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집에 오면서 구자훈 선생님께서 길상사에서
매주 목요일 식사 봉사를 하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 동네 바로 옆동네 성북구에서요
전에 길상사 다녀와서 쓴 글이 있어 덕분에 찾아 보았어요. 다행히 있네요
길게 써서 지금 안되고 집에 가서 여기 올릴게요 구선생님 ㅡ 덕분에 저도 오래전 글을 보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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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24 성북동 길에서...>
가까운 한성대 입구역에서 문화 해설이 있는데 코스에 길상사가 있길래 신청했다. 한 번 가 본다는게 여태 가지 못하고 있어
이번 기회에 꼭 가보고 싶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 도착하니 해설가님과 3명의 선청자가 도착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서울시 문화해설사가 261명 있는데 모두 자원봉사자라고 하셨다. 몇 번 이런 해설을 듣는 코스에 참석했는데
늘 대만족이어서 그 박학다식함과 수고가 자원봉사일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새삼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길상사로 가는 길에서 선생님은 지금은 수원에 사시지만 유년기 여기 성북구에 사셨는데 어려운 시절 미군 부대가 나누어준 밀가루로
수제비를 해 먹던 일이며 지금과는 달리 건물이 많이 들어서지 않은 흙길이었던 당시를 추억하셨다. 남편이 다녔던 학교들도 이 근방
에 있어 나는 그 당시의 아이들은 흙 먼지를 날리며 산과 골목길에서 많이 놀았을텐데 현재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여쭈어 보았
다. 이를테면 우리 아이들은 학원 안다니는 놀 친구가 없어 늘 엄마에게 놀아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까지 놀았다
고 하시면 어려웠지만 그 때가 지금보다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대치동에서 오신 세 분 어머니도 이 이야기에 솔깃하
며 공감을 하셔서 우리는 금새 한 마음이 된 듯했다. 올라가는 내내 선생님은 당시 이 동네에 살 때 4.19 혁명이며 김신조 일당이 남
한으로 넘어와 총성이 울리던 때를 회상해서 설명해 주셨다. 4.19 때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길 멀리서 총성이 울려 마을 사람들이
뭔가 구경하러 나갔다가 번쩍하며 빛이 나길래 모두 도망쳤다고 말씀하셨다. 북한에서 김신조와 간첩들이 우이령 너머로 들어왔을
때 이후로 교련이라는 과목이 학교에 생기기 시작했고 예비군도 그 때 창설되었다고 말씀하셔서 매년 남편이 참여하는 훈련이라
더 관심있게 들을 수 있었다.
크게 코스는 우리 문화재를 해외에 널리 알려 한국을 세계속에 심는데 큰 역할을 한 최순우님 가옥과 성곽, 선잠단지, 길상사로
이어졌는데 이야기 하나 하나 들을 때마다 아~~ 그랬구나 그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가까이 있는 문화유적을 덕분에 정말
잘 배우고 역사와 문화가 전해주는 소중한 것들로 인해 뿌듯한 시간들이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사진으로 정리해 보려 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 주고자 하는 마음과 시간이 들여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해설을 다시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마트폰으로 올리다보니 사진이 순서대로 나열된 것은 아닌데 여기는 길상사로 이 이야기만 듣고 나는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를 데리고 오기 위하여 나머지 해설을 듣지 못한 것이 아쉽다.
길상사 사연을 들으며 지금의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나서 이해하려고 애쓰면서도 깊은 감동이 되었다.
길상사는 1999년 돌아가신 고 김영한님께서 1997년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감화되어 전북의 화엄사에 기탁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금액으로 1000억이라고 하니 그 어마어마한 금액에 놀라우면서도 한 순간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 또한 충격적이어서
모두들 한 마디씩 그 분의 마음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부유한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김영한님은 15세 때 친척의 사기로 인해
그 재산이 다 사라지자 학교도 그만두고 기생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1916년 생이시니 그 때가 아마 1931년 쯤인가보다.
기생 생활을 하며 요정 정치가 흔한 시절 엄격한 교육을 받고 여기 대원각에서 그 시작을 했다고 하는데 해설사님께서 젊은 시절
몇 차례 여기 와 본 적 있는데 일명 기생이라고 하지만 어찌나 고고한 지 대접받는 입장이었지만 감히 손 한 번 못 잡아보았다고 하셨
다. 기생이라는 직업을 천시하는 풍습이 있는데 기생도 다 격이 다르다고 말씀하시며 그 여성들은 그곳을 찾는 지식인 층의 손님들과
깊은 정신적인 교류를 할 수 있을 대화가 가능하였고 비용도 매우 비쌌다고 말씀하셨다. 대기업에 과장으로 근무하며 한 달 월급이
30만원 일 때 남자 두 명이 왔는데 오늘날로 치면 300만원 할것이라 하시며 시간내내 매우 진솔하고도 진지하게 말씀해 주시는 해설
사님이 고마왔다. 김영한님은 당시 일제 강점기 한글학회에 계시던 한 손님의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을 가셨는데 한글학회가 탄압을
받으면서 귀국하여 함흥으로 다시 기생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만난 운명의 남자.. 시인 백석.....
서로 사랑했지만 백석 부모님의 반대로 백석은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하고 결혼 후 바로 밤에 찾아와 만주로 함께 가자고 했다고 한다.
김영한님은 그것을 거절하고 백석은 홀로 떠났다. 이 부분에서 나의 소견으로 안타까운 것이 왜 만주로 같이 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다.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결과론으로 말하자면 결혼한 여인과도 함께 살지 못했으니 그저 안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여기서 놀라운 사람과 사랑에 대한 순수한 믿음은 김영한 님이 백석님을 죽을 때까지 그리워하였다는 것인데 1000원억 가치의 길상사
를 기부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그 천억?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한 것을..... " 눈물이 날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말을 믿음을 그렇게 죽을 때까지 간직하다니... 말이라는게 얼마나 하니 쉽고 체면상으로 상황이 그래서
표리부동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김영한 님의 마음에 새겨진 백석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깨어지지 않는 거대한 철벽, 빛나는 광물
이었을까? 사랑도 마음도 이별도 쉽게 쉽게 다들 바빠서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공유하지도 못하는 이 시대에는 감히 따라기기 어
려운 가치라는 생각이 든다.
이 건물이 1999년 돌아가실 때까지 김연한 선생님께서 사셨다는 곳이라고 한다. 뒤의 풍경이 산이 있고 경사진 골짜기에서 물이 흐르
는 모양새이다.
1930년대의 백석.... 미남에다가 지식인의 이미지가 물씬 느껴진다. 뭇여성들이 반할만한 외양인데 함흥 토속어를 잘 구사한 그의 시
를 높이 평가한 것 때문에 일부러 찾아 시집을 읽었었는데 어려웠다. 그래도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찾아 읽어야겠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사람에 대한 추억과 믿음을 갖는 것에 대해서 이분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잘 해 주어야겠다.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했는데 역시나... 저기서 김영한 선생님께서 1999년까지 사셨다. 그 때 내 나이가 27이었나.....^^
이 지역이 농사짓기는 어려웠으나 산수가 좋아 풍류를 즐기려고 사대부 등 지배층에서 많이 찾은 곳이라 한다. 그래서인가 길상사에
있는 이 바위 또한 예사로와 보이지 않아서 찍었다.
ㄷ자 모양의 저기 건물이 대원각이었다고 한다.
개나리가 나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늘어진 노란 꽃들이 보여 영춘화일것이라 생각하고 확인해 보았더니 내 생각 그대로였다.
다이아몬드 갤러리와 카페라는데 이 쪽 방향으로 고급 주택이 많아 왠지 걷는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일반인이 갈 수 있는 곳이면 한 번
들려보고 싶구만....
깨끗하게 단장된 건물들이 부유한 동네임을 실감케하는데 잘 조경된 집들을 보며 다들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 촬영 장소가 여기인것
같다고 말했다. 나도 몇 차례 드라마 보다 질려서 이제는 잘 보지 않지만 뭐 이런 것.....
부잣집으로 일하러 간 처녀가 그 집 아들과 사귀게 되는데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힘들어 하는것 같은.....
이런 류의 대화들을 끝날 때까지 서로 나누었는데 자식들이 각자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적으로 살도록 지지해 주는게 부모의
역할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나 또한 그러한데 아직은 어렵지 않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8살... 10살.....
지금부터라도 미래의 결혼 자금은 스스로 다 마련해야 되는 것이며 사람도 외견뿐 아니라 무엇보다 마음을 볼 줄 알아야 되는 것...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야겠다.
대사관들이 많은 곳이어서 한국 국기와 외교를 맺은 여러 나라 국기가 곳곳에 게양되어 있다. 여기는 앙골라 대사관이다.
여기가 성당인데 법정스님과 김수환 추기경님이 가까운 사이여서 두분이 자주 왕래했다고 한다.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요즘 국제테러집단의 소식을 들으며 다시 느낀다.
아마 내 생각에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진 종교인들도 있을 듯한데 .............
종교와 사상으로 인간성이 훼손되는게 그 어떤 것보다 위험해 보인다.
잘 조경된 집들.... 여기는 버스도 안 다녔는데 4월 1일 마을버스가 처음으로 다니게 될 것이라고 해설사님이 알려주셨다.
태종이 남산을 누에 머리의 형상이라며 잠실 단지에 뽕나무를 심도록 한 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는 선잠단지...
마전터가 말과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광목천을 양잿물로 표백하는 것과 관련있는 지명인데 이 지역이 풍류객들에게는 인기있는 산수를 자랑했지만 백성들이 거주하기는 힘들었던 곳이라한다. 그리하여 특별한 빨래터 허가를 나라에게 주어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는
성곽을 만들기 위해 농사짓는 시기는 피했던 것, 성곽에 사용된 돌에 따라 시대가 달랐던 점, 성곽 복원에 관련된 이야기 등을
들으며 이익한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 검은 돌과 흰 돌이 구분되는데 검은 돌은 조선시대 실제 돌이고 흰 돌은 현대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큰 돌 사이에 크기가 알맞은 작은 돌을 넣어 균형을 잡았다고 한다.
정으로 커다란 바위를 쳐서 구멍을 뚫은 뒤 마른 나무를 넣고 물을 부으면 그 부피가 늘어나면서 돌이 깨지는 원리를 이용해 분리한
흔적이 바위에 남이 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세종시대에 지은 유형의 성곽이다.
성곽이 우리 문화 유산으로 자부심을 갖을 만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 복원을 가능하게 한 것은 수원화성을 세운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라고 한다. 그 때문에 화성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쉽게 등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여장에 대해 알아서 즐거웠는데 여장이란 이렇게 성곽 위에 쌓은 부분이고 3개의 구멍(타구)로 나누어져 있다.
내려다보는 방향이 양쪽은 원총안으로 멀리 볼 수 있게 하였고 가운데는 기울어지게 하여 가까운 아래를 군사들이 볼 수 있어 적의
동향을 파악하게끔 만들었다. 알고 나니 신기하고 재미있다.
타구 세 개 확인...
도성 쌓은 방법도 알고 나니 흥미롭고 시대에 따라 기술이 나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1930년대에 지어진 집의 형태라고 하는데.... 와우.. 그래서 다시 쳐다 보았다. 저기 문을 열고 친구 아이가 뛰어 나와 놀자고 할 것 같
은 왠지 익숙하고 고풍스럽기도 한 느낌이다.
은퇴하시고 보람있는 일을 하시는 해설사님...
저기 멀리 산이 북악스카이웨이
<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역사, 문화 여행이었습니다. >
첫댓글 북악을 넘어 내려가다 보면 길상사로 빠지는 길이 있어서 가보려라 지난쳐 버려..가보지 못한 길상사를 자세히 설명 해 주셨네요.
이금주선생님 글을 읽으니 다음 번에는 지나치지 말고 꼭 가봐야 겠네요.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예 조용하고 편안한 곳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