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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 1933년 10월 당시 경성 서대문경찰서장이 작성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발각에 관한 건’ 내용 중 일부. 중앙부에 안광천 선생의 이름이 보인다.<국사편찬위원회>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안광천(安光泉, 1897~?)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특이한 존재다. 그는 김재봉·강달영·김철수에 이어 조선공산당 4대 책임비서를 지냈음에도 얼굴을 알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 중 많은 이들이 일제에 체포되거나 요주의 인물로 감시 대상이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얼굴사진을 남겼으나 안광천은 최대 비밀지하조직의 책임자까지 지냈음에도 사진 한 장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중잡지 <별건곤> 1928년 2월호에는 안광천의 용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머리를 길러 뒤로 젖혔으나 지나치게 길지는 않았다. 얼굴은 빼빼 말라 골격이 훤히 드러났으며, 좌우 뺨은 두드러지고 턱은 뾰족했다. 과묵한 편이고, 말을 하고 나면 해죽해죽 웃는 습관이 있어서, 다정스럽고 친절한 기분이 느껴졌다. 키가 호리호리하고 약질이었다. 체격만을 놓고 보면 투사 같은 느낌은 없었다.”
언변과 재능이 뛰어난 ‘천재 이론가’
안광천은 구한국 시의(侍醫, 궁궐 의원)를 지낸 안왕거의 아들로 경남 김해(진영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학으로 사회주의 사상과 접했는데 논쟁에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언변과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김기진은 “안광천이란 사람은 참말로 머리가 영리하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며 “내가 만나 본 사회주의자들 중 조선에서 제일가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안광천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경상도 출신의 김약수·송봉우·이여성 등이 조직한 북성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북성회 간부들이 귀국하자 안광천·하필원·박낙종 등은 1925년 1월 일월회를 조직했다. 안광천을 지도자로 한 일월회는 “과학적 이론에 입각한 엄정한 비판”의 자세를 견지한다는 방침에 따라 국내의 파쟁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고 재일본 조선인 무산계급단체의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 2월 김세연 등과 함께 일시 귀국한 안광천은 당시 최대의 파벌이었던 서울파와 화요파의 통일을 권유했다. 일월회가 추진한 사회주의진영의 통일운동은 국내와 만주에도 영향을 미쳤다. 만주에 있던 고려공산청년회와 서울파 일부에서도 통일운동에 호응하면서 세 계열의 소장파 인물들과 화요계의 공청, 김준연 사이에 연대가 형성됐다. 이들을 두고 ‘레닌주의동맹’ ‘마르크스주의단’ ‘레닌주의단’ ‘M파’ ‘L파’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는데, ‘ML당’으로 불리는 3차 조선공산당을 출범하는 토대가 됐다.
정우회 선언 주도하고 3차 당 책임비서에 선출
1926년 4월 당시 국내의 주요 사회주의 단체였던 화요회·북풍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 등 4개 단체가 합동해 정우회를 출범시켰다. 정우회는 그해 6월 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핵심 멤버들이 체포되면서 와해 위기에 놓이게 됐으나 일월회가 대거 참여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그런데 정우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안광천 등은 같은해 11월15일 사회주의운동의 방향 전환을 담은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의 핵심내용은 사상단체의 통일과 대중조직화를 위한 일상투쟁의 전개,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의 전환,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와 공동전선, 이론투쟁을 통한 운동의 진로 제시 등이었다. 이를 두고 전진회에서 ‘개량주의적 우경론’이라고 비판하면서 활발한 논쟁이 전개됐다.
이런 가운데 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서 검거를 면한 중앙간부 김철수의 주도 아래 여러 파벌들을 망라해 1926년 12월6일 2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한 3차 조선공산당을 출범시켰다. 여러 파벌이 망라했다고 해서 이른바 ‘ML당’으로 불렀다.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안광천은 1927년 1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하필원을, 4월에는 박낙종을 일본부 책임비서에 지명했다. 측근을 중심으로 당 조직을 정비한 안광천은 민족주의자와 협력해 민족협동전선체 조직에 적극 나섰다. 같은해 2월15일 신간회 창립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조직의 확대·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안광천은 전진회측이 신간회와 별도로 사회주의자들의 독자적인 조직을 결성하려 하자 비상설운동협의회를 추진해 전진회측의 기도를 무산시켰다. 또한 1927년 9월에는 영남친목회를 이용해 영남지방에 신간회 지회 조직을 확대하려 했으며, 신간회 경성지회장인 한용운을 이용해 경성지회를 장악하려는 작업도 했다.
민족협동전선을 둘러싼 논쟁
영남친목회란 경성에 거주하는 경상도 출신자들의 친목단체로 지주와 상공인 등의 자본들까지 참여하고 있었다. 안광천이 작성한 ‘영남친목회 취지서’에는 “용기를 고취해 전 민족적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 분투”하겠다는 대목이 있다. 이 ‘전 민족적 사업’이란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을 뜻할 수도 있고, 일제하에서 자치제 실시나 참정권 획득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안광천이 영남친목회를 통해 지주와 자본가층을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에 끌어들이려 했던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었지만, 사회주의진영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강하게 제기됐다. 당시 전국적인 대중조직이던 조선노동총동맹·조선농민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 사회주의진영 단체들은 영남친목회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성격의 모든 ‘지방열단체’들까지 반대했다. 민족협동전선체였던 신간회에서도 지방열단체 반대를 결의했다.
조선공산당 내부는 안광천을 옹호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그룹으로 분열됐다. 결국 1927년 10월 안광천은 책임비서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으나 분란은 계속됐다. 안광천은 1927년 11월 ‘신간회와 그에 대한 임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비판에 응답했다. 그는 여기서 사회주의자들의 당면 임무는 민족협동전선 조직인 신간회 내에서 무산계급의 헤게모니를 전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헤게모니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민족협동전선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했다. 안광천은 1928년 자신의 견해에 대한 비판론은 민족협동만을 중시해 계급해방의 과제를 방기하는 청산주의라고 비판·반박했다.
안광천의 ‘혁명적 인민공화국 노선’
안광천이 책임비서 자리에서 물러난 뒤 1928년 2월 주요 간부들이 검거되면서 3차 공산당이 와해됐다. 2월 말과 3월 사이 검거를 면한 간부들에 의해 4차 조선공산당이 재조직됐다. 책임비서는 차금봉이었는데 안광천은 정치부장으로 선임됐다. 안광천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강령과 선언 작성, 국내 운동 상황에 대한 보고문을 작성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코민테른에 보고하는 국내정세에 관한 보고’(보고)와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논강)을 작성했다. 이 두 개의 문건에는 안광천의 민족해방운동론이 체계화돼 있는데, ‘혁명적 인민공화국’ 건설 구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들은 조선공산당 전국대회 혹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문건으로 이 무렵 조선공산당의 민족해방운동론이자 국가건설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광천은 ‘논강’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건설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도 아니고 소비에트 공화국도 아닌 ‘혁명적 인민공화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의 장래 권력조직은 조선사회의 정세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이어야 한다. 조선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것은 좌익소아병적 견해이며 부르주아공화국을 건설하려는 것은 우경적 견해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안광천의 주장은 당시의 현실과 계급 구성, 운동단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이뤄진 것이다. 이때 안광천에 의해 체계화된 ‘인민공화국’ 개념은 1945년 해방을 전후해 사회주의자들이 내세운 국가건설 구상의 기본적인 토대가 됐다.
중국 망명 후 흔적 없이 사라지다
안광천은 1920년대 중반 치열한 이론투쟁을 통해 민족협동전선을 바탕으로 한 조선공산당의 민족해방운동론을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민공화국’ 개념을 체계화했다. 하지만 안광천은 1928년 5월 당규 문란을 이유로 출당처분을 받았다. 부인 이현경을 불법적으로 복당시켰다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활동할 근거를 잃어버린 안광천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안광천은 의열단과 협력해 민족해방운동을 이어 갔다. 1925년 단원들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면서부터 사회주의에 끌리기 시작한 김원봉은 1928년 이후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했다. 사회주의자로서 국내에서 신간회운동을 했던 안광천과 의열단을 이끌며 민족유일당 운동을 폈던 김원봉 두 사람은 민족협동전선을 위해 협력·연대할 수 있었다.
안광천은 김원봉과 함께 1929년 활동무대를 베이징으로 옮겨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조직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운영하면서 잡지 <레닌주의>를 발간했다.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위원장 안광천은 레닌주의정치학교를 통해 1930~1931년 사이에 20여명을 교육해 이들을 국내에 밀파해 적색노조·적색농민조합 등을 조직하도록 했다. 그러나 1933년 국내에 파견된 요원들이 검거됨으로써 안광천의 당 재건운동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신간회가 해소되는 등 좌경노선이 득세하면서 안광천은 “당의 발전을 저해하는 계급적 반역자”로 비판받게 됐다. 안광천이 주장했던 ‘인민공화국 노선’도 부정됐고 소비에트 국가 건설론이 주류가 됐다.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이 극좌노선에서 벗어나 통일전선론으로 복귀한 1930년대 후반에야 다시 ‘인민공화국’ 노선이 사회주의운동에서 주목받게 됐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그러나 그때는 안광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김원봉은 남경으로 이동했는데 이후 안광천의 행적은 찾을 수가 없다. 중국인과 주로 활동해 중국인화됐다는 설, 사망설 등 불확실한 추측이 있을 뿐이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내고 뛰어난 이론가로 이름을 날린 안광천은 사진도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수수께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임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