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지 못할 첫경험, 벽소령의 별 밤의 추억
1. 일자: 2017. 8. 4~5 (금/토)
2. 장소: 지리산
3. 행로 / 시간
[8월 4일: 음정차량통제소(05:20, 750m, 벽소령 5.5km) -> 연하천 갈림(16:18, 벽소령 2.6km, 연하천 3.2km) -> 작전도로 갈림(17:25, 벽소령 0.3km) -> 벽소령 대피소(17:35).
8월 5일: 벽소령 대피소(04:30, 세석 6.3km) -> 선비샘(05:28) -> 전망바위(06:15~47) -> 칠선봉(07:03, 1558m, 세석 1.9km) -> 세석대피소(08:13~09:50) -> 한신계곡 입구(09:55, 백무동 6.5km) -> (험로 1.5km) -> (한신폭포, 오층폭포) -> 가내소폭포(11:36) -> 첫나들이폭포(11:54, 백무동 1.7km) -> 백무동 주차장(12:30)]
4. 동행: 유박사, 다리, 옥혜, 행진, 아카, 명동
< 벽소령 별밤 산행을 준비하여 >
지난 7월 288 정기산행에서 8월은 지리산 대피소에서 하룻밤 묵는 힐링 여행을 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처음엔 여름 휴가 성수기에 과연 대피소 예약이 가능할까? 하며 성사에 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행진, 아이넷과 화엄사~피아골 고난의 행군을 다녀온 후 일이 급진전 된다. 행진이 행동에 나선다. 밴드에 의견수렴 공지를 올리더니, 7월 17일, 난 예약을 해야 하는지도 잊었는데 벽소령 대피소 예약을 독려하는 글을 올린다. 정성에 감응하여 국립공원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 4 좌석 예약을 추가한다. 단체가 일을 도모할 때 앞서 행동하는 이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한다.
많은 이들의 참석을 기대했건만 휴가철 금요일 출발이라 그런지 출석률이 저조하다. 갈팡질팡 끝에 최종 6명으로 확정되었고, 버스 차편 예약을 마치고 준비물 분담도 대충 마친다. 그 와중에 옥혜님과 행진님은 화대종주 꿈에 부풀어 있다.
여정의 대강을 살핀다. 첫날 버스 타고 마천에서 내려 택시로 이동 후 음정~벽소령 7km를 한낮 더위를 이겨가며 진득이 올라야 한다. 맑은 날씨가 예상돼 힘겨운 벽소령 행이 될 것 같다. 벽소령에 도착하여 먼저 와 있을 화대 종주 팀과 합류하여 낭만적인 밤을 보내고, 이튿날 새벽 벽소령을 출발 세석에 도착하여 아침 해 먹고 한신계곡으로 하산할 계획이다. 음정~벽소령, 벽소령~세석, 한신계곡이 각각 6.5km 남짓이다. 총 산행거리는 20km 정도로 넉넉잡아 9시간을 예상한다. 1박 산행이니만큼 시간과 거리의 부담은 없다.
오늘 산행의 키워드는 벽소령이다. 노고단~천왕봉 중간 지점에 위치한 고개로 높이 1350m, 옛날 함양 마천면과 하동 화개면을 이어주던 교통 요지다. 벽소령의 달 풍경은 지리 10경 중 하나로 겹겹이 쌓인 산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희다 못해 푸른빛을 띤다 하여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 한다. 벽소령의 밤이 기대된다.
마천 택시 기사에게 전화해 버스가 내리면 음정까지 데려다 달라고 예약을 하는 것으로 산행 준비를 마친다.
< 희망사항 >
참가자 카톡방을 만들며 별칭을‘벽소령 별 밤’이라 했다. 벽소한월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여름 밤이라 왠지 달보다는 별이 더 낭만적일 듯하여 명명했다. (달력을 보고 금요일이 음력 13일 임을 알고는 은근히 달밤에 대한 기대도 크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지리산 대피소에서 자는 게 말이다. 수영 박태환 선수가 런던 올림픽에서 메달 따던 날이니 벌써 5년 전이다. 새벽, 해발 1500미터가 넘는 새석대피소에서 생중계로 올림픽 방송을 본다는 것 자체가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다. 당시 이른 저녁 먹고 멀뚱하게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 일찍 잠자리에 들며, 혼자 대피소에 자는 건 할 짓이 못 된다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다. 든든한 동지들이 5명이나 함께 한다. 게다가 푸짐한 저녁식사도 준비돼 있다. 그야말로‘산장에서 별 헤는 낭만적인 밤’이 기대된다. 마음에 커다란 풍성이 달린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산행 당일 평소와는 영 다른 시간, 늦은 아침 배낭을 꾸린다. 코펠 버너에 장어, 새우까지 넣고 나니 배낭에 틈이 없다. 대피소와 시외버스 예약과 취소의 번거로움, 배낭 무게와의 싸움, 준비물 분담, 게다가 무더위와 숨 막히는 습기……. 정상적 생각으론 설명하기 어려운 고행의 길을 나서며 마음을 다잡는다. 동행이 늘었으니 기쁜 일이고, 날이 맑다는 건 그만큼 밤 하늘이 화려할 거라는 희망 메시지이고, 배낭 무게에 비례해 저녁 식탁이 푸짐해지리라. 늘 그렇듯, 가 보지 않은 길을 걷고 나면 조금 더 성장해 있으리란 믿음을 안고 집을 나선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 마천 가는 길에 >
동서울터미널에서 다리님, 아카님과 커피 한 잔 들고 지리산행 버스에 오른다. 맨 앞자리 질주하는 차 창으로 보이는 시원한 풍경이 좋다. 차 안에서 본 바깥은 삼복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도로에 아지랑이가 피어 오른다. 날씨도 내 마음도, 모든 게 푸르다.
두 여성동지들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내내 대화 삼매경이다.
함양에서 고속도로를 빠져 나온다. 함양, 인월, 실상사를 거쳐 마천에 도착한다. 예전 대간 11기 따라 나섰다 뱀사골로 내려와 식사를 하던 식당 앞이 마천정거장이었다. 전화로 예약한 택시가 마중 나와 있었다. 먹을 게 부족하다는 종주팀의 연락을 받고 라면 몇 봉지를 더 산다. 지금쯤 벽소령에 도착해 쉬고 있을 게다.
택시로 일반 차가 올라가 수 있는 맨 위쪽까지 간다. 덕분에 시작 고도 750m, 벽소령까지 남은 거리는 5.5km다. 순식간에 고도 150m, 거리 1.2km를 단축했다. 속된 말로 거저 먹었다. 무더위 속 큰 힘이 되어 준다.
< 음정~벽소령 >
햇빛 막이 스카프를 한 두 여인을 호위하며 벽소령을 향한다. 벽소령까지 내 역할은 호위무사다. 근데 무사보다 주인이 더 힘이 세 보인다. ㅎㅎ
마천에서 잠시 차에서 내렸을 때 숨막히는 더위와 습기를 맛 본지라, 지레 겁 먹었으나 그늘진 숲에 들어서니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널찍한 작전도로를 천천히 오른다. 먼저 산행을 시작해 벽소령에 도착해 있을 종주 팀의 동태를 예측하고, 산행에 대한 기대를 이야기한다. 대피소에서의 첫 밤이 기대된다는 아카님의 말에 다리님은‘첫 경험, 그거 별로 인지 알잖아!’하고 되받아 친다. 내게도 누군가와 함께 산장 (대피소보다 훨씬 낭만적인 말이다.)에서 자는 건 처음이다. 기대가 크다. ^^
잔 돌이 깔린, 녹음이 우거진 벽소령 길은 생각보다 낭만적이다. 진한 녹색의 숲을 두런두런 담소하며 걷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이다. 걷기 시작 40분 만에 2km를 왔다. 벽소령까지 남은 거리는 3.5km, 잠시 숨을 고른다. 초반 행보가 무척 빠르다. 하늘에 구름이 인다. 덕분에 그늘이 더 짙게 드리운다. 두 번 걸은 음정~벽소령 길. 대간 초반 무척 힘겹게 내려온 기억과, 혼자 보충하며 가을의 낭만을 즐기며 내려오던 행복한 기억이 교차한다. 오늘은 오름 길인데도 여유가 있다. 산행은 역시 언제 누구와 걷느냐가 중요한가 보다.
< 음정 들머리 두 여인 / 벽소령 둥근이질풀 >
연하천 갈림에 선다. 음정~연하천 길은 비탐구간인지 알았는데 탐방로가 개방돼 있다. 가지 않는 길에 욕심이 인다. 언젠진 모를 그날을 꿈꿔본다. 잠시 쉬어 간다. 다리님의 빵과 아카님의 사과를 나눠 먹는다. 꿀 맛이다. 나머지 오름에 큰 에너지가 돼준다.
힘들이지 않고 걸어도 고도는 빠르게 상승한다. 좌측으로 시야가 확 트인다. 어느덧 작전도로가 끝난다. 고도는 1300미터에 육박하고 이제 벽소령까지는 0.3km 거리만 남았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마중은 없었다. 남자 셋이 하는 일이 다 그렀지 뭐! 버너도 망가지고, 먹은 것도 없다고 라면 사오라 하더니만, 일찍 와 할 일도 없을 텐데…. 두 여인의 불만 섞인 말이 잦아진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된다. 밤을 버스에서 보내고, 무더위에 오래 걸었으니 피곤도 하겠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벽소령 목책이 보인다. 동자꽃과 둥근이질풀이 산장 도착을 알린다. 옥혜님과 행진님이 우릴 보고 반갑게 뛰어온다. 17:35, 생각보다 너무 쉽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햇살은 쏟아지지만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먼 길 돌아 내 집에 돌아온 느낌이다. 깨끗하게 청소된 식탁이 288을 기다리고 있었다.
< 벽소령 별 밤 >
배낭을 푼다. 새로 장만한 작은 버너가 제일 인기다. 각자 준비한 음식들이 식탁 위로 올려진다. 푸짐하다. 상추에 잘 익은 김치 게다가 장아찌까지, 식탁이 비좁다. 장어가 익어가는 사이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마신다.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종주팀은 먹을게 부족한데다 버너까지 망가져 고생했다 한다. 고기가 구워지고 소주 잔이 부딪힌다. 산에서 소주는 금이다. 소중한 거, 아껴 먹어야 한다. 비어 있던 인근 테이블에 산꾼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작자의 음식들이 요리된다. 물물교환이 일어난다. 라면에 햄에 항정살까지 색다른 음식들을 맛본다.
배에 음식이 들어가니 여유가 생긴다. 벽소령까지 여정의 에피소드를 나누며, 다음 산행지에 대한 의견들이 교환된다. 좋은 음식 앞에 두고서도 산꾼들의 화제는 늘 산이다. 행복감에 젖는다. 출발 전 기대보다 현실이 훨씬 훌륭하다. 맛난 음식, 웃고 떠들어도 눈치 볼 거 없고, 맑은 하늘에 뭉개 구름이 두둥실, 한 잔 소주가 곁들여져 흥이 더욱 난다. 새우도 한 판 구워 먹고, 대패 삼겹살이 불 판에 올라온다. 상추쌈에 구기 한 점 올리고, 양파 초절임과 쌈장을 올리고 소주 한 잔 곁들여 먹는 기분은 천하를 얻는 느낌이다.
내가 준비한 석쇠는 음식 담는 그릇으로 용도가 바뀐다. 그거 사려 두 번이나 마트에 갔는데…. 애써 준비한 호일도 무용지물이 된다. 대신 작은 버너는 인기 만점이다. 먹성들이 대단하다. 남은 고기에 김치 볶음밥이 만들어지고 햄까지 구워진다. 오늘은 식사량의 끝은 없다.
< 벽소령 저녁 1 >
술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낸다. 처음엔 아카님이 소주에 물을 타 먹었는데 조금 지나니 아껴 먹느라 너도 나도 얼음 소주 칵테일이다. 기분 최고다. 시간이 흐른다. 술이 조금 부족한 게 아쉬웠으나‘과유불급’이다. (덕분에 숙취에 시달리지 않고 맑은 기분으로 다음날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서녘에 해가 진다. 이 역시 볼거리다. 구름 사이로 해가 숨어들더니, 아쉬운 듯 그 붉은 기운이 비집고 나온다. 동녘 하늘에는 달이 하늘에 걸려 있다. 오늘 밤을 밝힐 귀한 존재다.
어둠이 깃든다. 산장의 밤이 찾아 든다. 스틱이 기둥이 되고 랜턴이 스틱 기둥에 걸려 식탁을 훤히 밝힌다. 옥혜님이 귀한 커피를 내린다. 집에서 원두를 갈아와 종이 필터로 걸러낸다. 1350미터 고지 벽소령에 커피 향이 퍼진다. 세상에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일행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벽소령에서의 첫 밤은 이렇게 행복하게 흘러간다.
< 벽소령 저녁 2 >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식탁을 치우고 짐을 안으로 옮긴다. 47번 침상, 내 자리다. 군 훈련병 시절 막사를 연상시킨다. 그래도 고단한 몸이 누울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벌써 코골고 자는 이들이 있다. 조용히 배낭을 두고 밖으로 나온다. 행진님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다. 자! 이제부터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가 펼쳐진다.
평소 어두운 밤에도 선명한 사진을 찍는 이들이 부럽고 신기했다. 그 세계를 행진님이 보여주겠단다. 달이 뜬 방향으로 비탈 돌 위에 걸터앉는다. 13일 달이 휘영청, 그 아래로 흰 구름이 흘러간다. 푸른 하늘에 별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견우, 직녀, 백조가 만드는‘여름의 대삼각형 별’이 선명하다. 조금 더 날이 맑았다면 그 주위를 흐르는 은하수도 목격될 텐데…. 너무 큰 욕심인가 보다. ㅎㅎ
사진이 아니더라도 그저 바라보는 밤 하늘 풍경만으로도 행복감에 젖는다. 보름달이 주는 위력에 새삼 놀란다. 평소 꿈도 꾸지 못했던 신세계가 내 눈앞에 와 있다. 감격 또 감동이다.
행진 PD의 주문에 따른다. 큐 사인이 떨어지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숫자가 헤아려진다. 1, 2, 3…. 어쩔 땐 8까지, 또 어쩔 땐 15까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게다. 무조건 따라 한다. 무언가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고, 나도 분명 그 주인공이다. 이 아니 흥분되겠는가? 장소를 변경한다. 이번엔 바위에 앞에 있고, 그 뒤로 북두칠성이 선명하다. 그 누구의 꿈이었다는 별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완성된다. 이번엔 행진님도 함께 포즈를 취한다. 숫자를 좀 더 길게 헤아려진다.
지금 이 순간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둠이 좀 더 깊어진다. 이슬이 내려앉는다. 또 자리를 옮긴다. 이정표 옆 목책에 앉는다. PD님의 주문에 따라 등장 배우가 바뀐다. 행복한 웃음이 번진다. 따로 또 같이 별과 밤하늘을 배경으로 우리의 흔적을 남긴다. 사진이 웃음까지 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 벽소령 별 밤 1 >
카메라 속 사진을 미리 본다. 어둠 속에서도 인물들의 표정이 살아있다. 행진님의 연출 실력이 빛을 발한다. 독사진까지 보너스로 얻고 별이 빛나는 밤과 이별한다. 저녁까지 붐비는 식탁에는 밤이슬이 내려앉는다. 조용하다. 웬 처자 2명이 행진님의 사진을 보고는 내일 새벽 길을 따라 나서겠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샘에서 물 한 모금 먹고 잠자리에 든다.
뒤척인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코고는 소리에 익숙해질 무렵 선잠이 깬다. 이제 벽소령에서 새벽을 맞이해야겠다.
< 벽소령 별 밤 2 >
< 벽소령~세석 >
어둠 속에서 누군가 배낭을 메고 나간다. 비몽사몽하던 잠이 확 깬다. 시간을 확인한다. 3시 57분, 밖으로 나온다. 약속된 시간이다. 다리님과 아카님도 막 나온다. 다리님이 아카님 옆에 무자비하게 코고는 이 때문에 아카님이 잠을 못 잤을 거란 걱정을 한다. 그 상황을 뜬 눈으로 목격한 다리님 역시 그랬을 게다. ‘산에서니까’란 말로 용서되는 많은 것들이 있나 보다.
이내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하늘을 본다. 깜작 놀란다. 어제보다 더 많은 별이 쏟아진다. 얼마 만에 느끼는 ‘쏟아지는 별 밤’이던가? 샛별 옆으로 겨울 대표 별자리 오리온의 삼태성이 선명하다. 감격스런 하루가 밝았다. 오늘도 어제만큼 좋은 일이 많을지어다. 4시에 보자는 이들은 한밤중인가 보다. 길을 나선다.
배낭은 여전히 묵직하다. 04:30 세석으로 향한다. 랜턴이 어둠을 밝힌다. 작전도로가 연결되는 1km 남짓 지점까지는 수월하게 왔다. 오름이 시작된다. 덕평봉으로 향하는 언덕이다. 성삼재에서 출발해 종주할 때 가장 힘겹게 느껴지는 구간이 바로 여기서부터 세석까지다. 늘 힘에 겹던 길,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아직 힘이 있고, 새벽 서늘한 기운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선비샘까지 힘들이지 않고 걸었다. 어느 순간부터 동녘이 붉게 변한다. 이 새벽 천왕봉에 오른 이들은 일출의 감격을 제대로 맛보았을 게다. 천왕봉과 대청봉에 여러 번 올랐으나 제대로 된 해맞이를 해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선 부러울 따름이다.
아쉬운 대로 선비샘에서 시원한 물 마시며 일출의 감동을 대신한다. 선비샘은 새벽 맑은 정신을 깨우는 차가운 물이 솟구친다. 물 맛이 그만이다. 구름 사이로 여명이 느껴진다. 검은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은 기운에 힘을 얻는다. 어둠을 뚫고 산들이 기지개를 편다. 우리의 산은 높이 솟은 것만이 아니라 여러 겹으로 겹쳐 있다는 개 특이하다. 산이 깊다. 지리의 산은 더욱 깊게 느껴진다.
어둠이 물러가고 새날이 시작되는 의식은 의외로 간단했다.‘세수하고 꿀물 마시고.’흐르는 물에 얼굴을 씻는다. 다리님이 준비한 꿀 물을 나눠 마신다. 힘이 솟는다. 아침부터 호강한다.
< 선비샘에서 맞는 일출 >
날이 훤해졌다. 작은 바위 전망대에 선다. 아직은 빛이 부족하다. 부스스하던 일행들의 얼굴이 훤해진다. 그 심한 코골이 속에서도 다 잘 잤나 보다. 아님, 새벽을 일찍 맞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여유인가 모르겠다. 후자이리라.
< 칠선봉 인근 전망바위 풍경 1 >
06:15, 풍경 안내 입간판이 있는 전망대에 당도했다. 아침 햇살이 찬란하다. 빛이 너무 좋다. 행진 PD님의 연출은 아침에도 이어진다. 바위 위에 올라서 온갖 포즈를 취한다. 멀리 산들이 너울진다. 산과 구름의 경계가 사라진다. 검붉게 시작한 산 그림자는 멀어질수록 진한 녹색 그리로 연한 회색으로 옅어진다. 그 어느 작가가 이런 풍경을 연출할 수 있단 말인가? 어제 벽소령 별 밤도 좋았지만 칠선봉 부근 전망바위의 황홀한 빛의 향연도 최고이다. 모델이 바뀌어 가며 촬영은 길게 이어진다. 하나하나가 모두 작품 수준의 명작 사진들이 양산된다. 왜, 행진님이 PD인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 칠선봉 인근 전망바위 풍경 2>
아침 태양이 봉우리를 넘어 오른다. 이글거리던 빛에 눈이 부시다. 석양 모드로 사진을 찍어본다. 검은 산 넘어 흰구름이 태양빛을 받아 흰빛 산이 된다. 마치 바다 위 포말 마냥 흰 구름이 요동친다. 새벽 길을 나선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에 감격한다.
30분 넘게 사진 찍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7시가 가까워진다. 다시 길을 나선다. 숲에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 칠선봉 인근 전망바위 풍경 3 >
07:03, 칠선봉을 지난다. 세석까지는 1.9km, 진짜배기 험로다. 고도 차는 크지 않으나 오르내림이 잦아 쉬이 지친다. 나리꽃과 모싯대가 깨어나 아침을 맞고 있다. 들꽃에게도 아침의 싱그러움이 묻어난다. 머리 들어 숲 위를 바라본다. 아침 햇살이 숲을 뚫고 들어온다. 녹음(綠陰)이란 말뜻이 실감날 정도로 녹색의 어둠이 짙다.
긴 나무계단이 시작된다. 영신봉으로 향하는 마지막 난코스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묵직해져 온다. 계단 끝에 올라선다. 하늘을 본다. 깜작 놀란다. 멀리 옅은 코발트색 운무가 감지된다. 산과 하늘이 합쳐져 대양(大洋)이 된다. 푸른 색감이 은은해 감동적이다. 인공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연한 푸르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 지그시 멀리를 바라본다. 오늘은 감동이 참 많은 날이다. 그 옆으로는 남성적인 골격미가 물씬 풍기는 산맥들이 흘러간다. 이 역시 먼 하늘은 연한 코발트 빛이다. 참 좋다.
< 영신봉 전 나무 계단에서 본 운무 >
영신봉에 올라선다. 고도가 1600미터를 훌쩍 넘는다. 여기서부터 세석까지는 꽃 길이다. 평탄한 등로를 따라 들꽃이 지천이다. 동자꽃은 주홍빛으로 시선을 붙잡지만 꽃잎이 성한 게 드물다. 비비추도 잎이 축 처져 있다. 반면 구절초와 원추리는 제철이 아니건만 싱싱하다. 꽃 보는 재미에 빠져들다 보니 어느덧 세석대피소다. 숙박객들이 떠난 산장은 고요하다. 벽소령에서 3시간 40분이 넘게 걸렸다. 당초 장터목에서 백무동으로 하산하려던 계획을 한신계곡으로 변경한다. 여유롭게 여겼던 시간이 더 이상 넉넉하지 않다.
< 세석의 들꽃 >
대피소 벤치에 앉는다. 늦은 아침 식탁이 차려진다. 주 메뉴는 라면, 김치를 겹들인 라면은 제 맛이다. 남은 새우까지 구워 먹고 나니 10시가 가까워온다. 밥 해 먹는데 이리 시간이 많이 흐를 줄 몰랐다. 설거지 하고 식수를 보충한다. 햇살을 피해 얼른 한신계곡으로 향하는 응달로 들어선다.
< 세석~한신계곡 >
일반적으로 세석~첫나들이폭포까지를 한신계곡이라 하고, 그 아래를 백무동계곡이라 한다. 오름 길 4시간 반, 내림 길로 3시간 반을 잡는 험로다. 여름 가뭄이 심해 계곡 물이 말랐다는 기사를 접한지라 큰 기대 않고 세석을 내려선다.
예상대로 하산 초입은 거칠다. 몇 해 전 수해로 망가진 길을 복구했는데 그래도 이젠 거친 돌들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10시가 지난다. 13:30분 차를 예매한 터라 서두른다. 다행히 앞장 선 아카님이 속도를 내어 준다. 응달에 서니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 2km 지점인 한신폭포까지만 내려서면 길이 순해지므로 힘을 내 본다. 그쯤에서 탁족이나 하고 갈 생각이다.
1.5km를 내려오니 계곡의 물소리가 들린다. 한신계곡은 역시 이정표가 없다. 다만 주위에 물이 많아지는 걸 보며 존재를 추측한다. 한 시간쯤 내려왔나 보다. 등로가 순해진다. 물소리가 거칠다. 곳곳에 폭포가 산재해 있다. 생각 외로 수량이 풍부하다. 다리를 여럿 건넌다. 예전보다 등로가 잘 정비돼 있다. 3시간이면 충분히 내려갈 수 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쉴 곳을 찾는다. 다리 밑에 멈추어 선다. 유박사님과 다리님이 물에 뛰어든다. 난 좀 더 가서 씻을 요량으로 세수만 한다. 얼굴에 물이 닿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시원하다.
11:35, 가내소 폭포에 도착했다. 전망대까지 갖춘 한신계곡 최고의 명소다. 이곳에서 지류가 갈라져 한신지계곡을 따라 오르면 장터목까지 갈 수 있다. 세석 출발 100분만에 4km를 걸었다. 혹시나 해서 긴장을 하며 걸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시간은 충분하다. 이내 첫나들이폭포에 도착한다. 길은 행락객들이 다닐 정도로 넓어진다. 문제가 생겼다. 알탕을 하려 하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 계곡과는 점점 멀어진다. 조금 더 좀더 하다가 실기했나 보다. 어느덧 백무동 야영장까지 와 버렸다. 다행히 야영장 입구에 물이 흐른다. 등목을 하고 윗옷을 갈아 입는다. 살 것 같다. (상가지역으로 내려오다 보니 샤워 2천원 팻말이 보인다. 예전에도 보고 아쉬워했는데 오늘 역시 편히 샤워할 기회를 놓쳤다.)
< 한신폭포 인근 / 가내소 폭포 >
버스 승차장에 도착해 예매한 표를 찾는다. 시간은 1시간쯤 남는다. 괜히 서둘렀나 보다. 그래도 짐 챙기고 옷 갈아 입고 하는 사이 어느덧 버스에 오를 시간이다.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당겼으나 다음을 기약한다. 찌는 듯한 더위에 버스 안 에어컨 바람이 그립다.
< 에필로그 >
곤히 잤다. 일어나 보니 발목과 종아리 부근이 벌겋게 부풀어 올라있다. 모기물린 자국, 지난 벽소령 별 밤의 훈장이다. 어제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카톡에 사진들이 올라와 있다. 어제 밤에도 늦게까지 본 사진을 이른 아침 보고 또 본다. 행진님 사진은 압권이다. 특히 벽소령 별 밤 사진과 이른 아침 세석 가는 길 전망바위에서의 사진은 예술이다. 그가 왜 PD 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사진이 어제의 감동을 고스란히 다시 가져온다. 행복한 미소가 다시 번진다. 과정을 힘들진 몰라도 지나고 나면 다 좋은 추억이 되는 게 등산의 또 하나의 매력이다,
몸이 기분 좋은 노곤함에 빠져 든다. 여럿이 함께 하는 산행, 모든 게 내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많은 걸 새로 경험한 값진 날이었다. 예상외로 편했던 음정~벽소령 길, 황홀한 벽소령의 밤, (사실 초저녁 뜬 달을 보고는 우리 밤 주인공은 달이라 여겼는데, 밤이 깊자 이내 주인공이 바뀐다. 찬란한 여름 밤하늘 무수히 많은 별의 기세에 달은 초라해졌다.) 풍성한 음식들, 흥겨운 대화, 모자란 듯 한 소주의 아쉬움까지…. 오래 기억될 소중한 추억을 얻었다.
‘첫 경험, 그거 별로 인지 알잖아!’에서 ‘첫 경험, 그거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하면 참 즐거운 일이여!’로 바뀐다.^&^
첫댓글 황홀한 첫경험
애써 준비하고 추진하시고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다른 첫경험을 맞을 설레임으로 오늘도 힘이 솟아납니다~~~
함께해 즐거웠습니다.
다음도 기대됩니다^^
게으른 내가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것은 감동이. 산 맛은 님의 글을 봐야.
글로나 소식 전하는 사이가 되었네. 벽소령 좋았어. 다음엔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