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빛깔 사슴, 지바라밀 전하다
돈황의 257굴 벽화 ‘구색록경’ 도상화
횡권식으로 표현…사건 전개 ‘한눈에’
사슴왕의 자비와 인과율 무서움 담아
그림① 돈황 제257굴 서벽 ‘녹왕본생도’ 일부. 물에 빠진 사람과 녹왕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본생도는 중생 제도의 방편의 의미를 담았다.
붓다의 수많은 전생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녹왕본생(鹿王本生)은 사슴왕이던 붓다가 자비(慈悲) 베풀어 선근(善根)을 심었다는 이야기이다. 본생설화는 대게 서(序)·본(本)·후(後) 삼분(三分)으로 구성되어있다. 붓다와 같은 성인은 전생에 수많은 선행의 삶을 통한 윤회로 비로소 성불한다는 것이다. 서분(序分)은 불타가 본생설화를 설(說)하시게 된 경위와 장소 등을 말한 것이고, 본분은 본론으로서 전생에 있어서의 불타의 경력을 말한 것이다.
후분은 본분 중에 나타난 주인공이 바로 불타 자신의 전신(前身)이라는 것과 그 외 누구는 현재 누구의 전세(前世)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불설구색록경(佛說九色鹿經)〉의 기록에 의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어떤 사람이 깊은 물에 빠져 물을 따라 떠내려가면서 허우적대며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아홉 빛깔의 사슴(九色鹿)이 그 소리를 듣고는 곧장 물가로 달려가서 물속으로 들어가 그를 강기슭으로 던져냈다. 물에 빠졌던 사람은 무릎을 꿇고서 목숨을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노비가 되어 사슴을 위해 물풀을 따다 바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사슴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절대로 말하지 마시오.”
물에 빠졌던 사람은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하고 떠났다. 그때 그 나라의 국왕이 총애하는 왕비가 밤에 꿈을 꾸었는데, 몸에 아홉 빛깔의 털이 나 있고 눈처럼 흰 뿔이 달린 사슴을 보았다. 다음날 왕비는 국왕에게 꿈 내용을 말하고 꿈에서 본 사슴을 잡아 달라고 간청했다.
꿈에서 본 사슴을 잡는다면 그 가죽을 벗겨서 옷을 해 입고 그 뿔을 불진(拂塵)의 손잡이로 쓰고 싶어서였다. 국왕은 즉시 큰 상금을 걸고 온 나라에 알리기를, 만약에 아홉 빛깔의 사슴을 잡아 오는 사람이 있다면 은이 가득 담긴 금그릇과 금이 가득 담긴 은그릇을 하사하고,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겠다고 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왕이 큰 상금을 걸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부귀를 얻고 싶어 즉시 왕국으로 가서 비밀을 알렸다. 국왕이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많은 군사를 산으로 보내어 사슴을 잡아오게 했는데, 다행히도 아홉 빛깔 사슴의 좋은 벗인 까마귀가 이것을 발견하고 하늘에서 소리쳐 사슴에게 알려 주었다. 사슴이 단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자 까마귀가 공중에서 내려와 사슴의 귀를 쪼니, 아홉 빛깔 사슴은 갑자기 놀라서 일어났지만 이미 병사들에게 포위되니 상태라 도망칠 길이 없었다.
사슴은 국왕 앞에서 말했다. “저는 나라에 공이 있으니, 저를 쏘지 마세요. 저는 이 나라 백성 한 명을 구해 준 적이 있어요.”
사슴은 거듭 왕에게 여쭈었다. “제가 여기에 있다는 걸 누가 알려 주었지요?”
“수레 옆에 있는, 저기 얼굴에 부스럼이 난 사람이요.”
사슴은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쳐다보고서 슬픔과 분함이 복받쳐 국왕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이전에 깊은 물에 빠졌는데, 빠져 죽기 직전에 제가 생명을 아끼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서 강기슭으로 건져냈어요. 제가 사는 곳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알리지 않겠노라 약속했지요.”
왕은 사슴의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사람을 질책했다. “너는 큰 은혜를 입고서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배신을 했으니 어찌된 노릇이냐?”
그래서 국왕은 아홉 빛깔의 사슴을 산으로 다시 돌려보냈고, 물에 빠졌던 이는 몸에 종기가 나고 입에서는 악취가 풍겨서 사람들이 모두 혐오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왕비는 화가 나서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곡절이 많고 담겨진 의미도 깊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아주 훌륭한 우언 고사(禹言故事)이다. 이 본생도는 아홉 빛깔 사슴의 형상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화가는 낡은 규칙을 타파하고 새로운 경지를 창조해 냈다. 경전의 기록에 따르면, 사슴과 국왕이 만났을 때에, 사슴은 바로 무릎을 꿇고 왕에게 여쭌다. “제가 여기에 있다는 걸 누가 당신께 알려 주었는지요?”
인도의 고대 조각이나 서역(西域)의 초기 벽화를 막론하고 사슴의 형상은 모두 철저히 불전(Nidana)에 근거해서 처리되었는데, 즉 사슴이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들고서 애원하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돈황 벽화는 다른 것들과는 다른데, 여기에서는 아홉 빛깔의 사슴이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물에 빠졌던 사람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국왕 앞에서 당당하게 규탄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홉 빛깔 사슴의 형상에는 고대의 화가들이 쏟아 부은 감정이 반영되어 있다.
그림② 돈황 제257굴 서벽 ‘녹왕본생도’로 물에 빠지 사람이 비밀을 알리자
국왕이 녹왕을 잡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다.
제257굴 서벽에는 녹왕본생에는 물에 빠진 자와 녹왕의 모습이 그려졌다. 녹왕에 의해 구조된 물에 빠진 사람이 무릎을 꿇고 녹왕을 향해 노비가 되어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맹세하는 장면이다. 제257굴 서벽에는 국왕과 녹왕의 모습이 함께 그려졌다. 화면에 나타난 녹왕은 국왕 앞에서 고개를 들고 가슴을 내민,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는 모습이다. 그는 당당하게 국왕을 향해 물에 빠진 자의 배은망덕함과 비열함을 폭로하고 있는 장면이다.
또한 제257굴 북벽에는 오백 마리의 백조를 탄 비구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 그림은 ‘수마제녀인연(須魔提女因緣)’ 고사화 중 일부분이다. 그림 중에 비구승 대가전연(大迦移延)을 둘러싸고 앞뒤와 아래에 6마리(실제로는 500마리를 뜻함)백조가 있다.
돈황 제257굴 서벽 ‘녹왕본생도’는 전폭 가로 96cm, 세로 385cm로 표현형식은 장방형(長方形) 구도로 단락을 9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화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야기가 치밀하고 생동감 있게 전개되고 있다.
아홉 장면은 대략 이와 같다. 1. 사람이 물에 빠져서 살려 달라고 외친다. 2. 아홉 빛깔 사슴이 물에 빠진 사람을 업고 물에서 나온다. 3. 물에 빠졌던 사람이 무릎을 꿇고서 목숨을 구해 준 사슴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4. 아홉 빛깔 사슴이 산에 누워 있다. 5. 왕비가 국왕에게 꿈 내용을 말하면서 아홉 빛깔의 사슴을 잡아 달라고 한다. 6. 물에 빠졌던 사람이 국왕에게 비밀을 말한다. 7. 국와이 병거(兵車)를 이끌고 말을 타고서 간다. 8. 국왕이 말을 타고 산으로 들어간다. 9. 아홉 빛깔의 사슴과 국왕이 만나게 된다. 이야기는 최고조에서 끝난다.
이 본생도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색록(九色鹿, 아홉 가지 색깔의 사슴)에 의해 구조된다는 장면이다.(그림①) 그림의 대체적인 내용은 사슴은 보답을 바라지 않으나 이 사연을 밖으로 누설하지 말라고 했으나 때마침 욕심 많은 이 나라 왕후는 아홉 빛깔 사슴의 아름다운 가죽으로 옷자락을 장식하고자 하였다. 이에 물에 빠졌다가 아홉 빛깔 사슴에 의해 구출된 자는 상 받기를 탐내어 왕에게 밀고하여 아홉 빛깔 사슴을 잡게 하였다.
그 후 아홉 빛깔 사슴의 사신(使臣)이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 물에 빠졌다 구출된 자를 처벌하게 하였다. 사실 전체 사건의 전개는 크게 인명구조, 기서(起誓), 밀고, 체포 등 네 단락으로 나뉘고 있다.(그림②)
화면은 횡권식(橫卷式)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사건의 전개를 옆으로 길게 연결하여 그림으로 그려내는 표현형식으로 오늘날의 동영상을 사건, 사건마다 정지시킨 것과 같은 표현방식이다. 이 벽화는 양 끝에서 시작하여 화면 중심에서 사건의 절정을 이루게 하는 특이한 순서로 배치하여 아홉 빛깔 사슴이라는 선량한 붓다의 전생을 잘 드러나게 하고 있다. 이처럼 구도가 화면 중앙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인물, 차마 그리고 산수 배경과 함께 아홉 빛깔 사슴의 움직임이 확연히 드러나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화면 중심을 두드러지게 처리함으로써 이야기 줄거리를 쉽게 전달해 주고 있다. 아홉 빛깔 사슴이 화면의 전반에서 가장 많은 위치와 공간에 배치되어 있으며 그러면서 이 부분을 화면의 시각 중심으로 에워싸고 있어 당시 화사(츐師)들의 독특한 조형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거의 두루마리 형식의 그림, 연환화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두루마리를 펼쳐 읽으면서 그림 속 장면을 통해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본생도 벽화는 관람자의 눈이 가장 먼저 비치는 화면 중앙에 중심 주제를 배치하고 좌우로 살펴 부제를 살펴보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체 이야기의 구성이 치밀하고 생동감 있으며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색채의 처리는 ‘요철법(凹凸法)’으로 즉, 돋으러 지게 칠하고 있으며 사물의 표현이 간결하면서도 힘차고 수법이 자유롭고 능숙하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중국 전통 회화기법에는 없었던 것으로 북위시대 막고굴 벽화가 서역미술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사슴왕의 본생설화는 자비, 보시, 지계, 인욕 등 지바라밀(智波羅蜜)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본생설화의 불타는 동물이거나 조류인 경우가 많은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살 천신, 국왕, 걸인 등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설화를 통해서 인도 고대 신앙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수많은 세상에서 선근과 정진을 쌓음으로써 이미 부처가 되셨지만 이 세상에 오셔서 비로소 오도(悟道)의 정각(正覺)의 내용인 연기법을 중생에게 보이신 것은 오직 중생 제도를 위한 방편이라는 신앙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