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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22년 경원대제가 봉행된 경원재敬源齋 전경
황해도 연안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해 국자감 사문박사를 지낸 김섬한이다. 2015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연안 김씨는 총 93,38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잘 알려진 인물로는 조선 중종조의 권신 희락당 김안로, 그리고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광해군에 의해 서궁에 유폐되었던 것으로 유명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와 그의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있다.
2. 관향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지배 아래에 있다가 고구려의 강역으로 넘어간다. 시기는 불명이나 고구려의 한성 점령 이전일 것이다. 이후로는 고구려의 동삼흘(冬彡忽) 혹은 동음홀(冬音忽)이었고, 동청(冬靑)·시염성(豉鹽城) 등으로도 불렸다.
남북국시대에는 통일신라의 한주(漢州)에 속했으며 경덕왕에 의해 해고군(海皐郡)으로 개칭되었다.
다시 왕조가 바뀐 고려 초에는 염주(鹽州)라 하였다. 성종 14년(995)에 방어사를 두었다가 현종 초에 도로 방어사를 폐지하고 해주에 내속시켰고, 뒤에 감무를 두었다. 고종 4년(1217) 이 지역이 거란의 침입을 막은 공이 있다 하여 영응현(永鷹縣)으로 승격되었고 고종 46년(1259)에는 고을 사람 차송우(車松祐)[車松佑]의 위사의 공이 있다는 이유로 복주(復州)가 되었다. 이후 원종 10년(1269)에 역시 고을 사람인 이분희(李汾禧)가 위사공신에 책록되자 석주(碩州)로 이름을 또 고쳤다. 충렬왕 34년(1308) 목(牧)으로 승격하며 이름을 온주(溫州)로 바꿨고(온주목), 충선왕 2년(1310)에 모든 목을 폐하여 연안부(延安府)가 되었다.
온주목으로 승격하기 전까지 해주목에 속했으며, 10도 체계 아래에서는 관내도(關內道)에, 5도 양계 체계 아래에서는 서해도(西海道)에 속했다. 고려 중기 이후로 수도 개경(開京) 근방에 한정되었던 경기(京畿)가 확장되어 1069년 백주(白州), 재령(載寧)과 함께 경기에 이속되었다. 고려 말에는 경기가 좌/우도로 나눠지게 되는데, 이 때 연안은 경기우도(京畿右道)에 속했다. 별호는 양원(陽原)이고, 성종이 정한 또다른 별호는 오원(五原)이다.
조선 건국 후 태조 2년(1393) 각도의 계수관을 정할 때 부평(富平)과 함께 경기우도의 계수관이 되었다. 태조 3년(1394)에는 서해도가 풍해도(豊海道)로 개칭되었고, 태종 13년(1413)에는 연안이 도호부로 승격함과 함께 경기우도에서 풍해도로 이속되었다. 태종 17년(1417) 풍해도가 황해도(黃海道)로 개칭되었다. 연안은 조선 시대 때 황해도의 이름의 근원이 된 황주목(黃州牧), 해주목(海州牧)에 버금가는 고을이었으며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배천군(白川郡), 우봉현(牛峯縣), 토산현(兎山縣), 강음현(江陰縣)을 관할했다.
임진왜란 중이던 선조 26년(1593)에는 연안읍성에서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李廷馣)과 연안부사 김대정(金大鼎)이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くろだ ながまさ)가 이끌던 일본 제3군 약 5천여 명을 맞아 승리했다. 구로다는 평양(平壤), 평산(平山), 배천(白川)과 해주(海州)를 지나 연백평야로 향하고 있었는데, 곡창지대인 연백평야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연안성을 함락시켜야했다. 이런 전황 속에서, 조선은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로 쳐들어온 왜군을 패퇴시킴으로써 황해도의 곡창지대를 지켜내고 선조가 몽진해 있던 의주목(義州牧)과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를 잇는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광해군 대에는 해주목의 벽성현(碧城縣) 강등으로 황해도가 황주와 연안에서 이름을 딴 황연도(黃延道)로 개칭되기도 했다. 고종 32년(1895)에 23부제가 실시되었을 때 해주부(海州府)에 속했고 고종 33년(1896) 13도제가 시행될 때에는 황해도 연안군(延安郡)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안군(延安郡)과 배천군(白川郡)이 통합되며 두 군의 앞 글자 한 자씩을 따온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연백군 대부분의 지역이 8.15 광복 이후 그어진 38선 이남에 있었고, 이남의 연백군은 벽성군(碧城郡) 동부 지역을 편입한 후 황해도에서 경기도(京畿道)로 이관되었다. 북한은 삼팔선 이북의 연백군을 폐지하지 않고, 평산군(平山郡)과 금천군(金川郡)의 일부 지역을 편입시켜 연백을 존치했다. 이렇게 연백은 한동안 두 연백군이 공존하는 모양새로 유지되었다.
6.25 개전 후 인민군이 점령했다. 인천 상륙 작전仁川上陸作戰, Inchon landing Operation Chromite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국군과 UN군이 탈환했으나 중공군의 참전 후 후퇴하며 연백을 내줬고, 이후 재탈환하지 못하면서 연안은 가깝지만 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북한은 한국전쟁 중 북한에 점령된 38선 이남 연백군에 남연백군(南延白郡)을 설치했다. 이후 연백은 남연백군과 이북의 연백군을 거쳐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연안군과 배천군으로 재분리된다. 군면리 대폐합 전후의 황해도를 비교한 지도 1954년 북한이 황해도를 분할함에 따라 연안군은 황해남도(黃海南道)에 속하게 되어 현재에 이른다.
조선 전기의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의 연안도호부 항목은 연안의 토성으로 김(金)이 있다고 적고 있다.
3. 역사
3.1. 기원
延연安안 金김氏씨의 시조 발상과 흥성[오류]
연안 김씨의 시조 김섬한(金暹漢)은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다. 《안락당집(顔樂堂集)》, 《씨족원류(氏族源流)》,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문헌에 의하면 신라 왕실의 후예인 두 형제가 임금에게 직간을 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 형은 북빈경北濱京(오늘의 강릉)에, 아우는 시염성豉鹽城(오늘의 연안)으로 유배되었는데 이 아우의 후손이 김섬한이다. 김섬한은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명종 때 사문박사를 지내고 가세가 번창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연안(延安)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인조실록》에 실린 인목왕후의 지문(誌文) 내용도 《안락당집》, 《씨족원류》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음은 여러 자료에 담긴 연안 김씨의 연원(淵源)을 설명한 내용들이다.
먼저 《안락당집》이다. 3권의 『세계(世系)』에서 시조의 선계와 시조의 행력을 소개하고 있다.
金김氏씨系계出출新신羅라宗종姓성。初초。兄형弟제二이人인在재國국。直직諫간忤오王왕。流류遠원地지。遂수除제籍적。兄형居거北북濱빈京경。弟제居거豉시鹽염城성。因인家가焉언。 高句麗時。冬參忽地稱豉鹽城。後改海皐郡。隷西海道。高麗改號鹽州。恭愍朝。改延安府。今因之。 國국子자博박士사諱휘 暹섬漢한 是시其기後후孫손。由유博박士사公공以이上상。世세遠원無무籍적。不불可가考고。
김씨의 선계는 신라 종성(宗姓)에서 나왔다. 맨처음 나라에 형제 두 사람이 있어 직간을 하다 왕에게 미움을 받아 먼 땅으로 유배되고 마침내 제적되어 형은 북빈경(北濱京)에 살았고, 아우는 시염성(豉鹽城)에 살면서 한 집안을 이루었다. 국자감 박사 휘 섬한(暹漢)은 그 후손이며 박사공(博士公) 이상은 세계(世系)[세계(世系)]가 멀고 문적이 없어 상고할 수 없다.
遠원祖조諱휘 暹섬漢한
好호學학不불倦권。於어書서無무不불讀독。沈심潛잠聖성賢현之지訓훈。深심有유所소得득。名명震진關관西서。有유一일 按안察찰。慕모公공風풍。一일見견如여舊구。秩질滿만。載재與여還환京경。遂수登등司사馬마試시。陞승上상舍사。明명年년。登등乙을科과。授수國국子자四사門문博박士사。大대興흥儒유敎교。
원조(遠祖) 휘 섬한
학문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현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심오한 이치를 터득한 바 그 이름이 관서에 떨쳤다. 그 당시 한 안찰사가 있었는데, 그가 공의 높은 학문과 행적을 흠모하여 처음 만났지만 옛날부터 사귄 벗같이 친밀하게 지내더니, 관직이 만기가 되어 공과 더불어 서울(개경)로 돌아갔다. 곧 공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상사(上舍)에 들어가고, 다음해에 문과 을과에 등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四門博士)에 제수되니 유교가 크게 흥하였다.
(하략)
《안락당집(顔樂堂集)》 3권 『세계(世系)』
한국고전종합DB > 한국문집총간 > 안락당집 > 顔樂堂集卷之三 > [世系] > 최종정보
4권의 『지(誌)』에서는 희락당이 『세계(世系)』 기록의 근거를 밝히며 자신이 보고 들은 바와 고보(古譜)들을 두루 논증했다고 적었다. 이를 통해 현전하지 않는 오래된 족보 비슷한 문서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비록 희락당이 높은 학식으로 기억되는 인물은 아니나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인물이 논증한 후 기록했으니 믿을 만한 기록이라 하겠다.
嗚오呼호。顯현揚양先선德덕。孤고安안老로能능之지哉재。吾오宗종。自자鼻비祖조。至지先선府부君군。世세積적代대邈막。系계籍적又우沒몰。逮체我아眇묘末말。曾증高고以이上상。尙상亦역味미味미。孤고未미嘗상不불痛통慨개於어斯사。編편輯집先선稿고。旣기孤고以이見견聞문。旁방證증古고譜보。序서爲위世세系계。尾미付부于우編편。
오호라 선조의 덕행을 현양(顯揚)[현양(顯揚)]함에 내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종문(宗門)이 시조로부터 선부군(先府君)에 이르기까지 세월이 쌓여서 세대가 아득하고 또 계적(系籍)이 없어진 채 나의 대에 와서도 증조와 고조 이상은 자세하지 못하여 일찍이 통탄함을 금치 못하였다. 선고(先考)[선고(先考)]의 유집을 편집하고 이어서 내 보고 들은 것으로 고보(古譜)를 두루 논증(論證)하여 차례대로 세계를 기록하고 유집 말미에 붙인다.
(하략)
《안락당집(顔樂堂集)》 4권 『지(誌)』
한국고전종합DB > 한국문집총간 > 안락당집 > 顔樂堂集誌 > [誌] > 최종정보
약 한 세기 뒤 소성대비가 승하하자 당시 대제학이던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가 지문을 썼다. 지문에는 죽은 사람의 생애 등을 적는데, 여기 적힌 연김의 연원과 시조의 행력도 위의 자료들과 같다.
(전략)
謹근按안、王왕后후姓성金김氏씨、系계出출新신羅라王왕族족。其기後후有유坐좌直직諫간、謫적豉시鹽염城성, 子자孫손因인籍적焉언、後후改개延연安안府부。始시祖조暹섬漢한、高고麗려四사門문博박士사。
삼가 살펴보건대 왕후의 성은 김씨(金氏)로서 선계는 신라(新羅) 왕족에서 나왔다. 그 뒤에 바른 말로 간하다 죄를 입고 시염성(豉鹽城)으로 귀양간 이가 있어 자손들이 인하여 관향을 삼았는데 뒤에 연안부(延安府)로 고쳤다. 시조(始祖)는 김섬한(金暹漢)인데 고려의 사문 박사(四門博士)이다.
(후략)
《인조실록》 27권, 인조 10년(1632) 10월 6일 경오 1번째기사 인목 왕후를 장사지내며 지은 지문과 애책문. 대제학 장유가 짓다
17세기에는 송창(松窓) 조종운(趙從耘)이 조선의 여러 망족(望族)을 망라한 통합보인 《씨족원류(氏族源流)》도 만들어졌다. 이 족보의 연김을 설명한 내용도 다른 문헌과 크게 차이가 없다.
延연安안金김氏씨。金김暹섬漢한。國국子자四사門문博박士사。新신羅라時시有유王왕子자兄형弟제、以이直직諫간忤오主주意의謫적遠원地지、兄형居거北북濱빈京경、弟제居거豉시鹽염城성因인以이爲위鄕향。後후孫손暹섬漢한登등第제爲위博박士사、訓훈誨회後후學학不불倦권云운。
연안 김씨. 시조는 김섬한(金暹漢)이다. 국자감 사문박사를 지냈다. 신라 시대에 왕자인 형제가 있었는데 직간(直諫)을 함으로써 군주의 뜻에 거슬려 먼 땅으로 유적(流謫)되어, 형은 북빈경(北濱京)에 살았고, 동생은 시염성(豉鹽城)에 살면서 이를 인하여 관향을 삼았다. 후손 섬한(暹漢)이 과거에 등제하여 박사로서 후학들을 가르쳐 인도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씨족원류(氏族源流)》 中
한편, 비슷한 시기 내자시윤공파 15세 승휴(承休) 김군석(金君錫)과 승휴의 조카 복원(復元) 김지(金潪)에 의해 편집되고 1719년 기해년(己亥年)에 복원의 장남인 원성종중(原城宗中) 17세 정혜공(靖惠公) 김상훈(金相勛)이 간행한 연안김문의 첫 대동보인 《기해보(己亥譜)》의 『범례』에는 다른 자료들과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延연安안古고鹽염州주、一일云운豉시鹽염城성。高고句구麗려景경德덕王왕改개爲위海해皐고郡군。 高고麗려元원宗종以이衛위社사功공臣신李이汾분禧희之지鄕향、改개爲위碩석州주。 忠충烈렬王왕陞승爲위溫온州주、忠충宣선王왕降강爲위延연安안府부、別별稱칭五오原원。我아朝조仍잉爲지之지焉언。麗려明명宗종時시、始시祖조博박士사公공、以이直직諫간謫적延연安안、仍잉籍적焉언。
연안(延安)의 옛 이름은 염주(鹽州)이며 다른 이름은 시염성(豉鹽城)이다. 고구려 경덕왕 때 고쳐 해고군(海皐郡)을 삼았다. 고려 원종이 위사공신 이분희(李汾禧)의 고향이라 하여 고쳐 석주(碩州)를 삼았다. 충렬왕 때 온주(溫州)로 승격되었다가 충선왕 때 연안부(延安府)로 강등되었다. 별칭은 오원(五原)이다. 조선에서 그대로 따랐다. 고려 명종 때 시조 박사공이 직간하다가 연안으로 유적(流謫)되어 이에 관향이 되었다.
(하략)
《기해보(己亥譜)》 『범례(凡例)』
《기해보》의 『범례』에서 밝히는 연안 김씨의 연원에 대한 내용은 관향의 연혁을 간략히 설명하며 경덕왕을 고구려의 왕이라고 적는 사소한 오류를 빼면 지금까지 열거된 문헌자료들과 같다. 그러나 사문박사를 지낸 시조의 행력(行歷)에 관해서는 간언하다 연안으로 유배되었다고 적혀 있어 위의 자료들과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다. 왜냐하면 국자감의 사문학에서 국자학생들을 가르치던 정8품 관리가 임금에게 직간을 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두번째 대동보인 《을유보(乙酉譜)》의 『서문(序文)』에도 하술할 내용과 같이 '시조 박사공(博士公)이 직간하다 연안으로 유배당해 연안이 관향이 되었다’는 것은 근거를 알 수 없는 말이라고 이 주장을 일축하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기해보 내의 다른 부분에 적힌 시조의 행력과도 상반되기 때문이다. 먼저 《을유보》의 『서문』이다.
吾오宗종述술古고自자顔안樂락堂당始시苟구非비顔안樂락堂당父부子자先선代대之지世세派파列열祖조之지名명德덕嗟차後후人인于우何하焉언其기言언曰왈金김氏씨系계出출新신羅라宗종姓성初초兄형弟제二이人인以이直직諫간流류遠원地지兄형居거北북濱빈京경弟제居거豉시鹽염城성博박士사公공是시其기後후孫손云운顔안樂락去거古고未미遠원言언必필有유徵치而이舊구譜보謂위博박士사公공以이直직諫간謫적延연安안仍잉籍적焉언不불知지何하所소據거也야盖개博박士사公공以이文문敎교起기關관西서其기後후若약蘿나葍복之지利리賓빈皇황朝조逸일溪계之지第제名명東동選선世세爲위東동方방詞사宗종懶나軒헌公공以이文문雅아淸청謹근際제會회靖정陵릉位위登등相상有유若약文문貞정之지直직節즉批비鱗린暴폭碎쇄有유若약顔안樂락堂당之지文문章장黼보黻불聖성朝조三삼珠주聯련芳방爲위國국之지光광當당其기時시一일門문三삼中중書서二이文문衡형布포列열貂초斑반出출入입金금華화者자殆태數수十십人인一일時시搢진紳신士림林림推추之지爲위館관閣객之지主주衣의冠관之지右우莫막之지敢감京경焉언
우리 祖조上상의 來유歷래를 顔안樂락堂당이 처음 記기錄록하였으니 만약 안락당 父부子자가 아니었다면 先선代대의 分분派파와 祖조上상님들의 名명聲성 그리고 遺유德덕을 後후裔예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거기에 써 있기를 金김氏씨는 新신羅라의 王왕姓성에서 갈려 나왔다. 當당初초에 兄형弟제 두 사람이 있어 王왕에게 直직諫간을 하다가 먼 지방으로 流유配배되었는데 형은 北북濱빈京경에 가 살았고 아우는 시염성(豉鹽城)에 가 살았으니, 博박士사公공은 그 後후孫손이다 라고 하였다. 顔안樂락堂당께서 그다지 오래된 분이 아니므로 반드시 증거가 있어서 한 말일 터인데 舊구譜보에 博박士사公공이 直직諫간을 하다가 延연安안으로 流유謫적되어서 貫관鄕향이 되었다는 것은 그 根근據거가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없다.
무릇 博박士사公공이 文문學학으로 關관西서에서 出출身신한 이후 蘿나葍복公공이 皇황朝조에서 이름이 났고 逸일溪계公공의 名명聲성이 東동選선에 오름으로 해서 세상에서 東동方방의 文문章장大대家가라 하였다. 懶나軒헌公공이 文문學학과 淸청廉렴으로 中중宗종大대王왕을 만나 領영相상에 올랐고, 文문貞정公공의 곧은 절개는 惡악政정을 粉분碎쇄하였으며 顔안樂락堂당의 文문章장은 太태平평聖성代대에 輔보翼익[보익(輔翼)]을 다함과 더불어 三삼兄형弟제의 聯연芳방[연방(聯芳)]은 나라의 빛이 되었다. 당시 한 문중에서 三삼中중書서와 二이文문衡형이 나왔고 金금冠관朝조服복으로 御어前전에 늘어선 者자가 無무慮려 數수十십人인이라 당세에 높은 벼슬아치와 이름있는 선비들이 館관閣각之지主주와 衣의冠관之지右우로 떠받들어 올리니 아무 부족함이 없었다.
(하략)
《을유보(乙酉譜)》 『서문(序文)』
《기해보》의 '시조 연안 유배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아래는 《기해보》의 시조의 행력을 기술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始시祖조金김暹섬漢한。好호學학不불倦권 於어書서無무不불讀독。沈심潛잠聖성賢현之지訓훈、深심有유所소得득、名명震진關관西서。有유一일 按안察찰 慕모公공風풍、一일見견如여舊구、秩질滿만載재與여還환京경。遂수登등司사馬마試시陞승上상舍사、明명年년登등乙을科과授수國국子자監감四사門문博박士사。招초諸제生생館관下하、勸근學학不불輟철、儒유道도日일興흥、文문風풍大대振진。
시조 김섬한. 학문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현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심오한 이치를 터득한 바 그 이름이 관서에 떨쳤다. 그 당시 안찰사가 공의 높은 학문과 행적을 흠모하여, 처음으로 만났지만 옛날부터 사귄 벗같이 친밀하게 지내더니, 관직이 만기가 되어 공을 대동하고 개경으로 돌아 왔다. 곧 사마시에 합격하여 상사(上舍)에 들어가고, 다음해에 을과에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四門博士)에 제수되었다. 여러 유생들을 국자감에 모아 끊임없이 학문을 장려하여 유학이 날로 흥왕하고 문풍이 크게 떨쳤다.
《기해보(己亥譜)》 中
시조 박사공(博士公)은 관서(關西)에 이름을 떨치다 안찰사와 벗이 되어 상경, 과거에 합격해 벼슬을 받았다고 적혀있다. 관서는 서북면(西北面; 오늘날의 평안남도와 평안북도 일대)과 서해도(西海道; 오늘날의 황해도 일대)를 가리키고 안찰사는 오늘날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도(道)의 지방관이다. 이를 통해서 박사공은 본래 고려 서해도 염주에 살다가 학문으로 출세하여 식구들을 거느리고 중앙에 진출, 중앙관료로서 삶을 개척해 나갔고, 후손들은 계속해 관리가 되어 문벌을 형성해오며 사족화(士族化)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여러 기록에 관향이 오늘의 황해도 연안 지방이라고 적혀 있거나 연안 김씨라고 전해지는 김씨들[長壽][彦壽][鼎傑]이 있는데 이들은 박사공의 후손으로 계대(繼代)[계대(繼代)]가 되지 않아 김섬한을 시조로 하는 연안김문의 일원이 아닌 간언하다 유배당한 신라 왕손 형제 중 동생의 후손으로 박사공 김섬한의 윗대에서 갈라진 사람들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추정을 사실로 가정할 때, '시조 연안 유배설'이 사실이 아닌 이유로 위의 이유들 외에 김섬한이 간언하다 연안으로 유배당한 것이라면 김섬한의 후예가 아닌 이 연안 출신 김씨들의 존재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들 수 있다.
후손들을 기준으로 세대 간격을 고려하여 역산한 김섬한의 생년은 12세기 중반인데, 명종의 재위 기간(1170 ~ 1197)이 12세기 후반에 걸쳐있고, 사문박사는 국자감에 둔 정8품의 벼슬로, 실제로 존재했던 관직이므로 비록 김섬한이 《고려사》 등의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내려오는 전승은 대체로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조선 명종대 편찬된 야사집(野史集)인 《삼한습유기(三韓拾遺紀)》에는 '연안의 김씨는 백제에서 나왔으며(延연安안之지金김出출百백濟제)、광주(光州)의 김씨는 고구려에서 나왔다(光광州주之지金김出출高고句구麗려)'는 기록이 있다.
3.2. 고려 의장기 고려(918~1392)
918년, 태봉의 시중 왕건(王建)이 정변을 일으켜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태봉국 철원성 포정전에서 고려 건국을 선포,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고려는 936년 9월 일리천 전투一利川 戰鬪에서 후백제를 격파, 황산(黃山)에서 패주하던 견신검의 항복을 받아 후삼국통일을 이루어낸다.
연안 김씨의 시조 김섬한은 고려 사람으로, 12세기 중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조 연김은 문과 급제 5명, 문과 장원 1명[狀元]을 배출했다.
3.2.1. 12세기~14세기
무신정권기에 재세(在世)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조 김섬한(金暹漢) 이후 많은 후손들이 관직에 나갔다. 그중 정사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처음 이름이 보이는 인물은 원 간섭기이던 충렬왕 24년(1298) 충렬왕이 복위하자 왕명을 받아 권영 등이 인사행정을 담당했다는 기록에 언급되는 시조의 증손 김우(金祐)이다. 고려 말기 우의 손자인 나복산인(蘿蔔山人) 김도는 공민왕 20년(1371) 명 제과(制科)에 급제자 120인 중 25위의 성적으로 급제하고 귀국해 蘿나蔔복山산人인金김濤도長장源원이라는 여덟 자의 어필을 하사받았으며, 그가 살던 곳은 '팔자동(八字洞)'으로 불렸다.
3.3. 조선 어기 조선(1392~1910)
공양왕 4년(1392) 고려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 이성계(李成桂)가 왕대비 안씨에 의해 감록국사(監錄國事)에 봉해져 개경(開京)의 수창궁에서 새 왕조를 개창한다.
조선조에 들어 연김은 중전, 국구, 부마 각각 1명, 왕자비 3명(부부인 1명, 군부인 2명), 종묘 배향공신 2명[享], 정공신 5명(개국공신 1명), 봉군 7명(부원군 2명), 삼정승 6명[상신], 대제학 4명(문형 2명), 청백리 3명[淸][廉], 당상관 38명 이상, 문과 급제 163명, 무과 급제 271명, 음양과(잡과) 급제 1명, 사마시 입격 297명, 문과 장원 8명[壯元], 무과 장원 2명[武魁]을 배출한 명문으로 거듭난다.
사색 당정에 있어 연안 김씨는 주로 서인의 노론에 속했다. 동서 분당의 시발점이 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손자 심정세(沈挺世)는 연흥부원군 의민공 김제남의 맏사위이고 노론의 영수였던 문충공(文忠公)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에게 의민공은 외증조(外曾祖)할아버지이다.
3.3.1. 14세기~16세기
조선이 들어선 후 대장군공계 6세 나복산인 김도(金濤)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였고, 호부원외랑공계에서는 밀직제학공파 9세 공경공(恭頃公) 김로(金輅)가 태조의 건국을 도와 개국공신에 책록되며 세도가문으로써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평안도 정주목의 연김은 홍패 19장, 백패 38장을 받았고, 평양부의 연김은 홍패 5장, 백패 34장을 받아
각각 총 39장 • 57장으로 평안도 각 군현 단위 성본별 급제자 수 1위 • 3위를 차지했다.
생원 • 진사시 입격자를 배출한 평양의 유력 가문 중 가장 많은 수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개성부윤공파와 공부전서공파를 위시한 서북의 연안 김씨(호부원외랑공계)는 관서망족(關西望族)의 반열에 올랐다.
김사준(金思濬)과 그의 사촌동생 김사홍(金思洪), 그리고 사준의 사위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김우전(金祐銓), 김은제(金恩濟), 김지환(金智煥), 김공선(金公善), 김관기(金寬基), 김근훈(金瑾薰), 김기홍(金起鴻), 김명근(金明根), 김사만(金思晩), 김사용(金思容), 김사정(金思鼎), 김사집(金思潗), 김석보(金錫甫), 김련(金鍊), 김여제(金輿濟), 김용열(金龍烈), 김이제(金利濟), 김종철(金鍾哲), 김종택(金鍾澤), 김종택(金鍾澤), 김주항(金周恒), 김중전(金仲銓), 김진의(金鎭懿), 김진팔(金鎭八), 김창섭(金昌涉), 김창의(金昌義), 김태영(金泰泳), 등 수많은 인물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3.5.
1910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ひろひと)가 일본방송협회 라디오 방송을 이용해서 옥음방송을 하여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한반도와 한민족은 일제에서 해방된다.
이에 미 육군 제24군단이 삼팔선 이남의 한반도 및 그 부속 도서를 점령하여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조선총독부에게서 한반도의 행정권, 치안권 등을 넘겨받아 통치한다.(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삼팔선 이북의 한반도 및 그 부속 도서에는 소비에트 민정청Советская гражданская администрация이 들어서 1945년 8월 26일부터 1946년 2월 15일까지 174일간 통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