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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師禪에서 禪旨의 표현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Revelations
of the Chan’s Essence
김 태 완 (Kim Tae-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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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대학교 철학과 강사
ktw38@chollian.net
■차 례■
1. 서 론
2. 禪에서 표현과 안목의 문제
3. 논리에 의한 간접적 설명
3.1. 혜능의 對法論
3.2. 백장의 三句論
3.3. 스즈키의 卽非論理
4. 행위에 의한 직지인심
4.1. 禪旨의 직접표현
4.2. 직접표현의 自己否定的 성격
5. 간접표현과 직접표현의 여러 양상
5.1. 간접표현의 양상
5.1.1. 說明
5.1.2. 指示
5.2. 직접표현의 양상
5.2.1. 格外語를 이용
5.2.2. 六根의 知覺을 이용
6. 결 론
祖師禪에서 禪旨의 표현에 관한 연구
1. 서 론
중국 선종의 전개사에서 마조 이후 그 문하의 선을 祖師禪이라고 한다.
조사선은 혜능에 의한 선의 중국화, 즉 定慧不二에 바탕한 頓悟禪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으로서,
그 禪法의 특징은 上堂說法과 선문답을 통한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의 실천이었다.
‘祖師西來意’로 질문되는 조사선의 禪旨는 곧 人心으로서,
어떻게 인심을 가리키고 어떻게 인심을 깨달을 것인가 하는 것이 조사선의 골자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따른 조사선의 실천구조는,
스승이 설법을 통해 인심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거나 문답을 통해 인심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그 설명을 듣거나 표현을 知覺한 學人이 機緣이 맞을 경우 견성한다는 형태이다.
따라서 이 선을 사상적으로 연구함에 문제가 되는 것은 대체로,
① 스승에 의한 인심의 설명과 표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② 학인의 견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③ 인심은 어떤 것인가,
④ 어떻게 공부해야 인심을 깨달을 수 있는가 하는 등이다.
다시 말하면,
①은 直指人心,
②는 見性成佛,
③은 心性論,
④는 修行論이라는 주제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은 그 가운데
①직지인심과 관련하여, 인심의 간접표현인 설법의 방식은 어떤 것이며,
인심의 직접표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것이다.
2. 禪에서 표현과 안목의 문제
달마가 정법안장을 전할 후계자를 정하려 할 때의 일을
전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달마는) 인도로 돌아가려 할 때 문인들에게 말했다.
“때가 되었다. 너희들은 각자 얻은 바를 말해 보라.”
그때 문인 道副가 답하여 말했다.
“저의 소견으로는,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는 것이 도의 쓰임(道用)입니다.”
달마가 말했다.
“너는 나의 피부를 얻었다.”
尼總持가 말했다.
“저의 지금 아는 바(所解)는, 아난이 阿閦佛國을 봄에 한 번 보고는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道育이 말했다.
“四大는 본래 空하고 五陰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저의 見處에는 얻을 만한 一法도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慧可가 일어나 절한 뒤에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달마가 말했다.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
조당집 제2권․
경덕전등록 제3권
․천성광등록 제6권 등 여러 곳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제자의 안목을 시험하여 바른 안목을 갖춘 자에게 宗旨를 부촉하는 선종의 전통을 묘사한 것이다.
안목을 시험하는 방법은 ‘얻은 것을 말해 보라’(言所得)고 하여
제자에게 자신의 안목을 표현하기를 요구하고,
그 표현을 보고 그 제자의 안목을 판정하여 그가 正法을 얻었는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런 테스트 방식은 馬祖 이후에는 감변이라고 하여 선문답의 주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이처럼 제자가 자신의 안목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서 그의 견처가 어느 정도인지를 판단한다는 사실은, 곧 안목의 다름,
즉 견처의 깊이는 그의 표현에 의하여 드러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즉 禪의 표현은 선에 대한 그의 안목이라는 바탕에서
나오므로, 선에 대한 안목의 정도와 그 표현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안목이란,
어록에서는 흔히 知見이라고 표현되는데, 지식의 多少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 견처의 깊고 얕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선에 대한 안목의 표현이란 곧 자신의 체험적 견처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으로서,
한 禪者가 체험한 선은 그의 언행에 의하여 그대로 밖으로 표현된다는 뜻이다.
선이 언행에 의하여 그대로 표현된다는 이 점은 선문답이 가능한 근거이기도 하며
또 선이 이심전심으로 전수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스승은 자신의 견처를 언행을 통하여 밖으로 표현하고,
제자는 스승의 그러한 표현을 보고서 스승의 견처를 파악하여
스승과 같은 안목을 갖추게 되는 것이 바로 이심전심으로 선을 전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이심전심의 행위는 석가와 가섭의 이른바 三處傳心을 위시하여 전등록과 어록에는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스승이 제자에게 표현하는 모든 선의 언행이 전부 이심전심의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불경에서의 부처의 언행 역시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선의 견처가 禪匠의 언행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견처와 표현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곧 선에서 가르침과 배움의 가능근거가 된다.
즉 이미 선의 門안에 들어가 있는 선장이 자신의 견처를 언행으로 표현하면,
아직 문밖에 있는 학인은 그 선장의 언행을 통하여 문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선의 문이란 곧 견성이라고 하는 탈논리적․탈의식적․탈사유적인 체험을 가리킨다.
이른바 “마치 사람이 물을 직접 마셔 보고 그 차가움과 따뜻함을 아는 것과 같다”는 말과 같이,
아직 논리적이고 사유적인 意識의 틀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학인으로서는 견성이라는
문안의 탈의식적 세계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아직 의식의 구속을 벗어나지 못한 학인에게
탈의식적 세계인 선의 세계를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설명만으로는 알려 줄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견성의 체험이 논리적인 사유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선의 체험을 전달할 아무런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선을 가르칠 아무런 길이 없다면,
선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형성될 수가 없을 것이고, 이심전심이라는 말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선에는 가르침과 배움의 길이 있고, 그 길을 통하여 선은 지금까지 전승되어 왔다. 그 의사소통의 길이란
곧 六根이라는 知覺의 통로를 통하는 길이다.
즉 사람들에게 공통된, 보고 듣고 느끼는 지각작용을 통하는 길이다.
이처럼 만인에게 공통된 의사소통의 길이선장과 학인에게도 역시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인에게 공통된 의사소통의 길을 통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선에는 선만의 독특한 방법이 있다.
일상적인 대화와는 달리 선에서만 사용하는 표현의 길이 있는 것이다.
선문답에서 선장이 사용하는 이러한 표현의 길은 크게 보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간접적․소극적 표현의 길이고 또 하나는 직접적․적극적 표현의 길이다. 간접적 표현의 길은, 언어문자의 의미를 매개로 하는 언어적 표현으로서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편 직접적 표현의 길은, 통상적 용법에서의 언어문자를 매개로 하지 않고 직접 견처를 표현하는 길로서 어떠한 정해진 격식의 구속도 없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格外語니 格外事니 格外玄機니 하고 부른다. 이렇게 보면, 간접적 표현은 언어라는 격식에 구속되기 때문에 格內語나 格內事가 될 것이다. 격내어인 간접적․언어적 표현은 이른바 方便語로서, 초월적 진리를 가르치는 종교나 사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여기에 비하여 격외어인 직접적 표현은 선에만 고유한 진리 표현과 전달의 방법으로서, 선을 선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간접적 표현과 직접적 표현, 즉 방편어와 격외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3절과 4절에서 살피기로 하고, 여기서는 앞에서 제시한 달마와 제자들의 일화에서 간접적․언어적 표현과 직접적․탈언어적 표현의 예를 보기로 하자. 도부․니총지․도육․혜가 등 4명의 제자가 표현하는 각자의 견처를 살핀 달마는 혜가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한다. 위의 문답에서 볼 때 혜가와 나머지 3인의 차이는 언어적 표현을 하느냐 탈언어적 표현을 하느냐 하는 한 가지이다. 즉 각자 얻은 바의 견처를 말해 보라는 요구에 대하여, 언어라는 격식을 빌려서 간접적으로 견처를 표현하느냐, 아무런 격식도 빌리지 않고 직접 견처를 드러내느냐 하는 차이에서 달마는 그 견처의 及不及을 판정한 것이다.
견처의 급불급을 판정한다는 말은, 단순히 가장 나은 견해를 가진 이를 傳法後繼者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견성의 체험 즉 禪門 안으로 들어왔음이 확인되어야 비로소 인가가 된다는 말이다.
육조단경에서 五祖弘忍이 신수의 게송을 보고 “문밖에는 도달했으나 아직 문안에는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물론 육조단경의 경우처럼 언어적 표현인 게송만으로도 견처의 深淺과 급불급은 판정이
될 수가 있다. 위 달마의 예에서도 언어적 표현은 차등을 두고 판정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도부는 文字에 장애되지 않음을 말하고, 니총지는 견처에 장애되지 않음을 말하며,
도육은 일체법에 장애되지 않음을 말하여, 각각 피부(皮)․살(肉)․뼈(骨)라고 그 견처의 깊이가 판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간접적․언어적 표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반면에, 혜가는 행위로써 직접 자신이 얻은
견처를 표현하고 있다. 즉 앞선 3인은 자신의 견처를 표현함에 말이라는 관념적 매개물을 만들어 냄으로써,
견처와 견처에 관한 관념이 이원화되어 있다. 즉 아직도 禪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선을 대상으로서 바라보고 있는
문밖의 사람들인 셈이다. 반면에 혜가는 견처를 관념화시키지 않고 자기가 곧 견처인 그대로를 직접 표현함으로써
선문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즉 혜가에게는 자신과 선이 하나로서 따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달마는 전법후계자로 혜가를 인정한 것이다
.
이처럼 이원적이냐 非二元的이냐 하는 것은 선문 밖에 있느냐 선문 안에 있느냐를 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예컨대 육조단경에 나오는 신수와 혜능의 게송은 바로 그러한 기준에 따라서 급불급이 판정되고 있다. 신수는 마음의 거울과 먼지를 이원적으로 보고서 먼지를 없애야 본래 거울을 찾는다고 말하는 반면, 혜능은 거울도 먼지도 없다고 하여 비이원적이다.
즉 眞(거울)․妄(먼지)의 양변을 떠나서 不二의 中道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선문답의 속성을 설파한 臨濟의 四賓主에서도 안목을 판정하는 기준은 境界와 자신이 둘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고, 이른바 ‘사자 새끼는 사람을 물고 한나라 개는 흙덩이를 쫓는다’(獅子咬人韓獹逐塊)라는 말도 역시 같은 취지를 말하고 있다.요컨대 언어의 의미를 매개로 하여 관념적으로 禪旨를 표현하면 이것은 이원적이고 간접적인 표현이며, 무의미한 행위로써 선지를 표현하면 이것은 비이원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이다.
3. 논리에 의한 간접적 설명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은 언어적인 표현에 의존한다. 이러한 언어적 가르침을 敎說이라고 하는데, 교설을 모아 놓은
것이 경전이다. 조사들의 가르침을 수록해 놓은 선어록을 보면, 선에서의 가르침 역시 대부분 언어를 통하여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인간에게 의사소통의 방법은 역시 언어가 주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선에서는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이라고 하여,
언어가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로서 사용될 경우의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선의 견처를 언어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표현할 경우에는
매개물인 언어에 의하여 표현되는 선을 볼 수 있을 뿐이지, 본래의 선 그 자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선의 견처 곧 견성의 내용은 언어로써는 온전히 표현될 수가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비단 선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초월자 혹은 초월적 경지를 말하는 종교나 사상에서는, 그 초월자 혹은 초월적 경지가 언어로써는 완전하게 표현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이 거의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인도 전통사상인 우파니샤드에서 잘
알려진 “아니다 아니다”(neti neti)와 불교의 四句百非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교외별전․불립문자․직지인심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언어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는 선의 입장에는 미칠 바가 아니다. 선에서 이런 기치가 나타나는 것은 혜능 이후 혹은 마조 이후
로서, 선의 주요한 실천양상이 선문답이라는 형태로 되면서이다. 여기서는 육조단경과 백장록을 통하여 그들의 언어적
표현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고, 현대의 禪學者 스즈키 다이세쯔가 주장하는 선의 논리인 卽非論理를 검토해 보자.
3.1. 혜능의 對法論
육조단경의 후반부에 보면, 혜능이 法海를 비롯한 10대 제자를 불러서 자신의 멸도 후에 어떻게 설법하여야
종지를 잃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장면이 있다. 설법 방법에 대한 혜능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먼저 三科法門을 들어서, 움직이고 작용함에는 36가지로 相對시키고,
나고 듦에는 兩邊을 떠나며,
일체법을 설하되 自性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누가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말을 함에 모두 쌍으로 하고 對法을 취하여 오고 감이 서로 因이 되게 하다가,
마지막에는 두 법을 모두 없앰으로써 달리 갈 곳이 없게 하여야 한다.
여기서 三科法門이란 곧 五陰․十八界․十二入이다. 만법은 자성에 含藏되어 있으므로 18계는 자성의 작용이라고 한다.
자성의 이러한 작용은 相對法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그렇게 나타나는 상대법을 망라한 것이 36對法이다.
36대법은 크게 3종류로 분류되어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外境無情 5對:天․地, 日․月, 明․暗, 陰․陽, 水․火.
㉡ 法相語言 12對:語․法, 有․無, 有色․無色, 有相․無相, 有漏․ 無漏, 色․空, 動․靜, 淸․濁, 凡․聖, 僧․俗, 老․少, 大․小.
㉢ 自性起用 19對:長․短, 邪․正, 癡․慧, 愚․智, 亂․定, 慈․毒, 戒․非, 直․曲, 實․虛, 險․平, 煩惱․菩提, 常․無常, 悲․害,
喜․瞋, 捨․慳, 進․退, 生․滅, 法身․色身, 化身․報身.
이것을 보면, 外境과 法相과 自性으로 범주를 나누고,
그 속성을 표현하는 말을 둘씩 쌍으로 하여 서로 상대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쌍으로 하는 이유를 혜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누가 너희에게 뜻을 물을 경우, 有를 물으면 無로써 대답하고,
無를 물으면 有로써 대답하며,
凡을 물으면 聖으로써 대답하고,
聖을 물으면 凡으로써 대답하되,
두 길(道)이 서로 因이 되어서 中道의 뜻을 낳게 해야 한다.
너희는 하나의 물음에 대해서는 하나의 대답을 하되,
여타의 모든 물음도 한결같이 이렇게 한다면 이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을 일컬어 어둠이라 합니까?”라 묻는다면
“밝음은 因이고 어둠은 緣이니 밝음이 사라지면 곧 어둠이다.
밝음을 가지고 어둠을 드러내고 어둠을 가지고 밝음을 드러내니,
오고 감이 서로 因이 되어 中道의 뜻을 이룬다”라고 답하여라.
여타의 물음도 모두 이와 같이 대답하라.
너희들이 후에 법을 전함에 이렇게 서로 가르쳐 준다면 종지를 잃지 않을 것이다.
만법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을 둘씩 서로 상대시켜 쌍을 이루게 하는 이유는,
두 상대법에 빠지지 않고 중도를 얻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말을 둘씩 서로 상대시켜 중도를 얻는다는 것은,
앞 인용문의 “말을 함에 모두 쌍으로 하고 對法을 취하여 오고 감이 서로 因이 되게 하다가,
마지막에는 두 법을 모두 없앰으로써 달리 갈 곳이 없게 하여야 한다”라는 말의 의미이다.
말을 함에 중도를 얻는다는 것은,
“나고 듦에는 兩邊을 떠나며, 일체법을 설하되 자성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혜능이 법을 설하는 방법으로 36대법을 따르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곧 일체법을 설할 때에 자성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하여, 법을 설할 때 對法을 따른다는 것은
곧 대법을 극복하고 중도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고,
중도로 나아간다는 것은
곧 자성을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바로 자성은 대법의 형식으로는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법의 형식이란 思惟의 법칙 혹은 언어의 법칙인 同一律과 矛盾律에 근거하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대법을 떠나서 중도를 이루어야 자성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성은 사유나 언어를 통하여 알 수 있거나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따라서 결국 혜능의 對法論도 앞서 우파니샤드의 ‘네티 네티’나 불교의 사구백비와 같이,
진리-여기서는 자성-는 언어로써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개념을 쌍으로 대응시키고 양변을 떠나 중도를 이룬다는 형식은
본래 불교에서 중도를 설명할 때에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선에서 이러한 형식의 중도가 가지는 의의는 한발 더 나아간 곳에서 찾아야 한다.
선에서의 그 의의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무엇도 세우지 않는다는 無住와 無相이라는 소극적 의미뿐만 아니라,
자성을 벗어나지 않는다(즉 자성을 드러낸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찾아야 한다.
禪家의 태도와 敎家의 태도를 구별짓는 차이가 바로 이 점에 있다.
예컨대 교가에서는 금강경을 해설할 때 ‘四句偈’ 등을 근거로 無住․無相 등의 空思想을 말하겠지만,
선가라면 그렇지 않고 금강경의 맨 처음 ‘如是我聞’에서 벌써 자성의 自在한 작용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적극적 의미는 “18계가 모두 자성으로부터 일어나 작용한다” 또는 “자성으로부터 작용이 일어나
(36의) 대법이 있다”는 혜능의 말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아직 혜능 때에는 탈언어적 직접표현의
행위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마조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설법을 함에 대법을 사용하여 중도를 이루는 궁극적 목적이 적극적으로 자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바로 이 점에,
선에서 언어적 표현이 가지는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아가 탈언어적 직접표현에서 적극적으로 자성을
드러내는 행위로 발전하게 되며, 바로 이 적극적인 자성의 표현이 이른바 直指人心이라고 하는 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 살펴볼 百丈의 三句論 역시 바로 이와 같은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3.2. 백장의 三句論
百丈錄에는, 부처와 조사가 가르침을 펴는 말씀인 敎說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백장의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백장은 말하는 자의 입장에 서서, 상대에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正法에 어긋나지 않으며,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 것은 정법에 어긋나는 魔說이 되는 것인지를 해설하고 있다.
백장은 교설을 그 의미와 역할과 표현법에 따라서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백장의 분류에 따르면 교설은,
㉮ 了義敎語와 不了義敎語,
㉯ 遮語와 表語(=不遮語),
㉰ 生語와 死語,
㉱ 藥語와 病語, ㉲ 逆喩와 順喩,
㉳ 總語와 別語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백장은 분류된 하나하나의 경우에 속하는 예를 따로 들지 않고,
이렇게 분류한 것을 다시 그 쓰임에 따라서 크게 두 경우로 나누어서 예를 들고 있다.
‘닦아서 부처가 된다’,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
‘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
‘이것은 부처의 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不了義敎語이고 表語(=不遮語)이며 總語이고 한 됫박쯤 되는 말이며
染法 쪽을 선택한 치우친 말(邊語)이고 유사한 비유를 드는 말(順喩)이며
죽은 말(死語)이고 범부 앞에서 하는 말이다.
‘닦아서 부처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부처라는 것도 부처가 한 말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了義敎語이고
遮語이며,
別語이고 백 섬들이 말이며
三乘敎 밖의 말이고
반대 비유를 드는 말(逆喩)이며,
淨法 쪽을 선택한 치우친 말(邊語)이고
살아 있는 말(生語)이며
수행 지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다.
이제 이 예에서 백장이 한 분류의 의미를 살펴보자.
범부를 가르치는 말의 예로서 백장이 든 것들은,
“닦아서 부처가 된다”(修行得佛),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有修有證),
“마음이 곧 부처다”(是心是佛),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卽心卽佛),
“이것은 부처의 말이다”(是佛說) 등이고,
수행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가르치는 말의 예는,
“닦아서 부처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不許修行得佛),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다”(無修無證),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부처라는 것도 부처가 한 말일 뿐이다”(佛亦是佛說) 등이다.
이 예들을 보면, 똑같은 내용을 범부에게는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수행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서로 정반대의 의미로 말해 주고 있다.
왜 같은 내용을 범부와 수행 지위에 있는 자에게는 정반대의 의미로 말해 주는 것일까?
우선 요의교와 불요의교에 대하여 언급한 백장의 말을 보자.
불요의교에는 인간․천상의 스승이 있고 중생을 제도할 스승도 있으나,
요의교에서는 인간․천상에게 스승이 되지 않으며, 법을 스승으로 삼지도 않는다.
아직 본래 마음(玄鑒)에 의지하지 못하였다면, 우선 요의교에 의지해야 조금은 가까운 데가 있다.
불요의교는 다만 귀머거리 속인 앞에서나 말하기에 합당할 뿐이다.
불요의교는 스승이 있고 부처가 있다는 긍정표현이고,
요의교는 스승도 없고 진리도 없다는 부정표현인데,
긍정표현은 진리에 귀먹은 속인 앞에서나 할 만한 말이라는 것이다.
또 본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수행자가 아직 본래 마음을 얻지 못했다면
우선 부정적인 가르침에 의지해야 도움이 된다고 한다.
말은 단순히 고막을 울리는 소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작용하여 생각을 일으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긍정적인 말은 그 말이 나타내는 의미를 세우는 것이고, 부정적인 말은 그 말이 나타내는 의미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귀먹은 속인이란 곧 불교의 진리를 들은 적이 없는 속인이란 말이니, 이와 같은 귀머거리 속인에게는 우선 위대한
불교의 진리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믿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긍정표현으로써 불교의 진리를 세운다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긍정표현으로 의미를 세우는 것은 눈먼 속인을 진리로 인도하는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백장은 이러한 방편설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처음부터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중생이 해탈할 기약이 없겠고, 처음부터 말을 하면 중생이 또 말에 따라 알음알이를 지어 이익은 적고 손해만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설법을 하지 않고 빨리 열반에 들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 뒤 과거의 부처들 모두가 三乘法을 말하였음을 돌이켜 생각하고는 방편설로 거짓 이름을 세워서, 본래 부처가 아닌데 그(중생)에게는 부처라 하고, 본래 菩提가 아닌데 보리․열반․해탈 등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백 섬을 지고는 일어나지 못함을 알고 우선 한 되 한 홉을 지워 주었으며, 요의교는 그가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불요의교를 가르쳤던 것이다.
여기에서 백장은 부처가 애초에 교설을 세운 동기를 말하고 있다. 교설이란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세운
방편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처가 깨달은 진리는 본래 말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가르칠 수가
없고, 말할 수 없는 진리를 말하여 가르치면 오히려 진리를 왜곡시키고 중생을 잘못 이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부처가 가르침을
펴려고 할 때 빠져 있던 딜레마였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고 가르침을 펴는 방법으로 부처가 선택한 것이, 말을 하되 그 말을
부정하는 방법이었다. 즉 강을 건너고 나면 버려야 하는 뗏목이나 지붕에 올라가고 나면 버려야 하는 사다리처럼,
한정된 역할을 수행하고는 버려야 하는 수단 방편으로 말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에 귀먹은 속인을 이끌기 위한 방편으로는 긍정표현(表詮)을 세웠고,
출가수행자를 위한 방편으로는 부정표현(遮詮)을 세웠던 것이다. 불교의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서 그것을 얻고자 발심한 수행자에게는, 눈먼 속인을 이끌기 위하여 세운 것들이
단순한 방편일 뿐, 진리라고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그래서 부정표현으로써 앞에서 세운 것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교설을 방편설로 보는
敎家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언설로 된 가르침(敎說)을 방편으로 세웠다가 방편의 역할을 다하면 그 언설은 버린다.
백장은 이러한 방편교설의 논리적 구조를 자신의 독특한 이론인 三句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대체로 敎語는 모두 三句와 관련되어 있다.
삼구란
初善․
中善․
後善이니,
처음에는 곧바로 그(學人)에게 좋은 마음을 내도록 하여야 하고,
다음에는 그 좋은 마음을 부수게 하며,
그런 뒤에야 비로소 좋은 선(好善:後善)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컨대 ‘보살은 곧 보살이 아니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라 한다’라든가,
‘法은 法도 아니고 非法도 아니다’ 등의 말이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여기서 만약 一句만 말한다면 중생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이며,
三句를 동시에 말한다면 스스로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부처의 일과는 관계가 없다. 지금 비추어 깨달음(鑑覺)이
곧 자기 부처라는 데까지 말하면 이것은 初善이며,
지금 비추어 깨달음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면 이것은 中善이며,
머물지 않는다는 알음알이(知解)도 짓지 않는다면 이것은 後善이다.
백장에 의하면, 삼구란 불교에서 말로 하는 가르침 즉 교설의 특징적인 구조이다. 그 구조는
① 초선에서는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하나의 입장을 지키고,
② 중선에서는 초선의 입장을 버리며,
③ 후선에서는 초선의 입장을 버렸다는 생각(知解)도 버리는 것이다.
‘보살은 곧 보살이 아니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라 한다’라든가,
‘법은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다’ 등의 말은 이른바
금강경에 나오는 無住相의 가르침인데, 백장도 삼구라는 방식으로 역시 무주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佛法은 어떠한 견해도 아니므로 깨달은 자는 어떠한 견해에도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견해의 相이야말로 깨달음을 막는 커다란 장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삼구의 무주상은 곧 앞서 혜능의 대법론에서 ‘양변을 여의고
중도를 이룬다’고 하는 말과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대법론에서 상대되는 법을 쌍으로 세우고
둘 다를 떠나서 달리 갈 곳이 없는(更無去處) 중도로 돌아간다고 하는 논리적 구조는,
곧 초선을 중선에서 부정하고
후선에서는 둘 다를 떠나 知解조차도 없어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상을 이룬다고 하는 구조와 다를 바 없다.
불교의 진리를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면 이러한 논리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본래 언어란 차별과 相對를 통하여 대상을 표현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란 본래 인간의 사유에서 나온 것이므로, 결국 우리의 의식적 사유와 언어를
통하여 불교의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은 대법론이나 삼구론 혹은 사구백비와 같이 소극적인 표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서 혜능의 대법론도 구경의 목적은 적극적으로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듯이, 백장의 삼구론 역시 목적은 소극적인 삼구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무애자재한 자성의 활용에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백장 삼구의 이러한 특성은 다음 4절에서 살펴보겠다.
3.3. 스즈키의 卽非論理
현대의 선사상가이자 실천수행자이기도 하였던
일본의 스즈키 다이세쯔(鈴木大拙)는 卽非論理라는 것을 가지고 선을 설명하고 있다.
卽心是佛 혹은
卽心卽佛이라는 것은 非心非佛과 동일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卽은 긍정을 非는 부정을 나타내므로,
양자간에 어떤 관련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의 논리의 특성은 肯定卽否定․否定卽肯定이다.
내가 卽非의 논리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논리라 하면 안 되고, 체험을 논리로 만든 것이다.
선경험을 논리의식 위에 끌어내어 말하면 아무래도 이렇게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논리는 종래의 논리와는 같지 않다.
非는 대립의 세계에 있고
卽은 자기동일의 세계에 있다.
그래서 대립한 그대로 자기동일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선경험의 논리이기 때문에 絶對心의 위에 萬象의 세계가 성립하는 것이 된다.
스즈키는 즉심시불이 곧 비심비불과 동일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마조와 法常의 일화이다.
법상은 마조의 즉심시불이라는 말을 듣고 깨달았는데, 뒤에 마조는 이제는 비심비불이라고 말하여
법상을 시험해 보지만, 법상은 이 말을 듣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 까닭은 선의 입장에서는 즉심시불과 비심비불이 서로 같은 뜻이기 때문이라고 스즈키는 해설하고 있다.
말의 의미로 본다면 卽과 非는 서로 반대의 의미인데, 어떻게 선에서는 즉과 비가 같다고 말하는가?
스즈키는 이것을 선경험의 입장에서 心性論的으로 설명하고 있다. 스즈키에 의하면,
心은 相對心과 絶對心의 두 가지로 해석된다고 한다.
절대심은 法界一心․唯心․本有身․淸淨心․空․無 등으로도 부르는 것으로서 唯一한 것이고,
상대심은 절대심 위에서 펼쳐지는 삼라만상의 다양한 경험세계라 한다.
또 절대심은 불생불멸이고 無善惡이며,
상대심은 생멸하며 선악이 있지만,
절대심은 상대심을 통하여 활동하고 드러난다고 한다.
스즈키는 절대심과 상대심의 이러한 관계를 법상의 설법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법상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대들은 모두 각자 마음을 돌이켜 근본에 통달해야 하고,
그 말단을 쫓지 말라. 근본을 얻기만 하면 그 말단은 저절로 따라온다.
만약 근본을 알고자 한다면 오직 자기 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마음이 원래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법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도 사라진다.
마음은 일체의 善惡과 함께하지 않으니, 만법을 생성하면서도 본래 그대로 如如하다.
여기서 ‘마음을 돌이켜’(廻心),
‘마음이 생기면’(心生),
‘마음이 사라지면’(心滅) 등에서의 心은 모두 상대심이고,
‘자기 마음’(自心),
‘이 마음’(此心) 등은 절대심이라 한다.
말하자면, 마음의 절대적 측면은 항상 청정하고 여여하지만,
마음의 상대적 측면은 만법과 더불어 생멸한다.
그러므로 절대적 측면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이지만(卽心是佛),
상대적 측면에서는 마음이 부처가 아니다(非心非佛).
그러나 절대심과 상대심은 一心의 양 측면일 뿐,
본래 하나의 동일한 마음이다.
즉 본래의 일심에서는 절대심과 상대심이 不二이다.
그러므로 즉심시불과 비심비불은 본래의 일심에서 보면 같은 것(不二)이다.
이것이 스즈키의 즉비논리이다. 마음의 절대적 측면은 동일성(卽)이고 상대적 측면은 이질성(非)이지만,
一心의 측면에서는 동일성과 이질성이 사라지고 不二의 입장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앞서
혜능의 대법론과 똑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절대심과 상대심의 둘을 쌍으로 대응시켜 對法으로 만들어서,
이 양변을 떠나 불이의 중도로 돌아간다는 논리 구조가 똑같다.
스즈키의 즉비논리는 본래 금강경의 구절에서 힌트를 얻어 구상된 것으로 보인다.
금강경에서 가장 특징적인 구절은, “이른바 일체법은 곧 일체법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일체법이라 이름한다”(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名一切法)와 같은 문장이다.
이 문장은 바로 즉비의 논리를 나타내고 있다. 실제 금강경에는 이와 같이 즉비의 논리를
나타내는 문장이 10군데 이상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금강경의 사상을 설명하는
논리방식이 즉비논리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른바 四句偈에서, “만약 諸相이 (곧) 非相이라고 본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若見諸相(卽)非相 則見如來)라는 문장도 즉비논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금강경의 이런 문장들은 앞에서 보았듯이
백장이 자신의 삼구론을 나타내는 예로서 들고 있는 문장들과 같다.
‘肯定
․否定․
肯否의
양변을 떠남’이라는
삼구의 논리를 나타내는 예로서 백장은, “보살은 곧 보살이 아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 한다”(菩薩卽非菩薩 是名菩薩)를 들고 있다.
따라서 논리적 구조로 보나 들고 있는 사례를 보나, 혜능의 대법론과 백장의 삼구론 및 스즈키의 즉비논리가 모두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모두, 상대적이고 분별적인 사유나 언어로써 불교와 선의 깨달음의 체험적 경지를 나타내려면 이러한 논리적인 구조를 통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 논리는 언어로써 체험적 진리를 나타내려고 할 경우에 따를 수밖에 없는 언어 표현의 논리이다. 따라서 위의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스즈키는 즉비논리를, “선경험을 논리의식 위에 끌어내어 말하면 아무래도 이렇게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4. 행위에 의한 직지인심
4.1. 禪旨의 직접표현
위에서 살펴본 대법론과 삼구론 및 즉비논리 등은 선체험을 언어논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체험은,
일반적으로 체험이 그렇듯이, 그 자체는 항상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無論理的인 것이지 간접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체험의 직접 전달을 추구하는 선에서는 교외별전이니 불립문자니 직지인심이니 하는 등을 표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체험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대법론이나 삼구론이나 즉비논리 같은 논리적 표현이 아니다. 선체험을 직접
표현하는 언어 혹은 행위는 격외어 혹은 격외사로 불리는 무논리적 방법이다. 물론 대법론과 삼구론도 양변을 떠나 갈 곳이 없다든지 시비의 지해마저 벗어난다든지 하여 궁극적으로는 무논리적 격외의 도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떠난다거나 벗어난다거나 하는 소극적 표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성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작용을 드러내는 것은 무논리적 표현인 격외어이다.
이처럼 선지를 무논리적․적극적․직접적․즉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직지인심이다. 직지인심이란 간접적 전달 수단인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어떠한 논리적 격식도 통하지 않고 직접 마음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직지인심을 표방하는 선을 格外禪이라고도 부르고, 선지를 표현하는 언어나 행위를 격외어니 격외사니 하고 부르며, 선지식을 格外道人 혹은 出格見解人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백장이 말하기를, 부처는 처음 成道하였을 때 보리수 아래서 21일을 말 없이 앉아서 차라리 法을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중생이 집착하는 성품 때문에 부처의 격외어를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중생의 집착하는 성품이 격외어를 들으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부처는 자비심을 내어 방편설을 세워 법을 설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서 격외어란 부처가 깨달은 지혜-선에서 보면 禪旨이다-를 곧바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무논리적
표현인 직지인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부처가 그러한 직지인심을 행한 예로서 禪家에서 잘 알려진 것이 이른바 염화미소에서 꽃을 들어올리는 행위이다. 말 없이 꽃을 들어올려 곧바로 선지를 나타내 보였을 때,
그 행위의 뜻-즉 직지인심의 선지-을 알아차린 자가 가섭이었으므로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였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본 혜가가 달마에게 법을 부촉받은 이야기와 같은 줄거리이다.
다만 이번에는 혜가가 직지인심의 행위를 하였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실 백장도 삼구론을 말하면서 최상승의 선은 삼구를 뛰어넘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백장이 삼구론을
말한 목적은 삼구의 초월에 있었던 것이다. 다음의 글은 백장이 삼구를 어떠한 의도로 고안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淸濁의 두 흐름과
凡聖 등의 법과
色聲香味觸法과 世間法․出世間法 등에 모두 조금도 애착하지 않는다.
이미 애착하지 않게 되고 나서는 애착하지 않음에 머물러서 그것을 옳다고 여기니, 이것이 初善이다.
이것은 조복된 마음에 안주하는 것이며, 聲聞人이며, 뗏목이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며, 二乘의 道이며,
禪那果이다. 이미 애착하지 않게 되고 나서 또 그 애착하지 않음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中善이다.
이것은 半字敎이며 아직 無色界이니, 이승의 도와 魔道에 떨어짐은 면하였으나, 아직 禪病이 남아 있고
보살의 계위에 매여 있다. 이미 애착하지 않음에 머물지 않게 되고 나서 또 애착하지 않음에 머물지 않는다는
알음알이(知解)도 짓지 않으니, 이것이 後善이다.
이것은 滿字敎이며, 무색계․선병․보살승․마도에 떨어짐은 면하였으나,
지혜에 막히고 지위에 막히고 行에 막히는 까닭에, 자기의 불성을 보는 것이
마치 밤중에 색깔을 보는 것처럼 뚜렷하지가 못하다. …… 만약 삼구를 꿰뚫어서
세 단계에 매이지 않는다면, 敎家에서 세 번 뛰어서 그물을 벗어난 사슴을 가지고
번뇌를 벗어난 부처에 비유하듯이, 그를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되면 연등불의 뒤에 오는 부처에 속하게 되며,
최상승이며, 上上智이며, 佛道의 위에 서는 것이니,
이 사람이 바로 부처이며 불성을 가졌고 중생의 스승인 것이다.
여기서 백장은 삼구를 각각 선수행의 경지에 적용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① 초선은 어떠한 법에도 애착하지 않게 되고서는 그 애착하지 않음을 옳다고 여겨 그곳에 머물러 있는 二乘의 경지이고,
② 중선은 이미 애착하지 않게 되고 나서 또 그 애착하지 않음에도 머물지 않는 菩薩乘의 경지이며,
③ 후선은 이미 애착하지 않음에 머물지 않게 되고 나서 또 애착하지 않음에 머물지 않는다는
知解도 가지지 않는 佛地의 경지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경지는 각각 어떤 지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므로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완전한 깨달음은 세 경지,
즉 삼구를 꿰뚫어 벗어나(透過) 어디에도 매이거나 머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격외의 선을 말하는 것이다.
삼구의 초선․중선․후선은, 諸法은 皆空이라는 곳에 머물고(二乘), 空에도 머물지 않으며(菩薩), 空에 머물지 않는다는
分別知解도 없다는(佛) 것으로서 모두 제법개공이라는 정해진 법과 관련되어 정해진 하나의 地位이다. 그러나 최상승은
어떠한 지위나 법에서도 벗어나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격외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백장 삼구론의 최종 목적은 역시 격외의 무애자재한 선임을 알 수 있다.
임제도 백장의 삼구와 비슷한 맥락에서 격외의 선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임제의 三種根機이다.
그대들 제방의 학인들이 찾아올 때, 나는 여기에서 3가지 근기로 끊는다. 中下根機가 올 때에는 나는 곧 그 경계는 뺏으나
그 법은 없애지 않고, 中上根機가 올 때에는 나는 곧 경계와 법을 모두 빼앗고, 上上根機가 올 때에는 나는 곧 경계와 법과
사람 모두를 빼앗지 아니하고, 격을 벗어난 견해를 가진 사람(出格見解人)이 올 때에는 나는 여기에서 곧 전체로 작용하며
근기를 매기지 아니한다. 대덕들이여! 이러한 경지에 이른 학인이 힘쓰는 곳에는 바람도 통하지 않고 電光石火라도
바로 지나쳐 버린다.
그러므로 만약 학인이 눈을 두리번거리기라도 하면 곧 무관하게 되어 버리며, 헤아리는 마음이 되면 바로 어긋나고,
생각을 움직이자마자 곧 틀려 버린다. 따라서 아는 사람은 눈앞을 벗어나지 않는다.
임제는 중하근기가 오면 경계는 빼앗고 법은 빼앗지 않는다고 하는데,
경계란 諸法이고 법은 諸法皆空을 말하는 것이므로, 경계는 빼앗고 법은 빼앗지 않는다는 말은
곧 제법개공의 二乘의 지위에 머물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상근기가 올 경우는 경계와 법을
모두 빼앗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제법개공에도 머물지 않게 하는 것이며(菩薩),
상상근기일 경우는 경계와 법과 사람 모두를 빼앗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빼앗고 빼앗지 않고 하는 분별도 두지 않는 것으로서 부처의 지위이다.
이렇게 본다면 임제의 삼종근기는 곧 백장의 삼구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임제는 다시 出格見解人이 올 경우는
곧 전체로 작용하며 근기를 매기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백장이 말하는 최상승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격외의 선이다.
여기서 임제는 격외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全體作用’ 즉 ‘오직 작용할 뿐’이라는 말과 ‘눈앞을 벗어나지 않는다’(不離目前)라는 말이다.
임제록에서 임제가 선지를 표현하는 용어는 人인데, 이 人을 직지하는 말을 요약하면 ‘卽今目前現用’이라는 말이다.
臨濟人의 특징은 옷을 벗은 인과 옷을 입은 인의 두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인의 이 두 측면은 앞서 보았던
스즈키의 心의 두 측면인 절대심과 상대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임제인은 마치 투명인간처럼 옷을 벗은 경우에는 無相․無住의 空으로서 살아 움직이더라도 지각되지는 않으나,
옷을 입으면 입는 옷에 따라서 청정한 부처가 될 수도 있고 오염된 범부가 될 수도 있으며 온갖 경계를 만들어
그 속으로 출입할 수 있다. 우리들의 六識은 옷만을 지각할 수 있을 뿐, 그 속에 있는 옷을 입는 인은 알지 못한다.
임제선의 요점은, 옷을 보되 옷만 보지 말고 그 옷을 입는 人을 파악하라는 것이다.
六識으로 지각되는 것은 옷뿐인데, 그 옷을 입는 사람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그 실마리는 움직임이다. 옷은 움직일 수가 없다. 사람이 옷을 입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옷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그 속에 있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이다.
옷만 본다면 옷은 뻣뻣하게 죽어 있다. 옷이 살아 움직일 때 고정된 옷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살아 움직임을 보고서 사람이 옷을 입고 있음을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옷과는 달리 모습이 없는 투명인간인 사람은 다만 옷의 움직임을 통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즉 無相인 절대심은
有相인 상대심을 통하여 파악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절대심과 상대심이 본래 一心으로서 不二이듯이,
임제의 인과 옷도 불이이다.
절대심이니 상대심이니 사람이니 옷이니 하고 나누는 것은,
혜능이 대법론에서 가르쳤듯이 언어로써 법을 설명함에 편의상 취하는 설명방식일 뿐이다.
臨濟人에서는 그 살아 움직임에서 인과 옷의 불이가 드러난다. 따라서 임제선에서 인을 직지하는 말이
곧 ‘卽今目前現用’이다. 사람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늘 ‘지금 여기서의 움직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人을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선지의 파악을 이처럼 살아 움직이는 작용에서 찾는 것은 마조 이래 그 문하의 전통이다.
마조가 선지를 나타내는 용어는 주로 心인데, 그 심은 바로 性과 性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相으로 분석된다.
즉 성과 상은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不二이다. 그러므로 마조선에서도 見性 즉 性의 파악은 相을 통하는 것인데,
이때는 상을 작용하는 살아 움직이는 상으로 본다. 다시 말해 상을 작용으로 볼 때 곧 성을 본다.
그러므로 모든 경험사실은 전부 性의 작용이다. 宗密이 마조선을 설명한 것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고, 손가락을 퉁기고,
눈알을 움직이는 등 作爲하는 것이 모두 佛性의 작용이고 다른 작용은 없다.
모든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고, 선업을 짓고, 악업을 지으며, 즐거운 과보를 받고,
괴로운 과보를 받는 것 모두가 불성이다. 마치 밀가루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도
그 하나하나가 모두 밀가루인 것과 같다.
이 몸을 미루어 살피면, 四大의 뼈․살․목구멍․혀․이빨․눈․귀․손․발 등이 모두 스스로 말하고, 보고, 듣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예컨대 문득 목숨이 끊어져 온몸이 아직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입은 말할 수 없고, 눈은 볼 수 없고, 귀는 들을 수 없고, 다리는 다닐 수 없고, 손은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말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반드시 佛性임을 알아야 한다. 또 사대의 뼈와 살을 하나하나 자세히 미루어보더라도 어느 것도 貪․瞋․癡 등의 번뇌가 아니다. 그러므로 탐․진․치 등의 번뇌는 모두 불성이다. 불성의 본체는 일체의 차별된 여러 가지가 아니지만, 일체의 차별된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다. …… 만약 그 體性을 밝히려고 하여도 끝내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니, 마치 눈이 스스로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 그 應用으로 나아간다면 모든 움직임이 전부 이것이며, 다시 다른 法이 있어서 주관과 객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 佛性의 작용으로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一心의 性을 불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견성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모든 생각과 행위의 움직임이 전부 불성의 작용이므로, 불성을 直指하는 방법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역시 직접적이고 즉각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臨濟人의 파악의 경우와 같다.
마조어록에 보면, 흐르는 물을 가리킨다든지, 뒤에서 갑자기 이름을 불러 돌아보게 한다든지,
걷어찬다든지, 후려친다든지, 눈썹을 찡그린다든지 하는 등의 동작을 통하여 불성의 움직임을 직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행위를 통하여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불성을 표현함으로써 제자를 지도하는 것은 마조 이래 그 문하에서 행해진 선의
가장 큰 특징이 된다. 禪宗史에서 보면, 江西의 마조 문하와 湖南의 석두 문하가 모두 이러한 직지인심의 禪法을 실천하여 五家의
종파를 이루면서 중국선종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므로 직지인심의 선법의 연원은 역시 혜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육조단경에 아직 직지인심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직지인심의 출발을 마조로 보는 것이다.
4.2. 직접표현의 自己否定的 성격
禪旨의 직접표현에는 언어를 통한 간접표현에 비하여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며 적극적이라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그것은 心의 구조상 또는 인식 기능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心은 性과 相이라는 양 측면이 있으며, 相의 측면만이 육근이라는 지각기관을 통하여 육식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직접표현이건 간접표현이건 모두 六境이라는 相으로 표현되고 육식이라는 相으로 인식되어 전달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선지의 직접표현이라고 하더라도,
相을 통하여 性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이 점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 함정이란 人心에는 이해하여 모방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스승의 직지인심의 행위를 보고서 실제로는 견성치도 못했으면서 그 겉으로 드러나는 相을 나름으로 해석하여 모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본래 선지의 직접표현이란 見相을 하고서 見性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직접표현을 보고서 견성치는 못하고 견상만으로 그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함정 때문에 선지의 직접표현은 항상 自己否定的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견상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선지의 직접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견상만으로 그친다는 것은 바로 知解로써 이해하여 말이나 행위를 비슷하게 모방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조가 法常에게 비심비불이라 말한 것이나, 구지화상이 시자의 손가락을 칼로 자른 일이나, 현칙선사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모두 이러한 함정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금릉 報恩院의 玄則禪師는 滑州의 衛南 사람이다. 처음에 靑峰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으니,
청봉이 “丙丁童子가 불을 얻으러 왔구나” 하고 말했다. 현칙이 이 말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가 淨慧를 만났는데,
정혜가 그 깨달은 뜻(悟旨)을 따져 물었다. 현칙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丙丁은 불인데 다시 불을 구한다 하는 것은,
현칙이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묻는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라 하였다. 이에 정혜가 말했다. “하마터면 놓치고 지나갈 뻔하였군!
원래 잘못 알고 있었구나.” 현칙은 비록 이런 가르침(開發)을 받았으나 여전히 마음은 개운치가 않았다. 물러나 온갖 궁리를
다 해보았으나 그 현묘한 이치를 알지 못했다. 이윽고 정성을 기울여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하니,
정혜가 말했다. “그대가 물어보라. 내가 그대에게 말해 주겠다.” 현칙이 이에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정혜가 말했다. “병정동자가 불을 얻으러 왔구나.” 이 말에 현칙은 활연히 깨달았다.
현칙은 처음에 청봉의 말을 듣고 나름으로 이치를 쫓아서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사념으로 相을 쫓아 이해한 것으로 意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아직 이른바 ‘放下着’을 못한 것이다. 정혜에게서 그런 이해는 잘못이라는 말을 듣고서
온갖 궁리를 다하여 그 이치를 찾으려 했으나, 이치로 따진다면 다른 이치가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정혜에게 다시 가르침을 구하니, 정혜는 청봉과 똑같은 말을 하였다.
여기서 마침내 현칙은 사념의 상을 놓고 견성을 경험하게 된다.
무엇이 부처냐는 질문을 받고서 청봉이 “병정동자가 불을 얻으러 왔구나”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분명 선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말을 사념으로 상을 쫓고 이치를 따져서 이해한다면, 그 말은 선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똑같은 표현이라도 사념으로 상을 쫓아 이해한 말이라면, 선지의 직접표현으로서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喝이라든지 棒과 같은 행위에 의한 직접표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임제도 처음에는 황벽의 몽둥이질을 오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를 표현하거나 그 표현을 대할 경우에 사량분별은 금물이다. 견성은 사량분별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여기서 재론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점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선지에 관한 논리적 설명이 아닌 선지의 직접표현의 경우,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더라도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지, 사량분별을 통하여 잘 고안된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깨달음의 지혜란, 헤아리고 사량하지 않더라도 그 순간 그 상황에 가장 적절한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그러한 것일 것이다. 다음 절에서 다루겠지만, 깨달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연스러움 즉 無爲이다. 만약 헤아려서 고안한다면 이것은 有爲이지 無爲가 아니다. 그러므로 백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 구절의 의미를 知解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지해는 탐욕에 속하는데 탐욕은 병이 된다.
다만 지금 有無의 모든 法을 떠나 三句 밖으로 벗어나기만 하면 저절로 부처와 다르지 않게 된다.
이미 자기가 부처라면, 무엇 때문에 부처가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하겠는가.
그저 부처가 못 되어서 유무의 모든 법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한 것이 두려울 뿐이다.
선지의 표현을 헤아려서 이해할 경우의 이러한 자기부정적 성격은, 앞서 언어적 표현에 적용되었던 대법론이나
삼구론 및 즉비논리와 같이 논리로서 형식이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相을 투과하여 性을 파악한다는 취지는 같다.
요컨대 가장 중요한 것은 견성하여 선문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지,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잘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이와 같이 사념으로 헤아리는 함정을 피하기 위하여 직접표현에 요구되는 하나의 조건은,
그 표현이 즉각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표현의 즉각성은 이미 위에서 임제의 말을 인용하여 언급하였다.
대덕들이여! 이러한 경지에 이른 학인이 힘쓰는 곳에는 바람도 통하지 않고 電光石火라도 바로 지나쳐 버린다.
그러므로 만약 학인이 눈을 두리번거리기라도 하면 곧 무관하게 되어 버리며, 헤아리는 마음이 되면 바로 어긋나고,
생각을 움직이자마자 곧 틀려 버린다. 따라서 아는 사람은 눈앞을 벗어나지 않는다.
臨濟人을 파악하는 말이 ‘卽今目前現用’이라고 할 경우, 여기에는 직접성과 동시에 즉각성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사실 ‘직접표현’이라는 말 속에는 ‘즉각적으로’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 헤아림에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대개 스승은 제자가 즉각 대답치 못하고 머뭇거릴 경우에는 지체 없이 바로 제자를 부정해 버림으로써,
헤아리면 곧 어긋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天皇道悟가 龍潭崇信에게 “볼려면 곧바로 보아야지 헤아리고 생각하면 어긋난다”라고 하는 말이나, 임제가 머뭇거리는 제자에게 지체 없이 喝과 棒을 휘둘렀던 것이 모두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임제의 일화는 머뭇거림을 용납치 않는 禪匠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상당하여 말했다.
“붉은 고깃덩이 위에 하나의 無位眞人이 있어서 늘 그대들의 面門으로 출입하니,
아직 알지 못하는 자는 자세히 살펴라!”
그때 어떤 스님이 나와 물었다.
“무엇이 無位眞人입니까?”
임제가 禪床을 내려와 그를 움켜잡고 말하였다.
“말해라, 말해!”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가 그를 밀쳐 버리고 말했다.
“무위진인이라니 무슨 마른 똥덩어리 같은 소리냐?”
그리고 곧바로 방장실로 돌아갔다.
육체(붉은 고깃덩이) 위에 하나의 無位眞人-곧 불성-이 있어서,
늘 面門-耳目口鼻-으로 출입한다. 무엇이 무위진인인가?
학인의 이 질문에 대한 임제의 답은 그를 움켜잡고 말하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답은 이것이다. 학인이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바로 무위진인의 출입이다.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은 무위진인이 하는 짓이다. 붉은 고깃덩이인 입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붉은 고깃덩이인 입 위에서 출입하는 무위진인 곧 불성이 말하는 것이다.
무위진인이 고깃덩이인 입을 움직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제는 무위진인을 묻는 학인에게 대답으로 그에게 스스로 말하라고 시키는 것이다.
누구에게 말하라 하는 것인가? 무위진인에게 말을 하라는 것이다. 무위진인이 직접 자기 입으로 대답을 하게 하는 것이다.
임제는 무위진인을 확인하는 가장 정확한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무위진인 스스로가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이
무위진인을 알려 주는 가장 정확한 길이 아닌가? 임제의 이러한 친절한 대답을 듣고도 학인은 스스로가 바로 무위진인임을 모르고, 밖으로 찾아 생각으로 헤아리며 머뭇거리고 있다. 이에 임제는 그를 밀쳐 버리고, 무위진인이라니 무슨 더러운 거짓말인가
하고 그를 나무란다. 밖으로 相을 찾아 헤아린다면, 무위진인과는 무관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5. 간접표현과 직접표현의 여러 양상
마조 이후의 禪宗은 上堂示衆과 선문답이라는 공부방법을 통하여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을 추구하는 선을 실천하였다. 즉 스승의 가르침은 언행을 통한 직지인심의 형태가 되고, 제자는 그 스승의 언행을 지각하여 견성성불의 기회를 만난다고 하는 구조이다. 상당시중의 경우이거나 문답의 경우이거나 스승이 마음을 밝혀 보여주는 방법은,
언어적 설명과 지시를 통한 간접적 방법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마음의 작용을 보여주는 직접적 방법의 두 가지이다.
5.1. 간접표현의 양상
5.1.1. 說明
여러 가지 비유와 예를 들어서 마음을 깨닫는 올바른 길을 다각도로 설명하는 경우는 주로 상당설법으로 행해졌다. 이것은 선에 관하여 스승이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형태이다. 현재 남아 있는 어록으로 보아 가장 長文의 설명은 임제록의 示衆이며, 마조․백장․황벽 등도 비교적 장문의 상당설법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경전에서의 설법과 다를 바 없는 방편설이라고 해야 한다. 다만 설명의 내용은 역시 직지인심․견성성불의 선에 관한 것이지, 어떤 교리의 체계적 설명은 아니다. 그러므로 설명의 기본적인 논리는 앞서 살펴본 대법론이나 삼구론 혹은 즉비논리의 논리와 같다.
5.1.2. 指示
간략한 설명이나 명령․질문 등을 통하여 마음을 지시하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주로 문답에서 행해졌다.
이것은 상당설법의 경우보다는 훨씬 직접적이라고 하겠지만, 여전히 언어의 의미관념을 매개하고 있으므로 간접적이다.
그러나 언어를 매개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개념을 정의한다거나 체계적으로 마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고,
짧은 경구 같은 말이나 암시적인 말을 사용하거나, 비유를 들거나, 신체 동작을 지시하거나 하는 등의 방법을 가지고 마음에
관한 잘못된 관념을 버리게 함으로써 올바른 공부에로 유도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때 학인이 본성을 깨닫느냐 아니냐는
그 순간 학인의 기연이 맞아떨어지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으므로, 선지식의 지도가 항상 학인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두 예화에서 마조의 가르침이 이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大珠慧海가 처음 마조를 참례했을 때, 마조가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越州의 大雲寺에서 옵니다.”
“여기에 와서 무엇을 바라는가?”
“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의 보물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무엇을 하겠는가?
여기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으니, 무슨 불법을 구하겠는가?”
대주가 이에 절하고 물었다.
“무엇이 저 혜해의 보물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보물창고이다.
그것은 일체를 다 갖추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므로 쓰려고 하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어찌 밖에서 구하려 하느냐?”
말이 끝나자 대주는 本心을 알아차리고,
자기도 모르게 뛸 듯이 기뻐하며 감사의 절을 하였다.혜해가 開悟한 이 일화에서 마조의 가르침은,
“자기의 보물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무엇을 하겠는가?
여기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으니, 무슨 불법을 구하겠는가?”와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보물창고이다.
그것은 일체를 다 갖추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므로 쓰려고 하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 어찌 밖에서 구하려 하느냐?”라는 두 마디의 말이다.
이 두 마디의 말 속에는 마음을 알 수 있는 바른 공부의 자세와 마음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모두 피력되어 있다.
마음공부의 바른 자세란 밖으로 구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마음에 대한 바른 견해란
‘지금 묻고 있는 그것이 바로 마음으로서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일체를 다 갖추고 있으므로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들 말은 모두 일상적인 어법 그대로의 말들로서 이해하는 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누구나 마조의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긴 하지만, 누구나 이 말을 듣고 마음을 깨닫는다고 할 수는 없다. 대주혜해가 마조의 이 말을 듣고 마음을 깨닫게 된 것은 역시 기연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汾州無業이 마조를 참례하였다.
마조는 그의 훤칠한 용모와 종소리같이 우렁찬 목소리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높고 높은 佛堂이나 그 속에 부처가 없구나.”
무업이 절하고 꿇어앉아서 물었다.
“三乘 교학은 그 뜻을 대략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禪門에서는 항상 바로 마음이 부처라고 하니, 정말 모르겠습니다.”
“알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지, 그밖에 다른 것은 없다네.”
무업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찾아와 가만히 전수하신 心印입니까?”
“스님은 정말 시끄럽군. 우선 갔다가 뒤에 찾아오게.”
무업이 막 나가는데 마조가 불렀다.
“스님!”
무업이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게 무엇인가?”
무업이 바로 깨닫고 절하자 마조가 말했다.
“이 둔한 작자야! 절은 해서 무엇 하느냐.”
무업이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마조는 여러 가지 방편을 사용하여 무업을 바르게 이끌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무업을 만난 마조는 먼저, “높고 높은 불당이나 그 속에 부처가 없구나”라고 하여,
무업의 겉모습을 빌려 무업이 경계만 쫓고 자기의 마음은 모르는 것을 꾸짖는다.
이에 무업이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하자, 마조는 “알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지,그밖에 다른 것은 없다”라고 하여 무업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준다. 그러나 무업은 아직 알지 못하고 다시 마음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에 마조는 “스님은 정말 시끄럽군. 우선 갔다가 뒤에 찾아오게”라고 하여,
일단 무업이 말에 따라다니며 찾는 마음을 꺾어서 쉬도록 한다. 그리고는 방을 나가는 무업을 불러서는 무업이 머리를 돌리자
“이게 무엇인가?”라고 하여, 부르는 소리를 듣고 머리를 돌리고 하는 등의 작용을 하는 ‘그것’이 바로 마음임을 물음의 형태로
더욱 강하게 암시한다. 이에 무업이 비로소 자기의 마음을 깨닫고는 감사하여 절을 한다. 그러나 마조는 더욱 철저하다.
마조는 깨닫고서 절하는 무업을 향하여 “이 둔한 작자야! 절은 해서 무엇 하느냐”라고 하여, 절하는 행위조차도 다만 마음의
작용일 뿐, 의도적으로 감사를 표시하려고 마음을 내어 경계를 만들어 경계에 따라다녀서는 안 됨을 경고하고 있다.
5.2. 직접표현의 양상
5.2.1. 格外語를 이용
언어를 사용하여 선지를 직접표현하는 경우는 이른바 격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禪匠이 격외어를 말하는 경우에는 겉으로는
보통의 의미에서 말을 하는 것 같으나, 선지식이 이 말을 함에 의도하는 것은 그 말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선지식이 말하는 격외어에는 二重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격외어에는 예컨대, 불교의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다’라든가 ‘차나 한 잔 마셔라’라는 등으로 보통의 의미에서 보아 전혀 답이 될 수 없는 엉뚱한 내용을 말한다거나, ‘다리는 흘러가는데 물은 가만히 있다’라든가 ‘서쪽의 강물을 한입에 다 마셔 버린다’라는 등으로 그 말의 의미가 합리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넌센스의 문장을 말하는 두 종류가 있다.
이 두 종류 모두 이 말을 듣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에서는 같은 효과를 가지는데, 이것이 선지식이 격외어를 말하는 첫째 의도이다. 여기서 혼란에 빠진다는 의미는, 도무지 합리적인 사고와 추리로는 이 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혼란은 곧 알음알이의 분별망상으로부터 학인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혼란에 빠진 학인이 이 혼란을 빠져나오는 길은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 말을 무시하고 잊어버림으로써 혼란에서 빠져나오는 것인데, 이것은 곧 선 공부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는 이 말을 붙잡고 이 말이 완전히 이해되고 소화될 때까지 참구하는 것인데, 이것이 선을 공부하는 학인이 취하는 바른 길이다.
만약 학인이 전심전력으로 이 말을 참구하여 마침내 이 말을 소화하고 보면, 놀랍게도 이 말들은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답이며, 넌센스가 아니라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합리적인 말이 되는데, 이것이 선지식이 격외어를 말하는 또 하나의 의도이다. 선지식은 엉터리 스승도 아니고 실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학인이 참구 끝에 이 말을 소화한다는 것은 사유를 통하여 추리하여 이 말을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말들은 애초에 추리를 통해서는 완전한 이해를 기대할 수 없는 말들이다.
만약 억지로 의미를 끼워 맞추어 스스로를 위로한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짓으로서 결국 완전한 위안은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학인이 참구 끝에 이 말을 진실로 조금의 미심쩍음도 없이 완전히 소화해 냈다면,
그것은 깨달음 곧 견성했음을 의미한다. 다음의 일화는 격외어가 어떻게 견성으로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圜悟의 스승인 法演화상은 어느 날 陳提刑이라는 거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형은 어린 시절에 ‘小艶詩’를 읽어 본 적이 있소?
그 시 가운데 다음 두 구절은 제법 우리 佛法과 가까운 데가 있습니다.
‘소옥아! 소옥아! 자주 부르지만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檀郞이 목소리를 알아주기를 바라서이다.’”
제형은 연신 “네! 네!” 하였고 법연은 자세히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때마침 원오가 밖에서 돌아와 곁에 모시고 섰다가 물었다.
“듣자하니 스님께서 ‘소염시’를 인용하여 말씀하시는데 제형이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까?”
“그는 소리만을 알아들었을 뿐이다.”
“단랑이 목소리를 알아줬으면 하였는데, 그가 이미 그 소리를 알아들었다면 어찌하여 옳지 않습니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 악!”
원오는 이 말에 갑자기 느낀 바 있어 방문을 나서니 닭이 홰에 날아올라 나래를 치며 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에 다시 “이것이야말로 그 소리가 아니겠느냐” 하고는, 드디어 법연을 찾아가 인가를 받았다.
“소옥아! 소옥아!” 하고 부를 때, 단랑이 알아듣는 것은 ‘소옥’이라는 의미관념이 아니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말을 듣고서 그 말의 의미관념을 따라가지 않고, 그 말이라는 현상이 생겨나는 근원을 파악하는 것이 곧 佛法이라는 스승 법연의 말을 듣고 원오는 무언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소리를 알아들었으면 된 것이 아니냐”고 물은 것이고, 법연은 원오가 껍질을 깨는 길을 찾았다고 보고서 즉각 ‘뜰 앞의 잣나무’라는 공안을 제시하여 이것도 같은 뜻임을 알려 준 것이고, 그리하여 원오는 공안을 타파하고 견성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실로 위대한 啐啄同時의 한 장면이다. 여기서 원오가 깨달은 것을 해설해 보면, “소옥아! 소옥아!” 하는 말이나
“뜰 앞의 잣나무” 하는 말이나 “악!” 하는 외침이나 “꼬끼요!” 하는 닭의 울음이나 모두 그 相으로 따라가면 제각각
다른 것들이지만, 그 근원으로 돌아가면 모두 동일한 작용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말을 듣고 헤아림을 뛰어넘어 一心의 작용과 契合토록 하는 것이 선문답에서 격외어를 사용하는 목적이다.
작용과 계합한다는 것은 곧 견성을 의미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心性論에서 보면 일심은 순수한 작용으로서의 性-곧 淸淨心이다-과 그 작용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相-곧 染汚心이다-으로 나누어 말해지는데, 육근으로 지각되는 상을 따라가지 않고
순수 작용인 성을 파악하는 것이 바로 견성이다. 상으로 보면 모든 경험은 제각각 다르게 나타나지만 성으로 보면 모두가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한 입장에서는 세계를 一味平等한 一法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5.2.2. 六根의 知覺을 이용
소리를 지르고 움직임을 보이고 신체로 접촉하여 느끼게 만들고 하는 등의 행위를 통하여 마음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앞서 宗密의 서술에서 보았듯이, 지각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움직임이 전부 불성의 작용이라고
마조는 말하고 있다. 즉심시불과 三界唯心의 一心法을 말하는 마조의 입장에서는 불성의 작용은 곧 一心이다.
이 점에서는 마조의 손제자에 해당하는 黃檗도 마조를 계승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같다고 말할 때에는 一精明이지만, 나누어지면 六和合이 된다. 일정명은 一心이고 육화합은 六根이다. 이 육근은 각각 六境과 화합하니, 눈은 색깔과 화합하고, 귀는 소리와 화합하며, 코는 냄새와 화합하고, 혀는 맛과 화합하며, 몸은 촉감과 화합하고, 意는 法과 화합하여 그 사이에서 六識이 생겨나 十八界가 된다. 그러므로 만약 十八界가 實在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육화합은 일정명이 되는데, 이 일정명이 곧 마음이다.
이처럼 육식으로 지각되는 세계가 전부 일심의 드러남이기 때문에, 지각이 가능한 어떤 행동이든 모두 마음을 직접 표현하는 것이고, 따라서 견성의 기연으로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선지의 직접표현으로서, 소리를 지르거나 움직임을 보이거나 신체를 접촉하여 느끼게 만들거나 하는 등의 행위가 스승들에 의하여 빈번하게 행해졌다. 그 예들을 몇 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황벽이 일찍이 대중을 흩고, 洪州의 開元寺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相公 裵休거사가 어느 날 절로 들어오다가 벽화를 보고 그 절 주지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슨 그림입니까?”
“고승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고승들의 겉모습은 여기에 있지만, 고승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절 주지가 아무런 대답을 못 하자 배휴가 “이곳에 禪僧은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한 분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상공은 마침내 황벽을 청하여 뵙고,
전에 주지에게 물었던 일을 황벽에게 물었다. 그러자 황벽이 배휴를 불렀다.
“배휴!”
“예!”
“어디에 있는고?”
상공은 이 말 끝에 깨닫고 황벽을 다시 청하여 開堂說法을 하게 하였다.
고승의 그림은 여기에 있지만 고승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그림을 보고 고승을 묻고 부름에 대답하는 작용 속에 모든 것이 있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그대는 누군가?”
“저는 아무개입니다.”
“그대는 나를 인식하는가?”
“분명히 압니다.”
백장이 拂子를 일으켜 세우더니 물었다.
“불자를 보느냐?”
“봅니다.”
백장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무엇이 부처인가?
부처를 묻고 이름을 말하며 백장을 알아보고 불자를 보는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더 이상 부처를 어떻게 나타내겠는가?
洪州의 水老가 처음 마조를 참례하고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절 한번 하라.”
수로가 막 절을 하는데 마조가 별안간 한 번 걷어찼다.
여기서 수로는 크게 깨닫고 일어나 손을 비비면서 “하하” 웃고 말했다.
“그것 참 신통하다, 신통해. 수많은 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한 터럭 끝에서 그 근원을 알아 버렸다.”
불법을 묻는 수로에게 마조는 절하라고 한다.
절하는 행위는 바로 수로의 마음이 ‘卽今目前現用’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작용에 마조는 충격을 주어서 수로로 하여금 지금 절하고 발길에 채여
아프고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고 불성의 작용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임제가 하루는 普化와 더불어 신도 집에 공양 초대를 받아 갔다.
밥상을 앞에 두고 임제가 말했다. “한 터럭이 큰 바다를 삼키고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간다면,
이것은 神通妙用인가, 아니면 본래 自體가 그러한 것인가?” 보화가 발로 밥상을 차 엎어 버렸다.
이에 임제가 말했다. “대단히 거칠구나!” 보화가 응대하여 말했다. “여기에 무엇이 있길래 거칠다느니 미세하다느니 하는가?”
다음날 다시 임제와 보화는 신도의 집에 공양 초대를 받아 갔다.
임제가 보화에게 물었다. “오늘 공양은 어제와 비교해서 어떤가?”
보화는 전날처럼 발로 밥상을 걷어차 넘어뜨려 버렸다.
임제가 말했다. “옳기는 옳다만 너무 거칠다.”
보화가 말했다. “이 눈먼 작자야! 佛法에서 무슨 거칠고 미세함을 말하느냐?” 임제는 혀를 내둘렀다.
한 터럭이 큰 바다를 삼키고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간다는 것은, 경계 쪽에서 말하면 이것은 불가사의한 신통묘용이겠지만, 불성의 입장에서 말하면 발길질해서 밥상을 뒤엎는 것과 똑같은 작용일 뿐이다. 相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것과 작은 것이 구별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신통묘용이다. 그러나 모양도 위치도 없는 性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구별지어 가능하거나 불가능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보화는 바로 性의 입장에서 자재한 활용을 나타내어 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화가 발길질하는 대신 그저 밥 한 술 뜨는 것으로 대답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임제는 보화에게 옳기는 옳지만 너무 거칠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화는 보다 철저하다. 本心 즉 불성은 無相이므로 거기에 어떤 거칠고 미세함이라는 相對性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定上座란 스님이 찾아와 물었다.
“무엇이 佛法의 큰 뜻입니까?”
임제가 의자에서 내려와 정상좌를 움켜쥐고 뺨을 한 대 때리고는 곧 탁 놓아 버리니,
정상좌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스님이 말했다.
]“정상좌! 어찌하여 절하지 않는가?”
정상좌는 막 절을 하다가 홀연히 크게 깨달았다.
이 상황은 임제가 황벽에게 두들겨 맞고 대우에게서 깨달은 상황과 극히 유사하다.
무엇이 불법의 큰 뜻인가라는 정상좌의 물음에 임제는 정상좌를 움켜쥐고 뺨을 한 대 때린다.
불법의 큰 뜻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뺨 한 대가 답이다.
뺨 한 대가 불법의 큰 뜻인 것이다
임제는 의자에서 내려와 정상좌를 움켜쥐고 뺨을 때리고 정상좌를 놓았다.
정상좌는 임제의 이러한 동작을 지켜보며 눈에 보이는 대로의 모습에 끌려 다니면서도
, ‘왜 불법의 큰 뜻을 물었는데 이런 짓을 하는가. 이것이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인가’ 하는 의문으로 가슴이 가득 찼다.
바로 그때 옆에 있던 스님이 정상좌에게, 임제가 그렇게 친절히 대답하는데도 왜 감사의 절을 올리지 않느냐고 다그친다.
비로소 정상좌는 임제의 그러한 행동이 바로 자기의 질문에 대한 대답인 줄로 알고 동시에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佛法이란 바로 손 한 번 흔들고 발 한 번 옮기는 것이다. 손 흔들고 발 옮기는 겉모습에 매몰되지 않으면
이 모든 동작이 전부 불성의 작용이다.
6. 결 론
우리에게 경험되는 세계는 우리 마음에 의하여 구성되는 세계이므로, 우리에게 관련되는 모든 문제는 본래 그 원인도 마음에 있고 그 해결의 실마리도 마음에 있다고 보는 것이 조사선의 세계관이다. 우리 마음의 본질을 속속들이 앎으로써 우리에게 관련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선의 목적은 늘 마음을 깨닫는 것에 있다.
선에서의 깨달음은 이심전심이라는 전통이 말해 주듯이, 스승의 가르침은 직지인심으로 나타나고 여기에 제자의 발심이 기연이 맞을 경우 견성성불이라는 깨달음의 체험이 이루어지는 구도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가운데 스승의 가르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그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스승의 가르침은 상당설법과 선문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그 형식은 설명을 통하여 마음을 간접적으로 가르치는 방법과 행위를 통하여 마음을 직접 가리키는 방법이 있다. 설명을 통하여 가르치는 방법은 대법론이나 삼구론이나 즉비논리같이 언어를 논리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상대적 관념인 邊見을 파괴하여 중도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중도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성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설명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은 주로 언어의 상대성을 벗어난다는 소극적 방법이다.
한편 행위를 통하여 마음을 직접 표현하는 방법은 작용을 드러낸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정해진 방식이 없다. 마음의 작용을 드러냄에 정해진 방식이 있을 수는 없지만, 인간의 한정된 知覺機能에 따라서 그 표현방식을 분류해 볼 수는 있다. 즉 작용을 드러내는 방식은 知覺 가능한 모습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제약이 있는 것이다. 지각 가능한 모습 가운데 선사들은 소리와 색과 촉감을 이용한다. 소리를 이용할 경우에도 언어의 형식을 취하는 격외어와 단순히 소리만을 내는 경우가 있다. 색을 이용하는 것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고, 촉감을 이용하는 경우는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다.
이처럼 지각 가능한 행위를 통하여 마음의 살아 움직임을 드러내는 것이 직접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이 있으니, 그 표현이 관념적 사량분별의 결과물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량분별은 相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서, 중생심의 전형적 특성이다. 선을 공부하는 목적은 相의 차원을 벗어나 性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견성이라 한다. 따라서 선의 목적인 견성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사량분별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직접표현과 그 직접표현의 지각에는 사량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卽刻性이 필수 조건이다. 이런 면에서 마음의 직접표현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 순간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 작용’(卽今目前現用)이다.
혜능에 의하여 개발되고 마조에 의하여 완성된 中國禪인 祖師禪의 공부법의 단적인 특징은, 이처럼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마음을 드러내어 제자를 지도한다는 곳에서 찾을 수가 있다. 상당설법을 통한 언어적 간접적 가르침은 사실 敎家의
가르침과 별로 다르지 않은 方便說이지만,
문답과 행위를 통한 직지인심의 방법은 마조 이후에 비로소 禪工夫의 주류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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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Revelations of the Chan’s Essence
In the tradition of Chan, the enlightenment refers to internal experience wholly, but not entails external transformation. However, the enlighten- ment should be expressed in formal way whatever it be as far as to transmit something from master to his disciple, which is necessary in teaching and learning, and can be possible to recognize to be enlightened. In Chan tradition, the way to express enlightenment, or the essence of Chan is divided into twofold:one is the explanation by concept and theory, the other performance by actions. The former will be indirect way to show the essence of Chan, the latter should be positive and direct. The former, or conceptual or logic explanation have often been exerted to show the destitute of its own nature of a concept, or to show its nature of dependency that a word came to be meant only when it comes to its contradictory concept. Hui-neng(慧能)’s theory of Relative Concept, Pai- chang(百丈)’s theory of Three-phrase, and D. T. Suzuki’s theory of Be-not are all the case. The performance by bodily actions touch the six sensory perception(by the six sense-organs;eye, nose, tongue, body, and mind) and make these perceive the movement of mind directly. This is often called as ‘the direct way to show mind(直指人心)’ There is an important principle in the direct way to show mind. The role is that conceptual understanding does not allowed in any cases. In other words, it can not be called ‘direct revelation of mind’ when the bodily reactions are sprung from the conceptual understanding. In this sense, the ideal way to express the essence of Chan seems to be the extraordinary way to speak. This extra- ordinary way to speak superficially show conceptual expression through the concepts, but it does not require conceptual understanding but urge to transcend the concepts. This seem to be very effective medicine to cure the mind of a layman contaminated by the image of langu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