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진 받는 날이면
2016년 7월 6일 수요일은 Y 대학교 의과대학 SVR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날입니다. 어제 SVR 병원으로 부터 내일 오전 9시 20분에 내원하라는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6개월 전에 예약한 날자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근무 약사에게 오늘은 약국을 아홉시에 출근을 부탁하고 약국 열쇠는 앞 노점상 할머니에게 맡겨 놓았습니다. 지난 밤부터 물 이외에는 금식해야 합니다. 강변역에서 2호선을 승차하고 신촌역 3번 출구로 나옵니다. 병원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하여 벌써 부터 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걸어도 10여분이면 갈수 있지만 습관적으로 버스에 오릅니다. 5분 간격으로 도착하는 병원행 버스이지만 오전 시간대에는 항상 붐비는 시간입니다. 겨우 올라탄 승객 두 사람이 자리가 없습니다. 진료 시간이 촉박하니 그냥 서서라도 가겠답니다. 병원 방침으로 입석은 불가하다고 운전 기사가 하차를 하여야 한답니다. 볼멘 소리를 투덜대 보지만 기사의 대답은 " 입석은 안되니 하차 하십시요" 간단 명료합니다. " 내가 내릴테니 저 분을 태워주세요" 젊은 여성의 다급한 소리는 그냥 그녀의 독백입니다.
본관 응급실 옆에서 하차하고 보니 시계는 09시16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본관 2층 핵의학과에서 접수를 하고 방사선 동위원소 19번 촬영실로 들어 섭니다. 심근 스캔을 하는 곳 입니다. 이미 일곱 여덟명이 의자에서 대기중입니다. 촬영실 출입구에는 호명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두서너 번 다른 환자들이 들어 가고 나온 다음에야 내 이름을 부릅니다. 의료 기기 위에 앉아서 양손을 얹고 10분 정도 지나니 끝났다는 멘트를 듣습니다. 영상 의학과에서 가슴 촬영, 심전도실에서 심전도, 그리고 채혈실로 옮겨서 혈액과 소변 채취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오전10시 19분입니다. 아침을 금식하여 허기 느낌이 오며 시원한 어름물 한잔이 그립습니다. 흰우유는 한잔 마셔도 된다고 하지만 그대로 빠져나와 병원 뒷쪽에 있는 모악산(안산)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안산(鞍山)은 산의 모양이 말의 안장(鞍裝)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일명 모악산(母岳山)이라는 이름은 어머니 품 속처럼 편안하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인가 봅니다. 산높이도 나즈막한 295.9m이며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오를 수 있는 체력 단련장이라고도 할만 합니다. 산둘레를 휘감아 도는 자락길을 데크로 조성되어 있어서 장애인도 무난히 오를 수가 있습니다. 오전에 소나기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우산은 챙겼으나 선그라스는 생략했습니다. 하늘에는 비구름은 간곳이 없고 후끈한 태양볕이 땀구멍을 모두 이완시킵니다. 치과대학 병원, 간호대학, 에비슨 의생명 연구센타, 알렌기념관, 상남경영관, 천문대,새 천년 기념관, 언어 연구 교육원, 총장 공관등을 거쳐서 무악산 입구로 들어섭니다. 언어 연구 교육원 뒷쪽에는 다서살 짜리의 이란성 쌍둥이 손녀 손자 녀석들이 다니고 있는 SVR 어린이집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이고 낮이고 손주들이 마냥 그립고 보고 싶고 무엇이든 모두 주고픈 마음 뿐입니다. 어쩌다가 어린이집에 들르는 날이면 할아버지를 외치면서 쏜살 같이 달려 나옵니다. 두 녀석이 한꺼번에 품속으로 매달리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 거립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손주 두 녀석을 한꺼번에 안아 줄 수 있었는데, 요즘은 녀석들이 더 크기도 했지만 힘에 부치는 느낌은 어쩔수가 없습니다. 보고픈 충동을 억제하면서 느려지는 발걸음에 속도를 배가합니다. 12시가 조금 지나 정상에 올라 섭니다. 오늘처럼 30℃를 오르내리는 찌는 더위에도 정상까지는 40여분이면 닿을 수 있습니다. 정상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으며 조선시대의 모습을 최근에 재현해 놓은 것입니다. 동(東) 서(西)에 두개가 있었으며 동봉수대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방마다 높은 산 위에 봉화대를 설치하여 외세의 침략이나 긴급사항이 발생하면 연기나 불을 피워서 중앙에 까지 알리는 통신 수단이었습니다. 건너편에는 인왕산이 마주하고 북쪽으로는 북한산 백운대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서울 시내가 사방으로 한눈에 들어 오며 남산과 관악산 근교의 모든 산을 조망할수있습니다. 서대문에서 구파발로 넘어가는 통일로에는 인왕산과 안산을 가르는 고개 무악재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무악재는 호랑이가 출몰하여 사람을 해치기도 하던 험준한 고개였습니다. 고개를 넘어 갈 때는 몇명이 모이면 군졸들이 화승총을 갖고 손객들을 호위하여 넘나들던 고개이기도 합니다. 안산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건물 중에도 기다랗게 늘어선 빨간 벽돌집들이 유난히 시선을 당기고 있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민족의 존재를 말살하려던 일제 강점기의 끔찍한 유물입니다. 일제의 손아귀로 지어진 1908년도 경성 감옥으로 시작하여 수많은 독립 투사와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었던 죽음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7개의 감옥과 지하 여자 감옥, 사형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평도 안 되는 지하 감옥에서 " 대한 독립 만세 " 라는 단어 여섯 글자의 참뜻을 느껴 보지도 못하고, 심장이 터지도록 외치기만 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독립 투사들의 절규가 아직도 가슴을 때리고 있습니다. 국가의 독립을 외치는 이 나라의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일제시대 침탈의 만행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용서할 수도 없는 민족의 한(恨)으로 남았습니다. 1960년대의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이 또 다시 먹구름을 씌우기도 합니다. 민주와 자유를 외치는 수 많은 학생과 시국 사범들을 옭아매는 요람지로 탈바꿈 합니다. 덕분에 까까 머리 신세를 막 벗은 대학교 1학년생으로 64년도 6월 4일에 64 감방 그 속을 며칠간 관광(?)할 기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 젊어서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절대 나서지 마라 " 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시던 아버님의 애잔한 모습이 뇌리를 흔듭니다. 공포 분위기 속에 탄생시킨 유신 헌법은 인권을 짓밟는 행태만은 일제 강점기 때와 어쩌면 닮은 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로 서울 형무소, 서울구치소로 명칭이 변경되어 왔으며 1987년도에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합니다. 정상에서 내려와 더 가까이 빨간 벽돌집으로 다가가는 발걸음에는 말 못할 무거움만이 가슴을 누릅니다. 약속 되어 있는 오후에 검진 시간이 생각납니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추스리며 다시 정상을 향하여 오르고 서둘러 하산합니다. 더위는 여전히 온 몸을 땀으로 적시우고 갈증은 타는 가슴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상 외로 한 시간여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Y대학교 학생회관 지하로 찾아 들어 갑니다. 덥수룩한 머리칼들을 시원스레 자르고 싶은 마음이 조바심으로 바뀝니다. 육십이 넘은직한 이발사들의 섬세한 손놀림으로 노객의 얼굴이 새롭게 변신합니다. 난생 처음으로 이발사의 손을 빌려서 허옇게 보이는 모발을 까맣게 염색을 받습니다. 답답하게 짓눌리어 있던 가슴 속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기분입니다. 이발 요금에 팁까지 쥐어 주고 자리에서 벗어 납니다. 후끈한 더위가 또 다시 온 몸을 휘감고 있습니다. 나머지 검진을 모두 마친 시간은 오후 네시에 가까워 가고 있습니다. " 오늘 아침 아홉시에 와서 검진을 이제야 모두 끝내고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애기들도 만나보지 못하고 간다. 수고들 해라 " 셔틀 버스 속에서 이 곳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며느리와 아들에게 톡으로 문자만 보냅니다. 수요일은 온 종일 아들이 정형외과 외래 진료를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며느리는 아마도 수술실에서 환자들에게 마취를 시키느라 톡을 들여다 볼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애비로서 바쁜 자식들에게 잠시나마 시간을 뺏는 것도 신경이 쓰여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쪽 팔다리가 마비되어 거동이 불편한 팔십은 훌쩍 넘음직한 할아버지를 남자 한 분이 부축해서 걸어 옵니다. 옆에 거들고 있는 사람도 회갑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입니다. 버스에 타는 일도 몹시 힘에 부칩니다. 앰브란스의 다급한 경적 소리도 귓전을 자극합니다. 저 멀리 내 아버지 어머니의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걸음걸이가 뒤뚱거리며 어머니는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상념에 젖어들어 잠시 환영(幻影)이 스쳐 지나간 것입니다. 두 분이 자식들 곁을 떠나 가신지도 40년 50여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에 약주에다 안주로는 비개가 두툼한 돼지고기를 즐겨 드셨습니다. 회갑을 못 넘기고 돌아가시기 전에도 두어번 쓰러지셨으나 여전히 술을 멀리하기는 힘드셨나 봅니다. 병원 의사에게 진료를 권유했으나 일언지하에 거부 반응을 보이십니다. 당신이 드시고 싶은대로 드신다는 주장입니다. 그 때 어린 마음으로는 당신의 깊은 속 뜻을 헤아릴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북녘 하늘 아래 홀로 두고 피난 나온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었을까를 짐작해 봅니다. 내 어머니는 가끔씩 가슴앓이로 속이 치밀어 오르는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손수 인절미를 구워서 드시면 괜찮다고만 하셨습니다. 젊어서 시집오신 후에 매섭고 모진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 가슴 속엔 메마른 피멍의 상처가 가득 합니다. "소금을 물속에 끌어 들이라면 이유를 대지 말고 무조건 끌어 들여 " 하는 아버지의 호통 소리는 집안은 어름 바람이 일며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못하십니다. 가부장적인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여인상입니다. 수 많은 세월에 온갖 고통과 비애를 가슴 속으로만 묻어 두고 지낸 삶입니다. 하고픈 말이나 불평 한 마디 하지 못한채 자식만을 바라보며 사셨습니다. 자식들에게도 야단치거나 큰 소리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에는 두분 모두 한마디 말씀도 없이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어머니 아버지 두분을 병원에 모시고 가지 못한 것이 이렇게 한(限)이 될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나간 세월은 되돌릴 수 없으매 살아 생존에 잘 하라시던 선조들의 가르침이 오늘따라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오늘 당신 자식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최고 명문 대학병원에서 최신 의료기기와 의술로 하루 종일 몸 구석 구석을 검진 받았습니다. 그것도 당신의 손주와 손주 며느리가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대학병원에서 말입니다. 멀어져 가는 병원 모습을 바라보면서 때 늦은 자책감으로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쉬임없이 흐르는 눈물이 가슴을 적시고 있습니다. 피난길의 꿈 같은 세월에 네 남매를 키우시느라 고생 자체가 삶의 전부였던 부모님입니다.
당신의 자식인 맏 아들이 벌써 살아 생존에 어머니 아버지 연세를 넘어서 칠십대 중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 어머니 ! 아버지 ! 이 못난 어리석고 철없는 자식을 용서하지 마세요 "
이제 와서 드릴 말씀은 고작 이것 뿐입니다 .
2016년 7월 14일 못난 아들 최 정 남
첫댓글 글 읽느라 10분은 보낸기분 ~~!! ㅎㅎㅎ 뭐니 모니 해도 건강이 제일이오니 부디 몸관리 자~알 하시와요
~~!!
백도사 도사님은 도사니까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하시겠지요
켄,정말피부에와 닿는부분이너무나많네! 문장이너무길어 지루하기도하지만 내눈에서나도모르는사이에눈물이흘러내렸다네왜? 이심전심이 있었나보내 켄!."아버지의애절함과 자신에대한무능함(어려서)현재의사항을구구절절너무잘표현" 켄 감동받았다! 켄! 멋진 놈!.ㅡ
위짜추는 역시 나이가 45년 해방둥이 어린 나이라 역시 순수한 순정파라오
그리고쓰기는모악산이지만읽을때는무악산이라고합니다. 켄.(무악산: 안산 ).
모악산이 더 정감이가는 이름이니까 나는 모약산이라 할거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