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하지 않은 말은 없지만 아래에 정말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세상 모든 경전의 핵심.. 세상 모든 수행의 핵심.. 아래와 같습니다.
"깨달음을 위해서 하는 일은 뭐든지 도움이 돼. 깨달음을 생각지 않고 하는 일은 한 발 더 떼어놓게 하지. 그렇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간단히 말해서 모든 사물과 생각을 넘어선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돼. 자네가 되려고 하는 바로 그 존재야말로 자네 현재의 본래 모습이야. 그냥 그 사실만 명심하라구."
아이 앰 댓 상권 41. 관조자로서의 태도를 발전시켜라.
문: 깨달은 사람은 하루 중, 또는 매시간 마음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어떻게 보고 듣고, 또 먹고 마시고 자고 깨고 일하고 쉬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그 상태가 자기의 상태와 다르다는 증거는 뭔가요? 소위 깨달았다는 사람들에 대해 말로 하는 증언 말고 그 상태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방식은 없나요? 심리적인 방법이나 신경에 관한 반응, 또는 신진대사나 뇌파 등 심신의 구조상 관찰 가능한 차이점이 없습니까?
M: 차이점을 발견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어. 모든 것은 자네가 얼마나 볼 줄 아느냐에 달렸지. 하지만 객관적 차이란 건 정말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그들의 태도랄까, 관(觀) 같은 것이야. 집착이 전혀 없이 관조하는 태도이지.
문: 만약 자기 아이가 죽으면 깨달은 사람은 고통을 느낍니까? 안 느낍니까?
M: 고통을 느끼는 사람에 대해 연민을 느끼지. 사건 자체는 별로 중요성이 없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연민으로 가득해. 그 존재가 살았든 죽었든 육신을 지니고 있든, 육신을 벗었든 말이야. 결국 사랑과 연민이 그의 본성이지. 그는 살아있는 모든 것과 하나이고 사랑이란 바로 살아 있는 일체감이지.
문: 사람들은 죽음을 몹시 두려워합니다.
M: 깨닫고 나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그러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에 대해 연민을 느끼지. 결국 나고, 살고, 죽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그렇지만 두려워하는 건 그렇지 않아. 물론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지만 말야.
문: 가령 말이죠. 선생님께서 몸이 편찮아서 열이 심하고 몸이 쑤시고 떨렸는데, 의사가 증세가 심해서 살날이 몇 날 안 남았다고 하면 선생님의 최초의 반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M: 그런 거 없어. 향이 다 타고나면 없어지는 게 당연하듯이 육신도 죽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한 거야. 정말이지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라는 사실이야. 난 그냥 있는 거야. (I am)
문: 그렇지만 선생님의 가족들은 절망감을 느낄 게 아닙니까? 가족들에겐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M: 보통 하는 말 있잖아. "두려워하지 마라. 생명은 계속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들을 보살펴 줄 것이고 머지않아 우린 다시 만날 것이다." 등등이지. 하지만 내겐 그런 식으로 소동을 벌이는 게 의미가 없어. 난 살고 죽는 존재가 아니야. 난 태어난 일도 없고 죽을 수도 없어. 기억하거나 잊어버릴 무언가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아.
문: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M: 기도하는 건 좋은 일이야. 기도를 해주면 죽은 이들이 몹시 좋아하지. 그러나 깨달은 이들은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 자신이 사람들이 하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니까 말이야.
문: 그러면 깨달은 사람들은 죽고 나서 어떻게 지냅니까?
M: 깨달은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또 죽으리라 생각하나?
문: 그러나 육신이 해체된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사건 아닙니까?
M: 깨달은 이에게 중요한 사건이란 건 없어. 누군가가 깨달을 때만 그의 가슴이 환희로워지지. 나머지는 전혀 관계가 없어. 전 우주가 그의 몸이고 모든 생명이 그의 생명이야. 하나의 도시에 전구 하나가 꺼졌다고 해도 전체에는 전혀 무관하듯이 한 육신의 죽음이 전체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해.
문: 개체가 전체에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나 개체 자체에 대해선 정말 중요합니다. 전체는 추상이지만 개체, 구체화 된 개체는 현실이니까요.
M: 그건 자네 생각일 뿐이야. 내게는 오히려 그 반대야. 전체가 현실이고, 부분은 부질없는 거야. 개체는 나고 죽고, 또 나고 이름과 형태를 바꾸어 가지만 깨달은 이는 변화가 없는 실체일세. 오히려 변화를 가능케 하는 존재야. 그러나 그가 자네에게 확신을 주진 못해. 그건 스스로 경험에 의해 생겨나야 해. 내게 있어서 모든 건 하나이고 모든 것은 평등해.
문: 죄악과 미덕도 하나의 동일한 것입니까?
M: 그런 건 모두가 사람들이 꾸며낸 거야.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이야. 결국 행복한 것이 미덕이고 괴로움으로 끝나는 게 죄악이지. 둘 모두가 마음의 상태들일 뿐이야. 그러나 나의 상태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지.
문: 저희는 본다는 게 뭔지를 알려고 헤매는 장님과 마찬가지로군요.
M: 표현이야 어떻게 해도 좋지.
문: 침묵 수행이 영적인 수행으로서 유용합니까?
M; 깨달음을 위해서 하는 일은 뭐든지 도움이 돼. 깨달음을 생각지 않고 하는 일은 한 발 더 떼어놓게 하지. 그렇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간단히 말해서 모든 사물과 생각을 넘어선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돼. 자네가 되려고 하는 바로 그 존재야말로 자네 현재의 본래 모습이야. 그냥 그 사실만 명심하라구.
문: 그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믿어지지 않습니다.
M: 나도 그랬던 적이 있어. 그러나 난 나의 스승을 믿었지. 그랬더니 그분 말씀이 옳다는 걸 알게 되더라구. 가능하다면 날 믿어 봐. 내가 말하는 걸 마음에 새기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도록 해. 왜냐하면 이미 구족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찾는 일이 장애가 돼서 오히려 보지 못 하게 한다구.
문: 선생님은 모든 일에 매우 무관심하신 것 같습니다.
M: 난 무관심하지 않아. 불편 부당할 뿐이지. 나나 내 것을 더 좋아하거나 하지 않아. 흙 한줌이나 보석 한 줌이나 다 마찬가지야. 삶과 죽음이 내겐 똑같아.
문: 불편부당함 때문에 무관심하신 거예요?
M: 그 반대야. 연민과 사랑이야말로 나의 핵심이야. 그러면서도 편애함이 없기 때문에 사랑에 자유로워.
문: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이라는 관념 자체가 몹시 중요하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도 깨달음 같은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삽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을 방치해 두고서 말입니다. 일단 깨달음이란 말을 들으면 씨가 뿌려지고 결코 죽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해마다 8개월 동안 계속 그의 비구니들을 보내어서 설법을 하게 하셨습니다.
M: 음식을 줄 수도 있고, 옷, 집, 지식, 애정을 나누어 줄 수도 있지만 최고의 선물은 깨달음의 복음이야. 나의 스승께서 곧잘 하시던 말씀이지. 자네 말이 맞아. 깨달음이 최고지. 일단 그걸 얻으면 그 누구도 그걸 가져갈 수 없으니까.
문: 선생님께서 서구에 가셔서 지금처럼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겁니다.
M: 당연히 그러겠지. 둔한 사람들한테는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미친 짓일 거야. 그러나 어째? 그냥 그대로 두라구. 내가 잘난 것 없으니 난 나대로 살고, 그 들도 죄가 없으니 그들은 그들대로 사는 거지 뭐. 궁극적인 실체는 무수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어. 그 이름과 형상들이 무수하지. 모든 것이 같은 바다에서 솟고 스러지니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야. 원인과 결과를 찾는 것은 마음의 장난에 불과해. 존재하는 건 모두 사랑할 만한 거야.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라구. 어디를 가든 어떤 것이든 존재와 의식 그리고 사랑을 보게 되지. 뭔가를 더 좋아할 이유가 없어.
문: 천재지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을 때에는 별로 그렇지 않은데 사람이 사람 손에 죽을 때에는 몹시 슬픕니다. 불가피한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살인을 하는 것은 피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보기에 추하고 몹시 혐오스럽습니다.
M: 모든 일은 그 일이 생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야. 자연적인 재난이든 사람이 만든 재난이든 재난은 생기게 되어 있으니 혐오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문: 어떻게 원인이 없이 어떤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M: 하나하나의 사건에 모든 우주가 반영되고 있어. 궁극의 원인은 추적할 수 없어. 인과 관계라는 생각 자체는 생각과 말이 가능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지. 우리는 원인 없는 사건 발생을 상상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과 관계가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야.
문: 자연은 마음이 없으니까 반응할 수 없지만, 사람은 마음이 있는데 왜 그렇게 삐뚤어져 있습니까?
M: 삐뚤어진 원인들이 또한 자연적이지. 유전, 환경, 등등이야. 자넨 비난하는 데에 너무 민감해. 타인들을 염려하지 마. 자기 마음부터 먼저 다루라구. 자기 마음도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걸 깨달으면 이원적인 생각도 없어지지.
문: 제가 추측할 수 없는 희한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마음이 자연의 일부일 수가 있습니까?
M: 왜냐하면 자연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야. 마음이 없으면 자연이 어디 있겠나?
문 자연이 마음속에 있고 마음이 저 자신의 것이라면 저는 자연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그렇지 못합니다. 저의 통제권을 벗어난 힘들이 저의 행동을 결정하고 있으니까요.
M: 관찰자로서의 태도를 길러봐. 그러면 무심(無心)이 스스로 통제력을 가져다준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관조의 상태는 주체적인 힘이 가능한 거야. 거기엔 수동적인 것이 전혀 없어.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