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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주 테마여행 / 20차 /김제 모악산 산행후기
1. 일 시 : 2011. 09. 18(일) / 7시 출발 - 8시 도착 /13시간
2. 장 소 : 모악산/금산사/증산교본부/동심원
3. 참여인원 : 43명
4. 이동코스 : 상주-남상주ic-청원고속도록-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전주ic-
완주 구의면 원기리 주차장 -금산사-금산사ic-호남고속도로-청원상주고속도록-남상주ic-무양청사
5. 테마여행 일정
◇등산소요시간 : 원기리주차장-대원사-수왕사-무제봉-모악산정상-헬기장-심원암-금산사-
금산리주차장(10km/ 5시간)
◇문화탐방 : 금산사 / 증산교본부 / 동심원
◇별미탐방 : 조양월/ 민물메운탕 / 063-543-4700
김제는 특별한 별미는 없는 것 같다. 우리네 먹는 음식이랑 별만 차이가 없었다. 금산면사무소에 음식
점을 소개 받았는데 금산사 근처 메운탕집을 소개받아 메기메운탕과 새우메운탕을 준비를 부탁하였다.
전라도 답게 음식은 정갈하고 맛이 있었다. 메기메운탕이 우리 입에 맞았는지 모두들 새우메운탕은 맛
이 좀 덜하다고 하였다.
6. 테마여행 후기
9월은 미륵의 고장, 지평선의 고장인 김제를 탐방하기로 하고 평상시 보다 한시간 늦게 상주에서 출발
하였다.
옛날같으면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만 완주에서 오르는 모악산 초입까지 3시간이 체 걸리지 않았다.
다른지역에 비해 주차장이 잘정돈 되어있고, 특히 주차료가 없어서 그런지 모악산 산행은 완주군 원기
리 주차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등산객들에게는 보편화 되어있는 모양이다.
날씨가 좋지 않아 조망은 볼수 없었지만 백제인의 삶이 남아있는, 전쟁의 고통에 힘겨워했던 백성들을
위해 미륵세계를 제시하여 고통속에 벗어날수 있다는 희망의 메세지를 던져주었던 미륵, 백성들은 진정
미륵이 도래하리라는 생각에 고통의 세월을 보상받았을 것이다.
원기리 주차장. 주차장 시설이 어느 주차장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겄만 주차료와 입장료를 받지않습니
다. 모악산 등산로 진입까지는 도로주변에 아웃도어 가게와 먹걸이 가게가 도로 주변에 있어 산객들에
게 눈요기를 하고 있었다.
<대원사에 얽힌 전설>
조선 중기 고승인 진묵조사 일옥(1562-1633)은 만경헌 불거촌에서 태어났다.
7세때 전주의 봉서사에서 출가한 그는 불경을 한번 읽으면 곧 암송하고 그 내용을 통달하였으므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능엄경>을 즐겨 읽었고, 좌선삼매에 빠져 끼니를 잊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며, 선정의 높은 경
지에서 유유자적하시며 중생을 제도하였다.
법력이 높았던 그를 유학자들은 '비록 승려지만 유림의 행동을 하였다.'는 평을 하며 진도인이라 부른
것처럼 폭 넓게 학문에 전념하였다. <성리대전>을 빌려 동구 밖에 나가기 전에 다 외웠다거나 신이한
풍수지리학과 공중을 날아다녔다는 등의 기행, 이적으로 석가의 소화신으로 추앙받았다. 암울했던 시대
에 대한 고뇌가 기인으로서의 진묵조사의 행적이었다.
선의 경지에서는 당대에 같이 살았던 서산대사와 버금가는 선지식이라 할 수 있다.
기와 그려진 그림들.. 한폭의 수채화 같습니다..
수왕사, 생각보다 너무나 초라한 사찰이였다.. 사찰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보는 기도처와 같았다. 이
사찰은 송화백일주의 비법을 간직한 주지스님이 가끔 매스컴을 타고 있다
천년신비의 사찰법주로 알려진 송화백일주松火白日酒는 정부가 지정한 전통식품 명인名人 1호 벽암스
님이 빚는 술이다.
벽암스님은 전북 완주군 모악산 수왕사水王寺 주지스님이다.
벽암스님이 빚는 술은 애초에 스님들이 마시던 곡차穀茶였다. 수왕사는 산중턱에 있어 스님들이 고산병
에 시달리며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모악산 해발 800m 수왕사에서 참선을 하던 수도승들은 지천에 있는 송화를 이용해 송화곡차를 마시며
고산병을 이겨냈다.
이는 불교사회집에 ‘신라 진덕여왕이 부설거사 도반승인 영희, 정조와 함께 수도정진하다 헤어지면서 석
별의 정을 나누기 위해 송화 곡차를 마셨다.“고 적고 있다. 그때부터 수왕사에서 전승되기 시작한 송화
곡차는 12대 전승기능보유자인 벽암스님에 이르러 전통사찰법주 송화백일주로 탄생한 것이다.
그러자 수왕사 하리에 송화양조를 설립한 벽암은 천년신비의 사찰법주를 복원하고, 고산병을 예방하기
위해 마시던 사찰법주를 사지寺誌나 옛 문헌을 찾아 전통주로 연구개발 했다.
송화백일주는 솔잎· 댓잎, 오미자· 국화· 산수유· 구기자 등과 함께 찹쌀· 곡자· 오곡 등이 주원료다. 여기
에 모악산 7부 능선 따라 암벽을 등지고 있는 수왕사水王寺 물로 송화백일주를 빚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것은 천년신비의 사찰법주의 법칙이다.
모악산 7부 능선 따라 커다란 암벽을 등지고 있는 수왕사水王寺는 말 그대로 물의 왕王이란 지령地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시사철 용출하는 물맛은 그 어디에도 비길 때가 없다.
송화백일주는 100일 동안, 저온에서 장기간 재 숙성해서 빚어지는 술로 장기보관 할수록 더욱 깊은 맛이
나고, 고산병예방에 더욱 효능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수왕사 석간수
모악산
모악산 산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금산사지>에 '조선의 고어 로 엄뫼와 큰뫼로 칭하였다. 엄뫼는 모악
이라 의역하고, 큰뫼는 큼을 음역하여 금(金)으로 하고, 뫼는 의역하여 산(山)으로 하였다'는 것으로 보
아 금산사의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또 다른 산이름 유래로는, 정상 아래에 위치한 쉰길 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과 비슷하다 하여 모
악산이라 이름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다음으로는 모학산(母學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지금도
모학산과 연관된 지명으로 '학가산', '학래' 등의 지명이 있고, 지금은 원기리로 바뀌었지만 윗학래, 아
랫학래라는 곳도 남아 있다. 모악산은 삼국유사와 고려사에는 금산(金山)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모악산
으로 표기되어 있다.
풍수지리설은 난세에 더욱 민중의식 속에 파고들어 모악산은 계룡산과 더불어 민중신앙 및 신흥종교의
텃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조선조 말기에서부터 6.25 이후까지 모악산에는 수십 개의 신흥종교집단이
성행했었다. 그러나 신흥종교 중 하나였던 용화교주 서백일이 신도의 칼에 사망하고, 도립공원 개발과
함께 무허가 건물로 단속 철거됐다.
정상은 통신탑이 설치되어 있어 정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수 없었다. 인공위성시대에 방송탑은 이제는
철거해도 될것같다. 시민단체에서 통신탑 철거를 위한 서명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하루 빨리
철거하여 민족의 명산인 모악산이 옛날모습으로 회복되기를 바랄뿐이다. 정상인지 건물옥상인지 구분
이 가지 않는 모악산의 정상에서 날씨가 좋으면 변산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아쉽게도 운무에 감싼 모악산은 아름다운 조망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정상에서 점식 식사중
정상밑에서 한 산객이 의자에 식탁을 차리고 혼자만의 만찬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정말 자유인처럼 보
였다. 혼자만의 식탁인데도 정성을 다하여 차리고 먹는 점심...너무나 인상적인 모습이였다.
금산사.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
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
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
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
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
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금산사 미륵전(국보65호)
모악산(母岳山)에 자리한 금산사(金山寺)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지은 절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
표율사(眞表律師)가 다시 지었다. 미륵전(彌勒殿)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
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龍華殿)·산호전(山呼殿)·장륙전(丈六殿)이라고도 한다. 1층에
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
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
몄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
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며, 우리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3층 목조 건물로 잘 보존
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금산사 오층석탑(보물25호)
금산사 안의 북쪽에 송대(松臺)라고 불리는 높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바로 뒤에는 석종모양
의 사리계단이 있는데, 이렇듯 사리계단 앞에 석탑을 세워놓은 것은 사리를 섬기던 당시 신앙의 한 모습
이기도 하다.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의 탑이다. 기단부는 아래층 기단의 규모가 좁
아져 있고, 각 기단의 윗면에 다른 돌을 끼워서 윗돌을 받치도록 하고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2층 이상
에서 줄어드는 비율이 제법 부드럽고, 각 층의 몸돌에 새겨진 기둥조각이 넓은 편이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6번째 층은 다른 층처럼
몸돌의 각 귀퉁이에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모양의 것이 덮여 있으나, 이것은 탑의 머리장식을 받
치기 위한 노반(露盤)으로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머리 장식은 온전히 유지되어 원
형이 잘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기본 양식을 따르면서도 기단이나 지붕돌의 모습 등에서 색다른 면을 보
○혜능왕사 탑비(보물24호)
이 부도군의 3번 부도비가 보물 제24호로 지정된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이다. 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운 것이다.
현재 탑비는 귀부와 비신만이 남아 있고 비의 머리부분은 결실되었다. 대리석의 비신은 높이 2.78m, 너
비 1.5m로서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은 판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 『해동금석원』등에 그 내용이
전한다. 비문의 글씨는 약 2cm의 크기로 구양순의 해서체인데 활달하고 쾌적한 멋을 지녔다. 비의 앞면
에 43행 77자씩으로 스님의 출생과 교화활동, 입적 등을 적었으며 그 둘레는 당초문으로 장엄했다.
서자(書者)와 찬자(纂者)의 이름은 판독할 수 없고 각자(刻者)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해동금석원』
에 의하면 이오가 짓고 정윤(鄭允)이 썼으며 비음(碑陰)은 채추탄(菜推誕)이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금속고』에서는 비음을 채추탄이 쓴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귀부는 방형의 지대석위에 놓였는데 신체는 장대하나 머리는 작은 편이다.
등에는 육각의 갑문(甲文)을 새기고 등위에 비신을 얹는 삽입부를 마련했다.역동적인 발과 비늘의 표현
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여 고려시대의 탑비 가운데 우수한 작품임을 알게 한다.
○금산사 방등계단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
(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
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
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
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
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
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
녔다는 뜻이 된다.
조선조 생육신의 한사람이었던 김시습이 이절을 찾아 이곳방등계단에서 남긴시
구름기운 아물아물, 골 안은 널찍한데.
엉킨 수풀이 깔린 돌에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금산사)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과 우레가 석단을 감싸도는구나
낡은 침대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람스치니 저녁 추위가 생기누나
객실에서 하룻밤 자고가니
연기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다
○육각다층석탑(보물27호)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
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
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
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
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당간지주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
(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금산사에 핀 꽃무릇입니다..
○증산교 본부
전북 김제에 있는 증산 법종교는 증산의 딸인 강순임이 1953년에 건축했으며, 증산교의 한 교파인 법종
교의 본부이다. 이 증산 법종교에는 태평전, 구릉사영대, 삼청전, 전하전, 경춘대, 대령전, 승묘전 등 큰
건물들이 들어서 있지만, 공원처럼 조경이 잘 되어 있고 또 호반을 끼고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한국에서 성립된 종교의 하나로 창시자 강일순의 호에 따라 증산교라 하였는데 일제 강점기에 흠치교라
고 하였다.
한국 신흥교 가운데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로 성장하였으며, 유불선/단군사상/전통종교의 유산을 거의
모두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사회적 모순이 뚜렷해지고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자. 기층민중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이에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동학농민운동은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형태로 나타난 대응으로서 한때
삼남지방에서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으마.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물적 토대가 미비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강일순은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길을 모색하려는 방편으로 전통종교의 교리를
공부하고, 세상의 모든 것에 밝아지는 도통공부에 힘썻으며 1897년 3년 동안 전국을 편력하는 등 수행
에 정진하였고, 1901년 모악산에 들어가 세상이치를 궁구하기 시작하였다.
강일순이 죽은뒤로는 그의 아내 고부인을 중심으로 선도교라 이름하여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강일순
추종자 차경석의 실권이 커짐에 따라 보천교라 이름하였고, 그의 실천지침인 천지공사를 행하며 주변사
람들을 가르쳤을 뿐이다.
강일순 사후 김형렬, 안내성, 이치복, 박공우, 문공신, 김광찬등이 각지에서 증산교 분파를 세우기에 이
르렀다.
신도수가 크게 늘어가는 가운데 차경석의 보천교는 보화교로 이름을 고치고 시국이라는 국호를 선포하
는등, 한때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때는 100개의 교파가 난립하는등 증산교는 교파의 분지와 한께 그 영향력을 넓혀 나갔는데. 차경석의
황제등극 실패의 악영향, 지나친 교파분리, 총독부의 강제와 압력등으로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강일순 초상화 , 좌측에는 강일순 우측에는 그의 부인의 무덤이 초상화 좌우에 안장되어 있답니다..
우측의 초상화가 따님이랍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고 했다는 말이 실감이납니다.. 사진속의 이분의 고향이 상주랍니다. 아직도 상주 화
동에 형님이 살고 계신다고 합니다. 덕분에 증산교에 대해 자세하게 들을수 있었다. 자세히 설명을 듣고
나니 증산교에 대해 조금을 알것만 같았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모든 성씨의 시조의 위패를 모셔놓았습니다. 각자의 성씨의 시조에게 삼배를 올렸답
니다.
○동심원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증산교 앞의 금평저수지를 옆에 끼고 제비산에 위치한 작은 공원으로 동심원은
1994년 음력으로 3월3짓날에 개막식을 올렸는데 개막식 날짜는 1994년 동학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
고, 4월13일은 일제치하에서 있었던 우리나라 상해임시정부 수립일 기념일이라는 뜻깊은 의미를 가진
다.
개막식 날짜 하나만으로도 가진 의미가 여럿인 것처럼 이곳은 스스로 독도인임을 자처하는 송재욱이란
분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각종 수석과 나무, , 역사적 기념물과 조선 영토회복 기원비석등을 설치전시하
여 지난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기상과 얼을 심어주기 위한 수련장이
다.
지금의 송재욱이란 분이 몸이 안좋아 관리가 되지않아 잡초가 무성하고 정돈이 되지않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곳이다.
오늘의 별미, 메기 메운탕과 민물새우 메운탕입니다. 말린 무층을 많이 넣어 한결 맛이 좋았습니다. 저
수지를 바라보면서 김제에서 하루여행을 한잔의 술과 함께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돌아 보지 못한 김제의 지평선과 벽골지는 다음을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다음달 테마여행은 부안으로 떠납니다. 내변산을 산행하면서 서해의 아름다움을 조망하고 천년고찰 내
소사의 전나무숲길을 걸어면서 살아온 우리네 길을 이야기한번 해봅시다. 곰소항에서 젓갈로 별미를 맛
보고 새만금 바닷길을 달려서 상주로 돌아올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