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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의 변모
피로하고 쓸쓸한 대통령
한 인간으로서 경험한 갖가지 애환의 폭과 깊이에 있어서 박정희(朴正熙)를 능가할 인물은
당분간 우리 역사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만군, 일군, 국군 등 세 나라의 군복을 차례로 갈아 입으면서 세 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이다. 그는 세 번 결혼했고, 제국주의· 사회주의·민주주의의 세 가지 이데올로기를 편력했다.
일제·이승만정권·민주당정권에 대해 차례로 반역을 꾀했으며 대통령이 된 뒤에도 미국에
도전한 반항아이기도 했다. 그는 동지들을 밀고하여 자신의 목숨을 건졌고, 충복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5·16 그날 밤엔 절망적이던 상황에서 강철같은 의지로 역전승을 거둔 사람이
피 B형, 키 164 센티미터, 몸무게 50킬로그램 남짓한 박정희였다. 군인시절 그는 결백한
장군이란 신화를 남겼으나 집권한 뒤엔 경제개발이란 화려한 명제의 뒤안길에 부정·부패의 씨앗을 뿌렸다.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배고픔의 추방'이란 유사이래 최초의 업적을 이룩한 그는 정치 테러의 희생이 된 형과
아내를 뒤따라 갔다. 이런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의 인간됨을 반영한다. 성격 변화의 진폭과 감정의 기복이
가진 낙차의 크기에 있어서도 그만한 인물은 달리 없을 것이다.할아버지처럼 자상하다가도 서릿발처럼 비정한 사람,
부끄럼을 타는 성격과 미국도 들이받는 오기의 공유자, 인간 차별을 하지 않는 겸허함과 은인을 배신하는 무서운 결단력의 공존,
권위의식과 반골의식의 혼재-그래서 '청탁을 같이 들이마시는' 사람, '크게 치면 크게, 작게 치면 작게 울리는'
큰북과 같은 사람이란 평을 들었던 것이 인간 박정희였다.
1979년 10월 25일, 최후의 날을 하루 앞둔 박대통령은 업무 협의차 일시 귀국한 김용식(金溶植) 주미대사를 불러
청와대 뜰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이날 배석했던 유혁인(柳赫仁·청와대 정치담당 수석비서관)에 따르면 대통령은
스르르 떨어지는 오동나무 낙엽을 한 잎 줍더니
아주 감상적인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더라고 한다.
'오동나무 낙엽 하나가 가을이 깊어감을 알린다고 했는데……'
이때의 대통령 모습은 처연하고 스산하여 그날 오찬 참석자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았다.
1979년 10월, 박대통령은 집권 19년째의 가을 속에 있었다. 인간 박정희는 그때 쓸쓸한 홀아비였다.
비감과 고독감에 젖어 피로한 지도자였다. 매섭고 날카로운 맛이 많이 빠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군인시절 표범처럼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던 자세나 5·16 뒤의 그 패기에 찼던 모습과는 크게 달라진
만 62세의 박정희가 거기에 있었다.
정상의 고독
1964∼65년 패기에 찬 젊은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청와대는 늘 쓸쓸했다는 것이, 당시의 청와대 대변인 박상길(朴相吉)의 얘기다.
'대통령의 직분-이 세상에서 이 직위만큼 긴장되고 바쁘고 자유 없는, 일방적인 의무에 시달리는 직업은 다시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차라리 그것은 직무라기보다는 24시간의 대결이며, 잔인할 정도로 절대만을 강요당하는 성직이 아니면 배수진을 업고 부대의
생사를 책임진 지휘자와 같다. 누가 대통령직을 두고 화려하고 영화롭고 만복을 누리는 자리라 하겠는가. 항차 세계 최강의
적성세력 앞에서 갈라진 강토의 반 조각을 가지고 5천년의 역사를 개신하며 조국을 지키고 발전을 시도함에 있어서랴,
국민들은 일방적으로 요구 비판하고 더 많은 주문을 강요하는 것이 체질화되었고, 맹공·난동·데모·폭력으로 뒤집어엎는 것을
지식인의 지고의 선처럼 착각한 바도 있었다. 여기에 대통령의 외로움이 있고, 눈물이 있다. 오후 5시가 되어 관저의 전직원이
퇴근하고 나면 그 넓고 거대한 영역 안에는 마음을 주고받을 식구 4, 5명만이 외로이 남는다. 그리고서도 대통령은 못다 본
서류를 열람해야 하고, 국사의 중대사 그리고 고독과의 대결을 해야 한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수없이 뇌까린 말이 있다.
'이 자들이 나만 이 깊은 감옥에 처넣고 저희들은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사사건건 말썽만 부리니……'
나는 서너 번 가량 모든 직원이 퇴근하고 갈 데 없는 대통령이 서재에 우두커니 홀로 서서 지는 노을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그 눈에 이슬이 맺힌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컴컴해진 실내에서 피아노로 「황성옛터」를 치시기도 했다.'
(朴相吉, 『나와 제 3·4공화국』, 한진출판사)
박대통령은 싸늘하고 고독하며 애조 띤 분위기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최후의 공식만찬 자리에서 유정회 대변인
정재호(鄭在虎)가 이야기한 대로 '눈 가장자리에는 늘 눈물의 그림자가 서려 있는' 사람이었다.
박상길은 1960년대의 화려한 고도성장기에서도, 박대통령의 모습에서 '비극의 주인공'을 연상하곤 했다고 한다.
'셰액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비극적이되 영웅적인 주인공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끝없이 한 속에 침잠하는,
처연한 모습이었읍니다. 그런 분을 모시려니까 심적으로 고되더군요. 1965년에 모 레코드 회사에서 유행가 신판을 하나 냈읍니다.
뒷면은 북한의 육상선수 신금단의 절규 '아버지!'를 소재로 한 노래였읍니다, 그 앞면은 박정희 작사·작곡의 「금오산아, 잘 있거라」였어요. 가수 박모씨가 부른 이 노래가 어떤 경위로 취입이 됐는지 알 수 없었으나 노래의 기조는 애잔한 가락이었읍니다.'
대통령의 새마을 담당 특별보좌관으로 박대통령을 따라다녔던 박진환(朴振煥)은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에 있어 보니까 결국 나라의 운명을 '나의 책임'으로 의식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대통령뿐이란 생각을 하게 됩디다.
당직자나 총리나 장관이 대통령의 책임을 분담했겠읍니까, 박 대통령은 어느 날, 이후락(李厚洛) 정보부장으로부터
북한의 군사력에 대한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
'한강물이 넘치는지 안 넘치는지는 둑 위에 서야 안다'고 하십디다.'
'둑 위에 홀로 선 사람'으로서의 중압감과 고독이 박대통령을 늘 짓누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박정희의 숨겨진 婚歷
박정희의 침울한 분위기에 기여한 요인은 그의 가난한 성장 환경과 실패한 결혼생활, 그리고 과거의 사상적 편력에 대한
강박의식이었다고 한 측근은 분석했다. 이것이 그의 무서운 집념과 아집, 그리고 기복이 심한 정서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으리란 추측이다. 박정희는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두 번 결혼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세 번 결혼했음을 나는 최근에 확인했다. 그의 여자관계는 그의 종말과도 연관되므로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는 1936년 대구 사범 5학년 시절(만19세) 여름방학 때 세 살 아래인 김호남(金浩南) 처녀와 결혼했다.
음력으로 1937년 10월 22일에 김씨는 큰딸 박재옥(朴在玉)을 낳았다. 박정희는 아버지가 서둘러 시킨 이 결혼에 불만이 많았다.
1937년 4월 1일 문경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한 그는 아내를 데리고 가지 않고, 혼자서 하숙을 했다. 이때부터 사실상의 이혼상태였다.
박정희의 두번째 결혼에 대해서는 김점곤(金點坤·육군소장 예편·경희대 교수)이 1차적인 증언자다.
1947년 춘천 8연대에 있을 때부터 박정희 소위는 상관인 김중위에게 자신의 실패한 첫번째 결혼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곤 했다.
춘천 시내엔 일본식 목욕탕이 하나 있었다. 가끔 같이 목욕하면서 신상문제를 의논하곤 했다.
박정희는 첫번째 아내인 김호남이 헤어진 뒤 재혼했다면서 '이젠 나도 재혼을 해야겠다'는 뜻을 비치곤 했다.
원용덕(元容德) 연대장은 각별히 아끼는 부하 박정희의 결혼 문제에 자기 일처럼 나섰다.
원대령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원목사의 소개로 어느 철도 공무원의 딸과 선을 보려고 원, 김, 박 세 사람이 용산의 철도관사로
간 적이 있었다. 박정희는 처녀의 용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퇴짜를 놓았다. 김점곤에 따르면 박정희는 여자를 고르는
심미안이 꽤 높았다고 한다.
박정희가 원용덕을 통해서 원목사에게 거부 의사를 전달하자 원목사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원용덕은 '그렇게 처녀가 아까우시면 아버님께서 장가 드시지요'라고 우스개를 했다고 한다.
1947년 11월, 8연대에서 경리장교로 근무하던 박경원(군사영어학교 출신)이 춘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김점곤은 신랑의 들러리로 참석했다. 신부의 들러리와 짝이 되어 그날 밤을 유쾌하게 놀았다.
김씨의 상대가 된 이 처녀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몸매가 잘 빠졌고, 얼굴은 길고 이국적으로 잘생긴 여자였다.
그 여자는 원산에서 고교를 다녔고, 이화여전을 중퇴했다고 했다. 성격도 쾌활했다.
다만 김중대장보다 서너 살 위인 것 같아, 친구들이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나이가 안 맞는군'이라고 농을 던지곤 했다.
박경원 전장관은 지금 (주)코스모스 고문으로 있다. 그는 '나의 결혼식에 박대통령이 참석한 것을 기억한다.
그 들러리는 원산에서 여고를 다닌 내 처의 친구였다'고 했다. 이 증언으로 미뤄 두 사람은 결혼식장에서 처음으로 만난 것 같다.
박정희가 8연대에서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옮긴 것은 1947년 10월이었다.
그 몇 달 뒤(아마도 1948년 봄) 김점곤은 박정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결혼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몇 달 뒤 김씨도 육군본부로 전보되었다. 용산의 박정희 대위 관사로 놀러갔더니 아내를 소개시켜주었다.
김씨의 짝이었던 바로 그 들러리 아가씨였다.
형무소 생활때 틈 생겨
일단 이여인이라고 해놓아야 할 이 두번째 아내는 지금껏 공식기록에서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생전엔 관변 전기작가들에 의해 육영수가 첫번째 아내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었으니 이여인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친족 중에선 박정희와 이 여인의 관계를 '잠깐의 동거'니 '외도'니 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약 2년간 사실혼의 관계에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결혼신고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박정희나 그의 동료, 부하들이 이 여인을 아내와 부인,
또는 사모님으로 대우했음이 분명하므로 '두번째 아내'란 표현을 써야 마땅하다.
김점곤은 박정희가 1948년 11월 숙군 대상자로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조사받고 있는 동안 자신의 관사 맞은편에 있는 박정희의
관사로 위문을 간 적도 있다. 총각인 김소령은 유부녀 집을 혼자서 찾아가기가 무엇해서 옆집에 사는 군악대장 이종태의 일본인
아내를 데리고 방문하곤 했다. 김소령은 박정희의 아내 이여인이 그때부터 몸가짐이 이상했었다고 기억한다.
집에 잘 붙어 있지 않고, 남편이 숙군 대상자가 될 줄 모르고 결혼했다며
불평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오곤 했다는 것이다.
김소령은 당시 이여인과 박소령 사이엔 여자 아이가 분명히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소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기가 일찍 죽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 이 점은 앞으로 더 알아보아야 할 문제다. 박소령이 석방된 다음날
그의 집을 찾아갔던 김점곤에 따르면 이여인은 아주 냉랭한 표정이었고, 김소령에 대해서도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기자는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 이 여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49년 4월 초 박정희가 아직 현역으로 정보국 전투정보과장 자리에 있을 때 태릉에 나가서 찍은 사진이다.
그때 같은 과에 있었던 부하가 찍은 것이다.
박소령의 왼쪽에 그 여자가 앉아 있다. 비록 작은 사진이지만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고 미인이란 느낌이 바로 들 정도다.
긴 얼굴에 여고생 제복 같은 옷차림이 이 여자를 순진하게 돋보여 주고 있다. 당시 전투정보과 선임하사였던 김이진 상사는
박정희가 군복을 벗은 뒤 그의 집에 갈 때마다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파면 이후 생계가 어려워짐에 따라 부부 사이가
벌어져 가고 있는 낌새가 보였다.
김상사는 부부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것은 박정희가 매일 술에 취해 늦게 돌아오는 데다가 금전적으로 쪼들리고 있었고,
군에서 파면돼 장래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박정희는 섀퍼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김상사가 어느 날 그의 집에 들렀더니 개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뒤 들으니 박정희는 부부싸움 끝에 셰퍼드를 권총으로
쏴 죽여버렸다는 것이었다. 김상사는 이여인이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귀골의 미인이었다고 기억한다.
음독 뒤 가출, 그리고 기구한 해후
전투정보과 남한반장 한무협(韓武協·육군소장 예편)은 박정희가 그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준 인연도 있고 해서 그 부부와는
아주 스스럼없이 지냈다고 한다. '그분의 관사가 아주 가깝게 있어 자주 놀러 갔었지요. 이여사에게 술상 차려오라고
떼를 쓰기도 했답니다. 히스테리가 있어 그분에게 술을 많이 마신다고 바가지를 긁는 일이 많았어요.
그러나 싹싹할 때는 그럴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한무협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여인이 잔소리를 할 때는 묵묵히 듣고만 있는 스타일이었다. 하루는 박정희가 밤 늦게까지 집에
가지 않고 사무실에 남아 있기에 전투정보과 이영근(李永根) 중위(전유정회 총무)가 까닭을 물었다. 박정희는 이여인이 자신이
애독하던 『손자병법』을 찢어버렸다면서 원망하는 투의 말을 하더란 것이다.
박정희가 문경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있을 때의 하숙집 여주인의 아들 임창발(林昌發)은 1949년 여름 박정희가 쓰던 용산의
육군본부 관사에 놀러와서 나흘을 묵고 간 적이 있었다. 사흘째 밤 박정희가 이여인과 다투는 소리가 났다.
나흘째 밤 임씨가 잠을 자고 있는데 박정희가 흔들어 깨웠다. '여자가 약을 먹었다. 급하니 네가 구급차에 태우고
병원에 좀 갔다와라.' 박정희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집 앞에는 이미 구급차가 대기중이었다.
임창발은 축 늘어진 이여인을 차에 태워 이름도 모르는 어느 병원에까지 데리고 가 입원을 거들어준 다음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한무협 중위는 1949년말쯤 박정희의 처 이씨가 집을 나간다면서 짐을 싸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아내를
데리고 관사로 뛰어갔다. 그러나 이씨는 한중위 부부가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차에 짐을 싣고는 휑하니 가버렸다.
아내의 가출은 군복까지 벗은 박정희를 비탄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 같다. 그는 처남과 함께 아내를 찾아나서
인천 등지를 싸돌아다녔다.
1950년 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장으로 부임한 한웅진(韓雄震) 중령(육군소장 예편)은 지금의 고려병원 뒤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이여인의 가출로 홀아비가 된 박정희가 자주 놀러와 자고 가곤 했다. 박정희와 육사동기생인 한씨는
'그때의 박정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비참했었다. 잠도 못 이루고 고민하면서 때로는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아내는 집을 나가고, 그의 어머니는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의 불행으로 충격을 받아 죽고, 친구들은 피하고, 생활은 어렵고,
그래서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선 동기생 하숙방으로 기어 들어와 하소연을 하다간 처연하게 흐느끼곤 했다는 것이다.
'그때 저는 방첩대장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안심하고 그를 가까이할 수 있었지만 다른 동료들은 그와 친했다간 또 무슨 오해를
받을까 싶어 피한 것도 이해할 만한 상황이었지요.' 1950년의 그 암울하던 여름을 박소령(6·25 직후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으로 복직)이
대구, 그리고 부산으로 옮겨다닌 육군본부를 따라다니고 있을 때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는 아마도 정보국 보급실장 김재춘(金在春·육군소장 예편·중앙정보부장 역임)일 것이다.
김재춘은 박정희가 헤어진 두번째 아내를 못내 그리워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육군본부가 부산으로 옮겨가 있을
무렵 김재춘은 박정희와 함께 부산 범일동의 어느 술집으로 놀러갔다. 접대부를 불렀다. 그 여자는 박정희의 옆자리에 앉자마자
후닥닥 뛰쳐나가 술집 바깥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 여자는 약 1년 전에 헤어진 박정희의 두번째 부인이었다.
김재춘은 그때부터 박소령에게 '이젠 미련을 버리고 재혼하십시오'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해 가을 박정희는 육영수와 맺어졌다.
두 전처를 끝내 못 잊어해
군인시절 부하들에게는 손찌검이나 폭언을 거의 하지 않은 '자상한' 박정희 장군이 유일하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한 상대는
육영수였다는 증언들은 많다. 두 사람의 관계는 시인 박목월이 쓴 육영수 전기에서 보듯 지순하기만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웅진은 '그분과 술을 퍼마시고 집에 같이 갔다가 육여사가 싫은 표정을 짓는다고 내가 보는 데서 때리고, 심지어 물을 뒤집어
씌운 적도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 식사중에 육여사가, 부하의 청탁을 남편에게 전했어요. 박장군은 화를 버럭 내더니 숟가락으로 육여사를 사정없이
찌르면서, 비겁하게 마누라를 시켜서 부탁하는 그런 새끼는 혼을 내주어야 된다면서, 그 따위 부탁 듣지 말라고 고함을 치더군요.
밥상을 뒤엎고 그릇을 집어 던지는 것도 더러 봤지요. 그래도 그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육여사는 훌륭한 분이었읍니다.'
그가 육영수에게 그렇게 거칠게만 군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잠든 아내의 모습을 두고 시를 짓기도 할 이만큼 자상하고 애틋한
남편이기도 했다. 이 점 역시 그의 성격상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그런 박대통령은 첫 아내, 둘째 아내도 못 잊어했었다.
한병기(韓丙起) 대위(전캐나다 대사)는 박정희와 첫 아내 사이에서난 박재옥과 결혼한 뒤 부산으로 장모 김호남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한때 박정희 장군이 사령관으로 있었던 군수기지사령부와 가까운 절에서 김여인은 보살(절에서 가정부 역할을 하는 여자)로
일하고 있었다. 박정희와 헤어진 뒤 재혼하여 낳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그때는 재혼한 남편과도 헤어져 있었다.
김여인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적이 있다는 항간의 풍설은 잘못된 것이다.
1970년에 박대통령은 한병기가 청와대에 들어와 인사를 하자 '장모와 연락이 있느냐'고 물었다. '자주 찾아 뵙습니다'고 하자
박대통령은 '잘 보살펴드려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첫 아내가 그때 세들어 살고 있던 부산의 집 사진을 찍어오게 했다.
박대통령은 칼라 사진으로 찍힌 그 집을 한참 보고 있더니 '이와 비슷한 집을 사드려라'면서 180만원을 주었다.
사위 한병기에 따르면 김씨는 박대통령과 헤어진 것을 '전생의 업보'라고 생각하면서 전남편을 위해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한다.
김씨는 고생을 사서 하기도 했다. 충북의 어느 시골 암자에서는 다른 할머니와 단둘이 지내면서 일부러 불을 안 때고 냉방에서
생활하여 '전생의 업보'를 감당하려 했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또 모 신문사 기자이던, 두번째 아내 이여인의 남동생을 청와대로 불러 안부를 물은 적도 있었다.
이 남동생은 누님(이여인, 당시 재혼하여 서울에서 거주)에게 박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한 통 쓰면 대신 전달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오기가 대단한 이여인은 일언지하에 거절, 두 사람은 10·26때까지 한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다.
이여인은 1987년 4월 현재 남편과 5남 1녀를 둔 65세의 할머니로서 서울시내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
내가 주민등록표의 사진으로 확인한 이 할머니의 얼굴은 아직도 미인이었다.
내면의 붕괴는 육여사 사망부터
한병기(당시 칠레 대사)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의 피격 소식을 칠레에서 들었을 때 장인의 앞날이 걱정되더라고 했다.
'육여사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저는 박대통령의 양팔이 모두 잘린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읍니다.
육여사는 장인 어른의 브레이크였읍니다. 대통령이 너무 강경한 방향으로 치달을 때 늘 제동을 건 것이 육여사였죠.
그것도 아주 기술적으로 하신 분입니다. 박대통령깨서는 다른 사람이 동으로 가라고 하면, 그 길이 바른길이라 하더라도 그 참견에
기분이 상해 서쪽으로 가버릴 수 있는 기질이 있었읍니다. 육여사는 박대통령을 기분 좋게 동쪽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기교를
가진 분이었읍니다. 정의의 편에 서서 일이 꼬일 때 이것을 풀 수 있는 분이 육여사였지요. 그런 분이 사라졌으니
박대통령과 청와대의 앞날이 어둡다는 예감이 들더군요.'
육영수가 박정희의 좋은 반려자이자 견제자였다는 증언은 숱하다. 1965년 4월에 한병기는 뉴욕에서 살고 있었다.
미국 신문에 한일협정 비준을 앞두고 한국 정정(政情)이 어지럽다는 기사가 연일 실려 그는 울화통이 치밀었다.
'이런 짓거리 하려면 5·16은 무엇하러 했는가' 하는 생각이 나더라고 한다. 그는 곧바로 서울로 날아왔다.
청와대에 들어가니 육영수 여사가 그의 손을 붙들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것을 보고 더욱 화가 치민
한병기는 장인을 만나면 싫은 소리를 해야겠다고 별렀다.
그날 따라 대통령은 잔뜩 화가 나서 청와대로 돌아왔다. 한씨가 집무실로 들어가니
박대통령은 '왜 왔어?'라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정치를 이 따위로 하시려면 윤보선씨한테 줘버리는 게 낫겠읍니다.'
'이놈이!'
장인이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한씨는 이를 피했다. '와장창'하는 소리를 듣고 이후락 비서실장이 뛰어들어왔다.
대통령은 나가라고 했다. 한씨는 장인에게 계속 대어들어 한 30분간 서로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집무실을 나오니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이 한병기의 팔을 끌어가며 '왜 그랬느냐'고했다.
한씨는 '각하 좀 똑똑히 모십시오!'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뒤 장기영 부총리와 김형욱 정보부장이 한씨를 불러 술을 받아주고
돈도 많이 주었다. 한씨는, 박대통령이 두 사람에게 '이놈이 나한테 뗑깡을 부리더라'고 했고, 그들이 자신을 달래려고
그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윤필용(尹必鏞)준장이 방첩부대장으로 있을 때인 1966년 어느 날 육영수 여사가 오빠 육인수 집에 와서
윤준장에게 전화를 걸어 좀 와달라고 했다. 육여사는
'우리 두 사람이 만난 것을 각하께서 절대로 몰라야 한다'면서 평소 쌓아놓았던 불만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김OO, 이OO, 박OO, 장OO, 이런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이 나라가 망해야 하는데 그래도 농촌에 가면
아이들의 옷차림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은 웬일입니까?'
'사모님, 우리가 동남아로, 월남으로 진출을 많이 해서 국력이 신장되고 있어 한두 사람이 부정해 먹어도 표가 안 납니다.'
'윤장군님, 이건 절대로 여자의 시샘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하께 여자를 소개하면 소개했지 왜 꼭 말썽날 만한
탤런트들을 소개합니까?'
사라진 대통령의 브레이크
김상철(金尙哲·현변호사)은 1970년 2월 박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서울대학교 단과대학별 수석 졸업예정자들을 박대통령 부부가
초대, 저녁을 대접하는 자리에 법대 수석 졸업예정자로서 참석한 것이었다. 그는 박대통령을 처음 보고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그토록 증오해오던 무서운 독재자의 이미지와 실물로 나타난 박정희는 너무 달랐다. 우리가 미워해왔던 사람이
이렇게 작고 약한 바로 이 사람인가 하고 허무감마저 들더란 것이다. 얼굴 살갗은 새까많고 주근깨가 많았다.
김상철은 그 박대통령에게서 '머리를 치켜든 코브라'의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육영수는 식사 도중에 김상철의 이름을 부르더니 '왜 학생들이 데모를 하느냐'고 물었다.
최문환 서울대 총장이 이 질문을 대신 받아 적당히 기분 좋은 말을 했다.
육영수 여사는 재차 '김상철 학생, 말 좀 해봐요'라고 했다. 이번엔 법대 학장이 가로막고 나서서 적당히 이야기를 했다.
육여사는 세번째로 '교수님들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 이젠 학생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고 재촉했다.
김상철은 육여사가 학생의 입을 통해 대통령에게 바른말을 전해주고 싶어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충 이렇게 말했다.
'저의 친구들 중에는 막걸리를 마시자고 하면 커피를 마시자고 하는 학생들도 있읍니다.
커피를 마시자는 학생들처럼 열심히 공부만 하는 학생들도 필요하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시국을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어야 나라가 잘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난 걸 보니까 대통령께서 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기능공들을
격려해주셨다고 하더군요. 참 좋은 일입니다만 기능공들은 어차피 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미래의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학생들에게도 격려를 해주시고, 실수를 하더라도 한수 접어두고 생각해주시면 합니다.'
박대통령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김상철은 뒤에 그날 밤 육여사가 대통령으로부터 손찌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육여사를 대신한 차지철
박준규(朴浚圭) 전공화당의장은 육여사가 박대통령의 주변에서 사라진 것이 그의 종말을 재촉한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풀이한다.
'비록 두 분이 자주 다투기도 했지만 싸울 상대가 없다는 것은 더욱 허전한 일이었을 겁니다. 생활 패턴이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육여사 대신 대통령을 조석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이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는 것이 비극의 또 다른 씨앗이었읍니다.
경륜, 지식 수준, 도덕 수준에서 도저히 박대통령의 말 상대가 안되는 자가 쓸쓸한 대통령을 모시고 다니며 여러 가지
악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육영수의 죽음은 박정희 대통령 곁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을 빼앗아간 대신, 있어선 안될 사람을 곁에 갖다 놓았다.
박대통령은 1974년 8월 공화당 의원 차지철(車智澈)을, 문세광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박종규의 후임으로
경호실장에 임명한 것이었다. 사위 한병기의 증언은 이렇다.
'육여사가 돌아가신 뒤 경호실장 박종규씨는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고 박대통령도 그를 부르지 않았읍니다.
그 무렵 제가 청와대에 가서 장인을 뵈었더니, '경호실장에 누가 좋겠어?'라고 묻습디다.
저는 별 생각 없이 '오치성씨가 어떻습니까?'라고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오씨와 친하지 않지만, 그분이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곁눈질을 하지 않는 사람이란 인상을 갖고 있었거든요. 대통령께서는 '오치성이는 적이 많챦아?'라고 하십디다.
오씨가 10·2 항명 파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을 암시하는 말씀 같았읍니다. 그러시더니 대뜸 '차지철은 어때?'라고 했어요.
사실 저는 차지철에 대해서는 썩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적극적으로 반대할 자료도 없고 해서
'차지철이도 좋지요'라고 해버렸어요. 제가 차씨에 대해서 인상이 좋지 않았던 것은, 8대선거 직후 박대통령과
차지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자리를 같이 했을 때, 차씨가 '지난번 선거에서는 500만원밖에 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때 당선되려면 적어도 3∼4억원을 써야 할 때인데,
차씨가 거짓말을 하는구나, 너무 위선적이다,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더구나 박대통령은 차씨의 말을 믿으시는 것 같았읍니다.'
한웅진은 5·16 그날 밤 박정희 소장과 함께 공수단에 들러 병력출동을 독려했었다.
박치옥(朴致玉) 단장은 장도영(張都瑛)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경거망동을 하지 말고 부대를 장악하라'는 엄명을 받고 있을 때였다.
박단장이 행동을 주저하고 있을 때 차지철 대위 등이 들고 일어나 맨 먼저 무기고를 부수고 출동 준비를 했다. 이 장면을 박소장이
목격했다.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을 도우려고 나서는 차대위의 인상은 박정희 소장의 뇌리에 깊게 찍혔고,
이것이 차실장을 그토록 편애하고 방임하는 결과로 나타났으리라는 것이 한씨의 분석이다.
정재호는 '차지철 의원이 경호실장으로 임명됐을 땐 적임자란 평이 지배적이었다'고 했다.
'국회의원으로서 차지철은 처음엔 공수단 출신의 혈기방장하고 와일드한 젊은이란 인상을 주었다.
그가 변신하게 된 계기는 국회내의 폭행 사태로 언론의 뭇매를 얻어맞고 부터였다. 근신하고 조심하는 자세로 돌변,
사람이 갑자기 달라진 듯했다. 그때쯤 전직 국회의원의 딸과 결혼식을 조용하게 올렸는데 몇 달 뒤 외간남자 문제로 이혼을 해버렸다.
이 사건으로 차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 친한 기자에게 울면서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
이 충격도 차를 인간적으로 성숙시킨 듯했다. 낡은 코트, 모자, 구두를 신고 외모에는 무관심한 듯 자신의 수양에만
진력하는 듯했다. 내무위원장으로서는 사회를 아주 공평하게 봐 야당의원들도 좋아했다. 그는 결백증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돈에 대해서도 깨끗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았을 때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가 그 증거가 아니었던가,
꼭 절간에 사는 것 같아서…
1975년 5월 21일 박대통령과 단독회담을 했던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은 그 9년 뒤 기자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박대통령과 나는 배석 없이 집무실인가, 넓은 방에 단 둘이 앉았읍니다. '사모님께서 불의의 변을 당하셔서 무어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읍니다'라고 내가 먼저 정중히 인사를 했지요. 박대통령의 눈에 한 순간 눈물이 맺혔읍니다.
박대통령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어요. '인사를 해줘 고맙습니다. 제 처가 죽고 난 뒤부터 꼭 절간에서
혼자 사는 것 같습니다.' 박대통령은 창밖의 단풍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를 바라보며 '이렇게 큰 집에서 혼자 사는 것이……'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어요.'
이때 김총재는 대통령이 측은하게 느껴지더라고 했다. 김총재는 공식 연회석상에서 육영수를 몇 번 만난 적밖에 없었다.
육영수는 '김총재님,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라고 말을 건네곤 했는데, 김총재는 퍽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파묻힌 박대통령을 심기일전시키려고 애쓴 사람들도 많았다. 박대통령은 주위에서 재혼을 권하면 쑥스러운 듯
씩 웃기만 했다고 한다. '지만(志晩)이가 장가든 다음에나……' 하면서 말을 피하기도 했다. '각하께선 수줍음을 잘 타시는
분이기도 했읍니다. 재혼 이야기만 나오면 그런 표정입디다.'(모 비서관의 얘기) 대통령 측근일수록 육여사의 죽음이 박대통령의
말기 통치에 결정타를 가했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박대통령이 재혼을 했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내라는 기둥이 뽑혀나간 집안에서 대통령의 자기 통제력은 서서히 약화되고 있었다.
대통령의 쓸쓸함을 달래려고 주위에서 고안한 '궁정동'은 그런 약화 현상을 부채질했을 뿐이었다.
박대통령은 다른 사람의 여자 문제에도 퍽 관대했다.
1974년에 야당의 당수 후보가 유부녀와 통정, 그 여자가 이혼을 당한 적이 있었다.
이 여자는 지방에 내려간 당수 후보를 여관까지 찾아가 '같이 살자'고 매달렸다.
당수 후보는 급한 김에 벽에 걸어둔 달력을 찢어 뒤에다가 서약서를 써주었다.
모 기관에서 이 서약서를 입수, 박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당장 태워버려라'고 지시했다.
청와대의 라스푸틴?
육영수 대신에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떠맡고 나선 것은 큰딸 박근혜(朴槿惠)였다.
20대 초반이던 박양은 박-카터 정상회담 뒤의 만찬 등 모든 공식행사에 대통령과 함께 나갔다.
그는 1976년 4월 구국여성봉사단을 만들어 최태민이란 사람을 총재로 앉혀 충·효·예의 실천운동을 벌였다.
최태민은 의혹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묘하다. 최태민은 1975년 1월께 박근혜 앞으로 편지를 썼다.
'어젯밤 꿈에 국모님(필자 주 : 육영수를 가리킴)을 뵈었읍니다.
국모님 말씀이 내 딸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이었읍니다…….' 이런 요지의 야담 같은 내용이었다.
근혜양의 비서실에서 이 편지를 넣어준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박근혜는 편지를 다 읽고는 직접 최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렇게 해서 최태민을 만난 근혜양은 단박에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때 70대 노인인 최태민은 늙은 아내와 장성한 여러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도 얼굴의 피부가 팽팽한 동안이었다.
몸집은 작으면서도 다부져 보였다. 최태민이 쉽사리 근혜양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데 대해,
최씨가 최면술과 심령술에 도통한 사람이라는 설도 있었다.
박근혜가 최초의 사회활동(구국여성봉사단)을 하게 된 계기는 최태민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1975년 2월 박근혜는 친면 있는 치안본부의 고위간부에게 최태민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 간부가 최태민을 만나러 갔더니, 최씨는 당황한 모습으로 '죽을 죄를 지었읍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간부가 근혜양의 부탁으로 왔다고 했더니 최씨는 갑자기 거만해졌다. 이 간부는 뒷조사를 시켰다.
최씨가 자유당 시절에 경찰관을 지냈다는 것, 정규과정을 밟은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 등 불미스러운 점들이 드러났다.
이 간부는 직접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이 정보를 근혜양에게 알려주고, 주의를 주었다.
박대통령은 으례 그러듯 '누가 그러더라'는 식으로 정보의 소스를 밝혔다.
발끈한 박근혜는 치안본부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섭섭해하였다.
이 간부는 그뒤로 박대통령과 근혜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근혜에게 최태민과의 관계를 끊도록 건의한 비서 3명도 그만두었다.
근혜는 최태민을 직접 불러들여 만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최태민이 추천한 김모씨가 근혜의 비서가 되었다.
1978년 김재규(金載圭) 정보부장은 구국여성봉사단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최태민의 비행을 검사 출신인 백광현(白光鉉)
안전국장에게 조사시켰다. 박승규(朴升圭) 민정수석비서관이 여러 차례 비행보고를 대통령에게 올렸는데도 먹혀들지 않아
그가 나섰다는 것이다.
최씨가 여러 재벌 총수들이 구국봉사단에 기탁한 수십억 원을 횡령한 사실, 여비서들과의 불륜 등이 드러났다.
김재규 부장이 이 조사 결과를 보고하자 박대통령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확인작업을 벌였다.
옛 임금의 친국을 연상시키는 방식이었다. 대통령은 한쪽에 김재규 부장·백광현 국장, 그 반대편에 박근혜·최태민을 앉히고
직접 신문하기 시작했다. 먼저 김·백 두 사람에게 최씨의 비행을 보고하게 했다.
대통령은 딸과 최씨에게 '이게 맞느냐?'고 물었다. 딸은 울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최씨는 '고문을 당해서 허위 자백을 했다'고 했다. 판단이 서지 않았는지 대통령은 검찰에 또 수사를 지시했다.
검찰의 조사 결과도 김부장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나 최태민은 구국봉사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 그는 명예총재로 뒤로 물러난 것 같았지만 총재가 된 박근혜에게 계속 영향을 끼쳤다.
김재규는 박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10·26뒤 강신옥(姜信玉)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
'각하, 일본도 보십시오. 큰영애는 적십자사 같은 데나 관여하도록 해야지 이런 데서는 손을 떼게 해야 합니다
.' 박근혜는 울면서 김부장에게 '왜 남의 프라이버시 문제까지 조사하느냐'고 항의했다. 김부장은 박양의 수첩까지 압수하여
공정하게 조사했고 '돈이 필요하면 내가 주겠다'면서 제발 손을 떼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명예총재로 물러나서도 구국여성봉사단에 대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최태민에게 집요한 관심을 두었다.
1979년 5월에 '최목사가 계속해서 대통령 큰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그 자는 백해무익한 놈이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할 놈이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5·17 직후 계엄사에서는 최태민을 붙들어가 부정사실과
축재사실을 확인했으나 대통령의 가족에 대한 배려에서 잘 봐주었다고 한다. 김재규의 범행 동기를 수사한 한 관계자는
'김부장은 이 사건 처리로 대통령에 대해 실망했고, 존경심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시해 동기의 하나다'고 했다.
박정희가 큰딸을 싸고 돈 것은 그의 정신에서 일어나고 있던 큰 변화의 한 표출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뒤 혈족의 이권 개입을, 너무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철저히 막아왔다는 것은 유명하다.
누님 집에 경호원을 배치, 찾아오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고하게 했고, 수사기관을 시켜 친족을 자처하는 이들을 전국적으로
조사, 혼을 내주기도 했었다. 국회의원 후보로 나온 친척을 강제 사퇴시킨 적도 있었다. 그런 박대통령이 육여사의 사망 뒤로는
자기 자녀들마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나약한 면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없는 자식들에 대해 느꼈을
측은함이 박대통령을 감상적으로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박정희는 아들 지만이 말썽을 부리고 다니는 것을 알고는, 직접 막대기로 아들을 수십 번이나 때리며
'대통령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너하고 나하고 같이 죽자'고 오열한 적도 있다는 것이, 당시 청와대 측근 인사의 말이다.
김재규는 10·26뒤 강신옥 변호사와의 옥중 면담에서 박지만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지만군이 육사에 재학중에 무단외출을
하여 ㄷ재벌 총수 아들과 함께 여자들과 어울려 다닌 것을 육사교장이 알고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이었다.
김재규는 대통령에게 '군을 위해서도 퇴교시켜 유학을 보내도록 합시다'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어머니가 없어서 그놈이 잔정을 받지 못해 그러는 모양이다'면서 아들을 직접 혼내주더라는 것이 김재규의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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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조갑제 닷컴에 실린 유고(1)-인간 박정희의 변모(1)를 옮겨온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