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구는 인색하다. 남성중심의 구시대적 잔재가 뿌리 깊다. 한국농구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진
여자. 그러나 결국 일본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 그녀는 아직도 한국농구 첫 여자 지도자를
꿈꾼다. 1970년대 한국여자농구를 이끌고, 1980년대 이후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그녀. 한국농구가 몰라본 불운한 女子 이옥자(58)다.
호기심 넘쳤던 소녀, 멋을 아는 여자
이옥자는 호기심 많던 소녀였다. 중학교에서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이 체육관이었고, 책보다 운동화 사는 것이 먼저였다. 스포츠의 피가 흐르는 가족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농구장으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호기심에 선생님 몰래 수줍은 외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농구에 있어서만은 악바리였다. 남몰래 농구 연습을 하기 위해 담장을 넘었고, 잠시도 농구공을 손에서 떼지 못했다.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후 태릉선수촌에서는 귀했던 커피의 여유를 즐길 만큼 멋을 아는 여자였다.
현재 태릉선수촌 지도위원으로 계시는데, 요즘 생활은 어떠신가요? 좋아요. 공기도 좋고요.
새벽마다 일어나서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운동도 하고요. 사실, 제 적성에 맞지는 않아요.
전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여기는 조용하니까요. 그래도 적응이 돼서 이젠 편안해요. 김인건 총장님도 농구인 출신이어서 더 편하죠.
왠지 농구와 어울릴 같지 않은 외모신데, 첫 인연이 궁금합니다. 상당히 바보 같았어요.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웠어요. 위로 오빠가 한 명 있고 아래로 남동생 둘이
있었기 때문에 전 사립학교를 갈 형편이 안됐어요. 등록금 때문에 무학여중 시험을 봤죠. 합격자 발표 날 혼자서 2원50전을 들고 학교에 갔는데, 제 이름이 있더라고요. ‘효도했구나’ 생각했죠. 교정이 어떤지 궁금했어요. 운동장도 끝없이 넓더라고요. 체육관이 하나 있었는데, 소리가 나서 빠끔히 열어봤죠. 그게 농구인지도 몰랐어요. 선배한테 물어 ‘나도 이거 할 수 있느냐’고 물었죠. 내일부터 운동화 신고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그길로 집으로 달려가 합격통지와 함께 운동화를
사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농구를 시작하게 됐어요.
학교 첫 방문부터 농구와 인연의 끈이 닿으셨네요. 원래 운동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활동적인 데가 있었나 봐요. 그런데 평생 할 줄 알았나요? 운동신경은 있었던 것 같아요. 오자미나 고무줄 같은 놀이는 좋아했으니까요. 초등학교 때는 미니 농구라는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중학교 입학하면서 하게 된 거죠. 선배들은 체육관에서 하고 후배들은 아웃코트에서 쇳가루 뿌려가며 했을 때에요.
농구의 어떤 매력에 빠져드셨나요? 농구를 처음 봤을 때 희한하게 생각한 것은 공이 그렇게 큰데 작은 링에 집어넣는 거였어요. 사각형 모퉁이 끝을 맞추면 무조건 들어가는 거죠. 그 안에 넣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합격자 발표가 12월에 있었는데, 3월 입학하기 전까지 농구에 푹 빠졌죠. 정말 재밌더라고요. 지금도 농구를 가르치면 재밌으니까요. 녹초가 되도요. 지금도 NBA, 배구, 골프 다 좋아하는 거 보면 스포츠를 좋아하긴 하나 봐요.
처음 시작을 했으면 경기에서 뛸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운동화만 신고
옆에 서서 구경했죠. 그러다 입학하면서 바로 뛰기 시작했어요. 농구 센스가 있었나 봐요. 2학년 때부터 스타팅 멤버로 들어갔으니까요. 가드를 맡았는데 코트 위 살림을 맡은 거죠. 제 적성에도 맞아서 비교적 무난하게 소화했던 것 같아요.
집안 내력인가 봐요. 어려서부터 스포츠에 관심을 갖고 운동 센스가 뛰어나기 쉽지 않은데요. 집안이 모두 스포츠 모드죠. 오빠가 13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미스터 코리아 출신이라서 몸이 정말 좋았고, 동생이 지금 연세대 야구 감독이니까요. 아버지는 야구 전문가 수준이죠. 막내 동생도 운동했으면 잘했을 거예요. 조카들도 다 잘하니까요.
센스만 있다고 잘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만큼 노력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연습을 하셨나요? 지는 것을 싫어했어요. 전차 타고 다닐 땐데 드리블 잘하려고 고무공을 하나 사달라고 해서 학교 왔다 갔다 하면서 공을 튀기고 다녔어요. 이왕이면 폼을 예쁘게 하려고 거울보고 슛 연습도 하고요. 농구가 재밌는 게 처음엔 굉장히 단순해요. 붙으면 뚫고 떨어지면 던지는 거니까요. 그러다 동료들 움직이는 것도 봐야 하고, 선수들 컨디션도 체크하고, 벤치와 커뮤니케이션도 하다보면 복잡해지는 거죠.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다시 또 심플해져요. 눈썰미가 없으면 못하죠. 센스가 필요하니까요.
가드를 맡으셨는데, 어떤 스타일이셨나요? 전 센스로 농구를 하는 편이었어요. 스틸과 어시스트를 굉장히 많이 한 선수였거든요. 득점하는 것도 조금 지나니까 재미가 없더라고요. 패스를 해주는 것에 흥미를 더 느꼈죠. 나중에 일본에서 뛸 때는 가드면서도 득점왕을 거의 차지하기도 했었고요. 게임이 안 풀리면 제가 뚫고 들어가야 하니까요.
고등학교 진학은 무학여고가 아닌 숭의여고로 옮기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면요?
무학여고와 숭의여고 둘 다 잘했을 때에요. 봉투에 쌀을 조금씩 넣어가지고 모아서 합숙할 때죠.
숭의여고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계속 있었어요. 금전적으로도 조금 혜택을 줬고요. 집하고도 가까워서 숭의여고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집이 어려워서 교통비도 만만치 않았거든요.
당시 숭의여고가 우승을 휩쓸 때잖아요? 적응이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숭의여고가 전승할 때였죠. 우승 못하면 안 되는 분위기였고요. 멤버가 창창했어요. 전 그냥 굴러들어온 돌이었죠.
타교에서 들어왔으니까요. 실력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못 살아나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제 별명이
‘도둑년’이었어요. 무학여고가 담이 높지 않아 새벽마다 담 넘어서 연습을 했거든요. 다른 사람들
모르게 연습을 하려고요. 그런데 겨울에 걸렸죠. 눈이 오면 발자국이 남아 알게 되거든요. 키가 작았기 때문에 슛 연습은 기본이고 지적 받았던 것은 다했어요. 연습은 정말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 기억에 고등학교 때 한 번도 진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 미국에 계신 김정욱 선생님이 전승을 할 때마다 아무 말 없이 데려가 회식을 시켜주시기도 했죠.
여고시절 추억이 궁금해요. 호기심이 가장 많을 때잖아요? 지금 여자프로배구 감독이 된 조혜정이 우리 학교 배구부 친구였어요. 농구부와 배구부는 원래 상극이었는데, 저랑 혜정이가 상급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죠. 그땐 체육관에서 휴대용 전축 틀어놓고 춤추고 놀다가 선생님한테 걸려서 혼도 많이 났죠. 해서는 안되는 짓도 많이 했어요. 학생 땐 왜 그렇게 수업 들어가는 게 싫었는지 몰라요. 영화도 보려고 수업도 빼 먹고요. 특별히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순간순간 기질을 발휘해서 체육관에서 노는 거죠. 하급생들은 망보고요. ‘선생님 떴다’ 하면 농구하는 척 하기도 하고요. 정해진 룰을 크게 벗어나진 못했고요. 배구부와 어울려 그렇게 체육관에서 노는 거죠.
그 당시면 선후배 관계도 상당히 엄격하던 시대잖아요. 김재순, 조경자, 김정희 등 대표팀에
계속 있었던 언니들인데, 굉장히 잘했어요. 제 위로 선배들이 6명이 있어서 솔직히 힘들었어요.
선후배들 관계도 엄격했죠. 숭의여고는 특히 유명했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다 잘 지내는 사이죠.
관사로 쓰던 것을 농구장 숙소로 개조해서 사용했었는데, 괴팍한 선배가 기억나요. 소주를 좋아하던 선배였는데, 제가 열심히 사서 날랐죠.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이 아닌 실업팀 상업은행으로 들어가셨어요. 이강숙, 황선해 등 실업팀
언니들이 워낙 쟁쟁한 멤버들이 많았어요. 한양대 간다고 입학할 때까지 있다가 돌아왔죠.
한양대 멤버도 괜찮았거든요. 제가 드래프트 1호에요. 처음엔 적응을 잘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농구와는 너무 달랐어요. 스피드부터 차이가 났으니까요.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잘해야 했죠. 돌아가신 이상훈 선생님도 굉장히 잘해주셔서 적응을 할 수 있었고, 대표팀에도 뽑히게 됐죠.
실업 2년차 때 국가대표팀에 발탁이 되셨어요. 첫 태극마크여서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아요. 태극마크 발표하던 날 기분을 잊지 못하죠. 엄마한테 빨리 가서 자랑하고 싶은데, 버스가 왜 이렇게 느려요? 그땐 돈보다 명예가 우선이었거든요. 대표팀이 되고 태릉선수촌 들어가면 6~8개월 정도 합숙을 했어요. 한 번 들어가면 몸이 달라져서 나와요. 대표팀을 꼭 하고 싶은 이유였죠.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 돼서 나오니까요. 패스 나가는 것부터 달랐어요.
대표팀 시절 태릉선수촌에서의 추억이 있다면요? 전 태릉에서도 별나게 놀았죠. 그때는 커피가 귀할 때였어요. 팬이란 사람이 처음으로 커피를 갖다 줬는데 맛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커피포트 갖다놓고 TV로 미니시리즈 ‘계절의 여왕’ 보면서 커피를 마셨죠. 신문을 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는데, 신문으로 전등에 갓을 씌우고 선수들이 제 방에 모여서 커피를 마셨죠. 제가 커피를 맛있게 타서 별명이 ‘이마담’이었어요.
국가대표팀에서는 5년간 활약을 하셨어요. 대표팀 은퇴 계기가 있었다면요. 세계선수권에 참가를 할 때였나 그래요. 비행기 타고 배 타고 이태리 시실리로 갔었는데, 노장이라고 많이 안 뛰게 하는 거예요. 한 번도 스타팅을 놓친 적이 없었거든요. 이제 그만둬야 겠다고 느꼈죠. 그해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한 뒤 미국 유학을 떠났어요. 수모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은퇴식도 했었죠. 마지막 경기 은퇴식을 하는데 조혜정이도 와서 축하해줬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체념이 빨라서 한 번 결정한 것은 신경 안 쓰고 접어요. 선수생활을 그렇게 끝냈죠.
선수 시절을 돌이켜보면 어떤 스타일의 가드였다고 생각하시나요? 굉장한 가드는 아니에요.
대신 꼭 필요한 가드였어요.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를 메워야 하는 타입이었던 것
같아요. 평범한 선수에서 한 단계 정도 위라고 할까요? 성격은 원만한데 보스 기질은 있었죠.
소심하면서도 그런 면이 있었어요. 현역 생활도 재밌었지만, 가르치는 것을 더 좋아했었던 것 같아요.
恨 많은 지도자 人生
한국프로스포츠 사상 첫 여성 지도자 탄생 소식이 들렸다. 아쉬웠다. 농구가 아닌 배구였다.
이옥자에게도 조혜정(GS칼텍스 신임 감독)과의 인연은 뜻 깊다. 숭의여고 시절부터 이어온 끈이
둘도 없는 인생의 친구가 됐다. 그러나 걸어온 길은 비슷하다. 조혜정이 유럽행을 택할 때 이옥자는 일본으로 떠났다. 국내로 돌아와 지도자 수업을 받은 이옥자는 2000년대 일본 샹송화장품 감독으로 2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귀국과 함께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아 2007년 아시아선수권 우승을 이뤘지만 거기가 끝이었다. 이후 이옥자의 이름은 지도자 명단에 없었다.
지도자로서 한 획을 긋기 시작하셨어요. 이력이 독특한 게 일본에서 먼저 선수 겸 코치를
했습니다. 이후 국내 지도자 생활을 하다 다시 일본행을 택하셨고요. 샹송화장품 가와무라 사장이 한국이 왔다가 저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했어요. 절 보자마자 샹송화장품으로 와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미국으로 가려고 원서까지 냈는데, 미국에서는 와서 테스트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샹송화장품은 연봉도 괜찮았고, 꼭 미국이 아니라도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땐 샹송화장품이
외국선수를 많이 넣었어요. 아마 제가 마지막일 거예요. 샹송화장품이 1부 리그 8개 팀 가운데
4위정도 하는 팀이었죠. 선수층이 얇아서 제가 뛰던 2년 동안 우승을 못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감독으로 가서는 우승을 시켰죠.
일본에서 상당히 힘든 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적응도 쉽지 않았을 것 같고요. 처음엔 말도
못하게 스트레스가 많았죠. 가르치는 입장에서 이해를 시켜야 하니까 사전을 들고 다니면서 직접
얘기를 했어요. 통역도 없었기 때문에 스트레스 때문에 변비도 올 정도였죠. 그렇게 고생한 게
지금은 많은 도움이 되죠.
일본에서의 생활에 부담을 느끼진 않으셨나요? 성격이 징징거리면서 못하는 성격이에요.
최선만 다하면 되는 거죠. 안 되면 할 수 없고요. 그렇게 결과에 연연해하는 스타일도 아니고요.
계획 세운대로 밀고 나가는 거죠.
일본에서의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었다면요? 안 좋을 때도 기억나지만, 이기고 좋을 때가
아무래도 기억에 남아요. 샹송화장품 마지막 경기였는데, 임영보 선생님이 계셨던 잘 팀과 사제지간 대결을 펼쳤어요. 4강 플레이오프 기자회견을 하고 또 챔프전 기자회견을 했어요. 한국사람 둘이 나가서 얘기를 하는 거죠. 저로선 부담스런 부분이 있었죠. 그래서 언제나 선생님 먼저였어요.
첫 번째 경기는 이겼는데, 두 번째 경기에서 전반만 18점차로 졌어요. 전 항상 비상무기를 갖고 있어요. 물론 수비변환인데, 그 점수를 뒤집어서 이겼어요. 차분한 제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좋아했다는 거 아니에요. 더블팀 인터셉트, 더블팀 인터셉트, 쓰리 포인트…. 그렇게 이겼어요. 요즘도 그때 얘기를 많이 해요. 선생님께는 아무래도 죄송한 마음이 있었죠.
일본에서의 생활을 접고 국내무대로 복귀하셨어요. 곧바로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으셨어요.
현역 포함 8년을 일본에서 했는데, 이 정도 경험을 했으면 여자지만 한국 가서도 될 거라 생각했어요. 일본에서는 연봉이 파격적으로 올랐는데, 그거 다 버리고 한국에 왔죠. 오자마자 대표팀 코치를 하니까 별 얘기가 다 나왔어요. 어차피 부딪쳐야 될 일이라 생각했고, 다음에 또 기회는 안 줄 거라 생각했어요. 욕을 먹더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여자가 적이더라고요. 인천 아시아선수권에서 티켓을 땄는데 올림픽을 못 갔어요.
한국농구와 일본농구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었다면요? 국민성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일본 애들은 교과서 농구를 해요. 설명을 해준 것은 그대로 하는데, 변화를 주지 못해요. 오로지
그것만 하는 거예요. 교과서 농구가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니까 정말 재밌어했어요. 변화를 주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죠. 한국 같은 경우 (정)선민이한테 작전 지시를 하더라도 상황이 안 되면 다른 것을 하잖아요? 일본 애들은 수비가 있든 없든 무조건 작전대로 가야 되요. 윗사람이 얘기하면 그대로 해야 해요. 아주 큰 차이죠. 수비에 막혀 부딪쳐 박더라도 그 길로 가요. 그래서 옵션이 많이 필요해요.
한국여자농구의 위기라는 말이 있어요. 선수가 없다는 얘기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단한 위기라고 보는데요. 이젠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왔어요. 일본은 아마추어에 여자농구팀이 3천개가 있어요. 한국은 20개 정도죠. 그것도 한 팀당 10명이 넘는 선수가 없다는 것은 정말 심각해요. 또 애들을 키워내는데도 프로 와서 5년은 걸려요. 일본은 천재 같은 센터가 한 명 나왔어요. 원 핸드로 덩크를 하고 앨리웁도 하더라고요. 한국은 선수 빈곤이 걱정이에요. 그래도 한국은 일본을 충분히 이길 거예요. 농구는 그렇게 쉽게 못 쫓아와요.
얼마 전 여자프로배구에서 사상 첫 여자감독이 선임됐습니다. GS칼텍스 조혜정 감독이죠.
숭의여고 동창이시잖아요? 느끼는 부분이 많으시겠어요. 전 결정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조혜정하고는 자주 만나 그 문제로 의논도 많이 했죠. 굉장히 영리한 친구예요. 열정도 있고 잘할
거예요. 종목을 망라하고 한 두 사람씩 나오기 시작하면 농구도 그런 날이 오겠죠. GS칼텍스에
고맙더라고요. 처음이라는 시도 자체가 중요한 거니까요.
국내 여자프로농구에 있어서 여자 지도자의 필요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반드시
여자 지도자가 있어야 된다고 봐요. 남자가 아무리 잘 알아도 여자들의 심리를 잘 몰라요. 애들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파악하고 있죠. 경험과 노하우 있는 지도자감도 많아요. 제가 아니더라도 기회가 되면 여자 지도자가 꼭 나와야 해요. 선진국들은 모두 여자 지도자가 있어요. 왜 그렇게 하겠어요? 저도 국내 프로구단에서 신체검사까지 받고 계획서까지 냈었어요. 사실 다 된 줄 알았죠. 그런데 참 힘들더라고요. 제가 감독을 한다고 잘한다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여자 지도자는 빨리 나와야 해요. 시대가 어느 시댄데요. 한국은 상당히 인색하더라고요.
그렇다면, 프로농구에서는 왜 나오지 않을까요? 여자 마음은 여자가 더 잘 알 것 같은데요.
오히려 여자 선수들이 더 꺼려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어요. 다루기 힘들다는 것 때문에 나온 얘기
같은데, 인정은 못해요. 대표팀 코치를 하면서도 그런 것은 전혀 못 느꼈거든요. 여자 선수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아는 것은 여자 지도자에요. 잔소리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어요. 요즘 애들이 30대가 대부분인데, 잔소리해서 될 것도 아니고 또 누가 그렇게 해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선수들이 있다면 나중에 부메랑이 돼서 다 돌아오는 것을 알아야죠. 일본에 있을 때도 한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차별을 조금 느낀 적은 있었는데, 성별 때문에 곤란을 겪거나 그런 적은
없었어요. 그쪽 사회는 잘하면 받아들이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통 여자농구에 보이지 않으세요. 다시 도전을 해 볼만도 한데요. 올해는 한 번도 안 나갔어요. 이상한 소문이 생기고 하니까 싫어서요.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일하고 싶으면 나가서 해야 하는데, 바보 같아서 그런 것도 못해요. 그래도 부딪쳐 봐야죠.
국내 여자프로농구 첫 여자 지도자로서 꿈도 아직 있으신가요? 버렸다고 얘기 할 수 없죠.
제가 농구를 선수로 뛴 게 15년, 가르친 건 28년이에요. 가르치는 일이 더 재밌어서 그랬나 봐요.
지금도 NBA 보면서 좋은 패턴 있으면 메모지에 그려나요. 후배들이 물어보면 답을 하기도 해야 하니까요. 계속 준비를 하는 거죠. 경험이나 노하우 같은 것은 어느 순간 누구에게라도 전수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기회가 한 번 주어진다면 지금껏 쌓아둔 제 농구를 압축해서 한 번 보여주고 싶어요. 아마 남자감독도 저만큼 경력 있는 사람은 없을 걸요? 늙은 쥐가 독을 뚫어요.
글 서민교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본인 제공
2010-05-28
첫댓글 여자선수가 여자감독을 싫어한다............보편적으로 그러더라구요 ㅠㅠㅠ
여자선수들이 여자감독을 싫어하는 이유 중에 여자를 너무 잘 알아서 싫다고 하더군요....잔소리도 심하고 사생활 침해 수위도 높고....뭐 이런건 우려심에서 우러나는 선입견일수도 있겠죠.
2007 ABC에서 이옥자 코치님이 전술을 많이 짰다고 들었어요.
늙은 쥐가 독을 뚫는다 ㅋㅋㅋ명언
우리은행 감독직에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아쉽게도 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