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하지만 언제나 똑같은 뉘앙스로 행복한 건 아니다.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도 많다. 희망이 없다고, 지금껏 잘못 살아왔다고, 곁에 손 내밀 사람 아무도 없다고 착각하는 날도 종종 있다. 그럴 때 나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스스로에게 일깨워 줘야 할 필요와 의무를 느낀다. 그런 날 꺼내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 직접 처방한 묘약인데 도마뱀의 눈물, 소금 뿌린 로즈마리, 밀랍과 복숭아씨 같은 까다로운 재료가 필요한 건 절대 아니다. 외려 아주 간단하다. 그렇지만 효능은 즉각적이고 강력하다.
그건 사과 한 알을 껍질째 와사삭 깨물어먹는 일이다. 너무 시시하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까다로우면 까다롭지 간단하다고 비웃을 일은 아니다. 사과는 와사삭 소리가 입안에서 비강을 통해 고막으로 바로 전달되고 뿜어진 과즙이 얼굴에 확 튈 만큼 싱싱해야 한다.
물 많고 당도가 높되 단맛 뒤에 반드시 새콤한 진저리가 뇌하수체의 어느 부분을 살짝 건드려줘야 한다. 그러므로 같은 과일이라도 배나 감은 사절이다. 신맛이 지나쳐 혀안의 미각돌기들을 노골적으로 긴장시켜도 곤란하다. 아주 살짝쿵, 담배씨만큼만, 붉은 수박 위에 한 알갱이 얹힌 소금처럼, 단맛을 옹호하는 신맛이어야 한다.
빛깔은 물론 붉은 게 좋다. 그러나 표면 전체가 일정한 톤으로 붉기만 해서는 재미없다. 농담과 명암과 강약이 요구된다. 동트는 하늘처럼 연분홍이나 연노랑이 한 줄기 끼어드는 편이 의식의 지평을 확장시킨다는 게 그동안의 내 경험이다. 형태가 좌우대칭일 필요는 없다. 약간의 불균형이 도리어 매력적인 건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너무 복잡하다고? 그렇지 않다. 이건 사과를 고를 때의 문제지 평소 서너 개의 사과만 확보해두면 어려울 게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건 사과를 잡을 때 엄지를 꼭지에, 장지를 배꼽에 대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안정감이 생기고 사과 안에 든 하늘 기운, 땅 기운이 일사불란하게 스민다. 손가락의 맨 끝마디 볼록한 살집 외엔 살갗이 사과껍질에 닿아서는 안 된다. 짐작했겠지만 초밥장이가 생선을 오래 잡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과의 물리적 형태가 점점 눈앞에서 사라진다. 스미는 과즙에 몸이 환호한다.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님을 감지한다. 마침내 드러나는 두 개의 사과씨! 낙담도 회한도 고독도 단숨에 제압하는 핵! 이 씨앗이 사랑으로 미쳐 다시 한 번 사과로 환원되는 날이 올까…. 작은 생명을 오래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평화다. 신비다. 명백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