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눈
- 박용래 / <월간문학>(1966) -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월훈(月暈)
- 박용래 / <문학사상>(1976) -
첩첩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
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
지, 꽁깍지처럼 후미진 외딴 집, 외딴 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 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무를 깎
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허방다리 → 함정
* 갱 → 구덩이
*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 첩첩산중에도 없는 마을 →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배경
*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 원경에 해당하는 배경으로,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띰.
* 갱 속 같은 마을 → 현실 세계로부터 차단된 신비스러운 공간
*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 순식간에 해가 지는 상황, 짧은 겨울 해가 지는 상황
* 창문은 모과빛입니다 → 향토적이고 싱그러운 정서를 환기시킴.
* 기인 밤입니다. → 노인이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끼는 시간
*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 시간의 경과
* 겨울 귀뚜라미 → 노인의 정서가 이입된 대상
*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 노인이 느끼는 고독감의 깊이를 절절하게 드러냄.
*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 → 시적 대상이 '노인'에서 '월훈'으로 변화하면서 마무리됨.
* 월훈(달무리) → 쓸쓸함과 적막감을 자아내는 소재임.
점묘(點描)
- 박용래 / 『먼바다』 (창비, 2013) -
싸리울 밖 지는 해가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보리바심 끝마당
허드렛군이 모여
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
지는 해가 二重으로 풀리고 있었다.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
징소리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연 시
- 박용래 / <강아지풀>(1975) -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枾)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 비름 잎에 / 꽂힌 땡볕 → 여름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 녹색의 비름 잎에 내려꽂히듯 쏟아짐을 표현
* 여름 한낮 / 비름 잎에 / 꽂힌 땡볕이 / 이웃 마을 / 돌담 위 / 연시로 익다 → '여름'과 '가을',
'땡볕'과 '연시', '나'와 '이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존재한다는 시적 인식
을 반영하고 있는 구절(윤회론적 사고의 반영)
* 한쪽 볼 / 서리에 묻고 → 늦가을에 내리는 서리를 맞고 감이 익어감을 표현한 것
* 눈오는 어느 날 / 깨어나 → 겨울은 일상적으로 생명을 위축시키는 공간이지만, 여기에서는 역설적
공간으로 설정됨. 즉, 제상에 놓인 연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를 기약하는 하나의 상
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 심지 머금은 / 종발로 빛나다 → 심지 머금은 종발이란 '꼭지를 달고 있는 감의 형상'을 나타낸 것
인데, 이것을 기름을 종발에 담고 그 속에 심지를 놓아 불을 밝히던 옛날의 등잔불에 연결해서 표현함.
* 박용래(朴龍來), 1925~1980)
출생 : 1925. 8. 14. 충청남도 논산
사망 : 1980. 11. 21.
학력 : 강경상업고등학교 졸업
수상 : 1980년 제7회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
1969년 제1회 현대시학 작품상, 1961년 제5회 충남문화상 수상
경력 : 1974 한국문인협회 충남지부장
본관은 밀양(密陽). 충청남도 논산 출신. 아버지는 박원태(朴元泰)이며, 어머니는 김정자(金正子)이
다. 1943년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조선은행에 입행하여, 1944년 대전지점으로 전근하였다.
1945년 8·15광복을 맞아 사임하고, 1946년에 일본에서 귀국한 김소운(金素雲)을 방문하여 문학을 배
웠다. 그 뒤 향토문인들과 ‘동백시인회(柊柏詩人會)’를 조직하여 동인지 『동백(柊柏)』을 간행하
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문학 수업을 계속하여 1955년 6월
호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로 박두진(朴斗鎭)의 첫 추천을 받았고, 이듬해「황토길」·
「땅」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1969년에 한국시인협회가 주관하여 발간한 『오늘의 한국시인
선집』 중 하나인 첫 시집 『싸락눈』을 출간하였다. 이어, 한국시인협회 주선으로 1971년에는 한성
기(韓性祺)·임강빈(任剛彬)·최원규(崔元圭) 등의 시인과 함께 동인시집 『청와집(靑蛙集)』을 출간
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전원적·향토적 서정의 세계를 심화, 확대시킨 것이 특징이며 언어의 군더
더기를 배제하여 압축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저녁눈」은 이러한 특성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으
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기타 저서로는 시집 『강아지풀』·『백발(百髮)의 꽃대궁』, 유
고시집 『먼 바다』(1984)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1985)이
있다. 1974년 한국문인협회 충청남도 지부장에 피선되었다. 1961년 충청남도 문화상, 1969년현대시학
사(現代詩學社)가 제정한 작품상을 수상하였고, 죽은 뒤 1980년에 한국문학사(韓國文學社)가 제정한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84년 10월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 그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월훈(박용래) / 시낭송 김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