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엔 교과서의 저자이신 순천향대 김기승 교수님이 미래엔 교과서의 교사용 지도서에 기고하신 글입니다. 4개의 주제로 나누어 올립니다.
1. 검인정 교과서의 의미
1) 역사는 항상 새롭게 쓰여진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과거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를 다루거나 파악하는 주체는 현재의 우리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실 들 중에서 현재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어진 사실들이 역사로서 기록되고 기억된다. 이 점에서 역사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선택된 과거의 사실들에 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사람들에 의해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평가된 사실들만이 후대에까지 전승되어 기억된다.
근현대사는 현재 우리의 삶과 가까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말한다. 근현대사는 우리의 삶의 현재 모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를 누구로 설정하며, 현재의 삶의 모습을 어떻게 진단하느냐에 따라 근현대사 서술은 크게 달라진다. 역사학자들은 사실의 발견과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통해 다양한 개인, 집단, 계층의 관점을 대변한다. 전문적 역사가들은 활발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역사에 대한 일정한 합의를 도출한다. 그러나 이 합의는 영구불변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기에 역사는 항상 새롭게 쓰여질 수밖에 없다.
2) 검인정 제도 시행의 문제
역사 교과서 편찬 제도가 바뀌고, 교육과정의 개편에 따라 교과서의 내용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부 수립 이래 역사 교과서는 오랫동안 국정 제도로 운영되어 정부가 교육과정과 내용에 개입하여 국민 공통의 역사를 서술했다. 후손들에게 전승될 역사의 기억이 정부에 의해 획일적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정부 주도에 의한 국정 운영, 역사학계의 미성숙이라는 상황은 국정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독재가 타도되고 민주화가 이룩되어 개인과 사회의 국정 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역사 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인정 제도로 바뀌었다. 국가와 정부의 역할은 역사교과서의 기본적 교육과정만 제시하고 구체적인 서술은 민간의 역사학자들에게 맡기는 제도가 새롭게 시행되었다.
그러나 어렵게 출발한 검인정 제도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서술 내용을 둘러싸고 정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비밀이 엄수되어 보호되어야 할 검정위원들의 명단이 노출되었고, 교과서 저자들은 편파적 학자들로 매도되었다. 또 여러 이익 단체들도 교과서 서술에 불만을 제기하고 정정을 요구하였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러한 다양한 비판과 수정 요구들에 대해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친 뒤 출판사들에게 정정을 요구하였다. 이 때 한 출판사는 저자의 뜻을 무시하고 수정하여 제출하였다. 이에 저자들은 자신들의 양심에 반하는 내용이 저술된 교과서의 출판과 보급을 금지시켜 줄 것을 법원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사법부는 저자가 동의하지 않는 교과서의 출판과 보급이 합법이라고 판결하였다.
두 번째의 검인정 제도 시행 과정에서는 역사 교과의 교과목 명칭 문제가 빚어졌다. 초기에는 세계사와 한국사를 포괄한 고등 역사 교과목이었다. 고등 역사란 과목으로 교육과정과 집필 지침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여러 출판사들이 교과서 심의를 신청하였고, 이 중에서 검인정 교과서로 사용할 교과서가 선정되었다. 교과서 심의 절차가 종결된 이후 급작스럽게 교과목 명칭이 한국사로 바뀌면서 교육과정이 크게 변경되었다. 선정된 출판사들은 바뀐 교육과정을 기준으로 수정본을 제출하였다. 이렇게 새로 제출된 교과서는 심의위원회가 아니라 별도로 선정된 기관의 추가적인 심의를 거쳐 교과서로 최종 확정되었다. 교과서 심의가 서로 다른 기구와 사람들에 의해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던 셈이다.
역사 교과서 검인정 제도의 시행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한국 근현대사 교육에 관해 생각해야 할 점이 많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선 한국근현대사는 현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교육 내용이 사람들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된다. 이에 이해 당사자들이 역사서술에 직접 개입하여 이미 만들어진 제도와 절차는 무시되었다. 이것이 역사 서술에 대한 부당한 개입의 문제인지 아니면 국민의 다양한 여론을 수렴하지 못하는 현행 제도의 문제점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역사 교과서의 교육과정 제정, 심의, 저술 등은 일체가 역사학자와 역사교사들이 참여하여 만들었다. 이 점에서 역사 교과서는 역사학자들의 공동 참여 작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 교과서 심의가 종결된 후 외부에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제도와 절차가 어그러지게 되었다. 이에 역사학자들은 검인정 제도 운영이 가져온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시정을 요구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국민적 동의를 얻지 못했고,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미치는 데 실패하였다. 게다가 정부의 시정 지시와 저자의 의견이 충돌되었을 때, 법원은 역사 교과서의 저자는 정부의 교육 방침에 따른 수정 지시를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검인정 제도 아래에서 만들어진 역사교과서는 국정 제도의 경우보다는 다양한 역사학자들의 참여가 가능하였지만, 여전히 역사학계의 일반적 의견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으며, 저자들에게 허용된 서술의 자유도 제한적이었다. 현행 역사교과서는 교과서 편찬에 관련된 여러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이 절충되어 조정된 결과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잠정적인 것이다.
3) 교과서의 의미
살아가는 모든 개인은 자신의 역사를 갖는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사실을 취사선택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해석한다. 개인의 역사는 타고나면서 정해지지 않으며, 단독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개인은 타인의 역사, 기성세대가 만들고 정리한 역사를 참고하면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우리들은 과거 살았던 모든 개개인의 역사를 일일이 접할 수 없기에 사회적으로 합의된 역사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세상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간다.
교과서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보편타당한 객관적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과 서로 모순되기조차 한 수많은 사실들을 담고 있다. 오늘의 역사 교과서는 이러한 가치관의 충돌과 사회의 모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역사 교사에게 던진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면서 배울 것인가의 문제는 역사 교사와 학생들의 몫이다. 역사 교과서 편찬에 수많은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하였듯이 역사 교육에서는 교육의 두 주체인 교사와 학생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역사 교육 현장은 교과서의 복사판일 수 없다. 역사 교사와 학생은 교과서를 참고 자료로 삼아 현재 혹은 미래의 역사에 대해 발전적이고 창조적인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이 경우 비로소 역사 교육이 과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역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