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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가 악보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바오로가 따뜻한 차를 들고 다가온다.)
안토니오: 바오로 형님, 일찍 오셨네요! 형님, 저 이 악보 보고 한참 고민했습니다. 이거 오늘 연습할 곡 맞죠? 그런데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구분도 없고 그냥 멜로디 줄 하나만 덜렁 있는데요? 게다가 콩나물 음표도 아니고 네모난 기호들에... 반주 코드도 없고요. 저는 그 웅장한 4부 화음 부르려고 성가대 왔는데, 이 밋밋한 노래는 대체 뭡니까?
바오로: (허허 웃으며 곁에 앉는다) 아, 지휘자님이 오늘 특별히 준비하신 악보군요. 안토니오 형제님, 이게 바로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입니다. 가톨릭 교회음악의 꽃이자 서양 음악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죠. 무반주로 부르는 종교 음악의 정수랍니다.
안토니오: 서양 음악의 뿌리요? 그런데 왜 이렇게 심심합니까? 제가 전기 만지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건 마치 복잡하고 화려한 회로판을 보다가 그냥 전선 한 가닥만 덜렁 있는 걸 보는 기분입니다. 화음이 없잖아요.
바오로: 아주 정확한 비유네요. 전선 한 가닥! 즉, 화성이 없는 단일한 멜로디 라인인 단선율(Monophony) 음악입니다. 그런데 형제님, 제가 평생 땅의 높낮이를 재고 기준점을 잡는 '측량기술자'로 일하지 않았습니까? 건축물을 올리려면 화려한 인테리어보다 먼저, 절대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수준점(기준점)'을 잡아야 합니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바로 가톨릭 전례음악의 '절대 기준점'입니다. 형제님이 좋아하는 그 화려한 다성음악(4부 합창)도 사실 중세 시대에 이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단선율에 다른 성부를 하나씩 덧붙이면서 발전한 거거든요.
안토니오: 아... 그러니까 이 단선율이 모든 성가의 기초 뼈대라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이름이 '그레고리오'면, 옛날 그레고리오라는 교황님이 이 곡들을 혼자 다 작곡한 겁니까?
바오로: 많은 사람들이 교황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가 비둘기 형상을 한 성령에게서 선율을 전해 듣고 직접 작곡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유럽(로마와 갈리아) 지역에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던 성가들을 통합하고 채보(악보로 기록)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전례의 통일을 이룩한 그레고리오 교황의 이름을 상징적으로 붙인 거지요.
안토니오: (악보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런데 형님, 이 악보는 4분의 4박자 같은 박자표도 없고 마디 줄도 없네요. 정해진 박동(Beat)이 없으면 여러 명이 부를 때 엉망이 될 텐데요. 아,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이 네모난 음표들은 뭡니까?
바오로: 이 네모난 기호들은 '네우마(Neuma)'라고 부르는 독특한 초기 기보법인데, 현대 오선보가 탄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죠. 그리고 박자표가 없는 게 이 성가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고정된 박자가 아니라 **'자유 리듬(Free Rhythm)'**을 사용하거든요. 박자에 억지로 노래를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라틴어 가사의 자연스러운 억양과 강세에 따라 물 흐르듯이 유동적으로 노래하는 겁니다.
안토니오: (무릎을 탁 치며) 아하! 전기로 치면, 인위적으로 펄스를 탁탁 튕겨주는 교류(AC)가 아니라, 직류(DC) 전기처럼 기도의 흐름을 타고 저항 없이 부드럽게 쭈욱 흘러간다는 거군요!
바오로: 맞습니다! 중세 교회에서 음악은 가사(말씀)의 의미를 상승시켜 신자들을 하느님께 이끄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사 전달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반주 없이 사람의 목소리로만, 그것도 다 함께 한목소리로 부르는 '제창(Unison)'을 원칙으로 했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에서도 **"성교회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로마식 전례의 고유한 성가로 인정하며, 전례 행위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그 멋진 4부 합창보다 이게 전례에서 더 '첫 자리'를 차지한다고요?
바오로: 네. 화려함은 덜할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가장 순수하니까요. 로마 교황청에서도 여전히 그레고리오 성가가 전례에 가장 합당한 음악 형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형제님이 베이스 파트에서 묵직한 저음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성가대원 모두가 자기 소리를 뽐내지 않고 오직 하나의 선율로 완전히 일치되어 부르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를 때, 참된 일치와 기도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여러 목소리가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거죠.
안토니오: (경외심 어린 눈빛으로 악보를 본다) 형님 말씀을 듣고 나니 이 밋밋한 멜로디가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단순히 지루한 옛날 노래가 아니라,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자들이 하느님과 주파수를 맞춰 온 가장 순수한 '기도의 원형'이었네요. 제가 제 목소리 뽐내고 싶어서 화음만 고집했는데, 오늘 이 단선율을 부르면서 하나 됨의 진짜 의미를 배워봐야겠습니다.
바오로: (어깨를 두드리며 활짝 웃는다) 안토니오 형제님의 그 깨달음의 속도는 정말 빠르네요! 자, 곧 연습 시작입니다. 오늘은 우리 테너와 베이스가 나뉘는 대신, 서로의 숨소리와 라틴어 기도의 흐름에 귀를 기울이며 완전히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봅시다.
(두 사람, 서로를 마주 보고 미소 지으며 악보를 들고 자리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