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 언덕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문득 가방의 무게가 달라졌음을 깨달았을 때, 파리의 바람은 조금 더 차갑게 느껴졌다. 세라 베이크웰의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At the Existentialist Café)』 한국어판이 파리의 어느 이름 모를 골목, 혹은 카페 테이블 위에 남겨진 채 나의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해 버린 것이다. 이국의 도시에서 활자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단순한 물건의 분실을 넘어 사유의 닻을 잃는 것과 같았다. 결국 센 강변을 걸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의 낡은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 특유의 오래된 종이 냄새 속에서 영문판 «At the Existentialist Café»를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가방에 남은 유일한 책.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제한은 역설적으로 가장 깊은 몰입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낯선 언어로 쓰인 문장들을 더듬어 읽으며, 중요한 챕터는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곱씹어야 했다. 베이크웰이 묘사한 1932년 파리의 '베크 드 가즈(Bec de Gaz)' 바에서 살구 칵테일을 마시며 시작된 그들의 철학, "이 칵테일로도 철학을 할 수 있어!"라는 레이몽 아롱의 한마디가 사르트르의 얼굴을 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던 그 현상학의 기원이 영문판의 묵직한 질감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독서가 아니라, 파리의 공기를 마시며 철학자들의 숨결을 직접 대면하는 치열한 실존적 체험 그 자체였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 장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관통하는 이 명제는, 영문판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끊임없이 나의 내면을 향해 질문을 던져왔다. 한국이라는 익숙한 공간에 두고 온 수많은 이름표들이 떠올랐다. 법정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서면을 쥐고 치열하게 다투던 변호사, 누군가의 얽힌 삶을 풀어내려 애쓰던 조정위원,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자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견고한 껍데기들. 59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회가 나에게 부여하고 나 스스로 구축해 온 그 화려하고도 무거운 '본질'들은, 사실 진정한 나의 '실존'을 가리고 있는 기만(mauvaise foi)의 장막은 아니었을까. 사르트르의 통찰처럼 인간은 미리 그려진 설계도나 목적 없이 세상에 먼저 내던져진 존재다. 우리는 끊임없는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창조해 나갈 뿐, 그 어떤 직위나 계급, 명칭도 결코 '나'라는 존재의 근원적 자유를 대신 설명해 주지 못한다. 나는 몽마르트에서 책을 잃어버린 그 순간, 나를 겹겹이 포장하고 있던 직업과 명성이라는 본질마저 파리의 돌바닥 위에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벌거벗은 실존'으로서의 나 자신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 사유의 연장선에서 찾아간 몽파르나스 묘지는 고요하고도 묵직했다.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나란히 잠든 합장묘 앞에 섰을 때, 베이크웰의 책 속에서 읽었던 보부아르의 죽음에 대한 서늘하고도 애절한 통찰들이 뇌리를 스쳤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육체적 쇠락과 죽음을 지켜보며,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기록한 『아주 편안한 죽음』 등을 통해 인간의 필멸성을 뼈저리게 응시했다. 책 속에서 그녀는 죽음이란 결코 추상적인 철학의 대상이 아니라, 타자의 부재를 통해 내 세계의 일부가 찢겨나가는 생생하고 폭력적인 사건임을 고발했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갈라놓는다. 내 죽음은 우리를 다시 결합시키지 못할 것이다."라는 보부아르의 건조하지만 가슴을 울리는 체념 속에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무(無) 앞에서도 끝내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고 연대하려 했던 두 실존주의자의 치열한 삶이 녹아 있었다. 그들의 묘비 위에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남겨둔 지하철 티켓과 돌멩이들을 바라보며,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가 생전에 던졌던 주체적인 선택의 궤적들은 타인의 실존 속에 이토록 짙게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페르라셰즈 묘지에 잠든 모리스 메를로퐁티에게로 이어졌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engagement)이나 보부아르의 윤리학과는 또 다른 결을 지닌 메를로퐁티. 그는 순수한 의식이나 절대적 자유의 고립에서 벗어나, 세계와 얽혀 있는 '신체화된 주체(embodied subject)'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세상을 지각하고 타인과 교차한다. 영문판 책의 거친 종이 질감을 느끼는 손끝, 파리의 가을바람을 맞으며 묘지의 흙길을 밟고 서 있는 나의 두 발, 책을 잃어버린 당혹감과 이국적인 풍경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이 교차하는 생생한 감각들. 메를로퐁티의 무덤 앞에서 나는, 나의 실존이 그저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관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파리의 대지 위에 두 발을 딛고 숨 쉬고 있는 나의 신체적 현전(presence) 그 자체임을 실감했다.
이 여행은 단순히 책 한 권을 잃어버리고 새로 산 해프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규정하던 단단한 사회적 수식어들을 모두 벗어던지고, 오직 책 속의 문장들과 파리의 묘지들이 건네는 침묵에 기대어 '나는 누구인가'를 근원적으로 묻는 거대한 철학적 여정이었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산 그 두꺼운 영어 책의 모서리가 닳아갈 만큼 같은 문장을 두 번 세 번 거듭해 읽어 내려가던 밤들. 그 밤들은 법률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나라는 존재의 텅 빈 자유를 직시하는 서늘하지만 황홀한 시간이었다.
실존주의는 그저 과거의 우울한 철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내게 "너는 네가 선택한 결과물들의 총합"이라며,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떠한 직함이나 명분의 그늘에 숨지 않고 나만의 선택으로 채워 나가라는 강렬한 초대장이었다. 몽파르나스와 페르라셰즈에서 만난 영혼들, 그리고 가방 속에서 나와 함께 호흡했던 베이크웰의 문장들은 내게 묻고 있었다. 변호사라는 직업,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역할을 모두 지워버린 텅 빈 무대 위에 홀로 섰을 때, 너는 도대체 어떤 자유를 노래할 것인가.
책 한 권만을 의지해 스스로의 내면을 끝없이 파고들었던 파리에서의 이 고독하고도 충만한 시간은, 남은 나의 삶이 끊임없이 '본질'을 부수고 나침반 없이 '실존'의 바다를 항해하는 눈부신 여정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나는 여전히 밀린 서면들을 정리하고 제출하기에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