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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도 동백
그 섬에는
별이 뜨고
별이 진다
사랑이 깊어지면
마술에 걸린 듯
파란 하늘에서
붉은 옷고름을 추스르다
그만
뚝 떨어뜨린
별 하나
마디
죽순이 대나무가 될 때까지
하늘 높이 자라면서 고비를 넘긴 듯
일정한 간격마다 동그란 마디를 만든다
바람을 견디고, 눈비를 견디는 힘은
촘촘한 마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마디의 힘이 없었다면
하늘 높이 곧게 뻗은
텅 빈 몸뚱이를 지탱하지 못하고
조그만 바람에도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삶의 고비를 건너본 사람은 안다
고비를 넘기듯 몹시 괴롭고
얼굴빛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도 있었을 것이다
고열을 동반한 심한 몸살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아
삶이 무너질 고통이 따르는 아픔을 느끼는 것은
험난한 세상 앞에 기죽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가라고
대나무처럼 우리 몸도 쓰러지지 않게
단단한 마디 하나 만드는 것이다
박물관
사람들이 박물관에 와서 서성인다
천년의 활자가 박힌 항아리를 눈으로 훑고 지나간다
한 권의 책으로도 그들의 문장을 다 읽을 수 없지만
속이 훤히 보이는 꽉 막힌 유리 벽 안으로
사람들은 한 발짝도 들어서지 못하는데
묵은 족자 속 강물이 흐르고
시커먼 글자들이 살아서 튀어 나온다
죽은 자들의 소유물이었던 보물들을 훔쳐 왔거나
심해를 헤엄쳐 왔거나, 깊은 땅속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백 년이 걸렸을 것이다
그 억겁의 시간을 생각해보면 박물관 유리벽으로
스며드는 그들의 그림자는 금방이라도
바삭하게 부서져 버릴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도 저 인고의 세월 건너온 것처럼
사람들마다 가슴속에 바싹 마른 꽃을 걸어두고
깨어진 조각을 맞추듯 빗살무늬토기 같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파문들로 가득한
박물관 하나쯤 지어놓고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 냄새
팔순 넘은 우리 어머니
아침밥 드시다가
옆집 할머니 갑자기
저세상으로 가셨다는 소식 듣고
‘아이고 편히 가셨네’
‘나도 저렇게
아무런 고통 없이
저세상 가야 할 텐데……’ 하신다
나 죽거든
생장하지 말고 화장해서 묻어달란다
세상에 맡지 못할 냄새가
사람 썩는 냄새라고,
지난번 묘사 때
유자 하나 가져와 차 안에 두었다
얼마 되지 않아 유자는
엄마 얼굴처럼 바싹 말라 쪼그라들었다
아득한 시간을 건너온 거뭇한
유자 냄새가 차 안 가득하다
얼굴
하회탈 얼굴에
주름살이 없었더라면
조각 작품이 아니라
못생긴 얼굴에 불과했을 것이다
중년으로 접어든
내 얼굴
세월이 깎고 또 다듬어서 만든
하회탈
발가락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남쪽 바다
물과 물 사이에 모여 있는 섬들은
새벽부터 뱃고동 소리 요란하다
끊임없이 파도를 뒤집으며 바람에 온몸 맡겨두고
갈매기들이 찍어 놓은 발자국들 따라간다
그 섬들 사이에서 삶의 무게를 실은 배들이
끊어질 듯 허리를 부여잡고 쉼 없이 거친 물살 가르는
오밀조밀한 섬들 사이에 꼼지락거리며 사는
사람들과 섬들은 사람 몸으로 치면 발가락이다
정수리에서 가장 먼 그곳
답답하고 낡은 구두 안에서 헤지고 부르튼
발가락들이 허물어지는 줄도 모르고 물질하며
갯가에 앉아 종일 소꿉놀이한다
세발낙지가 빠르게 숨어들 때는
제살이 깎여 손발톱이 자랄 틈도 없다
망둥이들이 파놓은 숨구멍에 뽀글뽀글
밀물이 들어차면 낡은 구두를 벗은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울퉁불퉁한 발가락들이 하나둘
뭍으로 올라와 등짐을 풀면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에 연신 혈관은 굵어지고
물차들의 뜨거운 피는 더욱 빠르게 정수리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