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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 계간 「兒童文學評論」 25년간 101호째 펴낸 李在徹 교수
漢字 쓰는 잡지 붙들고 40년…『나 아니면 할 사람 없다는 생각으로 해왔다』
李 在 徹
1931년 경북 청도 출생. 경북고 졸업. 단국대 대학원 문학박사. 대구교육대 교수. 아동문학평론사 주간,발행인. 아시아 아동문학회 공동회장. 한국아동문학회 회장. 단국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등, 저서로는 아동문학개론, 아동문학사, 세계아동문학 사전 등
자신감 있는 목소리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학문적 이론을 정립하고 개척한 사람입니다』
인터뷰 요청을 위해 전화했을 때, 단국大 李在徹(이재철·71) 교수 자신이 본인을 소개한 말이다. 자신감 있는 中年의 목소리였다. 古稀를 넘긴데다 위암으로 胃완전절제 수술을 받은 바 있다는 이력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2001년은 李在徹 교수에게 남다른 한 해였다. 2001년 10월21일 李교수는 세종문화회관에서 古稀 기념식을 가졌다. 사재를 털어 25년간 발간해 온 아동문학 전문 계간지 「兒童文學評論」 100호를 기념하고, 古稀紀念論叢 「韓國現代兒童文學作家作品論 Ⅱ」를 출간하기 위해서였다.
『쇼를 한 번 했다. 실은 내 古稀가 2000년이었다. 나를 위해 古稀宴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한 해 미뤄서 「兒童文學評論」이 100호가 되는 시점에 맞췄다. 그리고 古稀를 핑계삼아 아동문학 관련 전문가들의 글을 받아 아동문학에 대한 선행연구를 정리했다』
개인의 힘으로 우리나라 아동문학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역량을 집결하는 데는 이른바 「쇼」가 필요했던 것이다. 회갑 때도, 정년퇴임 때도 李교수는 그것을 아동문학의 이론을 정리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李교수가 아동문학에 대한 사랑으로 일생을 아동문학에 바쳐온 지 40년, 이제 그는 우리나라 아동문학계의 거목으로 불린다. 아동문학 評論家 崔湧(최용)은 「李在徹論」에서 이렇게 평했다.
<史溪(편집자 注·李在徹의 號)는 투철한 역사적 사명감으로 척박한 아동문학의 황무지를 沃土로 전환시켰다. 小波(소파·방정환)가 일제 치하의 가시밭길을 아동문화운동의 희미한 등불을 들고 외로이 걸었다면, 史溪는 성인문학에 가려 입문기 문학 정도로 취급되는 문단 현실 속에서 사명감 하나로 아동문학의 활로를 暗中摸索했다>
李在徹 교수는 1931년 일제시대 때, 대지주의 3代 독자로 태어났다. 경북공립중학교를 거쳐 경북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이 드물던 1950년대에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는 경북대학교 대학원 현대문학석사 1호이다. 李교수와 같은 세대의 학자로는 李御寧, 金允植 등이 있다. 李在徹 교수가 同 世代 학자들에 비해 學界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이유는 문단에서 괄시받는 「찬밥」 신세의 아동문학을 택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李교수는 본인이 우연한 기회에 아동문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며, 한때는 그 때문에 상당히 고민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詩人으로서 그리고 詩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대성하고자 하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시문학 사전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1963년 전국 교육대학 공통교과서를 만드는 데 적임자가 없다 하여 내가 아동문학 항목을 집필하게 됐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아동문학에 투신하게 되었다』
경북대학교에서 시론, 소설론 등을 강의하던 李교수는 대구교육대학이 경북大 병설로 세워진 후 분리되면서 졸지에 대구교육大 교수가 되었다. 1전공이 詩, 2전공이 소설, 3전공이 아동문학이었는데, 3전공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맡아서 하다보니 어느새 국내에서 유일한 아동문학 이론 교수가 된 것이었다. 자신에게 되뇌듯 그는 말했다.
『내가 詩 안 쓰고 일반 문학평론 안 해도 할 사람 많아. 하지만 아동문학은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걸… 나 하나 헌신해서 아동문학 연구가 이뤄진다면 그게 보람인 게지』
부부가 만들고 배달하는 잡지
1982년 위암으로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은 李在徹 교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울 망우리에 있는 小波 方定煥 선생의 묘를 수습하는 것이었다.
『1983년 5월5일 묘역정화 및 碑 건립식에 올라온 方定煥 선생의 부인에게 기자가 마이크를 갖다 대자 「내가 죽으면 남편한테 李在徹 교수가 오래 살도록 부탁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인지 암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다』
李在徹 교수는 2002년 겨울호로 101호가 되는 「兒童文學評論」을 일컬어 자신의 생명줄이라 말했다. 실로 그의 아동문학에 대한 집념은 「兒童文學評論」을 통해 잘 드러난다. 「兒童文學評論」은 상업적으로 전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잡지이다. 제작비는 李교수가 자신의 연금 일부를 떼어 충당하고 있으며, 발송은 李교수의 부인 金美子씨가 도맡아 하고 있다. 아동문학가들이 휴가를 이용해 참여해 줄 뿐, 직원이라고는 李교수 부부가 전부인 셈이다.
『집사람이 소포 묶는 선수가 다 되었다. 사실 그 사람은 날 살린 사람이고, 오늘날 내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다. 그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아동문학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앉아서 돈을 벌어오기는커녕 매일 버리고 앉아 있었으니 말이다』
인쇄비를 지불하지 못해 책을 압류당하여 빚을 내어 다시 찾는 수모도 겪고, 도움을 받기로 양해를 구한 작가들의 오해를 받아 원고료 도둑으로 몰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당해가며 만들어 낸 책이 바로 「兒童文學評論」이다.
『언젠가 추운 겨울날, 택시에 책을 싣고 광화문 우체국에 가는데 운전기사가 우체국 건너편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몇 번이나 건너면서 우리 부부가 진땀을 흘리고 있던 와중에 안면이 있던 조선일보 기자 출신 童詩 작가를 만났다. 그가 도와 주면서 하는 말이 「내가 받아 보는 책이 이런 식으로 배달되는 줄 몰랐다」고 하더라』
국제아동문학관 추진
모든 고생이 「兒童文學評論」 잡지를 살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덕택에 「兒童文學評論」은 어른이 보는 아동문학 잡지로서 자리잡아 한 회도 거르지 않고 100호에 이르렀다. 25년 積功으로 「兒童文學評論」을 통해 160명에 이르는 아동문학 작가가 배출되었으며 그에 따른 학문적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
李在徹 교수의 서재에는 해묵은 책들이 풍기는 퀴퀴한 먼지 냄새가 가득하다. 책장 가득 동화책들이 꽂혀 있고, 그것도 모자라 책장 위에서 천장에 닿는 공간에도 누런 서류들이 빼곡하다. 구석구석에는 두꺼운 달력으로 꼼꼼히 포장해 놓은 뭉치들도 보인다.
그의 아동문학 자료에 대한 집착을 짐작케 하는 설명이다. 李교수는 우리나라 어느 기관보다도 많은 아동 문학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그 양은 2만여 권으로, 시가로 치면 30억원에 상당한다. 일제시대에 나온 잡지의 유일본도 상당수 있는데, 六堂 崔南善의 「少年」을 마련할 때는 한 달 월급을 다 쏟아 부었다고 한다. 아동문학이 학문적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료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끌어 모은 것이다.
『이사를 갈 수 없다. 1960년대부터 우리 집은 지하실, 창고, 방 가릴 것 없이 어디에나 아동문학 자료가 쌓여 있다. 과천에 책을 다 줘 버리고 나면 집이 허전할 것이다』
현재 李在徹 교수는 경기도 과천 국제아동문학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국제아동문학관은 다른 나라 아동문학 저서까지 다 모아서 아동문학을 연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시스템이다. 평생 아동문학 자료를 수집해 온 선배가 후배들에게 남겨 주는 마지막 배려이고, 아동문학 연구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필생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아동도서는 국회도서관이고 區民도서관이고 보전 관리를 안 한다. 심지어 새 책이 나오면 이전의 책은 폐기 처분한다. 옛날 어린이들이 읽던 책이 있어야 학자들이 연구도 하고 어린이들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과천 국제아동문학관을 세우려는 것이다』
과거 李교수는 서울 국제아동문학관 건립을 추진한 바 있었으나 교섭이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李교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2001년 다시금 재원이 풍부한 도시를 물색, 경기도 과천시의 문을 두드렸다. 그가 갖고 있는 아동문학 관련 도서 및 자료 2만 권을 세세히 파악하여 목록을 만들어 보여 주며, 그 모두를 과천시에 기증하겠으니 국제아동문학관을 지어 달라고 제안했다. 과천시에서는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과천 국제아동문학관 설립이 성사된다면 세계에서 세 번째 국제아동문학관이 된다. 현재는 독일의 뮌헨, 일본의 오사카에만 있다. 하지만 137억원이라는 예산이 드는 사업이다 보니 행정절차가 상당히 복잡하다. 때마다 예산 심의가 필요하고, 그때마다 『전자도서관이 있는데 국제아동문학관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돈만 쓰는 기관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반대의견이 나온다.
그는 조금이라도 국제아동문학관 건립 실행을 앞당기기 위해 오사카의 국제아동문학관에 직접 연락을 취하고 협조를 구했다. 이에 대해 오사카 국제아동문학관에서는 과천시 행정담당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적극 협조하겠노라고 과천시에 공문을 보내는 등의 정성으로 응답해 왔다. 그들도 李在徹 교수의 노고에 대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리한 얘기지만 부설 아동문학 대학원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국내 대학에는 아동문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곳이 없으니, 그곳에서 연구원들이 연구와 후진 양성을 병행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아동문학 발전의 기틀을 만들어 주자는 것이 내 의도이다』
『어린이들이 좋은 책 읽어야…』
『아동문학가를 사랑하거나 아동문학을 사랑해서 일생을 바친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어린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어린이들이 양질의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아동문학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李在徹 교수는 우리나라의 아동문학을 비평 無風地帶라고 지적했다. 尹石重, 李元壽 등 작가는 있었지만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줄 만한 학자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평론가도 없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동문학은 문학으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다.
李교수는 한국 아동문학을 국제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1990년 아시아 아동문학 대회를 창시해 서울에서 처음 개최했고, 이후 2년 단위로 일본, 중국 등지에서 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1997년 8월 다시 서울에서 개최하게 되었을 때는 아시아 아동문학 대회를 세계 아동문학 대회로 격상시켰다. 세계 아동문학 대회에는 예산이 1억7000만원 소요되었는데, 문예진흥원에서 지원을 받고 아동문학가들의 찬조도 받아 1억원을 마련하고 나머지 경비는 자신의 퇴직금으로 충당했다.
그는 우물 안 개구리의 시야를 가진 국내 아동문학가들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럽의 아동문학 이론의 大家들을 초대했다고 말했다. 당시 세계 아동문학대회에는 유럽 국제아동문학학회를 창시한 독일 프랑크푸르트大의 클라우스 도더러, 6代 회장인 호주 디킨스大의 론다 번버리, 7代 회장인 스웨덴 스톡홀름大의 마리아 니콜라에바 등이 참여했다. 李교수는 클라우스 도더러의 말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전해 주었다.
『나를 보고, 하는 첫 마디가 「우리는 유럽에서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어밖에 쓰지 못했는데 당신은 사우스 코리아에 앉아서 월드라는 단어를 쓰는구려. 당신이 국제 아동문학학회에서 활동한다면 세계적인 리더가 될 사람인데 여기에서 외로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참여했던 유럽 지역 및 중국, 일본 등의 학자들은 李在徹 교수 古稀 때 축전을 보내왔다. 그 중 스톡홀름大의 마리아 니콜라에바 교수의 글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 아동문학의 부흥을 위해 기울이신 교수님의 貢獻은 큰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교수님은 아동문학 분야에서 수많은 출판물의 작자로서, 학술지의 主幹으로서, 그리고 정기 아동문학대회의 창립자로서의 중심적인 역할을 통해 한국과 北아시아 全지역 아동문학 主流에서 핵심적인 人士 중에 한 분이 되셨습니다. 아동문학의 국제적인 교류를 위한 교수님의 헌신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북한 아동문학의 始祖는 金日成 가족
1948년 5월 李在徹 교수는 조선문학가동맹 대구사대, 경북중학 문학독서회 사건으로 被檢되어 일주일간 유치장에 拘禁된 이력이 있다.
『부유한 집안서 태어나, 반발심 때문이었는지 학생 때는 레프트(좌익)였다. 하지만 6·25 때 학도병으로 출전해서 북한을 한 바퀴 돌아보니 북한은 내가 생각했던 체계 있는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파쇼라는 게 우익에 의한 것을 말하지만 북한은 좌익에 의한 파쇼, 즉 전체주의 국가였다』
6·25 출전 경험이 계기가 되어 결국 李在徹 교수는 민족주의로 돌아서게 되었다고 한다. 李교수의 서재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大東民族兒童文學中興」이라고 씌어 있다. 그의 세계관이 온전히 담겨 있는 좌우명인 셈이다.
지난 3년 동안 李在徹 교수는 북한 아동문학에 대해 연구해 왔다. 백방으로 접촉해 자료를 수집하여 100여 편의 동화를 정리했고, 그 가운데 36편을 추려 곧 출간할 예정이다.
『동요, 동시, 소설에는 金日成 가족 얘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더군. 게다가 小波 方定煥은 간 곳 없고, 아동문학의 始祖가 金日成 집안으로 되어 있었다. 헌데 동화만은 脫정치였다. 동·식물을 의인화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테마도 남쪽 아이들이 수용할 수 있는 정직하자, 절약하자, 남을 도와 주자 등의 덕목이다. 그래서 남쪽 아이들에게도 읽혀야겠다고 생각했다』
李在徹 교수는 현재 평양에 편지를 전달해 놓은 상태이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부수석 한석윤씨를 통해 평양 조선작가동맹 아동문학 국가 위원회를 2002년 8월 중국 대련에서 있을 제6차 아시아 아동문학대회에 초청한 것이다.
李在徹 교수가 아동문학과 더불어 고집하는 또 한 가지가 있다. 漢字에 대한 고집이다.
『漢字는 동양의 라틴어다. 광복 후 한글 전용을 실시할 때도 상용한자를 철저하게 교육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하지만 漢字교육을 하지 않아 아이들이 아버지 이름조차 漢字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컴퓨터 못 하면 컴맹이라 하는데, 漢字 교육을 소홀히 해서 漢盲(한맹)을 양산해 놓았다』
李在徹 교수는 주변의 知人들로부터도 漢字를 고집하다가는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쨌든 안 팔리는 책,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 혼자라도 지켜야 한다고 배짱을 부려본다. 그는 한글이 훌륭하지만 문맥상 꼭 漢字를 써 주어야 한다면 漢字를 쓰는 것이 맞고, 상용漢字 정도는 반드시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바꿀 생각이 없다.
『북한은 한글 전용할 때 漢字 요원을 양성했다. 그 인력을 가지고 「朝鮮王朝實錄」을 우리보다 먼저 번역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가적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李교수는 『90% 대학생이 漢字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수준이다. 대학교수들도 漢字 쓰는 수준이 유치할 정도이다』라며 혀를 찼다.
李在徹 교수는 현재 아동문학의 수준에 대해 묻자 『40년 전보다 많이 개선됐다. 아동문학가들의 의식구조도 개선됐고, 문장력도 좋아졌다』고 평하며, 『예전에는 걱정을 많이 했다. 내가 죽으면 아동문학이 어떻게 되려나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李교수는 자신이 해 주었듯이 제자들이 다시 그들의 제자에게 헌신하여 아동문학 연구를 계승해 가길 당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팔십까지는 버텨볼 생각이다. 내가 하지 못한 일들이 많아서이다. 기초라도 탄탄히 닦아 두어야 숨이 넘어가더라도 기분 좋게 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