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 양심과 실존적 결단
*하이데거의 존재과 결단(선택)의 문제
*도시(세속적 삶,욕망,유혹,바쁨,비본래적 삶)와 교외(한적한 삶,본래적 삶)
#본래성의 의미는 #나자신곁에있음이다. 그것에 관해 서는 #키르케고르가 이미 말했다. 그는 '실존이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현재적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관심거리, 일거리, 먹거리 등 관심 쏟고 있는 그것 곁에 있 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슨 '거리, 거리'를 찾아다니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 곁에 있지 않고 #사물곁에빠져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것이 전부는 아닌데 ...."라는 것을 느끼는데, 그 순간 불안이 바로 그 동안 잊고 지냈던 '나 자신'을 지시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불안이 지시하고 있는 그것, 즉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음'이라는 가능성에로 넘어가게 되면, 그것이 바로 양심'이라고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는 '양심'이 부버의 요구에 대한 증명이 되는 셈이다.
하이데거는 #이성은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곧 나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것에 대해서 이성은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오로지 '양심'만이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양심'은 바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해야 함을 말해주기 때문에, 양심이 일차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그 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빼내어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 에 #양심과 불안은 함께 있는 것이다. 즉 불안을 거두어버 린 사람에게는 양심도 무뎌지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양심을 '나 자신 안에서 나 자신을 나 자신 앞 으로 불러 세우는 #침묵의소리 라고 묘사한다. 이 양심의 소리는 끊임없이 수다 떠는 잡담 속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양심의 소리는 말을 끊고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고요함, 침묵 속에서 들려온다. 끊임없이 바쁘게, 남들과 더불어 정신없이 사는 삶 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불러 세우는 양심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불안의 용기를 갖고 나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 있을 때, 그런 상황이 나 자신에게는 '꺼림직함'이고 # 안절부절못함 일지는 모르지만 바로 거기에서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양심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양 심을갖기를원함 이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양 심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 가능성을 택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렇게 양심을 갖기를 원할 때 #양심의소리는 들린다. 하이 데거가 말하는 #탓이있음을떠맡음 이란, 나의 내던져 있음이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나에게 과제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의 길로 떠맡아 거기에서부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 능성을 찾으라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하이데거는 '양심'을 갖기를 원함' 그리고 '탓이 있음을 떠맡음'을 강조하였다. 하이데거는 일상의 논리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 결단을 내릴 수 있고, 바로 그때 이제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결단을 내려 자기 자신을 떠맡아 자기의 존재를 존재하는 실존이행이다. 자기의 #존 재해왔음을 자신의 현사실로 받아들여 거기에서부터 자신의 존재가능을 미래[올제]에로 기획투사하여 그 가능성을 구현하기 위해 지금 여기 현재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며 실존의 세계를 펼쳐나간다. 그 세계는 일상의 세계 저편에 있는 세계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일상의 세계와 뗄 수 없이 맞붙어 있는 세계이다. 인간은 이 두 세계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우선 대개는 '그들'의 세계가 갖는 #평온함을 즐기면서. 실존적 결단을 계속 미루면서. 선택지가 많아져 선택의 어려운 요즘 세상에서는 선택이 곧 고통이기에 선택 없이 그저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며 떠맡음, 선택, 결단을 포기한다. #각자도생의 시대 어느 때보다 실존적 결단이 중요하다
*유사개념: 칼융의 자아에서 자기로, 라깡의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불교의 열반/피안 등
끈 / 박소란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있다
(도시적 비본래적 삶을 잡을 수도 있고 놓을 수도 있다.선택과 결단의 문제다)
(존재는 인연에 의한 생멸인데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짐짓 골똘한 표정으로
헐거운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답을 미룰 수도 있다
(진실성이 없는 자세로 생각하는 척하며
야무지게 결단하지 못하고 본래적 삶의 부름을 미룰 수도 있다.)
나는 지금
교외로 향하고 있다 버스는 이상하리만큼 굼뜨고
창밖 도로변에는 꽃들이 빽빽이 심어져 있다 이상하리
만큼
눈이 부셔
(나는 지금
본래적 삶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교외로 향한다.도시에 비해 이상하리만큼 버스는 천천히 가고 혹은 미련하리만큼 굼뜨고 창 밖 도로변에는 꽃들이 즉 이데아들이 빼빽빽하다.빛의 세계다.이상하리만큼 혹은 이상적인 세계다)
슬며시 훔쳐다 감거나 묶을 수도 있다
괴성을 지르며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사랑할 수도 있다
(도시적 삶,세속적, 비본래적 삶은 욕망의 경쟁이므로 훔치거나 극단까지 가서 파멸할 때까지 애착할 수 있다)
사랑은 아닐 수도 있다
엉클어진 시간을 풀 수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한 욕망이 아닐 수 있다.
헝클어진 시간을 끈처럼 풀 수도 있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아무 생각없이 내버려둘 수도 있다. 선택의 문제다)
적당한 크기와 모양으로 조각을 내어
아무 바닥에나 던져버릴 수도 있다
오래 벼린 칼이 있고 마침 칼은 가방 속에 있고
(양심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며 살 수도 있다. 그것도 사실은 바닥적 삶이다.
오래 벼린 칼은 양심이며 가방, 마음 속에 있다)
나는 지금
교외로 향하고 있다 끈과 칼은
이상하리만큼 닮았고
(나는 지금
교외 즉 양심의 방향으로 기투하고 있다. 끈은 인연이나 존재를 상징한다. 칼은 결단과 선택을 상징한다.존재는 선택에 의해 좌우되므로 서로 닮았다.존재는 무이고 빔이다.선택으로 내용이 채워진다)
끊을 수도
더 잘 끊을 수도 있다
(비본래적 삶은 결단에 의해 끊을 수도
더 잘 혹은 철저히 끊을 수도 있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있다
(결단에 따라 본래적 삶을 살 수도 있고 잡담, 호기심, 애매모호함, 평균성에 빠진 비본래적 삶으로 결국은 후회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