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자주 쓴다. 이 말 속에는 다른 것에 비하여 변화의 속도가 느린 강산마저도 변한다는 사실보다는, 세월이 무상하다는 의미나 이런 강산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이미 많이 달라져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이런 제반 현상의 변화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하루가 다르게 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현실이 바뀌고 있으며, 우리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들은 변화하고 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우리들의 겉모양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이에 따라 행동마저 바뀌고 있다.
그런데 60년이라면 얼마나 바뀔까?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아직 60년을 살아보지 못하여, 그 변화의 실체와 정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마도 처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정도의 추측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추측만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도 없다. 실제로 그 실상을 눈으로 확인하여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이 글은, 60년을 넘는 세월(공식적으로 1936년에 등단하였으니 1998년 현재까지 정확하게는 62년) 동안 우리 근대 시문학사에서 꾸준히 시 창작을 하면서, 우리 근대 시문학사와 이런 시를 가르치는 학교 교육에서 일정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시의 변화 양상을 살피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먼저 이 글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시인 서정주는, 일제 강점기인 1915년에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속칭 질마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이 당시 대표적인 민족 자본가이자 민족 지도자(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였던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일가의 농토와 소작인을 관리하던 부친 덕분에, 경제적인 곤란을 겪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개명하여 근대 교육을 받았으나, 그의 어머니는 이런 근대와는 거리가 먼 '신라'와 같은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따라서 그는 근대적인 문물들이 다양한 형태로 자리잡기 시작하는 도시(줄포에서 서울까지)적인 삶과,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시골(질마재)의 원초적인 삶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일제 강점, 민족 해방, 6.25 전쟁, 분단된 국가, 독재 정권의 횡포, 민중들의 피맺힌 반독재 투쟁과 같은 민족사의 파란만장한 여러 우여곡절들을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그리고 이런 체험을 시라는 언어 예술을 통하여 꾸준히 형상화하고 있으며, 이런 시적 체험은 다양한 시각에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우리 현대 시사에서 대표적인 원로 시인으로 대가(大家)를 이룬 시인으로 비추여지기도 하고, 때로는 일제와 독재 권력의 주변을 맴돈 훼절(毁節) 시인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서정주와 그의 문학에 대한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학교에서도, 그의 명망(名望)과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영욕(榮辱)이 부침(浮沈)하는 곡절을 겪고 있다.
이제 서정주의 시적 편력과 그 의미를 본격적으로 살피기 전에, 서정주를 이야기하는 이유를 간단하게 밝힘으로써, 이어질 논의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해 보자. 첫번째 이유는 서정주의 작품이 우리 근대 시사에서 만만치 않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양적으로는 1000편에 가까운 작품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작품의 질적 수준도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서정주의 시작품은 한국 근대 문학사나 근대 시사를 기록하는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의 이러한 문학적 성과는 곧바로 중고등학교에서의 문학 교육을 위한 제재로 활용되고 있다. 서정주와 그의 문학은 문학사적으로는 물론 문학 교육에서 중요한 성과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제반 현상의 원인을 제대로 밝히고 그 의의를 살피는 것은, 우리 문학사의 한 부분에 대한 실체 구명과 문학 교육의 현황 점검을 통하여 그 올바른 방향을 정립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Ⅱ. 순수시의 논리와 교육 이데올로기
서정주는 유년기를 지나자마자 원초적인 서정을 간직하고 있는 고향에 대한 여러 추억들을 뒤로하고, 근대 문물이 막 들어온 또다른 세계인 도시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 곳에서 그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보다는 불교의 세계를 접하거나 고민 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인다. 더구나 이런 그가 시작(詩作)을 시작할 무렵은 우리 사회가 일제 강점의 질곡 속에서도 근대적인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때였다. 이미 김기림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 이상의 초현실주의가 실험되고 있었으며, 서정주 역시 이들의 주변에 있던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따라서 서정주의 시는 김기림이나 이상 등과 같은 1930년대 시인들이 극복 대상으로 삼았던, 1920년대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는 다른 곳에서 출발점을 삼고 있다.
이 당시 그의 문학적 체험은 다양한 편력을 보여주고 있다. 회고에 의하면,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적인 육체성에서 출발하여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에 이어지는, 인간성을 신성으로까지 추구하는 초인(超人) 정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그의 이런 지향은 고대 이스라엘의 기독교 구약성서에 보이는 양명성(陽明性)이 헬레니즘 신화와 맥이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에게 영향을 준 대표적인 해외 문인으로는 인간 질곡의 밑바닥을 떠메고 형벌 받은 시인으로 살았던 보들레르와 자연에 자리하고 살았던 시성(詩聖) 이백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 시인으로는 김영랑에게서 우리말의 달갑고 떳떳함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 국창(國唱)의 가락을 듣는 것 같은 황홀감을 느꼈다고 쓰고 있다. 이에 비하여 형용 수식적 시어 조직에 의한 심미 가치를 형성하고 있는 정지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옷을 입히지 않은 내심의 밑바닥에서 꾸밈없이 그대로 솟아 나오는 어풍(語風)을 보이는 이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런 문학적 체험을 배경으로 서정주는, 체험을 강조하면서 이를 구상적 이미지로 표현하여야 한다는 시론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우리가 근대시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서정시를 감정 표현 위주로 설명하였던 일본인들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이런 비판을 통하여 시가 감정과 지성의 정신 전부를 담을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감정과 지성이 일체가 된 상태에서 제일 밝은 눈으로 아[知]는 상태를 시적 체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이런 시적 성취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시가 체험의 산물이 되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R. M. 릴케는 그의 [말테의 수기]에서 "시는 감정이 아니라 체험이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어떤 어린애도 시를 쓸 것이 아니냐."는 뜻의 말을 했다. 그는 감정이 아닌 체험이 시라고 하였고, 이 시 체험이란 것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이 시적 체험이라는 것을 요량(料量)해 보면 그것은 울음이나 환희의 마지막 것인 동시에 그뿐만 아니라 또 제일로 잠 잘 깬 밝은 눈의 이해임에 틀림없다. 100 퍼센트의 감동과 100 퍼센트의 앎[知]이 합해진 상태 -- 이것이 시의 체득임엔 틀림없다. (중략) 시를 만일 이와 같은 지혜와 감정의 -- 즉, 전 정신의 체험의 길로 정하고 나간다면, 감정이 쉴 때는 지혜를 가지고 겪고, 지혜보다는 감정이 더 움직일 때는 또 그것을 가지고 겪고, 둘이 합해서 나타날 때는 또 그걸로 치러나가고 해서 시정신의 탐구엔 공백이 없을 것이고, 공백이 없는 곳에 매너리즘도 깃들일 여지가 없을 것이다.([시의 체험], {전집}2, 18면)
또한 이런 작자 자신의 체험을 독자가 방불하게 겪어 감동에 이를 수 있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통한 전달, 즉 형상화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이런 형상화를 이미지 즉 구상(具象)을 통하여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시의 암시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으로 겪는 다섯 가지의 구상 중에서도 더 많이 눈과 귀가 겪는, 시각적 구상과 청각적 구상의 가장 효과적이고 정리된 시적 조직을 통해서 줄밖에 없다."([시의 암시력], {전집}2, 50면)고 단정하고, 시를 쓰는 사람이 이미지(구상)를 형상화하는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무래도 여기엔(시로 표현하는 일 -- 필자주) 먼저 시각적 구상의 어떤 것에 비교해 표현하는 길 이상의 것이 없다. 음악이라면 물론 그 기막힌 감동에 맞추어서 한 곡조의 노래를 우리의 귀에 보내야 하리라. 그러나, 시면 먼저 그 기막히는 모습을 무엇에건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가 시각의 이미지들을 잘 짜서 거기 다시 음향의 조화까지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이 이미지의 비교를 한참 계속하고 난 뒤의 일에 속한다. (중략) 시의 언어의 음향의 암시력은 회화적 영상들이 시인 자신에게 최상의 간절감을 주며 구축되었을 때, 비유해 말하면 연꽃을 에워싸고 도는 적당한 바람과 같이 거기 일고 엉기는 것이다. 시인 자신을 감동시킨 영상 구축의 힘이 그 음악성을 대동하게 되는 것이다.([시의 암시력], {전집}2, 50~51면)
이처럼 서정주는 시각적 이미지의 형상성을 시 창작의 기초로 보고, 이와 더불어 언어의 음악적 특성 즉 청각적 이미지가 뒷받침되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그는 시적 형상화에서 체험과 이미지를 중요한 요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적 실천은 이런 두 측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서정주의 시세계에서 {화사집}과 {질마재 신화}로 대표되는 초기와 후기는 체험 세계의 형상화와 관련이 있다면, {서정주 시선}이나 {동천}으로 대표되는 중기는 시의 언어와 그 언어로 표현되는 이미지의 형상화와 연결된다.
또한 이런 시론을 기반으로 하여 서정주는 현실의 정치적 문제에 주로 관심을 보이는 일련의 시를 비판하고 있으며, 같은 맥락에서 일관되게 순수시의 시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점은 일찍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를 극복한 계기와도 관련이 있으며, 초기의 일부 모더니즘시에서 보이는 진보적 성향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순응주의로 나아가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해방 정국에서 좌파 문인들과 대결 구도 속에서 그가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하면서, 그의 이런 관점과 시적 경향은 더욱 견고한 틀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런 해방 직후의 변화 모습을 다음의 글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의미(사상이 시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생리적 질서와 그 관문을 통과한 표현이어야 함 ─ 필자주)에 있어서만이 사상은 시와 서로 관련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상이 바로 시라는 의미에서의 관련과는 스스로 문제가 다르다. 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시의 사상이 아니라 사상의 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류의 시 기록자가 사상가요 시인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 시적 사상가들에게도 또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저 프리드리히 니이체류의 자가류(自家流)의 사상가들이요, 또 하나는 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선전원인 프롤레타리아 시인들과 같은 아류의 사상가들이다. 조선에도 이 두 부류의 시적 사상가들은 존재해 있다. 유치환이라는 사람의 장래를 나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사람중의 하나이거니와, 그에게 있는 표현 시험자로서의 시인의 일면을 제한 또 다른 반면(半面)을 나는 전자의 경우라고 생각하고, 남로당과 문학동맹 소속의 시적 선전원들의 대부분을 후자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시와 사상], {전집}2, 324~325면)
이 글은 해방이 되자마자 문단의 주도권 장악을 꾀했던 좌파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대한 비판의 일 절이다. 이 때 서정주가 내세운 논리는 순수 문학 또는 순수시라는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순수는 다분히 경향 문학에 대한 반발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서정주는 이런 순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는 "1930년대 중기로부터 해방 전 사뭇 통속 문학과 경향 문학 -- 그것도 주로 정치적 경향 문학 이외의 모든 문학 조류를 총칭하는 말"([사회 참여와 순수 개념], {전집}2, 292면)이라고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이런 계급 문학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서의 순수의 정의는 해방 정국의 시적 실천에 그대로 적용되게 된다. 그러나 이 당시 그가 내세운 순수의 실상 역시 우파 또는 자유 민주주의의 정치적 이념을 표방하는 또다른 차원에서의 정치 사상적인 문학일 따름이었다.
문학사적으로 이런 민족주의 좌파 문학과 우파 문학의 이데올로기 대결 국면은, 해방 정국이라는 상황이 단독 정부의 수립이라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게 됨에 따라 해소되게 된다. 더구나 6.25 전쟁이라는 동족간의 피의 상잔을 겪은 뒤에는 좌파의 논리는 사라지고, 우파의 논리만이 우리 문학사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따라서 그의 순수의 개념 역시 "대한민국의 수립과 아울러 불순수한 좌익이 다수의 해방 전의 순수 작가·시인들을 몰고 잠적하고 말자, 그 따로이 말자고 할 것없이 통속에 대한 상대 관념"(위의 글, 294면)이라고 다시 정의될 수밖에 없었다. 즉 '반공'을 국시(國是)를 앞세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수립 이후에는 계급 사상이 부정됨에 따라, 서정주가 주장한 순수시라는 시적 지향('청문협'과 이후 '한국문인협회'의 시적 지향)은 자연스럽게 우리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수의 의미는 계급 또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개념을 통용되게 된다. 즉 정부의 수립과 6.25 전쟁의 상처는 우리 문학사를 더욱 왜곡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계급 문학에 몸을 담았던 전력이 있는 시인들이나 그들의 시는 우리 문학사의 서술에서 제외되었으며, 비록 부분적으로 언급되는 경우에도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그 단적인 예가 박영희가 전향을 선언하면서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계급주의 이념인 '붉은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이와는 상대되는 사상만이 순수한 것이자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우리 문단의 주도권 세력의 변화와 과거 우리 문학사에 대한 이해의 왜곡은 문학 교육의 국면에 그대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정부 수립 이후 우리 교육은 새로운 국가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방향에서 정립되었으며, 문학 교육도 이런 방향에서 한 걸음도 비켜 설 수 없게 된다. 우리 시 교육 역시 이런 방향에 충실하게 복무할 수 있는 순수시 중심으로 짜여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해방 이후 서정주가 일관되게 주장했던 순수에 포괄될 수 있는 문학만이 교육 제재로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그가 개념 정의한 순수의 입장에서 보는 문학관만이 교육의 관점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서정주는 이런 배경들을 바탕으로 해방 문단에서는 물론 우리 문학 교육의 여러 국면에 견고한 성을 구축하게 된다.
Ⅲ. 자기 드러내기의 시적 편력과 그 의미
앞의 장에서 서정주의 시론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그가 체험과 이미지를 시적 형상화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과 이런 요소들은 그의 시세계의 변화에도 일정한 관련이 있음을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장에서는 그의 시적 편력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 의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즉 시인의 생각을 나타낸 것이자 논리적 근거로서의 시론이 구체적인 작품 창작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그의 시세계의 변화를 시기별로 구분하고, 이런 시세계가 그의 시와 문학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나를 살필 것이다. 특히 각 시기를 대표하면서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그 의미를 설명하여 이후 논의의 기초로 마련하고자 한다.
서정주의 시적 편력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보면, 먼저 보들레르와 니체, 희랍 신화의 영향 아래 자신의 온몸을 보여준 시기인 초기와 해방 이후 순수시의 논리를 표방하면서 우리 민족의 전통과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였던 중기, 소박하고 진솔한 삶이 어우러진 고향의 이미지와 방황하는 떠돌이의 삶을 표현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이 때 초기에는 그의 해방 전 창작으로 1941년 간행한 {화사집}이 대표적인 시집이며, 중기는 대략 제2시집 {귀촉도}에서부터 1972년 {서정주문학접집}까지, 후기는 {질마재 신화} 이후의 시 창작이 이에 속한다. 물론 이런 시기 구분은 각 시기의 특성과 해당 시집의 주조가 일치하느냐는 여부를 주목한 대략적인 나눔이다.
또한 이런 시기 구분에는 다음과 사항들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한계를 전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들 시집의 시세계가 앞뒤의 시기와 일부 겹치거나 교섭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으로, 어떤 시집이 어느 한 시기의 경향만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후기에는 많은 시집들이 간행되었으나 이 범주에 속하는 시집은 {떠돌이의 노래}, {안 잊히는 일들}, {팔할이 바람}, {늙은 떠돌이의 시} 정도이며, 마지막으로 아직도 서정주의 시세계는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진행형의 상태라는 점이다. 특히 후기의 작품군에서 제외한 작품들은 노년기에 세계 각국을 유랑하면서 쓴 여행 시편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 역시 문학적으로는 시인 자신의 삶과 관련시켜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발가벗은 인간의 자기 고발
서정주의 시세계에 대하여 설명을 할 때, 인생파나 생명파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개념은 그가 1949년 {조선명시선}을 편찬하면서 사용하였던 규정으로, 자신을 포함하여 주로 {시인부락} 동인들의 시적 경향과 {생리}의 동인이었던 유치환을 염두에 두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인생파라는 용어는 일본의 현대시사의 '인생파'와 혼동하는 일이 있으므로, '생명파'라고 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는 의견도 첨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근·현대 문학사에서는 김동리, 서정주, 오장환, 김달진, 함형수, 유치환, 조연현 등을 생명파에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정부 수립 이후 우리 문단에서 소위 '문협 정통파'의 적자(嫡子)라고 할 수 있는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유치환을 일컫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런 생명파의 시적 경향에 대하여 그는 "사람의 기본적 가치 의식, 그 권한 의식 -- 이런 것 때문에 질주하고 저돌하고 향수하고 원시 회귀하고 하는 시인들의 한때가 왔다. 그들은 그들이 왜 그러는지의 역사적 의의를 두고 체득하고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마치 자연히 그리된 것처럼 1930년대 후반기의 일정치하 민족의 최후 질곡이 시작될 무렵, 나체(裸體)로 일어서 있었던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에는 이 유파가 목적 의식을 가진 동인 활동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며, 인간적인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서 출발하여 자신들의 발가벗은 나체를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즉 생명파가 인간 본연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을 그 근본 정신으로 삼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서정주 개인적인 시세계를 논의할 때, 이런 생명파의 경향을 보이는 시로는 초기시인 {화사집}에 수록 작품을 주로 꼽는다. [자화상], [화사], [문둥이], [대낮], [맥하(麥夏)], [바다] 등이 그 예이다. 이제 여기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시적 방식의 하나인 [자화상]을 통하여, 이 당시 그가 지향했던 시세계의 면모를 살펴보도록 하자.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를 닮었다한다.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어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詩의 이슬에는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註. 此一篇昭和十二年丁丑歲仲秋作. 作者時年二十三也
-- [자화상]의 전문({시전집}1, 35면)
1937년에 쓴 이 시는 자신의 생애에 관한 전기적 사실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년이 된 시의 제작 시점까지의 체험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즉 마름이었던 아버지와 늙은 할머니, 늘 가난하였던 어머니, 외할머니, 바다에 나갔다가 죽은 외할아버지, 그리고 그 외할아버지를 닮은 손톱이 까만 어머니의 아들인 '나'가 등장 인물로 설정되고 있으며, 이런 인물들의 삶을 통하여 나의 모습을 뒤돌아보고 있다. 이처럼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는 숨길 것이 하나도 없는 투명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그래서 시인 서정주가 독자를 의식하여 세상을 향한 목소리의 일성(一聲)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는 때로는 죄인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천치로 보이기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이런 부끄러움은 전적으로 자신을 향한 것으로, 그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천형(天刑)과 같은 것이었다. 서정주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뱀([화사], [대낮], [맥하])이나 문둥이([문둥이], [맥하])와 같은 원초적인 시적 상징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은 이 시에서 '종'이라고 표현된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마름의 아들로, 불운한 운명을 타고난 어부의 손자로 태어난 손톱이 까만 아이에게서부터 연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나 삶에 대하여 '뉘우치지' 않는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뉘우치지 않는다는 그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부끄러움과 원죄 의식을 완전히 극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찬란히 동터오는 아침에도 자신의 시의 이슬에 몇 방울 피가 아직도 섞여 있다는 표현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으며, 병든 수캐라는 자학적인 표현에서도 부끄러움은 완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서정주의 초기시는 육체와 물질적 상징의 세계를 추구한 보들레르와 초극(超克)하는 인간상을 추구한 니이체를 수용하여, 자신을 발가벗긴 원초적인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때 그의 시적 형상화의 근원으로 작용하는 것이 체험이며, 이 체험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곧바로 그의 시이기도 하다.
2. 전통과 정신의 서정화 작업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이라는 부끄러운 상처를 남겼던 서정주는, 해방 직후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순수시 또는 순수 서정시의 세계를 선택하게 된다. 이런 대표적인 시가 [국화 옆에서]({경향신문}, 47. 11. 9)이었으며, 이 시기에 간행된 시집 {귀촉도}(선문사, 1946), {서정주 시선}(정음사, 1955), {신라초}(정음사, 1960), {동천(冬天)}(민중서관, 1968) 등은 이런 그의 시적 지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즉 우리 민족과 역사 속에서 전통적인 것을 추구하고, 이를 통하여 민족의 정신사를 추적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신라 연구의 차원에서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신라 정신'과 불교적인 인연설이나 윤회설을 서정적인 언어와 시적 이미지화로 표현함으로써, 그가 해방 이후에 일관되게 주장한 순수시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들 중에서 [국화 옆에서], [무등을 보며] 등에서 자기 반성과 생활인의 철학을 보여준 서정주는, '영통주의(靈通主義)'라고 명명된 샤머니즘과 불교적 신앙관을 바탕으로 신라 문화의 신비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으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일찍이 인연을 맺은 불교에서 종교적 구원을 얻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선운사 동구]나 [동천]과 같은 작품으로, 성숙한 단계에 접어든 시인 서정주의 인간적 풍모를 유감없이 그려내고 있다. 이런 시에서 보이는 시적 언어와 비유적 이미지의 효과적인 표현은 순수시의 실체를 보여줌은 물론, 시사적으로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영예로운 찬사를 받기도 한다. 이제 이런 시 한편을 읽으면서, 그가 보여준 중기시의 세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동천] 전문({시전집}1, 156면)
우선 이 시에는 깜깜한 동짓달 밤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과 그 어두운 하늘을 날아가는 새가 그려지고 있다. 마치 한 폭의 담백한 수묵화(水墨畵)와 같은 시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시이다. 이런 풍경화를 연상하는 시적 형상 자체로도 의미는 충분히 있다. 즉 동양적 신비감에 싸인 선(禪)의 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고, 이런 분위기는 시적 정서를 형성하여 우리에게 떠나간 임과의 애잔한 사랑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떠난 임이지만 그 임을 그리는 '내'라고 표현된 시적 화자의 맑은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더구나 이런 화자의 마음을 자연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무심한 새마저도 알고 있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동양적인 시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초기시나 후기시에 보이는 산문 지향과는 전혀 다른 방식인 절제된 언어와 고도의 상징적인 수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수사적이거나 설명적인 어투를 배제하면서도 나름의 시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상징적 시어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위하여 이 시에서는 '고은 눈섭'과 '매서운 새'라는 시적 이미지가 중요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때 눈썹은 일반적으로 슬픈 운명을 지닌 미모의 연인을 연상시키는 초승달과 비유되고 있으며, 이것은 내 마음속에는 고운 것으로 '즈믄 밤에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 올려놓은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달로 표현된 눈썹은 인간의 근원적 존재를 암시하는 동시에 완전무결한 보름달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새는 이런 영원의 세계를 동경하지만 결국 한계가 있는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 아울러 어둠과 겨울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구도적 자세를 가지고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또다른 인간이라는 존재를 대비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서정주는 평범한 삶의 모습에서 진리를 찾아내고, 이를 통하여 우리 문화 전통과 정신사를 보여주고 있다. 옛날 우리 민족의 삶이 투영되어 있는 신라의 설화에서는 물론 우리 주변의 생활 속에서도 이런 진리를 찾을 수 있음을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초승달과 같은 자연 대상은 대상에 머물지 않는 새로운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으며,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도 이런 인간과 삶의 진리가 숨어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즉 그는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선운사 동구], {시전집}1, 171면)에서처럼, 없는 듯한 가운데에서 '오히려' 찾아내고 있고, '남았읍디다'라는 표현을 통해 이런 삶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3. 신화가 된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
신라와 불교에서 구원의 등불을 발견했던 서정주는, 후기시에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업보(業報)처럼 지고 있던 고향과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서 그는 '신라적인 것'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계에 이르면, 초기시와 같은 원초적인 죄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신화'라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있으며, 이런 인간들의 삶에 대하여 시인의 따뜻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지식인임네 하고 시를 쓰는 자신에 비하여 훨씬 예술과 일치된 삶을 살고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서 진솔함을 찾아내고 있다. 이제 그는 인생의 말년에 고향에 돌아와서 그 고향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고 싶은 것이며, 같은 맥락에서 후기시에 보이는 방랑과 방황은 이런 고향 찾기의 시세계라고 할 수 있다.
서정주는 이 시기 주로 자기 고향 사람들을 시적 형상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런 시적 형상을 통하여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들의 진면목을 산문적인 시로 보여주고 있다. 주로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고 소고·장고·꽹가리 잘 치고 멋 내길 좋아하고 또 건달패이기도 했던 사람들 ─ 일종의 심미파(審美派)"([질마재], {전집}3, 26면)들을 찾아서 고향 마을인 질마재로 내려가고 있다. 특히 무심하면 지나치기 쉬운 촌무지랭이들의 이야기마저도 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평범한 서민들을 그가 쓰는 새로운 '신화'의 주인공으로 격상시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이런 시세계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질마재 上歌手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을 쓴 중을 세우고, 또 喪輿면 喪輿머리에 또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上歌手는 뒤깐 똥오줌 항아리에서 똥오줌 거름을 옮겨 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 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明鏡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읍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좋게 밀어 넣어 올리는 쇠염발질을 점잔하게 하고 있어요.
明鏡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
─ [상가수(上歌手)의 노래] 전문({시전집}1, 282면)
이 시는 {질마재 신화}에 수록된 시로, 고향에서 서정주가 만난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시의 주인공인 '질마재 상가수'는 평범한 농사꾼이면서 이승에서의 삶과 저승에서의 삶에 대한 노래를 유난히도 구성지게 불러대던 '심미파'의 한 사람이다. 서정주는 이 사람들을 통하여 생활과 분리되지 않았던 예술가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모습은 '왜, 거, 있지 않아'와 같은 이 시의 일상적인 언어 표현을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나고 있으며, 일상적인 일과 삶의 현장에서 '똥오줌 항아리'를 거울 삼아 흐트러진 머리결을 손질하는 우스꽝스러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남을 의식한 거추장스러운 장식이나 체면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삶, 생활이 일이고 일이 놀이이고 예술이었던 서민적인 생활의 모습이 일상적인 이야기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시들은 더욱 현실감을 부여하고 있으며, 독자들에게는 진솔함을 느끼게도 한다.
또한 이 시기의 시들은 대부분 자신의 체험을 산문시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학교를 다니기 위하여 아버지를 따라 줄포로 이사간 10살 이전에 보고들은 이야기를 찾아서, 꿈과 같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고향 여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고향 여행에서 찾은 이야기들은 모두 자전적 체험의 내용([내 마음의 편력], {전집}3)과도 일치하고 있다. 그 단적인 예로는, 바다에 나갔다가 죽은 외할아버지를 기다리기 위해서 해일(海溢)을 피하지 않는 외할머니([해일]), 억울한 오해로 인해 첫날밤에 집을 나간 신랑을 기다리다가 재가 된 신부([신부]), 단골 무당을 뒤따라 다니던 머슴이 선무당이 되어 가는 모양([단골 무당네 머슴 아이]) 등이다.
이처럼 그가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서 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일찍이 탐구하였던 희랍 신화이나 건국 신화와 같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이나 '환웅'이나 '단군'와 같은 신성스러운 인물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이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것이며, 시인에게는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는 거울['명경(明鏡)']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이처럼 자신을 키워준 고향(故鄕)에로 회귀하고 있다. 해방 직후에 쓴 [국화 옆에서]라는 시의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시전집}1, 93면)라는 표현처럼, 숱한 인고(忍苦)의 세월을 겪은 시인이 이제는 자기 성찰의 단계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Ⅳ. 서정주, 문학과 삶의 의미
일반적으로 서정주의 시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우리 문학사의 대가를 이루고 있음이 인정되고 있다. 참으로 인간적 소재를 통하여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런 인간들이 지향하는 영원의 세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앞의 장에서 살핀 바와 같이 그는 시적 대상을 자신의 체험 속에서 찾고 있으며, 이를 적절한 언어와 이미지를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시에서 이런 의미들을 바르게 읽을 때, 그의 시적 편력도 시 교육의 차원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평가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다른 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부터 순응주의적인 문학관으로 퇴영하고 있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서정주의 시는 우리 문학 교육에서 중요한 제재로 간주되었다. 그러다가 그의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과 독재 정권에 영합하였던 전력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이 확산되면서, 우리의 문학 교육 현장에서 그의 시에 대한 교육마저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국정 교과서에서는 그의 시작품이 제외되었으며, 일부 검인정 교과서는 제한적인 관점에서 그의 시작품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문학 교육의 현실을 보면서, 해방 이후의 문학 교육에서 과거 '카프(KAPF)'나 '조선문학가동맹'에 관여하였던 사람들의 문학을 제외했던 점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과거 서정주와 '청문협'이 중심이 되어 순수 문학이나 일제 강점기 저항 문학만을 교육적 대상으로 삼았던 기준이, 현재에는 역설적이게도 이를 주창했던 서정주에게 적용된 것이다.
그동안 서정주의 문학에 대해서는 다각적이고 심층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자기 비판을 감행하면서, 그의 시사적 위상이 새롭게 정립되고 있기도 하다. 아울러 시인은 시로서 남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금이나마 삶에 문제가 있더라도 시로 이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권력이나 생활에의 유혹 때문에 생긴 시인의 상처는 치유될 수 있어도, 시에 남은 상처나 미완성의 시는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시인에게 시 외에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서정주의 문학과 삶을 읽기 전에도, 읽는 중에도, 읽은 후에도 이런 잡(?)스런 생각들이 필자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런 잡스러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와 평온을 회복하고 싶은 생각이 앞선다.
이제 서정주를 읽으면서 느낀 감상적인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가 일찍이 불렀던 다음의 시처럼, 올곧은 삶을 지켜가는 문단의 선배 시인으로, 이 험한 세상을 오래 산 어른으로, 우리가 그리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빌면서…….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처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녜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