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공주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국민보도연맹사건>
오산과 평택, 천안에서 전투를 치르고 후퇴하던 미 24사단 34연대는 공주에 주둔하였다. 1950년 7월 11일 아침 7시 미군에 배속된 국군 1기갑연대 기병대대 6중대(중대장 박익균 朴翊均 중위) 2개 소대는 공주를 출발하여 예산으로 가던 중 ‘인민군 환영대회장’인 듯한 유구국민학교에서 인민군 6사단 소속 2개 중대를 습격하여 60여 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국군 피해는 1명 부상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전투결과는 인민군 2개 중대 병력을 2개 소대가 공격한 것으로 보기에는 상식과 거리가 너무 멀다. 게다가 라주바예프에 따르면, 인민군 6사단이 유구에 도착한 것은 7월 12일 아침 6시였다고 한다. 그리고 7월 11일은 예산과 공주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가장 많이 희생된 날이었다.
이로 보아 당시 유구국민학교에 모여 있던 2개 중대 500여 명은 인민군이 아니라 국민보도연맹원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편 한국전쟁사상 국군 최초의 승리는 국군 17연대의 화령장 전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연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했다.
공주에서는 충남경찰국의 명령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이 있었는데, 주로 6월 29일과 30일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의당면은 6월 29일경, 계룡면은 6월말에서 7월 13일 사이였다.
공주경찰서 유치장과 공주형무소에 구금되었던 보도연맹원들은 7월 9일에서 11일 사이에 공주시 상왕동 왕촌 살구쟁이와 의당면 청룡리 도살장 뒷산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청년방위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CIC의 지휘 하에 청년방위대가 왕촌현장의 구덩이를 팠다고 한다.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공주 보도연맹원 총살은 CIC의 지휘 하에서 벌어졌다. 공주지역에서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은 250명에서 300명 정도로 추산되며 상왕동 왕촌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는 305구인데 아직 발굴이 덜 된 곳까지 합산하면 현장의 희생자는 최소 400여 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형무소사건>
후퇴하던 국군과 경찰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일으킬 당시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재소자들도 이들과 함께 집단희생당했다. 공주형무소는 1949년 8월 재소자 수는 1,022명으로 나타나며, 전쟁 발발 당시 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정치범을 비롯하여 재소자 대부분이 단기수였다고 한다.
전쟁 발발 후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이 1950년 7월 9일 공주CIC, 공주파견헌병대, 경찰에 의해 상왕동 왕촌 살구쟁이에서 희생되었다. 총살은 아침 10시부터 해질녘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희생자 수는 400~700명이었으며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구분되지 않았다.
학살은 왕촌 살구쟁이 내 여섯 곳이었는데, 2009년 이 중 세 곳의 구덩이가 발굴되어 317구의 유골이 출토되었다. 이때 총살을 피한 일반 재소자들은 7월 10일부터 12일까지 논산을 거쳐 전주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이후 공주지역에서는 미 제24사단(제19연대, 제34연대)이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전투를 치렀다. 7월 13일은 전투가 없었으나 14일부터 포격과 함께 도하가 시작되어 전선이 돌파당했다. 7월 15일 대평리(현 연기군 금남면 용포리)에서 전투가 있었으며, 16일 금강선이 붕괴되어 대전으로 철수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국군 수복과 인민군 후퇴시기에 국군환영을 준비하던 공주 유구면 주민들이 1950년 9월 30일 유구면 녹천리 수촌다리에서 총살당했다. 이 사건을 포함해 유구면에는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자 수가 150명에 달한다는 주장이 있다.
<토벌 피해>
한편, 국군 수복 후 공주경찰서의 토벌작전이 있었다. 10월 8일 학룡산에서 5명을 사살하고 20명을 생포했다.(한국전쟁사 4권 737쪽)
이상 공주지역에서 확인된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