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행정법원의 난민인정불허결정처분취소 청구 기각에 대한
버마행동한국의 입장
당신이라면, 단지 한국 사회의 난민이 되기 위해
6년 동안의 기나긴 쇼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들은 십여 년 전에 각기 다른 이유로 한국 사회로 들어와 이주노동자로 생활해 왔고, 1990년대 후반부터 부천 지역의 ‘미얀마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2004년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반대하는 성공회대성당 농성에 참여하였고, 농성 정리와 함께 재한 버마이주노동자의 권리 확보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지속하고자 ‘버마행동한국’의 전신인 ‘미얀마이주노동자회’를 결성하였습니다.
당시에 이미 한국에서 버마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던 정당인 NLD한국지부가 있었지만, 우리들이 새로운 단체를 결성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다수 한국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조국의 민주화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만 수십 년 동안 군부의 억압통치가 계속되는 현실에서, 선뜻 활동에 나서기에는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많은 재한 버마인들을 민주화 활동에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반정부 정당보다 대중적인 단체의 결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결성된 ‘버마행동한국’의 활동 목적은 재한 버마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확보는 물론 궁극적으로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한국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이 당하는 고통이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미얀마정부와 정치상황에 기인한 것이며,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버마이주노동자들이 조국의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독려하고 동시에 한국의 시민사회와 국민들에게 버마민주화 문제를 알리고 동의를 얻어내는 활동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수천 명의 버마 출신 이주노동자들 중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수십 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어렵게 살아가는 중에도 버마민주화를 위한 한국 내에서의 활동에 대해 더욱 매진해왔습니다.
하지만 미얀마정부와 주한미얀마대사관에 대한 우리들의 항의 활동이 지속되자, 미얀마군부정권은 미얀마주재한국대사관과 한국 정부를 통해 ‘버마행동한국’에 대한 부당한 위협과 탄압을 가해왔습니다. 우리들은 2004년 3월 하순에, 미얀마주재한국대사관이 ‘미얀마이주노동자회’(‘버마행동한국’의 전신)를 포함한 한국 내 버마 단체에 대한 동향조사 보고 요구와 함께 당시 미얀마 내에서 가스개발 사업을 개시한 (주)대우인터내셔날 미얀마 법인에 대한 폭파 위협을 했다는 내용을 담은 공문을 외교부에 보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얀마주재한국대사관의 공문이 외교부를 통해 경찰청으로 전달되었고, 이에 경찰청에서는 ‘미얀마 단체의 테러위협첩보 보안활동 강화지시’ 명목으로 ‘버마행동한국’의 회원들과 활동을 주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얀마군부가 수십 년 간 반대 세력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통해 독재정권을 유지해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버마행동한국’의 활동에 대해 미얀마정부가 주목하고 더구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깊은 고민 끝에 난민인정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민인정신청 이후 5년이 넘게 지나도록 한국 법무부는 우리들에게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버마행동한국’을 결성한 지도, 난민인정신청을 한 지도 이미 5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들은 평일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대사관 앞과 거리를 지키며 한국사회에 버마민주화 문제를 알리고 관심과 지지를 호소해 왔습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우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었고 기꺼이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특히 2007년 9월 버마의 샤프론 항쟁 이후에는 ‘버마행동한국’이 주축이 된 재한 버마인들의 단일 조직인 ‘버마민주화운동촉진위원회’를 결성하여 현지와의 긴밀한 교류 하에 더욱 내실 있는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속적인 활동 속에서 때로는 분에 넘치는 격려를 받았고 우리들의 활동이 버마민주화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다양성 증진에도 작지만 소중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지 한국에서 살고자 했다면 우리들은 그렇게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제추방 당하지 않고 한국에서 사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십여 년 간 살아온 제2의 고향과 같은 이곳에서 한국인과 결혼해 현실에 안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당하게 이주노동자로 생활하고 훗날 기쁘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돌아갈 조국의 미래를 위해 우리들은 ‘버마행동한국’을 결성하고 5년이 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고된 일상 속의 달콤한 휴식을 모두 반납한 채 버마민주화 활동에 쉼 없이 매진해 온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재판부는 우리들의 이 모든 활동을 단지 난민 자격을 얻기 위한 고의적인 쇼라는 모욕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는 우리들의 애국심과 버마민주화에 대한 의지는 물론 버마의 미래까지도 모독하는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버마행동한국’의 오랜 활동에 지지와 연대를 아끼지 않으며 버마민주화를 위한 싸움에 함께 해왔던 한국의 시민사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여 년 전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버마는 여전히 서슬 퍼런 군부 독재가 건재합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변하지 않았지만, 젊은 날을 다 바쳐 일하며 버마 민주화 활동을 펼쳐온 한국 사회의 인정과 지지 속에서 우리들은 변화되었습니다. UN 사무총장을 배출한 인권 선진국의 위상을 자랑하는 한국의 시민사회와 함께해 온 ‘버마행동한국’ 활동을 끝내 부정하고 우리들을 내팽개친다면, 그것은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의 반인권적이고 기만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