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회의 거목 박형룡(6): 보수적 장로교의 분열
이 글을 읽기에 앞서 이 카페 "개혁주의 게시판" 에서 한국장로교회의 거목 박형룡에 관한 독서감상문(1)~(5)를 읽으시면 이해하시기에 조금 더 편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번째 분열(1952)과 신사참배의 회개문제', '한국장로교회의 두 번째 분열(1953)과 신학적 자유주의의 문제', '한국장로교의 세 번째 분열(1959)과 세계교회협의회(WCC)에의 참여문제' 등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유주의와의 투쟁'이다. 이 모든 문제들에 박형룡은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였다.
박형룡은 프린스턴과 남침례신학교에서 이후 자신의 행보보다는 온건하고 개방적 태도를 유지하였으나, 한국에 귀국해서 자유주의자들과 대립하면서 보여준 특징은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칼 맥킨타이어와의 교제가 이어지면서 그의 신학은 점차 더욱 강경하고 완고한 양상을 띠게 된다. (매킨타이어에 대해서는 본문 아래 첫 댓글 참조)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
본서의 저자(장동민)은 아세아연합신학원 설립자인 김의환과 박형룡의 관계에 관한 내용을 신(新)복음주의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 박형룡과 그를 추종하는 보수적 목사들은 김의환의 사상을 계속해서 의심했다. 1971년 김의환은 「지성인을 위한 로마서」를 발행했는데, 이것이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진리를 파상한 번역"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김의환은 동북아 신학자 협의회의 총무로서 아세아연합신학원을 설립하였는데, 이 신학원은 신(新)복음주의를 선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김의환은 1970년 저서 「도전받는 보수신학」에서 자신은 신복음주의자가 아닌 칼빈주의자라고 하면서 신복음주의자 중 특히 칼 헨리의 주장 중 일부를 받아들여 근본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박형룡을 겨냥하면서 그가 지도하는 보수신학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조심스런 이야기를 하였다. (김의환에 대해서는 본문 아래 두번 째 댓글 참조) (칼 헨리는 세번 째 댓글)
미국 신복음주의 운동
신복음주의자들은 1942년 전미복음주의자협의회 (NAE,National Association Evangelicals)를 만들었는데, 현재 협의회장은 한인2세인 월터 킴 (Walter Kim)이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의미로 그리스도 신앙을 통한 구원을 믿는다면 로마 가톨릭 신자나 진보 기독교인들과도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Fuller Theological Seminary(풀러신학대학원)를 설립했으며, 1956년에는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의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처니티 투데이》 (Chrsitanity Today) 창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6년 지미 카터 대통령 당선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개입하는 등 교회가 정치문제에 간섭하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미국과 하나님 나라 (미래적이며, 현재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출처: 신복음주의-위키백과 |
장동민은, 위와 같은 김의환의 직접•간접적인 도전에 대해서 박형룡은 처음에는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고 본다. 그러나 1971년 총회신학교 이전(移轉)문제가 일어나고 자신의 위치가 불확실해지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김의환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러면서 그의 시각은 신복음주의에 대해서 이단으로 규정하고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도 극단의 반대 입장을 취한 것 같다는 것이다. 박형룡의 말년 그의 아들인 박아론은 1976년 「신학지남」권두언 "종과 횡의 신학"이 총신대학 학장과 교수진에 의해서 거절되고 원고게재가 취소당하자 크게 격분하였다. 이 글은 WCC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면서, WCC의 선교정책을 비판하고 보수적 선교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프랑크푸르트선언(1970), 베를린선언(1973), 로잔대회결의문(1974) 및 서울선언(1975)도 비판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형룡과 뜻을 같이 하는 제자들은 한국에서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 사라져가고 신복음주의가 들어와서 신학적 좌경화를 이루는 징조라고 보았다. 그리고 진정한 총신대는 없어졌다고 보고 정통보수신학을 회복하기 위하여 1979년 "백년 전 정통보수신학을 계승하는 평양신학교, 장로회신학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을 이어받는 총회신학교를 복구"하여 당시의 총회신학교로부터 분리해 나갔다. 이 때 결국 교단이 갈라져 합동 측과 합동보수 측으로 나뉘었다. (이에 앞선 통합과 합동의 분열은 본문 아래 네번 째 댓글을 참조)
(to be continued)
첫댓글 칼 매킨타이어 (위키 백과)
칼 커티스 매킨타이어 주니어(Carl Curtis McIntire, 1906년 5월 17일 - 2002년 3월 19일)는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성경장로교회의 창립자이면서 목회자였다. 국제 기독교 교회 연맹(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과 미국 기독교 교회 회의의(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의장을 오랫동안 했다. 자신을 근본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기독교 방송 설교자였다. 프린스턴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성경장로교회를 세우고 1937년 훼이스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위키백과)
김의환 (위키 백과)
김의환(金義煥, John Euiwhan Kim, 혹은 John Edward Kim, 1933년 11월 19일 - 2010년 5월 10일)은 호는 은석(恩石)이며 대한민국의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B.D.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Th.M. 그리고 템플 대학교에서 Ph.D. 학위를 받았다. 미국 LA에서 목회를 한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칼빈대학교와 총신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다. (위키 백과)
칼 헨리 (위키 백과)
칼 헨리는 1913년 뉴욕 시 맨해튼에서 독일 이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로마 가톨릭 신자이고, 부친은 루터교회 신자였다. 성공회(Episcopal Church)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192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다. 1932년에는 《스미스타운 스타》편집장이 되었다. 밀드레드 크리스티 부인과의 만남으로 회심했다. 1933년 휘튼 대학교에서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였고, 1938년 시카고의 북침례교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었다. 1947년 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49년 Ph.D 학위를 받았다. 1956년부터 1969년까지 크리스처니티 투데이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의 근거를 성서의 예언자 전통과 복음주의 신학에서 찾은《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1947년 작.2009년 IVP에서 박세혁의 번역으로 한국에 소개함.), << Aspects of Christian Social Ethics >> 등이 있다. (위키 백과)
"WCC 가입 찬성 측과 반대 측의 갈등으로 통합과 합동은 분열했다. 이 때 박형룡 박사는 일찍부터 WCC 운동의 실체를 알고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해, 교단 목회자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해왔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2849#share
본문을 잘 보았어요. 통합과 합동의 분열은1959년이고 1979년은 합동 내부에서 또 분열한 것으로 보면 되지요?
네, 잘 보셨습니다. 1950년대의 굵직한 분열은 본문에 도표를 삽입해 넣었습니다.
같은 교단, 교회, 신학교,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신학사상이나 지식, 성경해석, 인식이 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면 큰 분란이 일어나지 않는데, 나와 조금 다르다고 그것을 문제 삼으면 이혼이나 분열 밖에 없습니다. 보수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전수한 공로는 인정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분열을 조장하는 당사자가 된 것은 흠이 되겠죠. 신복음주의라고 해봤자 그다지 틀린 말 하는 것도 아닌데 그걸 이단이라고 규정한 것은 너무 편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지나서 보면, 역사가 흐른 뒤에 보면 더 이해되고 명확해지는 일로서 분열이 능사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 부지기수인 것 같습니다.
역사성 있는 좋은 글 잘 봤어요.
박형룡 목사의 생각은 자유주의가 창궐을 하기 전에 미리 쐐기를 박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더 강경하게 나아간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어쨋든 과 못지 않게 그의 공로도 잘 조명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이 시리즈를 통해 학습을 잘 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공감 감사해요.
박형룡을 보면 한국교회사와 장로교회사를 함께 알 수 있습니다.
(1)~(6)을 보니 한국교회의 역사가 대강 보이는 것 같습니다. 좋은 독서감상문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