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세이 : 일제의 무단통치의 시작과 변절하는 애국지사들
1.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후 일제가 채택한 식민지 정책은 총과 칼을 앞세운 ‘무단통치’였다. 조선의 식민지 총독은 모두 육군과 해군의 대장 출신이었다. 힘으로 조선을 압살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외형적으로는 ‘법’을 내세워 한국의 영토와 재산을 강탈하기 시작하였다. <회사령>을 통해 모든 기업운영을 허가받도록 하였으며, <토지조사사업>라는 근대적 토지개량이라는 명목으로 관례적으로 운영되던 농토를 빼앗고 수많은 토지를 강탈하였다. 신자유주의자들이 근대적 발전이라는 평가하는 철도, 도로, 통신 등의 새로운 시설은 민중들의 노동을 약탈하여 만들어진 ‘피의 산물’이었다. 일본에서는 폐지된 <태형규칙>을 적용하여 노동을 강요하고 성과가 미진한 사람들에게 끔찍한 ‘태형’의 벌칙을 가했던 것이다.
2. 일본의 한국병합은 일본의 권위를 높이고 한국의 기를 죽이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조선왕조’의 전통과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정략을 집요하게 지속하였다. 1915년 경복궁 궐내에서 벌어진 <조선물산 공진회>는 기생을 동원하여 벌인 향락과 탐욕의 잔치였다. 일본의 신상품을 통해 한국 민중의 물욕을 부추겼고 기생들의 춤과 노래를 통해 왕궁의 권위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당시 공진회를 홍보한 포스터의 메인 인물은 ‘기생’이었다. 이러한 포스터에 대해 한 학자는 말한다.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공진회를 계기로 일본 내부의 정치적 문제를 외부(조선)으로 돌리게 하고 조선에의 투자를 촉진하는 한편 에로티시즘과 엑조티시즘이 결합된 형태인 기생 이미지를 통해 일본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자극해 조선 이주와 관광을 위한 유인책으로 활용된 것이다.”
3. 한일병합에 반대하는 독립운동 세력을 제거하려는 탄압도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특히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활동하였던 신민회와 기독교 운동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은 <105사건>을 조작한다. 이 사건은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의 독립자금모금 활동을 총독암살사건으로 변모시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하였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내부의 독립운동은 불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의 권력에 대한 더 철저한 굴종을 가져오게 되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일부 선교사들은 일제에 굴종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일제의 지배를 찬양하게 된다. 조선 기독교 지도자들도 자신들의 굴종을 정당화하는 논리 계발에 나서게 되며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라’라는 성경의 오남용이 이루어진다.”
4. 이렇게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무단통치’는 한국 민중들의 분노를 응축하게 만들었다. 1919년 고종의 인산으로 터져나온 불길같은 운동은 민중들의 각성과 울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민중들의 분노가 쌓여가는 것과는 달리 계몽운동 선각자들의 변절과 배신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권력의 힘 앞에서 하나둘 굴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윤치호는 국가의 개화와 개혁에 대한 관심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비록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주요 애국계몽단체의 주체로 활동하였고 신민회의 대표로도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105인 사건>을 계기로 윤치호는 철저한 ‘친일인사’로 변신한다. 친일전환을 명목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윤치호의 행적은 대표적인 친일인사의 활동 그 자체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친일 윤치호가 한때는 대표적인 애국운동가였다는 사실은 그 후 계속 증산되어간 친일분자들의 양산에 대한 예고였는지 모른다.
5. 윤치호보다 더 안타까운 사례는 장지연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때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명문장으로 조선 민족에게 강렬한 울분과 분노의 목소리를 전달했던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 장지연은 한일병합 후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장지연은 당시 유일하게 국문과 한문으로 발행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친일적인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또한 경남일보에 일본에 대한 아부성 글을 올렸다는 증언도 있다. 해방 후 의암 장지연에 대한 평가는 학계의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과거의 행적과는 관계없이 합방 후 친일의 글을 남겼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많았다. 당시 엄혹한 현실에서 그에 대해 너무도 가혹한 잣대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억압의 시대, 절망의 시대인 일제 시대의 일을 두고 오늘의 잣대로 ‘왜 죽을 때 죽더라도 처절하게 부딪치며 살지 않았느냐’고 한다면 과거사 정리는커녕 엄혹한 역사 현실을 외면하는 공허한 독선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6. 윤치호와 장지연의 경우는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수많은 변절과 참담한 변신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일제 시대 식민의 시간이 지속되면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친일인사로 바뀌었다. 현재 우리가 비난하는 많은 친일인사 중 한때 조국의 독립과 개혁에 몸과 마음을 전념했다는 기록을 발견하는 일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명분과 실리에 의해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한 유혹을 이겨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였다. ‘있는 그대로 평가하기’, 지나친 독설은 자제할지라도 친일의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벌어진 수많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이 모두를 종합해서 평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외면하는 것은 역사의 왜곡이다. 현재 윤석열 정부가 2024년 1월 이승만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하면서 이승만의 부정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처럼 말이다.
첫댓글 - 인간의 나약함!
- 자기중심의 인간성, 이해될 수는 있어도 역사 앞에서 동조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