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진 나라 가야국
한반도 고대사는 흔히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역사에 관해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문헌들이 고려 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지만, 고구려의 역사서인 <유기>와 <신집>,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는 고대 국가 팽창기에 중국과 다른 주체적인 입장에서 각기 자기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들이다. 그런데 통일 신라에 이르면 공식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는다. <화랑세기> <고승전> <제왕연대력> 등 특정한 분야의 역사서들만 있을 뿐이다. 이미 중국(당)의 속국이 되었으므로 독립 국가로서 자체 역사서는 편찬하지도 못할 뿐더러 필요도 없어졌고, 중국의 한 지방 역사로 다루어지면 족하기 때문이었을까?
'삼국' 시대로 인해 가장 크게 피해 본(?) 역사가 바로 가야의 역사이다. 가야 6국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김해의 금과 가야는 무려 500년 가까이 존속했던 왕조인데, 우리가 배운 역사 교과서에는 불과 단 한 페이지 분량으로 소개하고 있는게 고작일 정도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단일 씨족으로는 가장 수가 많다는 김해 김씨의 시조가 바로 금관가야의 건국 시조인 김수로왕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알에서 났다는 그는 무려 158세를 살았고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그녀도 157세를 살았다)을 맞아 왕후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상식적으로 볼 때 누가 보아도 이 기록은 사실이 아닌 설화다. 그런데 고조선 시대쯤 거슬러 올라간다면 또 몰라도 김수로왕이 통치하던 시기는 기원1,2세기 무렵인데도 그런 설화 형태로밖에 전하지 않는다는 건 고대의 그 누구도 가야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어머니가 가야 왕족 후예인 김유신의 누이였으므로 가야 왕족과 인척관계가 있는 신라의 문무왕은 즉위하자마자 그간 단절되었던 김수로왕의 제사를 계속 지내라는 명을 내리고 그 경비로 토지를 내리는데, 그것도 역시 개인적인 조상 받들기에 불과했을 뿐 역사적인 관심을 보인 건 전혀 아니었다.
가야를 멸망시킨 것이 신라의 법흥왕(혹은 진흥왕)인 데도 신라는 가야의 역사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가 당당한 독립국이었다면 삼국 통일을 이룬 즉시, 이제 신라의 한 부분이 된 고구려와 백제, 가야 등에 관해 공식 역사서를 편찬해야 했을 것이다. 한 시대건너서 고려 시대에 겨우 삼국에 관한 역사서가 편찬되었지만 여기에도 가야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나마 가야에 관해 전하고 있는 문헌은 <삼국유사>뿐인데, 이것도 가야가 망한 후 가야 유민이 쓴 <개황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신라가 그토록 떠받드는 중국은 이전 왕조를 멸하고 태어난 새 왕조가 50년 안에 전대에 관한 공식 역사서를 편찬하는 게 관례로 되어 있었다.
가야에 관한 역사책으로는 고려 문종 대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김해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를 지낸 문인이 저술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이를 발췌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뿐이다. 이 기록은 내용이 워낙 소략하기 때문에 가야사를 복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일본서기》에도 가야의 역사가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일본인들이 많이 왜곡하였으므로 사료 비판이 요구된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따라 가야(加耶 ·伽耶 ·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 ·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야는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변한(弁韓) 12국에서 발전하였는데, 여기에는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접도국(接塗國)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순시국(古淳是國) ·반로국(半路國) ·악노국(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감로국(甘路國) ·구야국(狗邪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안야국(安邪國) ·독로국(瀆盧國)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고자미동국은 고성, 미오야마국은 고령, 구야국은 김해, 안야국은 함안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되고, 나머지는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설이 분분하다.
《삼국지》가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한 것이므로 이 시기까지 가야란 명칭은 쓰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함안) ·고령가야(高寧伽耶:함창) ·대가야(大伽耶:고령) ·성산가야(星山伽耶:성주) ·소가야(小伽耶:고성) ·금관가야(金官伽耶:김해) ·비화가야(非火伽耶:창녕) 등의 명칭이 나오며, 《일본서기》에도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 탁순(卓淳) ·탁기탄(喙己呑) 등이 나온다. 특히 《삼국유사》 기록은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에 변한지역의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1. 전기가야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 가야의 건국설화에 따르면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9간(干)이 추장이 되어 각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던 바, 하늘로부터 보랏빛 줄이 내려와서 보니 붉은 보자기 안의 금합에 6개의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아도간이 이를 집으로 가져간 지 12시간 만에 금합을 열어보니 여섯 알이 어린아이로 변하였는데, 그 중 먼저 태어난 이가 수로였다. 그는 곧바로 금관가야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기 5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설화는 9간으로 대표되는 김해지역의 토착세력과 수로 집단이 연합하여 금관가야국(변한 12국 가운데 구야국)을 건국한 사실과 그 뒤의 어느 시기에 그 국가를 중심으로 가야연맹체를 결성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전기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금관가야가 위치한 김해지역은 일찍부터 풍부한 철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 철은 화폐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으므로 《삼국지》 <동이전>에는 왜(倭)를 비롯한 한예(韓濊)와 중국 군현세력들이 여기서 철을 수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여 중국의 군현 및 왜 등과 경상도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금관가야는 중국 군현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지속적인 문화축적을 이루는 한편, 이를 경상도 내륙지역의 여러 국가와 왜 등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의 이익을 보면서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가야연맹체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낙랑군 ·대방군의 소멸과 고구려의 남진이 본격화되면서 가야연맹도 커다란 변동을 겪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왜 ·가야 세력과 동맹을 맺고, 신라는 이에 맞서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다. 400년 왜 세력이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 광개토왕은 보기(步騎)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신라국경에 집결한 왜군을 격파한 다음 임나(가야)의 종발성(從拔城:위치 미상)까지 진격하였다. 고구려군의 침공으로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의 여러 가야국들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쇠잔해졌으며, 일부 세력들은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경상도 내륙지방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전기가야연맹도 와해되고 말았다.
2. 후기가야
전기가야연맹의 해체 후 가야세력은 연맹체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로 존속하다가 5세기 후반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다. 고령지역은 경상도 내륙지방이었기 때문에 고구려군 침입 때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고령 지산동의 거대한 고분들은 바로 대가야 세력의 성장을 알려주는 고고학적인 증거이다. 대가야는 점차 경남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의 가야 국가들을 포괄하면서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가야연맹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을 금관가야가 주도한 가야연맹과 구분하여 후기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에 대가야 시조설화가 전하는데, 이것은 고령지역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였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설화에 따르면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고 한다. 이 설화에서 고령 대가야왕의 조상인 이진아시의 ‘아시’는 알지(閼智) ·하지(荷知)와 같이 대수장(大首長)이란 뜻이다.
또한 대가야국 시조를 수로왕과 형제 사이로 묘사한 것은 가야연맹을 주도한 대가야가 전기가야연맹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표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는 대가야가 그 밖의 가야국가들을 가야연맹에 끌어들이려는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대가야가 부상할 즈음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결성하였는데, 이때 두 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전략상 가야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대가야는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하였다.
《남제서》 <동이전 가라국조>에, 479년 가라국왕(可羅國王) 하지(荷知)가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爵號)를 받았다는 자료가 전한다. 하지는 중국기록에 보이는 유일한 가야인으로서 이 무렵에 대가야가 중국과 교류할 만큼 세력이 커졌음을 보여준다. 481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신라 북쪽 변경지역에 침입하여 호명(狐鳴) 등 7성을 취하고 미질부(彌秩夫:현 포항시 흥해읍)로 진격할 때, 가야군은 백제군과 더불어 신라군을 도와 고구려군을 격파한 적도 있었다. 이 무렵 대가야는 소백산맥을 넘어 전북 임실 ·남원을 일시 점령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6세기 초반 백제와 신라의 압박이 강화되면서 대가야의 성장은 방해를 받게 된다. 510년 백제는 대가야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여 경남 하동 ·거창 등을 위협하였다.
대가야는 522년 신라에 결혼동맹을 요청하였으며, 신라의 법흥왕은 대가야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을 가야왕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는 한편으로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내부체제를 굳건하게 정비한 다음, 서쪽 가야지역으로 무력진출을 적극 꾀하고 있었으며, 결혼동맹을 받아들인 것도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미 신라는 지증왕대에 가야지역을 침략하여 김해지역 등을 한차례 점령한 적이 있었고, 524년에는 법흥왕이 직접 남쪽 변방지역을 순행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532년 지속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한 금관가야는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신라의 금관가야 병합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을 위협하였다.
대가야는 신라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다시 백제 ·왜와 연합을 추진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이들 세력들이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백제 성왕이 주재한 대책회의에 참석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가야의 이러한 외교정책도 554년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이 관산성(管山城:옥천)에서 신라군에 대패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진흥왕은 555년 창녕지역에 비사벌정(比斯伐停)을 설치하여 중앙군단을 주둔시키고 가야정벌을 본격화하였다. 가야세력은 관산성싸움의 패배로 무기력해진데다가 일부는 신라에 항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백제의 원조가 끊기고 일부 세력마저 가야연맹에서 이탈하자, 대가야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562년 이사부(異斯夫)가 신라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대가야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이때 나머지 가야 국가들도 차례로 신라에 병합되면서 가야제국은 소멸하였다.
3. 유민
가야는 연맹체의 주도세력만 바뀌었을 뿐, 멸망할 때까지 연맹체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연맹체 아래에서 각 가야 국가들은 정치적인 독자성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다른 지역과 통합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전영토를 아우르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가야세력이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멸망당한 요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가야는 비록 멸망하였지만, 가야의 문화와 인물들은 신라 역사의 전개와 문화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6세기에 대가야의 가실왕(嘉實王)이 성열현(省熱縣: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신의 악사 우륵에게 가야금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우륵은 가야금과 더불어 12곡을 지어 바쳤다. 후에 우륵은 가야국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예상하여 신라에 망명한 다음 신라인 제자들에게 가야금을 전수하였다.
가야금은 신라 궁중음악으로 채택되어 거문고 ·비파와 함께 신라 3대 현악기가 되었다. 또한 중원경 출신인 강수(强首)는 가야인의 후예로서 유학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으며, 7세기 중엽 중국과의 외교문서 해독 및 제작으로 명성을 떨쳤다. 한편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들은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어 신라의 영토 확장과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김구해(金仇亥)의 손자 김무력(金武力)은 관산성싸움에서 백제군을 격파하는 데 크게 공을 세웠으며, 그의 아들 김서현(金舒玄)은 대야주(大耶州:합천) 군주(軍主)가 되어 진평왕 대에 활약하였다. 그리고 김서현과 왕족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 ·김흠순 형제는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그들의 누이인 문명부인은 태종무열왕의 왕비로서 문무왕을 낳았다. 김유신의 후손들은 중대 말기에 경주 토착귀족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다가 통일신라시대 말에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김수로왕 시절만 해도 가야는 신라보다 강국이었다. 그 점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 서기 102년에 신라의 주변에 있던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난다. 서로 다투던 이들은 더 힘센 신라에 중재를 의뢰하는데, 신라의 파사이사금은 자신이 없어 가야의 김수로왕에게 다시 의뢰한다. 김수로왕이 문제가 된 지역을 음즙벌국의 소유라고 정해 주자 골칫거리가 해결된 파사이사금은 그 보답으로 6부에 명하여 김수로왕을 접대하도록 한다. 그런데 6부 중 한지부는 서열이 낮은 자를 시켜 왕을 접대하게 한다. 이에 분노한 김수로왕은 부하를 시켜 한지부의 우두머리인 보제를 죽인다.
6부의 장이 죽었으니 파사이사금으로서는 펄쩍 뛸 일이지만 감피 김수로왕을 탓하지 못하고 하수인만을 잡으려 할 뿐이다. 그 하수인을 음즙벌국으로 도망쳤는데, 음즙벌국은 파사이사금의 송환 요구를 거절하고 버티다가 마침내 군사를 일으킨 신라에 항복하게 된다. 이는 당시 가야와 신라의 역관계를 알려 주는 사례이다.
한때 이처럼 강성했던 가야는 끝내 6세기 초 신라에 망하고, 잔존 세력이 백제에 의탁하여 백제와 신라의 전쟁에서 신라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그마저 신라의 손에 전멸당하고 만다. 당시 신라의 장수는 김유시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이었는데, 그는 가야 왕족 출신이니 가야는 결국 가야 왕족의 후손에 의해 멸망한 셈이다.
약 500년간을 존속한 왕조가 어째서 고대 국가의 성립을 이루지 못했을까? 이 점은 의문이지만, 진정 고대 국가 성립여부 조차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가야에 관해 알려진 사항이 없기 때문이다
연표
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수로왕(首露, 42~199) |
42~199 |
42년 알에서 낳아서 곧 즉위. 아유타국(인도의 한 국가) 공주 허황옥과 결혼함 |
2 |
거등왕(居登, ?~253) |
199~259 |
수로왕의 아들. 어머니는 허황옥 |
3 |
마품왕(麻品, ?~291) |
259~291 |
거등왕의 아들 |
4 |
거질미왕(居叱彌, ?~346) |
291~346 |
마품왕의 아들. |
5 |
이시품왕(伊尸品, ?~407) |
346~407 |
거질미왕의 아들 |
6 |
좌지왕(坐知, ?~421) |
407~421 |
이시품왕의 아들. 금토왕(金吐王), 김질(金叱). 왕비 용녀의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시끄러웠다. 후에 왕비를 귀양 보내고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
7 |
취희왕(吹希, ?~451) |
421~451 |
좌지왕의 아들. 질가(叱嘉) |
8 |
질지왕(?~492) |
451~492 |
취희왕의 아들 |
9 |
겸지왕(鉗知, ?~521) |
492~521 |
고이왕 아들. |
10 |
구형왕(仇衡, ?) |
521~532 |
겸지왕의 아들. 신라 진흥왕이 쳐들어오자 영토를 바치고 귀순함. |
가야의 왕에 대해서 언급되어있는 것은 수로왕부터 시작되는 김해의 금관가야, 그리고 이진아시왕부터 시작되는 고령의 대가야가 전부이다.
금관가야는 기원후 42년, 수로왕의 재위부터 532년,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모두 10대 490년간 존속하였다. 이 중에서 유독 수로왕만이 42년에서 199년까지 157년간이나 재위에 있었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 왕들은 평균 30-40년 가량 재위했던 셈이다. 이들 왕의 기록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고 있다.
대가야는 기원후 대략 42년, 이진아시왕의 재위부터 562년, 도설지왕이 신라 진흥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모두 16대 520년간 존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두산대백과 .네이버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