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를 심층적으로 파헤친 작가이자 철학자인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는 스즈키 다이(1870-1966)를 근대 일본 최대의 불교학자라고 칭한다. 선을 근현대의 새로운 문화적 코드로 등장시킨 것뿐만이 아니라 구미에 널리 알린 공적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저작은 일본어로 101책, 영어로 42책에 이르며, 2003년도에 40권의 전집이 일본의 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에서 완간되었다.
그의 연보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일본 혼슈(本州)의 동해안에 코처럼 솟은 이시카와현(石川県) 가나자와시(金沢市)에서 번(藩, 옛 행정구역)의 공의(公醫)의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아들들에게 원형이정(元亨利貞)을 붙여 다이세츠는 데이타로(貞太郎)로 불렀다. 다이세츠(大拙)는 그의 스승 샤쿠 소엔(釈宗演)으로부터 거사호(居士号)로 받은 것이다. 가세의 몰락으로 인해 고등중학교를 중퇴하고 영어교사로 일하던 중, 다시 학문에 매진하기 위해 현재의 동경대학에 입학했다. 그와 평생 친구로 지낸 교토학파의 거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太郎)와는 고등중학교의 동급생이었다.
대학생 시절 스즈키는 가마쿠라(鎌倉) 소재 임제종 사찰인 원각사(圓覺寺)의 이마기타 코센(今北洪川)과 그의 제자 샤쿠 소엔을 만나 참선을 배웠다. 1893년 소엔이 시카고 만국종교박람회에 일본대표로 참석했을 때, 강연원고를 스즈키가 영역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인 1897년 소엔의 추천을 받고, 미국에 건너가 동양학자 폴 케라스가 운영하는 출판사 오픈 코트에서 동양학 출판편집 업무에 참여했다. <노자도덕경>과 <대승기신론>의 영역본, 그리고 대승불교개론을 출판하여 일약 구미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09년 귀국, 학습원(学習院)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11년에는 그의 평생의 동지인 베어트리스와 결혼하였다. 1921년 대곡(大谷)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동방불교도협회를 창립하였으며, 영문학술지 <Eastern Buddhist>를 창간했다.
명저로 알려진 <Zen Buddhism and Its Influence on Japanese Culture(선불교와 일본문화에 대한 그 영향)>, <Zen and Japanese Culture(선과 일본문화)>, <Essays in Zen Buddhism(선불교 에세이)> 등을 통해 선을 일본 발음인 젠(Zen)으로 서구에 정착시켰다. 만년에는 정토진종의 조사 신란(親鸞)의 저서인 <교행신증(敎行信証)>을 영역했다.
프린스톤, 하버드, 예일대학 등 미국과 유럽의 유수의 대학에서 선에 대한 강연을 해왔으며, 칼 융, 하이데거 등 서구의 지성인들과 교류하고, 중국의 호적(胡適)과도 선 연구방법에 대해 토론했다. 인도의 신지학회 회원으로 가입하기도 했으며, 영성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신비사상을 일본에 소개하였다. 만년에 그는 선을 중심으로 한 불교전문서적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마츠가오카 문고(松ヶ岡文庫)를 설립하였다. 1966년 향년 96세로 열반에 들었다. 사후 스즈키학술재단이 세워져 그의 활동과 사상을 현창하고 있다. 자식이 없는 그는 생전에 전 재산을 그를 보살펴 준 가정부에게 주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사상의 핵심은 무엇일까. 많은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즉비(卽非)의 논리와 영성이라고 한다. 그는 동양적 시각(東洋的な見方)에서 서양의 지적 세계는 주와 객, 물과 심, 음과 양 등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인식이 아니면, 지식이 성립하지 않으며, 과학도 철학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고, 자연도 정복의 대상이 되며, 각종 침략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동양적 세계관에는 지성의 발생 이전인 ‘현지우현(玄之又玄)’, ‘황홀(恍惚)’, ‘혼돈(渾沌)’ 등의 노장사상에서 보듯이 천지미분전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성서>에서 신이 말한 “빛이 있어라”라고 하기 전의 세계라고 한다.
천계에 홀로 앉아 인간세계의 일들을 주저없이 완료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태평양의 물을 한 입에 마셔서 비워버리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얼토당토 않는 이러한 선적 경지를 반야사상은 “A는 비A(非A)이기 때문에 A이다”라는 일반논리로 전환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곧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것이다. 니시다 기타로가 말하는 ‘절대모순적 자기동일’로써 보통의 생각으로는 잡을 수 없으며, 말할 수 없는 선의 수사법이라고 한다. 이것이 즉비의 논리이다.
<금강경>13장의 “불타가 설하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智慧到彼岸)이라는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닐 새 이를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라고 하는 것이 선의 논리이며, 일본적 영성이라고 한다. 그는 청원행사(青原行思)의 “산산수수(山山水水), 산불시산(山不是山), 수불시수(水不是水), 산산수수(山山水水)”를 통해 선에 투영된 반야논리를 설명한다. 이 부사의하고, 비합리적인 논리는 부정을 매개로 하여 긍정으로 들어간다. 이를 선의 특수성이라고 하며, 생사의 문제에 대입할 경우, “당신들이 그렇게 도망가고 싶은 생사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벗어나고자 하는 계박(繫縛)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당신들을 묶고 있는 것이 있는가. 누가 당신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객미분별의 입장, 순수경험의 무분별의 입장, 무념무상의 경지, 차별즉평등・평등즉차별, 이사무애의 법계인 즉비 논리의 세계는 화엄의 사사무애의 법계, 평상심이 도, 그리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세계로 진행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일본적 영성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먼저 그는 “무언가 둘인 것을 포함하여 필경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또한 하나이면서 그대로 둘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지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영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을 대지(大地)로 보고, 그 대지에 뿌리를 내린 것이 종교라고 한다. 이러한 영성을 일본에서는 자기긍정을 매개로 한 초개(超個)를 보여준 신란이 드러냈다고 한다.
즉 염불의 체험을 통해 신란이 자신 한 사람을 위해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다고 한 신앙고백처럼 개인에 철저한 곳에서 개인을 넘어선, 즉 ‘개기(個己)의 방향에 초개기(超個己)’를 보는 것으로, 이는 선이 ‘초개기의 방향에서 개기’를 보는 것과는 방향이 달라도 궁극적으로는 양자에서 영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물론 남녀노소의 신분과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전수(專修)염불을 주장한 정토종의 조사이자 신란의 스승인 호넨(法然)에게 그 연원이 있다고 본다. 이를 통해 정토진종의 신앙인들인 묘코닌(妙好人)과 같이, 범부와 성인이 하나인 범성일여(凡聖一如)의 경지가 서민 속에서 선과 같은 깨달음의 세계를 꽃피웠다고 한다.
이처럼 스즈키는 진속(眞貞), 범성(凡聖), 체용(体用)을 불이(不二)로 보는 대승불교에 기반한 영성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영성적 자각의 내용은 대지(大智)와 대비(大悲)이다. 대지는 초영성적 분별에서 나오며, 자연지(自然智), 무사지(無師智)인 여래의 지견이다. 대비는 제불의 본원이며, 무연(無緣)의 자비, 무소외(無所畏)의 사랑, 어떤 의미에서는 아가페적 사랑이자 어찌할 수 없는 진실(誠)이다”고 한다.
스즈키는 일본 근대 국가주의의 축이었던 국가신도는 여기에 이르지 못했다고 보고, 전쟁으로 귀결된 인간의 폐쇄된 자아를 해방하는 동시에, 과학과 종교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영성의 시대를 전후에 복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선과 정토를 영성의 측면에서 일치시켰다는 점에서 불교의 또 다른 현대적 해석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한편, 선과 전쟁의 관련 속에서 스즈키에 대해서는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그는 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깨끗하게 죽는” 무사도야말로 일본최고의 정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전쟁터에서의 죽음을 긍정하는 사상으로 변질되었고, 침략전쟁의 시기에 반전사상을 드러내놓지 못한 나약한 지식인의 한계를 보게 된다. 제국주의에 목숨을 걸고 항거한 수많은 일본 내 불굴의 불교인 및 지성인들과 대비해 볼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첫댓글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분에 대한 학술적인 세미나가 열리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