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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고구려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진주강씨 시조 강이식 장군은 고구려 병마도원수를 지내셨다. 평원왕 32년 서기 590년에 수문제는 남조진(南朝陳)을 평정하고 고구려를 위협하던 차, 영양왕 즉위 이후인 서기 597년에 고구려를 협박하는 수문제의 무례한 국서에 대하여 강이식장군은 전쟁으로 대항하기를 주창하자 왕과 신하들이 이에 동의하고 장군을 병마원수로 삼았으며, 영양왕 9년, 수문제 즉위 18년인 598년에 수륙연합군 30만 대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 수문제를 임유관전투에서 크게 물리쳤으며, 13년 뒤인 영양왕 23년 612년에 수양제는 2백만 대군을 이끌고 재차 침공하자 장군은 병마도원수로서 살수대전에서 수나라를 크게 무찔렀다. 이러한 기록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밝히고 있으며, 장군은 민족적 영웅으로서 나라를 구한 구국공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장군의 묘소는 본래 만주 봉길현 원수림역 앞에 위치해 있으며 묘소 앞에는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는 거대한 비가 세워져 있다.
득관향조(得貫鄕祖) 진양후(晉陽侯) 정순공 강진(正順公 姜縉)
정순공은 9세기말 신라 헌강왕(재위 ? ~886)때 숭인전사운과(崇仁殿四韻科)에 장원급제하였고, 벼슬이 태중대부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에 오르면서 정순공(正順公)을 시호(諡號)로 받고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지면서, 이때부터 관향을 진주(晉州)로 하였다.
1세(一世) 박사공 파조 계용(博士公 派祖 啓庸)
고려 고종때 태어나셨고, 원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셨으며, 국자감 국자박사(國子監 國子博士)를 역임하셨다. 원종 15년(1274년) 갑술년 10월 원국 세조(元國 世祖)의 1차 동정(東征, 왜국 정벌)시, 도독 김방경이 통솔하는 고려군 6천명과 원(元)의 흔도 유부형, 홍다구(忻都 劉復亨, 洪茶丘)가 지휘하는 몽한군(蒙漢軍) 2만명의 동정군(東征軍)을 따라 왜의 정벌 작전에 통신사 서장관(書狀官)으로 왜(일본)를 다녀왔으며, 이때 아드님인 내급사공(諱 引文)도 함께 참가하셨다. 공께서는 이때 많은 공을 세운 까닭으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지셨으나,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셨다.
2세(二世) 급사공 인문(給事公 引文)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역임하셨다. 부친인 박사공께서 일본에 서장관으로 갈 때 동행하였으며, 충렬왕 7년(1281년)에 원나라가 2차로 동정(東征, 일본을 정벌)하고자 할 때, 일본 지리에 능숙하다하여 재차 추천되어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게 되었다. 2차 동정에서는 고려군 1만, 몽한군(蒙漢軍) 3만 등 총 4만명의 연합군으로서 1차 동정보다 더 규모가 컸지만, 때마침 불어 닥친 태풍으로 피해가 심했고, 부대 내에 발생한 역질(疫疾)로 인하여 제대로 전투를 치르지 못한 채 막대한 피해만 입고 퇴각하게 되었다. 공께서도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천신만고 끝에 겨우 환국하게 되었으며, 이후 공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셨다. 또한 자손들에게는 “몽고 오랑캐의 강성하에서는 유술(儒術)을 하지 말며, 부거(赴擧, 과거에 응시)하지도 말라”는 교훈을 남기기도 하셨다.
3세(三世) 어사공 사첨(御師公 師瞻)
고려 충렬왕때 음사(蔭仕)로 감찰어사(殿中監察御史)를 지내셨으며, 손자 군보(君寶)의 귀(貴, 功績으)로 판내의령 참리부사(判內議令 參理副使)로 증직되셨다.
* 참고문헌
*본 진주강씨 대사간공파 문중의 선조님들의 인물소개 글은 상기한 참고문헌을 기본으로 하여, 진주강씨 문중의 族譜, 家狀, 墓碑銘, 墓碣銘 등과 이씨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들을 비교하면서 재정리하였습니다(박사공파 27세손 和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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