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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전통시조보존회 원문보기 글쓴이: 운현
1. 아버지를 찾아온 유류와 고구려 왕실의 왕위 다툼
주몽의 원자 유류에 대한 이야기는『삼국사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주몽은 졸본으로 망명하기 전에 부여 여자 예씨와 혼례를 올린 몸이었다. 그리고 졸본으로 망명할 당시 예씨는 임신 중이었다. 하지만 모친 유화부인으로부터 금와의 맏아들 대소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듣고 오이, 마리, 협보 등의 친구들과 함께 급히 졸본으로 몸을 피했다.
주몽이 떠난 뒤 예씨는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이름을 유류[孺留, 유리(類利)라고도 전함]라고 지었다(유류가 태어난 해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략 주몽이 왕위에 오르기 한 해 전인 서기전 38년이나 이듬해인 서기전 37년 정도로 추정된다).
유류는 자라면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모양이다. 소년으로 성장한 유류가 어느 날 참새를 잡으려고 하다가 실수하여 물 긷는 아낙의 물동이를 깨뜨린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아낙은 ‘아비 없이 자란 자식이라 돼먹지 못했다’고 꾸짖는다. 이 말을 들은 소년 유류는 집으로 돌아와 예씨에게 아버지에 대해서 캐묻는다.
이에 예씨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네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아버지의 비상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남쪽 지방으로 도피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셨다. 네 아버지가 떠나실 때 내게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칠각형의 돌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하고 말하셨다.”
예씨로부터 이 말을 들은 유류는 그날부터 산을 헤매며 주몽이 남긴 유물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는 주변 산 어디에서도 칠각형의 돌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유류는 몹시 낙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는 않았다. 낮이면 주변 산을 뒤지며 칠각형의 돌과 소나무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항상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유류는 산을 헤매다가 몹시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루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그 순간 유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바위 틈새에 끼인 금속성의 물건이 내는 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몇 번에 걸쳐 같은 동작으로 마루에 힘껏 앉아보았다. 그때마다 어디선가 그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한 끝에 유류는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그 소리는 바로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유류는 주춧돌을 면밀히 살펴보게 되었고, 그것이 칠각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자 불현듯 아버지가 남긴 말이 떠올라 기둥 밑을 조사하였다.
과연 그 곳에는 아버지가 남긴 징표가 있었다. 부러진 칼 조각이었다. 주몽은 자신의 칼을 동강내어 징표로 삼고, 나중에 그 징표를 대조하여 아들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유류가 간신히 아버지의 유물을 찾아냈을 때는 이미 많은 세월이 흐른 뒤였다. 할머니 유화도 이미 죽고 없었고, 음으로 양으로 예씨 모자를 보살펴 주던 금와왕도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금와의 맏아들 대소가 동부여의 실질적인 왕으로 군림했다.
대소의 군림은 곧 예씨 모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류는 옥지, 구추, 도조 등의 친구들과 의논한 후 어머니 예씨와 함께 고구려로 탈출할 것을 다짐하고, 서기전 19년 4월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여 고구려 땅을 밟는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당시 중병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던 주몽은 아내와 아들이 찾아오자 매우 기뻐하였고, 유류를 태자에 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조정은 두 파로 나뉘게 된다. 주몽의 의중을 파악하고 유류의 태자 책봉에 찬성한 유류파와 유류의 태자 책봉을 반대하고 소서노의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를 지지하고 있던 비류파로 갈라졌던 것이다.
유류파의 중심인물은 주몽과 함께 망명한 오이, 마리, 협보를 비롯하여 대표적인 무장 세력인 부분노와 부위염, 고구려 토착 세력인 탁리, 사비, 설지 등이었고, 비류파의 중심인물은 소서노의 지지기반인 계루부 출신의 관리들과 오간, 마려 등의 중신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두 파의 대립은 유류파의 승리로 끝났다. 고구려 개국 이후 계루부는 동명성왕에 의해 거의 장악당한 상태였고, 나머지 네 부족 역시 동명성왕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명성왕의 고향 친구들인 오이, 마리, 협보 등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도 유류파가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류는 태자에 책봉되었고, 비류파는 쫓겨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소서노와 그녀의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비롯하여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는 머물 곳을 찾아 남쪽으로 떠났다. 남쪽으로 떠난 그들은 백제를 세우게 된다. 이 때 졸본의 많은 백성이 그들을 따라 나섰다. 이 때문에 민심이 이반되어 유류는 즉위 후에도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급기야 도성을 옮기기에 이른다.
비류파가 떠난 뒤, 유류는 동명성왕 측근들의 보필을 받으며 지냈다. 그리고 태자 책봉 5개월 뒤인 서기전 19년 9월에 동명성왕이 생을 마감함에 따라 고구려 제2대 왕에 올랐다. 그가 바로 유리명왕이다.
2. 유리명왕의 정권 장악 노력과 고구려의 격변
(?~서기 18년, 재위기간 : 서기전 19년 9월~서기 18년 10월, 36년 1개월)
주몽의 원자 유리명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구려 조정은 한 차례 정쟁을 치른다. 조정을 장악하려는 유리명왕과 이를 저지하려는 개국공신들 사이에 팽팽한 힘 싸움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유리명왕은 동명성왕의 맏아들로 동부여 출신의 왕후 예씨 소생이며, 이름은 유류 또는 유리이고, 동부여에서 서기전 38년 또는 서기전 37년경에 태어났다. 이후 장성하여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망명하였고, 서기전 19년 4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그 해 9월에 동명성왕이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고구려 제2대 왕에 즉위하였다.
왕위에 오른 유리명왕은 즉위 이듬해인 서기전 18년 7월에 다물후 송양의 첫째 딸을 왕후로 맞아들여 지지기반을 닦는다. 다물후 송양은 한때 비류국의 왕이었고, 고구려에 복속된 이후에는 동명성왕의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옛 비류국인 다물 자치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외척으로 삼는 것은 유리명왕에게 여러 모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송양의 딸은 시집 온 이듬해 10월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유리명왕은 왕후 송씨의 동생인 송양의 둘째 딸을 맞아들여 왕후로 삼는다. 그리고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개국공신들과 혼인관계를 맺는다.
자기 세력이 없던 유리명왕은 이와 같은 혼인관계를 통해 세력들을 무마시키며 점차 지지기반을 확대하였다. 하지만 정권 확대를 위한 이 같은 온건적 태도는 재위 11년인 서기전 9년의 선비족 토벌전쟁을 계기로 더욱 공격적으로 변한다. 유리명왕은 지속적으로 고구려 변방으로 밀려들고 있던 선비족 토벌전쟁을 계기로 힘을 강화하여 조정을 장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선비족은 자주 요수를 넘어와 부여와 고구려 변방 지역을 대상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그들은 형세가 유리하면 여지없이 밀고 들어와 노략질을 감행하고 전세가 불리하면 요서 지역의 험산 지대로 숨어버리는 일종의 게릴라 전술을 쓰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의 변방은 항상 불안에 휩싸여야 했다.
백성들의 불안감이 짙어지자 유리명왕은 드디어 선비를 토벌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부분노에게 대군을 내주어 토벌작전을 감행한다.
토벌작전의 선봉장으로 나선 부분노는 동명성왕과 함께 고구려의 영토확장 전쟁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동명성왕 6년인 서기전 32년에 오이와 함께 태백산 동남방에 있었던 행인국을 정벌한 장수도 바로 그였다. 그는 이 같은 많은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선비족을 응징할 전략을 세웠고, 마침내 선비족의 항복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유리명왕은 이 선비족 토벌전쟁에 직접 참가함으로써 군주로서의 위엄을 갖추게 되었고, 그 같은 무력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권 장악의 기회를 노리게 된다.
이 무렵 고구려와 동부여 사이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는 대소가 동부여의 왕이 되면서 고구려를 적대시하고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을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소모전으로 내부적인 어려움을 겪는 대소는 유리명왕 14년인 서기전 6년에 화친을 제의하고 인질의 교환을 요청하였다. 이에 유리명왕은 화친제의를 받아들여 태자인 맏아들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강경론자들의 반발과 도절의 반대로 고구려는 인질 교환 제의에 응하지 못했다.
화친제의를 거절당한 대소는 그해 11월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였다. 하지만 폭설로 인하여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는 바람에 동부여군은 제풀에 지쳐 퇴각하고 말았다.
대소는 퇴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고구려에 대한 침범을 자행했다. 이 때문에 유리명왕은 항상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급기야 다시금 대소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이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부여와의 전쟁을 두려워하던 유리명왕이 대소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이려 하자 강경론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하지만 유리명왕은 화친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강경론자인 탁리와 사비 등을 교시(郊豕, 교제에 쓸 돼지)사건을 일으켜 죽이기에 이른다.
유리명왕은 교제(郊祭, 왕이 들판에 돼지를 바치며 천지신명께 드리는 제사)에 쓸 돼지를 놓아주고, 탁리와 사비로 하여금 그 도망간 돼지를 잡아오게 한다. 그런데 그들은 돼지를 잡자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칼로 다리의 힘줄을 잘라버렸다. 이에 유리명왕은 교제에 쓸 돼지에 상처를 냈다는 이유로 그들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서기전 1년 경신년 8월에 일어난 이 ‘교시사건’ 이후 유리명왕은 갑자기 중병을 앓기 시작했다.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무당을 불렀더니, 무당은 ‘탁리와 사비의 귀신이 화근’이라며 왕이 귀신들에게 사죄하라고 하였다. 이에 유리명왕은 무당의 말대로 탁리와 사비의 귀신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병이 나았다.
그렇지만 유리명왕에겐 또 다른 난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인 서기 원년 1월에 태자 도절이 죽은 것이다. 그동안 부여에 대하여 강경론을 내세우며 유리명왕의 화친정책을 반대하고 있던 도절이 왜 죽었는지에 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유리명왕이 병상에서 일어난 시점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범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병상에서 일어난 유리명왕은 교시사건으로 강경파의 힘이 약화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시금 동부여와 화친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태자 도절은 끝까지 화친을 반대하다가 죽었을 것이다. 죽음의 형태는 자살일 수도 있고, 유리명왕의 명에 의한 타살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의 죽음 이면에 유리명왕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교시사건으로 탁리와 사비가 죽고 다시 태자마저 죽자, 졸본성의 백성들은 불안에 떨고 민심은 점차 유리명왕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유리명왕은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고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천도를 결심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교제에 쓸 돼지를 이용한다.
서기 원년 3월 유리명왕은 돼지를 놓아주고 측근인 설지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는데, 이는 겉으로는 교시를 잡아오는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진짜 목적은 새로운 도읍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도읍지를 알아보러 떠난 설지는 얼마 뒤 궁궐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국내의 위나암이 새 도읍지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고했다. 설지의 보고를 받은 유리명왕은 그해 9월에 몸소 국내에 가서 지세를 돌아본다. 그리고 위나암에 도성을 쌓게 하고, 도성이 완성되자 서기 3년 10월에 마침내 도읍을 위나암으로 옮겼다. 이로써 졸본성 시대는 종결되고, 위나암성 시대가 도래 하였다. 유리명왕은 위나암으로의 천도를 통하여 부여의 전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한편 정권 장악의 기틀을 마련한다.
위나암으로 천도한 후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유리명왕은 그해 12월에는 무려 닷새 동안이나 사냥을 즐기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는 변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위나암에서 오랜만에 사생활을 즐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국공신인 대보, 협보 등은 유리명왕에게 사냥을 그만두고 새 도읍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유리명왕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협보를 파면하여 관가의 농원을 관리하게 하였다. 선제 동명의 친구이자 개국공신인 협보를 한낱 관가의 농원지기로 보내버린 것은 귀양조치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협보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구려 땅을 벗어나 남한으로 떠나버린다(그 후 협보는 남한에서 다파라국을 세운다).
맏아들 도절이 죽은 후 둘째 아들 해명이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그는 천도 이후에도 졸본성에 남아 그 곳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용감하였기에 황룡국 왕이 찾아와 그의 용기를 시험하였다.
황룡국 왕은 해명에게 사신을 보내 단단한 활을 하나 선물하였다. 그러자 해명은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꺾으면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강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위나암성에 알려지자 유리명왕은 몹시 분개하였다. 유리명왕은 자기의 힘을 자랑한 해명을 아버지를 능멸한 불효자로 규정하고 황룡국 왕에게 사람을 보내 해명을 죽이라고 했다.
해명이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는 말을 들은 유리명왕은 필시 해명이 그 힘을 믿고 반역을 도모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민심이 이반되어 천도를 감행했는데, 그 구도읍지에 머물고 있는 태자 해명은 오히려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유리명왕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했을 뿐 아니라 아들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다. 그러던 터에 황룡 왕의 활을 꺾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황룡 왕의 사신이 유리명왕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황룡국은 항상 독립의 기회를 엿보았을 것이고, 유리명왕이 왕태자를 경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고의로 이 같은 일을 획책했을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내막이야 어찌 됐든 유리명왕은 그 활 사건으로 해명을 죽일 결심을 했고, 해명을 죽이라는 부탁을 받은 황룡 왕은 졸본으로 사신을 보내 태자를 초청한다. 이에 해명의 측근들은 초청에 응하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해명은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황룡 왕을 만난다. 그러나 황룡 왕은 해명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여 죽이지 않고 돌려보낸다.
이처럼 황룡 왕이 해명을 살려놓자 유리명왕은 서기 9년 3월에 졸본으로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칼을 내주고 자결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해명은 순순히 명령에 복종하여 자결하였고, 이로써 유리명왕은 자신의 아들을 두 명이나 죽인 잔혹한 임금이라는 백성들의 원성을 듣게 된다.
고구려에 이 같은 어려운 상황이 도래하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동부여의 대소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동부여를 섬기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협박을 가한다. 이에 유리명왕은 동부여를 섬길 것을 맹세하는 답장을 보낸다.
그런데 그 무렵 부여에서 내분이 일어난다. 아마 대소와 그의 여섯 형제가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고구려는 전열을 가다듬고 부여의 침입에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서기 12년에 중원의 내분을 틈타 동호와 흉노가 대거 남하하고, 한에 예속되어 있던 요서의 맥족이 대거 봉기하였다. 이에 당황한 신(新)의 왕망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원군 요청을 거절하자 왕망은 요서 대윤 전담을 시켜 고구려를 치게 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에 밀린 한군은 대패하고, 전담도 전사하고 말았다.
전담의 전사 소식을 접한 왕망은 엄우를 시켜 다시금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이 때 엄우의 계략에 말려든 고구려 장수 연비가 죽음을 맞는다.
이 때부터 유리명왕은 한나라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고, 이 틈을 노려 부여군이 고구려를 침입해 왔다. 하지만 부여군은 태자 무휼이 이끌던 수비대의 전략에 말려 전멸했다.
고구려군이 이렇게 승전을 거듭하자 유리명왕은 서기 14년 8월에 오이와 마리에게 군사 2만을 내주어 고구려 서쪽의 양맥을 치게 하여 아우르고, 다시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고구려현은 한의 동방정책을 담당하던 요서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에, 고구려현을 차지한 것은 한의 동방정책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렇듯 만년에 과감한 영토확장 전쟁에 몰두하던 유리명왕은 서기 18년 4월에 넷째 아들 여진이 물에 빠져죽는 불행한 사건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해 7월에 병약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휴양처인 두곡에 행차하여 휴양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재위 36년 1개월 만에 두곡의 이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57세 가량이었다.
능은 두곡 동원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유리명왕(孺璃明王)이라 하였다.
3. 유리명왕의 가족들
유리명왕은 왕후 송씨를 비롯한 4명의 부인에게서 6남 1녀를 얻었다. 이들 부인 가운데 송양의 1녀 왕후 송씨는 장남 도절을 낳은 듯하며, 송양의 2녀 왕후 송씨는 해명, 대무신왕, 민중왕, 여진 등 4남 1녀를 낳은 것으로 판단된다. 유리명왕은 사서에 기록된 부인 이외에도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렸을 것으로 판단되는 까닭에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자식들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여섯 째 아들 재사는 기록되지 않은 부인의 소생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서에 기록된 인물들에 한정하여 가족사를 정리한다.
이들 가족들 중에서 대무신왕과 민중왕은 각각 그 실록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외에 이름이 기록된 나머지 가족들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송양의 1녀 왕후 송씨(생몰년 미상)
유리명왕의 제1왕후 송씨는 유리명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서기전 18년 7월에 왕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그녀는 비류 지역의 유력가 송양의 장녀이다. 송양은 한때 비류강 근처에 있던 비류국의 왕이었으나, 동명성왕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비류국은 고구려에 복속된 뒤에 다물도로 개칭되었으므로, 그는 다물후에 봉작되어 다물도를 다스렸다(송양을 5부족 가운데 하나인 소누부의 부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유리명왕이 즉위 후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후로 맞아들인 것은 다소 정략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아버지 주몽의 후광으로 개국공신들의 보필을 받고 있긴 했으나 실질적인 힘이 없던 유리명왕은 송양의 딸을 아내로 취함으로써 다물도의 군사력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으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유리명왕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여 왕후로 입궁한 제1왕후 송씨는 생명이 길지 못했다. 그녀는 입궁한 지 1년 3개월 만인 서기전 17년 10월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망 원인은 분명하지 않지만 사망 시점이 결혼 1년 3개월 만인 점을 고려할 때 산욕으로 죽은 것으로 보이며, 이 때 태어난 아이가 장남 도절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녀의 능과 시호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송양의 2녀 왕후 송씨(생몰년 미상)
제2왕후 송씨에 대한 기록은『삼국사기』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 대무신왕의 어머니를 다물후 송양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대무신왕은 서기 4년(유리명왕 23년)에 태어났고, 왕후 송씨는 그 20년 전인 서기전 17년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서기전 17년에 사망한 왕후 송씨는 대무신왕의 어머니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누구인가?『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그녀 역시 송양의 딸이라면 유리명왕은 송양에게 두 명의 딸을 맞아들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시 풍속으로는 자매가 동시에 한 사람에게 시집가는 일도 허다했으므로 이 같은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사를 기록한 사람들이나『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이 이 두 사람의 송씨를 한명으로 처리한 듯하다.
따라서 유리명왕의 제1왕후 송씨가 아닌 그녀의 여동생이자 대무신왕의 어머니 송씨를 여기에서는 제2왕후 송씨로 기록한다.
제2왕후 송씨가 유리명왕에게 시집온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제1왕후 송씨와 함께 입궁했을 수도 있고, 그녀가 사망한 직후나 아니면 수년 뒤에 입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둘째 아들 해명이 서기전 12년에 태어난 것을 감안할 때 적어도 제1왕후 송씨가 사망한 때로부터 4년이 지난 서기전 13년 이전에는 입궁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제2왕후 송씨의 입궁 시기는 제1왕후 송씨의 사망 직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입궁 후 그녀는 언니의 아들 도절을 키우며 해명, 무휼(제3대 대무신왕), 여진, 해색주(제4대 민중왕) 등 4남과 우씨의 아내가 된 1녀 등을 낳았다.
그녀가 언제 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능에 대한 기록도 없다.
화희(생몰년 미상)
제1왕후 송씨가 죽은 해인 서기전 17년 10월 유리명왕은 두 명의 후궁을 맞아들인다. 화희(禾姬)는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골천 출신이다.
이 무렵 유리명왕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여러 유력자와 혼인 관계를 맺은 흔적이 보이는데, 화희는 그 유력자 가운데 한 집안에서 시집온 여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행정단위가 대개 곡ㆍ천 등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골천은 그 자치구 중 하나로 보인다.
5부족 중에 골천의 유력자인 화희의 가문은 당시의 유력자들 중에서도 꽤나 힘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는 화희가 유리명왕이 애첩인 치히를 내쫓아버리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사실에서 확인된다.
유리명왕은 화희 외에 한(漢)인 출신의 치희를 맞아들였는데, 이 때문에 화희와 치의 간에 다툼이 잦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유리명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을 지어 두 여자를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유리명왕이 사냥을 떠난 사이에 화희와 치희 간에는 욕설이 오가는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말다툼 중에 화희는 치희를 향하여 다음과 같은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네 년은 한인이 집에 살던 비첩인 주제에 어찌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느냐?”
이 말을 듣고 치희는 분통을 터뜨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유리명왕은 말을 타고 치희를 뒤쫓아 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리명왕이 지었다는 시가 ‘황조가’이다.
이렇듯 화희와 치희의 싸움 장면을 근거로 할 때 화희는 분명 유력자 집안 출신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화희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그녀가 자식을 낳았다는 기록도 없고, 어떻게 죽었다는 기록도 없다.
치희(생몰년 미상)
치희(치희)는 제1왕후 송씨가 죽은 해인 서기전 17년 10월에 화희와 거의 동시에 입궁한 여자이다. 그녀는 한나라 사람의 딸로서 유리명왕의 결혼정책과는 무관하게 입궁한 것으로 보인다.
화희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한나라 사람들을 무척 천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하긴 자기 나라를 떠난 망명인에게 좋은 대접을 했을 까닭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 사람들로부터 천한 대접을 받고 있던 한인의 딸이 후궁으로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그녀가 남달리 미색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미색으로 소문이 났고, 유리명왕은 그 소문을 듣고 그녀를 후궁으로 취했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따라서 치희는 화희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유리명왕은 화희보다는 치희를 총애했던 모양이다. 화희는 그 점을 참을 수 없어서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어 내쫓아버렸을 것이다.
화희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친정으로 가버린 차희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를 뒤쫓아 가던 유리명왕은 허탈한 마음으로 환궁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며 자신의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을 시로 읊었다.
편편황조 翩翩黃鳥(펄펄 나는 꾀꼬리는)
자웅상의 雌雄相依(암수 서로 정다운데)
염아지독 念我之獨(외로운 이 내 몸은)
수기여귀 誰基與歸(뉘와 함께 돌아갈꼬?)
흔히 ‘황조가’로 불리는 이 시가 치희에 대한 마지막 기록인 셈이다. 그 후 그녀가 돌아왔는지, 아니면 몇 명의 자식을 낳았는지, 또는 언제 죽었는지 등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도절(서기전 17년~서기 원년)
도절(都切)은 유리명왕의 맏아들이며, 제1왕후 송씨의 소생인 듯하다. 그리고 그를 송씨의 소생으로 볼 때 서기전 17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 도절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서기전 6년 1월에 부여 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화친조약을 체결하고 인질을 교환하자고 제의한 기록에서이다. 이 때 도절은 이미 태자에 책봉되어 있었으나 12살의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부여가 인질을 교환하자고 하자 유리명왕은 이를 승낙한다. 유리명왕은 당시 부여의 강성함을 겁내고 있었고, 한편으론 전쟁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부여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여 하루빨리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 같은 유리명왕의 생각에 따라 도절은 인질이 되어 부여로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도절은 부여로 떠나기를 두려워했다. 또한 부여에 대한 강경론을 고수하는 신하가 많아 유리명왕은 부여와의 화친약조를 지키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해 11월에 부여는 5만의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에 쳐들어온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폭설이 내려 부여의 군사는 퇴각한다. 그렇지만 부여의 전쟁 위협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유리명왕은 어쨌든 부여와 화친을 맺어 전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고, 그래서 지속적으로 화친 의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때마다 강경론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강경론자의 대표자는 탁리와 사비였다. 유리명왕은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교시사건’을 일으킨다.
유리명왕은 그들을 제거할 계략을 세우고 교제에 쓸 돼지를 놓아주고는 그들로 하여금 도망간 돼지를 잡아오게 하였다. 이에 그들이 돼지를 잡아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의 힘줄을 잘라 가지고 오자 교제에 쓸 신성한 제물에 상처를 입혔다는 죄목을 씌워 그들을 죽였다.
이렇게 해서 강경론자들을 누른 유리명왕은 다시금 부여와의 화친을 서두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18살의 청년으로 성장해 있던 도절이 강경한 자세로 유리명왕의 화친정책에 제동을 건다. 그는 부여에 인질로 갈 경우 십중팔구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리명왕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도절은 서기 원년 1월 죽음을 택한다.
이 죽음이 스스로 택한 자살인지, 아니면 유리명왕의 명령에 의한 자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정황으로 봐서 스스로 자살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즉,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고, 부여에 인질로 갈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몰리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뜻이다. ‘도읍을 갈라놓다’는 뜻의 ‘도절(都切)’이라는 그의 이름에도 자살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해명(서기전 12년~서기 9년)
해명은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이며, 제2왕후 송씨 소생으로 서기 4년 16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의 태자 책봉 한 해 전인 서기 3년에 유리명왕은 도읍을 졸본에서 위나암으로 옮겼는데, 이 때 해명은 졸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말하자면 고구려 조정은 당시 일종의 분조(分朝, 특별한 상황에서 임금의 역할을 분리하는 것)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졸본에도 여러 신하가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해명은 힘이 세고 용맹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황룡국의 왕이 해명을 시험하기 위해 튼튼한 활 하나를 선물로 보냈다. 그런데 해명은 황룡국 사신이 보는 앞에서 활을 힘껏 당겨 꺾어버렸다.
서기 8년 1월, 해명의 나이 20세 때 일어난 이 사건은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온다. 황룡국 왕이 선물로 바친 활을 사신이 보는 앞에서 해명이 꺾어 버렸다는 말을 들은 유리명왕은 “해명은 자식으로 효성이 없으니, 나를 위하여 그놈을 죽여주시오.”하고 황룡국 왕에게 말한다.
유리명왕은 자신에게 등을 돌린 졸본의 민심 때문에 천도를 결심했는데, 해명은 오히려 그 곳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유리명왕은 자신의 친아들인 해명을 시기하게 되었고, 한편으론 해명이 반란을 도모할까 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해명이 활을 부러뜨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선물을 상대방이 보는 앞에서 부러뜨린 것은 가히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심하면 전쟁도 불사할 만큼 외교상의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해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같은 행동을 저질렀다.
따라서 해명의 이 같은 행동을 전해들은 유리명왕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아들을 죽일 만큼 대단한 일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유리명왕은 황룡 왕에게 밀서를 내려 해명을 죽이라는 부탁을 한다. 이는 이미 그 사건이 있기 오래 전부터 유리명왕이 해명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유리명왕은 분조 형태를 더 오래 유지하다가는 자칫 해명에게 왕위를 찬탈당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리명왕의 밀서를 받은 황룡 왕은 활을 부러뜨린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가량 되었을 무렵인 서기 8년 3월에 졸본으로 사신을 보내 해명태자를 초청한다. 해명이 이 초청에 응하려고 하자 근신들이 강하게 만류하며 말했다.
“이웃 나라에서 이유 없이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그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이에 해명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황룡 왕 따위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해명은 이 같은 결연한 마음으로 황룡국으로 떠났다.
해명을 만난 황룡 왕은 처음에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고구려 조정과의 마찰을 우려한 탓인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 3월 유리명왕은 자신이 직접 해명에게 자살을 명령한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이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제 네게 칼을 내리노니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결하도록 하라.”
유리명왕의 명령을 받은 해명은 즉시 자결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근신이 그를 말리며 말했다.
“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께서는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왕의 사자가 한 번 와서 말한다 하여 자결한다면, 왕의 지시가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자 해명은 그의 만류를 뿌리치며 말했다.
“지난번에 황룡 왕이 강한 활을 보냈기에, 나는 그들이 우리를 업신여길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활을 잡아당겨 꺾음으로써 답한 것인데, 뜻밖에 왕께 견책을 당하게 되었소. 왕께서 불효의 명목으로 내게 칼을 내려 자결을 명하셨으니, 어떻게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소?”
이 같은 말을 남기고 해명은 여진의 동원 벌판으로 가서 땅에 창을 꽂아 놓고, 말을 타고 힘껏 달려 그 창에 찔려 자결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1세였다.
그가 죽자 유리명왕은 태자의 예로 동원에 장사토록하고, 그 곳에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해명이 창에 찔려 죽은 그 곳을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여진(?~서기 18년)
유리명왕의 넷째 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서기 18년 4월에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그가 익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리명왕은 슬퍼하며 사람들을 풀어 시체를 찾게 하였다. 하지만 시체는 한동안 발견되지 않다가, 수일이 지나서야 비류 사람 제수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 후 여진은 왕골령에 묻혔으며, 그의 시체를 찾은 제수에게는 금 10근과 밭 10경이 상으로 내려졌다.
이 여진의 죽음은 유리명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 여진이 죽은 후 유리명왕은 병상에 누웠고, 그해 10월에 사망한다.
재사(생몰년 미상)
유리명왕의 여섯 째 아들로 제6대 태조의 아버지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또는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봉작인 고추가(古鄒加, 조선의 대원군이나 부원군에 해당함)에 올라 있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4. 새로운 도읍지 위나암과 그 위치에 관한 가설들
유리명왕은 서기 3년(유리명왕 22년)에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의 위나암으로 옮긴다. 이 때 유리명왕이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의 위나암으로 옮긴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졸본은 구려의 옛 수도였기 때문에 구려시대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구려의 중심세력인 5부족의 힘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서노와 그의 아들들인 비류, 온조에 대한 지지 세력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유리명왕은 졸본 백성들의 민심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둘째, 졸본은 변방이 가까워 적의 침입이 용이한 곳이었다. 특히 부여와 아주 근거리에 있는 까닭에 항상 부여의 전쟁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셋째, 졸본은 자기 손으로 큰아들 도절을 죽게 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졸본이 민심이 유리명왕에게서 멀어졌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유리명왕은 졸본이 안정된 곳이 못 된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부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국내의 위나암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도읍지로 위나암을 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설지의 보고 내용에서도 재확인된다.
“제가 돼지를 따라 국내 위나암에 갔는데, 그 곳 자연이 준험하고,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 아니라 전쟁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 같은 설지의 말을 들은 유리명왕은 그해(서기 2년) 9월에 자신이 직접 위나암의 지세를 살피고 돌아온다. 그리고 설지의 말대로 새 도읍지로 적당하다는 판단을 하고 천도를 서두른다.
이 이야기는 유리명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즉 졸본성은 변방에서 가까워 항상 불안한 데 비해 위나암성은 부여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나라로부터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졸본과 위나암은 거리상으로 비교적 먼 곳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위나암은 도대체 어디였을까? 졸본을 요동지역으로 비정할 때 위나암은 요동에서 한반도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지역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흔히들 이 위나암성이 중국 길림성 집안현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는 잡안현에서 광개토왕릉비를 비롯한 많은 고구려 유물과 능이 발견된 데 따른 것인 듯하다.
집안현에는 현재 고구려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진 집안현(통구성)이 있는데, 평지에 건설된 이 성의 규모는 동쪽 벽 554.5미터, 서쪽 벽 664.6미터, 남쪽 벽 751.5미터, 북쪽 벽 715.2미터로 성벽의 총길이가 2,686미터에 달한다. 이외에도 집안현성 서북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총길이 6,951미터에 이르는 산성이 있다. 많은 학자가 집안현성을 국내성이라고 하고 산성자산성으로 불리는 이 산성을 위나암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산성을 서기 209년에 제10대 산상왕이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게 되는 환도성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산성 안에는 궁궐터로 보이는 큰 집터와 5개의 연못, 샘, 망대 등이 있다.
이 성에서 약 6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3개의 좁은 협곡지대를 막아 만든 관마장산성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작은 석성이 있는데, 이를 대천초소라고 한다. 또 그 부근에는 망파령산성과 패왕조산성이 있는데, 이 성들은 집안현성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고 있다.
이처럼 집안에는 위나암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유물들만으로 무조건 그곳을 위나암성터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발상이다.
일부 학자들은 집안이 고구려와 같은 대국의 수도가 들어설 곳이 못 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유리명왕 37년에 물에 빠져 죽은 왕자 여진을 비류수 사람이 건졌다는『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들의 반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말하자면 위나암성은 비류수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이 주장이 맞다면 위나암성은 다물도 근쳐야 한다.
주몽이 망명하여 처음 머무른 곳이 비류수 가였고, 송양의 비류국(다물도)이 있던 곳도 비류수 상류였다. 또 비류수가 바닷가 근처에 있는 강이라는 것도 이미 언급한 바 있다(「동명성왕실록」‘고구려 민족의 형성과 동명성왕 시대의 주변 국가들’의 비류 편 참조). 따라서 위나암성을 섣불리 집안현으로 단정하는 것은 발견된 자료에만 의지하는 안이한 발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위나암성의 위치는 아직까지 확정되지 못했다. 섣불리 그 위치를 확정하는 것보다는 많은 가설을 세우고 향후 이에 대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법이 될 것이다.
5. 유리명왕 시대의 주변 국가들
선비(鮮卑)
유리명왕 11년(서기전 9년), 고구려는 노략질을 일삼고 있던 선비를 정벌해 속국으로 만든다.
선비는 원래 사르모론(西喇木倫)강 유역에 흩어져 있던 동호족의 지파로서 유목민이다. 이들은 요서 지역 및 대흥안령산맥, 소흥안령산맥, 요동 등 넓은 곳에 분포해 있었으며 유리명왕 당시에는 나라를 형성하지 못했다.
선비란 명칭은 최초로『초사(楚辭)』‘대초(大招)’에 보이는데 ‘가는 허리 빼어난 목덜미, 마치 선비 같아라’는 구절로 보아 어떤 민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학식이 뛰어나고 세상 이치에 밝아 그 품성이 고고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었다.
또『후한서』「오환선비전」에는 ‘선비는 동호의 지파이다. 따로이 선비산에 의지하여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선비라는 명칭이 선비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를『초사』‘대초’의 기록과 연결해 보면 선비산을 도를 닦는 고고한 사람들이 사는 산을 일컫는 것이고, 선비족은 그 산을 자신들이 출원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비’라는 명칭에는 민족적 자부심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명칭을 표방하고 나선 선비족에 대한 기록은 주나라 초의 일들을 다루고 있는『국어(國語)』‘진어(晉語)’에도 나타나 있는데, ‘선비는 동이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흔히 동호와 호맥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근거로 할 때 선비족이 동이족의 한 부류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표현이 아닐 것이다.
유리명왕 당시만 하더라도 선비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인구도 적었으며, 힘도 하나로 결집되지 못했다. 하지만 2세기가 되면 선비족의 힘을 강성해진다. 이 시기이 선비족에는 흉노와 탁발, 정령, 오환, 한족 등이 일부 포함되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다.
양맥(梁陌)
유리명왕 33년(시기 14년)에 유리명왕은 오이와 마리에게 명령하여 군사 2만으로 양맥을 멸망시키고,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 현을 점령한다.『삼국사기』는 이 고구려 현이 현도군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멸망당한 양맥은 맥족이 세운 국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양맥을 멸망시킨 후 진군하여 고구려 현을 점령했다는 것은 양맥과 고구려 현이 인접해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 현은 비록 한에 속해 있었지만 그 백성들은 맥족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고구려가 양맥을 무너뜨릴 당시의 정세를 살펴보면 한을 무너뜨린 왕망이 고구려를 침입했다가 패배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고구려 장수 연비를 꾀어내어 죽임으로써 고구려와 왕망의 신(新) 사이에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양맥과 고구려 현을 점령한 것은 왕망의 신을 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양맥과 고구려 현은 한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한의 동방정책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양맥과 고구려 현을 점령하여 왕망의 동방정책 자체를 무력화시켰다.
당시 왕망 세력의 영향력은 요서까지 밖에 미치지 못했다. 요동에는 고구려와 부여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요수를 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영토확장을 노리고 있던 한의 왕망이 요동의 지리에 밝은 고구려 현의 맥족과 양맥을 앞세워 요동을 넘보기 시작했고, 고구려는 이 같은 한이 침략 정책에 맞서 고구려 현과 양맥을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양맥과 고구려 현의 위치는 요수에 인접한 요서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들이 요동의 지리에 밝았던 것으로 보아 요수를 쉽게 건널 수 있는 상류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처럼 요수의 상류에 있던 고구려 현이 현도군에 속했다는 것은 현도군 역시 요서 지역에 있었음을 의미한다(현도군에 대해서는「광개토왕실록」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황룡국(黃龍國)
황룡국은『삼국사기』유리명왕 27년(서기 8년)과 28년(서기 9년)에 등장하는 나라 이름이다. 이 황룡국 왕이 선물한 활을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 해명이 꺾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고구려 조정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던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황룡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동명성왕 3년(서기전 35년) 3월의 ‘황룡이 골령에서 나타났다.’는 기사이다. 이 때의 황룡이 황룡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면 황룡국은 서기전 35년에 처음으로 골령에 세워진 셈이다.
하지만 이 나라에 대하여 고구려가 응징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황룡국은 고구려에 예속된 자그마한 속국이었을 것이다. 황룡국 왕이 유리명왕의 청을 받는 입장이고, 또 고구려의 태자에게 선물을 해야 하는 처지였던 것도 이를 증명한다. 더구나 황룡국 왕이 선물한 활을 고구려 태자 해명이 부러뜨린 것을 보아도 황룡국은 고구려에 비해 아주 약소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황룡국이 있던 골령은 해명이 머물던 졸본과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황룡국 왕이 선물을 유리명왕에게 바치지 않고 해명에게 바쳤다는 것은 해명이 머물던 졸본이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졸본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이던 동명성왕 3년에 ‘황룡’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도 역시 이를 증명한다.
▶ 유리명왕 시대의 세계 약사
유리명왕 시대 중국은 전한 말기와 왕망의 신(新)나라 때에 해당하며, 외척 왕망이 한의 정권을 장악하여 정사를 좌지우지하다가 결국 한을 멸망시키고 신을 세운다. 이에 왕망은 동방과 북방으로 팽창정책을 감행하여 흉노를 격파하는 등 성공을 거두는 듯하다가 내부적인 한계와 고구려의 반격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서양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즉위하여 노예해방령을 선포한다. 이 시기에는 로마에는 게르만족이 밀려들어 로마의 변방을 압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