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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83. [역경의 열매] 김덕호 (1-28) 3대째 한의사 집안… 30만명 무료 진료
내 이름을 낯설어 할 국민일보 독자들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5개의 인애가한방병원과 시립노인전문병원, 사회복지법인 장수마을의 3개 노인복지시설을 운영하며 500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는 경영인이라고 해야 할까. 3대째 한의사를 하고 있는 집안에서 30만명을 무료 진료하고 지금도 1주일에 6일을 진료하는 한의사라고 하는 것이 내게 더 가까울까. 목사를 8명 배출하고 30명의 장로가 있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뼛속까지 기독교인인 사람이라고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런 것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그저 상처 많고 허물 많은 한 사람의 죄인이자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은 인간일 뿐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내세울 것은 별로 없고 오히려 털어 놓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 많은 인생이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살아계심을 조금이나마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려 한다.
나는 경북 영주시 장수면 성곡리에서 자랐다. 성곡리는 '별고을'이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별 볼일밖에 없는 두메산골이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산쪽으로 제일 가까운 외딴집이었다. 무려 120여년 전에 건축된 기와집이었데, 방만 30칸이 있었다. 산 중턱에서 바라보면 맑은 날에는 멀리 영주 시내 불빛이 은은하게 보였고, 모교회인 성곡교회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교회 장로였던 할아버지는 한의사였다. 할아버지에게 진찰을 받고 약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밤낮 없이 집을 드나들었다. 할아버지는 돈이 없는 환자도 박대하지 않고 동네의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도우셔서 존경을 받았다. 요즘에도 영주에 가면 "김 박사 조부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 정도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새벽 일찍 깨워 성경과 한학을 가르치셨다. 잠이 부족해 눈을 비비기라도 하면 찬물로 세수하고 오라고 내쫓으셨다. 천자문부터 시작해 계몽편 명심보감 고문진보 사략 격몽요결 등을 외워야 했다. 할아버지가 바쁘신 날에는 저녁에 열리는 서당에서 동네 형들 틈에 끼여 앉아서라도 공부했다. 그러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꾸물대면 회초리가 기다린다.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가 밉기도 했다.
농사일은 끝이 없었다. 더운 여름날 웃통을 벗고 보리타작을 하다보면 까칠까칠한 까끄라기가 온몸에 들러붙어 따갑고 가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똥지게를 지고 가다가 자칫 잘못하면 뒤집어쓰게 된다. 수시로 풀을 뽑아도 돌아서면 잡초가 나 있었다. 때론 약초를 작두로 써는 일도 빠트려선 안됐다.
인생에 첫 시련이 닥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고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서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어떤 아주머니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는 아버지는 별말을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할머니께 여쭤보았다.
"할매, 저 아지매 누군데 엄마하고 저래쌌니껴?"
"덕호야, 아지매가 아니고 저 여자도 니 엄마데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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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경북 영주 출생/경희대 한의대 박사/의료법인 인애가한방병원그룹·인애가사회복지재단 이사장/경희대 부속한방병원 외래교수
***[역경의 열매] 김덕호 (2) 또 다른 어머니 등장에 어린시절 방황
나에게 엄마가 2명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었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영주에서도 소문난 기독교인 집안에다 할아버지는 동네 서당 훈장이 아니신가. 이런 집안의 아버지에게 2명의 아내가 있다니. 이해가 안됐다. 혼란스럽기만 했다.
'영주 어머니'로 불린 그분은 시시때때로 찾아와 어머니더러 나가라고 소리쳤다. 때로는 험악한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집안이 뒤집어졌다.
자초지종은 여러 해 뒤에야 알게 됐다. 영주 어머니는 아버지의 첫 아내였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이 났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영주 어머니의 친가에는 만성 피부병 환자가 있었다는데, 비슷한 증상이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치료법이 개발됐지만 그때만 해도 백납 또는 백반증이나 한센병 같은 피부질환은 난치병이었다. 더구나 한의원을 하는 집안에 피부병 환자라니. 할머니는 깜짝 놀랐고 영주 어머니는 자의반 타의반 친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에 우리 어머니가 시집을 오셨고 내가 태어난 것이다.
이런 내막을 알고 난 뒤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영주 어머니도 이해가 되었지만, 그건 뒷날의 일이었다. 당시는 앞뒤 사정도 모르는데다 사리분별도 안될 때였다. 그냥 모든 것이 할아버지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앞에서 꼼짝을 못했다. 내 용돈도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에게서 받아야 했다. 그런 아버지가 때로는 불쌍했다. "나라도 열심히 돈 벌어 호강시켜 드려야지"하고 다짐하면서 혼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할아버지와는 얼굴을 마주치기는 것도 피했다. 남들은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하고 날더러 본받으라고 했지만, 난 속으로 '우리 집안 꼴이 어떤지 알고나 그러세요'라며 코웃음을 쳤다. 교회를 가도 설교는 고리타분하기만 했다.
나는 날이 갈수록 비뚤어졌다.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했다. 우리 집에서 같이 살면서 일하던 고모를 발로 걷어차거나 부지깽이로 치마를 들치곤 했다.
초등학교 앞에서 숙부님이 문방구와 기름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학교를 마치면 가끔 가게를 보곤 했다. 그럴 때면 10환 20환을 빼돌리곤 했다. 등록금을 떼어 먹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쩌다 할아버지 책상 위에 치료비로 받은 돈이 있는 것이 눈에 띄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중학생이 됐다. 나는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시한폭탄이었다.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다.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패거리를 만들기로 약속했다가 선배들에게 뭇매를 맞기도 했다. 역 앞 대폿집에서 교복 단추를 풀고 앉은 형들을 보면 왠지 멋있어 보였다. 그 형들과 어울려 다니며 담배도 피웠다.
중학교 3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가니 영주 어머니가 어머니 앞에서 가위를 들고서 큰 소리를 치고 계셨다. 그 광경을 보고 내 눈이 뒤집어졌다. 나는 두 어머니 사이로 뛰어들면서 소리쳤다.
"내가 칵 디지삐면 그만 싸울랍니껴!"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보기 싫었다. 정말 죽어버리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마당에 뒹굴던 새끼줄을 집어 들고 뒷산으로 달려갔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3) 은혜 체험한 뒤 용서하는 법 배워
나무에 줄을 매달았다. 내가 죽으면 모든 문제들이 끝날까.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 있었다. 동생들의 얼굴이었다. 내가 죽어도 집안 문제는 여전히 7명의 동생들을 괴롭힐 것이다. 죽고 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니 차마 죽을 수 없었다. 매달았던 줄을 풀고 터덜터덜 산을 내려왔다.
또 한번은 마을 저수지로 들어가 죽으려 했던 적도 있었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갈대밭 사이로 조금만 걸어가도 땅이 쑥 꺼지면서 사람을 빨아들이는데, 그때는 늪도 꽁꽁 얼어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죽을 수 없었다. 이것도 아닌가 보다 싶어서 다시 걸어 나왔다.
사실 할아버지나 부모님들도 무척 힘이 드셨을 것이다. 실제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 많은 속병을 앓으셨다. 내가 어린 나이였기에 어른들의 그런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다. 나만 고통 받는다고 생각하고 나의 아픔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러고 보면 자식이 부모를 이해하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인생에는 뜻하지 않은 고통이 있을 수 있다. 우리 부모님들처럼 가해자가 없어도 이렇게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죽으려고 했지만 죽을 수도 없었다. 가족의 화목을 위해 기도도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인생은 고통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이 실타래처럼 얽힌 고통과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훌훌 털어버리고 해탈해야 한다고 한다.
기독교에선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용서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봐도 분명한 일이지만, 고통에 빠진 인간이 어떻게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닐까. 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뒤에야 어른들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다.
마을에는 같은 또래의 여학생이 있었다. 이름은 류성우였다. 성우네와는 할아버지끼리도 친했고, 교회도 어릴 적부터 같이 다녔다. 성우는 나중에 영천으로 이사를 갔지만, 가끔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고1 겨울방학 때였다. 교회에 가니 성우가 와 있었다. 그녀는 "방학이 되기만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다.
"머때매 그래 기다린노?"
"그거야 겨울에는 교회에서 부흥회하니까 빨리 와서 준비도 해야 되겠고, 우리 할배도 아프시니까 걱정도 되고…."
성우는 슬쩍 한마디를 덧붙였다.
"또 덕호 니도 보고 싶었다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겨울산을 올라 비둘기와 참새를 잡았다. 내려오는 길에 바위에서 잠시 쉬었다. 산에 오니 얼마 전에 죽으려고 여기를 올라왔던 일이 생각났다. 친구들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너거들 보기에는 우리 할배가 한의사고 집도 크니까 내가 부럽쟤? 근데 그거 다 빛 좋은 개살구데이. 와 내는 하필이면 이런 집에 태어났는지 진짜 불행하다. 그래서 죽을라캤다."
내 얘기에 친구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성우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4) "은사 받겠다" 결의 다지며 부흥회로
나는 내친김에 말을 더 이어갔다.
"까놓고 말해서 우리 집은 부자도 아니데이. 돈도 없다. 부모님도 별로 사이가 안 좋다 아이가. 싸우는 거 말리는 게 일이다. 이런 집안에 태어난 거는 불행한 거다. 하루하루 사는 게 진짜 힘들다. 얼마나 힘들었으모 콱 죽어삘라 그랬겠노. 동생들 아니모 그때 죽었을지도 모른데이. 내사 오늘도 그냥 다 잊어삐고 싶어가 너거들하고 사냥이나 하자 그랬다 아이가. 너거 같으면 우예 했겠노?"
내 말에 친구들이 한마디씩 했다. 성우가 한 말이 기억난다.
"덕호야,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니를 억수로 사랑하고 계시는 거 같다. 니는 이겨낼 수 있을 기다. 딴 생각하지 말고, 이겨가라. 힘내라. 알았재?"
겨울마다 여는 부흥회가 다가왔다. 성우는 나에게 부흥회에 꼭 같이 가자고 말했다.
사실 나는 어른들에게 실망한 뒤부터는 교회도 싫었다. 억지로 예배에 참석해도 설교 시간에는 늘 졸았다. 할아버지 때문에 새벽기도도 갔지만, 마룻바닥에 앉아 졸다가 뒤로 꽈당 넘어진 적도 있었다. 부흥회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수요일쯤 되니 성우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했다. 성우 동생은 영어 방언을 받았다고 했다. 기도하는 것을 훔쳐 들으니, 영어도 못하던 아이가 유창하게 영어로 기도를 하는 것 아닌가. 주변을 보니 방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덜덜 떨면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맨송맨송했다. 돌아보니 할아버지나 아버지도 남들처럼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성우가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었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답답해졌다.
'하나님이 없는 것은 아닐까. 있다 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밥도 먹지 않고 매달렸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목요일 저녁이 되자 마치 뭔가에 짓눌리고 갇혀 있는 듯했다. 죽고 싶은 충동이 또 일어났다. 친구들은 다 은혜를 받고 은사까지 받는데 왜 나만 이 모양일까. 성우는 그런 나를 위로해 주었다.
위로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부흥회 마지막 날인 금요일. 어머니가 아침밥을 먹으라고 깨우셨지만 일어나기도 싫었다. 교회 가기도 싫었다. 그냥 집에서 누워 잤다.
성우가 나를 찾으러 왔다. 저녁 6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는 내게 군고구마를 내밀며 함께 가자고 했다.
성우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교회는 이미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로 가득 했다. 한겨울이었지만 열기가 뜨거웠다. 앉을 자리도 없었다. 맨 앞자리가 황금자리라는 목사님 말씀이 생각났다. 학생이니까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오늘은 꼭 결판을 내야겠다'고 마음먹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때 부흥회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외치셨다.
"내가 은혜 받고 내가 새로워지자."
그래, 내 문제는 죽든지 살든지 내가 해결해야지. 나는 부흥회의 열기 속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갔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5) 지난날 방황 참회의 기도… 새 인생 시작
나는 부흥회의 열기에 압도되기 시작했다. 여태 그냥 불렀던 찬송가였는데 가사가 하나하나 가슴에 파고들었다. 다섯 끼를 굶는 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고구마뿐이었는데 머리는 오히려 더 맑아졌다. 분명히 맥이 빠진 상태여야 하는데 알지 못하는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기도를 하는데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라는 생각이 몰려 왔다.
그때 목사님께서 강단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김덕호 학생이 '은혜를 간절히 사모합니다'라는 제목으로 감사헌금을 했습니다. 김덕호 학생이 누군지 일어나 보시오."
순간 벌떡 일어났다. 목사님은 "덕호 학생은 방언 통역 예언에 가르치는 은사는 물론 특별히 신유의 은사가 강력하게 임할 터이니 바짝 매달리세요"라고 하셨다. 난 순간적으로 "아멘"하고 크게 외쳤다. 그 자리에 있던 온 교인들이 다 같이 "아멘"하며 화답해 주었다. 난 그때 감사헌금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날 대신해 감사 헌금을 냈던 것이다. 그게 부모님인지, 성우였는지, 다른 누구였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조지 뮬러 이야기를 하셨다. 어린 시절 방황했던 그는 20세 때 주님을 영접한 뒤 평생 고아원을 섬겼다. 모든 것을 나누었기에 말년에는 쪼들렸지만 오히려 하나님께 더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세상의 권세와 명예, 재물을 다 버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유산을 남긴 그의 이야기가 내게 불을 지폈다.
"나도 100여년 전 이 믿음의 선배처럼 살게 해 주십시오." 조지 뮬러가 만난 그 하나님을 나도 만나고 싶었다.
"하나님, 고통에 빠져 헤매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이 김덕호를 사랑하십니까. 내 평생을 내맡길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진정 이 구덩이에서 건져 주신다면 나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때와는 다르게 기도가 술술 이어졌다. 내 마음속에 있던 의심이 어느새 사라지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선하게 인도해 주시는 길을 따라 순종하겠습니다. 새롭게 하소서. 저의 미래를 보여 주소서."
기도를 하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얼굴도 화끈거렸다. 심장이 뛰었다. 어떻게 할 줄 몰랐다. 몸이 떨렸다. 뜨거운 열기가 배 깊숙한 곳에서 배꼽으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오 하나님, 너무 뜨거워요. 진정 이 느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면 더욱 뜨겁게 해 주십시오."
가슴을 부여잡고 고개를 들어 십자가 위를 바라보는데 마치 전기 치료를 받듯이 짜르르 전율이 왔다. 불덩이가 가슴과 등을 뚫어 놓는 듯했다.
집회가 마친 뒤에도 더 기도를 하고 싶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나 혼자 죽으려고 올라갔던 그곳이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두껍게 얼어붙은 추운 밤이었다. 바람도 쌩쌩 불었다. 그래도 나는 성령 충만을 받고 은사를 체험하고 싶다는 생각에 산중턱까지 걸어가 눈 위에 무릎을 꿇었다. 마침 보름이 가까워 달이 밝았다.
기도도 절로 나왔다. 전에는 기도할 말이 없었는데, 이때는 이상하게도 눈물 콧물이 흘러도 닦을 틈도 없이 기도가 줄줄 나왔다. 내가 저지른 잘못들이 눈앞에 영화처럼 펼쳐지는 것 같았다. 뜨겁게 기도하는 중에 방언이 터져 나왔다. 너무나 평안했다. 엎드린 자리의 눈이 녹아 진흙탕이 됐는데도 행복감이 밀려왔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6) 은혜 받으니 회개하고 용서하게돼
그날 이후 내 인생이 바뀌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와 기쁨, 소망이 솟아올랐다. 땅만 쳐다보던 내 영혼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하고 있었다. 찬송을 부를 때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어른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소년 김덕호는 없었다.
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 그 은혜가 내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 용기를 가지고 이제는 내 주변의 사람들과 관계를 풀어야 했다.
학교 앞에서 문방구점를 하시는 숙부를 찾아갔다.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재, 용서해주이소."
"야가 와 이라노. 퍼뜩 일나라."
"아입니더. 들어보이소. 지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아재 대신 가게 본다고 만날 들락날락 했다 아입니꺼. … 그때 10환씩 20환씩 제 호주머니에 챙긴 적이 많았심더. 그때는 용돈도 궁하고 해서 그랬는데 철없는 짓을 했십니더. 용서해주이소. 지금은 갚을 길이 없지마는, 내가 크면 꼭 갚겠심더."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숙부는 쉽게 용서해 주셨다.
"아이고, 덕호야. 기특하기도 하재. 마, 됐다. 니 용돈 준 거로 생각해라. 어여 일나라."
숙부를 뵐 때마다 늘 죄송하고 혹시 알아채지 않았을까 두려웠던 것이 한순간에 풀려버렸다. 할아버지도 찾아갔다.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배. 지가 할배한테 등록금 달라케놓고 몇번 받아서 써삤심더. 용서해주이소. 앞으로는 안 그라겠심더."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보니 할아버지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이내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할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내 어깨가 나도 모르게 들썩거렸다.
나도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고등학교에 막 올라왔을 무렵, 몇 녀석이 나를 집단으로 때린 적이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당했다. 평소 그 녀석들을 만나면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속에 칼을 갈곤 했다. 그 녀석들을 찾아갔다.
"느그들, 지난 봄에 내를 모다구리(집단폭행)했재. 머때매 그랬는가는 모르겠는데, 내는 억수로 억울했다. 느그들 한번 걸리면 반쯤 죽이삐야지캤다. 근데 마 이제 다 잊어삘란다. 느그도 잊어삐라. 대신에, 느그들 내하고 같이 교회 가자."
그 친구들은 지금도 영주에 살고 있다. 가끔 고향에서 만날 때면 이런 옛날이야기를 하며 웃곤 한다. 나중에 그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자기들을 보고도 아는 체하지 않고 지나가는 게 미웠다고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두운 호롱불이나 촛불 아래서 책을 읽거나 달빛에 글을 비춰보곤 했다. 눈이 나빠져 초등학교 졸업 무렵에는 20m 앞의 사람도 구별하기 어려웠다. 중학생이 된 뒤 은혜 받기 전까지 나는 공부는 좀 한다고 하면서도 나름대로 역 앞에서 담배도 피고 막걸리도 마시고 했다. 그런 놈이 친구들을 모른 체하고 지나가 버렸으니 그 녀석들에겐 눈꼴사납게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세상을 같이 살기 싫을 정도로 미워했던 분,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했던 분, 바로 영주어머니였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7) 행복한 10대로 탈바꿈… 친구 전도 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나의 하나님이 영주 어머님의 하나님도 되신다면, 그분도 공경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른들의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꿰매 주시고 치유해 주십시오."
영주 어머니에게는 2명의 자식이 있었다. 내게는 이복동생이었다. 거듭남을 체험한 뒤 그 동생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는 중에, 내가 집안의 평화를 열망하긴 했지만 평화를 만드는 이(Peace Maker)가 되려는 결단은 미처 못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평은 절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평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설교 말씀도 기억이 났다.
방학이 끝난 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자전거를 시내로 돌렸다. 그 곳에는 영주 어머니가 외롭게 살고 계신 집이 있었다.
무작정 페달을 밟았다.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생각이 지나갔다. 과연 영주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우리 어머니를 그렇게도 미워하시니, 나도 쫓아내지는 않으실까. 그러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영주 어머니를 용서한다고 말씀드리면 이해를 하실까. 아니면 내가 그동안 미워했던 것을 용서해달라고 해야 할까.
금세 영주 어머니의 집 앞에 다다랐다.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때에나 마지못해 찾아오던 집이었다. 오늘은 그런 핑계거리도 없이 혼자 찾아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영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굽니껴?"
"덕혼데요."
"어, 덕호 왔나. 들어오니라."
영주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왜 왔냐고 묻지도 않으셨다. 나는 운동화를 벗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밥 아직 안 묵었쟤?"
"예. 안 먹었니더."
"쪼매만 기다리래이. 밥 묵자."
영주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 오셨다. 소박한 밥상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별 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늦겨울 햇살이 창문을 넘어 들어와 밥상 위에 내려앉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날 나는 용서한다느니 용서해달라느니 하는 말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 같이 밥을 먹었을 뿐이었다. 그냥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 나는 가끔 별일 없이 그 집을 찾아가곤 했다. 그럴 때면 영주 어머니도 별 말 없이 내게 상을 차려주셨다. 영주 어머니는 내게 자신의 두 아들과 우애 있게 지내라고 당부하셨다. 그 집 동생들은 공부를 제법 잘했다. 영주 어머니에게는 두 아들이 자존심이자 자랑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방학 동안 큰 은혜를 체험한 나는 친구들에게 "예수를 만나 억수로 행복한 사나이가 됐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우리학교 교훈이 '경천애인(敬天愛人)'인데, 성경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을 경외해보자"고 일장연설을 늘어놓고는 했다.
그 시절 친구였던 금항련은 그때 내 모습이, 까무잡잡하고 울퉁불퉁한 게 잘생긴 구석도 없는 녀석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고 확신에 차있어 행복해보였다고 말했다. 그 친구도 나의 전도로 신앙을 갖게 됐고 지금은 장로가 되었다. 얼마나 큰 은혜인가. 서서히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나는 가업을 이어 받아 한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8) 한의대 입학후 유신 반대하다 유치장행
진로를 고민하면서 꼭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부담을 갖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도 은근히 바라기는 하셨겠지만 굳이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돈이나 명예보다 하나님 앞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평생 지루하다고 느끼지 않고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한 끝에 결국 의료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의료 활동을 통해 사람의 육신을 살리는 것은 물론이고 나눔과 섬김으로 영혼을 살리는 일까지 하고 싶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위한 성가 연습 기간은 꼭 시험 기간과 겹쳤다. 공부도 중요했지만 주일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 행사 준비도 빠질 수 없었다. 그러니 1분 1초를 아껴가며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해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힌 새벽기도의 습관과 주일성수를 위해 시간을 관리해온 경험이 지금까지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잠을 줄여야 할 때도 많았다. 촛불을 켜놓고 공부하다 머리카락을 여러 번 태워먹었다. 촛대가 넘어져 이불까지 불이 붙은 적도 있었다. 호롱불이 넘어져 석유가 흐르면서 큰 불을 낼 뻔도 했다. 물을 퍼올 틈도 없어 몸으로 덮었다가 화상을 입기도 했다.
"내 목숨 주님의 것, 나 하나 불살라 하나님께 드리자."
아예 벽에다가 이렇게 써붙여 놓았다. 새벽기도를 할 때에도 이렇게 기도했다.
"불 같이 살게 하소서. 나를 태워 남은 재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을 향해 드려서 거름이 되게 해 주십시오."
12월의 예비고사를 앞두고 교회에서 성탄절 칸타타 준비에 들어갔다. 고3이라는 핑계를 대고 빠질까 고민도 했지만 앞으로 긴 시간을 살면서 신앙과 세상 일 중에서 선택할 일이 많을 텐데 처음부터 잘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범사를 여호와께 맡기라"는 말씀이 기억났다.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더 열심히 공부하게 하소서. 지혜를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나니 마음에 평안이 왔다. 설사 입시에 낙방한다 해도 주님이 선한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예비고사에 합격한 뒤 쉴 겨를도 없이 본고사 준비에 들어갔다. 전기는 서울대 의대, 후기는 경희대 한의대를 선택했다. 내 마음은 내심 한의대에 더 기울어 있었다. 당시 한의대는 경희대뿐이었다. 정원은 40명. 전기 시험에선 수학이 조금 어렵다고 느꼈는데 결국 낙방했다. 후기 시험을 치르던 날은 눈이 많이 왔었다. 시험 당일 청량리 동도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기분 좋게 합격했다. 영주 촌놈의 서울 유학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
이 글이 국민일보에 실리는 날이 공교롭게도 수학능력시험일 하루 전이다. 40년 전의 나처럼 내일 시험을 치르는 모든 수험생에게도 하나님이 앞길을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굳게 붙잡기를 당부하고 싶다.
대학에 들어가니 시위로 캠퍼스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개헌으로 시끄럽던 시절이었다. 나도 유신 개헌에 반대하는 시위에 뛰어들었다. 내 앞에 최루탄이 떨어졌다. 눈물 콧물을 흘렸다. 경찰의 곤봉이 날아왔다. 청량리경찰서에 끌려갔다. 유치장에 갇힌 신세가 됐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9) 대학시절 주말엔 귀향, 교회신축 도와
당시에는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대학이 두세 달씩 휴교하기 일쑤였다. 개헌 반대, 군사정권 타도, 거기다 한의대는 한의군 장교 신설 등으로 데모가 이어졌다. 나도 예과 시절에는 개헌 반대 데모를 하다 청량리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진 적도 있었다. 내 앞에 떨어진 최루탄 때문에 고통당했던 기억도 있다.
나는 당시 정의감에 넘치는 젊은이로서 박정희 정권에 반대했지만, 소요 속에서도 그 뒤편에 꿈틀거리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한국인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찬반 양론이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것은 성장하고, 성장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이런 한국을 사랑하실 것이다. 분명 미래의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하고 큰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 우리 사회도 40년 전인 그 때 못지않게 시끄럽다. 대립과 분열도 심각하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 Maker)이 되어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고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면, 분명 오늘의 이 고통은 훗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성장통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의학 공부는 무척 힘들었다. 매일 쪽지 시험, 구두시험에 수시로 시험이 추가됐다. 1시간에 100쪽 씩 진도를 나가는 해부학 한 과목만 해도 1주일 내내 외우고 그리고 익혀야 했다. 새벽기도와 성경 묵상을 통해 힘과 지혜를 얻고 순간순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따라가기가 벅찼다.
어느 날 친구 녀석이 미팅에 나를 끌고 갔다. 내 파트너는 숙대 약학과 여학생이었다. 농담을 잘하는 친구들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나는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몰라 머뭇머뭇하다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나도 사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좀 논다고 놀았는데, 계속 그랬다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좀 더 재미있는 얘길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겨울방학 때 교회 부흥회에서 기도하면서 내가 큰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 뒤로 내 생활이 완전히 바뀌었다. 날마다 기쁨이 넘친다. 내가 한의대에 들어온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증거하고 싶은 꿈 때문이야."
미팅에서 처음 만난 여학생에게 이런 설교를 늘어놓았으니, 내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답답하다. 상대 여학생은 한참 동안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은 불교야. 어머니가 보살이거든. 넌 꼭 철학자 같다. 목사 같기도 하고…."
그 여학생과는 그 뒤에도 가끔 연락을 해서 만났다. 만나면 나는 늘 복음을 전했다. 그 학생은 졸업 뒤 제약회사에 다니다가 약국을 개업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겹게 살다가 예수를 믿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바쁜 중에도 주말에는 영주에 내려갔다. 모교회인 성곡교회가 건축을 시작했기에 토요일 하루는 교회에서 벽돌을 지고 흙을 날랐다. 주일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예배를 드리거나 때로는 성곡교회에서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한 번은 흙짐을 지고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만든 임시 계단을 오르는데, 3층 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발이 푹 꺼졌다. 나무판자가 힘없이 내려앉으면서 몸이 획 기울어졌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으면서 나는 허공으로 떨어졌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10) 교회 완공 기뻤지만 학비 걱정에 막막
발을 헛디뎌 떨어지던 나는 2층의 지지대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공사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달려왔다. 얼굴과 무릎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당시 성곡교회 건축에는 온 성도들이 헌신했다. 특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각오는 남달랐다. 할아버지는 한의원 수입을 모두 교회 건축을 위해 드렸고 1년의 공사 기간 동안 인부들의 새참을 도맡아 부담하셨다.
여기엔 할아버지의 개인적인 부담감도 작용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강요받았을 때, 할아버지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 바람에 서당도 문을 닫았고, 교회도 큰 어려움을 당했다. 일제는 교회 종을 떼어 가고 고등계 형사를 보내 일일이 감시했다.
할아버지는, 비록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교회에 어려움을 준 것을 늘 마음의 빚으로 생각했다. 그런 부담을 씻기 위해 건축에 더 열심을 내셨던 것 같다.
묘한 것은, 할아버지에게 그토록 불만이 많았던 나도 교회 건축에는 찬성을 했던 점이다. 내 학비와 용돈을 내가 마련하는 것이 교회 건축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주말마다 교회 건축 현장으로 달려가 흙짐을 졌는데, 내가 크게 다쳤다면 교회에서도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3층에서 떨어지는 큰 사고를 가벼운 부상으로 넘긴 것은 나 자신은 물론이고 여러 모로 다행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이라 믿는다.
교회가 완공되던 날 할아버지는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나도 북받쳐 오르는 가슴을 누르며 뜨겁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그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교회 건축 때문에 집안에 손을 내밀지 못했지만, 사실 등록금을 마련하는 일은 내게 큰 부담이었다. 교회에서 흙짐을 질 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선 등록금 걱정, 생활비 걱정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2학기 때에는 고등학생 2명을 과외하면서 등록비와 생활비를 간신히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학과공부는 더 어려워질 것이니 계속 과외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교회 건축이나 주일학교 봉사, 성가대 일을 빠질 수도 없었다. 주일성수는 어릴 때부터 철저히 해야 한다고 배웠으니 그날은 공부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고민이 커졌다.
하루는 학과장이신 강효신 교수님이 나를 부르셨다.
"김덕호군, 다음학기 등록금은 마련이 됐는가?"
"아직 마련이 안 돼 사실 조금 걱정이긴 합니다."
"김군은 성적이 좋으니 성적장학금을 탈 수 있겠네. 충분하진 않아도 등록금 절반 정도는 될 것이야. 그리고 이번에 마침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에 우리 학과 학생을 1명 추천해달라고 요청이 왔네. 5·16장학금이라면 등록금을 다 내고도 남지."
"예? 정말입니까? 저를 5·16장학생으로 추천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5·16장학금은 자네 선배인 민병일군과 자네 중 1명만 받을 수 있네. 김군과 민군 둘이 협의해서 결정해야 하네. 성적장학금과 5·16장학금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내일까지 생각해보고 답을 해 주게나."
***[역경의 열매] 김덕호 (11) 장학금 절박한 상황에 잇따른 행운
밤새 고민했다. 고향의 교회 건축을 위해서라도 나는 장학금을 꼭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민병일 선배에게도 나름대로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튿날 민병일 선배와 내가 나란히 강 교수님 앞으로 불려갔다.
"누가 5·16 장학금을 받겠는가. 우리 학과로서도 좋은 기회이니 오늘 이 자리에서 둘 중 1명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네."
내가 먼저 말을 하는 것이 민 선배에게 부담이 적을 것 같았다. 새벽기도 시간에 결심한 대로 말했다.
"민병일 선배님을 5·16 장학생으로 추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에게는 앞으로 또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민 선배가 서둘러 내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후배인 김덕호 군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5·16 장학금이면 졸업할 때까지 받을 수 있는데, 덕호가 받으면 장학금 수혜 기간도 더 길어지니 학교로서도 더 이익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덕호에게 양보하는 것이 여러 모로 좋겠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 양보를 반복했다. 강 교수님은 지긋이 웃으시며 민 선배의 말대로 후배인 나를 추천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일을 계기로 민 선배와는 두터운 정을 갖게 됐다. 서로 개업할 때나 학위를 받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찾는 선후배 사이가 됐다. 민 선배는 지금 경희대 의대 생리학과 교수로 계시며 세계적인 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즈후(Marquis Who's Who)'에 등재되기도 했다.
하나님의 축복이 이어졌다. 경주 김씨 종친회에 신청한 장학금도 받게 됐다. 종친 장학금은 대학원 석사 과정까지 수혜를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한의대에는 나이가 많은 신입생들이 꽤 있었는데, 그런 후배 중 몇 사람이 내게 학과 과외를 요청했다. 배운 것 중에서 중요한 요점만 정리해 달라는 것이다. 학과 공부도 되고 생활비도 벌 수 있는 길이었다. 이렇게 되니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도, 생활비도 다 해결이 됐고 오히려 모교회에 필요한 피아노나 OHP 같은 물품까지 바칠 수 있게 됐다.
이 모든 일이 내게는 기적과도 같았다.
시간의 여유를 얻은 나는 틈나는 대로 의료 봉사 활동도 하고, 또 당시 전철 휘경역 옆에 있었던 성문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로도 봉사했다. 교회학교는 중학생 때부터 보조교사로 활동해 왔기에 빠질 수 없었다.
어느 주일이었다. 한 아이가 감기가 걸린 채로 교회에 왔다. 기침도 하고 열도 있었다. 위생병원 부근에서 20분이나 되는 길을 늘 걸어오는 아이였다. 예배 중에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12) 난지도 교회찾아 무료진료하다 봉변
바깥에 저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감기 걸린 아이가 우산도 없이 갈 것이 걱정됐다.
우산을 함께 쓰고 집까지 바래다줬다. 장대비 속을 20분 동안 걸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문이 잠겨 있었다. 문 앞에서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그 아이도 가정 문제가 많았다. 얘기를 듣고 있으니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선생님도 너랑 비슷했단다. 내가 너만 할 때 할아버지를 많이 미워했지. 난 너무 힘들어서 두 번이나 죽으려고 했을 정도였어. 하지만 미워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더라. 오히려 내가 마음속으로 용서하고 어른들이 화해하도록 애쓰니까 그게 훨씬 좋더라고. 너도 지금 부모님 때문에 많이 힘들겠지만, 어른들을 너무 많이 미워하지 말어. 나중에 네가 어른이 되면 그땐 먼저 손을 내밀고 용서해주렴. 선생님도 같이 기도할게."
내 말을 듣던 아이는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예. 선생님. 선생님 말씀 잘 기억하겠습니다. 콜록콜록. 그런데 선생님, 저 지금 너무 추워요."
이마를 짚어보니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급히 위생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그 아이는 나중에 친구들을 교회로 많이 데리고 왔고, 아주 착실하게 성장했다.
또 한번은 겨울밤에 한 중학생 제자가 "죽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다. 부모가 이혼하게 돼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사정이 딱했다.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또 나의 과거 얘기를 해주며 함께 울었다. 마침 아르바이트로 받은 돈을 봉투째 건네주고 힘을 북돋아주었다.
하나님께서는 묘하게도 과거 나와 같은 처지의 학생들을 붙여 주셨다. 내게도 어린 시절의 아픔이 있었기에 그 아이들과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또 그 고통을 극복했기에 희망과 위로를 줄 수 있었다.
그 시절 교회학교 제자 중에는 목사가 된 사람도 여럿 있다. 영락교회 부목사로 계시다 경남 창원 상남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한 이창교 목사님도 어린 시절 성문교회에서 똑똑하면서도 유명한 개구쟁이였다. 얼마나 감사한가. 사람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무료진료 활동도 열심히 했다. 당시 경기도 과천에 있었던 구세군 양로원과 강동구의 청암양로원을 거의 매주 방문했다. 거기서 노인복지에 눈을 떴고, 인애가병원 설립으로 이어졌다. 보육원과 교도소도 자주 찾았다.
본과 2학년 무렵 혼자 난지도를 찾아간 적도 있었다. 지금은 월드컵 경기장과 공원이 들어섰지만 당시엔 거대한 쓰레기 산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파리떼가 들끓었다. 남자들은 거의 술에 취해 있었고, 아이와 여자들은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선배 한의사와 함께 교회를 찾아가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그날도 가랑비가 오고 있었다. 선배와 진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안경이 벗겨져 내동댕이쳤다. "악"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만지니 벌겋게 피가 흘렀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13) 한의학 공부하며 성경의 진리 확신
술 취한 남자가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린 것이었다. 좀 전에 진료를 받으러 왔던 남자였다. 속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고 했는데, 술에 취해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말도 꼬였다.
"아저씨, 취한 상태에서는 진료가 어렵습니다. 다음주 토요일에 또 올 테니 그때는 술 드시지 말고 오세요. 죄송합니다."
"그∼냥 봐줘봐!"
몇 번이고 실랑이를 했다. 조용히 가는가 했더니 어느새 뒷문으로 들어와 나를 때린 것이었다. 술김에 화가 단단히 났던 것이다. 옆에 계시던 목사님은 어쩔 줄 몰라하셨다. 우리를 붙잡고는 저녁밥을 먹고 가라고 하셨다. 밥을 먹으며 난지도 생활에 대해 자세히 듣게 됐다.
난지도의 쓰레기 더미에서 가끔 금반지나 돈이 나오기도 한다. 어쩌다 돈 될 만한 물건을 찾았다 해도 팔아서 술 마셔 없애고 노름해서 없앤다고 했다. 주민등록마저 말소된 인생, 내일의 희망이 없기에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힘든 사람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때린 그 사람을 보복하려는 주먹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매여 있는 생각과 질병을 때려 눕혀야겠다는 주먹이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거마지역에 마천청소년 수련관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내 마음속에는 신앙과의 갈등도 있었다. 특히 동양철학을 가르쳐 주셨던 노 교수님은 태극 원리를 절대화시켜 마치 종교 교리처럼 강의하셨다. 이분은 무신론적인 유물관에 입각한 절대 자연주의를 주장했다. 한의학도 그런 동양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공부를 하면서 사고를 정리해 나갔다. 동양철학도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동양인의 관념적인 눈으로 이해하고 분석 종합해 세운 학문일 뿐이다. 인간의 몸 또한 소우주다. 대자연에 오행과 육기가 있듯 인체는 오장육부가 있다. 달의 차고 기움이 여성의 생리에 관련되고, 항진과 억제 호르몬, 면역의 과함과 부족, 양이온과 음이온 등 자연현상은 음양 이론의 근거가 된다. 나는 한의학의 기초 이론 근거인 동양철학과 성경의 만남이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진리를 동양철학이 잘 증거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 같은 노력 끝에 나는 졸업시험과 한의사 국가고시를 모두 수석으로 합격했다. 남들은 주말마다 봉사활동에 교회활동으로 바쁘면서 수석졸업을 했으니 머리가 좋아 그런가보다 했지만 사실 머리는 그리 좋지 못했다. 새벽기도가 주는 힘과 바쁜 시간을 알차게 쓰려는 노력 덕분이었다.
자취를 하면서 그렇게 생활하는 것은 사실 힘들었다. 영양 부족으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고향 어른들은 내게 빨리 결혼하라고 성화였다. 졸업시험과 국가고시를 치르고 난 뒤 성문교회 임숙빈 집사님이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그 자리에는 베레모를 쓴 멋쟁이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서울 여자였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14) 연애편지 속 아내의 신앙·봉사에 끌려
베레모를 쓴 그 아가씨는 멋쟁이에 미인이었다. 하지만 경상도 촌놈에 못생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조금 나눠봤는데, 첫 만남이라서 그랬는지 까칠했다.
사실 그 전에 다른 곳에서도 선을 보라는 얘기가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한 여자 후배는 자신의 동생을 만나보라고 몇 번이나 권유했다. 그 집안은 지금도 유명한 재벌 집안으로, 규수는 승마에 골프에 못하는 것이 없는 데다 명문대에 재학 중인 최고의 규수라고 했다. 나와는 생활수준이나 문화나 가정환경이 다 안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정중하게 거절했다.
베레모 아가씨도 성격이나 취미는 나와 달랐다. 하지만 한신대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연세대 신학대학원에 다닐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던 점이 끌렸다. 사회복지 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몇 번 만나 얘기를 해보니 까칠해 보였던 면도 매력으로 느껴졌다. 자꾸 만나다보니 멋 내는 것을 좋아한다기보다는 개성이 있고 세련된 것으로 보였다.
그 무렵 인턴이 됐다. 외출할 시간도 없었다. 대신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 보내온 편지를 짬짬이 읽고 또 읽었다. 신앙도 같았고,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꿈도 나와 같았다. 이 여자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7년 12월 12일 결혼을 했다. 서울의 새침데기 아가씨가 경상도 산골 집안에 시집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어른들을 깍듯이 섬기고 보증금 200만원짜리 전셋집도 만족해 주었다.
아내는 요즘에도 사회복지 일에 힘쓰고 있다. 내가 영주에서 노인들을 진료할 때에도 함께 자리를 지켜주곤 한다. 영주에서 진료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서울로 올라올 때면, 차 안에서 아내의 다리를 베개 삼아 잘 때도 있다. 한번은 동승한 후배 한의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사람은 이제 이 일을 시작했으니 쉬지 못하고 끝까지 가야 할 것 같아요. 이것이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주신 소명이니까요. 옆에서 보기에는 안쓰럽고 안타깝지만 그냥 이렇게 지켜봐주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차는 밤늦어 어두워진 소백산 죽령고개를 굽이굽이 돌아가고 있었다. 흐트러진 내 머리를 한올 한올 다듬어 주는 아내의 손길이 따뜻했다.
내가 인턴으로 들어갈 당시 학과장들은 서로 제자를 삼으려고 했다. 특히 부인과에서 강력하게 나를 원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불임 치료에 특효 처방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심 개업하고 싶은 유혹도 느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명성이 있는 데다 한의사 국가고시에 수석합격을 했으니 당장 개업해도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 내가 생각했던 노인 복지의 꿈과는 거리가 있었다. 새벽마다 기도하며 어떤 길을 선택할지 고민했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15) 수련의 과정 거치며 소중한 경험 익혀
기도 끝에 나는 내과(간계내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여기에는 당시 간계내과 주임 교수이자 한의대학장이셨던 김정제 교수님의 영향이 컸다. 김 교수님은 새문안교회 장로였다.
내가 한의학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던 대학 3학년 때 김 교수님께 편지를 써서 "기독 학생으로서 한의학을 전공하는데, 동양철학적인 사고와 기독교적인 세계관 사이의 갈등, 현실적인 어려움을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해 의견을 교환한 적도 있었다.
김 교수님은 당시에도 연세가 많았지만 강의실에서 늘 열정을 쏟으셨다. 특히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엔, 교수님이 출근하시면 반드시 잠깐이라도 기도로 일과를 시작하는 모습을 늘 지켜보았다. 또 병실을 돌면서 환자를 살피다가도 기도가 필요한 이가 있으면 조용히 손을 잡고 기도해주시는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에는 눈 코 뜰 새 없었다. 인턴 때에는 거의 병원 안에서 생활했고, 레지던트 때에는 이틀에 한 번씩 숙직을 했다. 중환자가 많으면 아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이상하게 내가 응급실 당번일 때에는 사고 환자가 많았다. 때론 환자를 업고 뛰기도 했다. 당시에는 "왜 내가 근무할 때엔 이렇게 위독한 환자가 많을까"하고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 경험이 나중에 병원을 직접 운영할 때 큰 도움이 됐다. 아무리 위급하고 중대한 환자가 와도 의사는 흥분하거나 서둘러선 안 된다. 환자와 가족들을 진정시키고 필요한 조치를 신속하게 취해야 한다.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을 통해 그런 덕목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심폐소생술을 시행할 때는 땀을 뻘뻘 흘렸다. 병원에서 숨진 분을 업고 자택으로 모셔 가기도 했다. 화난 보호자한테 멱살을 잡힌 적도 여러 번이었다. 욕설과 거친 행동을 당할 때는 한의사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자존심이 무너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돌아서서 "주님, 이 험악한 분위기를 잘 이기도록 인내를 주십시오. 보호자들이 차분한 마음을 갖도록 해 주시고 이 가정을 위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경우는 환자의 사정이 딱해 눈물을 흘리며 내 박봉까지 쪼개서 도와주기도 했다.
1982년이었다. 한의학 박사 과정 입학시험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영주에서 전화가 왔다.
"덕호야,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빨리 내려오너라."
너무도 놀랐다. 놀란 가슴을 쓸면서 순간 기도가 튀어나왔다.
"주님, 할아버지에게 큰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할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다음날 있을 박사 시험을 포기하고 예약된 진료와 회진을 서둘러 마쳤다. 막 구입한 중고 포니승용차를 몰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고속도로와 죽령재를 넘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나는 "할아버지는 꼭 사셔야 한다. 나와 함께 선교와 노인 복지의 사명을 이루셔야 한다"고 되뇌었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16) 청지기적 삶 실천한 할아버지의 기억
나는 어린 시절 내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면서 할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했다. 가정의 불화도 문제였지만, 새벽마다 나를 깨워 글을 가르치고 혼내시며 용돈은 주지 않으면서, 남들을 돕는 일이나 교회 일에는 큰돈을 선뜻 내놓는 모습도 불만이었다.
고등학생 때 거듭남을 체험한 뒤에야 할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모든 복의 근원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재물과 재능은 단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관리하는 것으로 여기는 청지기적인 삶을 실천하신 것이었다. 또 나누면 나눌수록 마르지 않는 샘처럼 넉넉한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기억하게 됐다.
할아버지는 9살 때 외국인 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셨다. 이미 가세가 기울어 있었고 나라도 망해갈 때였다. 설상가상 형까지 잃고 어린 나이에 집안을 짊어져야 했다.
할아버지는 독학으로 한학과 한의학을 익히셨다. 조선시대에는 한학을 공부한 유생이 일정기간 한의원에서 훈련과 교육을 받은 뒤 시험에 합격하면 의원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강대국이 들어오고 조정이 힘을 잃으면서 보건제도도 혼란해졌다. 일제는 한민족의 얼과 혼을 말살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서양의학과 일부 일본 민속의학을 지원하면서 한의사가 되는 길은 아예 막아버렸다.
해방 이후 한의사 국가 검정고시라는 제도가 생기자 할아버지는 친구분과 함께 응시해 당당히 합격했다. 내가 경희대 한의대에 들어가 교수직을 거칠 때, 고향에 내려가게 되면 경험이 풍부한 노 한의사인 할아버지와 이론에 밝은 젊은 한학도인 나는 밤을 새워가며 토론을 벌이곤 했다.
할아버지는 특히 불임 치료의 대가였다. 내 친구 중에도 부모가 할아버지의 약을 먹고 자기를 낳았다는 이들이 여럿 있다.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은 아주머니들이 달걀꾸러미나 참깨를 내놓으면서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할아버지는 동의보감에서 나오는 방법과 나름대로 개발하신 처방으로 아이가 없는 집안에 도움을 주셨다. 전국에서 영주 성곡리 산골로 찾아와 할아버지에게 불임치료를 부탁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번 돈으로 서당도 운영하고 일제에 저항하다 상처 받은 사람들도 돌봐주었다. 모교회가 아니라도 인근 교회가 어렵다는 소식이 들리면 재물을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개원을 한 뒤에도 할아버지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부인과 환자들이 많았다. 전공이 다르다고 해도 할아버지의 처방을 내려 달라고 간청하는 분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생명이 나고 지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니 마음 편하게 가지시라"고 당부하면서 처방을 하면 의외로 효과가 컸다. 양방의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하면 여자에게나 남자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좀처럼 아이가 안 생긴다는 가정이 많은데, 특히 이런 경우 한방 치료의 효과가 좋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할아버지가 쓰러져 계신 영주의 병원에 도착하니 한밤중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17) "영문 한의학 책 만들자… 세계선교 위해"
서둘러 병실에 들어서니 할아버지는 정신을 회복해 계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한 뒤, 오늘 박사과정 입학 시험을 포기하고 밤새 내려왔노라고 말씀드렸다. 자주 안부를 여쭙고 내려오지 못한 것도 사과드렸다.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내 손을 꽉 쥐었다.
"덕호야, 아직 어지러우니 침 놔주고, 할배 걱정 말고 빨리 서울로 가서 시험 치거라."
못다한 이야기를 조용히 나누다 할아버지의 성화에 등을 떠밀려 다시 서울로 출발하려고 했다. 그때 옆 병상에 앉아 있던 분이 나를 알아보고는 치료를 부탁했다. 마침 경희의료원에서 내가 진료를 해드렸던 어르신이었다. 중풍이 재발돼 우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누워계셨다. 보호자인 아들이 눈치만 보다가 나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치료해줄 수 없느냐고 했다.
"여기는 제 병원이 아니어서 주치의의 요청 없이 제가 치료를 하지는 못하게 돼 있습니다. 또 지금 급히 서울로 가야 할 사정입니다."
보호자는 포기하지 않고 병실 문을 잠그면서 간곡히 부탁했다. 그분을 보니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 병원은 내 선배가 운영하는 곳이었고, 그때는 담당 의사가 출근하기 전이었다. 나중에 사정을 설명하기로 하고 침을 놓아 드렸다.
급히 차에 올라타니 아침 7시쯤 되었다. 죽령터널이 뚫리기 전이어서 죽령을 넘어 국도로 가야 했다.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경희대 의학관에 도착하니 10시10분이었다. 시험관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허락을 해주었다. 마음의 준비도 없고 밤새 차를 몰아 지친 몸으로 시험을 치렀다. 답을 제대로 썼는지도 몽롱할 지경이었다.
"하나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중요한 편을 선택했습니다. 나머지 저편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기도하며 답안지를 냈다. 사실 당시 나는 30살의 최연소로 입학원서를 냈기에, 이번에 떨어져도 여유가 있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이기로 하니 마음이 평안했다.
열흘 뒤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합격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말씀에 늘 순종치 못한 저에게 할아버지를 만나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주시고, 합격이라는 선물까지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나는 기도를 하며, 다시 한번 대학에서 내 사명을 다짐했다. 그것은 한의학을 통해 세계 선교를 하는 것이었다.
80년 임상교수로 발령을 받은 뒤 새벽기도 시간에 사도 바울의 선교를 묵상한 적이 있었다. 2000여년 전 바울은 교통 출판 경제 의료 등 모든 환경이 열악한 중에도 목숨을 걸고 선교를 했던 것을 깊이 묵상했다. 문득 지금은 몸으로 직접 가지 않더라도 복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경희대 외국인 강좌에서 강성길 교수님에 이어 한의학 강의를 맡게 되었다. 게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박사과정에도 합격하지 않았는가. 나는 결심했다.
"영문판 한의학 책자를 만들자. 세계 선교를 위해, 한국 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해!"
***[역경의 열매] 김덕호 (18) 영문 한의학 교과서 집필 몰두
당시에는 88올림픽을 우리가 유치하면서 세계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때였다. 세계 의학계에서도 우리의 전통 한의학을 알고 싶어했다. 영문으로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자료가 절실했지만, 협회나 경희의료원에도 간단한 영문 팸플릿이 있었을 뿐이었다.
중국은 이미 1970년대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침술을 전 세계에 알렸다. 유럽에서는 중국 의학 붐이 일어나 대부분의 침술 관련 용어가 중국어를 표준으로 하고 있었다. 나는 동료 교수들에게 제안했다.
"영문으로 한의학 교과서를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동양의 공통적인 내용 외에도 한국에서 발전시킨 특유의 침구술과 경희대가 쌓아온 임상적 실험적 데이터를 활용하면 틀림없이 가치가 있을 겁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 때 한국을 찾아올 세계인들에게 우리의 전통 한의학을 소개할 수 있는 천금의 기회입니다."
다들 뜻에는 동의를 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영문 교과서를 만들면 한국의 한의학을 배우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여들 것이니 세계 선교와도 이어질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향해 꿈을 펼치라는 음성을 주시는 듯했다. 아직 풋내기 교수에 불과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5∼6년 계획하고 자료를 모아갔다. 영작문도 다시 배웠다. 휴가도 반납하고 연구실에서 먹고 자기를 거듭했다. 동창회나 각종 모임은 아예 포기했다. "잘 나가니까 안 만나준다"는 오해도 받았지만 책을 선보이면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84년에는 버스 충돌사고, 85년에는 승용차 충돌사고, 86년에는 하지인대 파열로 입원하는 고통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집필에 매달렸다.
85년 최연소로 한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는 박차를 가했다. 86년 아시안게임 이전에 책을 내려고 했다. 경혈의 국제 표준화 작업이 늦어지고 교정도 만만치 않아 결국 해를 넘겼다.
87년 1월 1일이었다. 대학 본관에서 신년 하례회를 가졌다. 새해에는 서로 목표를 이루고 건강하라는 덕담을 나눴다. 내게 던져지는 덕담이 영문 교과서를 빨리 세상에 내놓으라는 말로 들렸다. 모임을 마치고 낮 12시쯤 김정제 학장 댁에 가기 위해 차를 몰았다. 회기동 캠퍼스를 출발해 종암동을 지나 북악터널로 들어섰다. 왕복 2차선 터널 안은 매연이 가득하고 어두웠다.
터널 중간쯤 갔을까. 갑자기 속이 메스꺼웠다. 머리가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앞차가 어디쯤 있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끼익!'
나는 급브레이크를 밟고 터널 가운데 멈췄다. 한동안 핸들을 꼭 쥐고 멍하니 있었다.
'빵빵∼' '빵빵∼'
뒤따라 오던 차들이 경적을 울려댔다. 마주 오던 차들은 헤드라이트를 깜박이며 빠른 속도로 스쳐갔다. 나는 눈을 비비고 머리를 흔들었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19) 첫 영문 한의학교과서 국내외 큰 반향
정신이 아득했다. 손가락으로 옆머리의 태양혈과 목덜미 풍지혈을 급히 눌렀다. 겨우 시야가 트였다.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 겨우 터널을 빠져나왔다. 터널 밖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는 후면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백지장처럼 하얀색이었다.
600여쪽 영문 한의학 교과서의 깨알 같은 글씨를 여러 번 교정하면서 가끔 머리가 핑 돌고 힘이 빠지기도 했다. 그 때문에 몸이 상한 것이다.
터널을 빠져나와 생각하니 자칫하면 큰일이 날 뻔했다. 터널에서 앞뒤로 오가는 차들이 나를 제때 보지 못했다면 어쩔 뻔했는가. 마치 사선에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터널에만 들어가면 착시가 생기고 어지럽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나중에는 터널 근처만 가도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해졌다. 터널증후군이었다. 나는 매주 서울에서 영주까지 오가야 하는데, 그 길에는 터널이 15개가 있다. 한밤 중에 응급 상황이라도 발생하면 직접 운전해야 하니 문제가 더 컸다.
주님께 매달렸다. 교과서를 88올림픽에 활용하려면 몸이 지쳐도 쉴 수가 없었다. 건강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며 마지막 원고를 정리했다. 그림까지 모두 새로 그렸고, 영문에 없는 용어는 새로 만들어가며 썼다. 마침내 탈고한 날, 나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이틀을 누워 있어야 했다. 받아든 책의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Acupuncture and Moxibustion'.
'침구학과 뜸 요법'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한국 특유의 사암침법과 사상침법 등 전통 침구술을 수록하고 임상 경험과 실험 데이터를 포함시켰다. 영자 신문과 일간지, 전문지들이 일제히 보도했고 문화방송 등 공중파 방송의 뉴스에도 소개됐다. 세계 각국에서 전화가 왔다. 대사관과 도서관에서 책을 보내 달라고 요청이 쏟아졌다. 내게 자기 나라로 와서 강의를 해달라는 곳도 줄을 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책을 통해 한국 한의학이 알려지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소서."
교수 시절에 여러 편의 논문을 냈지만 또 한 권 더 소개하고 싶은 책은 1989년에 펴낸 '동의 간계내과학'이라는 교과서다. 내가 속해 있는 과에서 김정제 학장님과 김병운 우홍정 교수님, 그리고 내가 참여해 저술했다. 영문 교과서 집필과 겹쳐서 힘이 들었지만,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전국의 간계 한의학 교수들을 대신해 책을 펴내는 일이니 소홀할 수 없었다.
그 무렵이었다. 영주에 계신 아버지가 전화를 했다. 심각한 목소리였다.
"영호 부부가 심각한 상황에 있다. 네가 내 대신 잘 처리해 다오."
영호는 영주 어머니의 큰아들로 내게는 동생뻘이었다. 영주 어머니 쪽의 일로 아버지가 직접 전화를 하신 것은 처음이었다. 나를 집안의 어른으로 인정하고, 영주 어머니와 한 가족으로 지내라는 뜻이었다. 당시 영호는 연세대 상대를 나와 회사 생활을 하다 장신대로 진학해 목사 안수를 앞두고 있었다. 장안동 영호네 집으로 달려갔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20) 동생 부부갈등 화해자역 뿌듯
영호의 집에는 영호 외삼촌이 와 있었다. 영호 내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외삼촌이 먼저 내게 부탁을 했다.
"자네가 진행을 해주게. 정말 부탁하네. 나는 말주변이 없네. 솔로몬의 지혜로 해 주게."
나는 한참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외삼촌과 이렇게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장래를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요. 제수씨에게 먼저 말할 기회를 드릴 테니 가감 없이 말해 주세요."
"외숙부님, 아주버님, 모두 제 잘못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자초지종을 다 들었다. 둘 사이의 성격 차이에서 온 갈등이었다. 영호의 얘기도 들어보았다.
"형님, 외삼촌, 부끄럽습니다. 제가 기도가 부족한가 봅니다. 내자가 이야기한 그대로 입니다만 제 불찰도 컸습니다."
외삼촌과 다른 방으로 옮겨 가 의견을 여쭈었다. 역시 화해를 시키자는 생각이었다. 나도 동감이었다. 다시 영호네에게 갔다. 두 사람을 뚫어지듯 바라보았다. 마지막 말을 했다.
"양쪽 다 결혼 준비 기도를 충분히 하면서 서로를 받아들였을 줄로 안다. 서로 다른 배경, 다른 성격,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목회의 길을 가기 위해 만나지 않았나. 합심해도 어려운 길인데, 벌써 이렇게 삐걱거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해답은 외삼촌과 나보다 두 사람이 더 잘 알 것일세."
제수씨가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더 드릴 얘기가 없습니다. 제가 자제하고 더 잘 섬기겠습니다."
영호도 다짐을 했다.
"앞으로도 목회의 길을 계속 가야 할 터입니다. 마음을 모아서 가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외삼촌이 조용히 타일렀다.
"이혼은 영적 힘을 약하게 한다. 두 사람이 더 기도하고 더 노력하여 선한 목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네."
외삼촌이 짧게 기도한 뒤 영호네 집을 나왔다.
다시 진료실로 돌아오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했다. 영주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뼈저리게 아픔을 겪었던 내가, 그 아들인 영호 부부의 화해자로 사용된 것 아닌가. 이제 진정으로 영호도 내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영호도 나를 형으로 인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이 사실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감사했다.
영호는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를 잘하고 있다. 목사도 부부싸움을 하냐고 흉을 볼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크고 작은 갈등이 없는 관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갈등이 있는데도 없는 척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갈등을 건강하게 극복하고 진정으로 화해한다면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법이다.
사실은 그 직후 우리 부부도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아내가 밤늦게까지 책을 뒤적이고 서류를 만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뜻밖에 답이 돌아왔다.
"목회를 하고 싶어서 목사고시를 공부해 왔어요. 하나님이 자꾸 그런 마음을 주세요."
"당신이 목사가 되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애들 다 클 때까지 당신은 상담 일만 하기로 했잖아."
***[역경의 열매] 김덕호 (21) 아내의 뜻 받아들여 교회 개척 결심
나는 아내에게 화를 냈다.
"꼭 목사가 돼 교회를 개척하겠다면 당신 마음대로 해. 대신 난 아무런 관심을 안 가질 테니."
아무리 얘기해도 아내는 교회를 개척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내 상황은 다급했다. 간계 내과학 교과서와 영문 서적을 출간한 뒤 일이 더 많아지고 바빠졌다. 한의대의 발전을 위해 연구지원을 확충하는 문제를 두고 학교와 논의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교회에서는 성가대원 대학부장 봉사단의 일로 쉽게 떠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제안했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자."
그러는 중에 아내는 당시 철거민 지역인 서울 둔촌동에 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몬테소리 유치원을 열었다. 거기서 부모들과 함께 소그룹으로 예배를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갈등이 깊어지면서 급기야 이혼 얘기까지 나왔다.
만약 가정예배가 없었다면 위기가 더 커졌을지도 모른다. 6개월쯤 되었을 때, 말씀을 읽는 중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하나 더 세워 선교와 지역 봉사를 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교회를 개척하라는 응답을 확실하게 받았어?"
"그래요. 확실해요."
아내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참사랑교회(예사랑교회로 개명)의 시작이었다.
교회 개척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 중에 전인순 권사님이 계셨다. 내가 대학시절부터 다니던 성문교회 성도로 인정 많고 신앙심이 깊은 분이었다. 89년 늦가을쯤 퇴근 시간이 넘어 전 권사님이 응급실에 실려왔다. 검사를 해보니 암 수치가 높았다. 배를 열기로 했으나 이미 늦었다고 결론이 났다.
남편 박순호씨는 당시 백령도 우체국장으로 있었다. 높은 풍랑으로 헬기도 뜰 수 없어 1주일이나 지나서야 도착했다.
"박사님, 저 사람 너무 착한 사람입니다. 차라리 나 같은 놈에게 몹쓸병이 생길 것이지…."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의학적으로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양방 항암요법과 녹용 삼칠근 등 한약 처방과 특수침술, 뜸술 등을 동원해 면역력을 증강하는 한방치료를 함께 시행해보기로 했다. 나는 권사님의 남편에게 말했다.
"박 국장님, 권사님의 마지막 바람은 국장님이 교회에 나가 예수 믿고 세례 받는 것인 줄 아십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 열심히 나가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라고 다그쳤다. 3개월쯤 됐을 때 갑자기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지고 폐렴까지 겹쳤다. 나도 기도하며 박 국장에게 알렸다.
"이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22) 국제학술대회서 한약재 항암효과 입증
위기를 맞을 때마다 기도하며 전인순 권사님께 항암 치료와 뜸 치료를 병행했다. 통증이 심할 때에는 침을 놓아드렸다. 1년이 지나자 암세포가 많이 없어지고 헤모글로빈 수치가 크게 회복됐다. 양·한방의 장점을 살린 협력 진료가 일구어낸 쾌거였다.
전 권사님은 웬 만큼 회복된 뒤부터 참사랑교회를 돕겠다고 나섰다. 완곡하게 말렸지만 "이제 다시 태어난 내가 교회 개척하는 두 분께 미력한 힘이라도 보태겠다"며 막무가내였다. 암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된 전 권사님의 간증은 우리 교회에 기도의 불쏘시개가 됐다. 철야 기도가 시작됐고 개척 3년 만에 출석 장년 성도 100명을 넘었다.
전 권사님은 3년이 지나 완전 회복을 확진 받았다. 치료가 아니라 치유였다. 의학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신앙과 심리, 환경 등을 총동원해 종합적인 회복이 진행됐다는 뜻이다. 권사님은 지금 퇴직한 남편과 함께 강원도 횡성 감천면에서 '에덴 관광 농원'을 운영하고 있다.
전 권사님에 대한 치유 사례는 학술적으로도 큰 관심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암 정복은 의학계의 최대 과제였다. 양방에서 사용하는 항암 요법은 정상 세포를 망가뜨리는 부작용이 너무 컸다. 전 권사님은 1년 6개월은 양·한방 협진을 했지만 후반에는 한약재와 침술로 관리해 완전 회복 판정을 받은 사례였다.
마침 영문 한의학 서적을 출간하고 88올림픽을 치르면서 해외 교류 기회가 크게 늘었다. 나는 전 권사님을 비롯한 몇몇 사례를 정리해 한약재의 항암 효과를 세계에 발표하기 위해 준비했다. 진료와 강의, 개척 교회를 섬기는 일을 병행하느라 밤을 새우고 끼니를 거르며 논문을 준비했다.
1991년 8월 선배인 강윤호 교수, 후배 김재규 교수 등 7명이 함께 중국 베이징에 갔다. 중국은 당시 미수교국이자 적성국가여서 홍콩과 광저우를 거쳐 들어갔다. 광저우에서 베이징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언젠가는 중국이 개방돼 의료선교단을 이끌고 들어가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베이징에서 열린 학술대회에는 북한 학자와 조선족 학자도 함께 있었다. 나는 영어로 발표하고 질문에 답했다. 영어로 표현하기 쉽지 않을 때에는 한자를 써가며 설명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북한 학자가 잇따라 질문을 던졌다. "남조선 한의사들은 향약집성방을 숙지하고 있습네까?" "같은 조선 땅에서 자란 약재라도 남북간 기후 차이 때문에 항암 성분 함량에도 차이가 있지 않겠습네까."
"인진호(사철쑥을 말린 약재)는 B형 활동성 간염과 간경변을 경과한 원발성 간암 환자에게 효과적입네까, 아니면 속발성 간암에 더 효과적입네까."
남북 대결의식 때문에 나를 골탕을 먹이려는 질문이었다. 임상 경험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너끈히 답변했다. 발표가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성공적이었다. 한국의 뛰어난 한의학을 세계에 알리고 선교의 도구로 삼겠다는 내 꿈이 이뤄지는 것만 같았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23) 전 재산 털어 서울 변두리에 병원 개원
베이징에서 돌아오자 해외에서 강연과 교류 요청이 더욱 늘어났다. 교환교수로 와 달라고 요청하는 곳도 있었다.
나는 꿈에 부풀었다. 새로운 논문을 써서 외국에 들고 나가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당시에는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이 적었고, 국가적 연구 지원 제도도 부족했다. 총장님을 찾아가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희대 총장실을 찾아갔다.
"총장님. 지금 전 세계가 한국의 한의학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잠을 자고 있습니다. 경희대 한의대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지만 사실 우리가 가진 것은 펜대뿐입니다. 무균 실험실도 없어 서울대나 과학기술원의 실험실을 빌려 쓰는 형편입니다. 그것도 모두 제 돈을 들여 실험을 했습니다. 무균 실험실은 국제적인 논문을 쓰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시설입니다. 도와주십시오."
나는 큰 액수의 연구비를 요청했다. 학교에서는 차일피일 미루었다. 꿈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자존심도 상했다. 당시 강남의 30평 아파트 값이 3000만원 정도 하던 때였다. 내가 요청한 2억원은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40억원이 넘는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교수가 당돌하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학교에 계속 있어 봐야 무슨 비전이 있겠는가.'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나가 개원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후일을 도모하며 기다릴 것인가. 주변에서는 개원을 말렸다. 1년여를 기도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30대의 10년을 학교에서 후회 없이 보냈다. 이제 40대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 개원하면 돈을 벌어 학술 활동과 선교 활동도 더 열심히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해 온 거여동과 마천동(거마) 지역에서 개업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당시 이곳은 달동네였다. 아내도 여기에 교회를 개척했으니 부부가 힘을 모아 하나님의 일에 힘쓰는 것이 더 보람 있겠다고 판단했다.
오래 전에 사 둔 농지가 개발구역에 편입되면서 대신 받은 땅이 이곳에 있었다. 큰 도로변에서 들어간 주택가였다. 여기에 건물을 짓고 교회와 한의원을 함께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잘나가는 교수로 있다가 나왔으니 의료장비도 최대한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퇴직금을 비롯해 내 전 재산을 그곳에 쏟아부었다. 빚도 끌어들여 92년 오금동에 5층 건물을 완공하고 영생한의원을 개원했다.
자신이 있었다. 문만 열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학교의 요청으로 1주일에 이틀씩 강의를 나가다 보니 진료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 오후 4∼5시간을 무료 진료에 할애하니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병원을 찾아온 사람들도 한마디씩 했다.
"도로변에서 보이지도 않는 이런 구석진 곳에 한의원을 차려 놓았으니 누가 오겠어?"
***[역경의 열매] 김덕호 (24) '1인4역' 몸은 힘들지만 마음 너무 즐거워
환경이 나쁘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매주 목요일 신우회로 모여 하나님께 매달렸다. 같은 건물 아래층의 참사랑교회에서도 열심히 기도했다. 원장실에서 혼자 앉아 있으면 기도의 열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6개월쯤 지나자 변화가 있었다. 환자들이 점점 늘더니 나중에는 감당 못할 정도로 몰려왔다. 환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 마음가짐이란 걸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 그 같은 일을 겪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료, 강의, 봉사 그리고 개척교회를 섬기는 일이 즐거웠다. 몸은 힘들지만 내가 필요해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하루하루가 기뻤다. 이때 봉사단체 '선한이웃회'를 조직해 체계적으로 봉사했다.
개원하고 2년이 지났을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내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덕호야. 할배는 니가 목사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 교수를 지내고 네 병원을 시작했으니 달란트를 잘 활용해라. 할배가 못 다한 일을 맡긴다. 노인복지를 잘 하거라. 나는 작게 했지만 너는 정식으로 크게 능력껏 해봐라. 할배가 그렇게 기도해 왔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에 처음 복음의 문을 연 분이었다. 내게는 한의학과 봉사의 사명을 전해주신 정신적 스승이었다.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는 길은 무엇일까. 새벽마다 기도하며 답을 구했다. 그 무렵 경희의료원 후배로 가깝게 지내던 손영하 교수가 한의원을 방문했다.
"형님, 한의원은 어떻습니까."
"꽤 잘되네. 하루에 외래 환자가 100명이 넘고, 입원 환자도 좀 되지."
"어이쿠, 엄청난 실적이네요. 한의원 건물은 형님 명의입니까."
"그렇네. 사실 집안이나 주변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 지었지."
"좋은 일이지만 걱정도 됩니다. 형님은 가문이 넓어 형제들도 많지 않습니까. 누가 와서 도움을 달라면 외면할 수 없겠지요?"
"사실은 사업하는 이복동생을 위해 이미 이 건물을 담보로 큰 액수를 빌려주었네. 다른 동생들도 부탁해 온 것이 있고."
"형님 성격이 베풀기 좋아하시니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자칫 재산도 날아가고 형제간에 우애도 상하는 걸 많이 봤습니다. 차라리 의료법인으로 전환하시지요."
의료법인은 공익법인으로 모든 재산을 출연해야 한다. 세금은 별 혜택이 없고 주무관서에 의해 감시 감독을 받아야 한다. 나 혼자만 생각한다면 의료법인으로 전환할 이유가 없었다. 기도를 했다. 확신이 생겼다.
'어차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내 이름으로 가지고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욕심만 커지고 유혹을 받을 것이다. 주님이 주인이신 공익병원을 만들어 국민들을 진료로 섬기는 것이 유언을 지키는 길이고, 하나님도 기뻐하는 일이다.'
아내와 아버지의 동의가 필요했다. 재산의 절반은 아내 몫이니 아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아버지가 반대한다면 오히려 집안에 평지풍파를 불러올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25) 아버지 '믿음으로 살라' 유언 남기고 소천
아버지는 이미 몸이 많이 쇠약해져 서울 오금동 한의원에 입원해 있었다. 아내와 아버지 앞에서 입을 뗐다.
"의료법인을 만들까 합니다. 그러려면 한의원 건물을 내놓고, 제가 모은 재산도 내놔야 합니다. 대신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노인복지에 힘쓰는 병원을 만들겠습니다."
아버지는 흔쾌히 동의했다.
"우리 가문이 믿음의 유산을 받아 이만큼 온 것이 감사하다. 네 할배와 내가 못다한 일, 이렇게 공익법인을 만들어 너희 내외 둘이 협력해서 잘 이루어 나가거라."
아내도 내게 말했다.
"저는 병원으로 번 돈에 욕심이 없어요. 당신은 기도하는 사람이니 기도 중에 응답 받은 대로 하세요."
마음이 홀가분했다. 동생들에게도 이런 사실을 알려주었다. 1995년 7월 15일 서울시 의학과에서 의료법인 허가를 받았다. 모든 부채를 다 변제하는 조건이었다. 건물을 내놓고도 내 재산을 더 털어 넣어야 했다. 그래도 감사했다. 아울러 한의원도 한방병원으로 확장 승격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했다.
아버지는 이듬해인 96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마지막까지 돌보며 직접 목욕을 시키셨다. 그때 어깨 인대가 파열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3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몸이 쇠약해져 마지막 수술에서는 마취에서 깨는 것도 힘들었다. 일어서면 넘어지고 오래 앉지도 못하셨다.
어느 토요일 오후,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와 내 아내의 손을 한참 동안 꼭 잡으셨다.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모기 소리만한 음성으로 간신히 말씀하셨다.
"여보, 당신에게 제일 미안하오. 부디 건강하고 야들 기도 뒷바라지 잘 해주게."
아버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아버지는 간신히 침을 짜내 입안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김 장로, 내 아들아, 너를 축복한다. 믿음으로 살거라. 할배가 유언하신 노인 복지도 잘 이루거라. 여러분들이 우리를 눈물겹도록 사랑해주었다. 네가 이만큼 와 있는 것도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우리 한의원을 찾아준 사람들의 은혜다."
아버지는 또 아내를 바라보시며 말했다.
"윤 목사, 며늘아가야. 참사랑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모습을 보고 떠났으면 좋겠는데, 남은 것을 교회에 바치고 싶다. 부디 동생들과도 우애 있게 지내거라. 너를 믿는다."
그것이 유언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만이었다. 68세를 향유하셨다. 5일장을 치른 뒤, 아버지를 간병하셨던 분이 이런 말을 했다.
"김 장로님은 병석에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저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셨습니다. 마지막 운명하실 때 무지개 길을 따라 하늘로 가는 듯한 모습을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가족 여러분의 헌신적인 사랑을 보면서 저도 예수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성곡리 고택에서 지내고 싶어했다.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하시다 결국 치매가 왔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26) 기도 끝 영주에 종합한방병원 기공식
홀로 계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매주 영주를 내려갔다.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 들판을 보며 고민했다.
'이대로 어머니까지 돌아가신다면 영주와 인연이 영영 끊기지 않을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는 길은 무엇일까.'
기도 끝에 영주에 의료복지타운을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금을 총동원하고 융자를 좀 받으면 땅을 사고 우선 종합한방병원을 건축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주말마다 영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부지를 물색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예정지 가까운 곳에 10만5000㎡(약 3만평)의 임야가 나왔다. 의료 복지 시설을 만들기에 적합했다. 나는 땅 주인을 찾아가기에 앞서 영주중앙교회 이수열 목사님을 먼저 찾아갔다.
"목사님, 영주에 복음의 전진기지가 될 의료 복지 타운을 설립하려고 합니다. 때마침 좋은 땅이 나왔어요. 교회가 함께 기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희는 기도로 돕겠습니다."
중앙교회 성도들은 매일 그 땅에 찾아가, 히브리 백성이 여리고성을 돌 듯이 그 일대를 한 바퀴 돌며 기도를 했다. 나도 영주를 오갈 때마다 그곳을 찾아 혼자 빙빙 돌면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 땅을 주십시오. 여기에서 복음의 씨앗이 자라 영주 복음화를 돕게 해주십시오."
마치 그 땅이 이미 우리 땅이 된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서울에서도 신우회와 예사랑교회(참사랑교회에서 이름을 바꿈) 기도팀장 이창희 권사님이 기도로 도왔다.
땅 주인은 이미 다른 축산업자와 매각 협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협상을 벌이고 있는 곳 옆에 여관방을 잡고는 치밀하게 작전을 짰다. 축산업자와 협상이 불발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음날 아침 은행이 문을 열기도 전에 땅 주인을 찾아갔다. 담판을 했다.
"이 땅에 사람을 살리는 병원과 복지 시설을 세우려 합니다. 저희가 많은 돈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영주에 더 많은 혜택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저희에게 땅을 파십시오."
결국 그날 계약에 성공했다. 계약한 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땅 주인의 부인은 교회 권사로 우리 한방병원의 고객이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웠다. 하나님은 이미 여리고 작전의 성공을 예비해 두셨던 것이다.
가슴이 벅찼다. 우리 가문이 영주에서 60여년 운영해온 한의원을 사랑해 준 시민들에게 보답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기도 중에 생겼다. 1997년 1월, 매입한 땅 중 가장 좋은 곳 2만2606㎡(약 7000평)를 영주시에 헌납했다. 그해 6월 종합한방병원 기공식도 거창하게 했다. 고위 공직자들이 참석한 것은 물론이고, 지역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나도 뿌듯했다.
며칠 뒤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당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직속 비서로 국제 사정에 밝은 친구였다.
"김 박사, 지금 한국이 위험하다. 국가 부도 직전이다."
"무슨 소리냐. 우리 고향 출신의 강경식 장관도 아무 문제 없다고 호언장담하는데…."
"내 말 믿어라. 지금 함부로 투자했다가는 큰일 날끼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27) 잇단 병원인수… 기도로 결정하면 성공
기공식까지 거창하게 했는데, 이제 와서 포기하면 우리 병원의 명예가 하루아침에 떨어질 게 뻔했다. 병원을 짓자니 앞날이 불투명했다.
금요 철야기도 중에 지혜가 생겼다. 병원 신축은 보류하고, 대신 영주 시내에 건물을 임차해 먼저 병원을 열었다.
얼마 뒤 과연 초유의 국가부도 사태인 IMF가 터졌다. 만약 무리했더라면 우리도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안도할 겨를도 없었다. 서울 오금동의 병원도 타격을 입었다. 의사와 직원을 줄이면 해결될 수 있었지만 다른 방법을 찾았다. 야간진료와 공휴일진료를 신설했다. 이때는 영주의 병원이 오히려 큰힘이 되었다. 할아버지 단골부터 손님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전국에 문 닫는 병원이 속출했다. 우리보다 먼저 송파구에 개원한 문정동 보생한방병원도 경영난에 봉착했다. 병원 하나가 문을 닫으면 주민도 손해고 직원과 환자도 피해다. 기도 끝에 병원을 인수했다.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 대신 공격적인 병원 경영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했다. 6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나는 병원행사 때 선물로 받은 화초를 직원들에게 나눠준다. 몇 달 뒤 화초를 잘 가꾸는지 확인하고, 혹시 말라버리기라도 하면 "풀 한 포기의 생명도 보듬을 수 없다면 고귀한 사람 생명을 치료할 자격이 없다"며 호통을 친다. 그런 경영철학이 조금은 도움이 됐다. 그 뒤 서울 강동구와 대전 등에서도 한방병원을 잇따라 인수했다. 산후조리원, 중국 제약공장에도 투자를 했다. 성공한 것도 있고, 실패한 것도 있었다. 신우회 직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도하고 결정한 것은 성공했고, 인간의 머리로 계산해 벌인 일은 다 실패했습니다."
그 말이 맞았다. 너무 교만했던 것은 아닌지, 혹 욕심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본다. 지금은 5개의 병원을 중풍 등 성인병과 척추관절 재활, 비만 미용, 청소년 수험생, 부인질환 등으로 특화해 운영하고 있다. 진료 봉사 활동도 이어오고 있다. 내가 장학금으로 공부했으니 되돌려주는 차원에서 장학금도 내놓고 있다.
처음 의료법인을 시작했을 때는 50배, 100배 열매를 맺는 밀알 한 알이 되라는 뜻으로 '일맥 의료재단'이란 이름을 썼다. 2005년 각 병원의 경영을 통합하면서 '인애가(人愛家)'라는 브랜드로 통일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집'이란 뜻으로,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믿음과 섬김의 뜻을 담은 이름이다.
그러는 중에도 매주 목·금·토요일은 영주로 내려가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어머니는 내게 평생 영주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속앓이를 했던 일, 한의원을 돕고 농사를 지으며 6남매를 키운 일, 그러면서도 참고 참으며 조용히 기도했던 일을 추억처럼 들려주셨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우리 집안이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머니가 주무실 때 몰래 얼굴과 손을 만져 보았다. 이미 앙상해진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내 눈물을 보면 마음 아파하실까봐 울음을 꾹꾹 속으로 삼켜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 뒤 어머니도 그 곁으로 가셨다.
***[역경의 열매] 김덕호 (28·끝) 신앙 안에서 용서·화해의 정신 깨달아
의료복지타운을 위해 사 둔 땅에는 1998년 사회복지법인 장수마을을 어렵게 인가받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최고의 시설을 갖춘 3개의 노인전문복지 시설을 2000년부터 순차로 지어 운영하고 있다.
2005년 영주시에서 노인전문요양병원을 세운다고 공고했다. 수탁운영권을 따내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우리도 경쟁에 뛰어들었다. 우리 가문에 베풀어준 시민들의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공익성 있는 기관을 운영해보고 싶었다. 건평 확장을 위한 거액을 부담하기로 하고 열심히 준비한 끝에 수탁자로 선정됐다.
기쁨도 잠시였다. 해가 바뀌자 의료환경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전국의 지자체마다 노인요양병원을 설립하다 보니 모두 적자투성이였다. 운영권을 반납하고 부도를 내버린 곳도 나왔다.
우리라고 뾰족한 해법이 없었다. 개원을 준비하면서 계산을 해 보니 첫해에만 최소 8억원의 적자가 예상됐다. 시민과의 약속이었기에 우리가 손해 보더라도 되물릴 수는 없었다. 투자를 늘려서라도 1등급의 요양병원으로 운영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올 3월 영주시립노인전문요양병원을 개원했다. 첫달 1억5000만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동안 우리 병원을 찾아준 전국적인 고객망을 동원했다. 사람경영, 사회적 책임경영, 투명경영 등 경영혁신 정신을 직원들에게 불어넣었다. 입원환자와 외래환자가 늘면서 점차 경영이 개선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조부와 선친이 남겨준 신앙의 유업을 지켜냈다는 생각이 든다.
'역경의 열매'를 연재하는 중에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병원의 한 환자분이 가정적으로 불행한 일을 겪고 입원해 계셨다. 그분이 주변의 권유로 국민일보에 실린 내 이야기를 읽으셨다. 그분은 우리 집안의 복잡한 이야기에 오히려 위로와 용서의 메시지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예배에도 나오셨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내가 국민일보 독자들에게 부끄러운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자고 마음을 먹었던 것도 바로 이런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 바로 신앙 안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자식들에게도 물질적인 재산보다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올 7월에는 개인적으로 감회 깊은 일이 있었다. 영주 어머니의 팔순 잔치를 내 힘껏 해드렸다. 친지들 앞에서 영주 어머니를 포옹해드렸다. 선친들께 다 못한 효도를 영주 어머니께 해드리고 싶다.
요즘은 외국인 환자까지 유치하고 싶은 꿈을 꾼다. 한국의 뛰어난 한의학과 영주 일대의 전통 문화, 또 잘 보존된 자연 환경에 신앙의 향기를 더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게 역경과 위기를 이겨낼 힘을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열매를 다시 빚진 자들에게 되돌려 주는 의료복지공동체를 만들어가도록 소망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한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와 사랑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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