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
마이스터 엑카르트(1260~1328)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게 없다. 대강 윤곽만 그리자면, 호크하임의 엑카르트는 에어푸르트 인근의 튀링겐 출신이다. 도미니코회의 회원이자 대학생으로서 파리에 있으면서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설을 접한 후, 1294년부터 1298년까지 에어푸르트 도미니코회 수도원의 수도원장과 튀링겐 관구장 대리 직무를 수행했다. ‘가르치는 일’과 ‘사는 일’에 두루 밝아 ‘앎의 스승’이자 ‘삶의 스승’이라 불린다. 세 번째 파리 체류 시기에는 파리 대학교 신학부 교수직에 올라 실질적으로 ‘신학의 스승’이 되었다.
‘이단’ 에크하르트?
중세 독일 신비사상의 핵심 인물,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자신의 라틴어 저서 『삼부작』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음의 명제, 문제 그리고 해설(주해) 중 어떤 것은 일견, 해괴망측하고 의심스러우며 오류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좀 더 힘들여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1329년, 아비뇽의 교황 요한 22세는 엑카르트의 저작 가운데 17개 항목이 “말마디나 문맥에서 … 오류나 이단의 하자를 포함하고” 11개 항목이 “너무 경솔하며 상당히 좋지 않게 표현되어 … 이단의 혐의가 있다”고 단죄했다. 물론 “이 항목들도 많은 설명과 보충을 가하면 가톨릭적 의미를 가질 수 있기는 하다”는 단서를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1980년, 독일 발버베르크에서 개최된 도미니코회 총회가 마이스터 엑카르트에 대한 판결을 재심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기로 결정하고, 자료 수집을 위해 마이스터 엑카르트 위원회를 구성한 바 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 복권 운동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 책은
엑카르트는 ‘모든 것’과 ‘자기 자신’마저 떠나서 ‘버리고 떠나’, ‘놓아두고 있으라’ 말한다. 그러면 ‘영혼 속에 하느님의 탄생이 이루어진다.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철학자인가, 신학자인가? 사상가인가, 영적 지도자인가? 사목자인가, 설교자인가? 전부 다다. 이 점을 이해할 지침서가 필요하다. 이 책은 애초부터 그런 지침서가 되도록 구상되었다. 최근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출전出典과 참고문헌이 수록된 자료를 제시하고, 지속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도록 그에 상응하는 전거를 제시했다.
디트마르 미트는 폭넓은 독자층을 고려하여 그들에게 일차 정보를 제공하고, 좀 더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학술용 판본을 소개할 요량으로 엑카르트의 저작들을 엄선했다. 엑카르트의 중심 사상을 드러내되 어느 정도 알기 쉽고 분량이 너무 길지 않은 작품을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
자세한 개관을 통해 엑카르트의 생애와 사상을 일별한 후, 본문에서는 엑카르트의 설교 작품을 중심에 놓았다. 순서를 그런 식으로 정한 것은 사목적 의도에도 부합한다. 엑카르트는 설교 작품을 자신의 성경 주해집에 배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집회서 24,23-31에 대한 설교와 강의를 선정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들은 성경 주석, 영적 담화, 설교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집회서 24,23-31은 마리아 탄생 축일(9월 8일)에 읽는 구절이다. 그 구절을 본문으로 삼아 엑카르트는 1303년부터 1311년 사이에 도미니코회 관구 총회에서 설교와 강의를 행했다. 라틴어로 된 두 번째 텍스트도 성경 주해와 설교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그것은 “나를 따라라!”(요한 1,43)는 말씀을 본문으로 삼은 설교로서 엑카르트가 『요한 복음 강해』에 편입시킨 것이다.
이어지는 글들은 엑카르트가 자신의 『설교집』에 수록한 라틴어 설교 초안들이다. 특히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신학적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것들을 선정했다. 초안마다 엑카르트의 방법에 따라 철학적 성찰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독자는 그 초안들을 읽으면서 엑카르트의 신학과 영성 생활론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어 설교 열 편은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 설교들은 엑카르트의 폭넓은 영향력을 보여 준다. 미트는 주관적 관심사에 따라서 열 편을 선정했다. 선정된 설교들은 그가 특별히 붙잡고 씨름한 것들로서, 개관에서 밝힌 엑카르트의 중심 사상들과도 연결되어 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글은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읽어야 한다. 그런 의도 가운데 상당 부분은 타락과 저속으로 여겨지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지 않고, ‘다르게 살 수 있음’을 보여 주면서 그것을 실제 경험으로 만들려는 데 있는 것 같다.
신적인 것과 연결된 인간 존재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모험은 시간 속에서 활동하기 위한 모험이다. 깊이를 알 수는 없지만 구도자를 떠받치는 심층, 곧 하느님 경험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모험이다. 인간 내면에 자리한 그 심층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당당히 책임지게 한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내면성’은 우리가 삶의 위험에 직면하여 뛰어드는 도피처가 아니라 우리가 활동적으로 참여하는 강력한 현실인 것 같다.
우리 시대의 절박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수많은 시도는 인간의 정체성 요구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정체성이 인간학의 커다란 주제이자 신학의 주제인 것은 그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하느님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장 깊은 근저를 발견하는 곳,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평온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신적 영역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시간을 잘 쓰라고 한 것처럼 영원한 것을 위해 시간을 쓰는 사람, 사유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철두철미 신앙에 몰입해 보려는 사람, 활동생활 한가운데서 자유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그 세계로 초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