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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林寶典
1
선림고경(禪林古鏡)에 씀
설봉스님이 하루는 원숭이들을 보고 말하기를
"원숭이가 각각 한 개의 옛거울[古鏡]을 짊어지고 있구나!"
하니 삼성스님이
"숱한 세월 동안 이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옛거울[古鏡]이라고 합
니까?"
하고 물었다. 설봉스님이
"흠이 생겼구나!"
하자 삼성스님이 말하기를
"천오백명을 거느리는 대선지식이 말귀도 못 알아들으십니까?"
하니 설봉스님이 말하였다.
"노승이 주지하기가 번거로와서..."
알겠는가.
비가 연잎을 적시니
향기가 집에 떠돌고
바람은 갈대잎을 흔드는데
눈은 배에 가득하네.
雪峰一日見 乃云, 者 各各背一面古鏡.
三聖便問, 歷劫無名何以彰爲古鏡.
峰云, 瑕生也.
聖云, 一千五百人善知識話頭也不識.
峰云, 老僧住持事煩.
會�
雨蒸荷葉香浮屋
風攪蘆花雪滿船
佛紀 2532年 端午節
伽倻山에서
退翁 性徹 씀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 간행사
귀의삼보(歸依三寶)하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이 이 땅에 전해져 겨레의 문화창달에 이바
지하고 나라의 동량을 배출하여 온 지도 천육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지나고 연륜이 멀어짐에 따라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는 선종의 정법은 감추어지고, 고불고조(古佛古祖)들의 바른 뜻은
매몰되어 잘못된 주장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이런 선문(禪門)의 병폐를 일찍부터 지적하시고,
그 시정을 위해 몇 해 전에는 「선문정로(禪門正路)」라는 저서를 출간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禪)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이 가장 요긴한 일인가를 심려해 오시던 차에, 우리들
주면에는 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필요한 선서(禪書)들이 너무나 빈곤
하다는 사실을 통감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불고조들의 말씀이 한문
(漢文)으로 되어 있어서 언어생활이 다른 요즘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 가운데 참선(參禪)을 위해 가장 요긴하다고 생각되는 삼
십여 종의 저서들을 가려내어 번역토록 하시고, 그 전집(全集)의 이름을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한문으로 된 말씀들을 한글로 번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때로는 큰스님의 구술(口述)을 옮기
고, 때로는 선(禪)의 이치를 여쭈면서 글 밝은 이들에게 번역을 부탁하
였습니다. 따라서 선림고경총서 간행불사(刊行佛事)가 겨레 공동의 문화
재산이 되고 후손들에게 부처님의 크고 밝은 가르침을 전하는 이 시대
의 훌륭한 유산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종사에서 처음 시도하는 번역인만큼 큰스님께서 연로하시
어 일일이 감수하실 수 없어 번역에 허물이 많으리라 믿습니다. 이 점
널리 이해하시고 잘못된 번역이 있으면 독자들께서 동참하시어 더 완벽
한 글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이러한 선림고경총서의 원만한 간행이 조계(曹溪)의 개울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되어, 선림(禪林)에 백화(百花)가 난만하고 모든 이들은 자성
을 깨쳐 성불(成佛)하길 발원합니다.
佛紀 2532年 端午節
해인사 백련암(海印寺 白蓮庵)
백련선서간행회(白蓮禪書刊行會)
圓澤 和南
차례
제1권 돈황본단경(敦煌本壇經)………………………………11
1 단경 지침(指針)……………………………………… 17
2 돈황본단경 편역(編譯)……………………………… 55
3 선교결(禪敎訣)……………………………………… 149
제2권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59
제3권 전심법요(傳心法要)………………………………… 227
1 전심법요(傳心法要)………………………………… 235
2 완릉록(宛陵錄)……………………………………… 279
제4권 신심명(信心銘)……………………………………… 347
제5권 증도가(證道歌)……………………………………… 359
제1권 돈황본단경(敦煌本壇經)
머리말
조계육조(曺溪六祖) 이후 선(禪)은 천하를 풍미(風靡)하여 당·송·원·명
시대에 불교가 꽃을 피우게 한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림에 따라 육조 본연의 종지가 많이 변하여 육조의 정통 사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대저 육조의 종지는 육조가 항상 주창한 "오직 돈법만을 전한다[唯傳頓
法]"고 하는 것으로서, 점문(漸門)은 일체 용납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
에 교가(敎家)의 점수사상(漸修思想)이 혼입되어 선문(禪門)이 교가화됨으로
써, 순수선(純粹禪)은 없는 실정이다.
「단경」은 육조의 법문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나, 그 유통 과정에서 첨
삭(添削)이 많아 학자들을 곤혹케 하였다. 다행히도 최고본(最古本)인 「돈황
본단경」은 천여 년 동안 석굴에 비장되어 뒷사람들의 첨삭을 면할 수 있었
으므로, 육조의 성의(聖意)를 잘 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가운데서
오락(誤落)된 부분은 각 유통본을 참조하여 엄정교정(嚴正校訂)하고 사의(私
意)는 개입시키지 않았으며, 토를 달고 번역을 하였다. 그리고 약해(略解)를
붙여 거룩한 뜻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생각하니, 권두(卷頭)의 지침
과 함께 읽기 바란다.
「선교결」은 서산(西山) 만년(晩年)의 명저(名著)로서 「단경」이해에 도
움이 되겠기에 더불어 실으니, 참학고류(參學高流)는 「단경」을 근본삼아
육조정법을 선양하기 바란다.
불기 이천오백삼십일년 가을
가야산 해인사 퇴설당에서
퇴옹 성철 씀
일러두기
*○는 제I편에서는 엮은이의 평석(評釋)을, 제II편과 제III편에서는 약해(略解)를 말
한다.
*제I편과 제II편에서, 보기를 들어 性(姓)은 원문의 姓자를 性자로 바로잡은 것이고,
[心]은 원문에는 心자가 빠진 것을 보충해 넣은 것이며, '頓漸'은 원문의 頓漸을
삭제해야 할 것으로 부호를 일치시켰다.
*제I편에서 원문 끝의 敦·大·興·德·宗은 각각 돈황본·대승사본·흥성사본·덕
이본·종보본을, 그리고 끝에 표시된 숫자는 「혜능연구(고마자와대학 선종사연
구회 1978년 간행)의 면(面) 수를 말한다.
*제II편에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임의로 제목을 붙이고 단락을 나누었다.
돈황본단경 차례
머리말………………………………………………………………………………13
일러두기……………………………………………………………………………14
제1편 단경 지침(指針)…………………………………………………………17
서언(序言)…………………………………………………………………………19
1.식심견성(識心見性)……………………………………………………………21
2.내외명철(內外明徹)……………………………………………………………25
3.유전돈법(唯傳頓法)……………………………………………………………29
4.무념위종(無念爲宗)……………………………………………………………37
5.정혜체일(定慧體一)……………………………………………………………43
6.무생서방(無生西方)……………………………………………………………47
7.불오염수(不汚染修)……………………………………………………………50
8.불보리인(佛菩提因)……………………………………………………………51
제2편 돈황본단경 편역(編譯)…………………………………………………55
1.서언(序言)………………………………………………………………………57
2.심사(尋師)………………………………………………………………………57
3.명게(命偈)………………………………………………………………………60
4.신수(神秀)………………………………………………………………………61
5.정게(呈偈)………………………………………………………………………65
6.수법(受法)………………………………………………………………………68
7.정혜(定慧)………………………………………………………………………70
8.무념(無念)………………………………………………………………………74
9.좌선(坐禪)………………………………………………………………………77
10.삼신(三身)…………………………………………………………………… 79
11.사원(四願)…………………………………………………………………… 83
12.참회(懺悔)…………………………………………………………………… 85
13.삼귀(三歸)…………………………………………………………………… 86
14.성공(性空)…………………………………………………………………… 88
15.반야(般若)…………………………………………………………………… 90
16.근기(根機)…………………………………………………………………… 92
17.견성(見性)…………………………………………………………………… 95
18.돈오(頓悟)…………………………………………………………………… 96
19.멸죄(滅罪)…………………………………………………………………… 99
20.공덕(功德)……………………………………………………………………102
21.서방(西方)……………………………………………………………………104
22.수행(修行)……………………………………………………………………108
23.행화(行化)……………………………………………………………………113
24.돈수(頓修)……………………………………………………………………114
25.불행(佛行)……………………………………………………………………119
26.참청(參請)……………………………………………………………………123
27.대법(對法)……………………………………………………………………126
28.진가(眞假)……………………………………………………………………131
29.전게(傳偈)……………………………………………………………………134
30.전통(傳統)……………………………………………………………………138
31.진불(眞佛)……………………………………………………………………140
32.멸도(滅度)……………………………………………………………………144
33.후기(後記)……………………………………………………………………146
제3편 선교결(禪敎訣)……………………………………………………… 149
제1편 단경 지침(指針)
서언
「단경(壇經)」은 육조(六祖)의 법손인 동토(東土) 선종의 근본이
되는 성전(聖典)이다. 「단경」은 전래되는 과정에서 다른 본(本)이
많이 나와 학자들을 곤혹케 하였으나, 돈황고본(敦煌古本)이 발견되
어 천고의 의심이 해결되었다고들 말한다.
그리하여 근래 일본의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 선종사연구회(禪宗
史硏究會)에서는 그 중 기본이 되는 다섯 본을 서로 대조하여 「혜
능연구(慧能硏究)」라는 책을 발간함으로써 단경연구에 공헌하였다.
다섯 본은 돈황본(敦煌本), 대승사본(大乘寺本), 흥성사본(興聖寺
本), 덕이본(德異本), 종보본(宗寶本)이다. 또한 열두 종류의 다른판
(版)들을 영인 수록한 「육조단경제본집성(六祖壇經諸本集成)」도
좋은 자료이다. 이에 가장 오래된 돈황본을 중심으로 네 본을 서로
대조하고 다른 여러 본을 참고하여 「단경지침(壇經指針)」을 작성
하여 보았다.
돈황본을 베껴 쓸 때 부주의하여 글자를 잘못 쓰거나 빠뜨린 것
이 많으나, 다른 본들을 참조하면 성의(聖意)를 파악하는 데 별로 지
장이 없다. 각 본의 자구(字句) 차이는 대강의 뜻만 취하고 하나하나
지적하지 않았으니 양해하기 바란다.
「단경」의 근본 사상은 식심견성(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이요, 식심견성은 법신불(法身佛)인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사
무쳐 밝음)이어서 견성(見性 성품을 봄)이 곧 성불(成佛 부처를 이
룸)이므로, 깨달은 뒤[悟後]에는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修行佛行]고
분명히 하였다. 뒷날 교가(敎家)의 점수사상(漸修思想)이 섞여 들어
와 오후점수론(悟後漸修論 깨친 뒤 점차로 닦는다는 이론)이 성행하
나, 이는 「단경」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니, 육조대사의 법손인 선가
(禪家)는 「단경」으로 되돌아와 육조대사 본연의 종풍을 떨치기 바
란다.
1. 식심견성(識心見性)
모든 법이 모두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 자기의 마음을
따라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서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였으니, 식심견성
(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하면 스스로 부처님 도를 성취하
는 것이니 곧 활연히 깨쳐서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一切萬法이 盡在自身心中이어늘 何不從於自心하야 頓現眞如本性
(姓)고 菩薩戒經에 云我本源(願)自性이 淸淨이라하니 識心見性하면
自成佛道라 卽時豁然하야 還得本心이로다-敦 316
만법이 모두 자기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 자기의 마음 가운
데에서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서 말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였으니,
식심견성하면 다 부처님 도를 성취하는 것이니 곧 활연히 깨쳐서 본
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萬法이 盡在自心이어늘 何不從自心中하야 頓見眞如本性고 菩薩戒
經에 云 我本源自性이 淸淨이라하니 識心見性하면 皆成佛道라 卽時
豁然하야 還得本心이로다-大.興.德.宗 316
○앞의 인용문은 돈황본이요, 뒤의 인용문은 대승사본·흥선사
본·덕이본·종보본이니,돈황본을 중심으로하여 네 본을 참조하
였다. 네 본이 더러 자구의 차이는 있으나 그 근본 뜻은 같다.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이 맑고 깨끗함)'은 「보살계경」의
말씀이요. '식심견성'은 육조의 말씀이요, '즉시활연(卽時豁然 즉
시에 탁 트이어 깨침)'은 「유마경」의 말씀이다. 두 경의 글을
인용하여 육조 자신의 법문인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스스로
부처님 도를 성취한다[識心見性 自成佛道]' 함을 강조한 것이
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있
어서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니, 자기의 성품을 깨치지 못하
였다면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성품을 볼지니라.
三世諸佛과 十二部經이 云在人性中하야 本自具有어늘 不能自性悟
어든 須得善知識示導(道)하야 見性이니라 -敦 317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에
있어서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므로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였다면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바아흐로 성품을 볼지니라.
三世諸佛과 十二部經이 在人性中하야 本自具有ㅓ늘 不能自悟어든
求善知識示導하야 方見이니라 -大.興.德.宗 317
○스스로 오달(悟達 깨쳐 통달 함)하지 못하면 선지식의 지도자
가 필요하다.
저마다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여 자기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깨닫
게 하되,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
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各自觀心하야 令自本性을 頓悟하되 若[不]能自悟者는 須覓大善知
識示導(道)하야 見性이니라 -敦 317
보리 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가졌거늘 다만
마음이 미혹하므로 스스로 깨칠 수 없으니, 반드시 큰 선지식의 지
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菩提般若之智는 世人이 本自(白)有之어늘 卽緣心迷하야 不能自(白)
悟하니 須求大善知識示導(道)하야 見性이니라 -敦 292
보리 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가졌거늘 다만
마음이 미혹하므로 스스로 깨칠 수 없으니, 반드시 큰 선지식의 지
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菩提般若之智는 世人이 本自有之어늘 只緣心迷하야 不能自悟하나니
須求大善知識示導하야 見性이니라 -大.興.德.宗 292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되 망념이 있어서 진여를 덮고 있으니
망념이 없어지면 본래의 성품이 깨끗하니라.
人性(姓)은 本淨이로되 爲妄念故로 盖覆眞如하니 離妄念하면 本性(姓)이
淨하니라 -敦 298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되 망념이 있어서 진여를 덮고 있으니,
다만 망념이 없으면 본래 성품은 스스로 청정하니라.
人性은 本淨이로되 由妄念故로 盖覆眞如하니 但無妄想하면 性自淸淨
이니라 -大.興.德.宗 298
○망상이 소멸하면 본래로 청정한 자성이 스스로 드러나니, 이
것이 식심(識心 마음을 앎)이며 견성이다.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니라.
識自(白)本[心]이 是見本性이니라 -敦 295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고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느니라.
自識本心하고 自見本性이니라 -大.興.德.宗 295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불법을 배워도 이로움이 없으니,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곧 큰 뜻을 깨치느니라.
不識本心하면 學法無益이니 識心見性(姓)하면 卽悟(吾)大意니라 -敦
284
○'큰 뜻[大意]'이란 돈황본 윗글에서 '큰 뜻을 알면 곧 의발을
부촉하리라[識大意하면 卽付衣鉢하리라]'고 한 그 '큰 뜻'이다.
앞 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 생각이 깨치면 곧 부처니라.
前念이 迷卽凡이요 後念이 悟卽佛이니라 -敦312
앞 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 생각이 깨치면 곧 부처니라.
前念이 迷卽凡이요 後念이 悟卽佛이니라 -大.德.宗 313
○흥성사본에는 이 구절이 빠지고 없으나 상관은 없다. 이는 돈
오견성(頓悟見性 단박에 깨쳐서 성품을 봄)이 곧 성불임을 말한
것이다.
자성(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성이 깨치
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自性을 迷하면 佛卽衆生이요 自性을 悟하면 衆生이 卽佛이니라 -敦 315
자성이 미혹하면 곧 중생이요, 미혹을 떠나면 곧 깨달음이니 깨달
으면 곧 부처니라.
自性을 迷하면 卽是衆生이요 離迷卽覺이니 覺卽是佛이니라 -大 315
자성이 미혹하면 곧 중생이요, 자성을 깨치면 곧 부처니라.
自性을 迷하면 卽是衆生이요 自性을 悟하면 卽是佛이니라 -大.德.宗 325
○불(佛)은 구경묘각(究竟妙覺)이며, 십지(十地)·등각(等覺)도
미혹중생이니, 정오정각(正悟正覺 바르게 깨치고 바르게 깨달
음)이 아니다. 식심견성은 정오정각을 말함이니, 그것은 구경묘
각이라야 한다.
2 . 내외명철(內外明徹)
무엇을 청정법신불이라 하는가? 세상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만법이 다 자기의 성품 가운데 있으니, 모든 법이 다 자기
의 성품에 있어서 자기의 성품은 항상 청정하니라.
해와 달이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여서 위는 밝고 아래는 어
두워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뚜렷하게 보지 못하다가, 문득 지혜의 바
람이 불어와서 구름과 안개를 말끔히 거두어 버리면 온갖 것이 일시
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세상 사람들의 성품이 청정함도 마치 깨끗한
하늘과 같으며 혜(惠)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아 지혜가 항상
밝거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서 자기의 성
품이 밝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참다운 법을 열어 주시는 선지식
을 만나 미망(迷妄)을 없애 버리면 내외 명철하여 자기의 성품 가운
데 만법이 다 나타나 일체법에 자재하나니, 청정법신이라고 이름하
느니라.
何名淸淨<法>身佛 世人 性本自淨 萬法 在自性(姓) 一切
法 盡在自性 自性 常淸淨 日月 常明(名) 只爲雲盖覆 上明
(名)下暗 不能了見日月星(西)辰 忽遇慧風 吹散 卷盡雲霧 萬
象森羅 一時皆現 世人性淨 猶如淸天 惠如日智如月 智惠常明
(名) 於外 着境(看敬) 妄念浮雲 盖覆 自性(姓) 不能明(名) 故
遇善知識 開眞法 吹却迷妄 內外明(名)徹 於自性(姓)中 萬法
皆現 一切法 自在性(姓) 名淸淨法身-敦 三百二(29)
무엇을 청정법신이라 하는가? 세상 사람의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모든 법이 모두 자기의 성품으로부터 나느니라. 모든 법이 자기의
성품 가운데 갖추어 있으니 하늘이 항상 맑음과 같으며, 해와 달이
항상 밝되 뜬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둡다가 문득 바람이
불어 모든 구름이 흩어지면 위 아래가 함께 밝아서 모든 모양이 다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세상 사람의 성품이 항상 떠돌아다님도 저
구름 낀 하늘 같아서 또한 그와같으니라. 지(智)는 해와 같고 혜(慧)
는 달과 같아 지혜(智慧)가 항상 밝거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
념의 뜬구름이 덮여서 자성이 밝고 맑지 못하다가, 만약 선지식을
만나 참된 법을 듣고 미망을 스스로 없앤다면 내외명철하여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모두 나타나나니, 성품을 본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므로 이를 청정법신불이라고 이름하느니라.
何名淸淨法身 世人 性本淸淨 萬法 皆從自性生 諸(30)法 在
自性中 如天常淸 如日月 常明 爲浮雲 盖覆 上明下暗 忽遇風
吹 衆雲 散盡 上下俱明 萬象 皆現 世人性 常浮遊 如彼雲天
亦復如是 智如日慧如月 智慧常明 於外 著境 被妄念浮雲 盖
覆 白性 不得明朗 若遇善知識 聞眞法 自除迷妄 內外明徹 於
自性中 萬法 皆現 見性之人 亦復如是 此名淸淨法身佛-大.興.
德.宗 三百二(31)
* 만법의 근원인 청정자성(淸淨自性)을 덮은 망념의 뜬구름을 다
흩어버리면 우주의 위 아래와 몸과 마음의 안팎이 확연명철(廓然明
徹 툭 트이어 사무쳐 밝음)하여, 깨끗한 유리병 속에 밝은 달을 담
은 것과 같다. 내외명철을 <영락경(瓔珞經)>, <능엄경(楞嚴經)>에서
는 구경묘각(究竟妙覺)이라고 하였으며, 육조는 법신불(法身佛)이라
고 하였다. <천태사교의 원교장(天台四敎儀圓敎章)>에서는 아래와
같이 자세히 설명하였다.
"미세한 무명(無明)을 나아가 부수고 묘각의 지위에 들어가서 무
명의 부모를 영원히 이별하고 구경의 열반산정에 오르니 대열반이라
이름하는지라, 청정법신을 이루어 상적광토(常寂光土 언제나 고요한
광명 세계)에 사니, 곧 원교불상(圓敎佛相 원교의 부처님 모습)이니
라[進破微細無明하고 入妙覺位하야 永別無明父母하고 究竟登涅槃山
頂하니라 名大涅槃이라 成淸淨法身하야 居常寂光土하니 卽圓敎佛相
也니라]."
자재보살(自在菩薩)들이 오매일여(寤寐一如 자나깨나 한결 같음)
는 되어도 구경묘각을 실증(實證)하지 못하면 '내외명철'의 경지는
되지 못하니, 이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극심심처(極甚深處 지극히
깊은 곳)이다.
동황본에는 '견성한 사람도 또한 이와 같다[見性之人도赤復如是라]'
는 구절이 빠졌으나, 망념이 없어져 만법이 모두 나타난 청정법신불
이 곧 견성이므로 상관이 없다. 이로써 육조는 견성이 곧 성불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자기 성품의 심지(心地 마음자리)를 지혜로써 관조(觀照 비추어
봄)하여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만약 본래 마음
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이미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매요, 반야
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이니라.
`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名)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
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昧 卽是無念-敦 三一
八(34)
지혜로 관조하여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만약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
매며 무념이니라.
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卽是無念-大.興.德.宗 三一八
*앞 항(項)에서는 내외명철이 청정법신불이라 하였고, 이 항에서
는 내외명철이 곧 식심(識心 마음을 앎), 해탈, 반야삼매(般若三昧),
무념(無念 생각 없음)이라고 하였다. 식심은 곧 견성이므로, 견성은
법신불(法身佛)이며 반야삼매며 무념임을 말하여 주고 있다.
곧 견성을 하여서 반야삼매에 들어가느니라.
卽得見性 入若三昧-敦 三一四(35)
*견성은 곧 반야삼매임을 말한다.
육진(六塵) 속에서 여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 감에 자
유로움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
行-敦 三一八
육진 속에서 물들지도 않고 섞이지도 않아서, 가고 옴에 자유로우
며 널리 사용하여도 걸림 없음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니, 무념
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
於六塵中 無染無雜 來去自由 通用無滯 卽是般若三昧 自在解
脫 名無念行-大.德.興.宗 三一八(36)
*식심, 견성, 해탈, 무념, 반야삼매 등은 모두 법신불이며, 묘각인
내외명철임을 강조하여 말하였다. 이는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 말함
이니, <기신론(起信論)의 '구경각 즉 견성(究竟覺卽見性)'과 같은 말
이다. 육조는 '견성이 곧 성불'임을 이렇게 소상하고 정확하게 말씀
하였으므로, 견성하여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한 뒤에 성불한다는 것
은 육조의 정통 사상이 아니니, 이러한 주장은 육조의 정전(正傳)에
서 배제되어야 한다.
3. 유전돈법(唯傳頓法)
오조(五祖)가 <금강경>을 강설하심에 혜능이 한 번 듣고 말 끝에
문득 깨치니라. 그 밤에 법을 받으니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문득 돈
법(頓法)과 가사를 전하며 '너를 육대조(六代祖)로 삼는다'고 하였다.
五祖說金剛經 惠能 一聞 言下 便悟(伍) 其夜 受法 人盡不
知 便傳頓法 衣 汝爲六代(伐)祖-敦 二八五
*이는 오도전법(悟道傳法 도를 깨치고 법을 전함)을 대강 서술한
것으로 돈법은 돈오법(頓悟法)이라는 말이다.
말 끝에 모든 법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음을 문득 깨닫고 내
가 말씀드렸다.
"어찌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 없
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움직임이 없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으리오!"
오조스님은 내가 본래의 성품을 깨쳤음을 아시고 내게 말씀하셨
다.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느니라. 만약 말
끝에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아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면 곧 '인천의
스승, 부처[人天師佛]'니라."
삼경(三更)에 법을 받으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곧 심인(心印)의 돈법과 의발(衣鉢)을 전하고, '너를 육대조사로 삼는
다'고 하였느니라.
言下 便悟一切萬法 不離自性 某甲 啓言 何期自性 本自淸淨
何期自性 本不生滅 何期自性 本自具足 何期自性 無動無搖
能生萬法 五祖知悟本性 乃報某甲(38) 言 不識本心 學法無益
若言下 自識本心 自見本性 卽名人天師佛 三更 受法 人盡不
知 便傳心印頓法 及衣鉢 汝爲六代祖-大.興.德.宗 二八五(39)
*이는 돈황본보다 상세하다.
대승사본의 '모갑(某甲)'과 돈법(頓法)]을 다른 본에서는 각각 '혜
능(慧能)'과 '돈교(頓敎)'라고 하였다. 돈법은 돈오법문(頓悟法門)이요,
돈교는 돈오교시(頓悟敎示)이므로, 내용은 동일하다.
'하기(何期)'이하는 깨친 법[悟法]의 내용인데, 오조가 인가(印可)
하며 말씀하시기를 식심견성하면 곧 이름이 '인천의 스승, 부처'라고
단언하였다. 그리하여 식심견성하면 불지(佛地 부처님의 지위)임을
선언하였으며, 지위(地位)와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넘
어 여래지(여래의 지위)에 들어가는[一超直入如來地] 돈오법임을 분
명히 하였다. 이는 견성하면 내외 명철인 묘각불지(妙覺佛地)임을
말한 것이니, 불지가 아닌 삼현(三賢), 십성(十聖)은 모두 견성이 아
니라고 한 것이다.
오직 돈교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을 부수는도다.
唯傳頓敎法 出世破邪宗-敦 三二七
오직 견성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을 부수는도다.
唯傳見性法 出世破邪宗-大.興.德.宗 三二七(41)
*돈황본에는 돈교법(頓敎法)이라 하고 다른 본에는 견성법(見性
法)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교가(敎家)의 돈교가 아니요 선무느이 '견
성돈오교법'을 지칭하는 것이어서, 견성법이 곧 돈교이며 돈교법이
곧 견성법이다. <단경>에서 많이 언급한 돈교는 견성하는 돈오교시
(頓悟敎示)이다.
대사가 이 돈오교법을 전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같은 한 몸이기를
바라노라.
大師令傳此頓敎 願學之人同一體-敦 三二十
우리 조사가 오직 이 돈법을 전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같은 한 몸
이기를 바라노라.
吾祖唯傳此頓法 願學之人同一體-大.德.興.宗 三二十
*조조상전(祖祖相傳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함)은 견성하는 돈오교
법뿐이다.
이는 다만 돈교라, 또한 대승(大乘)이라 이름하나니, 미혹할 때는
수많은 세월을 지나지만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此但是頓敎 亦名爲大乘 迷來經累劫 悟卽刹那間-敦 三二九
(42)
이 게송은 돈오 법문이요 또한 큰 법의 배[大法船]이니, 미혹하여
들으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지만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此頌 是頓敎 亦名大法船 迷聞經累劫 悟則刹那間-興.德.宗 三
二九(43)
*여러 겁을 잘못 헤매다가도 찰나 사이에 오달하므로 '돈(頓)'이라
고 한다. 육조의 법문은 유돈무점(唯頓無漸 오직 '돈'만 있고 '점'은
없는 것)이어서 돈오하면 곧 바로 불지에 들어가[直入佛地] 지위, 점
차를 없애는 것이 <단경>의 근본 방침이니, 육조는 이를 '직료성불
(直了成佛 당장 성불해 마침)'이라고 표현하였다.
나는 오조인(五祖忍)화상의 회하에서 한 번 듣고 말 끝에 크게 깨
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다. 그러므로 이 돈법을 뒷날에
널리 퍼지게 하여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돈오케 하여 저
마다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여 자기의 본성을 단박에 깨치도록 하는
것이니라.
我於忍和尙處 一聞 言下 大悟(伍) 頓見眞如本性 是故 將此
(汝)頓法 流行後代 令(今)學道者 頓悟菩提 各自觀心 令自本
性 頓悟-敦 三一七
*돈견본성(頓見本性 본성을 단박에 봄)과 돈오보리(頓悟菩提 보리
를 단박에 깨달음)는 같은 뜻이니, 이것이 육조의 돈교법문이다.
내가 오조스님 밑에서 한 번 듣고 말 끝에 문득 깨쳐 진여의 본
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으니, 이러므로 이 교법이 널리 퍼져 도를 배
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돈오하여 저마다 스스로 마음을 살펴 자기
의 본래 성품을 보게 하느니라.
我於忍和尙處 一聞 言下 便悟 頓見眞如本性 是以 將此敎法
流行 令學道者 頓悟菩提 各自觀心 自見本性(44)-大.興.德.宗
三二七
*다섯 본이 표현에 있어 자구의 차이는 조금 있으나, 근본 뜻은
같으므로 상관이 없다.
법에는 '돈'과 '점'의 구별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
이 있으니, 미혹하면 차츰차츰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바로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니, 깨치
면 원래로 차별이 없느니라.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明)漸契(勸) 悟人 頓修 識自(白)本
<心> 是見本性 頓卽元無差別-敦 二九五(45)
*'明'은 각 본에 '迷'로, '勸'은 '契'로, '本'은 '本心'으로 되어 있으므
로, 잘못되고 빠진 것이 분명하여 바로잡는다. 오인돈수(悟人頓修 깨
친 사람은 단박에 닦음)는 분명하게 있으므로 식심견성이 곧 돈수임
을 말한다. 그리고, 깨달은 뒤에는 영리함과 어리석음[利鈍]의 차별
도 있을 수 없다.
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으니,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고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면 곧 차별이 없느니라.
迷人 漸契 悟者 頓修 自識本心 自見本性 卽無差別-大.興.德
二九五(46)
*종보본에는 <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닦고 깨친 이는 단박에 계합
한다[迷人漸修悟人頓契]>로 되어 있으나, 근본 뜻은 앞의 항목과 같
다.
"청하오니 대사의 세우지 않는다[不立]하심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는 말씀하였다.
"자성은 잘못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어서 생각
생각이 반야 지혜로 관조하여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났으니 무엇을 가
히 세우리오. 자성은 단박에 닦는 것이니 세우면 점차가 있으므로
세우지 않느니라."
請大師 不立 如何 大師言 自性(姓) 無非無亂無痴 念念般若
觀照 常(當)離法相 有何可立 自性頓修 立有漸 此所(契)以不
立-敦 三三八(47)
"어떤 것이 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자성은 잘못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으며 어지러움도 없어서 생각
마다 지혜가 밝게 비춰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나서 자유자재하여 거침
이 없으니 무엇을 세운단 말인가? 자기의 성품을 스스로 깨쳐서 돈
오돈수(頓悟頓修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음)하여 점차가 없느니라."
如何是不立義 師曰自性 無非無痴無亂 念念般若觀照 常離法
相 自由自在 縱橫盡得 有何可立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
次-大.興.德.宗 339
*식심, 견성, 대오(大悟), 돈오는 원해 묘각인 내외명철을 내용으
로 한다. 그리하여 삼현(三賢), 십성(十聖)을 뛰어넘었으므로 돈오돈
수라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선(六祖禪)의 근본 사상이다. 그러므로
돈법, 돈교로써 일체의 점문(漸門)을 배제한 것이다.
마땅히 반야로 관조하면 찰나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져 이것이
곧 나의 진정한 선지식이라,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님을 아느니라. 자
기의 성품의 마음자리에 지혜로 관조하여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요 곧 해탈이니라. 이미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
매니,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무념이니라.
當起般若觀照 刹那間 妄念 俱滅 卽是自眞正善知識 一悟 卽
知佛也 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名)徹 識自本心 卽是解
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班若三昧 卽是無念-敦 三一八
(49)
반야지혜가 일어나 비추면 한 찰나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지나니,
만약 자기의 성품을 알면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르느니
라. 지혜로 비춰서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만약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매니,
이것이 무념이니라.
起般若觀照 一刹那間 妄念 俱滅 若識自性 一悟 卽至佛地 智
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
是般若三昧 卽是無念-大.興.德.宗 三一八(50)
*돈황본에는 '한 번 깨침에 부처님을 안다[一悟知佛]'고 하였고,
각 본에서는 '한 번 깨침에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一悟佛地]'고 하여
표현이 서로 다른 것 같으나, 반야로 관조하여 망념이 다 없어지면
내외명철하여 불지[佛地 부처님의 지위]가 아닐 수 없으므로, '부처
님을 안다[知佛]'함은 곧 '부처님 지위[佛地]'인 것이다. 또한 네 본에
서 '만약 자기의 성품을 알면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若識自性하면
卽至佛地]'고 한 것은 '식심견성'이 곧 부처님 지위임을 육조가 친히
말씀한 중요한 법문이니, 식심 견성하면 묘각(妙覺)인 내외명철임을
더욱 더 뚜렷이 하였다.
법달이 말 끝에 크게 깨치고 말하기를 "이후로 생각생각 부처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하니,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니라"하였다.
法達 言下 大悟 自言 已後 念念修行不行 大師言 卽佛行 是
佛-敦 三四五(51)
*대승사본에는 '부처님 행 닦기를 원한다[願修佛行]', 흥성사본에
는 '바야흐로 부처님 행을 닦는다[方修佛行]'고 하였으나 뜻은 같다.
덕이본과 종보본에는 이 구절이 빠졌으나, 다른 세 본에는 수록되어
있으므로 상관이 없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 기억과 집착이 없는지라, 광망(�x
妄)을 일으키지 말라.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이니라. 지혜로써 관조
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돈오견성(頓悟見性)하면 불지(佛地)이므로 오후점수(悟後漸修 깨
친 뒤에 점차로 닦음)는 필요없고 부처님 행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
는 교가의 점수사상으로 어지럽게 된 종문(宗門)에 일대 활로(活路)
가 되는 것이다.
자성이 삼신(三身 법신, 보신, 화신의 세 몸)을 갖추어 밝음을 빛
내어 사지(四智 부처가 갖추는 세 가지 지혜)를 이루나니, 보고 듣는
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히 부처님 지위에 오르느니라.
自性 具三身 發明成四智 不離見聞緣 超然登佛地-德.宗 三五
十(52)
*이 항(項)은 뒷 날 덧붙인 '참청기연편(參請機緣編)'에 들어 있는
것으로 돈황본에는 없으나 <전등록> 등에 육조의 법문으로서 많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육조의 법문임을 의심할 수 없는 유명한 구절이
다. 돈오견성하면 삼신, 사지를 이루어 초연히 부처님 지위에 오르니
[超然登佛地] 오인돈수, 유전돈법(唯傳頓法 오직 돈법만을 전함)을
항상 주장한 육조의 면목이 뚜렷하다.
4. 무념위종(無念爲宗)
나의 법문은 옛부터 모두 무념을 세워 종(宗)을 삼나니, 모양 없
음[無相]으로 몸[體]을 삼고 머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 皆立無念爲(無)宗 無相爲(無)體
無住[無]爲本-敦 二九五
*돈점(頓漸) 두 자는 군더더기임이 밝혀졌으며, 무념무종(無念無
宗), 무상무체(無相無體), 무주무위본(無住無爲本)은 무념위종(無念爲
宗), 무상위체(無相爲體), 무주위본(無住爲本)을 잘못 베낀 것이다.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먼저 무념을 세워 종을 삼고, 모양 없음으
로 몸을 삼고 머뭄 없음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我此法門 從上已來 先立無念爲宗 無相 爲體 無住 爲本-大.
興.德.宗 二九五(54)
*육조의 무념은 망상이 다 없어진 불지무념(佛地無念 부처님 지
위의 무념)이다.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是以 立無念爲宗-敦 二九六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所以 立無念爲宗-大.興.德.宗 二九六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此敎門 立無念爲宗-敦 二九七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此法門 立無念爲宗-大.興.德.宗 二九七(55)
*육조가 무념위종(無念爲宗 무념으로 종을 삼음)을 거듭 말씀하신
것은 육조의 근본 입장이 내외명철한 묘각무념(妙覺無念)에 있기 때
문이다.
세상 사람이 견해를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만약 유념(有念
생각 있음)이 없으면 무념도 또한 서지 못하느니라. 없다[無]함은 무
슨 일이 없다 함이며, 생각함이란 무슨 물건을 생각함인가? 없다 함
은 상대되는 두 모양의 모든 진로(塵勞 번뇌)를 버림이요, 진여는 생
각[念]의 몸[體]이며 생각은 진여의 씀[用]이니라. 자성이 생각을 일
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見聞覺知],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아니 하고 항상 자재하나니, <유마경>에 이르기를 '밖으로 능히 모
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第一義]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느니라.
世人 離見 不起於念 若無有念 無念 亦不立 無者 無何事 念
者 念何物 無者 離二相諸塵勞 眞如 念之體 念是眞如之用 性
(姓)起念 雖卽見聞覺知(之) 不染萬境(鏡)而常自(白)在 維摩經
云 外能善分別諸相 內於第一義而不動-敦 二九七(56)
*무념은 유무(有無)나 선악(善惡)처럼 상대되는 두 모양의 진로를
영원히 여읜 진여정념(眞如正念)을 말한다.
없다 함은 상대되는 두 모양의 진로의 마음이 없음이요, 생각함이
라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함이니, 진여는 생각의 몸이요 생각은 진여
의 씀이니라, (삭제 부분) 진여의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여섯 모양을
생각하여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ㅇ아
참된 성품이 항상 자재하며 밖으로는 비록 모든 물질과 모양[色相]
을 분별하나 안으로는 첫째 뜻에서 움직이지 않느니라.
無者 無二相諸塵勞之心 念者 念眞如本性 眞如 卽是念之體
念 卽是眞如之用 (削除部分)眞如自性 起念 念六相 雖有見聞
覺知 不染萬境而眞性 常自在 外能分別諸色相 內於第一義而
不動-大.興.德.宗 二九七(57)
*이 항은 돈황본과 약간 표현이 다르기는 하나, 진로를 영원히 떠
난 진여정념(眞如正念)의 근본 사상은 같다. 중간에 보조(普照)가 발
문(跋文)에서 지적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는 부분(眞如自性起念 非眼
耳鼻舌能念 眞如有性 所以起念 眞如若無 眼耳色 聲當時卽壞-삭제부
분) 은 삭제하였는데, 돈황 고본에는 이 부분이 처음부터 없으므로
돈황본의 뛰어남을 알 수 있으며, 삭제 부분은 이 항의 본 뜻인 '진
여정념(眞如正念)'을 설명해 보이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 기억과 집착이 없는지라, 광망(�x
妄)을 일으키지 말라.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이니라. 지혜로써 관조
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着 莫起(去)�x妄 卽自是眞如性(姓)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是見性成佛道-敦 三一三
(59)
*법을 깨달으면 곧 무념이요,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
이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라,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망념
도 없어서 광망(�x妄)을 일으키지 않고 자기의 진여의 성품을 써서
지혜로써 관조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
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著無妄 莫起�x妄 用自眞如性 以智
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是見性成佛道-大.興.德.宗 三一
三
*이 항 또한 돈황본과 표현이 약간 다르기는 하나 큰 뜻은 같다.
법을 깨달으면[悟法] 무념이요 견성성불임을 말하여 준다.
무념이란 모든 법을 보되 모든 법에 물들거나 매달리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모든 곳에 끄달리지 않느니라.
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敦 三
一八(60)
만약 모든 법을 보되 마음이 물들어 끄달리지 않으면 이것이 무
념이니라.
若見一切法 心不染着 是名無念-大.興.德.宗 三一八
모든 경계 위에서 물들지 않음을 무념이라 이름하느니라.
於一切境(鏡)上 不染 名爲無念-敦 二九六
모든 경계 위에서 일만 가지 경계를 만나서도 마음이 늘 고요하
여 생각 위에 모든 경계를 떠나고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於諸境上 心若能萬境 常寂 念上 常離諸境 不於境上 生心 所
以 立無念爲宗-大 二九六(61)
모든 경계 위에서 마음이 물들지 않음이 무념이라, 자기의 생각
위에 항상 모든 경계를 떠나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느니라.
於諸境上 心不染曰無念 於自念上 常離諸境 不於境上 生心-
興.德.宗 二九六
*모든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고 마음이 물들지 않음을 무념이
라고 하는 바, 식심견성한 불지무념이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이니, 불
오염(不汚染 물듦이 없음)은 곧 구경무념(究竟無念)을 말한다.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법에 두루 통달하며, 무념법을 깨친 이
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면, 무념법을 깨친 이는 부처님의 지위
에 이르느니라.
悟無念法者 萬法 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敦.大.興.德.宗 三一八(62)
*이는 옛 조사들이 특히 많이 인용하는 구절로, 육조는 무념이 곧
만법진통(萬法盡通 만법이 다 통함), 제불경계(諸佛境界 모든 부처님
의 경계), 불지위(佛地位)이므로, 식심견성하면 내외명철, 불지무념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 법문은 언제나 한결같아 터럭만큼도 어김이 없
으니, 이 법을 잇는 법손들은 이 철칙(鐵則)을 저버려서는 안 되며,
만약 어긋난다면 육조의 법손이 아니다.
이로써 <단경>의 대강을 알았다. <단경>의 목표는 식심견성이며
식심견성은 묘각인 내외명철이므로, 이를 반야삼매, 해탈, 무념이라
고 한다.
이는 점차(漸次)를 밟아 닦아가지 아니하고 당장 성불해 마친다
[直了成佛]고 하는 돈수이므로, 육조는 늘 유전돈법을 고창(高唱)한
것이다. 돈법이므로 무념으로 종을 삼아서 모든 망념이 사라졌으니,
제불의 경계인 불지라고 단언하였다. 그리하여 견성이 곧 성불임을
청천백일과 같이 선설(宣設)하였으며, 깨달은 뒤에는 부처님 행을 수
행[修行佛行]하였으니, 이 법을 잇는 법손들은 육조의 성의(聖意)를
바르게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돈오견성하고 차제점수(次第漸修 차
례로 차츰차츰 닦음)하여 구경성불(究竟成佛)한다'는 하택(荷澤), 규
봉(圭峯)의 점수사상은 교가(敎家)의 전통이요 육조의 사상을 바로
전한 것이 아닌 지해(知解)라고 옛 조사들이 극력 배제한 것이니, 육
조의 후손인 우리는 <단경>을 숙독(熟讀)하고 실천하여 삿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여야 한다.
5. 정혜체일(定慧滯一)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먼저 혜와 정
이 서로 다르다고 그릇 말하지 말라. 정과 혜가 한 몸이어서 둘이
아니니, 곧 정은 혜의 몸[體]이요 혜는 정의 작용[用]이니라. 곧 혜의
때에 정이 혜 속에 있고 정의 때에 혜가 정 속에 있나니, 이 뜻은
곧 정과 혜가 함께 함이니라.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第一勿迷言定慧別 定慧體一不二 卽定
是慧體 卽惠是定用 卽惠之是 定在惠卽定之時 惠在定 此義
卽是<定>慧等-敦 二九三
나의 이 법문은 정, 혜로써 근본을 삼나니, 정, 혜가 서로 다르다
고 그릇 말하지 말라. 정과 혜가 한 몸이요 둘이 아니니, 정은 혜의
몸이요 혜는 정의 작용이니라. 곧 혜의 때에 정이 혜에 있고 정의
때에 혜가 정에 있나니, 만약 이 뜻을 알면 정과 혜가 함께 배움이
니라.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勿迷言定慧別 定慧一切不二 定是慧體
慧是定用 卽慧之時 定在慧 卽定之是 慧在(65)定 若識此義
定慧等學-大.興.德.宗 二九三(99)
*함께 배운다[等學]함은 정혜등지(定慧等持 정과 혜를 함께 가짐)
곧 자성삼매(自性三昧)를 말함이요 수도방편(修道方便)이 아니니,
<열반경> 28에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정과 혜를 함께 하기 때문
에 부처의 성품을 밝게 본다[諸佛世尊은 定惠等故로 明見佛性이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제불의 자성삼매인 정과 혜를 수행점차(修行漸次 수행해
가는 차례)의 방법으로 삼는 것은 큰 착각이며 육조가 말씀하신 정,
혜의 본 뜻이 아니다.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빛 같아서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느니라.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
은 등불의 작용이니 곧 두 몸이 있으나 두 갈래가 아니니, 이 정과
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定慧 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卽有光 無燈卽無光 燈是光之(知)
體 光是燈之用 卽有二體 無兩般 此定慧 亦復如是-敦 二九五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빛 같아서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으나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나니,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
의 작용이라. 이름은 비록 둘이 있으나 몸은 본래 같은 하나이니, 이
정과 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定慧 猶如何等 猶如燈光 有燈卽光 無燈卽不光 燈是光之體
光是燈之用 名雖有二 體本同一 此定慧 亦復如是-大.興.德.宗
二九五(67)
*정, 혜를 등불과 빛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대저 정, 혜
는 적조(寂照 고요함과 비침)를 말함이니, 일체 미망(迷妄)이 없어지
면 자연히 진여혜광(眞如慧光)이 드러나 적조가 쌍류(雙流)하여 정
혜등지가 되어 제불의 대적광삼매(大寂光三昧)에 들게 된다. 그러므
로 정혜등등(定慧等等 정과 혜가 함께 하고 함께 함)의 구경불지(究
竟佛智)가 아니면 정, 혜가 아니요 미망이다.
점문(漸門)에서 '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以定治平亂
想] 혜로써 무기를 다스린다[以慧治平無記]'고 하여 이것을 '정혜쌍
수(定慧雙修 정, 혜를 쌍으로 닦음)'라고 하나, 이는 정혜등지인 육조
의 정, 혜는 아니다.
최상승법을 닦으면 경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물음도 없고 옴
도 없나니, 정, 혜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아니하므로 삼세제
불이 여기서 삼독(三毒)을 바꾸어 계정혜(戒定慧)로 삼느니라.
最上乘法 修行 定成佛 無去無住無來 是 定慧等 不染一切法
三世諸佛 從中 變三毒爲戒定慧-敦 三一三
*정혜등등하면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나니, 이는 삼세제불의 자성삼매(自性三昧)이다.
정, 혜가 서로 다르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은 법에 두 모양이 있느
니라.
定慧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敦 二九三(69)
*정혜각별(定慧各別 정과혜가 서로 다툼)하면 법에 두 가지 모양
을 둔 것으로서 정혜등등한 육조의 정혜는 아니니, 종문(宗門)에서
금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으로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
린다[以定治平亂想]'하고, '혜로써 무기를 다스린다[以慧治平無記]'고
하여 정과 혜를 각각 따로 하여 점수(漸修)의 방편으로 삼으니, 이는
실로 육조의 사상을 거스른 것이다.
그러므로 교가(敎家)의 점수사상을 버리고, 오매일여가 되어도 언
구(言句)를 참구(參究)하는 바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곧 대혜(大
慧)선사가 오매일여에 이르렀으나 원오( 悟)선사는 '언구를 의심치
않음이 큰 병이다[不疑言句是爲大病]'고 꾸짖으므로, 마침내 대혜선
사가 대오(大悟 크게 깨침)하여 양기정전(楊岐正傳)을 계승한 것이
다.
'오매일여한 때에 점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漸到寤寐一如時에도 只要話頭心不離라]'고 한 태고(太
古)선사의 유훈(遺訓)과 같이, 극히 어려운 오매일여의 깊은 경계에
서도 화두를 힘써 참구해야 한다.
만약에 오매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속에서 한결같
음), 동정일여(動靜一如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으나 한결같음)도 안
된 미망에서 화두를 버리고 정혜쌍수를 말한다면 참으로 한심스런
노릇이며 불조의 혜명(慧命)을 끊어 버리는 잘못된 법이니, 오직
<단경>을 스승으로 하여 가르침을 바로 계승하는 본분납승(本分衲
僧)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육조가 천명한 내외명철의 단경사상이다.
곧 마음을 혜라 하고 곧 부처가 이에 정이니, 정과 혜가 함께 하
여 마음 속이 청정하니라. 이 법문을 깨침은 너의 익힌 성품으로 말
미암은 것이니, 인(因)은 본래로 남[生]이 없음이라, 쌍수(雙修 쌍으
로 닦음)가 바르도다.
卽心名慧 卽佛乃定 定慧等等 意中 淸淨 悟此法門 由汝習性
因本無生 雙修是正-德.宗 三三七(72)
*이는 나중에 추가된 <참청기연편(參請機緣編)>에 들어있다. 이
쌍수를 점수문으로 오해하는 바 있으나, 이는 본 송(頌)과 같이 마음
속[意中]이 청정하여 정혜등등한 자성무생(自性無生 자성은 남이 없
음)에서 하는 말이다. 무생(無生 남이 없음)에서 쌍수(雙修 쌍으로
닦음)라 함은 적조쌍류(寂照雙流 고요함과 비침이 쌍으로 흐름)라
함과 같으니, 무생을 깨달아 마음 속이 청정하면 자연히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고[寂而常照], 비추면서 항상 고요하여[照而常寂] 적조쌍류
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혜등등이며 등지(等持 함께 지님, 삼매)라고 하는
바, 정 가운데 혜가 있고 혜 가운데 정이 있어서 정, 혜가 쌍등(雙等
쌍으로 함께 함)하므로 쌍수라고도 한다.
6. 무생서방(無生西方)
우매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기에 가서 나려 하고 깨친 사람은 스
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그
마음 깨끗함을 따라서 불국토도 깨끗하다'하시니라.
迷人 念佛 往生彼 悟者 自淨其心 所以佛言 隨其心淨 則佛土
淨-敦.大.德.宗 三二三
마음에 다만 깨끗치 않음[不淨]이 없으면 서쪽 나라가 여기서 멀
지 않고, 마음에 깨끗치 못한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을 해도 왕생하
여 이르기 어렵느니라.
心但無不淨 西方 去此不遠 心起不淨之心 念佛 往生難到-敦
三二四(74)
마음 자리[心地]에 다만 착하지 않음[不善]이 없으면 서쪽 나라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만약 착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면 염불하여도 왕
생하여 이르기 어렵느니라.
心地 但無不善 西方 去此不遙 若懷不善之心 念佛 往生難到-
大.興.德.宗 三二四(75)
*정토가(淨土家)에서는 대업왕생(大業往生 업을 지닌 채로 극락
세계에 가서 남)을 주장하여 착하지 못한 사람도 미타(彌陀)의 원력
으로 극락에 가서 난다고 말하지만, 설혹 가서 난다 하여도 이는 자
기의 업력(業力)에 따르는 환주장엄(幻住莊嚴)이요, 모든 부처님의
실지정토(實地淨土)는 아니다.
내외명철하면 서쪽 나라와 다름 없나니, 이 법을 닦지 않고 어떻
게 서쪽 나라에 이르리오.
內外明徹 不異西方 不作此修 如何到彼-敦.大.興.德.宗 三二五
*내외명철은 묘각정토(妙覺淨土)니, 이것이 육조의 정토이다. 십지
(十地)와 등각(等覺)도 내외명철한 제불정토(諸佛淨土)와 법신불(法
身佛)인 아미타불은 보지 못한다.
만약 무생인 돈법(頓法)을 깨치면 서쪽 나라를 봄이 찰나 사이에
있느니라.
若悟無生頓法 見西方 只在刹那間-敦.大.興.德.宗 二九五(76)
*<단경>의 사상은 철두철미한 자성자오(自性自悟 자기의 성품을
스스로 깨침)에 있으므로, 그 이외의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한 생각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곳곳마다 연꽃 피나니, 한 꽃에
한 정토요 한 국토에 한 여래로다[一念心請淨하면處處에蓮花開니一華一
淨土요一土一如來라]'고 한 방거사(龐居士)의 송구(頌句)가 단경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설사 대업왕생을 한다 하여도 제불정토와 미타면목(彌陀面目)은
꿈에도 보지 못하나니, 자성자오하여 남이 없음[無生]을 단박에 깨달
아(頓證], 참으로 미망으로부터 해탈하여야 한다. 미타(彌陀)의 진면
목(眞面目)을 보지 못하는 왕생은 꿈 속의 꼭두각시 놀음[夢中幻戱]
이니, 선가(禪家)에서 선정겸수(禪淨兼修 선과 정토를 함께 닦음) 운
운하는 것은 본분납자(本分衲子)가 아니며 육조의 법손이 될 수 없
다.
7. 불오염수(不汚染修)
대사가 말씀하셨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는고?"
"한 물건이라고 말씀드린다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그러면 닦아 증득[修證]하는가?"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오염(汚染)될 수는 없습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不汚染]은 모든 부처님께선 호념(護念)하
시는 바라,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니라."
師曰 什�物 恁�來 曰說似一物 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曰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師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
如是 吾亦如是-德.宗 三五 九(78)
*불오염(不汚染)을 육조는 무념이라고 하였으며, 무념은 내외명철
인 불지(佛地)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불지무념이 아니면 불오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오염은 제불의 호념하는 바이며,
너도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도다>라고 한 것은 부처님행을 수행
[修行佛行]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수증(修證 닦아 증득함)이란 무슨 말인가?
옛 조사들은 이 불오염의 수증을 점차수증(漸次修證 점차로 닦아
증득함)이 아니요, 불지인 원증(圓證) 후의 원수(圓修)라고 하여, 착
의끽반(着衣喫飯 옷 입고 밥 먹음), 소지분향(掃地焚香 땅을 쓸고 향
을 사룸) 등을 지칭하는 바, <털끝만큼도 닦고 배우는 마음이 없고,
모양 없는 빛 속에서 항상 자재하다[不起纖毫修學心하고無相光中常自
在라]>고 한 것이다.
이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이 수증을 점수사상에 배합하여 망상을
닦아 다스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이 불오염을 모르는 큰 잘못으
로서, 육조의 법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수문에서도 불오염을 주장하기는 하나, 점수문의 돈오는 '육진
의 번뇌가 전과 다름 없어서[客塵煩惱 如前無殊]' 무념이 아니므로
생각 생각 오염되어 불오염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념을 돈증
(頓證 단박에 깨침)하기 전의 수행은 모두 오염수(汚染修)인 것이다.
비록 망념이 본래 공(空)한 것은 안다 하여도, 망념이 계속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므로 경계를 따라 생각이 일어나[遇境生念] 전전(轉轉)히
오염되기 때문이다.
8. 불보리인(佛菩提因)
만약 수행하여 부처님을 찾는다고 할진댄 어느 곳에서 참됨[眞]을
찾으려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만약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이 있으
면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因]이로다.
若欲修行云覓佛 不知何處欲求眞 若能身中 自有眞 有眞 卽是
成佛因-敦 三八六
*몸 가운데 진여(眞如)가 있는 줄 알면, 이것이 수도하여 성불할
수 있는 씨앗이 된다는 말이다.
만약 수행하여 부처가 되고자 할진댄 어느 곳에서 참됨을 찾으려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만약 마음 가운데 스스로 참됨을 보면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이로다.
若欲修行覓作佛 不知何處擬求眞 若能心中 自見眞 有眞 卽是
成佛因-興.德.宗 三八六(81)
*돈황본에는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이 있다[身中自有眞]'고 되어
있고, 다른 각 본에는 '마음 가운데에서 스스로 참됨을 본다[心中에自
見眞]'고 하여 서로 차이가 있다.
'몸 가운데 참됨이 있음'은 몸 속에 진여가 있음이 되고, '마음 가
운데에서 스스로 참됨을 본다'함은 진여를 스스로 보는 것인지라 곧
견성이 된다. '몸 가운데 참됨이 있음[身中有眞]'은 성불하는 씨앗[成
佛因]이지만, '마음 가운에서 참됨을 봄[心中見眞]'은 견성인 불과(佛
果)로서 인지(因地)가 될 수 없으므로 <단경>의 '견성즉불(見性卽佛
견성이 곧 부처)'이라는 원칙에 어긋난다.
물론 다른 본들도 '참됨을 보는 것이 곧 성불하는 씨앗[見眞卽成
佛因]'이라고 하지 않고 돈황본처럼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
[有眞卽成佛因]'이라고 하였으므로 원칙상 모순은 없다. 그러나 '마음
가운데에서 참됨을 본다[心中見眞]'고 해 놓고 바로 뒤에 '참됨 있음
이 곧 성불하는 씨앗[有眞卽是成佛因]'이라고 하였으니, 돈황본이 아
닌 다른 본들은 자체의 모순을 면치 못하므로 앞뒤의 글이 맞지 않
는다.
화신 보신 및 정신이여! 세 몸이 원래 한 몸이니, 만약 몸 가운데
서 스스로 보는 걸 찾으면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루는 씨앗이로다.
化身報身及淨身 三身 元本是一身 若向身中 覓自見 卽是成佛
菩提因-敦 三八五(83)
*'멱자견(覓自見)'을 '찾아서 스스로 본다'고 하면 이는 견성한다는
말로서 성불하는 씨앗이 아니므로 '견성즉불'이라는 원칙에 어긋난
다. '스스로 보는 걸 찾는다'고 하면 '견성하는 길을 닦는다'는 말이
므로 성불하는 씨앗이라 하여도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화신 보신 및 정신이여! 세 몸이 원래 한 몸이라, 만약 자성 가운
데로 향하여 능히 스스로 보면 곧 성불하는 깨달음의 씨앗이로다.
法身報身及化身 三身 本來是一身 若向性中 能自見 卽是成佛
菩提因-興.德.宗 三八五(84)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품 가운데서 스스로 본다[性中自見]'함
은 견성이 된다. 그런데 견성은 불과(佛果)요 인지(因地)가 아니니
'성품 가운데서 스스로 본다[性中自見]'고 하면서 '성불하는 씨앗[成
佛因]'이라 하면, <단경>의 '견성즉불'이라는 원칙에 어긋난다.
본디 각 본에서는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면 곧 부처라 한다[識心
見性 卽名爲佛]'고 하였고, 또 '만약 자성을 알면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若識自性 卽至佛地]'고 하여 '견성즉불'을 더욱 강조하였으니,
이 대원칙(大原則)에 이긋나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는
뒷 사람들이 베껴 쓸 때 잘못하였거나 아니면 일부러 고쳐 바꾼 것
일 터이므로, 일본 조동종의 개조(開祖)인 도원(道元)의 필사본(筆寫
本)이라는 대승사본에는 논란이 된 앞의 두 구절이 들어 있는 '자성
진불송(自性眞佛頌)'을 모두 삭제해 버렸다.
모름지기 돈황본 및 다른 본에 일관된 근본 사상은 내외명철, 법
신불, 묘각견성(妙覺見性), 오인돈수, 자성돈수의 돈법돈교, 불지무념
을 전제로 한 무념위종, 식심견성, 오후수행불행(悟後修行佛行) 등이
니, 이에 어긋나는 사상은 모두 없애고, 오직 <단경>의 근본으로 돌
아와 육조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어야 한다. 특히 각본 가운데서 '마
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곧 부처라 한다[識心見性 卽名爲佛]', '만약
자성을 알면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若識自性 卽至佛地]'와 같은
법문은 육조의 가르침을 바로 잇고 드날리는 데 한층 도움이 되는
것이다.
제2편 돈황본단경 편역(編譯)
1.서언(序言)
혜능대사가 대범사 강당의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를 주시니, 그때 법좌 아래에는 스님, 비구니, 도교인,
속인등, 일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 자사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가의 선비 몇몇 사람
들이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함께 청하였고, 자사
는 이윽고 문인 법해로 하여금 모아서 기록하게 하였으며, 후대에
널리 행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함께 이 종지를 이어받아서 서
로서로 전수케 한지라, 의지하여 믿는 바가 있어서 이에 받들어 이
어받게 하기 위하여 이 <단경>을 설하였다.
惠能大師 於大梵寺講堂中 昇高座 說摩訶般若波羅密法 授
(受)無相戒 其時座下 僧尼道俗 一萬餘人 韶州刺史韋 (등據)
及諸官僚(寮)三十餘人 儒士餘人 同請大師說摩訶般若波羅蜜
法 刺史遂令門人僧法海集記 流行後代(伐)與學道者 承此宗旨
遞相傳授 有所依(於)約 以爲 承 說此壇經
2. 심사(尋師)
혜능대사는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
대사께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고 한
참 묵묵하신 다음 이윽고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조용히 들어라. 혜능의 아버지의 본관은 법양인데 좌
천되어 영남의 신주 백성으로 옮겨 살았고 혜능은 어려서 일찍 아버
지를 여의었다. 늙은 어머니와 외로운 아들은 남해로 옮겨와서 가는
에 시달리며 장터에서 땔나무를 팔았더니라.
어느 날 한 손님이 땔나무를 샀다. 혜능을 데리고 관숙사(官宿舍)
에 이르러 손님은 나무를 가져갔고, 혜능은 값을 받고저 문을 나서
려 하는데 문득 한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보았다.
혜능은 한번 들음에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치고, 이내 손님에게
묻기를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읽습니까.?" 하였다.
손님이 대답하기를
"나는 기주 황매현 동빙무산에서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는데,
지금 그 곳에는 문인이 천여 명이 넘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오조대
사가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바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혜능은 숙세의 업연이 있어서, 곧 어머니를 하직하
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다.
能大師言 善知識 心 念摩訶般若波羅蜜法 大師不語 自 心
神 良久乃言 善知識 靜( )聽 惠能慈父 本官 范陽 左降遷流
(嶺)南新州百姓 惠能幼小 父小早亡 老母 孤遺 移來(南)海 艱
辛貧乏(之) 於市賣(90)(買)柴 忽有一客 買柴 遂領惠能 至於
官店 客將柴去 惠能 得錢 却向門前 忽見一客 讀金剛經 惠能
一聞 心明(名)便悟 乃問(聞)客曰 從何處來 指此經典 客 答曰
我於 州黃梅縣(懸)東憑茂(墓)山 禮拜五祖弘忍和尙 見今(令)
在彼 門人 有千餘衆 我於彼聽見大師勸道俗 但持(特)金剛經
一卷 卽得見性 直了成佛 惠能 聞說 宿業有緣 便卽辭親 往黃
梅憑茂(墓)山 禮拜五祖弘忍和尙(91)
홍인화상께서 혜능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며, 이제
나에게서 새삼스레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제자는 영남 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짐짓 멀리서 와
서 큰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고 오직 부처되
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하였다.
오조대사께서는 혜능을 꾸짖으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영남 사람이요 또한 오랑캐거니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
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니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
니까?" 하였다.
오조스님은 함께 더 이야기하시고 싶었으나, 좌우에 사람들이 둘
러 서 있는 것을 보시고 다시 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시니, 그 때 혜능은 한 행자가 이끄
는 대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 달 남짓 방아를 찧었다.
弘忍和尙 問惠能曰 汝 何方人 來此山 禮拜吾 汝今向吾邊 復
求何物 惠能 答曰 弟子 是嶺(領)南人 新州百姓 今故遠來 禮
拜和尙 不求餘物 唯求<作>佛法 [作] 大師遂責惠能曰 汝是
嶺(領)南人 又是 若爲堪作佛 惠能 答曰 人 卽有南北 佛
性(姓) 卽無南北 (93) 身 與和尙 不同 佛性(姓) 有何差別
大師欲更共議 見左右在傍邊 大師更不言 遂發遣惠能 令隨衆
作務 時有一行者 遂差惠能於 房 踏 八箇餘月(94)
*금강경(金剛經)... '이 한 권의 경이 중생의 자성 속에 본래 있
으니, 스스로 보지 못하는 이는 다만 문자만 독송할 것이요, 만
약 본래 마음을 깨치면 이 경이 문자 속에 있지 않음을 비로소
알비니라[此一卷經 衆生性中 本有 不自見者 但讀誦文字 若悟本
心 始知此經 不在文字 -金剛經序-六祖]'
*직료성불(直了成佛 곧바로 요달하여 부처를 이룸)... 지위와 점
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성불함이니 <영가증도가(永嘉證道
歌)>의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 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간다)와 같은 뜻이다.
3. 명게(命偈)
오조 ㅎ인대사께서 하루는 문인들을 다 불러오게 하셨다. 문인들
이 다 모이자 말씀하혔다.
"내 저희들에게 말하나니, 세상 사람들의 나고 죽는 일이 크거늘
너희들 문인들은 종일토록 공양을 하며 다만 복밭만을 구할 뿐 나고
죽는 괴로운 바다를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모두 자성이 미
혹하다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들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 잘 살펴보라. 지혜가 있는 자는 본래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써서 각기 게송 한 수를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
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의 조사가 되게 하리니, 어
서 빨리 서둘도록 하라."
五祖弘忍於一日 喚門人盡來 門人 集訖(記) 五祖曰 吾向汝
(與)說 世人 生死事大 汝等門人 終日供養 只求福田 不求出
離生死苦海 汝等自性(姓) 迷 福門 何可救汝 汝 且歸房自看
有智(知)惠者 自(白)取本性(姓)般若之知(知之) 各作一偈呈吾
吾看汝偈 若悟(吾)大意者 付汝衣法 爲六代 火急急(97)
문인들이 처분을 받고 각기 자기 방으로 돌아와 서로 번갈아 말
하기를
"우리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뜻을 써서 게송을 지어 큰스님께 모
름지기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상좌는 우리의 교수사이므로 신수상
좌가 법을 얻은 후에는 저절로 의지하게 된 터이니 굳이 지을 필요
가 없다."하고, 모든 사람들은 생각을 쉬고 다들 감히 게송을 바치지
않았다.
그때 화공 노진이 홍인대사의 방 앞에 있는 삼칸의 복도에 '능가
변상'과 오조 대사가 가사와 법을 전수하는 그림을 그려 공양하고,
후대에 전하여 기념하고 자 벽을 살펴보고서 다음날 착수하려고 하
였다.
門人 得處分 却來各至自房 遞相謂言 我等 不須呈心用意作偈
將呈和尙 神秀上座 是敎授師 秀上座得法後 自可依(於)止 請
不用作 諸人 息心 盡不敢呈偈 時大師堂前 有三間房廊 於此
廊下 供養 欲畵楞伽變 幷畵五祖大師 傳授衣法 流行後代 爲
記 畵人盧珍(玲)看壁了 明日 下手(98)
4. 신수(神秀)
상좌인 신수는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교수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오조스님께서 나
의 마음 속의 견해가 얕고 깊음을 어찌 아시리오. 내가 마음의 게송
을 오조스님께 올려 뜻을 밝혀서 법을 구함은 옳거니와, 조사의 지
위를 넘봄은 옳지 않다.
도리어 범인의 마음으로 성인의 지위를 빼앗음과 같다. 그러나 만
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마침내 법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한
참을 아무리 생각하여도 참으로 어렵고 어려우며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로다. 밤이 삼경에 이르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남쪽 복도의 중간 벽 위에 마음의 게송을 지어서 써 놓고 법을 구해
야겠다. 만약 오조스님께서 게송을 보시고 이 게송이 당치 않다고
나를 찾으시면 나의 전생 업장이 두터워서 합당히 법을 얻지 못함이
니, 성인의 뜻은 알기 어려우므로 내 마음을 스스로 쉬리라.'
上座神秀思惟 諸人 不呈心偈 緣我爲敎授師 我若不呈心偈 五
祖如何得見我心中 見解深淺 我將心偈 上五(99)祖呈意 求法
卽善(卽善求法) 覓祖 不善 却同凡心 奪其聖位 若不呈心 終
(修)不得法 良久思惟 甚難甚難 甚難甚難 夜至三更 不令人見
遂向南廊下中間(問)壁上 題作呈心偈 欲求於法 若五祖見偈
言此偈語<不堪> 若訪覓我 我宿業障重 不合得法 聖意難則
我心自息(100)
신수상좌가 밤중에 촛불을 들고 남쪽 복도의 중간 벽 위에 게송
을 지어 써놓았으나 사람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게송으로 말하
였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秀上座 三更 於南廊下中間壁上 秉燭題作偈 人盡不知(和) 偈
曰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101)
時時勸拂(佛)拭 莫使有塵埃
신수상좌가 이 게송을 다 써 놓고 방에 돌아와 누웠으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오조스님께서 아침에 노공봉을 불러 남쪽 복도에
'능가변상'을 그리게 하려 하시다가, 문득 이 게송을 보셨다. 다 읽
고 나서 공봉에게 말씀하셨다. "홍인이 공봉에게 돈 삼만냥을 주어
멀리서 온 것을 깊이 위로하니, 변상을 그리지 않으리라. <금강경>
에 말씀하기를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 하셨으니,
이 게송을 그대로 두어서 미혹한 사람들로 하여금 외우게 하여, 이
를 의지하여 행을 닦아서 삼악도에 떨어지니 않게 하는것만 못할 것
이다. 법을 의지하여 행을 닦으면 사람들
에게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니라."
이윽고 홍인대사께서 문인들을 다 불러오게 하여 게송 앞에 향을
사르게 하시니, 사람들이 들어와 보고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내므로
오조스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모두 이 게송을 외우라. 외우는 자는 바야흐로 자성을
볼 것이며,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 않으리라."
문인들이 다들 외우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훌륭하다!'고 말씀
하였다.
神秀上座題此偈畢 歸房臥 無人見 五祖平旦 遂喚(換)盧供
奉來 南廊下 畵楞伽變 五祖忽見此偈 讀訖(請記) 乃謂供奉曰
弘忍 與供奉錢三十千 深勞遠來(102) 不畵變相也 金剛經 云
凡所有相 皆是虛妄 不如留(流)此偈 令迷人誦 依此修行 不墮
三惡 依法修行 人有大利益 大師遂喚門人盡來 焚香偈前 人衆
入(人)見 皆生敬心 <五祖曰> 如等 盡誦此偈者 方得見性(姓)
依(於)此修行 卽不墮落 門人盡誦 皆生敬心 喚言善哉(103)
오조스님이 신수상좌를 거처로 불러서 물으시되,
"네가 이 게송을 지은 것이냐? 만약 네가 지은 것이라면 마땅히
나의 법을 얻으리라." 하셨다.
신수상좌가 말하기를,
"부끄럽습니다. 실은 제가 지었습니다만 감히 조사의 자리를 구함
이 아니오니, 원하옵건대 스님께서는 자비로써 보아 주옵소서. 제자
가 작은 지혜라도 있어서 큰 뜻을 알았습니까?" 하였다.
오조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지은 이 게송은 소견이 당도하였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
을 뿐 아직 문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였다. 범부들이 이 게송을 의
지하여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견해를 가지고 위 없
는 보리를 찾는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문 안으로 들
어와야만 자기의본성을 보느니라. 너는 우선 돌아가 며칠 동안 더
자성을 보았다면 마땅히 가사와 법을 너에게 부촉 하리라."하셨다.
신수상좌는 돌아가 며칠을 지냈으나 게송을 짓지 못하였다.
五祖(褐)遂喚秀上座於堂內 問(門)是汝作偈否 若是汝作 應得
我法 秀上座言 罪過 實是神秀作 不敢求祖 願和尙 慈悲 看
弟子有小智惠 識大意否 五祖(褐)曰 汝作此偈 見卽來到 只到
門前 尙未得入 凡夫依(於)此偈修行 卽不墮落 作此見解 若覓
無上菩提 卽未可得 須入得門 見自本性(姓) 汝且去 一兩日來
思惟 更作一偈 來呈吾 若入得門 見自本性(姓) 當付汝衣法
秀上座去 數日作不得(105)
*'이 게송을 외는 이는 바야흐로 자성을 본다.[誦此偈者 方
得見性]'고 함은 오조(오조)가 대중을 유인하기 위하여 방편
으로 하신 말씀이다.
5. 정게(呈偈)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외고 있었다. 혜능은
한번 듣고, 이 게송이 견성하지도 못하였고 큰 뜻을 알지도 못한 것
임을 알았다.
혜능이 동자에게 묻기를,
"지금 외우는 것은 무슨 게송인가?"하였다. 동자가 혜능에게 대답
하여 말하였다.
"너는 모르는가?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고 죽는 일이 크니
가사와 법을 전하고저 한다 하시고, 문인들로 하여금 각기 게송 한
수씩을 지어와서 보이라 하시고, 큰 뜻을 깨쳤으면 가사와 법을 전
하여 육대의 조사로 삼으리라 하셨는데, 신수라고 하는 상좌가 문득
남쪽 복도 벽에 모양 없는 게송(無相偈) 한 수를 써 놓았더니, 오조
스님께서 모든 문인들로 하여금 다 외우게 하시고, 이 게송을 깨친
이는 곧 자기의 성품을 볼 것이니,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나
고 죽음을 벗어나게 되리라고 하셨다."
有一童子 於 房邊過 唱誦此偈 惠能 一聞 知未見性(姓) 未
(卽)識大意 能 問童子 適來誦者 是何言偈 童子答能曰 不
知 大師言 生死事(是)大 欲傳衣(於)(107)法 令門人等 各作一
偈 來呈看 悟大意 卽付衣法 爲六代祖(褐) 有一上座名神秀
忽於南廊下 書無相偈一首 五祖(褐)令諸門人 盡誦 悟此偈者
卽見自性(姓) 依此修行 卽得出離(108)
혜능이 대답하기를
"나는 여기서 방아찧기를 여덟 달 남짓 하였으나 아직 조사당 앞
에 가 보질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그대는 나를 남쪽 복도로 인도하
여 이 게송을 보고 예배하게 하여 주게. 또한 바라건대 이 게송을
외워 내생의 인연을 맺어 부처님 나라에 나기를 바라네"하였다.
동자가 혜능을 인도하여 남쪽복도에 이르렀다. 혜능은 곧 이 게송
에 예배 하였고, 글자를 알자 못하므로 어느 사람에게 읽어 주기를
청하였다. 혜능은 듣고서 곧 대강의 뜻을 알았다. 혜능은 한 게송을
지어, 다시 글을 쓸 줄 아는 이에게 청하여 서쪽 벽 위에 쓰게 하여
자신의 본래 마음을 나타내 보였다. 본래 마음을 모르면 법을 배워
도 이익이 없으니,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아야만 곧 큰 뜻을 깨닫느
니라.
혜능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절 안의 대중들이 혜능이 지은 게송을 보고 다들 괴이하게 여기
므로, 혜능은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오조스님이 문득 혜능의 게송을
보시고, 곧 큰뜻을 잘 알았으나, 여러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시어
대중에게 말씀하기를
"이도 또한 아니로다!"하셨느니라.
惠能 答曰 我此踏 八箇餘月 未至堂前 望上人 引惠能至南廊
下 見此偈禮拜 亦願誦取 結來生緣 願生佛地 童子引能至南廊
下 能 卽禮拜此偈 爲不識字 請一人讀 惠<能>聞(問)已 卽識
大意 惠能 亦作一偈 又請得一解書人 於西間壁上 題(提)著
呈自本心 不識本(109) 心 學法無益 識心見性(姓) 卽悟(吾)大
意 惠能偈 曰
菩提 本無樹 明鏡 亦無臺
佛性(姓) 常淸(靑)淨 何處有塵埃
又偈曰
心是菩提樹 身爲明鏡臺
明鏡本淸淨 何處染塵埃
院內徒(從)衆 見能作此偈 盡怪 惠能 却入 房 五祖(褐)忽見
惠能偈(但) 卽善[知]識大意 恐衆人知 五祖乃謂衆人曰 此亦
未得了(110)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佛性常淸淨 何處有塵埃]'... 각 유통 본에는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일어나리오[本來
無一物 何處惹塵埃]'로 되어 있다.
6. 수법(受法)
오조스님께서 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
을 설해 주셨다. 혜능이 한번 듣고 말끝에 깨쳐서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내 오조스님은 단박 깨치는 법과 가사를 전하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육대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써 신표로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
로 깨치도록 하라."
오조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혜능아, 예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
기 속히 떠나라."
五祖夜至(知)三更 喚惠能堂內 說金剛經 惠能 一聞 言下 便
悟(伍) 其夜受法 人盡不知 便傳頓法及衣 汝爲六代祖 衣將爲
信 代代相傳 法以心傳心 當令自悟 五祖言 惠能 自古傳法
命(氣)如懸絲 若住此(113)間 有人害汝 汝卽須速去(114)
혜능이 가사와 법은 받고 밤중에 떠나려 하니 오조스님께서 몸소
구강역까지 혜능을 전송해 주시었으며, 떠날 때 문득 오조스님께서
처분을 내리시되,
"너는 가서 노력하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이 법을 펴려하지 말라. 환란이 일어나리라. 뒤에 널리 펴서 미혹한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만약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
으리라." 하셨다.
이에 혜능은 오조스님을 하직하고 곧 떠나서 남쪽으로 갔다.
能 得衣法 三更 發去 五祖自送能於九江驛 登時 便五(悟)祖
處分 汝居努力 將法向南 三年 忽弘此法 難起(去) 在後弘化
善誘迷人 若得心開 汝悟 無別 辭違已了 便發向南(115)
두 달 가량 되어서 대유령에 이르렀는데, 뒤에서 수백명의 사람들
이 쫓아 와서 혜능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고자 하다가 반쯤 와
서 다들 돌아간 것을 몰랐었다. 오직 한 스님만이 돌아가지 않았는
데 성은 진이요 이름은 혜명이며, 선조는 삼품장군으로, 성품과 행동
이 거칠고 포악하여 바로 고갯마루까지 쫓아 올라와서 덮치려 하였
다. 혜능이 곧 가사를 돌려 주었으나 또한 받으려 하지 않고 "제가
짐짓 멀리 온 것은 법을 구함이요 그 가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하였
다.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문득 법을 전하니 혜명이 법문을 듣고 말끝
에 마음이 열리었으므로, 혜능은 혜명으로 하여금 "곧 북쪽으로 돌
아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셨다.
兩月中間 至大庾(庚)嶺 不知向後 有數百人來 欲擬害(頭)惠能
奪衣(於)法 來至半路 盡 却廻 唯有一僧 姓陳 名惠明(順) 先
是三品將軍 性行 序惡 直至嶺上 來 犯著 惠能 卽還法衣 又
不肯取 我故遠來 求法 不要其衣 能 於嶺上 便傳法惠明(順)
惠明(順) 得聞 言下心聞開 能 使惠明(順) 卽却向北化人來
(116)
*박학다문한 대선배인 신수(神秀)를 물리치고 일자무식인 초동
목수(樵童牧竪)에게 대법을 전하였으니, 불법은 문자에 있지않
고 견성에 있는 것임을 알겠다.
*변전돈법(便傳頓法 곧 돈법을 전수함)... <단경>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돈법뿐이오 점법(漸法)은 없으니, 점수(漸修)를 말
함은 단경의 법이 아니다.
7. 정혜(定慧)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 도교인, 속인들과 더
불어 오랜 전생부터 많은 인연이 있어서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신 바요 혜능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듣고 나서 스스로
미혹함을 없애어 옛 사람들의 깨침과 같기를 바랄지니라.[아래로부
터는 법(法)이니라.]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
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
선지식들아,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루느니라.
惠能 來依(衣)此地 與諸官僚(奪)道俗 亦有累劫之因 敎是先聖
(性)所傳 不是惠能自知 願聞先聖(性)敎者 各須淨心 聞了願自
除(餘)迷 如(於)先代悟 惠能大師喚言 善智識 菩提般若之智
(知) 世人 本自有之 卽緣心迷 不能自悟 須求大善知識 示導
(道) 見性 善知識 遇悟卽成智(118)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
서 둘이 아니니라.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 곧 혜가 작용할때
정이 혜에 있고 곧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느니라.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혜를 함께 함이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
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에 두 모양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
하지 않으면 혜와 정을 함께 함이 아니요,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가지면 정,혜가 곧 함께 함이니라.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는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앞 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
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
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
善知識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第一勿迷言惠定 別 定惠 體一
不二 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卽惠之時 定在惠 卽定之時 惠
在定 善知識 此義 卽是<定>惠等 學道之人 作意 莫言先定發
惠 先惠發定 定惠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 口說善 心不善 惠
定不等 心口俱善 內外一[衆]種 定惠卽等 自悟修行 不在口諍
若諍先後 卽是<迷>人 不斷勝負 却生法我 不離四相(120)
일행삼매란 일상시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
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다'라고 하였느니라.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입르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
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니라. 오직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국집하여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곧은 마
음이라고 하며, 망심을 제거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행삼
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과 같은 것이므로 도리
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니라.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
면 곧 속박된 것이니라.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사리불이 숲속에 편
안히 앉아있는 것을 유마힐이 꾸짖었음이 합당하지 않느니라.
선지식들아, 또한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
으로써 공부를 삼게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곧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짐짓 알아야 한다.
一行三昧者 於一切時中 行住坐(座)臥 常行直(眞眞)心(121)
是 淨名經 云 直(眞)心 是道場 直(眞)心 是淨土 莫心行 曲
(典) 口說法直 口說一行三昧 不行直(眞)心 非佛弟子 但行直
(眞)心 於一切法 無[上]有執著 名一行三昧 迷人 著法相 執
一行三昧 直(眞)心 坐不動 除妄不起心 卽是一行三昧 若如是
此法 同無情(淸) 却是障道因緣 道須(順)通流 何以却滯 心
<不>住在 卽通流 住卽被(彼)縛 若坐不動 是 維摩詰 不合呵
舍利弗 宴坐(座)林中 善知識 又見有人 敎人坐(座) 看心看淨
不動不起 從此置功 迷人 不悟 便執成顚 卽有數百般(盤) 如
此敎道者 故知(之)大錯(122)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
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善知識 定惠 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卽有光 無燈卽無光 燈是
光之(知)體 光是燈之用 <名>卽有二 體無兩(124)般 此定惠法
亦復如是(125)
*정혜위본(定慧爲本 정.혜를 근본으로 삼음)...'모든 부처님은 정.
혜가 함께 하므로 불성을 밝게 본다.[諸佛世尊은 定慧等故로 明
見佛性하니라-涅槃經二十八]'고 함과 같이 정혜등지(定慧等持)
가 된 부처라야 견성(見性)이므로 정혜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한
것이다.
*일행삼매(一行三昧)는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정.해가 등등(等
等)한 삼매이다.
8.무념(無念)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 깨침과 점차로 깨침이 없다. 그러나 사
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
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
품을 보는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로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善知識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明)卽漸契(勸) 悟人 頓修 識自
本<心> 是見本性 悟卽元無差別 不悟 卽長劫輪廻善知識 我
自法門 從上已來 [頓漸]皆立無念爲(無)宗(126)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예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
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무름 없음
(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새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
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생각생각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나,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
을 떠나느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생
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
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 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武相爲(無)體 無住[無]爲本 何名(明)無(爲)相 無相者 於相而
離相 無念者 於念而不念 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前念今
(念)念後念 念念相續(讀)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 卽是離
色身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住 念念卽住 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是>以無住 爲本(127)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
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
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하나니, 자
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를 떠나고 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
이니라. 일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
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미혹하여 스
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러므로 생각 없
음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미혹한 사름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善知識 外離一切相 是無相 但能離相 性體淸淨 [是] 是以無
相爲體 於一切境(鏡)上 不染 名爲無念 於自念(128)上離境
(鏡) [不]不於法上念生 莫百物思 念盡除却 一念 斷 卽[無]
別處受生 學道者 用心 莫不息法意 自錯 尙可 更勸他人 迷不
自見 [迷] 又謗經法 是以立無念爲宗 卽緣迷(名)人 於境(鏡)
上 有念 念上 便起邪(去耶)見 一切塵勞妄念 從此而生(129)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無念)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
이 없으면 생각 없음도 또한 서지 않느니라.
없다 함은 두 모양의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의 본성
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
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
고 아나,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뜻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하였느니라.
然此敎門 立無念爲宗 世人 離見 不起於念 若無有念 無念 亦
不立 無者 無何事 念者 [念]何物 無者 離二相諸塵勞 [念者
念眞如本性] 眞如 是念之體 念(130)是眞如之用 [自]性(姓)起
念 雖卽見聞覺知(之) 不染萬境(鏡)而常自在 維摩經 云 外能
善分別諸法相 內於第一義而不動(131)
*오인돈수(悟人頓修 깨친 이는 단박에 닦음)... 육조는 불지(佛
地)만을 돈오견성(頓悟見性 단박에 깨쳐서 성품을 봄)으로 인정
하였으며, 불지에는 오후점수(悟後漸修 깨친 뒤 점차로 닦음)가
없으므로 오인돈수라고 한 것이다.
*무념위종(無念爲宗 생각 없음로 종을 삼음)... 등각(等覺) 이하
의 모든 중생은 모두 망념이 있으므로[金剛已還의 一切衆生은
皆是有念일새]중생이라 하고, 모든 부처는 다 무념을 얻었으므
로 부처라고 이름하느니라.
*십지(十地).등각(等覺)도 유념(有念 생각이 있음)이요 불지만이
무념(無念 생각이 없음)이니, 견성은 불지무념(佛地無念)이므로
무념위종이라고 한 것이다.
9.좌선(坐禪)
선지식들아, 이 법문 중의 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
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
나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
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만약 깨끗함을 본
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
여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일으켜
깨끗하느니라.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이 생기느니라.
망상은 처소가 없다.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허망된
것임을 알라.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말하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
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되니라.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
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
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와
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
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니라.
善知(諸)識 此法門中 坐(座)禪 元不著心 亦不著淨 亦不言
[不]動 若言看心 心元是妄 妄如幻(幼)故 無所看也 若言看淨
人性(姓) 本淨 爲妄念故 蓋覆眞如 離妄念 本性(姓)淨 不見自
性(姓)本淨 心起看淨 却生淨妄 妄無處所 故知看者 [看] 却
是妄也 淨無形相 却立淨相 言是功夫 作此見者 障(章)自本性
(姓) 却被淨縛 若不動者 [不]見一切人過患 是 性不動 迷
(133)人 自身 不動 開口卽說人是非 與道違背 看心看淨 却是
障道因緣(134)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
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
지럽지 않는 것이 선(禪)이니라.
어떤 것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설
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
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라.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이요 안으
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
(定)하므로 선정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다'하였고, <보살계>에 말씀하시기를 '본래 근원인 자성이 깨끗
하다'고 하였느니라.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아
스스로 지음이 자기 성품인 법신이며, 스스로 행함이 부처님의 행위
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
今記汝 是此法門中 何名坐(座)禪 此法門中 一切無碍 外於一
切境界上 念不起(去)爲坐 [內]見本性(姓)不亂 爲禪 何名爲禪
定 外離(雜)相曰禪 內不亂曰定 外(135)若有相 內性(姓)不亂
本自淨自定 只緣境觸 觸卽亂 離相不亂 卽定 外離相 卽禪 內
[外]不亂 卽定 外禪內定 故名禪定 維摩經 云 卽時(是)豁然
還得本心 菩薩戒 云 本源(須)自性(姓) 淸淨 善知識 見自性
(姓)自淨 自修自作 自性(姓)法身 自行 佛行 自作自成 佛道
(136)
*정.혜를 함께 한 부처의 무념(無念)만이 선정이요 그밖의 것은
모두 번뇌.진로이다.
10.삼신(三身)
선지식들아, 모두 모름지기 자기의 몸으로 모양 없는 계(無相戒)
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
의 삼신불을 보게 하리라.
"나의 색신의 청정법신불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화신
불에 귀의 하오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보신불에 귀의합니다". [이
상 세번 부름]
색신은 집이므로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은 자기의
법성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세 몸의 부처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
는 보지 못하느니라.
선지식들은 들으라. 선지식들에게 말하여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
의 색신에 있는 자기의 법성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하리
라.
善知識 須自體 以(與)受無相戒 一時 逐惠能口道 令善知識
見自三身佛 於自色身 歸依(衣)淸淨法身佛 於自色身 歸依(衣)
千百億化身佛 於自色身 歸依(衣)當來圓滿報身佛 已上三唱
色身 是舍宅 不可言歸 向者三(138)身 在自法性 世人盡有 爲
迷(名)不見 外覓三[身]如來 不見自色身中三性佛 善知識 聽
與(汝)善知識說 令善知識 於(衣)自色身 見自法性 有三身(世)
佛(139)
이 세 몸의 부처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
의 부처라고 하는가?
선지식들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의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
을 행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착한 행동을 닦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속에 있어서 자성은 항상 깨끗함을 알
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
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지헤의 바람이 불어 구름
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성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세상 사람의 자성이 깨끗함도 맑은 하늘과 같아서, 혜(惠)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쳐 밝아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나니,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
을 청정법신이라 이름하느니라.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
것을 이름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 하느니라.
此三身佛 從性上生 何名淸淨[法]身佛 善知識 世人 性 本自
淨 萬法 在自性(姓) 思量一切[惡]事 卽行於(衣)惡 思量一切
善事 便修於善行 知如是一切法 盡在自性(姓) 自性(姓) 常淸
淨 日月常明(名) 只爲雲覆蓋 上明(名)下暗 不能了見日月星
(西)辰 忽遇慧(惠)風 吹散 卷盡雲霧 萬像森(參)羅 一時皆現
世人性淨 猶如淸天 惠如日 智如月 智惠常明(名) 於外著境(看
敬) 妄念浮雲 蓋覆 自性(姓) 不能明 故遇善知識 開(140)眞法
吹却迷(名)妄 內外明(名)徹 於自性(姓)中 萬法 皆見 一切法
自在性(姓) 名爲淸淨法身 自歸依(衣)者除不善行 是名歸依
(衣)(141)
어떤 것을 천백억화신불이라고 하는가?
생각하지 않으면 자성은 곧 비어 고요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
고 착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고 독과 해침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윗세계
가 되고 우치함은 변화하여 아랫나라가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한다.
한 생각이 착하면 지혜가 곧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자성의
화신이라하니라.
何名爲千百億化身佛 不思量 性卽空寂 思量 卽是自化 思量惡
法 化爲地獄 思量善法 化爲天堂 毒害(142)
化爲畜生 慈悲 化爲菩薩 智惠 化爲上界 愚癡 化爲下方 自性
(姓)變化甚多(名) 迷人 自不知見 一念善 知惠卽生 <此名自
性化身>(143)
어떤 것을 원만한 보신불이라고 하는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
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리고 하는니라.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착함을 물리쳐 그치게 하고 한 생
각의 착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나니, 비롯함이 없는 때
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착함을 보신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법신을 좇아 생각함이 곧 화신이요, 순간순간의 생각마다 착한 것
이 곧 보신이요, 스스로 깨쳐 스스로 닦음이 곧 돌아가 의지하는 것
이다. 가죽과 살은 색신이며 집으로 귀의할 곳이 아니다. 다만 세 몸
을 깨치면 큰 뜻을 아느니라.
<何名圓滿報身佛> 一燈 能除千年闇 一智能滅萬年愚 莫思向
前 常思於後 常後念善 名爲報身 一念惡報 却千年善止(心)
一念善報 却千年惡滅 無始(常)已來 後念善 名爲報身 從法身
思量 卽是化身 念念善 卽是報身 自悟自修 卽名歸依(衣)也
皮肉 是色身 是舍宅 不在歸依(衣)也 但悟三身 卽識大意
(億)(144)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사무쳐 밝음)은 묘각(妙覺)이니 불
교의 구경(究竟)이다. '시방세계 및 몸과 마음이 깨끗한 유리처
럼, 내외명철은 식음(識陰)이 다하였다고 이름하나니, 부처님의
묘장엄해에 들어가 보리를 원만케 하니라[十方世界와 及身心이
如吠瑠璃하야 內外明徹을 名識陰盡이니 入於如來妙莊嚴海하야
圓滿菩提니라 - 楞嚴經 十].'
'깨끗한 유리 속에 밝은 달을 담은 것 같으면 문득 지위를 초월
하여 괴해(果海)에 들어가 무소득에 돌아가나니, 바야흐로 구경
극칙이라고 이름하느니라[如淨瑠璃內含寶月하면 便超越地位하
야 入於果海하야 歸無所得이니 方名究竟極則이니라 - 山楞巖
通議 十]'
'만약에 식음이 다하면 바아흐로 지위를 넘어 얻는 바가 없이
구경을 원만성취하여 깨끗한 유리에 보배달을 담음과 같으니라
[若得識陰盡하면 方超地位하야 了無所得하야 究竟圓成하야 如
淨瑠璃內含寶月하니라 - 宗鏡錄 八十八].'
'수정영락은 안팎이 사무쳐 밝아서 묘각에 항상 머무나니, 일체
지혜의 지위라고 이름하느니라[水晶瓔珞은 內外明徹하야 妙覺
에 常住하니 名一切智地니라 - 瓔珞經 上].'
*육조스님은 내외명철을 청정법신이라고 하였다. 이는 불교의
구경인 원교불상(圓敎佛相 원교의 부처님 모습)이다.
"묘각의 지위에 들어가서 청정법신을 성취하니, 원교불상이니라
[入妙覺位하야 成淸淨法身하니 圓敎佛相也니라 - 天台四敎議
圓敎章 一].'
*조사스님의 말씀을 구차하게 교리에 배합할 필요가 없다고 생
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육조스님이 강조하신 내외명철은 불
교의 구경극칙인 원교묘각(圓敎妙覺)이다. 육조스님은 내외명철
이라야 식심견성(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이라고 하였
으니, 종문의 표방(標榜)인 견성(見性)은 불교의 구경묘각 즉 성
불(究竟妙覺卽成佛)임이 분명하다.
11.사원(四願)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에 귀의하여 마쳤으니, 선지식들과 더불
어 네 가지 넓고 큰 원을 발하리라. 선지식들아, 다 함께 혜능을 따
라 말하라.
무량한 중생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 없는 불도를 이루기를 서원합니다. [이상 세번 부름]
선지식들아,
무량한 중생을 맹세코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전지식들을 제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중생을 각기 자기의 몸에 있는 자기의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자기의 성품으로 스
스로 제도한다고 하는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와 번뇌와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의
깨달음의 성품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므로 바른 생각으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이미 바른 생각인 반야의 지혜를 깨쳐서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
버리면 중생을 저마다 스스로 제도한 것이니라, 삿됨이 오면 바름으
로 제도하고 미혹함이 오면 깨침으로 제도하고, 어리석음이 오면 지
혜로 제도하고 악함이 오면 착함으로 제도하며 번뇌가 오면 보리로
제도하나니, 이렇게 제도함을 진실한 제도라고 하느니라.
무량한 번뇌를 맹세코 다 끊는다 함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
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량한 법문을 맹세코 다 배운다 함은 위 없
는 바른 법을 배우는 것이다. 위 없는 불도(佛道)를 맹세코 이룬다
함은 항상 마음을 낮추는 행동으로 일체를 공격하며 미혹한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가 생겨 미망함을 없애는 것이다. 곧 스스
로 깨쳐 불도를 이루어 맹세코 바라는 힘(誓願力)을 행하는 것이니
라.
今旣自歸依三身佛已 與善知識 發四弘大願 善知識 一時 逐惠
能道 衆生無邊誓願度 煩惱無邊誓願斷 法門無邊誓願學 無
上佛道誓願成 善知識 衆生無邊誓願道 不是惠能 度善知識 心
中衆生 各於自身 自性(姓)自度 何名自性(姓)自度 自色身中
邪見煩惱 愚癡迷(名)妄 自有本覺性 將正見度 旣悟正見 般若
之智 除却愚癡迷妄 衆生 各各自度 邪來(見) 正度 迷來 悟度
愚來智度 惡來善度 煩惱來菩提(薩)度 如是度者 是名眞度 煩
惱無邊誓願斷 自心 除虛妄 法門無邊誓願學 學無上正法 無上
佛道誓願成 常下心行 恭敬一切 遠離迷執 覺知生般若 除却迷
妄 卽自悟佛道成 行誓願(148)力
12. 참회(懺悔)
지금 이미 사홍서원 세우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에게 '무상참회
(無相懺悔:모양 없는 참회)'를 주어서 삼세의 조장을 없애게 하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
다 우치와 미혹에 물들지 않고, 지난 날의 나쁜 행동을 일시에 영원
히 끊어서 자기의 성품에서 없애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니라.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지난 날의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없애도록 하라.
영원히 끊음을 이름하여 자성의 참회라고 한다. 과거의 생각, 미
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아서 지난 날
의 질투하는 마음도 없애도록 하라. 자기의 성품에서 만약 없애버리
면 이것이 곧 참회이니라." [이상 세번 부름]
선지식들아, 무엇을 이름하여 참회라고 하는가?
참(懺)이라고 하는 것은 종신토록 잘못을 짓지 않는 것이요, 회
(悔)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아는 것이다. 나쁜 죄업을 항상
마음에서 버리지 않으면 모든 부처님 앞에서 입으로 말하여도 이익
이 없느니라. 나의 이 법문 가운데는 영원히 끊어서 짓지 않음을 이
름하여 참회라 하느니라.
今旣發四弘誓願訖 與善知識 無相懺悔 <滅>三世罪障 大師言
善知識 前念後念及今念 念<念>不被愚迷染 從前惡行 一時
<永斷> 自性(姓) 若除 卽是懺悔 前念後念今念 念念<不>被
愚癡染 除却從前矯�x心 永斷名爲自性懺 前念後念及<今念>
念念不被疸妬(疸疾)染(151)
除却從前疾妬(垢)心 自性 若除 卽是懺 已上三唱 善知識 何
名懺悔 <懺>者 終身不作 悔者 知於前非 惡業 恒不離心 諸
佛前 口說無益 我此法門中 永斷不作 名爲懺悔(152)
*견성을하여 업식종자(業識種子)가 전부 소멸하여야만 참다
운 참회이다.
13. 삼귀(三歸)
지금 이미 참회하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무상삼귀의계
(無相三歸依戒:무양이 없는 삼귀의계)'를 주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깨달음의 양족존께 귀의하오며, 바름의 이욕존께 귀
의하오며, 깨끗함의 중중존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
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바라건대 자성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하라.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의삽보에게 귀의하
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이며 승이란 깨끗함이니
라."
今旣懺悔已 與善知識 授(受)無相三歸依戒 大師言 善知(智)識
歸依(衣)覺兩足尊 歸依(衣)正離欲<尊> 歸依(衣)淨衆中尊 從
今已後 稱佛爲師 更不歸依(衣)餘邪迷(名)外道 願自<性>三寶
慈悲證(燈)明(名) 善知識 惠能 勸[善]善知識 歸依(衣)<自
性>三寶 佛者 覺也 法者 正也 僧者 淨也(154)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이 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는 것을 양족
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곧 애
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이라고 하느니라. 범부는 이것을 알
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부처님에
게 귀의한다고 할진대는 부처가 어느 곳에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
지 못한다면 곧 귀의할 바가 없느니라. 이미 귀의할 바가 없으면 그
말이란 도리어 허망될 뿐이니라.
선지식들아, 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아
니하면 돌아갈 바가 없느니라.
自心 歸依覺 邪迷(名)不生 少欲知足 離財離色 名兩足尊 自
心 歸正 念念無邪故 卽無愛著 以無愛著 名離欲尊 自心 歸淨
一切塵勞妄念 雖在自性(姓) 自性(姓) 不染著 名衆中尊 凡夫
<不>解 從日至日 受(155)三歸依(衣)戒 若言歸佛 佛在何處
若不見佛 卽無所歸 旣無所歸 言却是妄 善知識 各自觀察 莫
錯用意 經中 只卽言自歸依佛 自性(姓) 不歸 無所歸處(156)
14. 성공(性空)
지금 이미 삼보에게 스스로 귀의하여 모두를 지극한 마음들일 것
이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리라.
선지식들아, 비록 마하반야바리밀법을 생각은 하나 알지 못하므로
혜능이 설명하여 주리니, 각각 잘 들으라.
마하반야바라밀이란 서쪽 나라의 범어이다. 당나라 말로는 '큰 지
혜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라. 이 법은 모름지기 실행할 것이
요 입으로 외우는데 있지 않다. 입으로 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꼭
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나, 닥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어떤 것을 마하라고 하는가?
마하란 큰 것이다. 마음의 한량이 넓고 커서 허공과 같으나 빈 마
음으로 앉아 있지 말라. 곧 무기공에 떨어지느니라.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과 대지산하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
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다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자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今旣自歸依(衣)三寶 各各至心 與善知識 說摩訶般若波羅蜜
法 善知識 雖念 不解 惠能與說 各各聽(157) 摩訶般若波羅蜜
者 西國梵語 唐言 大智惠彼岸到 此法 須行 不在口<念> 口
念不行 如<幻>如化 修行者 法身 與佛 等也 何名摩訶 摩訶
者 是大 心量 廣大 猶如虛空 莫空(定)心坐(座) 卽落無記(旣)
空 <虛空> 能含日月星辰 大地山河(何) 一切草木 惡人善人
惡法善法 天堂地獄 盡在空中 世人性空 亦復如是(158)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
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것이 곧 큰 실행이니라.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 있는 이는 마음으로 행하느니
라. 또한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워 생각하지 않은 것을 크다고 하
나, 이도 또한 옳지 않느니라.
마음의 한량이 넓고 크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곧 작은 것이
다. 입으로만 공연히 말하면서 이 행을 닦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性含萬法 是大 萬法 盡是自性(姓) 見一切人及非人 惡之(知)
與善 惡法善法 盡皆不捨 不可染著 猶(由)(159)如虛空 名之爲
大 此是摩訶行 迷人 口念 智者 心<行> 又有迷(名)人 空心
不思 名之爲大 此亦不是 心量 <廣>大 不行 是小(少) 莫口
空說 不修此行 非我弟子(160)
15. 반야(般若)
어떤 것을 반야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다.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이라고 하느니라.
한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거늘,
마음 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느니
라.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범음으로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라.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나니, 이는 곧 이 언덕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언덕에 이른다
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느니라.
何名般若 般若 是智惠 一<切>時中 念念不愚 常行智惠 卽名
般若行 一念愚 卽般若絶 一念智 卽般若生 心中常愚 <自言>
我修 般若 無形相 智惠性 卽是 何名波羅蜜 此是西國梵音 言
彼岸到 解義 離生滅 著境(竟) 生滅起(去) 如水有波浪 卽是於
此岸 離境 無生滅 如水承長流 故卽名到彼岸 故名波羅蜜
(161)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으로 행한다.
생각할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곧 진실로 있는 것
이 아니다.
생각 생각마다 행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있다고 하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반야의 법을 깨친 것이며 반야의 행을 닦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곧 범부요 한생각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보리니,
앞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 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
처니라.
선지식들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
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다 이 가
운데로부터 나와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르러 번뇌와 진로를 쳐부
수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니라.
가장 으뜸임을 찬탕하여 최상승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내왕 또한 없나니, 이는 정과 혜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않음이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정.혜로 삼느니라.
迷人 口念 智者 心行 當念時有妄 有妄 卽非眞有 念念若行
是名眞有 悟此法者 悟般若法 修般若行 不修卽凡 一念修行
法身 等佛 善知識 卽煩惱是菩提 捉前念 迷卽凡 後念 悟卽佛
善知識 摩訶般若波羅蜜 最尊最上第一 無住無去無來 三世諸
佛 從中出 將大智(知)惠)到彼岸 打破五陰煩惱塵勞 最尊最上
第一 讚最上 最上乘法 修行 定成佛 無去無住無來住 是 定惠
等 不染一切法 三世諸佛 從中變三毒 爲戒定惠(163)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팔만 사천의 지혜를 좇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팔만 사천의 질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라.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
나니 이것이 곧 진여의 성품이다.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니도 않나니,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느니라.
善知識 我此法門 從八萬四千智惠 何以故 爲世有八萬四千塵
勞 若無塵勞 般若常在 不離自性(姓)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
憶(億)無著 莫起(去)�x妄 卽自是眞如性(姓) 用智(知)惠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姓)成佛道(165)
*오즉불(悟卽佛 깨치면 곧 부처)... 육조는 불지(佛地) 이외는
깨달음[悟]으로 인정치 않는다.
*최상최존(最上最尊 가장 으뜸이고 가장 높음)... 육조가 설하신
법문의 전체를 두고 말함이다.
16. 근기(根機)
선지식들아, 만약 매우 깊은 법의 세계에 들고자 하고 반야삼매에
들고자하는 사람은 바르게 반야바라밀의 행을 닦을 것이며 오로지
<금강반야바라밀경>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반야삼
매에 들어가느니라.
이 사람의 공덕이 한량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경에서 분명히
찬탄하였으니, 능히 다 갖추어 설명하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최상승
법으로서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근기와 지혜가 작은 사람이 이 법을 들으면 마음에 믿음이 나지 않
나니, 무엇 때문인가?
비유하면 마치 큰 용이 큰 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염부제에 비가
내리면 풀잎이 떠다니듯 하고, 만약 큰비가 큰 바다에 내리면 불지
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 대승의 사람은 <금강경> 설하
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치고 안다.
그러므로 본래 성품이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스스
로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서 문자를 빌리지 않음을 알라.
비유컨데, 그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 원래 용왕이
강과 바다 가운데서 이 물을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모든 초목
과 모든 유정. 무정을 다 윤택하게 하고, 그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다시 큰 바다에 들어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한 몸으로 합
쳐지는 것과 같나니,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善知識 若欲入甚深法界 入般若三昧者 直修般若波羅蜜行 但
持金剛般若波羅蜜經一卷 卽得見性 入般若三昧 當知此人功德
無量 經中 分明(名)讚嘆 不能具說 此是最上乘法 爲大智上根
人說 小(少)根智人 若聞<此>法 心不生信 何以故 譬如大龍
若下大雨 雨於(衣)閻浮提 如漂草葉 若下大雨 雨於(放)大海
不增不減 若大乘者 聞說金剛經 心開悟解 故知本性 自有般若
之智 自用智(知)惠觀照 不假文字 譬如其雨水不從天(無)有 元
是龍王 於江海中 將身引此水 令一切衆生 一切草木 一切有情
無情 悉皆蒙(像)潤 諸水衆流 却入大海 海納衆水 合爲一體
衆生本性 般若之智 亦復(167)如是
근기가 작은 사람은 단박에 깨치는 이 가르침을 들으면, 마치 근
성이 작은 대지의 초목이 큰 비를 맞고 모두 다 저절로 거꾸러져서
자라지 못함과 같나니, 작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반야의 지혜가 있는 점은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또한 차별이 없
거늘,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곧 깨치지 못하는가?
삿된 소견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
는 것과 같다.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
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
닫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이같이 근기가 작은 사람일지라도 단박에 깨치는 가르침
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자
기의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 번뇌, 진로의 중
생이 모두 다 당장에 깨치느니라. 마치 큰 바다가 모든 물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작은 물과 큰 물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곧 자성을 보면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며 오고감에 자유로워 집착
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어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나니, 마음으로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경>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小(少)根之人 聞說此頓敎 猶如大地草木根性自小(少)(169)者
若被大雨一沃 悉皆自倒(到) 不能增長 小(少)根之人 亦復如是
有般若之智 [之] 與大智之人 亦無差別 因何聞法卽不悟 緣邪
見障重 煩惱根深 猶如大雲 蓋覆於日 不得風吹 日無能現 般
若之智 亦無大小 爲一切衆生 自有迷心 外修覓佛 未(來)悟自
性 卽是小根人 聞其頓敎 不信外修 但於自心 令自本性 常起
正見 煩惱塵勞衆生 當時盡悟 猶如大海納於衆流 小水大水合
爲一體 卽是見性 內外不住 來去自由 能除執心 通達無碍 心
修此行 卽與般若波羅蜜經 本無差別(170)
*반야삼매(般若三昧)... 식심견성하면 반야삼매라고 육조는
말했다.
17. 견성(見性)
모든 경서 및 문자와 소승의 대승과 십이부의 경전이 다 사람으
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나니,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세운 것이니라. 만약 내가 없다면 지헤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
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요, 일체 경서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
야 하느니라.
사람 가운데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기 때문에,
어리석으면 작은 사람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 사람이 되느니라. 미혹
한 사람은 지혜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성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
게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를 가진 사람
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
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말씀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이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나니, 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一切經書及文字 小大二乘 十二部經 皆因<人>置 因智惠性故
故[然]能建立 我若無 智人 一切萬法 本無不(172)有 故知萬
法 本因(從)人興 一切經書因人說有 緣在人中有[有]愚有智
愚爲小(少)故 智爲大人 迷人問(問迷人)於智者 智人與愚人說
法 令使愚者 悟解心(深)開 迷人 若悟心開 與大智人無別 故
知不悟 卽[是]佛是衆生 一念若悟 卽衆生[不]是佛 故知一切
萬法 盡在自身心中 何不從於自心 頓現眞如本性(姓) 菩薩戒
經 云 我本源(願)自性(姓) 淸淨 識心見性 自成佛道 卽時豁然
還得本心(173)
*오즉시불(悟卽是佛 깨치면 곧 부처)... 거듭 말하건대, 육조
의 깨달음은 불지(佛地)뿐이요 십지.등각은 깨달은 경지가
아니다.
18. 돈오(頓悟)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화상의 회하에서 한 번 듣자 그 말끝
에 크게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으니라.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쳐게
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지식들을 찾
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니라.
어떤 것을 큰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최상법이 바른 길을 곧게 가리키는 것임을 아는 것이 큰 선지식
이며 큰 인연이다. 이는 이른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
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느니라,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볼지니라.
만약 자기의 마음의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
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
야의 관조를 일으키라.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니 이것
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라, 한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아느니라.
善知識 我於忍和尙處 一聞 言下 大悟(伍) 頓見眞如本性 是
故將此(汝)敎法 流行後代 令(今)學道者 頓(175)悟(伍)菩提 各
自觀心 令自本性 頓悟 若<不>能自悟者 須覓大善知識示導
(亦道) 見性(姓) 何名大善知<識> 解最上乘法 直示正路 是大
善知識 是大因緣 所謂(爲)化導(道)令得見佛 一切善法 皆因大
善知識能發起 故三世諸佛 十二部經 云在人性中 本自具有 不
能自性(姓)悟 須得善知識示導(道) 見性 若自悟者 不假外善知
識 若取外求善知識 望得解脫(說) 無有是處 識自心內善知識
卽得解<脫> 若自心 邪迷 妄念顚倒 外善知識 卽有敎授 [汝
若]不得自悟 當起般若觀照 刹那間 妄念 俱滅 卽是自眞正善
知識 一悟卽知佛也(176)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
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
이 곧 무념이니라.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면, 모든
곳에 두루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
이 하여 여섯 도적들로 하여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이라고 하느니라.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이
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
에 이르느니라.
自性心地 以智惠觀照 內外明(名)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
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178)昧卽是無念 何名
無念 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 從六門走出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莫百物不思 常(當)令念絶
卽是法縛(傳) 卽名邊見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
諸佛境界 悟無念頓法者 至佛位地(179)
*돈견본성(頓見本性 본래 성품을 단박에 봄)... 내외명철하면
이것이 곧 식심(識心 마음을 앎).해탈.무념이고, 무념은 곧
불지라 하였다. 내외명철은 묘각이며, 식심은 견성(見性 성
품을 봄)이므로, 견성하면 묘각해탈이요 불지무념이다. 그러
므로 견성하면 곧 성불인 것이다.
'곧 불성을 보아서 아뇩다라삼보리를 얻느니라[卽見佛性하야
得阿 多羅三 三菩提니라 - 涅槃經 二]'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불성을 보느니라[必得
阿 多羅三 三菩提하야 得見佛性이니라 - 涅槃經 二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각 곧 성불이니, 위의 글들은
성불과 견성이 동일한 내용임을 말한다.
'지위가 십지인 보상이라 하여도 오히려 불성을 ㅂ게 보지
못하느니라[菩薩이 位階十地하여도 尙未明了知見佛性이니라
- 涅槃經 八]'
'모든 부처님은 정.혜를 함께 함으로써 불성을 밝게 보느니
라[諸佛世尊은 定慧等故로 明見佛性이니라 - 涅槃經 二十
八].'
'보살의 지위가 다하여 미세한 망념을 멀리 떠남으로써 심
성을 보나니, 구경각이라고 이름하느니라[菩薩地盡하야 以遠
離微細念故로 得見心性이니 名究竟覺이니라 - 起信論].'
'십지의 성인들이 법문을 설하기를 구름 이는 듯하고 비오
듯 하여도, 견성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운 것과 같으니라[十
地聖人이 說法은 如雲如雨하야도 見性은 如隔羅穀이니라 -
雲門 傳燈錄 十九].'
'견성하면 곧 부처가 되느니라[見性하면 卽成如來니라 - 宗
鏡錄 四十四].]
*이상과 같이 부처님과 조사들이 한결같이 견성이 곧 성불
이라고 하였으니, 육조스님 말씀과 같다. 그리고 교가(敎家)
의 권위인 현수(賢首)도 그의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에
서 구경불지(究竟佛地)만이 견성이라고 하였으니, '견성이
곧 성불'임은 선(禪).교(敎)를 통한 근본 철칙이다.
19.멸죄(滅罪)
선지식들아, 뒷 세상에 나의 법을 얻는 이는 항상 법신이 너희의
좌우를 떠나지 않음을 보리라.
선지식들아, 이 돈교의 법문을 가지고 같이 보고 같이 행하여 소
원을 세워받아 지니되 부처님 섬기듯이 함으로써, 종신토록 받아 지
녀 물러나지 않는 사람은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고자 하느니라.
그러나 전하고 받을 때에는 모름지기 예부터 말없이 부촉하여 큰
서원을 세워서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곧 모름지기 분부한 것이
니라.
만약 견해가 같지 않거나 뜻과 원이 없다면 곳곳마다 망령되어
선전하여 저 앞사람을 손상케 하지 말라. 마침내 이익이 없느니라.
만약 만나는 사람이 알지 못하여 이 법문을 업신여기면 백겁 만겁
천생토록 부처의 종자를 끊게 되리라.
善知識 後代 得吾(悟)法者 常見吾法身 不離汝左右 善知識
將此頓敎法門 同見同行 發願受持 如事(是)佛故 終身受持而
不退者 欲入聖位 然須傳(縛)受時 從上已來 然而付於法 發
大誓願 不退菩提 卽須分付 若不同見解 無有志願 在在處處
勿妄宣傳 損彼前人 究( )竟無益 若愚人不解 此法門 百
劫萬劫千生 斷佛種性(183)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나의 '모양 없는 게송'을 들어라. 너희 미혹한 사람
들의 죄를 없일 것이니 또한 '죄를 없애는 게송(滅罪頌)'이라고 하
느니라."
게송에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은 복은 닦고 도는 닦지 않으면서
복을 닦음이 곧 도라고 말한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끈이 없으나
마음 속 삼업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뒷 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가 따르지 않으리오
만약 마음 속에서 죄의 반연 없앨 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니라.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치면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행하여 죄 없어지리.
도를 배우는 사람이 능히 스스로 보면
곧 깨친 사람과 더불어 같도다.
오조께서 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을 전하심은
배우는 사람이 같은 한 몸 되기를 바라서이다.
만약 장차 본래의 몸을 찾고자 한다면
삼독의 나쁜 인연을 마음 속에서 씻어 버려라.
힘써 도를 닦아 유유히 지내지 말라.
어느덧 헛되이 지나 한세상 끝나리니
만약 대승의 단박 깨치는 법을 만났거든
정성들여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라.
대사께서 법을 설하여 마치시니, 위사군과 관료와 스님들과 도교
인과 속인들의 찬탄하는 말이 끊이지 않고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이
다'라고 하였다.
大師言 善知識 聽吾(悟)說無相頌(訟) 令汝迷(名)者罪滅 亦名
滅罪頌 頌曰
愚人修福不修道 謂言修福而是<道>.
布施供養福無邊 心中三業元來在.
若將修福欲滅罪 後世得福罪無造.
若解向心除罪緣 各自性(世)中眞懺悔(海).
若悟大乘眞懺悔(海) 除邪行正造無罪.
學道之人能自觀 卽與悟人同一例.
大師令傳此頓敎 願學之人同一體.
若欲當來覓本身 三毒惡緣心中洗.(185)
努力修道莫悠悠 忽然虛度一世休.
若遇大乘頓敎法 虔誠合掌志心求.
大師說法了 韋使君官僚僧衆道俗 讚言無盡 昔所未聞
(186)
*동견동행(同見同行 같이 보고 같이 행함)...같은 아래 글에서
'만약 견해가 같지 않으면[若不同見解]'이라고 함과 같이 '견
해가 같음'을 말한다.
*대승돈교(大乘頓敎)...삼승(三乘) 가운데의 대승이 아니요 최
상최존(最上崔尊)의 표현이며, 최상최존의 돈오교법(頓悟敎法)
을 말한 것이다.
19.공덕(功德)
위사군이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께서 법을 설하심은 실로 부사의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조
그마한 의심이 있어서 큰스님께서 여쭙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큰스
님께서는 대자대비로 제자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의심이 있거든 물으라. 어찌 두 번 세 번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위사군이 물었다.
"대사께서 설하신 법은 서쪽 나라에서 오신 제일조 달마조사의
종지가 아닙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제자가 듣자오니 달마대사께서 양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무제가
달마대사께 묻기를, '짐이 한평생 동안 절을 짓고 보시를 하며 공양
을 올렸는데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사자 달마대사께서 '전혀 공덕
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시니, 무제는 불쾌하게 여겨 마침내 달마를
나라 받으로 내보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은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삿된 길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모른 것이니라."
使君 禮拜 自言 和尙說法 實不思議 弟子嘗(當)有少疑 欲問
(聞)和尙 望[意]和尙 大慈大悲 爲弟子說 大師言 有疑(議)卽
問(聞) 何須再三 使君問(聞) 法 可不[不]是西國第一祖達磨祖
師宗旨 大師言是 弟子見說 達磨大師化(伐)梁武帝(諦) 問達磨
朕 一生已(未)來 造寺布施供養 有[有]功德否 達磨答言 無
功(189)德 武帝 遂遣達磨 出境 未審此言 請和尙說 六
祖言 實無功德 使君 [朕] 勿疑達磨大師言 武帝著邪道 不識
正法(190)
위사군이 물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육조도사께서 말씀하셨다.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닦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는 말라. 공덕은 법신에 있고 복밭에 있지 않
느니라. 자기의 법성에 공덕이 있나니, 견성이 곧 공(功)이요, 평등하
고 곧음이 곧 덕(德)이니라.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
만약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아상(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
덕이 없고 자성은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느니라.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곧 가볍지 않느니
라. 그러므로 항상 공격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곧 공이요, 스스
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덕이니라. 공덕은 자기의 마음으로 짓는 것
이다. <이같이> 복과 공덕이 다르거늘 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
한 것이요, 달마대사께서 허물 있는 것이 아니니라."
使君 問 何以無功德 和尙 言 造寺布施供養 只是修福 不可將
福 以爲功德 <功德> 在法身 非在於福田 自法性 有功德
<見性 是功> 平直是德 <內見>佛性 外行恭敬 若輕一切人
吾(悟)我不斷 卽自無功德 自性虛妄 法身 無功德 念念德行
平等直(眞)心 德卽不輕 常行於敬 自修身 卽功 自修[身]心
卽德 功德 自心作 福與功德別 武帝不識正理 非祖大師有過
(192)
*견성시공(見性是空 견성이 공임)...참다운 공덕은 오직 견
성 뿐이다.
21.서방(西方)
위사군이 예배하고 또 물었다.
"제자가 보오니 스님과 도교인과 속인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생각
하면서 서쪽 나라에 가서 자기를 바랍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
씀해 주십시오.저기에 날 수가 있습니까? 바라건대 의심을 풀어 주
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사군은 들으라. 혜능이 말하여 주리라. 세존께서 사위국에 계시
면서 서방정토에로 인도하여 교화해 말씀하셨느니라. 경에 분명히
말씀하기를 '여기서 멀지 않다'고 하였다. 다만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멀다 하고,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지혜가 높은 사람 때
문이다.
사람에는 자연히 두 가지가 있으나 법은 그렇지 않다. 미혹함과
깨달음이 달라서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을 뿐이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곳에 나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
이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땅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느니라.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
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허물이 있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가서 나기를 원하나 동방과 서방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다
한 가지니라.
다만 마음에 깨끗치 않음이 없으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마음에 깨끗치 아니한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하여 왕생하고자 하여도
이르기 어렵느니라. 십악(十惡)을 제거하면 곧 십만 리를 가고, 팔사
(八邪)가 없으면 곧 팔천 리를 지난 것이다. 다만 곧은 마음을 행하
면 도달하는 것은 손가락 퉁기는 것과 같느니라.
사군아, 다만 십선(十善)을 행하라. 어찌 새삼스럽게 왕생하기를
바랄 것인가. 십악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이하
겠는가.
만약 남(生)이 없는 돈법(頓法)을 깨치면 서방정토를 찰나에 볼
것이요, 만약 돈교의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염불을 하여도 왕생할
길이 멀거니, 어떻게 도달하겠는가?"
使君 禮拜 又問 弟子見僧道俗 常念阿彌陀(大)佛 願往生西方
請和尙 說 得(德)生彼否 望爲破疑 大師言 使君 聽 惠能 與
說 世尊 在舍衛國 說西方引化 經文 分明 去此不遠 只爲下根
說遠(近) 說近(遠) 只緣上智 人自兩(雨)種(重) 法無不<同>
迷(名)悟有殊 見有遲疾 迷人 念佛生彼 悟者 自淨其心(194)
所以佛言 隨其心淨 則佛土淨 使君 東方 但淨心 無罪 西方
心不淨 有愆 迷人 願生 東方西方(者) 所在處 皆一種 心但
無不淨 西方 去此不遠 心起不淨之心 念佛往生難到 除十惡
卽行十萬 無八邪 卽過八千 但行直(眞)心 到如彈(禪)指 使君
但行十善 何須更願往生 不斷十惡之心 何佛 卽來迎請 若悟無
生頓法 見西方 只在刹那 不悟]頓敎大乘 念佛 往生路遙 如何
得達(195)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혜능이 사군을 위하여 서쪽 나라를 찰나 사이에 옮겨 눈앞에 바
로 보게 하리니
보기를 바라는가?"
위사군이 예배하며 말하였다.
"만약 여기서 볼 수 있다면 하필 가서 나겠습니까. 원컨대 스님께
서 자비로써 서쪽 나라를 보여 주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문득 서쪽 나라를 보아 의심이 없을 터이니 당장 흩어져라."
대중들이 놀라 무슨 일인지 모르자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대중은 정신 차리고 들으라. 세상 사람의 자기 색신은 성(城)이
요 눈.귀.코.혀.몸은 곧 성의 문이니 밖으로 다섯 문이 있고 안으로
뜻의 문이 있다. 마음은 곧 땅이요 성품은 곧 왕(王)이니 성품이 있
으면 왕이 잇고 성품이 가매 왕은 없느니라. 성품이 있으매 몸과 마
음이 있고 성품이 가매 몸과 마음이 무너지느니라.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
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
생이 곧 부처니라.
자비는 곧 관음이요 희사는 세지라고 부르며, 능희 깨끗함은 석가
요 평등하고 곧음은 미륵이니라. 인아상은 수미요 삿된 마음은 큰
바다이며 번뇌는 파랑이요 독한 마음은 악한 용이면 진로는 고기와
자라요 허망함은 곧 귀신이며 삼독은 곧 지옥이요 어리석음은 곧 짐
승이며 십선은 천당이니라.
인아상이 없으면 수미산이 저절로 거꾸러지고 삿된 마음을 없애
면 바닷물이 마르며 번뇌가 없으면 파랑이 없어지고 독해(毒害)를
제거하면 고기와 용이 없어지느니라."
六祖言 惠能 與使君 移西方刹那間(問) 目(日)前便見 使君 願
見否 使君 禮拜 若此得見 何]須往生 願和尙 慈悲 爲現西方
大善 大師言 唐見西方無疑 卽散 大衆 愕然 莫知何]事(是) 大
師曰 大衆 大衆 作意聽 世人 自色身 是城 眼耳鼻舌身 卽是
城門 外有五(六)門 內有意門 心卽是地 性卽是王 性在王在
性去王無 性在身心存 性去身<心>壞 佛是自性作 莫(198)向
身<外>求 自性 迷 佛卽衆生 自性 悟 衆生 卽是佛 慈悲 卽
是觀音 喜捨 名爲勢至 能淨 是釋迦 平直(眞) 是彌勒 人我
是須彌 邪心 是大海 煩惱 是波浪 毒心 是惡龍 塵勞 是魚鱉
虛妄 卽是神鬼 三毒 卽是地獄 愚癡 卽是畜生 十善 是天堂
無人我(我無人) 須彌自倒 除邪心 海水竭 煩惱無 波浪滅 毒
害除 魚龍絶(199)
자기 마음의 땅위에 깨달은 성품(覺性)의 부처가 큰 지혜를 놓아
서 그 광명이 비추어 여섯 문이 청정하게 되고 욕계의 모든 여섯 하
늘들을 비추어 부수고, 아래로 비추어 삼독을 제거하면 지옥이 일시
에 사라지고 안팎으로 사무쳐 밝으면 서쪽 나라와 다르지 않다. 그
러므로 이 수행을 닦지 아니하고 어찌 피안(彼岸)에 이르겠는가.
법문을 들은 법좌(法座) 아래서는 찬탄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
으니, 응당 미혹한 사람도 문득 밝게 볼 수 있었다. 위사군이 예배하
며 찬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널리 원하옵나니, 법계의 중생으로
이 법을 듣는 이는 모두 일시에 깨쳐지이다."
自心地上 覺性如來 放(施)大智慧 光明 照耀 六門(201) 淸淨
照破(波)六欲諸天 下照 三毒 若除 地獄 一時消滅 內外明徹
不異西方 不作此修 如何到彼 座下聞(問)說 讚聲 徹天 應是
迷人 了(人)然便見 使君 禮拜 讚言善哉善哉 普願法界衆生
聞者一時悟解(202)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서방정토와 다르지 않다[內外明徹不
異西方]...내외명철한 제불의 정토 이외에는 모두 꿈 속의
장엄인 것이다.
22.수행(修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만약 수행하기를 바람다면 세속에서도 가능한 것이
니, 절에 있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으면 서
쪽 나라 사람의 마음이 악함과 같고,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하면 동
쪽 나라 사람이 착함을 닦는 것과 같다. 오직 바라건대, 자기 스스로
깨끗함을 닦으라. 그러면 이것이 곧 서쪽 나라이니라."
위사군이 물었다.
"화상(和尙)이시여,세속에 있으면서는 어떻게 닦습니까? 원하오니
가르쳐 주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혜능이 도속(道俗)을 위하여 '모양없는 게송'을 지어
주리니 다들 외워 가지라.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항상 혜능과
더불어 한 곳에 있음과 다름이 없느니라."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 통달함이여!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나니
오직 돈교의 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취를 부수는도다.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으나
미혹함과 깨침에 더디고 빠름이 있나니
만약 돈교의 법을 배우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하지 않느니라.
설명하자면 비록 일만 가지이나
그 낱낱을 합하면 다시 하늘로 돌아오나니
번뇌의 어두운 집속에서
항상 지혜의 해가 떠오르게 하라.
삿됨은 번뇌를 인연하여 오고
바름(正)이 오면 번뇌가 없어지나니
삿됨과 바름을 다 버리면
깨끗하여 남을 없음에 이르는도다.
보리는 본래 깨끗하나
마음 일으키는 것이 곧 망상이라
깨끗한 성품이 망념 가운데 있나니
오직 바르기만 하면 세 가지 장애를 없애는도다.
만약 세간에서 도를 닦을진대는
일체가 다 방해롭지 않나니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게 하라.
도와 더불어 서로 합하는도다.
형상이 있는 것에는 스스로 도가 있거늘
도를 떠나 따로 도를 찾는지라
도를 찾아도 도를 보지 못하나니
필경은 도리어 스스로 고뇌하는도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행동의 바름이 곧 도이니
스스로에게 만약 바른 마음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를 보지 못하느니라.
만약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나니
만약 세간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잘못이라 도리어 허물이로다.
남의 잘못은 나의 죄과요
나의 잘못은 스스로 죄 있음이니
오직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번뇌를 쳐부수어 버리는도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할진대는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나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말라.
이는 곧 보리가 나타남이로다.
법은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나니
세간을 떠나지 말며
밖에서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구하지 말라.
삿된 견해가 세간이요
바른 견해는 세간을 벗어남이니
삿됨과 바름을 다 쳐 물리치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하리로다.
이는 다만 단박 깨치는 가르침이며
또한 대승이라 이름하나니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나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大師言 善知識 若欲修行 在家 亦得 不由在寺 在寺不修 如西
方心惡之人 在家若修行 如東方人修善 但願自家修淸淨 卽是
西(惡)方 使君 問 和(尙) 在(203)家如何修 願爲指授 大師言
善知識 惠能 與道俗作無相頌 盡誦取 依(衣)此修行 常與惠能
[說]一處無別 頌曰
說通及心通 如日至虛空.
惟傳頓敎法 出世破邪宗.
敎卽無頓漸 迷悟有遲疾.
若學頓敎法 愚人不可迷.
說卽雖(須)萬般 合離還歸一.
煩惱暗宅中 常須生慧(惠)日.
邪來因煩惱 正來煩惱除.
邪正俱(疾)不用 淸淨至無餘.(204)
菩提本淸淨 起心卽是妄.
淨性在(於)妄中 但正除三障.
世間若修道 一切盡不妨.
常現在己過 與道卽相當
色類自有道 離道別覓道.
覓道不見道 到頭還自懊.
若欲貪覓道 行正卽是道.
自若無正心 暗行不見道.
若眞修道人 不見世間愚.
若見世間非 自非却是左.
他非我有罪 我非自有罪.(205)
但自去非心 打破煩惱碎.
若欲化愚人 是須有方便.
勿令破彼疑 卽是菩提見.
法元在世間 於世出世間.
邪見是(出)世間 正見出世間.
邪正悉打却 <菩提性宛然>
此但是頓敎 亦名爲大乘.
迷來經累劫 悟則刹那間.(206)
*'오직 돈교의 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취를 부
순다[唯傳頓敎法하야出世破邪宗이로다]'...육조스님은 <단경>
전체를 통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하는 돈교법만을 설하였
으므로, 돈법(頓法)이외는 모두 사종(邪宗)이라고 배척하였
으니 이는 최사현정( 邪顯正)의 대자비인지라, 육조의 법
손(法孫)으로서 점수(漸修) 운운하는 것은 육고를 반역(反
逆)하는 것이다.
23.행화(行化)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너희들은 다들 이 게송을 외워 가지라. 이 게송을 의
지하여 수행을 하면 천리를 혜능과 떨어져 있더라도 항상 혜능의 곁
에 있는 것이요,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얼굴을 마주하여도 천리를 떨어져 있는 것
이다. 각각 스스로 수행하면 법을 서로 지님이 아니겠느냐.
여러 사람들은 그만 흩어지거라. 혜능은 조계산으로 돌아가리라.
만약 대중 가운데 큰 의심이 있거든 저 산으로 오너라. 너희를 위하
여 의심을 부수어 같이 부처의 성품을 보게 하리라."
함께 앉아 있던 관료.스님.속인들이 육조대사께 예배하며 찬탄하
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들을 '훌륭하십니다. 크게 깨치심이여! 옛적
에는 미처 듣지 못한 말씀이로다. 영남에 복이 있어 산 부처가 여기
계심을 누가 능히 알았으리오' 한 다음 한꺼번에 다 흩어졌다.
大師言 善知(智)識 汝等 盡誦取此偈 依偈修行 去惠能千里
常在能邊 此不修 對面千里 各各自修 法(213)不相持 衆人 且
(旦)散 惠能 歸曹(漕)溪山 衆人(生) 若有大疑 來彼山間 爲汝
破疑 同見佛性(世) 合座官僚(奪)道俗 禮拜和尙 無不嗟嘆 善
哉 大悟 昔所未聞(問) 嶺南 有福 生佛在此 誰能得知(智) 一
時盡散(214)
대사께서 조계산으로 가시어 소주.광주 두 고을에서 교화하기를
사십여년이었다.
만약 문인을 말한다면 스님과 속인 삼오천(三五千)명이라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만약 종지를 말한다면 <단경>을 전수하여 이로써
의지하여 믿음을 삼게 하셨다. 만약 <단경>을 얻지 못하면 곧 법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모름지기 간 곳과 년 월 일과 성명을 알아서
서로서로 부촉하되 <단경>을 이어 받지 못하였으면 남종(南宗)의
제자가 아니다. <단경>을 이어받지 못한 사람은 비록 돈교법을 말
하나 아직 근본을 알지 못함이라. 마침내 다툼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법을 얻은 사람에게만 [돈교법의] 수행함을 권하라.
다툼은 이기고 지는 마음이니 도와는 어긋나는 것이다.
大師往曹溪山 韶廣二州 行化四十餘年 若論門人 僧之與俗 三
五千人 說不盡 若論宗旨(指) 傳授壇經 以此爲依(衣)約 若不
得壇經 卽無稟受 須知去(法)處年月日姓(性)名 遞(遍)相付囑
無壇經稟承 非南宗弟(定)子也 未得稟承者 雖說頓敎法 未知
根本 終(修)不免諍 但得法者 只勸修行 諍是勝負之心 與道違
背(215)
24.돈수(頓修)
세상 사람이 다 전하기를 '남쪽은 혜능이요 북쪽은 신수'라고 하
나, 아직 근본 사유를 모르는 말이다.
또 신수선사는 형남부 당양현 옥천사에 주지하며 수행하고, 혜능
대사는 소주성 동쪽 삼십오 리 떨어진 조계산에 머무시니, 법은 한
종(宗)이나 사람에게 남쪽과 북쪽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남쪽과 북
쪽이 서게 되었다.
어떤 것을 '점(漸)과 '돈(頓)'이라고 하는가?
법은 하가지로되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기 때문이다. 견해가 더
딘즉 '점'이요 견해가 빠른즉 '돈'이다. 법에는 '점'과 '돈'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는 까닭으로 '점'과 '돈'이라고 이
름한 것이다.
일찍이 신수스님은 사람들이 혜능스님의 법이 빠르고 곧게 길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신수스님은 드디어 문인 지성스님
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하여 조계산으로 가라. 가
서 혜능 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예배하고 듣기만 하되, 내가 보내서
왔다 하지 말라. 들은대로 그 뜻을 기억하여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
여라. 그래서 혜능스님의 견해와 나와, 누가 빠르고 더딘지를 보게
하여라. 너는 첫째로 빨리 오너라. 그래서 나로 하여금 괴이하게 여
기지 않도록 하라."
지성은 기쁘게 분부를 받들어 반달쯤 걸려서 조계산에 도달하였
다. 그는 혜능스님을 뵙고 예배하여 법문을 들었으나 온 곳을 말하
지 않았다.
지성은 법문을 듣고 그 말끝에 문득 깨달아 곧 본래의 마음에 계
합하였다.
그는 일어나서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제자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스님 밑에서는
깨치지 못하였으나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습
니다. 큰스님께서는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라옵니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거기에서 왔다면 마땅히 염탐꾼이렸다!"
지성이 말하였다.
"말을 하기 이전에는 그렇습니다만, 말씀을 드렸으니 이미 아니옵
니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번뇌가 곧 보리임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世人 盡傳 南[宗]能北(比)秀 未知根本事由 且秀禪師 於荊南
府當(南荊 堂)陽縣玉泉寺 住持(時)修行 惠能大師 於韶州城
東三十五里曹溪山 住 法卽一宗 人有南北(比) 因此便立南北
何名(以)漸頓 法卽一種 見有遲疾 見遲卽漸 見疾卽頓 法無漸
頓 人有利鈍故 名漸頓(217) 神秀師嘗(常)見人 說惠能法 疾直
指(旨)路 秀師遂喚(換)門人僧志誠曰 汝聰明多智 汝與吾至曹
溪山 到惠能所 禮拜但聽 莫言吾使汝來 所聽得(德)意旨 記取
(218) 却來與吾說 看惠能見解與吾誰疾遲 汝第一早來 勿令吾
怪 志誠 奉使歎喜 遂半月中間 卽至曹溪山 見惠能和尙(當)
禮拜卽聽 不言來處 志誠(城) 聞法 言下便悟 卽契本心 起立
卽]禮拜 自言 和尙 弟子從玉泉寺來 秀師處 不得(德)契悟 聞
和尙說 便契本心 和尙 慈悲 願當敎(散)示 惠能大師曰 汝從
彼(被)來 應是細作 志誠曰 未說時卽是 說[及]了不(卽)是 六
祖言 煩惱卽是菩提 亦復如是(219)
대사께서 지성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들으니 너의 스님이 사라을 가르치기를 오직 계.정.혜를 전
한다고 하는데, 너의 스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계.정.혜는 어떤
것인가? 마땅히 나를 위해 말해 보라."
지성이 말하였다.
"신수스님은 계.정.혜를 말하기를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을 계라
고 하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라고 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
이 하는것을 정이라고 한다. 어것이 곧 계.정.혜이다'고 합니다.
신수스님의 말씀은 그렇거니와, 큰스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알지
못합니다."
혜능대사께서 대답하셨다.
"그 법문은 불가사의하나 혜능의 소견은 또 다르니라."
지성이 여쭈었다.
"어떻게 다릅니까?"
혜능스님께서 대답하셨다.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느니라."
지성이 계.정.혜에 대한 스님의 소견을 청하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말을 듣고서 나의 소견을 보라. 마음의 땅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요, 마음의 땅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정이요, 마음의 땅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혜이니라."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요,
나의 계.정.혜는 높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또한 계.정.혜도 세우지 않느니라."
지성이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뜻은 어떤 것입니까.?"
지성은 단박 닦으라. 세우면 점차가 있으니 그러므로 세우지 않느
니라."
지성은 예배하고서 바로 조계산을 떠나지 아니하고 곧 문인이 되
어 대사의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大師謂志誠曰 吾聞汝(與)禪師敎人 唯傳戒定慧 汝(與)(221)和
尙 敎人戒定慧 如何 當爲吾說 志誠(城)曰 秀和尙 言戒定慧
諸惡不作 名爲戒 諸善奉行 名爲惠 自淨其意 名爲定 此卽名
爲戒定惠 彼作如是說 不知和尙所見 如何 惠能和尙答曰 此說
不可思議 惠能所見 又別 志誠(城) 問 何以別 惠能答曰 見有
遲疾 志誠(城) 請和尙說所見戒定惠 大師言 [如]汝聽吾(悟)說
看吾(悟)所見處 心地無[疑]非自性(姓)戒 心地無亂 是自性
(姓)定 心地無癡 自性(姓)[是]惠 能大師言 汝戒定惠 勸小根
諸人 吾戒定惠 勸上[根]人 得悟(吾)自[性] 亦不立戒定惠 志
誠(城) 言 請大師說不立 如何 大師言 自性(姓) 無非無亂無癡
念念般若觀照 常(當)離法相 有(222)何可立 自性(姓)頓修 立
有漸 此所(契)以不立 志誠 禮拜 便不離曹溪山 卽爲門人 不
離大師左右(223)
*자성돈수(自性頓修 자성으로 단박 닦음)...육고는 <제 8무
념편>에서 '미혹한 사람은 점점 계합하고[迷人漸契] 깨친
사람은 단박에 닦는다[悟人頓修]'고 말함과 같이, 깨침[悟]
은 모두 돈수(頓修)임을 말하였다. 돈황본에서는 '자성으로
단박에 닦는다[自性頓修]'고 간명하게 말하였으나, 각 본
(本)에서는 '자성이 스스로 깨쳐서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아서 또한 점차도 없다[自性이 自悟하여赤無漸次라]'고 소상
히 말씀하심으로써, <단경>에는 돈오돈수(頓悟頓修)뿐이요
점수(漸修)는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25.불행(佛行)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법달이라 하였다. 항상 <법화경>을 외워
칠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바른 법의 당처(堂處)를 알지 못
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의
심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제법 통달하였으나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
나. 경 자체에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네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바른 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 바른
정(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
나는 한평생 동안 문자를 모른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편(一遍)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니라."
又有一僧 名法達 常誦法華經七年 心迷不知正法之處 <來問
曰>經上 有疑 大師 智慧廣大 願爲決(時)處 大師言 法達 法
卽甚達 <汝心不達> 經上無疑(癡) <汝時自疑> 汝心自邪(耶)
而求正法 吾心正定 卽是持經 吾一生已來 不識文字 汝將法華
經來 對吾讀一遍 吾聞(問)卽知(之)(227)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를 마주하여 한편을 읽었다. 육조스
님께서 듣고 곧 부처님의 뜻을 아셨고 이내 법달을 위하여 <법화
경>을 설명하시었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이니라.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을 말씀하심은 다만 세상의 근기가 둔한 사
람을 위함이다.
경 가운데 분명히 '다른 승(乘)이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한불승
(佛乘) 뿐이라'고 하셨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을 듣고서 이불승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
혹하게 하자 말라. 경 가운데서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를 너에게 말
하리라.
경에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
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다. [이상의 열여섯 자는
바른 법이다.]
이 법을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나의 말
을 들으라.
사람의 마음이 생각을 하지 않느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하여
삿된 견해를 떠난다.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
하면 공(空)에 집착한다.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
는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
는 것이니라.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이니라. 네 문으로
나뉘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침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열고
(開) 보이고(示) 깨닫고(悟) 들어감(入)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곧 세
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法達 取經到 對大師讀一遍 六祖聞(問)已 卽識佛意 便與(汝)
法達說法華經 六祖言法達 法華經 無多語(228) 七卷 盡是譬
喩因(內)緣 如來廣說三乘 只爲世人根鈍 經文(聞)分(公)明 無
有餘乘 唯一佛乘 大師<言> 法達 汝聽一佛乘 莫求二佛乘 迷
却汝性(聖) 經中 何處是一佛乘 與汝(汝與)說 經云 諸佛世尊
唯以(汝)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已上十六字(家)是正法)
<此>法 如何解 此法 如何修 汝聽吾說 人心 不思 本源 空寂
離却邪見 卽一大事(是)因緣 內外不迷 卽離兩邊 外迷著(看)相
內迷著空 於相離相 於空離空 卽是不[空]迷 悟(吾)此法 一念
心開 出現於世 心開何物 開佛知見 佛 猶如覺也 分爲四門 開
覺知見 示覺知見 悟覺知見 入覺知見 開示悟入 從(上)一處入
卽覺知見 見自本性 卽(229)得出世(230)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언제나 마음 자리로 부
처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않기를 항상 바라노라. 세
상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
의 지견을 열나니,중생람의 마음이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의 지견을 여나니,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법이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삼승을
나눈 것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까닭이니, 너는 오직 일승불만을 의
지하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
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힘써 법대로 수행하면 이것이 곧 경을 굴리는 것이니라."
법달은 한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울
면서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였습니다.
칠 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
려서 생각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이니라."
그 때 듣는 사람으로서 깨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大師言 法達 吾(悟)常願一切世人 心地 常自開佛知見 莫開衆
生知見 世人 心<邪> 愚迷造惡 自開衆生知見世人心正 起智
惠觀照 自開佛知(智)見 莫開衆生知(智)見 開佛知(智)見 卽出
世 大師言 法達 此是法華(232)(達)經一乘法 向下分三 爲迷
(名)人故 汝但依(於)一佛乘 大師言 法達 心行 轉法華 不行
法華轉 心正 轉法華 心邪(耶) 法華轉 開佛知(智)見 轉法華
開衆生知(智)見 被法華轉 大師言 努力依法修行 卽是轉經 法
達 一聞 言下大悟 涕淚悲泣 自言 和尙 實未曾(僧)轉法華 七
年 被法華轉 已後 轉法華 念念修行佛行 大師言 卽佛行 是佛
其時聽人(入) 無不悟者(233)
*수행불행(修行佛行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깨친 뒤에는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고 하였다. 돈오견성(頓悟見性)이 성
불이어서 <금강경 제 8분 육조해의(六祖解義)>에 '행동불행
천리불행(行同佛行踐履佛行)'이라고 하였고, 또한 <제12분>
에는 '상수불행(常修佛行)'이라고 말씀하셨다.
'수행불행'을 대승사본에는 '원수불행(願修佛行)', 흥성사
본에는 '방수불행(方修佛行)'이라 하였고, 유통본(流通本)
에는 모두 누락되었으나, 돈황, 대승, 흥성의 세 고본(古
本)에 실려 있으므로 상관이 없다.
26.참청(參請)
그 무렵 지상이라고 하는 한 스님이 조계산에 와서 큰스님께 예
배하고 사승법(四乘法)의 뜻을 물었다.
지상이 큰스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은 삼승을 말씀하시고 또 최상승을 말씀하시었습니다. 제
자는 알지 못하겠사오니 가르쳐 주시기 마랍니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너는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바깥 법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윈
래 사승법이란 없느니라.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네 가지로 나누어
법에 사승이 있을 뿐이다. 보고 듣고 읽고 욈은 소승이요, 법을 깨쳐
뜻을 앎은 중승이며, 법을 의지하여 수행함은 대승이요 일만 가지
법을 다 통달하고 일만가지 행을 갖추어 일체를 떠남이 없으되 오직
법의 모양을 떠나고 짓되, 얻는 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이니라. 승
(乘)은 행한다는 뜻이요 입으로 다투는 것에 있지 않다. 너는 모름지
기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라."
時有一僧名智常 來曹溪山 禮拜和尙 問(聞)四乘法義 智常 問
(聞)和尙曰 佛說三乘 又言最上乘 弟子不解 望爲敎(敬)示 惠
能大師曰 汝自身心見 莫著外法相 元無四乘法 人心自有(不
量)四等 法有四乘 見聞讀誦 是小乘 悟<法>解義是中乘 依
(衣)法修行 是大乘 萬法 盡通 萬行(幸)俱備 一切無離 但離法
相 作無所得(德) 是最上乘 乘是[最上]行義 不在口諍 汝須自
修 莫問吾(悟)也(237)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을 신회라고 하였으며 남양사람이다.
조계산에 와서 예배하고 물었다.
"큰스님은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대사께서 일어나서 신회를 세 차례 때리시고 다시 신회에게 물었
다.
"내가 너를 때렸다.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신회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은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
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네가 아프기도 하
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했는데 어떤 것이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인 나무와 둘과 같고, 아프다
하면 곧 범부와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
邊)이요,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이니라.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
하면서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려 드는가?"
신회가 예배하고 다시 더 말하지 않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
라. 마음을 깨쳐서 스스로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와서 혜능의 보
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라 너
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느니라. 만약 네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
혹함을 대신하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신회가 절하고 바고 문인이 되어 조계산중을 떠나지 않고 항상
좌우에서 모시었다.
又有一僧名神會 南陽人也 至曹溪山 禮拜問言 和尙坐(座)禪
見 亦不見 大師起打神會三下 却問神會 吾打汝 痛 不痛 神會
答言 亦痛亦不痛 六祖言曰 吾亦見亦不見 神會又問 大師 何
以亦見亦不見 大師言 吾亦見
常見自過患 故云亦見 亦不見者 不見天地人過罪 所以亦見亦
不見(也) 汝 亦痛亦不痛 如何 神會答曰 若不痛 卽同無情木
石 若痛 卽同凡(夫) 卽起於恨 大師言 神會 向前 見不見 是
兩邊 痛<不痛> 是生滅 汝自性 且不見 敢來弄人 神會(禮拜)
禮拜 更不言 大師言 汝心迷不見 問善知識覓路 以心悟自見
依法修行(239)
汝自迷(名) 不見自心 却來問惠能見否 吾見(不)自知 代汝迷不
得 汝若自見 代得吾迷 何不自修 問吾見否 神會作禮 便爲門
人 不離曹溪山中 常在左右(240)
*최상승(最上乘)...삼승(三乘)을 초월한 최존최상제일(最
尊最上第一)의 선문(禪門)이다.
27. 대법(對法)
대사께서 드디어 문인 법해.지성.법달.지상.지통.지철.지도.법진.법
여.신회 등을 불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 열명의 제자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너희들은 각각 한곳
의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들에게 법 설하는 것을 가
르쳐서 근본 종취를 잃지 않게 하리라.
삼과의 법문(三科法門)을 들고 동용삼십육대(動用三十六對)를 들
어서 나오고 들어감에 곧 양변을 여의도록 하여라.
모든 법을 설하되 성품과 모양을 떠나지 말라. 만약 사람들이 법
을 묻거든 말을 다 쌍(雙)으로 해서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여라. 가
고 오는 것이 서로 인연하여 구경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마저 없게하라. 삼과법문이란 음(蔭).계(界).입(入)이다. 음은
오음(五蔭)이요 계는 십팔계(十八界)요 입은 십이입(十二入)이니라.
어떤 것을 오음이라고 하는가? 색음.수음.상음.행음.식음이니
라.
어떤 것을 십팔계라고 하는가? 육진(六塵).육문(六門).육식(六
識)이니라.
어떤 것을 십이입(十二入)이라고 하는가? 바깥의 육진과 안의
육문이니라.
어떤 것을 육진이라고 하는가? 색.성.향.미.촉.법이니라.
어떤 것을 육문이라고 하는가? 눈.귀.코.혀.몸.뜻이니라.
법의 성품이 육신인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육식과 육문
과 육진을 일으키고 자성은 만법을 포함하나니, 함장식(含藏識)이라
고 이름하느니라.
생각을 하면 곧 식(識)이 작용하여 육식이 생겨 육문으로 나와 육
진을 본다. 이것이 삼(三).육(六)은 십팔(十八)이니라.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
(正)을 포함하면 열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느니라.
악의 작용을 지니면 곧 중생이요, 선이 작용하면 곧 부처이니라.
작용은 무엇들로 말미암는가?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느니라.
大師遂喚門人法海,志誠,法達,智常,志徹,志道,法珍,法如,神會 大
師言 汝等拾弟子 近前 汝等 不同餘人 吾滅度後 汝各爲一方
頭 吾敎汝說法 不失本宗 擧<三>科法門 動<用>三十六對 出
沒 卽離兩邊 說一切法 莫(243)離於性相 若有人 問法 出語盡
雙 皆取法對 來去相因 究( )竟 二法 盡除 更無去處 三科法
門者 蔭界入 蔭是五蔭 界<是>十八界 <入>是十二入 何名五
蔭 色蔭,受蔭,想(相)蔭,行蔭.識蔭 是 何名十八界 六塵,六門,六
識 何名十二入 外六塵 中六門 何名六塵 色聲香味觸(未獨)法
是 何名六門 眼耳鼻舌身意 是 法性 起六識 眼識耳識鼻識舌
識身識意識 六門六塵 自性 含萬法 名爲含藏識 思量卽轉識
生六識 出六門<見>六塵 是三六十八 由自性邪 起十八邪 含
自性<正起>十八正 含惡用卽衆生 善用卽佛 用由(油)何等 由
(油)自性對(244)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에 다섯 대법이 있으니, 하늘과 땅이 상대
요 해와 달이 상대이며, 어둠과 밝음이 상대이며, 음과 양이 상대이
며, 물과 불이 상대이니라.
논란하는 말(語)과 직언하는 말(言)의 대법과, 법과 형상의 대법에
열두가지가 있다. 유위가 무위.유색과 무색이 상대이며, 유상과 무상
ㅇ이 상대이며, 유루와 무루가 상대이며, 현상(色)과 공이 상대이며,
움직임과 고요함이 상대이며, 맑음과 흐림이 상대이며, 범(凡)과 성
(聖)이 상대이며, 승(僧)과 속(俗)이 상대이며, 늙음과 젊음이 상대이
며, 큼과 작용이 상대이며, 김(長)과 짧음(短)이 상대이며, 높음과 낮
음이 상대이니라.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 대법에 열아홉 가지가 있다. 삿됨과 바름
이 상대요, 어리석음과 지혜가 상대이며, 미련함과 슬기로움이 상대
요, 어지러움과 선정이 상대이며, 계율과 잘못됨이 상대이며, 곧음과
굽음이 상대이며, 실(實)과 허(虛)가 상대이며, 험함과 평탄함이 상대
이며, 번뇌와 보리가 상대이며, 사랑과 해침이 상대이며, 기쁨과 성
냄이 상대이며, 버림과 아낌이 상대이며, 나아감과 물러남이 상대이
며, 남(生)과 없어짐(滅)이 상대이며, 항상함과 엇없음이 상대이며,
법신과 색신이 상대이며, 화신과 보신이 상대이며, 본체와 작용이 상
대이며, 성품과 모양이 상대이니라.
유정.무정의 대법인 어(語).언(言)과 법(法).상(相)에 열두 가지 대
법이 있고, 바깥 경게인 무정에 다섯 가지 대법이 있으며, 자성이 일
으켜 작용하는데 열아홉 가지의 대법이 있어서 모두 서른여섯 가지
대법을 이루니라.
이 삼십육 대법을 알아서 쓰면 일체의 경전에 통하고 출입에 곧
양변을 떠난다.
어떻게 자성이 기용(起用)하는가?
삼십육 대법이 사람의 언어와 더불어 함께 하나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空)에서 공얼 떠나나
니, 공에 집착하면 오직 무명만 기르고 모양에 집착하면 오직 사견
만 기르느니라.
법을 비방하면서 곧 말하기를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할진대는 사람이 말하지도
않아야만 옳을 것이다. 언어가 곧 문자이기 때문이다.
자성에 대해서 공(空)을 말하나 바른 말로 말하면 본래의 성품은
공하지 않으니
미혹하여 스스로 현혹됨은 말들이 삿된 까닭이니라.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어둠
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으로써 변화하여 어둡고, 어둠으로
써 밝음이 나타나나니, 오고감이 서로 인연한 것이다. 삼십육 대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外境無情 對有五 天與地對 日與月對 暗與明對 陰與陽對 水
與火對 語與言對 法與相對 有十二對 有爲無爲有色無色對 有
相無相對 有漏無漏對 色與空對,動與靜(淨)對,淸與濯對,凡與
聖(性)對,僧與俗對,老與少對,大大與少少對,長與短對,高與下對
自性[居]起用對 有十九對 邪與正對,癡與惠對,愚與智對,亂與
定對,戒與非對,直與曲(典)對,實與虛對, 與平對,煩惱與菩提對,
慈與害(空)對,喜與嗔對,捨與�h對,進與退對,生與滅對,常與無常
對,法身與色身對,化身與報身對,體與用對,性與相<對> 有情
(淸)無情(248)(親)對 言語 與法相 有十二對 [內]外境有無
<情>五對 自性起有十九對(三身有三對) 都合成三十六對法也
此三十六對法 解用 通一切經 出入 卽離兩邊 如何自性起用
三十六對共人言語 出外 於<相>離相 入內 於空離空 著空卽
惟長無明(名) 著相惟<長>邪見 謗法 直言不用文字 旣云不用
文字 人不合言語 言語卽是文字 自性上說空 正語言 本性 不
空 迷自惑 語言邪(除)故 暗不自暗 以明(名)變暗 以暗不自暗
以暗現明 來去相因 三十六對 亦復如是(249)
대사께서 열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후에 법을 전하되 서로가 이 한 권의 <단경>을 가르쳐 주어
본래의 종취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라. <단경>을 이어받지 않는다면
나의 종지가 아니니라. 이제 얻었으니 대대로 유포하여 행하게 하라.
<단경>을 만나 얻은 이는 내가 친히 주는 것을 만남과 같으니
라."
열명의 스님들이 가르침을 받아 마치고 <단경>을 베껴서 대대로
널리 퍼지게 하니, 얻은 이는 반드시 자성을 볼 것이다.
大師言 十弟子 已後傳法 遞相敎授一卷壇經 不失本宗 不稟受
(授)壇經 非我宗旨 如今得了 遞代流行 得遇壇經者 如見吾親
授 拾僧 得敎授已 寫爲壇經 遞代流行 得者必當見性(253)
*열명의 제자들이란 당시에 가까이에서 육조스님을 모시고
있던 제자들을 말한다.
*즉리양변(卽離兩邊 양변을 떠남)...양변을 떠남은 중도(中
道)를 말한 것이니, 불교의 근본 원리이다. 석존은 초전법
륜(初轉法輪)에서 녹야원 다섯 비구들에게 '여래는 양변을
떠난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하였다'고 유명한 '중도선언'을
하였다. 용수(龍樹)도 그의 <대지도론(大智度論)四十三>에
서 양변을 떠난 중도는 반야바라밀이라고 상세히 말하였으
니, 육조가 항상 고창(高唱)한 반야는 곧 중도를 말한다.
28. 진가(眞假)
대사께서는 선천 이년 팔월 삼일에 돌아가셨다. 칠월 팔일에 문인
들을 불러 고별하시고, 선천 원년에 신주 국은사에 탑을 만들고 선
천 이년 칠월에 이르러 작별을 고하셨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나는 팔월이 되면 세상을 떠나
고자 하니 너희들은 위하여 의심이 있거든 빨리 물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의심을 부수어 마땅히 미혹을 다 없애어 너희들
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는 너희들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리라."
법해를 비롯한 여러 스님들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으나,
오직 신회만이 꼼짝하지 아니하고 울지도 않으니 육조스님께서 말씀
하셨다.
"어린 신회는 도리어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평등함을 얻어 헐뜯
고 칭찬함에 움직이지 않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구나. 그
렇다면 여러 해동안 산중에서 무슨 도를 닦았는가? 너희 지금 슬피
우는 것은 또 누구를 위함인가? 나의 가는 곳을 너희가 몰라서 근심
하는 것인가?
만약 내가 가는 곳을 모른들 마침내 너희에게 고별하지 않겠느
냐?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은 곧 나의 가는 곳을 몰라서이다. 만약 가
는 곳을 안다면 곧 슬피 울지 않으리라.
자성의 본체는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느
니라.
너희들은 다 앉거라. 내 너희들에게 한 게송을 주노니, '진가동정
게(眞假動靜偈)'이다. 너희들이 다 외워 이 게송의 뜻을 알면 너희는
나와 더불어 같을 것이다.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해서 종지를 잃지 말라."
스님들이 예배하고 대사께 게송 남기시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
음으로 받아 가졌다. 게송에 말씀하셨다.
모든 것에 진실이 없나니 진실을 보려고 하지 말라.
만약 진실을 본다 해도 그 보는 것은 다 진실이 아니다.
만약 능히 자기에게 진실이 있다면 거짓을 떠나는 것이 곧 마음
의 진실이다.
자기의 마음이 거짓을 여의지 않아 진실이 없거니, 어느 곳에 진
실이 있겠는가?
유정은 곧 움직일 줄을 알고 무정은 움직이지 않나니
만약 움직이지 않은 행을 닦는다면 무정의 움직이지 않음과 같다.
만약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면
움직임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나니.
움직이지 않음이 움직이지 않음이면 뜻도 없고 부처의 씨앗도 없
도다.
능히 모양을 잘 분별하되 첫째 뜻은 움직잊 않는다.
만약 깨쳐서 이 견해를 지으면 이것이 곧 진여의 씀이니라.
모든 도를 배우면 이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힘써 뜻을 써서
대승의 문에서 도리어 생사의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
앞의 사람이 서로 응하면 곧 함께 부처님 말씀을 의논하려니와
만약 실제로 서로 응하지 않으면 합장하여 환희케 하라.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음이라 다투지 않으면 도의 뜻을 잃
으리오,
미혹함에 집착하여 법문을 다투면 자성이 생사에 들어가느니라.
大師先天二年八月三日 滅度 七月八日 喚門人告別 大師<先>
天元年 於新州國恩寺造塔 至先天二年七月告別 大師言 汝衆
近前 吾(五)至八月欲離世間 汝等 有疑早問 爲汝(外)破疑 當
令迷者盡 使汝(與)安樂 吾若去後 無人(入)敎汝(與) 法海等衆
僧 聞已 涕淚悲泣 唯有神會 不動亦不悲泣 六祖言 神會小僧
却得善<不善>等 毁譽不動 餘(除)者 不得 數年 山中 更修何
道 汝今悲泣 更有阿誰 憂吾不知去處在 若不知去處 終不別汝
汝等悲泣 卽不知吾<去>處 若知去(255)處
卽不悲泣 性體(聽) 無生無滅 無去無來 汝等 盡坐(座) 吾與汝
(如)一偈 眞假動靜(淨)偈 汝(與)等 盡誦取 見此偈意 汝<與>
吾同 依(於)此修行 不失宗旨 僧衆禮拜 請大師留偈 敬心受持
(特) 偈曰
一切無有眞 不以見於眞.
若見於(衣)眞者 是見盡非眞.
若能姿有眞 離假卽心眞.
自心不離假 無眞何處眞.
有情(性)卽解動 無情(性)卽不動.
若修不動行 同無情不動.
若見眞不動 動上有不動.(256)
不動是不動 無情無佛種(衆).
能善分別相 第一義不動.
若悟作此見 則是眞如用.
菩提學道者 努力須用意.
莫於大乘門 却執生死智.
前頭人相應 卽共論佛語.
若實不相應 合掌令歡喜(勸善).
此敎本無諍 無諍失道意.
執迷諍法門 自性入生死.(257)
29.전게(傳偈)
대중스님들은 다 듣고 대사의 뜻을 알았으며, 다시는 감히 다투지
아니하고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였다. [대중이] 일시에 예배하니, 곧
대사께서 세상에 오래 머무시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상좌인 법해가 앞으로 나와 여쭈었다.
"큰스님이시여, 큰스님께서 가신 뒤에 가사와 법을 마땅히 누구에
게 부촉 하시겠습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은 전하여 마쳤으니 너희는 모름지기 묻지 말라. 내가 떠난 뒤
이십여년에 삿된 법이 요란하여 나의 종지를 혹란케 할 것이다. 그
러나 어떤 사람이 나와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교의 옳고 그
름을 결정하여 종지를 세우리니, 이것이 곧 나의 바른 법이다. 그러
므로 가사를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너희가 믿지 않을진대는 내가
선대의 다섯 분 조사께서 가사를 전하고 법을 부촉하신 게송들을 외
워 주리라.
만약 제일조 달마조사의 게송의 뜻에 의거하면 곧 가사를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잘 들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외우리라."
게송에 말씀하셨다.
제일조 달마화상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내 본시 당나라에 와서 부처님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하노
니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리어 그 결과가 자연히 이루리로다.
제이조 혜가스님 게송에 말씀하셨다.
본래 땅이 있는 까닭에 땅으로부터 씨앗 꽃 피나니
만약 본래로 땅이 없다면 꽃이 어느 곳으로부터 피어나리오
제삼조 승찬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꽃씨가 비록 땅을 인연하여 땅 위에 씨앗 꽃을 피우나
꽃씨는 나는 성품이 없나니 땅에도 또한 남이 없도다.
제사조 도신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꽃씨에 나는 성품있어 땅을 인연하여 씨앗 꽃이 피나
앞의 인연이 화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자니 않는도다.
제오조 홍인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유정이 와서 씨 뿌리니 무정이 꽃을 피우고
정도 없고 씨앗도 없나니 마음 땅에 또한 남이 없도다.
제육조 혜능의 게송에 말한다.
제마음의 땅이 뜻의 씨앗을 머금으니 법의 비가 꽃을 피운다.
스스로 꽃 뜻의 씨앗을 깨달으니, 보리의 열매가 스스로 이루는
도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내가 지은 두 게송을 들어라. 달마스님의 게송의 뜻을
취하였으니 너희 미혹한 사람들은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그
러면 반드시 자성을 보리라.
첫째 게송에 말씀하셨다.
마음 땅에 삿된 꽃이 피니 다섯 잎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무명의 업을 지어 업의 바람에 나부낌을 보는도다.
둘째 게송에 말씀하셨다.
마음 땅에 바른 꽃이 피니 다섯 잎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반야의 지혜를 닦으니 장차 오실 부처님의 깨달음이로다.
육조스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여 마치시고 대중을 해산시켰다. 밖으
로 나온 문인들은 생각하였으니 대사께서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으
실 것임을 알았다.
衆僧 旣聞 識大師意 更不敢諍 依法修行 一時禮拜 卽知(之)
大師不永住世 上座法海向前言 大師 大師去後 衣法 當付何人
大師言 法卽付了 汝不須問 吾滅後二十餘年 邪法 (遼)亂 惑
我宗旨 有人出來 不惜身命 定(第)佛敎是非 竪立宗旨 卽是吾
正法 衣不合傳(轉) 汝不信 吾與誦先代五祖傳衣付法頌(誦) 若
據第一祖達磨頌]意 卽不合傳衣 聽 吾(五)與汝誦(頌) 頌曰
第一祖達磨和尙 頌曰(262)
吾本(大)來唐國 傳敎救迷情(名淸).
一花開五葉 結果(菓)自然成.
第二祖惠可和尙 頌曰
本來緣有地 從地種花生.
當本元(願)無地 花從何處生.
第三祖僧璨和尙 頌曰
花種雖因地 地上種花(化)生.
花種無生性 於地亦無生.
第四祖道信和尙 頌曰
花種有生性 因地種花生.
先緣不和合 一切盡無生. (263)
第五祖弘忍和尙 頌曰
有情來下種 無情花卽生.
無情又無種 心地亦無生.
第六祖惠能和尙 頌曰
心地含情種 法雨卽花生.
自悟(吾)花情種 菩提果(菓)自成.
能大師言 汝等 聽吾作二頌 取達磨和尙頌曰 汝迷人 依此頌修
行 必當見性
第一頌曰
心地邪花放 五葉逐根隨.
共造無明業(葉) 見被業(葉)風吹.
第二頌曰
心地正花放 五葉逐根(恨)隨.
共修般若惠 當來佛菩提.
六祖說偈已了 放衆生散 門人 出外思惟 卽知大師 不久住世
(265)
*'내가 떠난 뒤 이십여 년[滅後二十餘年]'운운한 것은 신회
(神會)에서 해당된 것으로서, 이 말은 신회 계통에서 조작
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다.
30.전통(傳統)
그 뒤, 육조스님께서는 팔월 초삼일에 이르러 공양 끝에 말씀하셨
다.
"너희들은 차례를 따라 앉아라. 내 이제 저희들과 작별하리라."
법해가 여쭈었다.
"이 돈교법의 전수는 예부터 지금까지 몇 대입니까?"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처음은 일곱 부처님으로부터 전수되었으니, 석가모니불은 그 일
곱째이시다.
대가섭은 제팔, 아난은 제구, 말전지는 제십, 상나화수는 제십일,
우바굽다는 제십이, 제다가는 제십삼, 불타난제는 제십사, 불타밀
다는 제십오,
협비구는 제십육, 부나사는 제십칠, 마명은 제십팔, 바라장자는 제
십구,
용수는 제이십, 가나제바는 제이십일, 라후라는 제이십이, 승가나
제는 제이십삼,
승가야사는 제이십사, 구마라타는 제이십오, 사야나는 제이십육,
바수반다는 제이십칠, 마나라는 제이십팔, 학륵나는 제이십구,
사자비구는 제삼십, 사나바사는 제삼십일, 우바굴은 제삼십이, 승
가라는 제삼십삼,
수바밀다는 제삼십이, 남천축국 왕자 셋째 아들 보리달마는 제삼
십오,
당나라 스님 혜가는 제삼십육, 승찬은 제삼십칠, 도신은 제삼십
팔, 홍인은 제삼십구, 나 혜능이 지금 법을 받은 것은 제사십대이니
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이후로는 서로서로 전수하여 모름지기 의지하고 믿어서 종
지를 잃지말라."
六祖後至八月三日 食後 大師言 汝等著(善)位坐(座) 吾(五)今
共汝(與)等別 法海問(聞)言 此頓敎法傳授(受) 從上已來 至今
幾代 六祖言初傳授(受)七佛 釋迦牟尼佛 第七
大迦葉第八, 阿難第九,
末(未)田地第十, 商那和修第十一,
優婆�}多第十二, 提多迦第十三,
佛陀(抒)難提十四, 佛陀(抒)蜜多第十五,
脇比丘第十六, 富那奢第十七,
馬鳴第十八, 毗羅長者第十九,(270)
龍樹第二十, 迦那提婆第卄一,
羅 羅第卄二, 僧迦耶提第卄三,
僧迦耶(那)舍第卄四, 鳩摩羅 第卄五,
耶多第卄六, 婆修盤多第卄七,
摩拏羅第卄八, 鶴勒那第卄九,
師子比丘第 , 舍那婆斯第 一,
優婆堀第 二, 僧迦羅第三十三,
須婆蜜多第三十四,
南天竺(竹)國王子第三子菩提達磨第三十五,
唐國僧惠可第三十六, 僧璨第三十七,
道信第三十八, 弘忍第三十九,
惠能自身 當今受法第四十(十四) 大師言 今日已後 遞(271)相
傳授(受) 須有依約 莫失宗旨(272)
*옛 역사는 증빙의 불충분으로 고증(考證)이 어렵다. 종문
법통(宗門法統)에 대하여 이설(異說)이 있긴 하나, 가섭으
로부터 달마까지 이십팔대설(二十八代說)은 육조스님과 같
은 해에 입적한 영가의 <증도가>에서도 '이십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二十八代는西天記로다]'라고 하였다.
31. 진불(眞佛)
법해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이제 가시면 무슨 법을 부촉하여 남기시어, 뒷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부처님을 보게 하시렵니까?"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들으라. 뒷 세상의 미혹한 사람이 중생을 알면 곧 능히
부처를 볼 것이다. 만약 중생을 알지 못하면 만겁토록 부처를 찾아
도 보지 못하리라. 내가 지금 너희로 하여금 중생을 알아 부처를 보
게 하려고 다시 '참 부처를 보는 해탈의 노래(見眞佛解脫頌)'를 남
기리니, 미혹하면 부처를 보지 못하고 깨친 이는 곧 보느니라."
"법해는 듣기를 바라오며 대대로 유전하여 세세생생에 끊어지지
않게 하리이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들으라. 내 너희들을 위하여 말하여 주리라. 만약 뒷 세
상 사람들이 부처를 찾고자 할진대는 오직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
라. 그러면 곧 능히 부처를 알게 되는 것이니, 곧 중생이 있음을 인
연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의 마음이 없느니라.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치면 중생이 부처이며
우치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니라.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마음이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
이니
한평생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 속에 있도다.
만약 한생각 깨쳐 평등하면 곧 중생이 스스로 부처이니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음이라 자기 부처가 참 부처이니
만약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리요."
法海又白 大師今去 留付何法 令(今)後代人 如何見佛 六祖言
汝聽 後代迷人 但識衆生 卽能見佛 若不識衆生 覓佛萬劫 不
得見也 吾(五)今敎汝 識衆生 見佛 更留見眞佛解脫頌 迷卽不
見佛 悟者卽見 法海願聞 代代流傳 世世不絶 六祖言 汝聽 吾
與汝(汝與)說 後代世人 若欲覓佛 但識自(佛)心衆生 卽能識佛
卽緣有衆<生> 離衆生無佛心
迷卽佛衆生 悟卽衆生佛
愚癡佛衆生 智慧衆生佛
心險(劒)佛衆生 平等衆生佛(275)
一生心若險(劒) 佛在衆生中
一念悟(吾)若平 卽衆生自佛
我心自有佛 自佛是眞佛
自若無佛心 向何處求佛(276)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문인들은 잘 있거라. 내가 게송 하나를 남기리니 '자성진불
해탈송' 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뒷 세상에 미혹한 사람이 이 게송의
뜻을 들여면 곧 자기의 마음, 자기 성품의 참 부처를 보리라. 저희에
게 이 게송을 주면서 내 너희와 작별하리라."
게송을 말씀하셨다.
진여의 깨끗한 성품이 참 부처요
삿된 견해의 삼독이 곧 참 마군(魔軍)이니라.
삿된 생각 가진 사람은 마군이 집에 있고,
바른 생각 가진 사람은 부처가 곧 찾아오는도다.
성품 가운데서 삿된 생각인 삼독이 나나니,
곧 마왕이 와서 집에 살고
바른 생각이 삼독의 마음을 스스로 없애면
마군이 변하여 부처되나니, 참되어 거짓이 없도다.
화신과 보신과 정신(靜身)이여,
세 몸이 원래로 한 몸이니
만약 자신(自身)에게서 스스로 보는 것을 찾는다면
본래 화신으로부터 깨끗한 씨앗이니라.
깨끗한 성품은 항상 화신 속에 있고
성품이 화신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행하게 하면
장차 원만하여 참됨이 다함 없도다.
음욕을 없애고는 깨끗한 성품의 몸이 없다.
다만 성품 가운데 있는 다섯 가지 욕심을 스스로 여의면
찰나에 성품을 보나니, 그것이 곧 참[眞]이로다.
만약 금생에 돈교의 법문을 깨치면
곧 눈앞에 세존을 보려니와
만약 수행하여 부처를 찾는다고 할진대는
어느 곳에서 참됨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도다.
만약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 있다면
그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이니라.
스스로 참됨을 구하지 않고 밖으로 부처를 찾으면,
가서 찾음이 모두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돈교의 법문을 이제 남겼나니
세상 사람을 구제하고 모름지기 스스로 닦으라.
이제 세간의 도를 배우는 이에게 알리노니,
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크게 부질없으리로다.
大師言 汝等門人 好住 吾留一頌 名自性眞佛解脫頌 後代迷
<人> 聞(門)此頌意 [意]卽見自心自性眞佛 與汝此頌 吾共汝
別 頌曰
眞如淨性是眞佛 邪見三獨是眞魔(摩)
邪見之人魔(摩)在舍 正見之(知)人佛則過(278)
性中(衆)邪見三獨生 卽是魔王來住舍
正見自除(忽則)三獨心(生) 魔(摩)變成佛眞無假.
化身報身及淨身 三身元本是一身
若向身衆覓自見 卽是<成>佛菩提因
本從化(花)身生淨性 淨性常在化(花)身中
性使化(花)身行正道 當來圓(員)滿眞無窮
狀性本身靑淨因 除狀卽無淨性身
性中但自離五(吾)欲 見性刹那卽是眞
今生若悟(吾)頓敎門 悟卽眼前見世(性)尊
若欲修行云覓佛 不知何處欲求眞
若能身中自有眞 有眞卽是成佛因(279)
自不求眞外覓佛 去覓 是大癡人
頓敎法門今已留(者是西流) 救(求)度世人須自修
今報(保)世間學道者 不依(於)此是大悠悠(280)
*게송 가운데서 '멱자견(覓自見)'을, '찾아서 스스로 본다'
고 하면 견성(見性)으로 해석될 염려가 있으므로 '스스로
보는 것을 찾는다'고 번역하였다. 유통본에는 '약향성중능
자견 즉시성불보리인(若向性中能自見 卽是成佛菩提因)'이라
고 하였는 바, '성중자견(性中自見)'은 견성이며 '견성이
곧 성불'임을 <단경>의 근본사상으로서 성불하는 씨앗[成佛
因]이 될 수 없으므로,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며 <지침(指
針)> 가운데서 이미 지적하였다.
32.멸도(滅度)
대사께서 게송을 말씀해 마치시고 드디어 문인들에게 알리셨다.
"너희들은 잘 있거라. 이제 너희들과 작별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 세상의 인정으로 슬피 울거나, 사람들의 조문과
돈과 비단을 받지 말며, 상복을 입지 말라. 성인의 법이 아니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내가 살아 있던 날과 한가지로 일시에 단정히 앉아서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으며,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어서 탄
연히 적정하면 이것이 큰 도이니라,
내가 떠난 뒤에 오직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내가 있던 날과 한
가지일 것이나, 내가 만약 세상에 있더라도 너희가 가르치는 법을
어기면 내가 있은들 이익이 없느니라."
대사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밤 삼경에 이르러 문득 돌아가시니,
대사의 춘추는 일흔여섯이었다.
大師說偈已了 遂告門人曰 汝等 好住 今共汝別 吾去已後 莫
作世情悲泣 而受人弔問(門)錢帛 著孝衣 卽非聖法 非我弟子
如吾在日一種 一時端坐 但無動無靜(淨) 無生無滅 無去無來
無是無非 無主<無往> 坦(但)然寂靜(淨) 卽是大道 吾去已後
但依(衣)法修行(284) 共吾在日一種 吾若在世 汝違敎法 吾住
無益 大師云此語已 夜至三更 奄然遷化(花) 大師春秋七十有
六(285)
대사께서 돌아가신 날, 절 안은 기이한 향내가 가득하여 여러 날
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았고, 산이 무너지고 땅이 진동하여 숲의 나
무가 희게 변하고 해와 달은 광채가 없고 바람과 구름이 빛을 잃었
다.
팔월 삼일에 돌아가시고 동짓달에 이르러 큰스님의 영구를 모시
어 조계산에 장사지내니, 용감(龍감) 속에서 흰 빛이 나타나 곧장 하
늘 위로 솟구치다가 이틀 만에 비로소 흩어졌으며, 소주 자사 위거
는 비(碑)를 세우고지금까지 공양하니라.
大師滅度之(諸)日 寺內異香 經數日不散 山崩(朋)地動 林
木變白 日月無光 風雲失色 八月三日 滅度 至十一月 迎和尙
神座於曹溪山葬 在龍龕之內 白光 出現 直上衝天 二日始散
韶州刺使韋 (處)立碑 至供養(286)
33. 후기(後記)
이 <단경>은 상좌인 법해스님이 모은 것이다. 법해스님이 돌아가
니 같이 배운 도제스님에게 부촉하였고, 도제스님이 돌아가니 문인
오진스님에게 부촉하였는데, 오진스님은 영남 조계산 법흥사에서 지
금 이 법을 전수하니라.
此壇經 法海上座集 上座無常 付同學道 道 無常 付門人悟
眞 悟眞 在嶺南曹溪山法興寺 見今傳授(受)此法(287)
만약 이 법을 부촉할진대는 모름지기 상근기의 지혜라야 하며, 마
음으로 불법을 믿어 큰 자비를 세우고 이 경을 지니고 읽어 의지를
삼아 이어받아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如付此(山)法 須得(德)上根(恨)智(知) 心身佛法 立大悲持此經
以爲依(衣)承 於今不絶.
[법해]스님은 본래 소주 곡강현 사람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시고
법의 가르침이 동쪽 땅으로 흘러서 머무름이 없음을 함께 전하니,
곧 나의 마음이 머무름이 없음이로다.
이 진정한 보살이 참된 종취를 설하고 진실한 비유를 행하여 오직
큰 지혜의 사람만을 가르치나니, 이것이 뜻의 의지하는 바이다.
무릇 제도하기를 서원하고, 수행하고 수행하되, 어려움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않고, 괴로움을 만나서도 능히 참아 복과 덕이 깊고 두터
워야만 바야흐로 이 법을 전할 것이다. 만약 근성이 감내하지 못하
고 재량이 좋지 못하면 모름지기 이 법을 구하더라도 법을 어긴 덕
없는 이에게는 망령되이 <단경>을 부촉하지 말 것이니, 도를 같이
하는 모든 이에게 알려 비밀한 뜻을 알게 하노라.
和尙 本是韶州曲江縣(懸)人也 如來入涅槃(盤) 法敎流東土 共
傳無住 卽我心無住 此眞菩薩 說眞宗(示)(288) 行實喩 唯敎大
智人 是旨依(衣) 凡度誓修修行行 遭難不退 遇苦能忍 福德深
厚 方授此法 如根性 不堪 材(林)量 不得 須求此法 違律(立)
不德者 不得妄付壇經 告諸同道者 令知密(諸蜜)意(289)
*도제(道 ), 오진(悟眞)...도제는 법해(法海)의 동학(同學)이
니 육조의 문인이요, 오진은 도제의 문인이니 육조의 손제자이
다. 이는 단경 전수의 계맥(系脈)이니, 돈황원본은 오진 이전
의 최고본(最古本)임이 분명하며, 일천여년간 돈황석굴(敦煌石
窟)에 비장(秘藏)되어 유통본처럼 뒷 사람들의 첨삭(添削)이
없으므로 육조의 성의(聖意)를 전한 진본(眞本)으로 평가된다.
제3편 선교결(禪敎訣)
유정대사에게 보임(示 惟政大師)
서산대사(西山大師)
요즈음 선(禪)을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
다'하고 교(敎)를 하는 사람도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고 말하
면서 한 법을 가지고 서로 같다느니 다르다느니 하여 손가락과 말로
서로 다투고 있으니[손가락과 말[指馬]... <장자>제물편에서 쓸데없
는 논쟁을 비유한 말] 슬프도다, 그 누가 능히 결단하겠는가!
그러나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교는 말
이 있는 곳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요, 선은 말 없는 곳
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다. 말 없는 곳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면 그것은 누구도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어 억지로 이름
하여 마음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배워서
알고 생각하여 얻는다고 하니, 이는 실로 가엾은 일이다.
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교 가운데도 또한 선이 있다'고 말하는 자
가 있으니 이는 성문승도 아니며 연각승도 아니고 보살승도 아니며
불승도 아니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선가(禪家) 입문
의 첫 구절이요 선의 뜻은 아니며, 세존께서 한평생 말슴하신 가르
침[敎]인 것이다. 비유컨대 세 종류의 자비의 그물을 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의 나고 죽음의 바다에 펴서 작은 그물로는 새우와 조개
를 건지고[인천소승교와 같음] 중간 그물로는 방어와 송어를 건지고
[연각의 중승교와 같음], 큰 그물로는 고래와 큰 자라를 건져서[대승
원돈교와 같음] 함께 열반의 언덕에 두는 것과 같으니, 이는 가르침
의 순서이다. 그 가운데 한 물건이 있어서, 갈기는 시뻘건 불과 같고
발톱은 무쇠 창날과 같으며, 눈은 햇빛을 쏘고 입으로는 바람과 우
뢰를 내뿜는다. 몸을 뒤쳐 한 번 구르면 흰 물결이 하늘에 닿고 산
과 강이 진동하며, 해와 달이 어두워진다. 세 가지 그물을 뛰어넘어
바로 구름 위로 올라가서 감로수를 퍼부어 뭇 생명들에게 이로움을
주니[바로 조사문 중의 교외별전의 기틀임], 이는 선이 교와 다른 점
이다.
今禪者曰 此吾師之法也 今敎者曰 此吾師之法也 一法上 同於
同異於異 而指馬交諍 嗚呼 其孰能訣之 然 禪是佛心 敎是佛
語也 敎也者 自有言至於無言者也 禪也者 自無言至於無言者
也 自無言至於無言 則人莫得而名焉 强名曰心 世人 不知其由
謂學而知思而得 是可 愍也 敎者曰 敎中 亦有禪也云者 出於
非聲聞乘 非緣覺乘 非菩薩乘 亦非佛乘之語也 然 此 禪家入
門之初句 非禪旨也 世尊一代所說之敎也 譬如將三種慈悲之網
張三界生死之海 以小網 蝦 (如人天小乘敎) 以中網
(如緣覺中乘敎) 以大網 鯨鱉(如大乘圓頓敎) 俱置於涅槃
之岸焉 此敎之序也 其中 有一物 如朱火 瓜如鐵戟 眼射
(293)日光 口吐風雷者 蒜身一轉 白浪 滔天 山河震動 日月
晦瞑 超出乎三網之外 直上乎靑雲之端 注甘露而益群生焉(正
如祖門敎外別傳之機) 此 禪之別於敎者也(294)
*믿기 어려운 비유 같기는 하지만, 선의 뛰어남을 이 말로써 능히
짐작할 것이다. 이 비유는 서산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선, 교의 우열을 가리는 데 쓰인 말이다.
그리고 화엄사상에 철저한 보조(普照)도 '교외별전은 교승보다 한
층 더 뛰어나다[敎外別傳은 逈出敎乘이라一看話決疑論]'고 하였고 또한
'교외별전이란 교학자만이 믿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아니
라, 선종에서도 근기가 낮은 이도 또 얕게 아는 이도 망연하여 알지
못한다[敎外別傳은 非但敎學者難信難入이요赤乃富宗下根淺識도茫然不知
矣니다一看話決疑論]'고 하였으며, 또한 서산은 그의 <선교석(禪敎
釋)>에서 말하기를 "화엄소[청량 지음]에 이르기를 '원돈 위에 따로
한 종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선문을 일컫는 것이다(華嚴疏一淸凉
一에 云, 圓頓之上에別有一種이라하니此는禪門之謂也라]"고 하였다. 이로서
선과 교의 차이가 이같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선과 교의 차
이가 이같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이 선의 법은 우리 부처님 세존도 또한 진귀조사에게서 따로이
전해받은 것이며, 옛부처의 케케묵은 말이 아니다. 요즈음 선의 뜻을
그릇 이어받은 자는 더러는 돈, 점의 문으로써 정맥을 삼으며, 더러
는 원돈의 교로써 종승을 삼고, 더러는 외도의 글을 인용하여 비밀
한 뜻을 설하며, 더러는 업식을 희롱함으로써 본분을 삼고, 또 더러
는 그림자를 인정하여 자신으로 삼는다. 심지어는 눈멀고 귀먹은 방
할(棒喝)을 함부로 행하여 부끄러움도 없으니 이는 참으로 무슨 마
음들인가? 법을 비방하는 그 허물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此禪之法 吾佛世尊 亦別傳乎眞歸祖師者也 非古佛之陳言也
今錯承禪旨者 或以頓漸之門 爲正脈 或以圓(297)頓之敎 作宗
乘 或引外道書 說密旨 或以弄業識 爲本分 或以認光影 爲自
己者 至於恣行盲聾棒喝 無 無愧者 是誠何心哉 其謗法之愆
余何敢言(298)
*돈오점수를 <수심결>에서 '돈, 점의 양문[頓漸兩門)', '돈, 점의
두 뜻[頓漸二義]'이라고 하였으니, 돈, 점의 문은 돈오점수를 말한 것
이다.
돈오점수는 하택(荷澤)과 규봉(圭峰)이 먼저 주장하고 보조가 힘
써 퍼뜨린 것으로서, 보조는 처음에는 돈오점수를 '달마의 법을 바로
이은 것[達磨正傳]'이라고 하다가 입적하기 한해 전의 겨울에 출판된
<절요(節要)>의 첫머리에서 '하택은 지해종사라, 조계의 적자가 아
니다[荷澤은是知解宗師니非曹溪嫡子라]'고 하여 종전의 주장과는 달리
돈오점수는 지해(知解)이며 조계의 정통이 아니요 교가의 행상[敎家
行相]이라고 하였다. 이는 사상의 큰 변환이며 진전(進展)이라고 볼
수 있다.
원교의 극치(圓敎極致]는 화엄연기(華嚴緣起)로서, <간화결의론>
에서 보조는 원돈신해(圓頓信解)인 여실언교(如實言敎)는 사구(死句)
라고 단정하고 무애연기(無碍緣起)를 불법 지해의 병[知解之病]이라
고 지적하여 평생 받들던 화엄사상을 원돈사구(圓頓死句)이며 지해
지병(知解之病)이라는 대담한 발언을 하였으니, 그의 사상에 커다란
진전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돈오점수와 원돈신해는 같은 내용이지
만 서산(西山)은, 선의 뜻을 잘못 알고 돈, 점의 문을 정맥으로 삼거
나 원돈의 교를 종승(宗乘)으로 삼는 것은 큰 법을 비방하는 것이라
고 확실히 말함으로써, 돈오점수와 원돈신해가 선의 정통이 아님을
잘 밝혀 주었다. 그러나 요즘의 선계(禪界)에는 아직도 돈오점수와
원돈신해를 선(禪)으로 오해하는 이가 많으니, 참으로 통탄하고도 남
을 일이다.
*교외별전은 팔만장경과는 달리 가섭, 아난으로 이심전심(以心傳
心)하여 내려온 것이니, 선의 특색이다. 진귀조사설(眞歸祖師設)은
한국에만 있는 전설로서, 서산이 이를 인용하였으나 <선교결>의 본
지(本旨)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교외별전이란 배워서 알며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마음 길이 다하여 끊긴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알아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세존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
시니 가섭이 얼굴 가득히 미소한 뒤로부터, 나아가서는 후세에 전한,
이른바 달마의 '툭 트이어 성(聖)이랄 것도 없다'한 것과 육조대사의
'선, 악을 생각하지 말라'한 것과, 회양의 '수레가 멈추니 소를 채찍
질한다'고 한 것과 행사의 '여능의 쌀값'과 마조의 '서쪽 강물을 다
마심'과 석두의 '불법을 모른다'함과 운문의 '호떡'과 조주의 '차 마
심'과 투자의 '기름 팜'과 현사의 '흰 종이'와 설봉의 '공굴림'과 화산
의 '북 두드림'과 신산의 '바라 두드림'과 도오의 '춤을 춤'에 이르기
까지, 이들은 모두 옛 부처와 옛 조사들이 같이 교외별전의 곡조를
노래한 것이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머뭇거릴 수 있겠는
가? 이는 모기가 무쇠 소를 물어뜯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제 말세에 이르러 낮은 근기는 많으나 이들이 교외별전의 근기
가 아니므로 다만 원돈문의 이치의 길, 뜻의 길, 마음의 길, 말의 길
로써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見聞信解]을 귀하게 여길 뿐으로 이치
와 뜻과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져 자미(滋味)가 없고 만지지 못하는
곳에서 칠통을 두드려 부수는 경절문(徑截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제 그대가 팔방의 납자 무리
들을 접대할 때 칼을 쓰되 긴밀히 하여(사량복탁으로) 억지로 이치
에 닿지 않는 말을 하지 말 것이요, 바로 본분인 경절문의 활구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쳐 스스로 얻게 하여야만 할 것이니 그것이
바야흐로 종사의 사람을 위하는 됨됨이니라.
만일에 배우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함을 보고 문득 뻘밭으로 이끌
어 교리를 말하면 사람의 눈을 멀게 함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만일에
종사가 이 법을 어기면, 비록 설법하매 하늘에서 꽃비가 어지러이
쏟아져 내릴지라도 이는 모두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내닫는 것이
될 뿐이다.
吾所謂敎外別傳者 非學而知思而得者也 須窮心路絶然後 始可
知也 須經自肯點頭然後 始可得也 始不聞乎 自釋尊 拈花示衆
迦葉 破顔微笑 乃至出於口而傳之於後一 達磨廓然無聖 六祖
善惡不思 讓師車滯鞭牛 思師廬陵米價 馬祖吸盡西江 石頭不
會佛法 至於雲門胡餠 趙州喫茶 投子沽油 玄沙白紙 雪峰 毬
禾山打鼓 神山敲羅 道吾作舞 斯等 皆先佛先祖 同唱敎會別傳
之曲也 思量得� 擬議得� 可謂蚊子之上鐵牛也 今當末世 多
(301)是劣機 非別傳之機也 故 只貴圓頓門 以理路義路 心路
語路 生見聞信解者也 不貴徑截門 沒理路沒義路 沒心路沒語
路 沒滋味無摸索底上 打破漆桶者也 然則如之何而可也 今師
對八方衲子之輩 下刃要緊 不得穿鑿 直以分分徑截門活句 敎
伊自吾自得 方是宗師 爲人體裁也 若見學人 不薦 便與拖泥說
敎 人眼不少 若宗師違此法 則雖說法 天花亂墜 總是癡狂外
邊走也(302)
*설교(說敎)의 교(敎)는 <선가귀감>에서 '교라 함은 돈오점수이다
[敎也者는頓悟漸修라]'고 한 그것이다. 근기가 낮다고 하여 사구(死句)
인 원돈신해, 돈오점수로써 사람을 가르치면 배우는 사람의 눈을 다
멀게 하며, 아무리 설법을 잘 하여도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내닫
는다[痴狂外邊走]'고 하였으니, 무서운 경책이다.
서산도 <선가귀감>을 지은 시절 -44세 때- 에는, 돈오점수의 교
의(敎義)를 먼저 배워 익힌 뒤에 교의 뜻을 놓아 버리고[放下敎義]
참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묘향산 금선대(金仙臺)
시절에 이르러서는 공부가 익어가면서 사상도 바뀌어, 원돈, 점수는
사구이며 지해의 병[知解之病]이니 '사람의 눈을 멀게 함이 적지 않
다[ 人眼不少]'고 하여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고, 만일에 그를 따르
지 않으면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내닫는다'고 심히 나무랬으며,
또 한편으로 그의 <선교석(禪敎釋)> 끝부분에서 '교를 중히 여기고
마음[선]을 가벼이 여기면 비록 많은 겁을 거쳐 닦더라도 모두 천마,
외도가 된다[重敎輕心[禪]하면雖歷多劫하여도盡作天魔外道라]'고까지 극단
적으로 말하였다.
보조는 서산과는 달리 원돈신해는 사구이며 불법 지해의 병이라
고 배척하여 놓고도, <간화결의론> 끝부분에서는 '증지가 현전(現
前)한 사람은 오늘날 보기도 드물고 듣기도 드물기 때문에, 다만 화
두참의문[사구]에 의지하여 바른 지견을 밝히는 것이 귀할 따름이다
[證智現前者는 今時에 罕見罕聞故로 今時에 但貴依話頭參意門[死句]하야
發明正知見耳라]'고 하였으니, 보조는 이만큼 선종의 안목에 혼란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낮고 열등한 근기라 하여도 활구(活句)만으로 지도하여야
하거늘, 자기가 지적한 사구인 지해의 병을 거듭 권장하였으니, 결국
<간화결의론>도 용두사미가 되어 버렸다. 끝부분에서 '활구를 잘 참
구하라[參詳活句]'고 말하였지만 활구를 잘 참구하는 것이 그의 진의
일진대 '참의사구(參意死句)'를 어째서 거론했는지 모르겠다. 만일에
선종의 바른 법안을 가진 스승[正眼宗師]이라면 오직 활구로써 나아
갈 뿐 '참의사구'는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도 서산은 보조와
는 달리 경절활구(徑截活句)로써 일관하였으니 후세의 명훈(明訓)이
되었다.
만일에 배우는 사람이 이 법을 믿으면 비록 금생에 철저한 깨침
을 얻지 못하여도 목숨을 마칠 때에 악한 업에 끌리지 않고 바로 깨
달음의 바른 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옛날 마조가 한 번 소리치자
백장이 귀먹었고 황벽이 혀를 내둘렀으니, 이는 임제종의 연원이다.
그대는 반드시 정맥을 가려서 종안이 분명할 것이므로 이렇게 누누
히 말하는 것이니, 뒷날 이 노승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만일에 노승
의 말을 저버리면 반드시 부처님과 조사의 깊은 은혜를 저버리는 것
이 될 것이니,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살펴야 한다.
若學人信此法則 雖今生 未得鐵悟 臨命終時 不被惡(307)業所
牽 直入菩提正路也 昔馬祖一喝也 百丈 耳聾 黃檗 吐舌 此
臨濟宗之淵源也 師必擇正脈 宗眼分明故 如許縷縷 後日 莫辜
負老僧也 若辜負老僧 則必辜負佛祖深恩也 詳悉詳悉(308)
*이 <선교결>은 서산 만년의 명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위의 글
과 같이 선(禪), 교(敎)가 엄연히 구별되어 있으므로, 선교일치(禪敎
一致) 운운하면서 혼동하지 말 것이며, 말세의 낮은 근기라고 하여
원돈사구, 지해의 병으로 그릇 들어가게 하지 말고 오직 종문정전
(宗門正傳 선종의 법을 바로 전함)의 활구를 내세워야 한다.
선문의 가장 큰 병은 원돈지해에서 오는 점수사상이니, 오직 육조
의 '유전돈법(唯傳頓法 오직 돈법만을 전함)'의 유법(遺法)을 지켜서
참구하는 화두[所參話頭]에 마음과 힘을 다할 것이며, 공부하는 가운
데 나타나는 경계와 지해(知解)에 병들지 말고 오매일여(寤寐一如
자나 깨나 한결같음)와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사무쳐 밝음)을
참으로 깨달음으로서 불성을 밝게 보아 본분납승(本分衲僧)으로서
불조(佛祖 부처님과 조사)의 정법을 계승하기 바란다.
제2권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머리말
이 논을 지은이는 마조 도일(馬祖道一) 스님의 제자인 대주 혜해(大
株慧海)스님입니다.
스님의 전기는 명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고 다만 [조당집(祖堂集)]권
14,[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6 등에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이를
종합해 보면 마조스님을 6년간 모시고 살았다는 사실만이 스님의 생존
연대를 추정할수 있는 유일한 단서 입니다.
혜해스님은 건주(福建省) 사람으로 성은 주[朱]씨이며 월주(浙江省)의
대운사 도지(道智)스님에게 출가 득도 하였습니다.
그후 스님은 강서(江西)에 있는 마조스님을 찾아가 뵈오니, 마조스님
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와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의 보배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떠나 사방으로 돌아다니
면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떤 불법(佛
法)을 구하려 하는가??"
그러자 혜해스님이 절을 하고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혜해 자신의 보배창고 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 너의 보배창고이다. 일체가 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사용[使用]이 자제한데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이 말 끝에 혜해스님은 크게 깨쳐서 자신의 본래 마음을 알았는데,
그것은 지적인 이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뛸듯이 기뻐서 절을 올려 감사를 드리고 6년 동안 마조스님을
시봉하였습니다.
그 후 도지스님이 연로 하시므로 대운사로 다시 돌아와서 도지스님을
봉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취와 활동을 감춘채 겉으로는 어리석게 살면
서 [돈오입도요문론 (頓悟入道要門論)] 한 권을 저술 하였습니다. 이책
을 조카 상좌인 현안(玄晏)스님이 훔쳐서 마조스님에게 보이니 스님이
이것을 보시고 대중들에게
"월주(越州)에 큰 구슬이 있으니 둥글고 밝은 광명이 비추어 자유자
재로와 걸림이 없구나"
하고 감탄하시었습니다. 대중가운데 혜해스님이 주씨임을 알고 있던
자가 있어서 큰 구슬(大珠)은 바로 혜해스님을 크게 칭찬하는 말임을 알
아차리고,
"옛날 같이 살았을때는 그렇게 훌륭한 스님인줄 몰랐는데 이제보니
큰 도인임에 틀림 없구나."
하고 다시 스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도반을 이루어 앞을 다투어 월주의 스님 문하에
들어와서 공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혜해스님을 대주(大珠)스
님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마조스님 문하에서 대주스님의 위치를 본다면 마조스님 비문에서나
[경덕전등록],[조당집]에서나 모두 스님을 마조 스님 수제자(首第子)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덕전등록]에 1700여명의 큰 스님 법문이 실려
있지만, 그 중에서도 대주 스님의 법문이 가장 많이 실려있고 제 28권에
도 다시 스님의 긴 법어가 따로 실려 있습니다.
마조스님의 정맥은 백장(百丈)스님에게로 내려갔다고 하는 것이 선가
의 정설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백장(百丈)스님, 남전(南泉)스님, 법
상(法常)스님들보다 대주스님이 더 유명하였으며 천하에 이름을 더 날렸
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돈오입도요문론]은 당대에 명성을 떨친
대주 스님의 저술이고 또 선가의 대조사이신 마조스님이 극찬한 책이므
로 선종(禪宗)의 정통사상을 아는데 있어서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라
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가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육조단경(六祖壇
經)] 이라든가, [전심법요(傳心法要)]라든가, [백장광록(百丈廣錄)]이라
든가 하는 선종의 어록들이 많이 있지만 이러한 어록들은 당시 사람들
이나 후세 사람들이 그 스님이 입적 하신뒤에 그 법문을 기록하거나 수
집한 것이지 본인들이 직접 편찬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돈오입도요
문론]은 대주스님이 직접 저술하였으므로 거기에 가필이나 착오가 없다
고 보며 다른 어떠한 어록보다도 완전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마조스님이 인가하신 논이니 만큼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정확하게 기술한 것으로서, 선종 초기의 근본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증도가(證道歌)와 함께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돈오(頓悟)란 구경각(究竟覺)을 말합니다. 즉 제8 아뢰야 근본 무명이
완전히 끊어져서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하여 진여본성(眞如本性)
을 깨친 증오(證悟)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도를 정등각한 구경각을 돈오
라고 하는 만큼, 입도(入道)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성불과 같은 뜻으로
서 증도라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돈오입도요문론]은 영가
스님의 [증도가]와 그 사상과 내용이 같다고 할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