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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사례 15 - 충남 예산군 조병란
새벽 5시에 일어나 어제 저녁에 예약 취사 해 놓은 밥과 찌개를 데워서
게 눈 감추듯 후다닥 먹고 손수레를 끌고나가서 호박을 따고 꽃수정 시키고
꽃 떨어진 호박에 봉지 싸고 키가 자라서 천장까지 올라가 다시 내려와 늘어진 호박 줄기내려서
고정 시키고 들어오면 점심때가 다 되어간다.
땀을 닦고 점심을 먹고나서야 잠깐 앉을수있는 시간날까?
남편과 커피 한잔 마셔가면서 이야기도 하고 컴퓨터도 하고 짬난시간에 반찬도 만들어 놓고
가끔은 낮잠도 즐길수있는 꿀맛같은 잠깐의 휴식시간이다.
이런 휴식도 요즘처럼 날씨가 뜨거운 한낮에 비닐 하우스안에 들어갈수 없을때 누릴수 있는 호사다.
다시 하우스에서 일할수 있는 만큼 온도가 내려갈 시간이면
다시 호박밭에 나가서 물체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일하고 들어와
샤워하고 저녁 먹고나면 9시반이 지난다.
매일 매일 다람쥐 체바퀴 돌듯 같은일의 반복이다.
살려고 일을 하는것인지 일을 하기위하여 사는것인지 분간이 안가는 년중 제일 바쁜때다
빠알갛게 동이 틀 무렵 밀짚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등에는 바지개를 얹은 지게를 지고
손에는 소 고삐를 쥐고 누우런 황소를 앞세워 풀이 파아랗게 자란 저수지 둑을 걸어가는
사진속 농촌풍경의 평화로움 한가로움 아를다움 서정과 낭만
깨끗한 물과 맑은공기 풀밭에 뛰어다니는 메뚜기 방앗개비 하늘을 한가롭게 날아다니는 새
나무위를 오르내리는 다람쥐 뒷산과 앞마당을 뛰어다니는 토끼들과 친구가되는 꿈
이모든 생각이 환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불과 몇달이 걸리지 않았다.
추우나 더우나 비가오는 날이나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나 비닐 하우스가 날아갈것같이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나 한가한날 없고 일은 해도해도 끝이없고 풀과의 전쟁도 끝이 없다.
남편이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때 지나는 말처럼 이 다음에 나이가 좀 더 먹으면
시골가서 농사 짖는다며 회사에서 작업복이 나오면 집에 가져와
차곡 차곡 모아두기에 대스럽지 않게 생각 했었는데
정말로 시골에 와서 그 옷을 입고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남편은 서울 사는 내내 마음속으로 시골로 내려올 계획을 하고 있었던것 같다.
다니는 회사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섬유회사이었는데 인건비가 자꾸 상승 하고
공장들이 중국으로 베트남 등으로 이전하면서 국내공장은 점점 축소가 되고
직원들도 중국으로 베트남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면서 남편은 가족을 두고 외국으로 파견 나가는 것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되었는지 갑자기 사표를 내게 되었다.
그러자 때마침 형제들이 돈을 모아 땅을 사서 농사도 짓고 나중에 집이나 몇채 지어
형제들이 다같이 모여서 살자며 예산 대술면에 만평이나 되는 과수원을 사게 되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따로 농사지을 터전을 마련하기 보다는
그곳에서 시작하는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남편이 우선 혼자 내려왔다.
그때는 아이들이 아직 초 중학생이 있었기에 아이 아빠만 내려와
조카 사위가 같이 농사를 하겠다기에 기초지식도 없이 무턱대고 농사가 바로 시작되었다.
말이 만평이지 조카사위는 다른 농사는 좀 하던 사람이지만 과수원은 처음하는 사람이고
아이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데 농사가 잘 될 턱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 농사짖는것을 보고 배우며 하는 일이라서
무슨일이든 다른 사람보다 한박자씩 늦는것은 대수고
언제 무슨일을 해야되는 계획을 짜기에도 두서가 없고
두사람이 마음이 맞아 척척 일이 진행이 되어도 어려울텐데
도데체 맞출수가 없는 성격이라 어려움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한참 일을 할 시간에 밥해먹고 빨래와 청소도 해야하는 살림까지 해야했으니 오죽했으랴.
그러자 그해에 IMF가 터졌다.
당연히 사과값은 폭락이 되었고 싼값에라도 처분을 해야했다.
그렇게 첫해 농사는 농비만 많이 들이고 끝내야 했다
남편 혼자서 살림하면서 농사짓는것은 할짖이 못되었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고 준비가 너무 부족했었다.
조카 사위가 자기가 다 알아서 할테니 감독만 하면 된다는 말을 너무 믿었던것도 큰 실수였다.
그렇다고 그 나이에 다시 취업을 하기는 젊은 사람들 취업하기보다 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기 보다는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때 농촌에 정착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확고 했기에
남편생각에 동조해서 이사를 내려와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
우선 아이들을 충남에 인재들이 모인다고 소문난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진학을 시키고
서울을 정리하고 시골로 완전히 이사를하게 되었다.
하지만 과수나무는 늙어서 다시 심어야 했고 만평이 넘는 덩치는 너무커서 감당하기도 어렵고
소독을 너무 자주해야하는 작목이라 남편의 적성에 맞지않아 고민을 하게되었다.
그리고 과수원땅이 온전히 우리것이 아닌것이 큰 부담이 되었다.
아무리 형제들 땅이라 해도 내 마을대로 할수있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작은 땅이라도 내 마음대로 해도 부담이 없는 온전히 내것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팔면 우리 부부가 감당할 만한 땅을 만날 수 있을것같아
부동산을 통해 여러 곳을 둘러보고 원래 생각해 두웠던
비닐 하우스 농사를 할수있는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농사는 잘 모르는 상태였지만 식물을 기르는 데는 대단한 취미가 있었다.
전공과는 다른 농사에 관심이 있어서 통신대학 농학과 공부를 하기도 했었다.
서울에 살을때도 아파트 이사를 하게되면 제일먼저 보는것이 베란다였다.
베란다에는 언제나 남편의 작품이 가득했었다.
이웃 아이들과 아주머니들이 자주 구경오는 집이었다.
1-2년생 화초부터 난 분재 열대어 심지어는 인삼까지
언젠가는 베란다 안에서 유주와 조롱박이 주렁주렁 열린것을 보고
지나가던 아이 엄마들이 아이 손을 잡고 구경 오기도 했었다.
일년 내내 돌아가면서 꽃이 피는 집 이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이 내려온지 3년 식구가 이사온지 1년만에 다시 지금의 예산 신암으로 이사를 했다.
농토도 그리 크지도 적지도 않은것같고 집도 그냥 쓸만하고
널찍한 마당도 있어 그런대로 시골집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마당 한쪽에 연못도 만들어 색색의 물고기가 노는것을 보는 재미도 맛보고 있다.
시골오면 꽃과 나무들을 마음껏 심어 가꿀수 있을것 같았는데
그런 여유를 부리기에는 너무 바쁜 것 같아 조금만 가꾸고있다.
어느분은 젊은 사람들이 와서 반갑다는 분들도 계시고
이렇게 곱게 생긴 사람들이 왜 힘든 시골생활을 하려 하냐며 걱정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다행히 동네 주 작목이 호박과 쪽파라서 남편의 적성에 꼭 맞는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오자 마자 이장님과 작목반장님 경노당에 동네 어르신들게 간단히 인사만 드리고
바로 호박농사를 시작했다.
동네 작목반장님이 그 바쁘신 와중에도 하나부터 열까지
비닐 하우스에 비닐 쒸우는것부터 씨앗 구입부터 시작해서
농자재 구입할수있는 거래처에 소개하고 인사시키는일
그 밖에 모든일을 자상하게 알려주셨기에 많은 힘이 되고 도움을 받았다.
농업기술센터에 가서 자문도 구하고 책도 빌려오고(빌려온책은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보고있다)
나름대로 공부도 하면서 이웃들 농사짖는것도 많이 보고 들으면서 공부하는 자세로 농사를 시작했었다.
신문도 열심히 보고 농사 정보지도 꼼꼼히 보고 인터넷도 열심히 찾아보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신암면 호박 연구회에서 광양으로 호박 견학을 다녀와서는
한 차원 높은방법으로 호박농사도 짖고있고 가끔은 출하하는 서울 시장견학도 다녔다.
우리 농산물을 계속 사가는 중 도매인과 전화통화를 해서
우리가 보완해야할 방법이 있는지도 상의해가며 농산물 포장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있다.
동네사람 모두가 선생님이었고 때로는 시어머님처럼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첫해부터 호박 농사와 쪽파 농사는 동네 분들보다 뒤지지않게 잘 지어가고있다.
시장과 농협에서 인정받는 정도면 성공한것 아닌가 생각하면 자만이겠지만
열심히 일한 댓가라 생각한다.
값이 좋지 않아 일찍 걷어 치운 아쉬운 해도 있었지만 어쩔수 없는 일 이었다.
농사로 평생을 지내온 동네분들에 비하면 아직은 프로가 못되는
아마추어 9년 초보(?) 농사꾼 이지만 열심히 하는 진짜 농사꾼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제일 힘 들었던 것은 서울서는 올빼미 족으로 살다가 꼭뚜새벽(?)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저녁에는 일찍자고 싶어도 12시 새로 1시가 넘어도 잠이 오지않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가 너무너무 힘들었다.
그 습관을 바꾸는데 몇 년은 족히 걸린것 같다.
새색시 시집오면 관심도 많고 흉도 많은 것처럼 관심을 갖어 주는것은 고맙지만
때로는 심하게 상처도 받고 별일도 아닌일을 공개적으로 씹히기도 하고
오해를 받을때도 있었고 오해를 할때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냥 넘겨도 별일아닌 것들로 많이 속 상한적이 있었던것 같다.
어떤 분들은 타관을 타는 것이라며 위로해주시면서 나는 이사온지 15년이 지난는데도
아직도 이사온 놈이라고 불릴때도 있다는 말씀을 듣고 우리는 아직도 멀은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40년 넘게 이웃에 구애받지 않는 곳과 아파트 생활만 한사람들이 동네 애경사에 빠짐없이 다니고
바빠도 시간내서 같이 할 일 있으면 하고 초상집에 가서는 밥도 안 먹던 사람이
처음으로 상여도 여러번 메었다.
지금은 새로 이사온 사람들이라는것에 많이 적응들이 돼서 그런지 사람들도 무관심해지고
우리도 누가 뭐라고 해도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한귀로 듣고 흘려버리는 여유도 생겼다.
점점 오산리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것 같다.
이사 들어온 사람들한테는 빨리 동네사람이 될수 있도록
따뜻하게 감싸줄수 있는 아량을 베풀어주었더라면 편안하게빨리 적응을 할수 있었을것 같다.
하지만 만 9년이 다 되어가는동안 서울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모든 동네 일이 어설프고 어려웠지만 지금은 나서서 일을 하는 시골 동네 아줌마가 되었다.
년초에 동네분들 모두모여 동계도 하고 경노잔치도 하고
면내 최육대회도 하고 작목반에서는 1 -2년에 한번씩 여행도 가고
동네 부녀회에서도 1년에 한번씩 여행도 가고 준비하고 진행하기에 힘든점도 있지만
크고 작은 아기자기한 재미도 쏠쏠한것 같다.
사람사는 맛을 느낄수있는 일 들이다ㅣ
봄 여름에는 호박농사 겨울에는 쪽파 농사로 어느덧 순식간에 10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간것 같다.
서울에서의 직장생활때보다 대부분은 더 바쁜 생활이지만
작물 전환기에 몇 달은 한가한 시간을 보낼수 있는 보너스
같은 여유도 있다.
시골에 와서 농사를 지어 큰 돈을 벌겠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지만
어느해는 농산물 값이 좋지 않아 더 힘이 들게 일한 해도 있었고
어느해는 힘은 들어도 값이 좋아 힘 든 줄 모르고 신나게 일한 해도 있었다.
가끔 동기간들이 오시면 좋아들 하신다.
처음에는 말씀들은 하지 않으셨어도 농촌생활에 잘 적응할까 걱정들을 많이 하셨단다.
친척들이 오실 때 조금씩 이나마 농사지은것 나누어 드릴때는 보람있고 흐뭇하기도 하다.
방송이나 책에서 가끔은 억대 귀농인들이 성공한 귀농인으로 소개가 되기도 하지만
꼭 그렇게 돈을 많이 버는 귀농인들만 성공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름철에는 애호박 겨울철에는 쪽파 재배 그밖에 노지 밭에서 조금씩 재배하는 작물로
연 2,500 - 3,000 만원 정도 수익이지만 시골생활이라 생활비가 도시 보다는 훨씬 적게들고
그럭저럭 빚 지지 않고 아이들 학비대면서 생활할수 있으니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이만하면 성공한것 아닌가 생각한다.
서울에 살면 노후대비로 4억이니 5억이니 저축을 해야한다지만
시골에서는 어차피 움직일수 있는 힘이 있을때까지는 일 할것이 있으므로
5억의 부담은 갖지 않아도 되지않을까 생각한다.
옛날 어느 학자가 매일 매일 글씨 쓰고 글 짖고 글 읽고 하는 생활을 끊임없이 하면서
죽기전엔 한가한 날 결코 없으리라고 한 말씀을 실감한다.
시골에서는 나이가 먹어서도 일은 줄여도 전혀 안하고 놀기만 하는 사람은 없는것같다.
죽기 전까지 움직일수있는 힘만 있으면 당연히 일을 해야되는줄로 아는것이
우리 시골 사람들의 인생살이 인것 같다.
일 하는것이 힘들기만 하다면 어떻게 1년을 하루같이 일을 할수가 있을까
그 과정에는 키우는 신기함도 있고 기쁨도 있고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어 어려움도 이길수 있는것 같다.
농산물 하나가 나오기 까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야 되는지 알고부터
어느것 하나 예사로이 생각지 않고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감사할줄도 알게 되었다.
서울에 살때는 비가 많이 와도 태풍이 와서 바람이 세게 불어도 눈이 많이와도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자연의 위대한 힘을 알게 되었고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다 해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순응 할수밖에 없다는 겸손함도 배워가고있다.
하느님이 보호해 주시기만을 눈치 볼 뿐이다.
농자재 값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계속 올라가기만 하고
농산물 값은 몇 년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암담한 현실이지만
일한만큼 댓가를 받을수 있는 좋은 날이 올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열심히 땀 흘리며 살수 있도록
건강하게만 해달라고 소박한 소망을 갖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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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각하지 못한 어려운 귀농생활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건강하세요.
맞아요 농사는 반은내가 짖고 반은 하늘이 지어준다고 하잖아요 착하고 정직한 마음을 하나님은 아실거예요 꿈이있는님의 마음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