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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장 성령의 열매 – 온유(2)
마 11:28-30, 민수기 12:1-15, 시편 37편 / 찬송 : 289장
민 12:2-3 / “여호와께서 모세하고만 말씀을 나누셨느냐? 우리하고도 말씀하지 않으셨느냐?” 하고 투덜거렸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이러한 비난을 들으셨다. 3) 모세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4. 온유한 모세의 중보기도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향하여 거세게 비방하며 힐난(詰難)했지만 모세는 자신에 대한 비난에 개의치 않고 온유함으로 침묵으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며 참고 인내했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承)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여기에 더 높은 차원의 신비로운 말씀의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1. 먼저 온유함의 비밀입니다.
모세는 자신에 대한 비방과 힐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와 사명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비난과 조롱을 받을 때에 혈기와 분노를 발하면서 “좋아요! 내가 안 하면 그만이지요. 누군 이 짓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요? 당신들 두 사람이 알아서 해요!” 하며 지도자의 위치를 포기하거나 떠날 수 있었건만 모세는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도력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모세의 온유함은 출생적인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 얻어진 성령으로 말미암는 후천적인 성품이었습니다. 모세의 자기 절제는 인간의 본성적 기질로는 불가능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명을 다하고 본분에 충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온유함과 사랑함이 지도자의 최고 아름다움임을 기억하고 온유함과 사랑의 능력을 위하여 더욱 기도하고 이를 증진시켜나갈 수 있도록 지혜와 힘을 키워나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2. 기도함의 비밀입니다.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하여 그저 온유함으로 참고 인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리암의 문둥병이 깨끗하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원컨대 나의 누이의 문둥병을 고쳐 주옵소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13절)하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모세의 호소는 애절한 마음이 내포되어 있으며 누이가 고통당하는 모습이 자신 때문에 오는듯한 절실한 그의 마음이 포함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는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이렇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약 5:16).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7일 후에 미리암은 깨끗해지고 건강한 몸으로 회막 안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미리암이 진중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구름기둥의 인도함으로 하세롯에서 출발하여 바란 광야에다 진을 쳤습니다. 다시금 모세와 아론 그리고 미리암의 동역관계가 아름답게 시작된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모세처럼 온유하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에 인용하여 봅니다.
1.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7:1-5 /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왜 너희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탓하느냐? 네 눈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 속의 티를 빼주마’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줄 수 있을 것이 아니냐.
요 8:7 / 그들이 계속 대답을 재촉하자 예수께서 일어서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
모세는 의인이 아닙니다. 감히 선(善-도덕적 생활의 최고 이상)한 사람도 아닙니다. 모세라고 예외일 수가 없음을 성경에서 또 이렇게 증명합니다.
롬 3:10-12 /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는 다른 믿음의 조상들(노아, 아브라함이나 다윗)처럼 실수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모세가 하나님께 ‘의롭다’라고 인정을 받은 것은 그의 믿음(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함) 때문입니다.
갈 3:10-11 / 그렇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셈입니다. 성경이 매우 분명하게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 유대교의 율법을 고스란히 지켜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여태까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 길은 믿음의 길뿐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예언자 하박국이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사람에게 살길이 있다.”고 한 말도 같은 뜻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모세의 시대에 살았다면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렇게 충고했을 것입니다.
약 4:11-12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헐뜯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남을 비판하거나 헐뜯는다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율법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셈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판정을 내리는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그 율법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판가름이 아니라, 그 율법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12) 그 율법을 만드신 분인 하나님만이 우리들을 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구원하기도 하고 멸망시키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무슨 권리로 남을 심판하거나 비판할 수 있습니까?
모세는 남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을 비난하면서 “여호와께서 모세하고만 말씀을 나누셨느냐? 우리하고도 말씀하지 않으셨느냐?”하고 투덜거렸는데도, 모세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습니다(민 12:1-2). 모세로서는 억울하기도 하고 변명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들의 비난이 말도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였겠지만 변명한다고 하여 자기나 저들에게도 유익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듣는 이가 유익하지 못한다면 하고 싶은 말을 다음으로 미루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로부터 “옷감을 자를 때에 열 번 자로 재본 다음에 자르라”고 했습니다. 옷감을 잘못 잴 가능성이 많으며, 일단 잘못 자르면 돌이킬 수 없고 그 피해가 막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매사에 신중을 가해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가 된 형제이므로 또 그렇게 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기에 서로 모독하거나 헐뜯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몇 번인가 되새기면서 남을 위한 사랑의 동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장된 우월감 내지는 자기 정당화의 동기로 남을 파멸케 하는 비방자나 판단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의 온유함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모세가 침묵한 이유 중의 하나는 모세는 비판을 꼭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비판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흠과 티가 없도록 몇 번인가 마음에 다짐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비판을 두려워하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성숙할 수 없습니다. 건전한 비판은 개인에게는 깨달음을 주고, 공동체의 질서를 세워주는 수단도 됩니다. 하지만 비판을 하거나 받아들일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 확실한 근거에 기초하지 않은 추측성 비판은 삼가야 합니다. 의혹만으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② 상대방을 일깨워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헐뜯고 비방하려는 목적으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③ 비판은 비판으로 끝내야 합니다. 비판을 받는 일이 유쾌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무시된 채로 함부로 비판할 때, 그것은 곧 심판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심판은 개인의 인격과 공동체의 평화를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 댓글 문화가 매우 심각한 지경입니다. 근거 없는 비방성 글을 무책임하게 유포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하고, 개인의 인격을 짓밟고,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한 홍 목사의 「리더여, 사자의 심장을 가져라」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쉽다고 생각될 때, 이것쯤은 내 경험과 상식으로도 너끈히 해결할 수 있다고 방심할 때 우리는 덫에 걸리고 만다. 당신의 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당신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당신의 처세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당신은 유한한 인간에 불과하다. 조종사 가운데서도 가장 숙달된 조종사가 뜻밖에 쉬운 비행 중 사고로 죽는 비율이 높은 원인을 아는가? 너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계기판을 보지 않으므로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종사를 훈련할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계기판을 철저히 바라보고, 자신의 감을 믿지 말고 계기판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당신은 영리하다고 자부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그 영리함이 오히려 당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 당신의 인생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경솔하게 결정해 버린 일,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라고 여겨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신속하게 처리해 버린 일이 뜻하지 않게 당신의 덜미를 잡는 치명적 실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판단하시게 하라.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자꾸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라.
3.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 6:14-15 / 만일 너희가 너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다.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이 자기를 향해 투덜거렸을 때에 모세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말 같지도 않았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의 영적 상태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변명이나 대꾸보다는 저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가 필요했음을 먼저 감지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곧 이어 미리암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인해 문둥병이 왔듯이 무언가 지도자들의 불평은 곧 하나님의 책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리암과 아론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과거 아론의 행적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레위지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레위 지파의 후손들로서 아므람과 요게벳의 아들들로서 아론은 모세보다 3살 많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의 400년 종살이 마지막 부분에서 출애굽(해방)에 큰 역할을 감당하며 광야 생활을 이끈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광야의 행로에서 아말렉의 공격으로 부득이한 전투를 할 때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께 전투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는 모세의 양팔을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위로 들어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는 데에 기여하였습니다(출 17장). 그러나 아론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규례를 그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출 28:1). 여기까지는 모세와 아론이 그야말로 멋진 동역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모세의 부탁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아론은 지도자로서의 사역의 첫 출발부터 그야말로 하나님의 백성, 특히 지도자로서는 영원히 도저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실수(금송아지 – 아피스 / 애굽의 우상들 가운데 풍요와 축복의 신)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음란하게 섬기게 하였습니다(출 32장). 뿐만 아니라 산에서 내려와 그것을 보고 분노하며 책임을 묻는 모세에게 아론은 회개하기는커녕 놀랍게도 핑계(분명한 거짓말이 가미된 - 그냥 백성들이 가져온 금을 모아서 불에 던졌더니 그렇게 금송아지가 나왔다)로 일관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금송아지에 머리를 조아린 일이 있는 사람이면 자기 피붙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칼로 쳐 죽이게 하였으니 이날 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3천 명쯤 되었습니다. 그 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역병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아론이 빚어 낸 수송아지 신상을 그들이 섬긴 까닭입니다. 아니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기는커녕 그 사실을 포기하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론까지 멸하려 하셨지만 모세가 오히려 그를 죽이려면 차라리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명부에서 지워달라(죽여달라)고 중보기도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에 의해서 아론은 생명도 구하고 그 후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삼아 본문에서 아론과 미리암이 자기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본 모세는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저렇게 변명하기보다는 묵묵히 저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에도 대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계속 중보기도를 하는 모세의 이러한 모습은 악한 세상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본 받아야 할 점입니다.
▣ 결론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배워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격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회가 되는 대로 격려를 하셨습니다. 격려는 동력이기 때문에 당신의 사람들에게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 그렇게도 잘난 척한 베드로를 비롯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목숨이 두려워서 두문불출하고 있던 제자들을 비롯해 40일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 격려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허물과 실수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부터 그들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을 모습을 연구해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서로 자리다툼을 합니다. 실수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급기야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확인까지 했음에도 베드로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고향에 가서 고기나 잡으며 여생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 허망한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해변에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6). 자신을 책망하고 야단을 쳐도 얼굴을 들 수 없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끝까지 배려하시고 기적을 통해 풍성함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향해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3번씩이나 하시면서 격려해 주십니다. 이런 뜻이겠죠. “베드로야,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어. 나는 너의 과거를 이미 잊었어. 그러니 너도 그 일을 잊으렴. 그리고 자신감을 가져. 나는 네가 파이팅을 했으면 좋겠어.”
그러므로 끊임없이 십자가에 달려 저와 여러분들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십시오. 죄인을 위해 죽기까지 인내하시고 참으신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 정중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밑에 나가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갈 때 하늘의 평안을 맛보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로서 사도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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