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십찰(華嚴十刹)김제 ⑦ 귀신사(歸信寺)(김제)
처참했던 전쟁터 달려간 의상, ‘부처님 세상’ 발원하다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 천년고찰
한세대 동안 끊이지 않았던 전쟁터
불보살 가피로 고통 극복 염원 담겨
금산사 말사 복원 중창 옛 역사 계승
김제 귀신사 전경. 신라 의상대사가 676년 창건한 화엄십찰이다. 제17교구본사 금산사 말사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천년고찰로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모악산(母岳山)에 자리한 귀신사(歸信寺)는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 말사이다. 금산사를 나와 전주로 향하는 3km 가량 떨어진 마을 뒤편에 자리한 작은 절이다. 현재는 비구니 스님들이 주석한다. 1970년대 시골 풍경을 보는 듯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영화 ‘보리울의 여름’ 촬영지였던 데서 알 수 있듯 고색창연한 옛 모습이 남아있는 절이다.
➲ 고색창연한 시골의 작은 절
그러나 천년 전 귀신사는 달랐던 듯 하다. 화엄십찰 중 한 곳이다.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에 등장하는 대표적 화엄십찰이다. 절 앞 마을에 부도가 남아 있고 건너편 모악산 기슭에 삼층석탑으로 보아 청도리 일대가 모두 귀신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676년(신라 문무왕 16년) 의상대사가 국신사(國信寺)라는 이름으로 창건 했다. 이 후 몇 번에 걸쳐 이름이 바뀌는데 ‘믿을 신(信)’ 은 빠지지 않았다.
‘믿음’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화엄경>은 “믿음(信)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라고 했다. “일체의 여러 선법을 증장하고 일체의 여러 의혹을 없애서 소멸시키며, 위없는 도를 드러내 보여서 깨닫게 한다. 깨끗한 신(信)은 더러움을 떠나 마음을 견고하게 하며, 교만을 소멸 제거시키며 공경의 근본이다. 신은 보배로운 가르침 중에서 으뜸가는 법이며, 청정한 손이 되어 뭇 실천을 받아들이게 한다. 신(信)은 능히 여러 염오와 집착을 버려 떠나게 하며, 신은 오묘하고 깊고 깊은 법을 이해하게 하며, 신은 능히 방향을 바꿔 뭇 선을 이루어, 마침내는 반드시 여래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신(信)은 불교 신앙의 출발이다. 모든 행은 믿음에서 출발한다. 지도(地圖)가 사실임을 믿기 때문에 길을 나선다. 그래서 <화엄경>은 믿음을 근원이라고 했다. 믿기에 행동으로 옮기고 행동 하므로 열매를 맺는다. “공덕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다. 불자(佛子)는 ‘부처님 가르침이 진실 임을 믿고 실천하는 자’이다. 한 번도 보지 않고 경험하지 않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믿는다. 지옥을 믿고 윤회를 받아들인다. 믿음은 그런 점에서 불교의 출발이자 전부다.
백제시대 양식을 보여주는 삼층석탑.
➲ ‘믿음으로 나라를 보호한다’ 국신사
그런데 ‘나라의 믿음’이라고 했다. 나라(國)가 이름에 붙는 사찰은 호국(護國)과 관련있다.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고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는다.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 중에서 ‘나라’를 강조한 사찰이 또 있다. 금정산 국청사(國淸寺)다. 의상대사가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보호하는 원력을 담아 창건했다고 전한다. ‘깨끗한 나라’는 부처님 세상, 정토(淨土)다. ‘화엄’에서 말하는 화장세계다. 그런 점에서 화엄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 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이로 인해 모든 외침과 근심이 사라지는 복된 나라 ‘정토’다.
의상대사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백성들이 피 흘리며 고통 받는 현장을 살피고 그 해결책을 불보살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는 믿음과 신행에서 찾았다. 의상은 ‘백화도량발원문’에서 이렇게 발원한다. “이 제자는 세세생생 관세음보살님을 가장 높은 스승과 성인으로 모시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이 지극한 정성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이마 위에 이고 받들 듯이 저도 또한 관세음보살님을 높이 모시고 받드옵니다. (중략) 모든 두려움을 멀리 떠나 마음이 편안하게 해 주시고 한순간에 흰 연꽃으로 장엄된 백화도량에 왕생하여 여러 보살님들과 더불어 바른 진리의 법을 듣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 생각마다 묘한 지혜가 더욱 더 밝아져서 부처님의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게 하옵소서.”
낙산사를 창건하고 6년 뒤 676년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여 화엄을 전파하고 제자를 길렀다. 동시에 옛 백제 땅에 국신사를 세웠다. 교통이 불편하고 멀리 떨어진 두 곳을 어떻게 동시에 창건할 수 있었을까? 후세 사람들은 676년 의상대사 창건설을 의심한다. 특히 신라 사람 의상이 백제 땅에 절을 세웠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의상이 당에서 귀국한 뒤 행적을 보면 국신사 즉 귀신사 창건 이유가 분명해진다. 의상대사는 귀국 후 산천을 편력했다. 670년에 당에서 들어와 그 이듬해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백화도량발원문을 짓고 6년 뒤 부석사를 창건했으니, 6년 간 전국을 편력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의 부석사 부근, 즉 소백산 자락에 이르러 ‘진정 불법을 펼칠 만 한 곳’이라 하여 걸망을 내려놓고 법을 펼친다.
<법장화상전>에 등장하는 화엄십찰 중 부석사와 함께 의상이 직접 창건한 사찰은 국신사, 범어사, 옥천사다. 이 중 범어사만 678년으로 2년 늦고 부석사 국신사 옥천사는 676년으로 창건 연대가 같다. 이는 의상이 직접 창건했음을 가장 확실하게 입증하는 역사 기록이다.
의상은 옛 백제 땅을 왜 찾아갔을까? 백제는 660년 수도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점령당하면서 무너졌다.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 1년 전이다. 그 때 의상은 구도행각 중이었다. 아직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때다. 백제는 수도는 함락됐지만 부흥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됐다. 부흥운동 중심지는 김제 일원이었다. 만경강 유역의 김제 만경 부안 등지다. 삼한에서 가장 넓은 곡창지대와 서해 바다를 접한 풍요의 땅이다. 661년부터 3년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은 변산 부근에서 막을 내린다.
삼한 내륙은 전쟁의 살육이 멈췄지만 금강 하구의 서해 곡창지대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신라 마저 집어삼키려 했다. 당 유학 중이던 의상이 급히 귀국한 것도 당 침공 야욕을 신라 조정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의상이 귀국한 670년부터 7년간 나당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676년 겨울 기벌포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기벌포는 백제부흥전쟁이 벌어졌던 백강, 즉 금강 하구다.
백제가 문을 닫고도 무려 17년, 한 세대 가까이 이 지역은 전쟁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셈이다. 넓고 비옥한 곡창지대며 어장(漁場)의 보고(寶庫), 금강 하구 김제 부안 일대는 초토화 됐다. 전쟁으로 희생당한 병사와 백성들 시신이 산을 이루고 내를 메웠을 것이다. 남은 자 보다 죽은 자가 더 많으니 들에 그대로 방치돼 짐승들 먹이가 되고 전염병이 돌아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 마저 쓰러졌다. 무형문화재 은산별신굿은 당시 영혼을 달래는 천도재에서 유래했다.
귀신사의 크고 넓은 사격을 전해주는 마을에 자리한 부도.
➲ 가장 처참한 전쟁 터 김제 부안
전쟁이 끝나자 의상과 원효는 가장 먼저 이곳으로 달려갔다. 그 흔적이 변산 일원에 남아있다. 두 도반은 백제부흥운동 지휘관 복신 장군이 거처하던 암굴에서 수행정진했다. 김제는 부안 변산과 인접한 곳이다. 그 해 의상이 국신사를 창건한 연유를 알 수 있다.
국신사는 모악산 자락에 위치한다. 너른 김제 부안 평야에서 모악산은 태산 보다 높다. 한 눈에 평야와 서해가 들어오는 이 지역의 성지(聖地)다. 의상이 세운 화엄사찰은 부석사에서 보듯 산을 따라 위로 향하면서 가람을 배치한다. 귀신사도 이같은 가람 배치를 따랐을 것이다.
호남 불교는 100여 년 뒤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건하여 법상종 근본도량으로 삼으면서 계율을 중시하는 미륵성지로 전환한다. 모악산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이 일어났다. 귀신사의 화엄사상이 세월이 지나면서 지역 특성에 맞는 새로운 결사와 신앙을 만드는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통일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에 귀신사가 화엄십찰에 이름을 올린 것을 보더라도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
귀신사 모습.
➲ 2000년대 중창 불사
고려 중기 이후에는 왕자들이 출가하여 주석하는 왕실사찰로 번성한다. 그 중 중요한 인물이 고려 중기 귀신사에 주석했던 원명 징엄(圓明澄儼, 1090~1141)이다. 화엄학과 천태학에 밝았던 고승으로 그가 머물 당시 크게 중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신사 사적사기에 “이 절은 또한 옛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원명대사 징엄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시면서 기특한 터를 살피셨는데, 곤륜산의 정맥이 모악산에 이르고 영취산의 신령한 근원이 굴령에 사사로움이 없어서 경계마다 팔백(八百)의 비보처가 될 뿐만 아니라 넓은 터가 삼천(三千)의 안거가 될 만하였다”고 적었다. 현재의 귀신사 남쪽 400m 떨어진 곳 청도리 마을 들판에 서있는 귀신사 부도 1기와 모악산으로 넘어가는 길에 자리한 청도리 3층석탑 등이 당시 이 지역까지 귀신사 권역이었음을 보여준다.
바다와 가깝고 내륙으로 가는 길목인 요충지며 넓은 평야와 모악산에 자리한 지리적 요인 때문일까?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면서 귀신사는 수난을 당하여 사격이 쇠퇴하고 이는 조선초 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 설잠 김시습(1435~1493)이 귀신사를 찾아 남긴 한 편의 시는 당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가을 풀 가득한 곳 석양 중에 와보니
홀로 선 빈산에서 생각은 끝없어라
돌탑은 무너진 채 꽃비만이 내리고
깨진 비석 들풀에 엉켜있는 듯하네
얼마간의 성패야 흘러가는 물 같은 것
옛날에도 관하에서 기러기를 보냈지
세상의 흥망이 모두 이와 같을까
이후 중창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자리를 옮겨 새로 중건하는 등 여러 차례 중수 중건 보수를 거치면서 화엄십찰의 명맥을 이어갔다. 근년에는 용타스님이 회주로 주석하며 1980년부터 동사섭 수련을 지도했다.
귀신사가 오늘날 모습으로 변모한 것은 2000년 주지로 취임한 무여스님 원력 덕분이다. 스님은 대대적 복원불사에 착수하여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두고 해우소를 신축하고 명부전을 이전 신축하였으며 지장보살과 십대명왕 등 권속 일괄을 개금 개채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적광전 해체 보수, 대휴당 해체 복원, 귀신사 진입로 정비 등 수많은 불사를 단행했다. 귀신사 문화 역사 복원에도 힘써, 2007년 대적광전 소조비로자나 삼불좌상이 보물로 지정됐으며 2020년 귀신사 역사와 문화를 살피는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불보살의 가피를 믿고 중생과 함께 극락정토를 염원했던 창건 원력이 모악산에서 빛을 발하는 귀신사의 오늘이다.
보물로 지정된 귀신사 대적광전의 소조삼존불상.
김제=박부영 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680호/2021년8월24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