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고난을 통과하는 길 Date 2017. 4. 9
Text Lk 24,25-27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1.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예수 믿는 분들이지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 맞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다 옳으며, 예수님께서 사신 삶의 방법을 최고인 것을 믿으시지요? 네~ 우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혹여 딴 맘을 먹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아직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중에 성령의 불이 임하시어서 이 진리를 깨달으시고 회개하고 통회하여 이 믿음, 즉 예수님이야말로, 다 맞고, 다 옳으며, 다 최고인 것을 믿는 그런 믿음이 생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26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의 길을 지난 다음에야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바뀔 수 없는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느냐는 책망성 말씀이 25절이고요, 그래도 못 알아듣는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다시 잘 설명하는 말씀이 27절입니다. 저는 오늘 종려주일에 이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험한 길, 고통스러운 길을 스스로 선택하여 걸어가신 그 때의 행적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스스로 이 십자가의 험한 길을 걸어가신 것도 맞고, 옳으며, 최고였음을 깨달으시고, 회개할 자 회개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확신이 필요한 분은 확신과 담대함을 얻으시기를 또한 기대합니다.
2.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사람들에게 첫째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 정하시고 가신 고난의 길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사고'(accident)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도리어 이 일은 예수님께서 아주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하신 길이며 준비를 철저히 하신 길이고 마음을 단단히 잡수시고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자신이 고난을 받은 후에 영광을 얻게 될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질문을 하신 후에 첫 번째로 하셨었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한 변화산 사건 후가 두 번째 예고였으며, 세 번째는 예루살렘으로 향한 최후의 길을 가시는 도중에 하셨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죽는다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냐며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할 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일갈하셨을 정도로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실 때에 제자 중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어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는데 누가 뭐라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었습니다. 나귀도 나귀 주인도 미리 수배해 놓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 종려주일 후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예수님의 행적은 대단히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방이며 그 때 행한 행동까지 모두 잘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일련의 고난들은 이미 예수님 오시기 600년 전부터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입을 통하여 예고되었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으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미가, 스가랴 등등의 예언자들도 그렇게 예언한 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한 첫 설교문,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행2,23) 대로, 두 번째 한 설교문,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3,18) 대로, 예정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구원사역은 왜 십자가의 길이 있어야 했을까요? 이는 제도적 구원과 실제적 구원 두 가지를 모두 완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을 위해 천국이라는 좋은 곳을 마련하고,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법적자격을 얻게 하는 것은 제도적 구원이요 형식적 구원입니다.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만들고 들어갈 자격을 부여하는 것만으로 천국이 완성되지는 않지요. 거기에 데려다 놓았을 때에 거기에 어울리는 삶을 살 수 있는 품성과 능력과 삶의 방식을 가져야만 천국의 완성, 구원의 완성이 만들어집니다.
자살하려고 물에 뛰어든 사람을 건져주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으로 하여금 힘든 삶의 길을 견디어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저주의 가시밭길 같던 인생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난 다음에도 마음이 다시 타락하거나 더럽혀지지 않고 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 완전한 구원을 위한 두 가지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기 위해 주님은 고난의 길을 가셔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고난의 길을 걸으신 것은 인류 구원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길이었음을 아시기를 축복합니다.
3.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로 하고자 하는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거창한 퍼포먼스를 하며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은 ‘나는 왕이다.’ ‘나는 메시야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퍼포먼스에 동원된 종려나무 가지, 어린 나귀,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11,9-10)라며 외친 환호성, 성전에 들어가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을 강도와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이들을 쫓아내신 돌발행동 등 모두 자신을 ‘메시야’요 ‘평강의 왕’으로 선포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당연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제사장들을 비롯한 당시 기득권자들에게 자신들을 위협하는 심각한 선동이요 불순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퍼포먼스는 ‘나를 죽여라. 나는 희생제물이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눅19,47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악의 승리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주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포하시고 작정하신 일이었을 뿐입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백성들 앞에서 설교하면서,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여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였으니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3,13-14)라고 외칩니다. 너희가 죽이긴 했지만 그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이요, 실상은 생명의 주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 자신들이 메시야시오, 평강의 왕이신 분을 죽게 한 잘못을 저질렀음을 알고 회개하며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행4,4)
여러분, 오늘 종려주일에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망가진 세상에서 오염된 인생들이 고통을 겪으며 사는 것에서 건져내어 살리러 오신 평화의 왕이요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당연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고 예수님의 구원,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패역한 세대의 흐름을 쫓아 그냥 되는 대로 살던 삶을 청산하여야 합니다. 더 이상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에 변화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 은혜를 힘입으며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망가진 인생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평강의 왕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믿음이 내 인생에서 사라졌던 행복을 되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생명입니다. 예수가 길입니다. 예수가 확실한 대안입니다. 믿으십시오.
4.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라고 하신 것 중 세 번째로 이 종려주일에 자세히 설명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주님은 이 구속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기쁘게 선택하신 고난의 길에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음을 알고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길이란 그리 호락호락한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을 가지 못하도록 훼방하고 미혹하며 기운 빠지게 하는 악한 자,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겨내고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의 길’을 가라는 것이 오늘 세 번째 말씀입니다. 아멘.
2015년 12월 3일 일산 정발산 성당에서 불제자 법륜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강연에 눈길이 간 건 한 목사 부인이 거기 참석하여 질문을 했다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공부 잘 하고 성실한 남편 목사가 가고 싶어 하던 유학 장학생으로 뽑혔는데 선발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그래도 어렵사리 유학을 가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어떤 학교 교수에 임용될 기회를 잡았는데 인맥에 밀려 기회를 놓쳤으며, 한 시골교회에 부임하여서 열심히 섬겼는데 장로 권사들이 하두 할 말 못할 말 다 해가며 괴롭혀서 참다 참다 5년 만에 사임하고 말았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 아들이 못마땅한 권사 시어머니는 대놓고 이 목사 아들과 사모님 며느리를 구박하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너무 힘들어서 부끄럽게도 가끔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고, 스스로가 너무 가치 없는 존재로 느껴집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법륜이 말하길, 당신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 길을 걷는다면 어찌 그런 걸로 낙담하느냐? 그게 예수 제자의 길이 아니냐? 그냥 예수를 통하여 명예와 행복을 얻고자 그 길을 걷기 때문에, 목사가 아닌 단지 한 사람의 남편으로 보기에 그렇게 갈등하는 것이 아니냐? 관점을 바꾸시오.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게 이런 소리 듣고 부끄러워해야 할 교인들이 사실 한 둘이 아닙니다. 힘든 것이 사실이지요. 맞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제자가 가야할 길이라면 견뎌내야 하는 것이지 낙담할 일이 아니지요.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