의 페르시아만까지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영묘 건물 자체는 아주 화려하진 않지만, 관들이 안치되어 있는 내부는 아주 화려하다. 반짝이는 묘당 안 중앙에는 가장 크고 눈에 띄는 흑비취(Black Jade)색 석관이 아미르 티무르의 무덤인데, 그의 스승인 "미르 사이드 바라카(Mir Said Baraka)"의 석관 바로 발밑에 자신의 무덤을 있어 스스로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 밑에 묻힌 것이다.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던 티무르는 그의 묘가 스승의 것보다 더 크지 않도록 유언을 했다. 지상에 보이는 관들은 비어 있고 진짜 관들은 4m 아래 지하 똑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 이런 형태의 묘당은 인도 아그라의 타지마할에서 본 것과 똑 같은 형태다. 지상에는 빈 관이 있고 지하 4m 아래 똑같은 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의 관이 놓여 있었다. 타지마할을 만든 샤자한은 인도 최대 무슬림제국이었던 무굴왕조 5대 술탄으로, 무굴왕조가 티무르의 후손 페르가나의 바부르가 세운 것이다. 그러니 비슷한 것이 당연할 것이다.
무슬림들은 죽은 사람들의 관을 그대로 노출시켜 놓은 경우가 많다. 이집트의 왕들처럼 피라미드를 짓지도 않고,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왕들처럼 거대한 봉분을 만들지도 않아 부장품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부장품이 없는 이슬람 무덤을 고고학적 연구 자료가 없어 싫어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도 화려한 무덤 건물인 영묘(Mausoleum)는 짓는다. 특히 사마르칸트에서는 악마들이 싫어하는 색이라고 하는 파란색으로 영묘를 화려하게 만들어 놓아 파란색이 사마르칸트의 색이 되었다고 한다.
구르 아미르에는 유명한 <티무르의 저주 일화> 있다. 1941년6월20일, 소련의 고고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 Mikhail Gerasimov"는 티무르의 무덤을 발굴하여 유골을 꺼냈는데, 무덤에는 "나의 평온함을 어지럽히는 자는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징벌과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실제로 묘가 개봉된 지 이틀 후인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된 이 사건은 티무르의 저주가 실현된 것이란 유명한 전설을 낳았다. 티무르의 얼굴 형상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던 게라시모프는 전쟁이 격화되자 1942년 11월 티무르의 유해를 다시 이슬람의식에 따라 영묘에 재안장했고 이후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기를 잡으며 전세를 역전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Believe it or Not" 같은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과 티무르 석관에 실제로 쓰여 있는 문구를 결합해서 티무르의 저주로 엮어서 만든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영묘 마당 한편에는 우물 같은 게 있는데 가이드 이크롬씨가 설명하길 이건 큰 술독으로 옛날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전투에 나가는 모든 장수와 병사들이 각자 술을 한 잔씩 따뤄 놓고 전투에 나갔다 돌아와서 이 술독에서 한 잔씩 술을 마시는데, 남은 잔의 수를 보고 몇 명이 전사했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구르아미르 광장 구경을 마치고 레기스탄으로 간다.
사마르칸트의 상징은 레기스탄 중앙광장이다. 레기스탄 광장에 도착하니 서쪽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노을빛이 푸른 돔과 타일에 스며들고 있다. 안내판에는 "Cultural Capital of Islamic World(세계 회교권의 문화 수도)"라고 되어 있다.
이곳은 티무르 제국의 중심으로 실크로드의 모든 상품이 몰려들던 교역의 중심지였다. 레기스탄 광장은 사마르칸트 구시가지의 중심으로 모래(레기)가 있는 땅(스탄)이란 뜻으로 지금은 잘 닦인 아스팔트 바닥이지만 중세시절 처음 이곳이 도시의 중앙광장으로 자리 잡았을 때는 실제로 흙과 모래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사마르칸트는 기원전부터 수천년간 번영해오던 실크로드 도시였고, 레기스탄 광장은 특히 티무르 제국 시절 중심 광장 역할을 하던 곳이다. 원래는 나팔을 불면서 공지사항을 낭독하기도 하고, 공개처형이 행해지는 광장이었다고 한다. 14,15세기에는 실크로드에서 가장 큰 시장이 있던 곳으로 광장에는 ㄷ자 형태의 좌우 대칭구조로 왼쪽에는 울루그베그 마드라사(Ulugh Beg, 1417년~1420년), 오른쪽에는 셰르도르 마드라사(Sher-Dor, 1619년~1636년), 가운데에는 틸랴코리 마드라사(Tilya-Kori, 1646년~1660년)등 3개의 마드라사(이슬람 신학교)가 서 있는데, 각기 다른 시대에 건설되었지만 조화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마드라사는 이슬람교육기관으로 현재 초등과정부터 대학과정까지 이슬람 경전과 율법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곳이지만, 과학, 의학, 철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해야 해, 강의실과 연구실은 물론, 기숙사도 포함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대형 마드라사가 세 개나 몰려 있는 곳이 레기스탄 광장이다.
광장에는 종교학교 마드라사가 옛날 학문적 번영과 도시의 웅장함을 보여주며 서 있다. 주름진 푸른 돔을 가진 마드라사는 아름다운 푸른색 타일과 정교한 조각을 자랑한다. 각양각색 원색 타일은 꽃과 나무를 아랍어 서체와 조화시켜 아름다운 기하학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슬람을 대표하는 디자인 아라베스크 문양이다. 티무르시대에 아라베스크 문양이 크게 발달했다고 한다.
왼쪽 울루그벡 마드라사는 티무르의 손자이며 천문학자이기도 한 울루그벡왕이 15세기에 세운 마드라사로 처음에는 신학교 강당으로, 나중에는 천문학, 철학, 수학 등 학문연구소로 활용됐다고 한다. 그는 1417년에서 1420년 사이 레기스탄 광장에 첫번째 마드라사를 건설했고, 심지어 학생들에게 직접 강의를 했다고 한다. 레기스탄 광장에 있는 마드라사는 그가 두 번째로 만든 것으로, 그의 첫 번째 마드라사는 또 다른 실크로드 도시인 부하라에 세워졌고, 1417년 완공되었다. 그러니까 부하라의 마드라사를 완성한 후, 바로 사마르칸트에도 마드라사를 건설한 셈이다.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에 있는 울루그벡 마드라사는 그의 천문학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마드라사의 앞에는 피슈타크(Pishtaq)란 거대한 사각형 파사드가 장식하고 있는데, 이 피슈타크에는 "하늘보다 두 배나 높고, 지구의 자전을 늦출 만큼 무겁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만큼 거대한 마드라사와 피슈타크란 뜻이라 한다. 그리고 이 파사드에는 별과 별자리 모자이크로 빽빽하게 장식이 되어 있다.
오른쪽의 쉐르도르 마드라사(Sherdor Madrasa)는 17세기 건축물로 부하라 칸국의 사마르칸트 총독이었던 얄란토시 바하두르(또는 얄랑투시 바호디르)가 건립했다고 한다. 셰르도르 마드라사는 "사자를 품은 마드라사"라는 뜻이라고 한다. 피슈타크 파사드에는 사자와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태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슬람은 절대로 우상숭배를 금기시해 살아있는 동물 묘사는 율법으로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한 것이라고 한다. "절대적인 권력 또는 힘(맹수)이 무지(사슴)을 쫓는다."는 의미라고 하지만,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율법을 어긴 건축가가 분노한 성직자들에게 처형을 당했다거나,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정도로 이례적인 문양인데, 때문에 당시 이 마드라사를 놓고 분위기가 흉흉했다고 한다.
정면에 있는 티리야 카리 마드라사(Tillya-Kori Madrasah)는 '알란토시 바하두르에 의해 세 마드라사 중 가장 늦은 1646년~1660년에 건설되었는데, 앞서 완공된 세르도르 마드라사 건축에 불만을 가진 이슬람교도들의 흉흉한 민심이 감안해 논란이 될 만한 디자인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을 뿐더러, 금을 충분히 사용하여 아주 화려하게 내부를 장식했다. 덕분에 셰르도르 마드라사에 대한 비난이 잠잠해졌다고 하며 틸라카리 마드라사가 아니었다면 호랑이 문양을 새긴 셰르도르 마드라사가 멀쩡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티리야 카리 마드라사의 백미는 중앙에 위치한 모스크(Mosque) 내부로 이곳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티리야 카리란 이름 자체가 "금으로 장식된"이란 뜻이라는데, 내부의 장식이 정말 화려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트릭이 있는데 마드라사 내부에는에는 금으로 장식된 돔 장식이 있는데, 깊고 둥근 돔 천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 평면이라고 한다. 건축가가 철저한 계산을 통해 착시 현상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돔이라고 착각하도록 장식을 만들어 넣은 것이라는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카라반사라이를 복원하는 대신, 셰르도르 마드라사와 대칭을 이루도록 지어졌다.
레기스탄 광장에 있는 세 개의 마드라사는 푸른색 타일을 사용한 거대하고 화려한 파사드도 화려하지만, 그 내부 역시 꼼꼼히 살펴볼만 하다. 중앙아시아 유적지의 공통적 현상인데, 이런 문화재 건물들을 상인들과 상점들이 점령하고 있다. 마드라사는 원래 학교이므로, 방들이 많다. 강의실들로 쓰던 방들인데, 일부 박물관들이 사용하고 있는 공간들을 제외하면 이곳들이 모두 상점으로 개조돼 있고, 파는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기념품 가게부터 카페트 가게까지 모든 방들이 상점들이다. 아마 중앙아시아 나라들의 재정이 넉넉치 않아 역사적인 건물들을 상인들에게 임대하면서 그 임대재원으로 역사적인 건물을 관리하던 관행 때문일지 모른다. 특히 이런 역사적 건물들이 대부분 종교시설이고, 구소련에서는 일부러 이런 종교시설들의 의미를 세속화시키려는 속셈도 있을지 모른다. 실크로드스러운 상업 전통도 있고, 옛 공산주의 치하에서의 연줄과 인맥을 통한 사회 운영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것 때문에 역사적 건물들이 훼손되기도 하면서, 건물이 사용되어서 유지되는 면도 있을지는 모르지만, 좀 안타깝기는 하다.
레기스탄 광장을 돌아 보는 걸 끝으로 사마르칸트 시티투어는 끝난다. 레기스탄 광장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차력쇼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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