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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장 권세와 준비와 영광은 주의 것
Ⅰ. 지금 직면한 피할 수 없는 문제
1. 미래의 한 백성
우리는 과거의 한 백성이 아니다. 그리고 결코 우리 자신이 과거의 한 백성이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미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최대의 가장 심각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날들은 분명히 앞에 있다. 우리는 영감으로 개괄된 그 큰 최후의 전진의 문 어구에 서 있다. 서곡에 불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장들을 포함해서 연구해 온 이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로 지나가 버렸다. 아무것도 이것들을 변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를 변할 수 있고 변화시킬 것이다. 그것은 행복이냐 저주가 되든지 간에 중대한 점이다. 그것은 그 의미의 중요성을 우리가 평가하도록 남겨두며 그 값비싼 교훈에서 유익을 받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항상 앞으로 위로 향상하도록 손짓하는 미래로 견실하게 전진하게 된다.
2. 과거의 최고의 교훈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분명하게 보고 참되게 이해하도록 명백한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형성한 확신에 조화 있게 행동할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이 페이지들을 통해서 연구해 온 그 큰 영적 논제들에 관한 기초적인 난관은 우리의 이해의 한계에 그렇게 많이 달려 있지 않다. 도리어 그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에 대하여 일어설 준비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면하도록 인도하신 새로운 문지들과 기대들에 호응할 우리의 결단에 있다. 그것이 어렴풋이 나타난 더 큰 도전이다. 그런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결과들, 큰 축복이 아니면, 비극적인 소실들을 초래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우리 앞에 제시해 둔 바와 같이 과거의 전반적인 문제를 직면하게 되기 전과 같은 일이 결코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진지한 사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책임을 수반한다. 우리가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볼 때 확신, 용기, 행동이 긴요한 것들이다. 지금 분명히 우리를 대결하고 있는 이 근본적인 영적 문제들에 무관심, 중립이 있을 수 없다. 아직도 서 있을 수 없고 그늘에 있을 시간이 없고 곁길에 있을 수 없다. 현상 유지 상태에 자아 만족, 자족, 조류에 흔들리는 범인이나 문제들의 곁에 서는 일은 결코 오늘날 특히 내일의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여파와 후광과 함께 1888년의 교훈은 잔지 일시적으로 회고할 제목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내일을 향하여 전진할 때 행동을 위하여 긴요하다. 그 원칙들은 남아 있는 모든 시대를 위하여 긴요하다. 그리고 시간은 달아나고 있다.
3. 그의 00의 말에 반응함
1888년의 논쟁과 승리는 우리의 유산이요 오늘날 우리의 책임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일을 위한 우리의 표준이 되었다. 88년에 해설되고 높여진 진리들은 새로운 최후의 강조를 위하여 우리에게 지워진 책임이 되었다. 그 충분한 의미를 알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 그리고 그 다음에 이용할 수 있도록 된 신성한 준비들 밑에서 앞에서 전진하는 것이 이 연구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왔다. 과거의 교훈들은 특별히 우리를 위하여 있는 것이요 다른 아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과를 불구하고 원칙과 옳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충성으로 관철하지 안 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하늘의 축복이 우리 위에 임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권능의 날에 반응을 나타낼 한 백성을 갖고 계신다. 그것에 관해서 우리는 확신한다. 그러나 각 개인이 그 모든 것과의 그의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것이 우리 각 사람을 위한 진지한 면이다.
Ⅱ. 과거, 현재, 영광스러운 미래
1. 과거는 미래에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매우 유익한 이 운동의 발생, 발전과 변천을 나타내는 과거 여러 해 동안의 우리 교회사의 펼쳐진 두루마리를 주목해 왔다. 우리는 이제 마지막 부분, 아직 미래에 있는 중대한 부분의 묘사에 도달했다. 우리는 1844년에 시작된 연속적인 우리 역사를 훑어보았다. 그러므로 그 전반적인 묘사가 우리 앞에 공정하게 있다. 우리는 여러 시대를 구분 짓는 집중된 사건들을 검토했다. 우리는 주요 전환점들과 그렇게 만든 요인이 무엇인가를 주목했다. 그리고 명백히 윤곽을 보여주는 시대들고 그렇게 구별되는 사건들의 집단을 관찰했다. 그 뛰어난 특성들이 우리 앞에 연대적인 파노라마 중에 공개되었다. 큰 빛들과 그늘들이 생생하게 대조되었다. 한 백성으로서 우리의 경험들 중의 고지들과 골짜기들이 대담한 강조로서 뛰어난 그 큰 1888 구분(Before Confrontation과 After Declaration)으로써 명백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충만함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제시함이 그 차이를 만들었다. 이 기별의 중대하고 영구적인 특성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점점 더 명백하게 되어 왔다.
2. 지금 비판적인 점에서
과거의 교훈들은 그들의 기별을 말해왔다. 그 뜻은 명백하다. 우리는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의 입장을 1888년의 빛과 그 여파의 빛 중에서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저주를 초래한 약점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앞에 있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서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입장을 달아보고 그 다음 미래를 직면하는 우리의 번영들과 우리의 실패들을 더 잘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도달한 비판적인 지점이다. 우리는 번영들과 우리의 실패들을 더 잘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완고해서도 안 되고 낙망해서도 안 된다.
3. 하나님의 간과의 축복
우리는 반드시 다만 인간적인 희망과 사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권고하고 길을 지시하기 위해서 포위하는 파멸들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두신 특별 선견자의 눈을 통하여 장차 올 일들의 코스를 알도록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단지 인간적인 통찰력과 이용할 수 있는 예지 이상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운명은 행복하였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간과의 확실한 축복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 하나님의 지혜와 권면은 필요가 생길 때 우리의 필요에 응하도록 이용할 수 있게 해오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우리를 인도하신 한 손이 있고 계속 우리와 함께 하신 한 분이 계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같은 신령한 인도가 없이 하늘로 가는 여행의 남은 부분을 우리가 홀로 가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백성은 행복하여라. 만일 우리가 신령한 권면에 유의하고 예정된 길을 걸어간다면 그렇다.
4. 과거의 실수의 반복을 피하라
잠시 과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과거를 배우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과거를 탐구해 왔다. 우리는 어떤 거침돌들과 단점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를 도와줄 안내서를 찾아냈다. 우리는 이리하여 우리 각자를 위한 하나님의 신앙의 큰 영원한 진리들에 세워질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분리로부터 연합을 얻기 위하여 과거의 연약함에서 힘을 모으기 위하여 종전의 실패에서 성공의 00의 발견하기 위해서 연구해 왔다. 우리는 우리 선구자들의 건전한 빛을 탐구하는 정신을 모방할 것이며 그 발전한 빛 가운데서 걸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운동이 싹 틀 때로 돌아가서 나는 단 한 개의 오유를 위하여 일천 개의 오류를 기쁘게 포기하겠다고 말한 J. N. Andrews의 유서 깊은 말에 유의할 것이다. 우리는 확증을 세운 진리의 명백한 명령에 끝까지 복종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직면할지도 모르는 비슷한 위험들, 바로 우리 앞에 있는 위기들을 인식하고 피하도록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역사는 항상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함정들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예언의 신의 탄원에 대하여 어떤 이들이 더디게 반응을 보인 것은 반드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온 마음으로 과거에 유의했을 때 과거의 변화 무쌍한 세월을 통해서 우리의 인도하시는 봉화가 되어 왔던 교회에 보내는 그 신령적 은사의 영감적인 교훈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오늘날의 안내를 위하여 그 권면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직면하고 있는 빽빽한 위험들과 증가되는 복잡한 일 때문에 특히 내일을 위하여 예언된 난관 때문에 더욱더 연구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예언의 신의 부르심과 주의사한들 특히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명령들과 권면들을 새롭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우리는 현재의 문제들에 관한 빛이 없이 방치되지 않았다. 물론 무시간적인 00들이 모든 시대에 적용하도록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간의 부분에 바로 오늘날에 적용되는 권고와 적용을 위하여 특별한 권면도 역시 주셨다. 이것들을 등한히 함은 우리의 파멸이다. 이것들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은 재난을 초청하는 것이다.
5. 예언의 신의 권면의 특별한 시간 관계
예언의 신의 권면들의 감명 깊은 시간 관계가 있다.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교회 시작부터 매 계단마다 항상 적합하고 감명 깊은 시간 관계가 있다.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교회 시작부터 매 계단마다 항상 적합하고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00들이 있다. 다른 것들은 1888년의 위기의 해까지 해당되고 혹은 1901년까지 연장된다. 또 어떤 것들은 과거나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요, 오늘날을 위한 것들이 있다. 이것들을 우리는 반드시 탐구하고 주의하고 따라야 한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우리는 즉시 현재를 위하여 주신 이 안내서들을 명백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잠복한 위험들과 산적한 곤경들이 과거에서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그 시간의 복잡성과 혼란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우리는 겸비한 맘으로 개인적으론 연합적으로 오늘날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권면들을 새로운 연구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힘과 견고성은 그 청사진의 이 세 목들을 따르는 데에 달릴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그런 연구가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철저하게 조직적으로 이행되지 못한 것을 개탄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렇게 등한한데 대한 변병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그런 연구로부터 무리의 방향 감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 계시된 권면들의 인도 하에서 함께 연합하여 전진해야 한다.
6.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함
그러나 다른 것이 더 있다. 우리는 과거의 교훈들과 확신들뿐만 필요한 것도 아니요 오늘날의 필수적인 것들만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장차 올 일들의 개관, 모형, 시야, 최종적인 한계, 끝마치는 강조,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끝마침을 표시하는 보호들(거기에 관련된 우리 각자 자신 생활들에 관한 영감의 파노라마의 예고를 알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신실하게 받고 따라야 한다. 그리고 얼마나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 계획들과 기대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가! 얼마나 우리가 그 큰 완성을 위한 우리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인식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모든 시대 중에서 최대의 일이 바로 우리 앞에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고(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최대의 필요를 제시하는 것같이) 똑같이 참으로 필요 되는 능력과 총명이 우리에게 보증되어 있다.
Ⅲ. 장차 올 것들의 모형과 강조
1. 전례 없는 상태가 불안하게 다가오다
우리가 미리 경고를 받은 그 최후 운동들은 점점 신속하게 되도록 되어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든 가능성 중에서 조만간 우리 자신에게 더 많이 던져질 것이다. 더욱 많이 개인적인 결정들을 해야 할 것이며 어둑 개별적인 인도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교훈을 그렇게 배워왔어야 하고 이전에 기록한 곤란과 전례가 없는 권면의 큰 원칙들에 확립되어야 한다. 이같이 개인의 힘은 성령의 직접적인 권능과 주관 하에서 연합한 영향의 전진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강력한 권능을 위한 택한 통로가 될 때 의로 사업을 홀로 완성할 수 있게 하실 하나의 방편이신 성령의 주관 하에서 전진할 것이다. 그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유명한 사람들이 우리와 연합하여 그들의 재능과 영향력과 재물을 세상을 위한 우리 사업의 끝마치는 국면에 바칠 때가 될 것이다. 그것은 약속되고 예언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다.
2. 논쟁은 더 적게 그리스도는 더욱 많이
우리의 최후 증거에서 강조점은 분명하게 개관되어 있다. 첫째 것들은 첫 번째 두어야 하고 우리의 모든 증거의 맨 앞에 그리스도를(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을 두어야 한다. 더 넓은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 모든 것이 골자와 진수를 구성한다. 논쟁이 더 적고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에 관해서 더욱 많이 말해야 한다. 우리는 추상적인 긴요치 않은 것들에 더 적은 관심을 갖고 어떤 것들에 대하여 더 적게 말하고 큰 본질적인 것들에 더욱 많은 집중을 해야 한다. 전가시킨 의는 물론 나눠주신 의의 경험, 구원하는 능력은 물론 보증하는 능력을 체험함은 생생한 사실이 되어야 한다. 모든 교리에 있어서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물론 속에 형성된 그리스도는 완전하고 가능케 하시는 균형에 있어서 최상의 예수 믿음과 더불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이중의 준비이다. 우리는 영원한 복음은 인류에게 보내는 우리의 마지막 기별의 진수요, 능력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참으로 셋째 천사의 기별의 알짜 진리이다. 이것들은 장차 올 것들의 모형을 이룬다.
3. 어떤 이는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 엄숙한 경고의 기록이 있다. 그 개념은 뚜렷하다. 미래의 도전은 틀림없고 모형은 분명히 이룩되었다. 우리가 그것을 등한시하고 경홀히 여기면 파멸이다. 만일 우리가 냉혹한 현실의 압력에 너무나 몰두한다면 우리는 곁길로 갈 수 있고 최후의 축복을 상실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어떤 이들은 뒤에 처지고 혼돈되고 잃어버릴지라도 반응을 보이는 목사와 백성은 전진할 것이다. 엘렌 화잇의 첫 번째 계시는 그것에 관해서 경고했다. 그 빛이 있는 길에서 탈락되어 캄캄한 세상 아래로 떨어져 나가는 일을 경고했다. 그렇다. 비극적으로 어떤 이들의 슬픈 탈락이 있을 것이다. 찬란한 빛이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대치될 것이다. 다른 이들이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들어와서 그들의 자리를 채울 11시에 들어온 일꾼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전진을 할 그 시간에 우리에게 가담할 주님의 남은 자들을 가지고 끝날 것이다.
4. 길을 잃어버린데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떨어져 나갈 필요는 없다. 뒤에 떨어진 데 대하여 변병이 없다. 재림 운동은 신속하게 위로 앞으로 행진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머뭇거리거나 다리를 질질 끌거나 제멋대로 하고 완고하게 되거나 하는 자들은 물어볼 필요 없이 그 길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길을 잃는데 대해 변명이 없다. 우리는 그 도성에 우리 눈을 고정시켜야 하고 지시된 길에 우리 발을 디디어야 한다. 이것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밖에서 오는 유혹보다 속에서 오는 유혹을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1SM 122). 이것은 이미 스스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증가될 것이다.
5. 베드로의 회심과 오순절
그 길에 있을 또 다른 사건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십자가의 위기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져버린 것과 비슷한 접이 있을 수 있다. 어떻게 유다는 배신했으며 베드로는 자기 주를 부인했고 어떻게 제자들은 주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일에서 도망쳤는가! 실제적으로 위기에서 그들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인간의 이야기를 비극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복음서 기록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 사도들은 그 십자가의 시간을 손상시킨 그 유감스러운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순간적인 흔들이는 경험은 그 전반적인 묘사 중에서 잠깐 동안의 사건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그 후에 생긴 일이었다.
6. 일시적인 넘어짐이 아니요 항구적인 00이다
감명 깊은 돌아옴이 있었다. 그 결과로서 신약성서 중에 위대한 장면들이 뒤따랐다. 온 교회사 중에서 최대의 영적 발전이 유다는 탈락되었으나 베드로가 설교자가 되어 오순절을 뒤따랐다. 그 전의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짓는 것은 최후의 결과이다. 강조해야 할 것은 일시적인 넘어짐이 아니요, 궁극적인 전진이다.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1888년 이후의 흔들림이 주요점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다만 지나간 탈선에 불과했다. 돌아옴과 그 직후의 늦은 비의 경험들은 이른 비와 견줄 만한 큰 사본이다. 그것은 승리의 부활이 될 것이다. 이 교훈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정당한 곳에서 강조해야 한다.
7. 용기 있는 사랑스럽고 통찰력 있는 사람들
분명한 비젼을 가진 사람들, 지도력이 있고, 완전한 헌신과 충성의 사람들이 이전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 용기와 사랑스런 사람들, 참된 능력을 가진 사람들, 그들이 발견할 때까지 찾는 사람들, 이스라엘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들이 요구된다. 하늘의 지혜는 이용할 수 있다. 헌신한 백성의 그들을 통해서 그의 마지막 큰 계획을 성취할 백성을 찾고 계신다. 그리고 그 분은 당신의 남은 교회와 그리고 그 남은 자들 중에서 그런 자들을 찾으실 것이다. 주의 기대에 응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주의 예정된 방법으로 행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호응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행될 것이다. 그리고 반응하는 기구들은 그것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그들 중에 끼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에게로 향할 것인가? 나는 조건 없이 호응할 것인가? 나는 나를 과거의 그릇된 관념이나 과거의 제한들, 과거의 사슬들을 끊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8. 하나님께서 최후 승리로 인도하신다
문제들과 두 갈래 길이 우리 앞에 분명히 있다. 우리는 과거에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길을 우리가 잊어버리는 일 외에는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LS 196). 그리고 현재 주의 기대를 인식하고 호응하는 것에 실패하는 것 외에는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미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에 만 일 주께서 우리의 생애를 완전히 주관하신다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인도해 오신 그 같은 손이 최후의 승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그 사명을 완성할 것이다. 중대한 문제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나 개인적인 관계는 무엇이 될 것인가이다. 내가 그 소리를 증가시키는 일을 도울 것인가? 내가 그 촉진시키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 마지막 말들의 심한 흑암은 의의 태양의 꿰뚫는 빛이 그 최후 폭풍의 두터운 캄캄한 그름을 뚫을 때 하나님의 빛에 의하여 밝아질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의 빛이 둘러싼 흑암을 몰아낼 때 인류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한 백성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9. 영광의 광채는 비극적으로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계 18:1-4의 감동적인 기별이다. 그것은 그 큰 완성이 있기 전에 온 세계 앞에서 명백히 지혜롭게 완전히 드러난 최후의 문제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마지막 승리, 마지막 증가하는 권능의 폭발에 관한 영감적인 묘사이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는 비극적으로 미치지 않는 영광의 빛 중에서 끝마칠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실패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발산하는 증거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할 수없다. 그 다음에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그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책임은 무엇인가? 우리 스스로 어떤 특별한 양상에 대하여 언급해 보자.
Ⅳ. 지체하는 일 때문에 직면하는 위기와 상태
1. 변경된 상태는 새로운 접근을 요한다
오늘날 변화된 상태와 변경된 태도에 적응하기 위하여 우리의 접근 방법의 개선이 긴요하다. 적지 않은 수효가 초창기 수십 년간의 접근법과 기교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놀랍게 변화되었고 이 상태는 촉진될 것이다. 벌써 아슬아슬한 속도로 진행되어 왔고 궤변적인 태도가 강력히 시행되어 왔다. 말씀의 영감, 구원의 사변적 사실들과 준비들, 죄에 관한 기본 관념, 도덕률의 증거를 받다 들이기를 택한다. 자유주의의 궤변은 풀려있다. 우리는 반드시 현세의 미묘함에 대처하도록 우리의 접근방법을 재조정해야 한다.
2. 권면들은 시대에 조화된다
우리는 오늘날 성경, 하나님, 그리스도, 창조, 죄, 구원, 중생, 초 자연성 등이 관하여 새롭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향락에 지치고 괴변적인 세상을 직면하고 있다. 대중의 관심은 형제애와 00의 의, 종교 연합의 적응과 타협, 사회 복음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는 세대와 같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한 복합 상태이다. 그것에 직면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지혜가 요한다. 그 지혜는 구하는 자가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직면하고 있는 강화된 목합성에 조화되는 권면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후자는 어떤 이가 우리의 사상과 술어에 주입하는 신 재림 주의의 분열을 의미한다. 이것에 관하여 우리는 항상 방어해야 한다.
3. 승리의 확신은 우리의 것이다
이것들은 뚫어야 할 첨가된 장벽들이요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새로운 약점이요 지금 직면한 금지된 위기 상태와 환경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1888년 이후와 1890년대 동안에 발생하지 않았다. 투쟁의 시대, 들끓는 편견의 시대, 화합할 수 없는 투쟁의 시대이다. 국가주의자들과 급진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세력이 깨어졌다. 잘 깨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장벽들이 지금 좌절된다. 청년들은 세계도처에서 반기를 들고 있다. 초자연적인 도움이 필수이다. 그러나 그것이 약속되어 있고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반응하는 연합한 백성을 계속 승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 분은 그들에게 성령의 저항할 수 없는 권능을 부어주실 것이다. 그들은 주님 자신의 놀라운 표현의 통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은 그 사업을 끝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능만이 그것을 할 수 있고 할 것이라고 우리는 강조해야 한다. 신령한 힘이 우리의 인간적 연약성을 보증하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다른 길이 없다. 직접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승리로 인도하는 길이요 오직 그 길 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준비이다.
4. 시설들이 성령의 권능을 대신 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갖지 못했던 기계적인 편의들이 있다. 라디오, TV, 항공 우편, 대량 교톨 수단, 트랭지스터, 테이프 레코드, 컴퓨터, 1500 방언으로 번역된 성경 등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님의 신의 효능이 없이는 헛것이다. 우리의 최고의 필요한 지구의 모든 부분에 비추고 꿰뚫을 그 최후의 빛 중에 계시록 18장의 보충하는 천사의 비추임 아래에서 그 큰 소리로 충만함 중에 늦은 비인 성령의 권능이다. 하나님은 능력, 계획, 준비를 갖고 계신다. 그 준비 중에는 주의 승리의 이 마지막 국면에 참여하도록 예정된 인간의 잠재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완전히 복종한 백성들은 그 완성에 참여하도록 되어 잇다. 그것이 이 개임적인 도전을 초래하는 약속과 확실성이다. 자원하는 한 백성이 그의 00의 날에 호응할 것이다. 그것은 00의 00이다. 그대가 내가 그 호응하는 무리 중에 한 중대한 역할을 하겠는가? 그것이 최상의 의문이다. 그리고 도전이다. 그것을 철저히 생각하라.
Ⅴ.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구체적인 요구가 포함되었다
1. 재연구, 재 고려, 재평가
전진한 조건들과 우발사건들의 빛 가운데서 우리가 이 새로운 세대 청년의 시대의 사상을 실제로 접촉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태도들과 접근방법들을 재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서로 통신을 하고 있는가? 비극적인 간격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변경시켜서는 안 될 표준과 유익하게 변경시킬 수 있는 방법 사이를 분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이 지상의 마지막 장면을 위한 명백한 청사진의 권면들과 일류의 변천된 태도와 망상을 일치시키고 있는지 없는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강조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불안한 세대와 교제하기 위하여 애쓸 때 우리는 청사진에 우리에게 주신 교훈 중에 어떤 요소라도 타협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술어가 우리가 전한 기별을 현대의 청중과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최근에 기관과 혼란의 아비가 고안한 사상과 술어를 결코 채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이해력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주님과 구세주를 난처하게 희생시켜가면서 세상의 관심을 결코 얻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아바 수십 년 전에는 적합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효과가 없는 우리의 시대에 뒤떨어진 대화와 낡고 진부한 판에 박은 문구의 효과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 뒤에 있는 빛을 성급하게 부인한 비극적인 부류에 속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EW 15). 우리는 완성 전이 지체되는 시기에 이 마지막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기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쌓아올린 복잡한 궁경을 통과하는 우리의 방법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기독교계의 모든 교회들에 흩어져 있는 특별히 내 백성이라고 부르는 굶주린 마음을 가진 백성의 큰 무리에게 참으로 도달하도록 전에 없는 기대와 요구를 재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교회들밖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이런 이들은 참 목자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음성은 그들이 그것을 찾고 있는 불안한 영혼들, 돌파작전에서 하늘의 최후 호소에 호응할 영혼들과의 교제를 방해해온 방해물들과 장애물들을 재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영감의 권면들을 따를 때 어떤 점들에 관해서는 적게 말할 사실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냉랭한 강압적인 증거와 논리에서 성령의 부드러운 감화 아래에서 더욱 많은 그리스도 중심의 증언과 호소로 변화시킬 때가 오지 않았는가를 알기 위하여 우리의 역할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마 하나님의 이상과 정당한 기대를 반사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애와 봉사의 코스를 재 지시하실 것이다.
2. 새로운 발견들과 새로운 힘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방법으로 그 사업을 끝마치시기 위하여 당신의 손을 대실 때 세상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증거의 성격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도록 예정되어 있고 하루에 수천 명을 교회에 쇄도하게 인도할 성령으로 채워진 생애들을 통한 성령으로 지시받은 접근 방법으로 변경될 것이다. 하늘은 그 날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우리 몫에 대하여 확실하게 해야 한다(우리의 순종, 우리의 적합성, 우리의 균형).
우리의 발견과 사용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새로운 발견, 새로운 증거들, 새 확증들, 새 확신의 증거들이 있다. 한편, 우리가 타당하게 계속해서 인용할 수 없는 의심스런 떠돌아다니는 인용구들이 있다. 그리고 결코 다시 사용되어서는 안 될 건전치 못한 논증들이 있고 가치 없는 주장들이 있다. 더 이상 만족치 못한 뚜렷이 느낄 수 있는 유행에 젖은 접근법들이 있다. 이것들은 우리는 반드시 검토하고 고쳐야 한다.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있다.
3. 근본적인 전진이 요구된다
우리가 내버려야 할 필요치 않는 거리낌을 주는 문구와 표현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타협하지 않고 우리 기별을 약화시키지 않고 강력히 증거 할 수 있다. 긍정적인 태도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이의 강조를 특정 짓는 유감스런 부정주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다시 연구하고 개혁하고 속에서 불타는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너무 자주 기별을 주신 초월적인 그리스도, 하나님의 계명만이 아니고 예수 믿음보다도 한 기별에 존귀와 영광과 신뢰를 두고 있지 않았는지 알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엄밀히 조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강조점을 분석하고 우리가 모든 중대한 가치 있는 교리의 중심이요 경계선이신 분에 대한 마음의 관계보다도 교리적 진리의 아름다우나 추상적인 조직에 대한 지적 승인에 너무 자주 강조해오지 않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4. 분명한 지시와 조화시키라
우리는 우리의 설교와 성경 연구 제목들과 그 내용을 살펴보고 우리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구원에 대하여 아무런 참된 유익이 없는 것에 사소한 점들에 대하여 연구하고 설교하는 대신 우리는 무릎을 꿇고 상태를 평가하고 우리의 약점들을 찾아내고 더 나은 방법들과 더욱 효과적인 계획들을 계발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절정의 시간에 하나님의 명백한 지시와 조화되도록 우리의 강조점을 대조하고 분석하고 측정하고 재조정하고 개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마 우리 00들 시대에는 매우 좋았을지 모르나 지금은 완전히 부적당한 진부한 시대에 뒤진 방법들을 내던져 버려야 한다. 때에 어울리는 발전이 분명히 요구된다.
5. 새로운 접근법과 호소와 전략
결론적으로 우리는 시대적인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새로운 접근법, 새로운 호소, 더욱 효과적인 전략, 더욱 영혼을 구워할 만한 더욱 효과적인 방법을 요한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탐구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야 한다.
우리가 권면을 받은 대로 그리스도안에 중심되고 성령에 충만한 빛나는 진리와 하나님의 준비들을 더욱 충분히 제시해야 할 때가 왔다. 우리를 얽어매던 큰 전진을 방해해오던 속박과 옹졸함을 탈피해야 할 때는 분명히 있다. 놀라운 거보를 내디디라고 부르고 있다. 전에 없었던 기회들이 우리 앞에 열리고 있다. 이 기회들을 우리는 포착해야 한다. 그 부름은 순복하는 생활과 성화된 식별력을 위하여 준비하고 하나님의 적합성을 가지라고 한다.
6.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일을 삼가라
다음 1888년의 위기에 관한 주의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1798년에 마지막에 들어선 것과 꼭 마찬가지로 1888년에 큰 외침과 늦은 비의 때에 돌입했다. 비록 지체되었지만 그 충만함은 오도록 되어 있고 우리가 검토한 바와 같은 퇴보에도 불구하고 그 때는 곧 온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좌절될 수 없고 되지 않을 것이다. 1888년에 큰 외침이 들려 조기 시작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는 예언의 신의 진실성을 배격하는 것이다. 늦은 비가 그 때 시작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별의 정직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큰 소리 외침은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의 의의 빛의 비추임의 시작과 동시에 일어났다. 처음에는 혼돈된 반응으로 방해를 받아왔으나 최근 수십 년간에 점점 더 명백히 더욱 귀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에 의하여 오해 받고 저항을 받고 반대를 당했으나 그 시련의 때를 이겼다. 그것은 1888년 이후 어느 때보다도 더욱 널리 믿어지고 오늘날 사랑 받고 더욱 열렬히 연구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가장 새롭게 되는 우리 하나님의 준비 중에 기쁨의 부활이 있다. 이것은 충분한 수학의 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언된 큰 전진의 문어귀에 서있다. 그러나 더러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Ⅵ. 영원한 복음의 완수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놀라운 범위
우리가 확신하기는 믿음의 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기별을 끝마치는 특징을 이루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강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확신과 더불어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단지 마술적인 신학적 술어(표어, 유행어구, 부적, 주문, 경구, 습관이나 상투어)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유일한 말의 요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구속의 준비와 기초 원칙(과거, 현재, 미래)이다. 그것은 모든 영적 생활의 근본 힘이다. 그것은 개인적 구원의 유일한 기초이다. 이리하여 그것은 위대한 필수요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포괄한 완전한 구속의 계획 중에 궁극적인 것이다. 누가 상당한 지성과 학식을 소유할지 모른다. 그가 신학적 상세한 일의 전문가일지 모른다. 그는 상세한 예언 해석에 기민할지 모른다. 그는 추상적 진리의 저명한 교수일지 모르며 기별의 모든 술어들과 많은 세목들을 잘 알지도 모른다. 그는 현대 진리를 위한 다양한 논쟁 가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실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의에 관해서는 사실상 무뢰한일 수 있다. 그것을 큰 재앙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문제의 요점은 중대하다.
2. 천국을 여는 주요 열쇠
믿음의 의는 단지 신앙의 한 부분이나 국면이 아니다. 그것은 그 전체, 예수님에 관한 충만한 믿음을 믿는 것이다. 그 범위를 숙고하라. 그것은 구원의 전체 면에 포함된다. 그것은 구속적 은혜의 핵심, 영원한 복음의 진수를 이룬다. 그것은 정말로 세째 천사의 기별이다. 어떤 더 강력한 표현, 범위, 내용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있는 중대한 주제이다. 그것은 선포하는 것은 한 백성이요, 한 운동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와 그 구성하는 교인들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것은 하늘을 여는 중요 열쇠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으로 개인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모든 참된 봉사의 원천이요,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과 효과적인 도거의 기쁨이다. 그것은 왜 그것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증거의 절정을 특징지어야 하는가의 이유이다. 그 최고의 위치는 제쳐놓거나 격하시킬 수 없다. 그것은 남아있는 높이 솟는 일을 우리가 직면할 때 핵심이다. 그것은 차차 앞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언이다.
Ⅶ. 진짜 기별에 관한 최후의 강조
1. 의에 갑옷을 입고
성령의 강권 하에서 그 기별의 큰 외침의 국면의 최후 신속한 운동 기간 중에 믿음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더 적은 교회들과 적용의 모든 세목에 몰두할 시간이 없을지 모른다. 그들은 우리 교회에서 충분히 연구해 온 것들 중에 어떤 예언 서적들 중에 제 2차적인 면들과 때때로 추상적인 것들을 다 알게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재림 신앙의 진수, 그 기본적 특성들을 충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진짜 세째 천사의 기별에 온전히 반응하고 그것에 의하여 변화될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복음, 영원한 진리들의 구원하는 진리들과 준비들에 충분히 반응할 것이다. 그들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산 교제 중에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의 갑옷을 온전히 입고 하나님의 찬 자녀들로서 오시는 그들의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비된 그리스도의 갑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진리들에 대한 강력한 증인들이 될 것이다. 그 기별의 그리스도의 의의 갑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진리들에 대한 강력한 증인들이 될 것이다. 그 기별의 긴요한 진리들은 확신을 가지고 인식하고 선포될 것이다.
2. 증가는 오순절을 능가할 것이다
강조는 있어야 할 곳에 으뜸 되는 진리들, 큰 진수에 있을 것이며 제 2차적인 것들, 중요치 않은 것들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복음은 강력한 힘으로 선포될 것이다. 그 증거 이외에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남지 않을 것이다. 그 주변에 있는 중요치 않은 것들(실제로 구원에는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것도)은 그것들이 없으므로 눈에 띄게 될지 모른다. 짧은 사업 그러나 철저하고 영광스런 사업을 주께서 세상에서 이루실 것이다. 이것들은 하늘의 보증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의 반응은 기독교회의 칠중사 중에서 어느 다른 영혼의 수확보다도 능가할 것이며 오순적의 수확을 훨씬 능가할 것이다. 이것은 절정을 이룰 것이다. 큰 무리가 구속 사업의 최후 부르심에서 모든 진리의 중심과 원주로서의 그 분의 정당한 위치를 차지하실 그리스도의 능력의 작용을 통해서 그들의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얻기 원하시는 마지막 사건들의 초점을 맞춘 묘사이다. 그것은 놀라운 전망이다. 그것은 진실로 진리의 승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실성이 확실한 것같이 확실하다.
Ⅷ. 초월적인 인격자(오늘날 재림 교회를 위한 최고의 교훈)
1. 구원은 한 인격 속에 구체화되었다
우리는 다음의 개인적인 기록으로서 끝마쳐보자. 기록한 바와 같이 재림 신도로서 그리고 누구보다도 재림 교회의 사역자들로서 우리가 이 교회의 기별의 사명의 최후 국면에 더욱 더 많이 이해할 경험하고 선포해야 할 필요가 있는 최고의 복음의 진리와 준비가 있다. 그 구원하는 것은 지식(아무리 건전하고 만족스럽고 완전하다 할지라도)이 아니라, 초월적인 인격자에게 한 믿음이다. 그의 그 사람만을 믿는 믿음이다. 구원하는 것은 아름다우나 추상적인 교리적 진리와 정통의 조직에 대한 열렬한 지적 승인이 아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초월적인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되고 인격화된 구속적 은혜의 준비를 믿고 전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모든 독특성에 대한 신도도 아니다. 그 시별의 주인 영원한 모든 것이 충만한 그리스도를 신뢰함,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2. 모든 진리들 중에 진리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교회 안에 있는 아무런 고백이나 교인 중도 어떤 지위와 기능도 어떤 활동과 행위가 아무리 건전하다 할지아도 그들 스스로 개인적이나 집단적으로 한다 해도 우리는 구워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이것들이 아무리 신실하고 완전하고 열렬할지라도 그렇다. 이 점에 관해서 비로 위험이 있다. 구원은 한 분이신 오직 유일하신 주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온전히 기초되어 있고 그 분에게서부터 온전히 솟아난다. 참 순종과 활동적인 행위는 필연적으로 구원 뒤에 수반된다. 그러나 그분에게서부터 온전히 오로지 그 분 안에만 있다. 그것이 오늘 재림 신도들인 우리를 위한 모든 진리들 중의 진리이다.
3. 전통이나 활동이 아니라 한 인격이다
그리고 우리는 00한 00들의 기초가 되는 어떤 병행하는 자명한 이치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위한 모든 합당한 것들과 더불어 세째 천사의 기별의 시험하는 진리들은 우리에게 의미가 죽은 것이다. 그 기별은 전체가 부분적으로나 우리의 죄를 속죄하지 못했고 할 수 없다. 재림 교안에 있는 정통적인 신조가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우리와 아버지 사이에 중보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 원칙들은 항상 적용된다. 이와 같이 사람의 본성과 죽은 자의 무의식과 악인들의 궁극적인 소멸 등에 관한 참된 이해가 우리에게 첫째 부활이나 변화시키는 날에 00성을 주지 목할 것이다. 오직 스스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성육신하신 분만이 그 일을 할 수 있고 하실 것이다.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존재한다. 더 풍성하고 영원한 생명은 그리고 선물로 주실 수 있는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안에만 존재한다. 참된 안식일에 대한 신조나 준수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할 수 없다. 오직 살아계신 안식일의 주인을 믿음으로써만 그 일을 할 수 있다. 우리 교회에 통일된 침례증서에 있는 모든 말씀들에 관하여 신실하게 긍정하고 교인이 되기 위해서 그 후에 침례를 받는 것이 우리를 환란의 때를 통과해서 새 땅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 위에 초월한 필수요건인 무한한 무엇이 있다.
4.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의
000인 율법에 대한 너무 신경을 쓰고 열렬한 순종은 그것이 없이는 아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필수적인 의를 우리 안에 결코 생산하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율법의 요구와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것은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나누어 주신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흠 없는 의이다. 목회에 봉사하는 것이나 기관에서 여하안 모든 형태에의 봉사의 다른 분야에서 봉사는 것이 우리를 위해 새 예루살렘의 문을 자동적으로 열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 자신의 성육신한 영원한 복음이신 분 안에 중심되어 있는 구속하는 능력과 준비들만이 그 일을 할 수 있고 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기본적이요 00이요 종국적인 것이다.
5. 각 시대에 하나의 준비
각 시대를 총망라해서 오직 하나의 길 구원의 하나의 수단만이 있어왔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식의 부적으로 멸망될 수 있을 지라도 구원은 결코 바람직한 일인 성서적 진리의 지식에 완전함이나 그 정도에 의존되지 않는다. 배도가 가장 황폐시키고 널리 퍼졌던 당시에도 오늘날 충분히 회복된 완성된 교리적인 진리의 충만한 광채 중에 있는 오늘날과 꼭 마찬가지로 구원하는 것은 아직도 단순하고 기본적인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믿음이었다. 우리가 권위 있게 말하는 것은 짙은 이방의 흑암 중에서 인쇄된 말씀을 갖지 못한 자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의 말씀들과 기적들에 관한 명백한 지식까지도 갖지 못한 자의 구원을 가능케 한 것은 그러나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빛을 비추신 하늘의 빛을 신뢰하고 따랐던 자들 단순한 믿음의 이 놀라운 준비였다. 그런 신실한 영혼들은 멸망되지 않을 것이다.
6. 그리스도는 필수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한 분의 초월적인 분, 오직 한 분, 성육신 하신 복음, 인격화되고 나타나신 실현시키신 완성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구원하신다는 논쟁할 여지없는 참된 일이다. 이 사람을 떠나서는 영적 죽음에서 피할 길이 없고 중생도, 칭의도, 성화도, 의도, 양자됨도, 영화도, 불멸성도, 영원한 생명도 영원히 없다. 그 분은 한 분의 필수적인 분이다. 그 분은 참으로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수단이요, 하늘가는 우리의 유일의 소망이시다. 그러므로 그 분에 대한 우리의 00은 중대하고 최고이다. 이것을 우리는 특히 사역자들로서 개인적으로 경험적으로 더욱더 많이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교회의 백성과 우리의 회심 자들로서 개인적으로 경험적으로 더욱더 많이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교회 백성과 우리의 회심 자들을 이 경험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에 대하여 아무 대치 품도 없고 양자택일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본질적으로 살아계신 한 분과의 관계이다. 그것이 그 모든 것의 핵심이다. 그것이 영원한 복음을 한 점에 모은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믿음이다.
7. 우리의 강조점들을 고쳐야 한다
과거에는 우리가 추상적 진리에 너무 많은 양광을 돌려왔고 놀라운 기별이 너무 많은 찬사를 했고, 인간적 특성과 활동에 너무 많이 칭찬해왔고, 그리스도를 떠나서 바람직한 태도를 작용, 준비들에 대하여 너무 많이 인정해왔다. 그리스도께 대한 구원의 관계에서 나온 열매요, 경과되어야 할 자질들을 지나치게 미리 강조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강조점 중에 어떤 것들을 고쳐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는 수정하기까지 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첫 번째 것들을 맨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모든 것, 신조, 활동, 감사, 헌신 등으로 중심과 둘레를 삼아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그 열차의 뒤에 따를 것이며 자연적으로 필연적으로 수반될 우리의 것은 대치하고 대신 들어서는 그의 생명, 그분의 믿음, 그분의 순종, 그분의 의, 그분의 품성이다. 그렇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된다. 그리고 구원하는 것은 이 이전이요, 변형이다. 이것이 영원한 복음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참 교리 “진리의 완전한 조직의 중심이며 원둘레이다. 그리스도의 범위와 원둘레 밖에는 아무런 본질적인 교리도 없다. 동시에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그 분은 모든 구원의 진리의 중심이요 근원이요 화신이시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최후 증거의 동기를 유발하고 광채를 바치게 될 진리이다. 이런 실체화된 진리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 시간에 최대의 힘과 호소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이다.
8. 새로운 접근법고 능력과 호소력을 예비한다
우리는 이런 경험적인 이해와 그런 기쁜 소식이고 그렇게 영광스럽고 무제한의 산 능력의 근원과 그리고 그런 산 경험을 가지고 한 새로운 접근법, 한 새로운 호소와 한 새로운 능력과 세상의 최대의 궁지의 시대에 전에 없던 필요에 대처하고 간절히 바라는 공허를 채울 열성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지구의 마지막의 치명적 질병들과 인류의 최고조에 달하는 절망을 위한 하늘의 최고 구제책을 가지고 갈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시다. 그것은 그 분의 기대요, 우리를 위한 준비이다. 죄와 하나님에게서의 분리를 위한 신령한 구제책은 충분하고 완전하다. 치명적인 죄의 질병을 위한 치료는 확실하고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것이 오늘날을 위한 과제요, 그리고 반드시 경험해야 할 관계요, 우리가 우리의 끝마치는 증거를 함에 있어서 우리가 인류 앞에 반드시 가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될 필수요건이다. 그것이 재림 교인을 위한 최고의 교훈이다. 그것이 예수의 믿음이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의이다. 그것이 임박한 영광스런 절정이다.
□ 후기
나는 1973년도 최대의 과제로써 밤에 청지기 부흥회, 혹은 전도회를 계속하면서 낮에 대회일도 가끔 보고, 찾아오는 사람돌과 상담하고 성경 교수하면서 틈틈이 이 책을 번역하였다. 문장이 미숙하다. 그러나 그 내용에 완전히 도취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때로는 코페를 쏟아가면서 피로한 줄 모르고 이 책을 번역하였다. 한번 이 책만 붙들면 놓기가 싫었다. 식사도 취침 시간도 없었으면 좋겠고, 이 책만 어서 속히 보고 읽고, 배우고, 명상하고 번역하며, 찬탄, 감탄, 감사, 시도 찬송을 연발하면서 꾸준히 계속했다. 나는 여기에서 신학교 4년간 배운 것보다 더 많이 영적으로 배웠고 참 복음의 의미와 삼천사의 기별의 핵심과 구원론과 기독론, 교리론, SDA가 하나님께서 직접 인도하신 참 마지막 교회라는 것과 예언의 신의 기별에 대한 더 큰 확신에 대하여 더 많이 배웠다. 성경과 시대의 소망 대쟁투, 구원에 대한 확신, 설교, 전도 방법, 늦은 비 성령, 큰 외침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의 관계들은 배웠다. SDA의 모든 교리와 구원론의 핵심과 원둘레는 그리스도 자기 구원과 품성 변화와 승리와 설교와 영혼 구원의 능력은 그리스도요 오직 모든 설교마다. 전도회마다. 그리스도만은 SDA신자들에게 알릴 것인가. 이것이 큰 과제요, 무거운 짐이었다. 주여 길을 열어 주옵소서!
온 한국이 이 기별로 속히 환하게 되게 하옵소서. 이 책을 섭리 중에 번역케하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립니다. 오 주 예수여! 내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주의 권능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아직도 살아있는 자신의 우상을 반석 되신 주 그리스도께서 깨뜨려 부셔주시고 주의 보혈로 더러운 맘을 깨끗이 씻어주시고 주의 성령을 통해서 새 마음을 창조하사 온유, 겸손, 사랑, 영혼을 위한 전도열이 뼈 속에서 불타고 가슴속에서 주의 사랑이 샘솟게 하소서. 항상 계속 내 맘과 육체와 의지와 감정과 입과 눈과 손발을 맡아 주장하사 말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주의 대리자 성령님의 통하여 살아계시고 나는 변화시키사, 예수님처럼 살고 말하고 봉사하고 품성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타오르는 열성으로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 곧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기별을 더욱 높이 쳐들고, 더 널이 전파하여 온 한국 땅, 먼저 SDA 사역과 신자들 대부분이 경험으로 이 기별을 알게 하시고 바벨론에 있는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곳에 이 교회에 주 예수께서 살아계시고 함께 동행하시고 함께 지상 영혼구원 사업하고 계심을 우리 SDA의 열심과 품성과 행위와 기별, 그리스도 중심의 기별, 성령의 함께하는 기별을 통해서 보게 하시고 이 곳으로 수없이 찾아오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중심의 기병이 모든 실제적 경건의 설교나 구원의 복음 설교나 전도 설교나 모든 교리 설교나 다니엘 계시록 예언 해설 설교에서 그리스도를 처음과 중심과 결론으로 외칠 수 있도록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주옵소서. 온 땅이 환해지는 큰 외침과 늦은 비의 권능의 기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기별이요 그리스도 중심의 삼중 천사의 기별이 오며, 늦은 비 성령의 권능으로 이 기별이 환해지는 줄 믿습니다.
온 한국 땅의 설교자들의 기별이 이 책에 있는 기별이 되게 하옵소서. 어서 속히 한국 교회 모든 목사님, 전도사님, 성경 교사님, 평신도 설교자들이 이 책을 볼 수 있게 해 주시고, 한국 교회 강단의 기별이 교리 설교, 행위 설교, 율법과 예언 해설 설교, 지적 전달의 설교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성령 충만한 참 영원한 복음 설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한국 모든 기관, 교회들이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순결케 되고 늦은 비의 절정에 이르게 하시고 이북에도 이 참 복음이 환하게 비치도록 길을 열어주옵소서 이 기별과 성령의 능력으로 이 사업은 영광스러운 논리로 마치고 이 기별을 성령님에게 붙잡혀서 전하는 사역자와 평신도들이 이 기별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와 능력으로 끝까지 최후 승리할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1888년부터 시작된 늦은 비와 큰 외침의 권능은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기별과 동시에 시작되어 동시에 지금까지 진행되었고 동시에 발전하여 동시에 절정에 이르고 동시에 온 땅을 완전히 비추고 사업은 마치고 주님이 데리러 오실 것이니이다. 계 18:1-4의 기별은 1888년부터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오며, 계 18:1-4의 능력은 늦은 비 성령의 권능과 지혜로 온 세상에 신속히 전파되는 것임을 깨달았나이다.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계몽된 백성이 교회의 대부분이 되지 전까지는 늦은 비의 절정에 도달할 수 없다 하였사오니 주여, 어서 속히 한국 교회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과 성령의 권능으로 계몽시켜 주시옵소서. 이들을 계몽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별을 전하도록 길을 열어주옵소서. 바벨론과의 장벽이 헐어지고 그곳에 포로된 주의 백성들의 예수님을 맘속에 교회 안에 강장의 중앙에 설교의 중신에 전도와 성경 교수의 핵심으로 모신 진리 교회로 찾아들게 하옵소서. 아멘.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도 날마다 구원하시고 승리케 하시고, 장차 온전히 끝까지 책임지시고 저와 가족과 한국 교회와 이 민족의 구워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부 록
부록 A
미네아폴리스 총회에 관한 엘렌 화잇의 보고
미네아폴리스 11, 4, 1888
사랑하는 메리에게
우리 지회는 끝났다. 나는 지난 안식일에 나의 마지막 설교를 했다. 처음에는 그 총회에 고려해야 할만한 감정이 있었다. 나는 교회가 꽉 찼을지라도 기도하기 위해 앞으로 나오라고 호소했다. 상당한 수가 앞으로 나왔다. 주께서는 나에게 탄원의 정신을 주셨고 주의 축복이 내게 임했다. 나는 오늘 아침이 회집에 나가지 못했다. 이 집회는 가장 수고스런 집회가 되었다. 왜냐하면 Willie 의사는 미래의 사건에 해롭게 될 결의를 하지 못하도록 순간마다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나는 큰 자유로운 심정으로 거의 20 번이나 설교했으며 우리는 이 회집이 큰 선한 결과가 이룩될 것을 믿는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키를 잡고 서 계시므로 파선되지 않을 것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 백성들 중에 일찍이 보지 못했던 가장 심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의 노력을 했지만 나의용기와 믿음은 건전했고 나를 실망시키지 않게 했다. 사실의 사건은 내가 수많은 페이지를 쓰지 않는 한 펜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Olsen장로가 GC회장이 되었고 Kansas주의 Dan James형제가 그를 보필하게 되었다. Haskell장로가 Olsen형제가 유럽에서 올 때까지 봉사할 것이다. 나는 미래가 어찌될 지 말할 수 없으나 우리는 베틀크릭에 4주일 동안 더 머물러 있으면서 비체하지 않고 즉시 나와야 할 증언을 출판해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는 이 사업의 큰 중심에서 일이 어떻게 되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비상시에 우리 백성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한 환자의 마음이 대총회 위원회를 주관하는 정신이 되어왔고 목사들은 사업의 유일한 건전한 한 Butler 장로의 그늘과 영향 하에 있어 왔다. 시기, 악한 추측, 질투심 등이 온 땅이 전부 부픈 것처럼 보일 때까지 퍼지는 누룩과 같이 역사하고 있었다. Willie는 수 마일을 지나서 Minnehaha 폭포로 갔다. 첫 번에 그는 잠시 보초 근무를 벗어나기 위해서 위원회로 갔다.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는 상당히 시원하다. 우리는 모두 감기에 걸렸으나 상당한 햇빛이 있었고 비는 매우 조금 왔다. 우리는 좋은 음식으로 즐길 수 있었다. 사라는 감기에서 약간 좋아졌다. 나는 남은 업무에 종사하느라고 감기를 위해서 병간호할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오늘 일요일에는 나는 집회에 참석치 못했으나 상당히 많은 방문을 해야만 했다. 나는 내 생애 중에서 힘과 자유와 성령의 권능을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사단이 나의 방문을 놀라울 정도로 방해할 권능을 가진 것같이 보였으나 나는 만일 우리가 여기에 없었더라면 이 집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를 생각하니 떨린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이 정신의 그 집회에 지배적인 능력을 갖지 못하도록 막기 위하여 역사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도 낙망치 않았다. 우리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신뢰한다. 진리는 승리할 것이며 우리는 그것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이 모두 집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너희와 함께 있으면 좋겠는데 우리의 소원을 논하지 않아야 한다. 주께서 우리의 지도자이시며 주께서 우리의 갈 길을 지시하시기 바라며 우리는 주께서 어느 길로 인도하시든지 따를 것이다. 자 나는 우리가 베틀크릭에 도착한 후에 할 수 있는 한 빨리 너에게 더 써 보낼 것이다. 이 급히 쓴 글씨를 이해해라. 크신 사랑이 온 가족에게 있기 바라며 특히 엘라와 모벨에게 있을지라 -엄마
추신: 나는 윌리를 위하여 짠 따뜻한 양말 한 켤레가 있다. 그리고 또 한 켤레가 거의 다 되었다. 내가 이 편지를 접고 있을 때 이 큰 얼룩점이 보기 흉하게 생겼구나. -어머니가 Letter 82, 1888
부록 B
1. 비슷한 용어들과 접근법을 사용함
와그너가 88년의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 먼저는 그리스도의 초월성에 관하여 다음에는 그의 결과적인 모든 것을 채우는 의에 관하여 실제로 제시하고 있는 동안에 A. T. Jones도 1888년 전후에 실제로 동일한 견해를 주장했다. 그러므로 한 분은 다른 한 분의 의미와 의도를 해설해 주고 보증한다. 88총회 이후에 그들은 함께 여행하면서 이 두쌍의 준비에 관하여 가르치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존스는 다양한 면에서 특히 북미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제시함에 있어서 더욱 뛰어나게 되었다. 그는 비슷한 접근법을 사용했고 가끔 동일한 술어들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예컨데 존스는 본질이란 술어를 강조했고 바로 본질, 하나님의 본질, 본질 중의 본질이란 말로 확대했다. 물론 후자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신성을 제시한 문구인 바로 그 하나님의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역사적인 말로 돌아간다. 사실상 히브리서에 관한 그의 적은 책에서 헌신한 길(1905)에서 존스는 본질을 강조함에 있어서 여러 형태를 사용했다. 진실로 존스는 누가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약 16번 그 말을 사용했다.
2. 본질의 강화된 일정한 용법
여기에 와그너가 그의 이 낱말을 사용한 의도를 이해하는 데에 분명한 빛을 던져주는 존스는 주도적인 선언이 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영접하게 동일한 사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존스는 히 1:3을 인용하면서 R. V. 난외주에 “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 분은 그 분의 인격 안에 그의 본질 안에 하나님의 바로 그 특징, 바로 그 품성, 그 본질이 있다. 그것은 하늘에서 그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 그리스도의 본성은 하나님의 본성이었다.”
“그러나 아들에 관하여는 그가 말씀하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원하고 영원하나이다.”
“히브리서 1장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왜냐하면 그 분은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의 그의 본성은 매우 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의 바로 그 특성이다. 이것이 영 중의 영이요, 하나님의 본질 중의 본질이신 구세주나 대표적인 의미에 있어서가 아니요 바로 그 본성에 있어서 실제로 같으신 분이라는 의미에서 꼭 같으신 분이다. 그의 본질의 바로 그 특성, 하나님의 영의 영, 본질의 본질이다.
그가 강조한 의미는 배우 명백하게 지지했으므로 오해할 수 없다.
3.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
몇 페이지 쥐에 나타나 있는 더 이상의 주요한 말씀은 다음의 확대하는 사상을 구체화 한다. 그러므로 그 분이 하늘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으로서 사명들보다 더 높았을 때에는 그와 하나님은 하나였다. 그와 같이 그가 인간으로서 세상에서 천사들보다 못했을 때에는 그 분과 인간은 동물이었다. 이같이 하나님 편에서 예수님과 하나 한 정신, 한 본성, 한 본질이었음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면에서 그리스도와 인간은 하나였다. 한 육체, 같은 본성, 같은 본질 이였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음은 형상에는 불론 본질에 있어서도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인간과 같음은 외형에서뿐만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다함은 형상이나 대표라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바로 본질에 있어서이다. 그리고 2장에서 그가 인간과 같음은 단지 형상에서 뿐만 아니라 바로 본질에 있어 그렇다. 이것은 물론 선행한 하나님의 본질에 주요한 강조를 한 것이다.
4. 엘렌 화잇의 확증하는 인정
이 의미 있는 표현들은 모두 9페이지 안에 나타나 있는데 존스와 와그너의 공동 신조를 나타내고 지울 수 없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질은 우연한 표현이 아니요 우발적인 혹은 되는대로 정의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은 매우 전문적인 정확한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확실히 바로 그 한님의 바로 그 하나님이란 뜻이다. 엘렌 화잇 자신이 이 동의어를 사용한 점은 와그너와 존스의 용어가 의도에 비범한 확증을 주는 빛을 던진다. 왜냐하면 부인은 와그너가 처음에 1888년에 미네아폴리스에서 그 술어를 사용했을 때 참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888년과 1890년 사이에 부인은 이 두 사람이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주제에 관해서 설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의 제시를 인정했다.
부록 C
Deity는 Divine의 근본 의미를 지지하게 위하여 대치됨
1. 근본 의미를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됨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중에서 엘렌 화잇의 수정의 한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설명한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상이나 교훈을 변경시키기 위한 개정이 아니었다. 그 대신에 그것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점진적인 의미의 수정이 생긴 한 술어의 근본 의도를 보존하기 위하여 수정한 것이다. 그것은 Divinity와 Deity란 낱말이 포함된다. 1888년 당시에 대쟁투를 출판될 때 Divinity는 Deity의 의미를 함축했었다. 이런 의미로서 1888년 판에 그 Divinity란 단어가 대쟁투 524, 552쪽에 나타나 있었다. 다음에 W. W. Prescott의 말 중에서 그 요점을 잘 드러냈다.
“약 25년 내에 Divinity란 술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단지 조정된 의미에서만 그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는 풍조가 생기게 되었다”(R&H Feb. 11, 1909). 그러므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현대주의와 0일신론자 주의가 처짐에 따라서 모든 선한 사람들은 신성하다라는 사상이 편만하게 되어 그리스도 단지 좀 더 신성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divinity의 근본적 사상이 약화되었고 유실되고 거세되었다. 1911년판 대쟁투에 여러 경우에서 deity이란 단어가 대치된 것은 divinity의 근본 의도를 보존하기 위함이란 것이 분명하다.
2. 우연히 된 것이 아니요, 그 사상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러므로 근본 사상과 의미는 변경되거나 수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수정은 근본 사상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권위 하에서 되었고 그리고 엘렌 화잇 자신의 승인 하에서 된 것이다. 사상이나 의미가 변경되었다는 여하한 도전은 그러므로 옳지 않다. 사상은 동일하게 남아 있다. 낱말을 변경시킨 것은 의미가 변경되어 의미가 약화된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 수정은 그 당시 많은 사람이 이해한 것보다 더 지혜롭고 더 중대한 사상이다. 그 수정은 다음과 같다.
1888년판
또 다른 위험한 오류는 그리스도의 divinity를 부인하는 교리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영감의 성서의 증언을 거부한다면 논쟁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영들이 그리스도의 divinity를 부인한다.
1911년판
또 하나의 위험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deity를 부인하는 교리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성(deity)를 거부한다면
영들이 그리스도의 신성(deity)를 부인 안한다.
부록D 1888년 - 기별에 조소자의 비극적 종말
1. 조소의 씨의 비극적인 수확
1930년에 C. C. Macreynold의 말에 의하면 1888년 총회시에 루이스 리차드 코라디는 믿음의 의에 관한 와그너 박사의 엄숙한 기별의 가장 뛰어난 조소 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기별을 저항하고 거절했던 어떤 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와그너의 연구를 엘렌 화잇이 강력하게 지지했기 때문에 콘라디는 그때부터 점점 더 예언의 신을 해치려고 애썼다. 드디어 심히 대항하여 싸웠다. 그것은 그가 명백히 말한 사람들 그 후에 중안 유럽 지회장을 한 Wilhelm Mueller목사 같은 분들에 의하여 입증된다. 이 Mueller 목사가 나에게 직접 말했다. 그러나 콘라디는 1932년에 우리와 온전히 관계를 끊을 때까지 교회 내에서 점점 더 유명한 목사로써 계속 봉직했다. 그러나 그가 살고 일하고 여행한 곳마다 그는 교묘하게 예언의 신에 관한 신임성에 관하여 의심의 불안한 씨를 뿌렸다. 그리고 결국 이 마지막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시별의 근본적 교의에 도전하게 되었다.
2. 부인했던 어떤이들 중의 산 사람
결과적으로 콘라디는 1888의 필수적인 원칙들에 대하여 그릇된 태도 때문에 엘렌 화잇에게 책망을 받았던 어떤 지도자들 중의 범위에 속한다. 콘라디의 치명적인 입장의 비극적인 결과는 다음에 기록된 사건들로 입증된다. 그가 드디어 1931년에 답변하게 된 후 우리를 떠난 후 콘라디는 우리 초기 지도자들 특히 화잇 부인을 대신하여 혹평하는 글을 썼다.
그의 슬픈 행로의 이 최후 공개는 그가 죽던 해인 1939년에 SDA 교회와 건설자들아란 제목으로 출판된 그의 79페이지와 공격으로 요약된 그의 건방지고 혹독한 말 가운데 나타난다. 참으로 그는 독일에서 그가 제칠일 침례교 출판소에 의하여 인쇄한 출판물이 나오기 직전에 죽었다.
3. 1888년이 전환점이었다
1888년이 콘라디의 생애에 있어서 전환점이었다는 것이었다. 침례교 역사학회의 Dr. Corliss Fit2 Randolph가 준비하여 1940년에 제칠일 침례교의 안식일의 증거에서 알게 되었다. 1888년에 콘라디는 러시아로부터 북미로 돌아와서 북미에 있는 독일인 SDA준에서 교육사업을 착수하는 데에 돕고 Milwaukee에서 독일계 양성 학교를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SDA지도자들에게서 받았다. 미국에 도착하여 콘라디는 88년 가을에 미네아폴리스 총회에 참석했다. 그 다음에 그 묘사의 다음 쪽에 SDA 전기가 Dr. Randolph가 기록한 이 의미심장한 구절이 나온다. 비록 그의 회심 때로부터 그는 자신을 SDA로 동일시했을 지라도 1888년에 그는 어떤 교리적인 신조들에 관하여 그들의 여선지와 지도자로 고백하는 제임스 화잇 부인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참으로 그는 화잇 부인과 다른 지도적인 SDA신자들을 특징짓는 극단적인 견해들을 항상 주장한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지도 하에서 재림교회로 회심한 자들은 다른 지도자들 밑에서 교리들을 받아들인 자들과 상당히 다른 훈련을 받은 것도 분명히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화잇 부인을 전적으로 거절했다.
4. 종전의 SDA교회들을 SDB교회로 조직함
콘라디가 공식적으로 SDA교회에서 이탈한 것을 말한 후에 랜돌프는 콘라디 자신이 한 말을 인용했다. “SDA 신앙에 근본 가르침에서 내가 떠난 것은 화잇 부인의 계시에 대한 나의 불신에 기초되었다.” 그 다음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SDB 교회를 입교한 후 그 교회 목사들 중의 일원이 되어 콘라디는 독일로 가서 거기에서 많은 SDA 친구들(그들의 이전 교회 관계와 조화되지 않음을 발견한)을 찾아냈다. 이 콘라디는 작은 SDB 교회들을 조직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그 묘사에 의하면 27개의 교회를 조직했다. 하나의 온 교회를 포함하여 533명의 교임을 가진. 이것이 SDB 각도에서 본 이야기이다.
5. 은밀한 비평이 공공연한 부인으로 끝난다
잠시 여기에서 머물러서 그 문제의 원리들을 숙고해 보자. 수년 전에 엘렌 화잇은 이 기초 진리를 다음의 예리한 말로 제시했다. 증언들에 관한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이 사단의 계획이다. 그 다음 단계는 우리 신앙의 중요한 점들, 우리 견해의 기둥들에 관하여 회의주의가 뒤따르고 그 다음에는 성서에 관하여 의심이 생기고 그 다음에는 멸망으로 행진해 내려간다. 그리고 1890년에 미네아폴리스 회의 조금 후에 화잇 부인은 다음의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사단의 최후의 기만은 하나님의신의 증언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부인이 계속해서 말하기를 사단은 그들 중에 있는 교회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부언하기를 증언들에 대항해서 사단의 증오심을 불붙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를 떠나는 자들은 하나님이 신의 증언들에 포함된 경고와 책망들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포기할 것이다.
이 말씀이 슬프게도 콘라디의 경우에서 예증되었다. 유달리 재능이 있는 한 사람이 그러나 중앙 유럽에서 지도자의 지위에 나타났다. 그는 지적인 추상적인 비인격적인 면의 우리 교회 교리적 신앙에 매혹되었다. 분명히 중대한 인격적 생명과 분리되어 있었다. 분명히 그에게 있어서는 진리는 주로 이론이요 가정이었다. 그는 이 운동의 개인의 신령적, 진동하는 생명을 알거나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비평적인 태도는 처음에는 은밀하게 주장했으나 그들은 이들에게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그의 부분적으로 감추어진 예언의 신을 거부함은 공공연한 투쟁으로 터지기 전에 점차 다른 이들에게 의식되었다. 1931년에 우리 지도자들과 서신으로 많은 의견 교환이 있었다.
6. 큰 허위 진술에 기초된 작은 책
콘라디의 적대감은 그 후의 그의 책에 점진적으로 나타났다. 공개된 신비 같은 책 그의 최후 공격도 그가 우리를 떠난 후 7년 후에 쓴 그의 종이 표시책 SDA교포의 건설자들에 나타났다. 그것은 참소와 불만과 재림교의 근본교리의 야단스런 거부(특히 예언의 신과 성소에 관한 우리의 교리가 상습 표적이 됨)로 가득 찬 탄핵이다. 첫 서두에서 우리 교회의 건설 자들에 관한 전술한 책명아래에 표제에 페니지에 콘라디는 O. R. L. Crogiera(1820-1913)의 큰 초상화를 넣었다. 그 분명한 백성은 성소 문제 때문에 우리 교회의 주 건설자들 중의 한 사람의 거짓된 범위 주에 Crosier를 포함시키고자 함이었다. 그의 서론의 첫말에 콘라디는 우리 건설자 중에 William Miller와 S. D. dnow과 같은 이들의 명단을 기록했다. 그러나 1844년 이후 수십 년간에 안식일 지키는 재림교회의 발전에는 이 두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1844년 이전의 밀러 운동과 그 마지막 칠일 운동 국면에서만 역할을 한 분들이다. 그리고 그 서론의 마지막 문장에서 콘라디는 엘렌 화잇에 관하여 그녀는 자기 자신의 과오가 조금도 없는 권위를 갖었고 주장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리하여 그가 그것을 분쇄하려고 하는 한 독단적인 경우를 확립했다.
7. 계시에 대한 비방
유산된 19세기의 영국에서 재림의 각성을 고상한 것으로서 칭찬한 후에 그는 미국의 모조적인 재림 운동이라고 대조시켰다. 그 다음에 엘렌 화잇의 첫 계시가 1844년 12월 22일이라고 2번 확인한 후에 사실은 그 계시의 정확한 날짜의 기록은 없고 단지 12월 어느 날이라고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콘라디는 그녀의 공상적인 계시 그녀의 환상적인 계시라고 그것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간질병이라고 비난한 Canright의 비방을 반복하고 그는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 화잇 부인의 주장을 혹평한다. 그는 Crozier의 가설에 꿰어 맞추기 위하여 그녀가 고안해 낸 거짓 계시에 관해서도 시사했다. 그 다음 다른 페이지에서 그는 화잇 부인이 과오가 없는 계시라고 하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했다고 비난했다. 콘라디는 1847년 4월 3일의 화잇 부인의 계시 하늘 성소에 관한 지어낸 계시 기만하는 행위의 계시라고 말한다. 이것들은 그가 사용한 형용사들이다.
8. 사실들에 의하여 주장들이 폐지되었다
콘라디의 정확한 지식의 부족과 그의 주장의 조잡함과 무책임함은 1846년 2월 7일자 Daystar Extra에 관하여 그가 강조한 말 중에 나타난다. 그것에 관해서 화잇의 도서실이나 어느 다른 SDA도서관에도 그 한 권의 완비된 책이 없다고 말했다. 정반대로 본 저자는 콘라디가 그 원본을 최초로 보기 전에 오하이오주 클레브랜드의 Western Reserve Historical Society에서 이 Extra의 사진판을 먼저 구했다. 그리고 이것은 신학대학원이 워싱턴에 있을 때 그 도서관에 있었고 지금은 Andrews대학교 도서관에 비치해 있다. 어떤 다른 도서관들은 물론 화잇 출판위원과 Riview and Herald도서관들에도 각각 그 책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콘라디의 지독한 소책자가 출판되지 전이었다. 이것에 첨가해서 35페이지에서 콘라디는 1848년 8월 18일에 받은 소위 허위의 계시 중에서 인용할 때 단지 일부분만 인용함으로 약삭빠르게 화잇 부인을 비난한다.
9. 화잇 목사님과 Andrews 목사에 대한 흉악한 비난
42페이지에서부터 시작하여 출판하인 제임스 화잇 목사를 생략, 배합과 환상적 해석의 약삭빠른 출판을 했다고 비난했다. 콘라디는 또한 제임스 화잇은 어리석은 것은 물론 이중인격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계획적인 경건한 사기성이 바람직하지 못한 점을 꾸며서 말했다고 주장함으로 입증된다고 했다. Andrews에 관하여 콘라디는 그의 독선적인 정신에 대하여 말한다. 정반대로 이 인용한 말은 Prophetic faith에 보존되고 문서화되어 있다. 그런 것들이 콘라디가 그 독선적 주장들 때문에 SDA와 인연을 끊은 이유들이라고 말한 것 중에 일부이다.
10. 재림 운동의 주장을 거부함
그는 그 자신의 예언적 진리의 추진력이란 책을 칭찬했으나 그 책은 대부분 큰 결함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이 1939년에 나온 소책자 60-62쪽에서 콘라디는 계14:6과 그에 수반된 기별 바벨론이 무너졌다. 거기서 나오라는 기별을 먼저 외치고 참으로 전한 사람은 루터였다고 주장한다(계 18:4). 그는 루터는 계14장에 있는 이 신성한 기별들 위에 그의 개혁 사업을 기초했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우리의 뒤늦은 운동과 기별의 가치와 독특성을 폐지시키려고 노력했다. 콘라디는 그의 공격을 끝마치면서 화잇 부인은 거짓 여선지자요 우이 교단의 주장과 견해는 비성서적인 오류에 기초되어 있다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이상이 콘라디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1888년의 기별을 최초에 저항하고 거부하고 그 다음에 그런 반대자들에 대한 예언의 신의 권면들의 경고들과 탄원들을 거절함으로 생긴 비극적인 열매였다. 그리고 이리하여 그에게만 개인적으로 한 것이다. 그것은 최후로 믿음을 거부하게 되는 길에 있는 첫 단계를 취하는데 대한 엄숙한 경고로 남아 있다.
부록 E
논거가 빈약한 미네아폴리스 기별을 지도층이 거절했다는 비난
1. 충분한 사실을 알기 위하여 40년 연구 1930년 봄에 A. G. Daniells는 한 젊은 조력자인 나에게 이 운동과 그 근본적 가르침 특히 1888년과 그 후에 있어서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미네아폴리스 기별의 참 생0적 이야기 전반에 관한 이해하기 쉬운 연구를 해보라고 명령했다. 이 위임을 받은 후 항상 나는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사실 수집, 증거 수집, 개인들이 질문은 다른 이들의 경험들과 확신들을 등한시하지 않을지라도 이 운동에서 여러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지도자들이었던 분들 중에서 대부분 한 것이다. 나는 특히 88 총회에서 직접 참석하고 계속해서 책임 있는 이치에 있었던 자들이 말한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갖었다. 이들은 발전들, 상태들, 태도들, 바꾸어 말하면 그 경우에 있는 사실들의 개인적인 지식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이 일을 함으로써 나는 만족스런 보상을 받았다. 이 방대한 문제들의 더 큰 발견은 이 책 중에 특히 14장과 15장에 나타나 있다. 항간에 떠도는 한 가지 문제는 1888년과 그 이후에 지도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이것은 우발적으로 생겼고 그러나 확실한 지지할만한 증거와 누가 그런 주장을 했는가에 관해서 생각난다.
2. 유력한 증거의 4개의 범주
그 연구에 포함된 사람들은 여러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다음의 대총회장들이 있다.
A. G. Daniells(1935 사망), C. H. Watson(1962 사망), J. L. Mcelhany(1959 사망), W. H. Branson(1961 사망), R. R. Riguhr와 R. H. Pierson, Daniells와 Mcelhany와는 내가 훨씬 연하였다. 침밀하게 지냈었다.
두 번째 미네아폴리스에 직접 참석한 자들 중에 내가 밀접히 잘 알고 있는 자들 A. O. Tiat와 특히 진지한 면담을 가졌고 모든 이들과 서신 연락이 있었다. 나는 A. O. Tait와 약 4년간 아주 가까이 교제했다. 처음에는 나의 00 성경 교사였고 그 후에 시조지의 편집 견습생으로 있을 때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였다.
세 번째 나는 여러 역사적인 연구자들 A. W. Spalding 특히 F. D. Nichal 최근 A. V. Olsen, Nomal Peace등과 긴밀히 교제했다. 그리고 이들보다 먼저 상당한 역사자 M. Ellsworth Olsen(1952년 사망)
네 번째 수년간 나는 우리 중에 탁월한 엘렌 화잇 자료들을 익히 아는 R. L. Odour은 물론 Arthur L. White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일한 특권을 누렸다. 이들이 연구하고 있는 요점에 관하여 증언을 첨가했다.
3. 남아 있는 그루터기는 신실함
어떤 경우에 나는 이 여러 부류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네아폴리스 총회 끝난 후에 항상 되살아난 것처럼 보이는 여러 해 만에 주기적으로 되살아난 그 비난의 주장하는 근거에 관하여 물었다. 그런 비난은 교단 전체가 혹은 최소한 이 운동의 지도층에서 Dr. E. J. Waggoner가 제시했을 때 1888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실제로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은 비판적인 비난하는 무리들 주에서 때때로 야망이 깨어진 사람 혹은 지도적인 형제들에게서 공정한 대두를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자들에게서 나왔다. 그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견해들과 추론들을 만들어서 약 20여명의 우리 교회에서 가장 유능한 잘 알려진 충실한 지도자들 모든 사실들에 접근했던 분들, 충분하고 균형 잡힌 증거를 열렬히 탐구해 온 자들에게 적용시켰다.
4. Daniells 중상들을 명백히 부정함
이 사람들을 범주별로 주목해 보라. 먼저 대총회장 중에서 나는 1926년 이후에 수년간 다니엘 장로와 긴밀한 교제를 가졌고 1935년에 그가 돌아가시기 전에 2개월간 열렬하게 그 분과 공동 연구 저술을 하였다. 이 책에서 지금 다루고 있는 것 중에서 그의 주장의 빛 중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의 많은 탐구하는 문제들 이 점을 포함해서 모든 연관된 특성들에 관해서 물었다. 그 중대한 시기의 그 전과 후에도 물론 사람들과 문제들을 잘 아는 분으로서 약 20년간 대총회장으로써 그리고 엘렌 화잇의 재산 보관 위원의 의장으로서 Daniells는 1888년 단시와 그 전후에 이 운동의 지도층은 이 기별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적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다니엘은 거의 모든 사람이 아는 것보다도 이 문제를 더욱 완전히 연구했고 그것을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지도자들과 엘렌 화잇이 요령 있게 지적한 88년과 그 이후에 미네아폴리스 기별을 거절했던 어떤 이들은 끔까지 고집부리고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다니엘은 그런 중상은 지금은 무덤에서 쉬고 있고 공격하는 자들에게 말할 수 없고 답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개탄했다. 그리고 1901년 이후 약 20년간 우리 교회의 뛰어난 지도자인 다니엘은 88년 이후 46년간 생존했다.
5. Watson과 McElhany는 꼭 같이 비난을 부인한다
C. H. Watson은 명백한 사상가이며 교회와 현대 진리에 기본적 충성과 강력한 충성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지도층의 불충성에 대한 비난에 대하여 그가 과거에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반대되었고 그런 고발은 그 시대에 사실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J. L. McElhanysms영원한 복음의 영원한 진리들을 충실히 믿는 자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리들과 준비들을 어디까지나 충실히 믿었고 나와 오랫동안 친밀했던 분으로써 그런 막역한 유감스러운 비난들에 대하여 깊이 괴로워하면서 그들은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했다. 그가 느낀 대로 하면 그들은 궤변이고 증거의 왜곡된 평가 혹은 풍문이다 불평에 기초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런 중상은 과고와 현재의 지도자들에 대한 거룩치 못한 허위 선전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내용을 그는 강력히 약정했다.
6. Branson - 죄를 뒤집어 씌우는 증거는 없다
W. H. Bramson은 같은 정신으로 강조해서 그의 선임자들의 태도와 행위와 영향을 상당히 연구했다. 그는 그가 사용한 문구대로 비겁하게 죽은 자들에 대하여 불충실한 비난을 하는 것으로 느꼈으며 타당한 유죄의 증거가 없다고 느꼈다. 믿음과 의의 기본적인 원칙들과 준비들에 대한 그 자신의 충성스러운 견해는 그의 책에서 입증되었다.
7. Tait도 그의 부인함에 강조함
그 다음에 1930년에 약 20명 이상 그 총회에 직접 참석한 사람들에게서 기록된 회신에서 그리고 그 후 계속 봉사하고 그 후의 지도자들의 태도와 행동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온 회답 그런 불평을 한 사람들은 한 분도 없었다. 그들의 일반적인 말은 14장과 15장에 있다. 나는 수년간 시조지의 그의 3명의 보조 편집인의 한 사람으로서 A. O. Tait와 함께 봉사하며 봉사했다. 수년 후에 1930년에 다니엘로부터 나의 저서의 위임에 관하여 알았을 때 그는 1888년과 그 이후의 여러 해 동안 그도 역시 1888년 이후의 지도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준비들과 실재들을 거절했다는 것을 강력히 부인했다.
Tait는 88년 이후 수십 년간에 지도자들과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엘렌 화잇과 가까이 접촉했고 여러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화잇 부인의 개인적인 증언들 중의 많은 것들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것들은 화잇 부인이 그에게 주었고 그런 배경과 반증의 빛 가운데에서 그가 주장한 견해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봉사했다. 그는 또한 다른 주요 증인이었고 그 주장을 단호히 부인했다.
8. Prescott는 사실의 여하한 근거도 부인했다
W. W. Prescott도 1888년 총회에 참석한 분이다. 숙련된 학자로서 교회의 주요한 지위에 있었는데 4개의 대학의 학장이었고 GC부총회장, 리뷰지의 편집국장, 저자, 유니온 대학의 신학 과장인 그도 역시 1888년 이후부터 그 이후의 우리 지도자들이 나쁜 짓을 했다고 비난하는 정규적인 비평가들의 주장에 대한 어떤 근거도 완강하게 부인했다. 이것은 교회의 뜨뜻미지근하다함과 부감각을 회개하는 것과 1888년 이후의 우리 지도자들이 중대한 00를 불신함으로 죄를 범한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내가 한번 만나서 토의해 본 분인 L. H. Christian이 한 증언도 본질적으로 같다.
9. Spalding은 직접 개인적인 지식에 기초에서 부언했다.
초기 역사적인 저자들로 돌아가서 그런 비난을 정당화시킬만한 것이 아무것도 J. N. Loughbarough의 대 재림 운동(1905) 혹은 M. E. Olsen의 시초와 전진(1935)에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Loughbarough는 오랫동안 이 운동에 가담했었고 그 책은 1888년의 16년 후에 썼다. 나는 1922년에 The Watchman의 편집자들 그에게서 계승했다. 우리는 그 후에 Takoma Park에서 교제했고 그가 “군대의 장교들”을 내놓은 동안에 지주 협의했다. 그는 88년 총회 기간 동안과 그 후에 베틀크릭 대학의 신학 대학생이었다. 그 후에 신임 받는 서기로서 수십 년간 우리 지도자들과 신임이 두터운 관계에 있었다. 이 고질적인 비난을 Spalding은 상당한 감정을 가지고 부인했다. 왜냐하면 그는 계시된 진리에 불충실했다고 비난받은 사람들을 친밀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는 그 주장들이 거짓임을 알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10. 윌콕스와 니톨이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F.M. Wilcox는 33년간(1911-1944) 리뷰지의 편집자로서의 그의 전략상의 지위 때문에 우리 지도자들과 긴밀한 교제를 하면서 일하면서 GC 사무직원들의 회집에 함께 않아서 화잇 출판위원의 의장으로 일했고 태도에 있어서 조용하지만 확고한데 그도 역시 그런 이따금씩 생기는 근거 없는 비난을 개탄하며 부인했다. 한 사람도 F. D. Nichol의 자격과 예민함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Nichol은 또한 화잇 보관 위원의 의장이었다. 우리가 비평과 불만의 여러 비난들을 논할 때 우리의 1888년 이후의 지도층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불신했다는 끊임없이 괴롭히는 억측을 포함해서 논할 때가 수다하다. Nichol은 우리 역사를 철저히 연구했고 그가 표현하기 주저하지 않는 어떤 적극적인 의견을 발전시켰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런 종류의 죽은 뒤의 비꼬는 말은 비위에 맞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부적합한 증거와 흐리터분한 생각 보통 개인적인 불평에 영향을 받은 것에 기초된 주관적인 날조라고 보았다.
11. Pease와 Olsen은 그 비난은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Norval Pease는 그의 B.D.논문을 준비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엘렌 화잇 저서의 분류를 통해서 볼 때 이모용적인 주장은 사실에 기초되지 않았고 의심과 일방적인 재료에 기초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끝으로 다년간 재림교회 최고 수준에 있었다. 그는 또한 엘렌 화잇 출판 위원의 의장이었다(1953-1963). 그 앞에 충분히 있는 이 주장에 관한 증거를 가지고 고심한 연구 후에 그릇된 전제와 잘못된 결론에 기초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를 지도층에서 거부했다는 그 주장을 완전히 배격했다.
12. 화잇과 Odom - 지지할만한 증거가 없다고
이제 화잇 출판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의 증언으로 돌아가 보자. 기록한 바와 같이 W. C. White은 미네아폴리스 총회 이후에 6개월간 GC의 실질적인 회장이었다. 그는 1888년 이후 26년간에 화잇 부인의 공중 앞에서 말과 사사로이 한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비난에 관한 인쇄된 주두의 견해를 안다면 W. C. White일 것이다. 그런 지식에 기초한 그의 답변은 결정적으로 정당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1888년 11월에 Smith Sharp와 O. A. Alsen에게 편지로 기록했다. 기록한 바와 같이 오늘날 살아 있는 두 분은 첫째는 Arthur L. White이요, 그 다음에는 R. L. Odom이다. White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전제의 엘렌 화잇의 저서들의 내용을 잘 안다. 그리고 Odom은 그가 3년간 엘렌 화잇 저서의 3권의 인덱스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 다른 이보다도 그 책을 잘 안다. Arthur White은 엘렌 화잇 지하실 모든 재료의 관리인이기 때문에 사실들을 앎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는 지위에 있다. 그리고 그는 약 30년간 엘렌 화잇 저서들을 거의 끊임없이 연구에 종사했으므로 엘렌 화잇의 기록된 증언 전체를 충분히 알고 있으므로 1888년 단시와 그 이후에 우리 지도자들이 88에 이 백성에게 새롭게 제시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선언된 기별을 배격했다는 그 주장을 배제했다. 이것은 어떤 주장이나 보류도 없이 한 말이다.
13. 개인적인 결론
타당성이 없다. 우리의 가장 유능한 지도자들 연구자들, 역사 자들의 자격 있는 증거의 이 감명 깊은 묘사에 대하여 그 함축된 증거에 접한 나도 역시 수십 년간 어떤 이들이 연구화한 이 중상이 가끔 노출되는 것을 알고 사람들 중에서 부지런히 연구하고 이것과 이와 비슷한 비난의 진위를 결정하는 기록된 자료들을 연구한 후 나 자신의 상당한 의견과 확증을 첨가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1888년 당시와 그 이후의 지도자들의 성실성에 관한 이 전통적인 공격은 역사적인 진리나 사실에 있어서 타당성이 없는 억측이다. 그것은 엘렌 화잇 자신이 결코 믿지도 않고 말한 적도 없는 것을 어떤 예언의 신의 말씀으로서 증명하려는 시도요 예언의 신의 서적, 정기 간행물 논문이나 개인적 증언의 기록에도 근거가 없다. 엘렌 화잇은 우리 1888년 이후의 지도자들의 성실과 충성에 확신을 가졌고 그렇게 선언했다.
14. 비난을 고집함은 순전히 완고함이다
전체적인 빛과 가장 충분히 알려진 전문적으로 지도자들과 연구자들이 위치에 있는 12개 이상의 빗나가지 않은 부인한 빛 가운데서 볼 때 누구나 그런 비난을 끈질기게 계속하는 것은 순전히 완고함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언해야 할 것은 다년간 경험을 통해서 결점을 잡는 자들이나 비방자들은 편견 없는 학자들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증거나 엘렌 화잇의 어떤 말씀을 항상 인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빛 가운데에서 불 때 지도층이 거부했다는 그런 비난은 병적이요 입증되지 않는 것이요 깊이 개탄할 일이라는 것이 나의 숙고한 견해이다. 진리를 변호함에 있어서 원칙에 굳게 서고 지금 예수님 안에 잠들고 있는 우리의 과거 지도자들의 충실성을 공격하는 것이 표면에 나타날 때마다 효과적으로 부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사실들과 여기 기록한 사람들을 한 뒤로부터 나는 달리 주장할 수 없다.
부록 F
AD 31년의 오순절 날을 산출함
3개의 해마다 있는 절기들과 7개의 해마다 있는 안식일들은 고대 성소 봉사의 일을 하는 동안 매 유대 성력의 첫 칠 개월에 있다. 연쇄적으로 있는 매년 절기는 정한 날에 있었고 주일 중의 통일된 날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축제일의 날짜는 해마다 요일과는 달았고, 2년도 같은 주일의 요일에 있지 않았다. 다음 페이지에 있는 표는 AD 31년에 유월절이 금요일에 해당되는 해에 기초된 것이다. 3절기와 그 구성분자는 왼편 단에 있고 그 좁은 중간 단에 그 날짜가 있고 7개의 매년 안식일들은 그 우편에 그 조항과 함께 있다. 그 권위를 위한 참고들이 있다. 계속적인 절기들이나 의식들의 계산은 그 처음이 유월절 혹은 Nisan 14일에 기초되었다. AD 31년 유월절을 이같이 금요일에 묶어놓으면 요제절의 일자는 그 후에 오는 오순절 날짜는 쉽게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항상 Nisan 15일에 있는 무교절의 첫날 다음에 요제 절이 오는데(이 날은 오순절이 어느 요일에 해당하는가를 결정하는 시작이 되고) 그때부터 꼭 50일째 되는 날에 도표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주일 중 첫말에 해당된다. 모세의 명기한 것에 의하여 Nisan 16일에서부터 세어서 50일째 되는 날이다. 이 도표에서 첫째달인 Nisan 월에 끝 부분과 둘째 달인 Iyar월 전부와 셋째달 Sivan월의 일부분에 가서 오순절이 온다. 50일간은 Nisan 14일 유월절 금요일에서 기점을 잡은 도표에서 세어서 된 것이다. ”(운명,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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