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0월은 (2007년) 1492년 컬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한지 515년 되는 달이다. 많은 사학자들은 1492년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해의 하나라 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한 해에 신대륙 발견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잡고 있던 회교 왕국의 몰락,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축출이 동시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이 세 사건의 연관 관계를 살펴본다.
스페인 통일·유대인 축출·신대륙 발견의 상관관계
스페인 남쪽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은 세계 최고의 건축미를 자랑한다. 온갖 섬세한 문양으로 장식된 궁전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그 아래 초원의 경치는 절경이다. 이 일대를 한번 둘러보면 800년 동안 이곳을 지배하던 회교도들이 왜 이곳을 ‘지상의 낙원’이라고 불렀는지 쉽게 이해된다.
<크리스토퍼 컬럼버스>
불행히도 15세기 후반 알함브라 궁전의 마지막 회교 왕인 보압딜은 멍청이였다. 태어날 때부터 “이 아이가 왕이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현자의 예언이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이 아이를 세자의 자리에서 쫓아내려고 여러 번 기도했으나 왕비의 결사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왕이 된 후에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향락에 빠져 세월을 보내다가 야금야금 기독교 세력에 영토를 뺏기고 군소 영주로 전락한다. 설상가상으로 조카의 무능을 보다 못한 삼촌 엘 사갈이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회교 왕국은 적전 분열 양상을 보인다.
이런 회교권은 분열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회교도를 축출하고 통일 스페인의 위업을 달성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왕과 카스틸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부부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라나다 인근 성을 하나씩 공격해 점령한 기독교 군은 당시 회교도 최대 명장이었던 엘 사갈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엘 사갈의 항복 소식을 들은 보압딜과 그라나다 주민들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을 결정하고 1492년 1월 2일 알함브라 궁전을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에게 넘겨준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회교도를 몰아내는데는 스페인에 퍼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당시에도 돈줄을 쥐고 있는 것은 물론 의료, 천문, 과학, 철학 등 전문 분야에 널리 종사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돈과 기술로 기독교 스페인 왕국의 번영에 큰 도움을 줬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이런 유대인의 은혜에 스페인 왕과 교회는 전 유대인의 국외 추방이라는 결정으로 보답했다. 회교도 축출과 함께 절정에 달했던 기독교 열기가 주원인이었지만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재산에 대한 욕심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라나다가 기독교도의 손에 떨어진 지 불과 석 달 후인 1492년 3월 30일 스페인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은 8월 전까지 나라를 떠나거나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당시 여왕의 보좌관과 세금 징수 총책임자로 고위직을 맡고 있던 유대인 아브라바넬과 아브라함 세니오는 천문학적 숫자인 3만 냥의 금화를 내면서 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종교 재판소장 토르케마다의 반대로 무산됐다. 토르케마다는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낸 후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을 이단으로 몰아 처형한 인물이다.
회교도를 몰아내고 유대인 재산을 몰수해 느긋해진 스페인 왕실은 그제서야 오랫동안 들은척 만척 했던 제노아의 선원 크리스토퍼 컬럼버스(원 이탈리아 이름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스페인 이름은 크리스토발 콜론)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항로 탐험을 허가한다.
1492년 4월 30일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는 알함브라 궁전에서 컬럼버스가 새 땅을 발견할 경우 그곳 총독으로 임명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의 10%를 준다는 문서에 서명한다. 그리고는 인근 항구 도시 팔로스에 컬럼버스에게 2척의 배를 내주라는 왕명을 내린다.
컬럼버스에게 배와 성원의 대부분을 제공한 팔로스 주민들의 질이 나빴던 것은 신대륙 주민들의 불행이었다. 이곳은 노예무역이 판을 치고 범죄자들이 들끓는 스페인에서도 악명 높은 도시였다. 스페인 왕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배에 선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중범자도 이 항해에서 돌아오면 죄를 면죄해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공교롭게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되는 마지막 날이었던 8월 2일 출항한 컬럼버스는 2달여의 항해를 거쳐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다. 엄밀히 말하면 아메리카 대륙이 아니라 카리브 해에 있는 한 섬이었지만 어쨌든 10월 12일 바하마의 산살바도르에 닻을 내리며 미국은 이 날을 연방 공휴일의 하나로 지정해 기리고 있다.
컬럼버스는 그 후에도 모두 4차례 신대륙을 왕복하며 왕과 국민이 바라던 황금을 찾지만 실패하며 그로 인해 왕의 신임을 잃고 비참하게 죽는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이 발견한 것이 신대륙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후 스페인은 아즈테크와 잉카 문명을 정복하면서 여기서 얻은 금은보화로 100년 동안 유럽의 강자로 군림하지만 갑작스런 귀금속 유입으로 인한 인플레와 후발주자 영국,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유대인들은 부와 기술로 이베리아 반도 회교도 축출에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회교도가 사라진 후 토사구팽 당하며 회교도를 내쫓아 집안 근심을 없애고 유대인 돈까지 빼앗아 여유가 생긴 스페인 왕실은 컬럼버스를 후원해 신대륙의 주인이 된다. 돌고 도는 역사의 묘한 연결고리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