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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정조(正祖)가 진정 사랑한 여인 – 의빈成씨
사랑은 아름다워라, 봄빛 머금은 4월의 장미여, 꿈꾸듯 다가온 그대, 내 삶의 모든 것 포근히 감싸주던
그대여 ~(1955년 미국 영화 慕情의 주제곡 중에서)
사랑에는 이유가 없고 그리움에는 마침표가 없다. 조선왕조 정조 임금 앞에 운명처럼 나타난 한 여인, 바로 아름다운 첫 사랑 성덕임(훗날 의빈)이다. 사랑은 선택이 아닌 운명처럼 다가와서 숙명처럼 받아드려 지지만 이별 앞에서는 아쉬움과 고통만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누가 이별을 아름답다고 했는가?
정조는 의빈성씨가 떠난(죽은) 후 직접 비문을 썼다.
“아! 너의 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嬪宮)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지금 이 상황이 참 슬프고, 애통하고, 불쌍하구나
평상시 화목하게 지냈건만 네가 나를 떠나 죽고 말았으니 너무 애달프고 슬프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너는 멀리 떠났다
나는 무릇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너를 데려 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이로써 느끼니 참 슬프고 애달프다”고 절규했다.(정조의 어제문에서)
한 나라의 지존, 임금이지만 그도 알고 보면 사랑하는 한 여인 앞에서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다. 조선 역사상 국왕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의빈 성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의빈성씨 묘는 서삼릉의 후궁 묘역 경내에 위치해 있다.
서삼릉(西三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희릉, 효릉, 예릉의 세 능(三陵)이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그동안 비공개 지역이었던 서삼릉 태실, 왕자묘.왕녀묘, 후궁묘는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의빈(성덕임) 그는 누구인가?
의빈(宜嬪)의 본관은 창녕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며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증 찬성(贈 贊成) 성윤우(成胤祐)와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의 딸로 태어났다. 선조(先祖)는 증 우찬성 성석연(成石因)이고 8대조 현감 성자심(成子深)에게는 딸인 한극성의 처만 있고 아들이 없어서 성만종을 양자로 들여 가계를 이었다. 아버지 성윤우는 정조의 외조부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청지기였고 승지 한준증의 청지기로 지내기도 했다.
1753년(영조 29년)에 교련관으로 무관직에 올라 1754년(영조 30년)에 경복궁 가위장이 되었고 1755년(영조 31년)에 절충장군, 가선대부를 거쳐 1761년(영조 37년)에 첨절제사가 되었다. 의빈은 아버지 성윤우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인연이 계기가 되어 1762년(영조38년) 이후에 입궁 했다.
성덕임은 원래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을 수발하기 위헤 입궁한 궁녀였으나, 혜경궁은 그녀를 궁녀보다는, 딸 처럼 여기고 키웠다고 한다. 정조의 다른 후궁들은 모두 명문가 출신임에 비해 의빈은 궁녀출신이었다.
- 국왕의 승은(承恩)을 거절한 유일한 여인
정조는 평생 궁녀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왕이지만 그가 유일하게 한 눈에 빠져버린 승은후궁이 있으니 문효세자의 생모 의빈성씨이다. 정조가 철모를 때 만나 평생을 같이 한 여인, 20년을 한결같이 기다려 이뤄낸 애틋하고 뜨거웠던 사랑의 결실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덕임은 1766년 정조의 첫 번째 승은을 거절했다. 王家의 여인들에게 비극은 숙명처럼 다가오곤 했다.
역사상 임금과 후궁 간의 사랑은 대부분 비극으로 끝난 경우가 많았다. 바로 숙종과 장희빈의 경우, 아름다운 후궁에서 비극으로 추락한 슬픈 이야기, 숙종의 사랑을 둘러싸고 인현왕후와 장희빈 간에 벌어진 갈등과 암투는 결국 장희빈의 비극적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이러한 비극의 사례를 보고 극도로 자숙한 것은 아닐까?
하여 의빈은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감히 명을 받을 수 없다."고 울면서 말하고 죽음을 맹세하며 사양 했다. 정조는 의빈의 뜻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종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궁녀로서 최고의 영광인 승은을 거부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용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의빈 성씨가 승은을 거절의 이유는, 자신과 가장 친분이 있었고, 삭막한 궁에서 서로 의지했던 효의왕후와의 의리가 가장 컸다는 생각이 든다.
정조가 의빈 성씨를 사랑했지만, 의빈은 죽는 순간까지도 효의왕후를 위했고, 효의왕후도 의빈의 죽음에 친형제의 죽음처럼 슬퍼했다고 한 것을 보면, 여인들의 궁중암투만 보았던 지라 너무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고난 천품이 선하고 총명했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단정한 태도와 자세를 수양하고, 맑고 올곧고, 더욱 상서로이 화기로우며 온화했다. 열 살(영조 38년, 1762년) 이후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임금의 친척 집안 여인들이 모두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아주 훌륭하게 뛰어나 능히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췄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용 했다. 심지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을 도회지에서 똑똑하게 분별하고 확고하게 지키니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御製宜嬪墓誌銘 중에서)
1773년(영조 49년) 봄에 혜경궁의 두 딸 청연공주, 청선공주 그리고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함께 고전소설 《곽장양문록》(전 10권 10책) 국문 필사에도 참여했다. 이 소설은 필사 시기가 알려진 소설 가운데 최고로 오래된 필사소설이며, 의빈이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표기되어 있다.
-두 번째 승은 거절 및 승낙
1780년(정조 4년)에 정조가 덕임에게 승은을 거절당한지 15년만에 다시 덕임에게 승은을 내리자 이번에도 거듭 사양했다. 그러자 정조는 의빈의 하인을 크게 꾸짖고 벌을 내렸고 이에 의빈은 승은을 받아들이고 후궁이 되었다.
의빈이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780년(정조 4년) 2월 21일에 화빈 윤씨의 간택을 앞두고 정조가 “작년 이후로 이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고 전에 이미 낭패를 당하였는데 지금 어찌 다시 거행하겠는가. 이 일을 하고자 해도 면목이 없다.”하고 주저 했었다. 적어도 이 때 이후에 후궁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문효세자와 옹주 출생
1782년(정조6년) 9월7일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 정조는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고 정5품 상의였던 의빈을 정3품 소용의 품계를 내리고 소용방(昭容房)에 대한 공상을 허락했다.
같은 해 11월에 영의정 서명선 등이 왕자(문효세자)를 원자정호(元子定號) 하라는 명을 내려달라고 아뢰었다. 정조는 “내가 망설였던 것은 복을 아끼려는 뜻에서였지만, 이제 이 일로 끊임없이 서로 버틴다면 도리어 복을 아끼는 뜻이 아니니 또한 염려스럽다.”는 입장을 밝히고는 왕자를 원자로 정했다.
12월에는 영의정 서명선, 좌의정 이복원이 원자의 생모에게 품계를 올려야 된다고 아뢰었다. 정조는 왕세자 책봉 후에 하려 했는데 서명선의 주청이 이어지자 승인 했다. 1783년(정조 7년) 2월 19일에 의빈(宜嬪)으로 승격 되었다.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생활을 검소하게 하여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함)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정조의 어제문에서)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에 옹주를 낳았다. 이 날은 반가운 비가 내렸고, 정조는“조금 전에 순산하여 딸을 얻었다. 아들이 있는 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라 하였다. 7월 2일에는 당시 원자(元子)였던 문효세자가 3세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 되었다. 정조의 차남 순조가 11세에 왕세자로 책봉된 것과 비교하면 무척 이른 일이었다.
- 본가의 증직을 연기하다
1784년(정조 8년)에 형조판서 조시준이 《속대전》에 왕세자 사친의 본가에 대해 증직하는 규정이 있으니 거행하기를 요청하자 정조는 세밀하게 알아보고 처리하겠다고 했다. 이후 영의정 서명선이 다시 아뢰자 추증에 관해 논의 하다가 거조(임금에게 아뢰는 조항)를 내면 깊이 헤아려 비답을 내리겠다고 했다.
1785년(정조 9년)에는 좌의정 홍낙성이 왕세자 사친의 본가를 증직하는 일이 급하니 시행하기를 요청했으나 정조는 법전 내용이 상세하지 못한 점, 홍봉한의 지처는 어디에 추증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 문효세자를 효의왕후의 아들로 삼았으니 세자 사친의 부친에 대한 추증은 중요한 관계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매번 허락하지 않았다.
1786년(정조 10년)에 좌의정 이복원이 왕세자 사친 본가에 대한 증직은 법전에 이미 행하도록 되어 있고 곧 《선원보략》을 수정하니 즉시 거행해야 한다고 아뢰자, 그제야 정조가 승인 했다.
- 행복도 잠시, 정조를 절망하게 한 왕자.옹주의 사망과 의빈의 죽음
옹주는 1784년 5월에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5월 12일에 경풍(驚風)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문효세자는 당시 유행하던 홍역으로 1786년 5월 11일에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에서 사망했다.
의빈은 마음이 약해서 칠정(七情, 마음의 병) 증세가 있는데 문효세자 사망 이후 중병에 걸렸고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 정조가 1786년(정조 10년) 윤 7월 21일부터 9월 7일까지 창덕궁과 경희궁을 오가며 지낸 것으로 보아 의빈은 늦어도 윤 7월에 경희궁으로 떠나서 9월 초에는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매일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는 항상 검열했으며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 안에 보관하고 쓰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786년 9월 14일 미시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사망했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참으로 안타깝고 기구한 운명이다.
- 정조의 어제문(御製文)
의빈 성씨가 사망하자 정조는 묘표(墓表)와 묘지명(墓誌銘)을 손수 지었다.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문효가 병오(1786년) 5월에 죽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서 9월 14일 갑신에 빈 또한 죽고 말았다. 석 달 뒤 11월 20일 경인에 율목동 문효의 묘 왼쪽 언덕 묏자리에 장사 지냈다. 빈은 자신을 잃고 문효를 따라 죽기를 늘 소원하더니 비로소 이제 문효의 무덤 곁으로 떠나가 버렸다. 빈은 장차 한을 풀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효의왕후가 아닌 천한 몸에서 나왔는데 병에 걸려 죽으니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효의왕후에게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요약발췌)
- 의빈이 등장한 예능 작품
정조임금을 주제로 한 작품에는 어김없이 의빈이 등장한다.
-소설: 궐에서 사랑을 찾다, 옷소매 붉은 끝동, 이상 정조대왕 등
-드라마: 이산, 조선왕조오백년(MBC)
-예능: 천일야사(채널A), 차이나는 클라스(JTBC)
그밖에 뮤지컬, 판소리, 만화 등 다수이다.
- 효창원과 의빈墓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와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어제비문 중에서)
정조는 의빈 성씨 사후 아들 문효세자의 묘 왼쪽 산등성이 임좌의 언덕으로 묘지를 정했다. 효창묘(1870년 효창원 승격) 경내에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묘가 함께 있으며 거리는 100걸음 쯤 떨어져 있었다. 원래 효창묘 영역은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였다. 묘역이 굉장히 넓고 송림이 울창하다.
세자와 후궁은 신분이 달라서 같은 곳에 묻힐 수 없다. 하지만 정조는 의빈과 문효세자의 무덤을 나란히 만들어 주었다.
정조는 의빈과 문효세자가 죽어서나마 못 다한 정을 나누고 함께 있기를 바라서였다. 숙종이 숙빈 최씨의 묫자리를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 근처로 정한 내관(內官) 장후재를 파직 시키고 다시 정하라고 했던 일과 비교하면 이례적이었다. 의빈묘(宜嬪墓)는 곡장이 삼면으로 둘러져 있고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쌍, 문인석 한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뜻이 무색하게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의빈 성씨의 무덤은 서삼릉 내 후궁 묘역으로, 1944년 효창원(문효세자)은 의빈 성씨의 무덤에서 2km 떨어진 의령원 앞으로 강제 이장 되었다. 母子간의 거리가 당초 백걸음(百步)에서 현재는 2km 멀어진 것이다.
“살아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 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아!
나는 빈의 죽음에 더더욱 이와같이 슬프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아아! 슬프도다.
가지마라 가지마라 이리가면 않된다”
(御製宜嬪3年內各祭祝文에서)
“임금이 완연히 기대했는데 어찌하여 아이들은 태어나고 멀리 가버렸으며 더욱이 그 어미 마저도 멀리 가버린단 말인가?”
“그런데 너의 목숨은 어찌 이리 가느랗단 말이냐? 나는 이제 무릇 중요한 일을 접고 너의 장례를 치러서 살필 것이다. 문효세자의 옆에 편히 쉬어라. 아들의 무덤에서 멀지 않게끔 아들과 어머니가 좌우에 있도록 할 것이다.”(어제비문 중에서)
정조임금의 첫사랑 의빈 성씨와의 아름답고도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후세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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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이> 성범모(대종회보편집장, 경제칼럼니스트, 전 문경대학교 겸임교수)
첫댓글 위 의빈성씨 글
2021.3.31 현재 1,163명이 읽었습니다(데일리리뷰 카페 기록).
2022.1.20 현재 조회수 10,350 기록(데일리리뷰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