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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안 나와 아쉬워요.
● 대만(Taiwan) 여행기
◆ 여행 기간 : 2012년 02월 25일(토) - 2012년 02월 28일(화), 3박 4일
◆ 여정 :
제1일 : 부산 - 타이베이 - 충렬사 - 국립고궁박물관 - 101타워 전망대
제2일 : 아미족(아미문화촌)민속쇼 - 대리석 공장 - 설산터널(12.9km) -
태로각협곡(장춘사, 연자구, 구곡동, 자모교)
제3일 : 금용천 온천 - 국립야류해상공원(기암괴석, 여왕머리) -
중정기념당 장계석총통과 송미령 여사의 관저 사림 관저 - 용산사 - 야시장
제4일 : 타이베이 - 부산
◈ 여행기 서두에
조그만 섬나라를 부자 나라 만들어서
세상에 이름 떨친 자유중국 세운 중정
단상에 높이 앉아서 오가는 이 절을 받네
※중정 : 장개석의 호
대학 선배인 이명재님께서 장개석 기념관에서 읊은 위 시조를 중얼거리며 지난 2012년 2월에 있었던 대만 여행을 생각해 본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실제와는 엄청난 차이를 드러낼 수도 있는 것이 선입견이란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대만은 조그마한 섬나라이고 장개석이 중국 본토에서 도망쳐 온 곳이라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저 평범한 나라라고 늘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 3박 4일간의 대만 여행으로 대만에 대한 그 동안의 부정적 인식이 이제 완전히 긍정적으로, 아니 감탄으로 바뀌게 되어 선입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은 무척 많다. 먼저 대만의 질서 의식에 대해 놀라워했고, 자신들의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며 자랑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큰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그 뿐만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는 감탄이었다.
◈ 대만 가는 비행기에서
2012년 02월 25일(토) 09 : 05분 우리 일행들은 김해공항 국제선 3층 오른쪽 하나투어 안내판 앞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반가이 맞이하는 가이드의 도움으로 출국 수속을 하고 출국장으로 나갔다. 출국장에는 파라다이스, 롯데 등 백화점과 인터넷 면세점이 있었다. 이들 면세점 또는 외국 여행 중에 구입하는 물품은 400불 이하에 해당하는 금액만큼만 구입하여 국내에 무관세로 들어 올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면세점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그냥 아이쇼핑만을 했다. 다만 출국 게이트가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줄곧 출국 게이트 쪽으로만 바라보다가 출국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 총알같이 비행기에 탑승했다.
11시 15분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부산 에어 BX 0701항공기다. 6행 34열, 204명이 탈 수 있는 소형 비행기였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들이 연무로 뿌옇다. 잔디밭에서 몇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서성거리고 있다.
이륙 시 느끼는 가슴의 서늘함. 드디어 비행기는 구름을 뚫고 하늘로 솟았다. 언제나 보는 하늘은 하얀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양떼들이 몰려가는 듯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했다. 비행기는 남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제 안전벨트를 풀고 자유롭게 몸을 움직여도 되겠지. 그러나 스튜디스는 조금만 더 기다리란다. 이륙한 지 20여 분이 흘렀을까 그 때야 스튜디스는 MP3나 핸드폰 사용을 허가한다. 그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12시 20분이다. 닭 요리가 기내식으로 나온다. 맥주가 생각나서 주문했더니 맥주 값을 달란다. 저가 항공기여서 맥주는 무료 제공이 안 된단다. 음료는 커피만 가능하단다. 비행고도 10,363m, 비행 속도는 시속 736Km, 기온은 영하 39도라는 안내 문자가 비행기의 천장에 달린 모니터에 나타난다.
기층 변화로 비행기가 떨기를 여러 번 거듭하기도 했다. 귀구멍이 뚫리는 ‘뚝’소리가 귀에서 나기도 했다. 어느 새 2시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대만에 가까이 오니 양털이 아닌 그냥 뿌연 상태의 하늘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아마 대만은 우기인가 보다. 14 : 25에 타이베이 타오위엔(도원)국제공항 도착했다. 가이드가 마중 나와 우리를 반긴다. 가이드는 우리가 타고 갈 버스로 우리를 안내했다. 전용 버스에 승차 후 약 1시간 동안 이동했다.
가이드의 마이크가 쉴 새 없다. 이것저것 쉬지 않고 주워 삼킨다. 시간 약속을 잘 지켜 달라. 모든 약속은 이곳 대만의 현지 시간으로 약속한다. 자기 소지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특히 여권은 생명만큼 소중히 여기란다. 깎는 문화가 없다. 특히 과일은 절대 못 깎는단다. 바가지도 없고 모두 정찰제다. 화폐 단위는 MT달러다. 대만 돈 1원은 우리나라 돈으로 42원에 해당한다. 미국 돈 1달러는 대만 돈 30원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대만 돈이 우리나라 돈보다 가치가 있다. 대만 자동차들은 거리에서 크락숀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어디에 가도 커피 자판기가 없다. 이는 아열대에서 열대 지방에 가까워 벌레가 생기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와 다른 것은 식당의 음료수 술 판매 이익은 종업원의 몫이라고 한다.
◈ 대만의 지형과 기후
대만은 동중국해(東中國海)에 있는 섬이다.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 푸젠 성과 마주하는 나라다. 중국에서 약 150㎞ 떨어져 있다. 면적은 35,195 km²로 경상남·북도의 크기다. 산이 많아, 전체 면적의 64%가 산지(山地)이다. 타이완 산맥(臺灣山脈, 대만산맥)이 섬의 동부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며, 봉우리들의 평균 고도는 3,000m를 넘는다. 섬에서 가장 높은 산(玉山, 옥산)은 표고가 3,997m에 이른다. 산맥의 동쪽은 평야부가 적고, 태평양 연안에서는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솟는 절벽이 계속된다. 그에 비해 서쪽은 비옥한 평야가 완만하게 타이완 해협(臺灣海峽)을 향해 펼쳐져 있다. 대부분의 강이 타이완 산맥에서 발원하고 있어 모두 짧고 험난하다. 주요 하천은 서부에 집중되어 있으며, 가장 긴 하천은 중부를 흐르는 줘수이강(濁水溪 탁수계, 167km)이다.
대만은 아열대성 기후로는 드물게 북부의 산악지방에서는 겨울에 눈이 내리고 남부지역은 일 년 내내 온화한 기온을 가진 곳이다. 산속의 기온은 6월에서 8월까지의 여름에도 놀랄 만큼 춥다. 12월에서 2월까지의 겨울 기간 동안에는 산봉우리가 종종 눈으로 덮인다. 타이베이를 포함한 대만의 북부지방에서는 겨울은 건조한 계절로 한낮의 기온이 19도까지 내려간다. 수도에서는, 끈적거리는 여름 동안은 평균 기온이 33도로 무덥고 습하며 비가 거의 매일 내린다. 대만의 여름은 또한 태풍 시즌으로 특히 6월부터 10월 사이이다. 남부지역의 기후는 일 년 내내 일조량이 높고 항상 덥다.
◈ 대만의 역사
대만은 구석기시대 말기(5만 년 전 ~ 1만 년 전)에 이미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360년 원(元)나라는 펑후제도(澎湖諸島)에 순검사(巡檢司)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푸젠(福建)의 취안저우(泉州)에 예속시켜 통치하였다. 1590년 유럽 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 인들이 타이완 섬에 내렸다. 16세기까지 타이완 섬에는 오스트로네시아 어족 원주민(原主民)들이 섬 전역에 널리 분포하여 거주하였으며, 한족 이주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7세기 명나라(明代) 말부터 유럽 상인들이 앞 다투어 타이완으로 찾아 들어오면서 한족(漢族)들의 타이완 이주도 시작되었다. 한편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세력이 대만에 들어와 경쟁과 알력을 다투다가 1662년 정성공(鄭成功)에 의해 축출되었다.
1874년 일제에 의해 모란사 사건(牡丹社事件)이 일어났고, 청불 전쟁(1884 - 1885)시기에는 프랑스 함대가 타이완 북부의 공략을 꾀했다. 이에 청나라는 타이완 방위를 위해 류명전(劉銘傳)을 파견했다. 류명전은 초대(初代) 타이완 순무(臺灣巡撫, 지방장관)가 되어 타이완 전역의 실효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근대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충분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고 타이완은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개석과 모택동의 대립은 물가 파동으로부터 시작했다. 신발 100원 짜리가 하루아침에 500원으로 급등하는 등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부정부패가 심했다. 차라리 일본 사람들이 통치할 때가 배는 불렀다고 중국인들은 장개석 정부를 비판했다. 이렇게 생활이 어려워지자 장개석 정부에 불만이 많았다. 이러한 불만으로 인해 1949년 12월에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모택동의 공산당 정부와 내전에서 모택동에 패해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 섬(대만)으로 이전하였고(국부천대), 이후 장개석의 국민정부인 중화민국의 실효 통치 지역은 사실상 타이완 지구로 한정되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을 23번째 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거주 인구는 약 2,500만 명이다.
◈ 눈을 뗄 줄 모르게 만드는 충렬사 위병 교대식
일행은 15 : 30경 충렬사에 도착했다. 충렬사는 '내전과 항일운동 시 전사한 군인과 열사의 영령을 모신 곳이었다. 충렬사에서는 늘 군 위병들이 근무하고 있었고 거행되는 위병 교대 근무 행사식은 너무나 절도가 있어 마치 마네킹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우리나라의 의장대도 잘 하지만 그들 위병들도 잘했다. 하여튼 그들의 모습에서 충만한 군인정신을 읽을 수 있어, 최전방에서 북한 인민군이 남으로 귀순해도 모르는 우리의 안보의식이 다시금 생각나기도 했다. 그들의 위병 교대식은 30분간 소요되었다. 위병 교대식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눈을 뗄 줄 모르고 바라보다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향했다.
<충렬사 군인 교대식 모습>
◈ 세계 4대 박물관인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을 찾다
17시경 고궁 박물관으로 갔다. 늦은 오후라 어느 때보다 덜 붐비는 시간으로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행운을 안았다고 가이드는 말했지만, 붐비는 시간에는 어떻게 붐비는지 몰라도 지금 이 시간에도 너무 붐빈다고 느꼈다.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은 세계 4대 박물관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박물관이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중국 8천년 역사유물과 보물, 미술품 등 85만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중 75만점이 3~6개월마다 바뀌어 전시되며 인기 있는 보물들은 영구 전시된다.
2, 3층으로 구분된 실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절대 불가능했다. 그래서 가이드가 박물관에 들어오기 전에 카메라와 배낭은 보관대에 맡겨라고 했는가 보다. 어쩔 수 없다. 진귀한 보물들을 마음속에 깊이깊이 담아 가자.
뭇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비취 배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비취배추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빽빽이 서 있어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겨우 볼 수 있었다. 과연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배추였다. 소장품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보석이라고 아무리 자랑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이드의 말을 빌리면, 고귀한 보물이기에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얽힌 이야기가 있었다.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할까,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들이 비취배추의 값어치를 더 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청나라 황제가 희고 푸른 옥 한 덩어리를 얻고는 유명한 세공을 불러다가 훌륭한 작품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한족(漢族) 장인은 만주족인 청나라 황제가 싫어서 정교한 배추를 조각해 내면서도 황충(蝗蟲) 한 마리와 종사(螽斯) 한 마리가 배추 잎을 뜯어먹는 모양으로 덧새겨 넣었다.
그래서 그 후 세인들은 배추의 하얀 하체의 몸통은 한족(漢族) 민중을 뜻하고 푸른 잎 부분은 푸른 색 즉 ‘청(靑)’과 같은 발음의 ‘청(淸)나라’를 뜻하는 것으로 메뚜기와 여치가 파란 잎 청나라를 갉아먹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치와 메뚜기는 배춧잎을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이를 어쩌나. 아주 그럴 듯한 짜맞추기식 해석으로 여겨지네.
이 비취배추의 소유자가 청나라 광서 황제의 귀비(貴妃)인 근비라고 했다. 근비는 이복 여동생 진비와 함께 나란히 후궁으로 뽑혀 영화궁에 살았다. 그들의 친정 아버지가 진비에게 혼수로 준 것을 진비가 언니인 근비에게 주어 근비의 소유가 되었다고도 한다. 진비는 책과 글을 좋아해서 보석 수집을 좋아하는 언니인 근비가 갖게 했다고도 했다.
중국에선 고래로 배추는 희고 푸른색이라 청백(淸白)을 상징해서 사랑 받아온 야채였다. 그래서 그 좋은 옥돌로 청아하고 품위 있는 소재인 배추를 조각했다. 그리고 여치와 배추를 조각한 것은 배추를 뜯어먹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다산을 상징한다고 했다. 거기다가 꺾으면 금방 물이 철철 넘쳐 나올 것 같은, 힘줄이 싱싱하게 조각된 배추는 물이 많아 여성의 풍성한 모습을 내포하여 아기를 잘 낳는 여인의 모습과 어울린다. 이로 보면 황제의 후궁으로 있는 근비와 진비가 황손을 주저리주저리 낳아서 자손만대(子孫萬代)를 기약하라는 친정아버지의 염원을 조각하여 선물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비취배추를 포함한 국립고궁박물관의 보물이 베이징의 자금성에 있어야 제 자리가 되겠지마는 거기 있었던 8천년에 걸친 가장 진귀한 보석과 유물들의 25%가 지금 대만에 와 있다. 이들을 장개석이 배에 싣고 중국 본토를 떠나 대만으로 향할 때, 모택동의 부하들이 이를 보고 보석을 실은 배들을 모두 침몰시키자고 했으나 당시 모택동은 어디에 있어도 우리 중국의 보물인데 왜 바다에 수장시키느냐며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과연 대국의 지도자다운 면모다.
◈ 101타워전망대 관광
타이베이 101빌딩은 대만의 현재를 상징하는 건물로 본래 명칭은 타이베이 국제금융센터라고 했다. 만개한 꽃이 첩첩이 포개진 모습의 이 빌딩을 자세히 보니 8개층씩 묶어서 올라간 모습으로 볼 수 있었는데, 중화권에서는 8이라는 숫자가 성장, 번영, 발전을 의미히기 때문에 이 점을 고려하여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 가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베이 101빌딩의 B1~5층까지는 쇼핑몰이었고 , 이를 구경 후 5층 매표소에서 US$ 30을 지불하고 101타워 전망대인 89층 전망대에 올라갔다. 그런데 5층에서 엘리베이터로 89층으로 올라가는 데는 놀랍게도 단 37초 만에 올라가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엘리베이터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로 기록해도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한 타이베이 101빌딩 전망대에서 본 아름다운 타이베이의 전경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내게 했고, 너른 벌판에 자리 잡은 계획 도시, 방사형의 도시인 타이베이 시의 저 끝에는 지평선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 몽골리안 BBQ로 저녁식사를 즐기고 호텔에 투숙하다
18시 30분경 타이베이 101빌딩을 출발해서 식당으로 갔다. 저녁 식사 메뉴는 몽골리안 BBQ였다. 몽골리안 BBQ는 소고기, 돼지고기 등의 고기와 야채를 손님들이 직접 선택하여 주방장에게 가져다주면 주방장이 큰 원형의 석판에서 고기와 야채를 볶아주는 요리였다. 중국의 식사 문화는 상을 돌리면서 먹는 코스 요리가 주(主)인데 저녁식사 메뉴인 몽골리안 BBQ는 중국 문화의 향이 충분히 풍기는 요리였다. 과일, 음료 술도 준비되어 있고 시장도 하여 모두들 즐겁게 식사시간을 보냈다. 세상살이의 즐거움 중 먹는 즐거움이 앞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오늘 비로소 깨닫는 기분이었다.
21 : 00경 식당을 나와 CHONG YU HOTEL(中悅國際大飯店, 전화 : (03)3478888)에 투숙했다. 그렇게 큰 고급호텔은 아니었으나 방이 아늑하고 조용해서 좋았다.
호텔 도착 후 술과 안주를 사려 밖에 나갔더니, 상점이 어디 있는지 모름은 말할 것도 없고 막상 상점을 찾아 물건 쥐고 돈 계산하는데도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니 정말로 답답했다. 그래도 손짓 발짓으로 술, 과자, 껌 등을 살 수 있었다. 궁(窮)하면 통(通)한다는 말이 바로 이때에 쓰는 말이었다.
◈ 둘째 날, 자강호 열차로 화련에 가다 -
2012년 2월 26일(일) 02일째다. 오늘은 화련으로 간다. 여정은 호텔 조식 뷔페 -> 타이베이(기차) -> 화련. 원주민 민속 쇼 -> 태로각 협곡 -> 저녁-> 화련(기차) -> 타이베이로 다시 돌아오는 코스이다.
어제도 비가 오더니만 오늘 아침에는 제법 빗방울이 굵다. 자고 일어나니 방에 빗물이 새어 들어 왔다. 그로 인해 방이 축축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방을 바꾸어 달라고 호텔 측에 요청했더니 쾌히 ‘예’ 라고 답해 주어 기분이 좋았다.
현지 시각으로 05시에 기상하였다. 05시 30분에 아침밥을 호텔식 뷔페로 먹고 06시에 화련으로 출발하였다. 버스에 오르니, 안내원이 중국말 몇 마디를 가르쳐 준다.
‘조안(朝安)‘을 ’따안‘
‘감사(感謝)합니다’를 ‘세세’
‘죄송(罪悚)합니다’ 는 ‘떼붙이’로…
언어의 일반적 성질 중에서 자의(自意)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내용은 같으나 형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내용은 같으나 중국말과 우리말의 형식이 다름, 바로 이것이 자의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증거랄까? 하여튼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우리가 투숙(投宿)한 호텔은 신흥 개발지에 위치한 타이베이 시의 변두리에 있었다. 이 변두리 호텔에서 타이베이 시의 기차역으로 가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1시간가량이 흐른 07:00에 기차역에 도착하였고 07:10분에 화련으로 출발하는 기차에 승차하였다. 집 사람과 나의 좌석은 25번과 27번 홀수석이었다. 대만의 좌석은 짝수는 짝수끼리 홀수는 홀수끼리 그래서 우리나라 같으면 아내와 내가 따로 앉았을 건데 대만에서는 동석(同席)했다. 열차 안은 깨끗했고 좌석 간 거리는 넓었다.
화련으로 가는 기차 안
태평양이 내다보이는 곳으로 달리는 기차라 우리나라 강원도 동해의 바다열차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화련이라는 곳이 당일로 이동하기에 왕복시간으로 볼 때 어려움도 많지마는 꼭 가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 여겨졌다.
08:30분, 벌써 1시간 이상 기차를 탔다. 태평양이다. 끝없는 수평선 저 멀리에 조각배가 떠가는 듯 어떤 물체가 보인다. 왠지 눈이 아득하고 갑자기 불안해 진다. 모든 것이 잘 되리라. 잘 될 것이라는 마음 속 기원을 하며 창밖을 바라다보았다. 우리가 타고 가는 기차의 유리창이 외짝 통유리로 마음껏 바깥 경치를 즐길 수 있고, 쾌적해서 좋다. 냇가에는 제법 큰물이 흐르고 있었고 산들은 차츰 높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에는 오트바이의 행렬이 끝이 없었다. 그들이 곳곳에 써둔 한자(漢子)는 현재 중국 본토에서 쓰는 간자체가 아닌 옛날의 정자체였다. 납골당이 눈에 많이 띄기에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일본의 영향이라고 했다. 해변을 따라 곳곳에 집들이 있다. 들에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가 전혀 없다. 아열대 지역이라는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다. ‘금연(禁煙)’이라는 문구도 보인다.
마을은 깨끗하고 논에는 2월인데도 벌써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가득 가두어 두었다. 아니 어떤 논에는 모내기를 하기도 했다. 들이 너르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들이 지평선을 이루고 있다. 사실은 아주 너른 들이었다. 우리나라 김해평야보다 더 너른 들이다. 들 가운데 곳곳에 마을이 있다. 눈에 보이는 집들과 논의 물의 높이가 거의 같다. 금방 논의 물이 집 안으로 들어갈 것만 같다. 멀리서 보아서 그렇게 느껴졌을 거다.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들도 제법 눈에 띈다. 연변(沿邊)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우리나라 농촌의 집들보다 크고 좋아 보이기도 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도시에 들어서니 고가 도로가 여기 저기 눈에 띈다. 새로 지은 집이 대단히 웅장한 모습으로 갑자기 눈앞을 막는다. 깨끗한 거리(距離)가 무척 마음에 든다.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것 같다. 이 도시의 광고표지판은 어떤 규격에 따라 설치한 것 같다. 고구마처럼 생긴 땅인 일본 대마도에서 볼 수 있었던 대나무, 야자수 나무가 눈에 많이 띤다. 자세히 보니 야자수 나무가 주된 가로수였다. 공장들도 깨끗해 보였다.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일락말락한다. 교회는 거의 보이지 않고 절들이 많이 눈에 띈다. 산에는 소나무를 찾기가 어렵다. 소나무가 자라기에는 날씨가 너무 더운 탓이리라. 안개에 반쯤 묻힌 산들이 마치 선경(仙境)인 듯하다.
지금 시각은 09:00이다. 벌써 2시간가량 가차를 탔다. 그 동안 기차 안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은 없었다. 그것은 우리도 본받았으면 좋겠다. 검표원이 제복을 입고 검표를 했다. 이슬비가 약간 내리지만 그런대로 좋은 날씨다.
▒ 타이완 관광의 하이라이트 화련 태로각협곡 ▒
09:40분에 화련의 신성시에 도착했다. 타이베이 시에서 출발한 지 2시간 40분가랑 흘렀다. 언젠가 있었던 중국 현지인의 철도 사고 후 화련역의 한 정거장 앞 역인 신성시역에서 모두 하차하도록 한 정부의 조치로 우리 일행도 어쩔 수 없이 하차하였다.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통유람(世通遊覽)‘이라 간판을 단 버스에 올랐다. 아직도 비는 그치지 않고 있다. 대만의 2월은 우기(雨期)인가 보다. 버스는 바닷가로 달리고, 그런데 바닷가에는 신기하게도 스치로풀 같은 휴지나 쓰레기가 없이 그야말로 깨끗하다. 자연 경관도 수려했다. 그런데 약간 아쉬운 것은 버스에 식수 준비가 안 돼 있는 것이었다.
♥ 타이완 원주민으로 소수 민족인 아미족(아미문화촌) 민속쇼 관람 및 대리석 공장 견학♥
우리가 찾아온 화련시는 인구가 30만 명 정도 되는 소도시이지만, 대만동부의 중심도시로 원주민과 한족의 문화가 만나는 곳이었다. 화련 뒤쪽으로 웅대한 동부산맥이 있고 앞으로는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대만 유수의 절경을 자랑하는 도시라 했다. 또한 태로각협곡과 아미족 문화촌으로 유명하며 대리석과 비취의 산지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아직도 독자적인 전통문화를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화련시의 30만 인구 중 절반은 아미족이다. 그들은 대리석 공장의 공연장에서 6-14명이 어울려 민속춤을 추었다. 공연에 출연하는 출연자는 덩치가 큰 남녀 각 7명이었다. 남자는 아미족 고유의 독특한 의상을 입고 머리에 꿩털을 꼽았고 여자는 양털 의상을 입고 흰새의 깃으로 만든 갓을 썼다. 10시 15분에 시작하여 고무줄놀이, 대나무 놀이 등으로 10여 바퀴 무대를 돌면서 공연을 했다. 이 공연은 원주민의 민화를 관광객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공연이라 했다. 공연의 마지막에는 결혼 무용을 했다. 공연 후에는 출연한 신랑과 신부 및 관중들이 함께 어울려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찍도록 강요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원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워 발마사지 등을 업으로 하고 있기도 하지만 관광객들에게는 부담을 주지 않으니 그들 나름대로의 룰이 있는 모양이다. 사진 대금은 16,000원이었다. 아마 모델비도 포함된 모양이다.
원주민은 15세가 되면 남자 성인 의식을 하는데 그 때가 되면 스스로 사냥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온몸에 문신을 한다. 여자 역시도 문신을 해야 비로소 시집 간 가정주부로서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문화의 특유성이란 바로 이런 것일 거다.
▲대만 원주민 민속쇼 관람-대만 원주민인 소수민족 아미족의 민속쇼 관람을 했다. 마지막에는 공연자와 관람자 모두 일어나 원을 돌기도 하면서 모두 하나가 되는 민속쇼 공연이었다.
11:00분에 이른 점심 후 가이드는 화련의 대리석 공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 곳 직원이 우리 한국어로 안내하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 사람이 관광객으로 많이 오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물어보니 대부분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고 했다. 오늘도 50단체 정도 여기에 와 있다고 했다.
대리석 공장 구경하고 나서 우리 일행 40여 명은 버스에 몸을 싣고 태로각 협곡으로 향했다. 이 국립공원은 13시 30분 이전에 들어가야 한다. 그 이후는 입장 불가이란다. 6시까지 신성역(新成驛)으로 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른 점심을 먹어라고 했을 때 의아해 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태로각협곡(장춘사, 연자구, 구곡동, 자모교)관광♥
'웅장한 대리석 절벽으로 이루어진 태로각(타이루꺼)협곡은 타이완에서 가장 경이로운 자연의 산물이다. 이 자연의 걸작품과 더불어 동식물의 생태계 보존 또한 잘 되어 있어 국제수준의 자연국가공원으로 공인받고 있다.'
◀ 타이루거 협곡은 웅장한 대리석 절벽과 다양한 생태계가 공존하고 있는데, 길을 따라 가다보니 웅장한 폭포, 기암괴석, 계곡, 제비 서식지 등을 만나실 수 있었다.
13:10, 유방교로 출발하여 불동 천완 다리를 거쳐 도로 공사 시 태풍으로 산에서 아주 큰 돌이 굴러 3사람이 깔려 죽은 후 그 돌을 다이나마이트로 3토막으로 내었다는 이야기를 간직한 산신정에 이르렀을 때 차에서 내려 걸어가라기에 모두 하차했다. 호수 지나서 낙석주의 안내판에 이르니 난간이 휘어져 있었고 낙석에 주의하라는 말과 함께 헬멧(안전모)를 주기에 쾌히 쓰고 깎아지른 절벽을 보니 여기저기 연자구(燕子口)가 있어 제비들이 천연동굴에 집을 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 타이루거 협곡 ♣
타이루거 협곡은 대만에서 네번째로 지정된 국가 공원으로
해발고도 2000m, 면적 920㎢, 길이 20km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물처럼 부드러운 여성, 물처럼 날카로운 여성 계곡이라 이름한 이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니 가히 장관을 이룬 경치에 절로 입이 벌어지고 계곡은 차츰 좁아져 아찔한 곳에 다다랐는데 이때의 시각이 14:00 다시 버스에 탔다. 버스가 산을 오를수록 깎아지른 절벽이 앞을 가로 막아 자세히 보니 온 산이 한 덩어리의 바위산이고 그야말로 협곡지대였다. 물이 맑지 않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쉼 없이 일어나는 지진으로 인해 석회물이 흘러내린다고 했다.
14:05 유방교를 지나갔다. 유방교의 이름처럼 돌들이 아가씨 피부처럼 곱다. 잠시 내려 돌들을 바라보고 만져보다가 14:18경 유방교에서 출발하여 산의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니 자모교라는 다리가 나왔다. 아들 장개국을 3년 2개월 동안 보지 못한 장재석이 찾아와서 묵을 때 장개국은 자기 엄마의 꿈을 꾼 곳이라 하여 자모교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테러각국립공원에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동원된 죄수들이 엄마를 그리다가 결국 엄마를 만나지 못 하고 죽게 되자 엄마를 영원히 그리는 곳이라 하여 자모교라 이름 붙였다고도 했다. 자모교에 있는 바위는 두꺼비처럼 생겼는데 재물이 붙을 자리라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 바위에 오르려고 애를 썼는데 그 모습들이 장관이었다. 자모교에 많은 차들이 와 교통순경들이 질서 지도를 하면서 애를 먹고 있었다.
다시 14: 45경에 자모교에서 출발하여 15:01쯤 녹수교에 도착하여 찻집에 들러 꽃차를 시켰더니 대만돈 900원, 우리 돈으로는 900원의 40배=36,000원 정도 였다. 술과 과자 등도 16,000원어치 사서 함께 나누어 먹었다.
화련의 하이라이트라 할만한 태로각협곡은 대리적 절벽으로 이루어진 대만에서 가장 경이로운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버스로 이동하는 내내 우리나라 인제 백담사계곡을 올라오던 그 비경과도 흡사 비슷했는데 조금 더 가파른 절벽이 대리석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보면 된다.
▲ 화련, 태로각협곡
16:20경 다시 신성역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현지 음식으로 하였는데, 돼지고기를 사냥고기라 하여 소고기 비슷하기도 하고 노루고기 비슷한 고기라면서 회전식불판에 맛있게 구워주었다.
저녁 먹고 나서 과일점에 가보았더니 입술 색소라 하여 석가모니 머리처럼 생긴 것을 주인이 권하기에 조금 먹었더니 무척 단 과일이었다. 그래서 일행들과 나눠 먹기 위해 몇 개 샀다. 어디를 가나 상점에는 물건을 가득 전시해 두고 손님들의 눈길을 끌려고 애를 써고 있었는데 이곳 신성역 앞에도 똑 같은 풍경이 재현되고 있었다. 점포를 차려 두고 있는 가게보다 오히려 노점상이 더 인기 있는 것 같아 씁쓰레하기도 했다.
■화련에서 열차편으로 타이베이에 귀환
지금은 타이베이 시로 가는 열차 안이다. 타이베이 시에 가까워질수록 열차는 역(驛)마다 정차한다. 손님이 앉을 좌석이 정해져 있고 열차 고빼가 많이 달려 있다. 기차표는 2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그 크기가 크고 다른 하나는 크기가 작다. 왜 작은 것이 있을까 하고 할머니가 들고 있던 것이니까 경로 우대증일거라고 말하고 함께 웃고 나서 보니 젊은이가 가진 승차권도 작은 것이었다. 승차권의 크기가 크고 작음으로 어떤 분류는 아닌 셈이다. 이는 선입견으로 판단해 버린 결과의 소산이다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대만에 대한 선입견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하고 싶다. 참으로 사람의 선입견(편견(偏見)이란 무서운 것이다. 무론 선입견의 의미는 본래부터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고 부정적이긴 하지만. ‘First impretion’이라는 첫인상, 아니다. 평소 갖고 있는 생각. 이것이 사물의 본질을 간과해 버리고 판단하는 것이다. ‘대만’이라는 나라는 중국 국민당 장개석 총통이 중국 본토에서 쫓겨서 도망해 온 곳이다. 그러나 한때는 '대만‘이 유엔의 상임이사국의 위치에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국 본토에 그 지위를 빼앗기고 만다. 그 당시 중국의 본토는 ‘중화인민공화국’ 바로 ‘중공’이라 부르던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이라 부른다. 중공이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만‘이라 하지 않고 ’대만‘을 중국이라 했다. 지금은 중공이 중국, 대만은 중국의 속국인 자유중국에서 ’대만‘으로, 이는 어느 도시 또는 지역의 명칭으로 여겨지지 나라의 이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중국, 즉 옛 중공과의 수교는 노태우 씨가 대통령이었던 1990년대이다. 이때 유행하던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친구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국제사회다.’라는 말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 3일째, 금용천 온천욕, 기암괴석이 즐비한 야류해양공원 체험하다
2012년 02/27(월), 03일째다. 오늘은 타이베이서 국립해상야류공원을 관광하고 타이베이로 귀환하는 코스다.
06:00 기상하다
07:00 아침식사하다. 호텔식, 뷔페로 식사했다.
08:00 오늘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여권을 항상 소지하고 다녀라는 아내의 충고(忠告)를 잔소리로 여기면서도 아내의 말이 옳다 싶어 방에 가서 가방에 넣어둔 여권을 찾아 왔다.
▶ 타이완 금산의 대표적인 온천장 금용천에서 온천욕하다
파도야, 파도야.
너는 아프지도 않니
바위에 그렇게도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고 나서도
또 부딪히니
차는 해안을 따라 계속 달린다.
파도야, 파도야,
함께 친구들이랑 밀려왔다가
어깨동무하며 함께 떠나가는구나.
너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듯이 나도 같이 가고 싶다.
또 타이베이 북쪽에 위치한 베이터우 온천 지대가 있는데, 이는 대만에서 최초로 개발된 온천 지대이자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세를 떨치는 온천이라 했다. 이렇게 베이터우 온천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이유는 바로 유황석 때문인데, 베이터우 온천의 유황석에 함유된 극소량의 방사성 물질이 암 등 난치성 질환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또한 베이터우 온천에는 온천박물관이 있어 대만과 전 세계 온천의 역사와 특징들이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들리지 못했지만 한 번쯤 들러 볼 만하다고 한다. .
◀ 금용천(金湧泉)
09:20분에 온천욕장에 도착 후 11:00까지 온천욕을 즐겼다. 우리들이 온천욕을 즐긴 곳은 ‘금용천(金湧泉)’이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 있는 온천장이다. 남자, 여자 탈의실이 따로 있었다. 샤워실, 화장실, 온천장의 동선이 짧지 않았다. 남자들은 온천욕 시간이 길다고 했으나 여자들은 아쉽다고 했다. 대만의 온천 문화는 대만 사람들 대부분이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이라, 우리처럼 대중탕이 거의 없고 독탕, 가족탕이 주를 이룬다고 했다. 그럴지라도 온천욕을 즐기는 재미를 더하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양의 탕을 만들어 놓았다. 장미탕(로즈탕), 인삼탕, 우유탕, 원수 기포탕, 습사우나, 건사우나 등이 있었다.
가이드는 온천욕 시 남녀 구분이 없기 때문에 수영복, 수모를 꼭 지참하셔야 한다는 등의 유의사항을 꼭 숙지하고 실천하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야류해양공원(예류지질공원)을 찾다.
파도는 조용했다가 갑자기 크게 출렁거린다. 경관에 이런 파도의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빨간 줄을 쳐 두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야류해안의 지질을 보면서 아프리카에 시장 조사차 직원을 파견했던 00신발회사를 생각했다. 아프리카에 시장조사 차 다녀온 두 직원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 직원은 아프리카인들이 아무도 신을 신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신이 필요 없다고 했고, 다른 직원은 아무도 신을 신고
지진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면보다 야류해안처럼 지진의 영향을 긍정적인 눈으로 보자. 지진의 긍정적인 측면을 상상해서 관광(觀光) 해(海)라고 하자. 무슨 말인고 하니 바위 모습을 어떤 다른 사물에 비유해 봐라는 뜻이다. 그러면 바위의 모습이 아름다운 여왕의 모습으로 보이는 등 다양한 사물에 견줄 수 있울 것이다. 특히 여왕 바위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의 옆얼굴과 닮았다고 하여 더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그래서 그 모양이 더욱 매럭적이었다. 야류해안의 지질 암석은 모두 모래 암석으로 기괴한 모습의 형태를 한 용암, 사암들의 돌들이 여행객들에게 신비로움을 멋지게 선사해 주었다.
13:30분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야류해안 공원을 떠났다. 해안을 조금 벗어나 주차장 쪽으로 나오니 주변에는 온통 상가로 꽉 차 있었고 그들은 먹거리 등 다양한 상품을 팔고 있었다. 버스 주차장 입구에 있는 장삿집 아주마들은 멸치 등을 팔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장사치들의 모습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어떤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마디로 사람이 너무 많아 도테기 시장을 방불케 했다. 그래서 밥을 먹었는지 뭘 먹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우리같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야류공원은 대만의 진주(眞珠)임에 틀림없었다.
◈ 타이베이 시의 대표적인 번화가인 서문정은 젊고 활기 찬 기운이 넘치는 거리다
차는 타이베이 시가지를 열심히 달리고 있다. 타이베이 시가지(市街地)는 거의 평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섬나라에 이런 평지도 있나 싶을 정도였다. 강물을 끼고 아파트 촌이 여기저기 형성되어 있었으며 곳곳에 숲이 무성했고 타일을 박은 집들도 많았다. 도로들은 모두 쭉 뻗어 아주 좋았다. 영국이나 일본 등 섬나라의 운전석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오른쪽에 있는데 대만의 운전석은 우리나라와 같이 왼쪽에 있었다. 그런데 도로에 차 주차해 두기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트바이가 많은 나라였다. 주유소의 기름값은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해 보니 휘발유가 1,320원 가량으로 우리나라보다 가격이 훨씬 쌌다. 역이 있고 ‘성해해운(盛海海運)’이라는 간판도 보인다. 한국의 명동을 방불케 하는 이곳 서문정에는 다양한 노점상 및 의류, 잡화, 음반 등의 쇼핑몰들로 꽉 차 있어 아이쇼핑만이라도 즐거움을 주었다.
이제 백화점으로 간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중국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발맛지를 받는다고 했다. 본래 여행 계약할 당시에 발맛사지 값은 지불했다. 그런데 팁으로 8,000원을 더 달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대만의 발맛사지는 중국 본토보다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가이드는 대만에 대해 우리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여러 가지 비유를 들며 이야기한다. 대만의 1인당 GMP는 15,900불 정도라고 했다. 또 2000년부터 2008년도에 걸쳐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라 지금은 강력한 부동산 가격 억제 정책을 쓰고 있다고 했고 교사들의 월 급여는 우리 돈으로 약 300만 원 가량 된다고도 했다.
대만에는 현재 우리 교민들이 줄어들고 있어 한식 요리하는 식당이 없어지고 있으며, 대만인들은 그들의 입에 넣는 것 그들의 몸에 소용되는 것은 항상 안전에 유의하고 있으며, 다양한 사람들이 조그마한 땅덩이 섬나라에 살고 있어, 이외로 아주 경쟁이 심해 경쟁의 중심인 시장 마케팅이 대인기라고도 했다.
비가 내린다. 우산을 펴든다. 그러나 곧 비가 멈춘다. 잔뜩 찡그린 하늘에는 비가 올듯말듯, 지금은 비가 안 온다. 우산을 접는다. 그런데 다시 비가 온다. 이를 두고 오락가락한다고 하는가 보다. 대만의 날씨는 참으로 알 수 없다.
여행지에서의 만난 동료 여행객은 곧 친해진다. 우리들이 여행 온 것은 패키지로 왔다. 패키지로 왔기 때문에 모두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 강릉에서 왔다고 하는 어떤 색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왔다고 한다. 또 자매(33살, 35살)끼리 온 여행객도 있고 일가족 모두가 온 여행객도 있다. 한 마음이 되어 3박 4일을 보내야 해서 그런지 금방 친해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14:50 백화점에 도착했다. 쇼핑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쇼핑 장소 위치 안내 등 모든 광고가 한국어다. 아마 우리 한국 관광객을 위한 백화점인가 보다.
장개석 총통 기념관에 도착했는가 보다. 가이드는 차를 정문에서 정차하지 않고 옆문에 정차시켰다. 정문에서는 기념관까지의 도보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란다. 먼저 기념관 정경이 나오는 모형에서 사진을 찍었다. 우아한 명나라식 아치가 눈에 띄고, 아치를 통해 들어가니 광대한 정원과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 자체만으로도 으리으리하였다. !25톤짜리 거대한 장개석 동상이 현 총통부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1층에는 총통의 전시관이 있었다.
15:40 대충문(大忠門)을 통해서 장개석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소흥남가(紹興南街)의 장개석 기념관은 대북시의 중앙공원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언제나 개방되어 있다.
16:30 장개석 기념관을 나오다. 입구 좌우에는 국립극장과 콘서트홀이 위치하고 있어서 국가적으로 큰 행사들이 치루어지고 있었다.
주위의 간판을 보니 ‘자행차(自行車)’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자전거(自轉車)라고 표기하는데……. 또 우리는 ’Family mart'라고 하는데, 그들은 ‘전가(全家)’라 표현했다.
18:40, 지압 및 족욕을 끝냈다. 그 비용은 1인당 37,000원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 정도의 금액이면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안 가고 있는데, 여행이니까 한 번 해 보는 거다.
석식은 샤브샤브로 즐겼다. ‘샤브샤브’란 쇠고기, 버섯 등 야채, 만두, 국수, 죽 등의 순서로 요리되는 음식으로 육수에 살짝 데쳐서 먹는 요리를 일컫는다.
◈ 현지인의 종교 체험 용산사 관광
용산사는 270년 된 절이었다. 도교를 주로 믿는 대만인들은 정해진 시간에만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 그들이 믿는 신을 향해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용산사 ▶
◈ 타이베이 제일 오래되고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야시장을 관광하다
과일을 듬뿍 먹고 오라는 먼저 간 사람들의 조언대로 과일도 과일이지만 현지식의 발효두부에 과감한 도전을 해도 좋지 싶다. 중국이 원조라고 알고 있는 발효두부가 원래는 대만이 원조라고 한다.
특히 스린 야시장은 타이베이 가장 규모가 큰 야시장 가운데 하나로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전통적인 먹거리가 풍부하여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과연 스린 야시장에는 포장마차 등의 노점상들이 많아 가격도 저렴하며 가구나 의류, 액세서리, 애완용품점들을 보실 수 있었다.
밤 10시에 용산사를 나와 10시 20분에 호텔에 투숙하여 휴식을 취했다.
▲ 야시장의 전경
● 대만이여, 안녕!
2012년 02월 28일(화) 04일째, 오늘은 타이베이 부산으로 오는 날이다. 여유롭게 9시 30분까지 조식(호텔식)하라 하여 9시경 조식하고 10시 20분경에 로비로 나왔다. 로비로 나오니 전용버스가 대기하고 있어 그 버스로 바로 대만 중정국제공항으로 1시간가량 이동했다. 오늘의 일정은 부산으로 돌아오는 것뿐이어서, 사실은 장개석 기념관 관람이 오늘이었으나 어제로 일정을 당겼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2시간 정도 공항의 이곳 저곳을 돌아보며 구경하다가 13:15, BX702기로 대만 중정국제공항을 출발하여 기내식(중식) 1회를 제공 받고 약 2시간 30분이 지난 후인 16:25경에 김해 국제공항 도착하여 귀가하였다.
단 4일이었지만 이번 대만여행을 다녀오면서 대만인들의 정신세계를 참으로 높이 사게 되었는데 GDP가 거의 2만불이나 되는 나라이기에 웬만하면 너도나도 자가용을 살 법도 한데 출퇴근 시간이 되면 70~80%가 스쿠터로 출퇴근 하는 모습이나 서로 먼저 가겠다고 경적을 울리는 일 또한 볼 수 없었으며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도시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지역성장이 더딘 점은 아쉽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강제로라도 무시해 버리는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상반된 점이 보기 좋았다. 그런 나라이기에 또한 많이 가졌다고 해서 "나 잘났소"하고 잘난 체 하는 사람 또한 없어서 빈부의 격차를 크게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늘 견문을 넓혀라는 말이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가슴에 와 닿는다. 이 번 여행이 더욱 그렇다. 많이 배우고 많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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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내주신 이메일에는 사진이 잘 나와서 즐감하였습니다. 대만은 아직 가 보지 못해서 다음에 여행 갈 때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훌륭하고 상세한 여행기 감사합니다!
내년이나 내후년쯤 배낭여행할때 많은 도움이 될듯 하네요잘 봤습니다
즐간해줘서 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