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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元杜尤)
이상규
한국에 온 첫 장로교 목사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e G. Underwood, 1859-1916). 그에 대한 수식어는 다양하다. 한국선교의 초석을 놓은 인물, 한국교회의 건설자,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4대 째 한국에서 일한 선교사 가정. 알렌(Horace Allen)에 이어 두 번째로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게 한 초석을 놓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열정적인 인물로서 많은 업적을 쌓았고, 한국인의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는 인물로 남아 있다. 윤치호는 그의 영문일기에서 언더우드는 “도량이 넓고 활동적인 인물이라”(Dr Underwood is a large-hearted and a hard-working man)고 평가했다. 민경배 교수는 그를 가리켜 “청사(靑史)에 빛날 업적을 남긴 분이라고 평가했다. 언더우드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새삼스럽지가 않다.
출생, 가정배경, 초기 교육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존(John Underwood)과 엘리자벳(Elisabeth Grant Marie)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언더우드의 나이 5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계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언더우드는 집 근처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10살 때는 한살 위의 형 프레데릭과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가 캐톨릭교회가 경영하던 기숙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는 사업실패로 가산을 잃게 되자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언더우드는 2년간 프랑스생활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왔고, 13세 되던 때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영국에 있을 때 부모들은 회중교회에 속한 신자였으나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저지주 뉴 더함(New Durham)에 정착하면서 화란개혁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저지(Jersey)시에 있는 남자학교(Hasbrook Seminary for Boys)에서 공부하고 1877년 뉴욕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1881년 뉴욕 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 주에 있는 뉴 브른스위크(New Brunswick)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화란 개혁파 교회의 신학교(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로서 일본 개척 선교사 페어벡 등 유명한 선교사들을 배출한 신학교였다. 언더우드는 1884년 동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교회의 목사로 장립 받았다.
언더우드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선교사가 되고자 했다. 신학교재학 시절에는 인도 선교를 지망하고 그것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소식을 접한 이후 언더우드는 “너 자신은 못 가느냐?” 는 도전을 받고 한국 선교를 결정했다고 한다. 언더우드는 북장로교 선교부의 엘린우드에 의해 한국선교사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즉 그는 1884년 7월 28일 한국의 첫 목사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임명을 받았다.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그해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1885년 1월 25일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일본에서는 선배 선교사인 헤펀(I. C. Hepburn)박사 집에 머물면서 한국선교에 대한 준비를 갖추면서 이수정 으로부터 한국말을 배울 수 있었다.
언더우드가 한국 서울에 도착한 날은 1885년 4월 5일이었다. 그는 미국을 떠난 지 5개월만에 제물포로 입국한 것이다. 이날이 마침 부활절이었다고 한다. 이날 언더우드는 북감리회 파송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와 함께 입국함으로서 내한한 최초의 장로교 목사 선교사가 된 것이다. 입국하면서 아펜젤러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 하나님의 자녀인 이 백성에게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 언더우드는 미혼이었으나 아펜젤러는 결혼한 부부였는데 당시 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임신 중인 외국인 여성이 한국에서 거주하는 것에 적절치 못하다고 보아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가 지내다가 그해 6월 다시 내한하였다.
한국에서의 사역
내한한 언더우드에게 가장 시급함 문제는 한국어의 습득이었다. 그러나 이 일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 한국의 현실적 요청 때문에 언어공부에만 전력할 수 없었던 점은 초기 선교사들의 공통적인 난제였다. 우선 언더우드는 광혜원(廣惠院)에서 제약사(dispenser)로 일하면서 병원일을 도왔다. 제중원에 의학교가 시작되자 언더우드는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한국정부가 볼 때 언더우드의 신분은 교사였다. 목사인 그가 자연과학을 가르쳤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뉴욕대학 재학 중에 언더우드는 자연과학을 공부하였으므로 당시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학교 설립은 언더우드의 중요한 기여였다. 처음에는 고아원 형태로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 때가 1886년이었다. 그해 1월부터 고아원 설립에 대한 구상을 했는데, 고아나 극빈자 아동들을 수용해서 기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기술학교 형태를 구상했다. 이것이 소위 ‘언더우드학당’이라고도 불리는 고아원 학교의 시작이었다. 이 학교는 ‘예수교 학당,’ ‘민로아 학당’, 혹은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다가, 1905년에는 경신학당으로 정착하여 오늘의 경신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1915년에는 서울에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가 후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언더우드는 순회전도자였다. 초기 선교사들의 공통적인 선교방식이 순회 혹은 순행전도였는데 언더우드는 이를 통해 전도의 씨를 뿌리고 한국의 자연과 지리를 익혀가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서울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그것이 새문안교회였다. 즉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집에서 한국인 14명이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새문안 교회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1889년에는 성교서회(聖敎書會), 곧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립하였고,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역임하며 성서의 번역사업을 주관했다. 1890년에는 「한영문법」과 「한어사전」(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5년간 작업한 결실이었다.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그가 한 일은 수없이 많지만 성경번역은 그의 가장 큰 공헌이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헤펀(J. C. Hepurn)박사의 조언을 듣고 1887년 2월 성경번역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때부터 한국성경 역간을 위해 노력하였다. 물론 헤론, 스크랜톤, 게일, 레이놀즈 등의 협력을 얻었지만 이런 봉사의 결과로 1905년 5월에는 신약성경이 역간되었고, 1910년에는 구약번역을 완료하였다. 그래서 1911년에는 구약성경이 역간되어 명실상부한 한국어 성경전서를 갖게 된 것이다. 찬송가 편찬에 있어서 언더우드의 기여도 간과할 수 없는 공헌이다. 1900년에는 기독청년회(YMCA)가 조직되는데, 이 일에도 언더우드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선교사들의 수고와 한국인들의 봉사로 교회가 설립되고 치리회가 조직되었는데, 1912년에는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었다. 언더우드는 첫 총회장으로 피임되었다. 이것은 그간의 봉사에 대한 예우적 의미도 없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한국 개화기에 종교·정치·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고, 저술을 통해서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남긴 「한국선교 23년」(For Twenty-three Years, a Missionary in Korea, 1908)은 초기 선교사역에 대한 소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언더우드는 30세가 되기까지 독신으로 일하다가 1889년 3월 의료선교사로 서울에서 일하고 있던 릴리아스 홀턴(Lillias S. Horton, 好敦)과 결혼했다. 이 때 홀턴은 38세의 노처녀였다. 그녀는 시카고여자의과대학(현재의 노스웨스턴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의사로서 1888년 내한하여 제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후에는 명성황후 시의(侍醫)로 인술을 폈고, 치료받지 못하던 여성들을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언더우드 부부가 신혼여행을 겸해 북부지방, 곧 개성, 솔내, 평양, 강계, 의주, 압록강 주변을 순방하기도 한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홀톤은 필력을 지닌 의사이기도 했는데 3권의 책을 남겼다. 언더우드는 정치적 권한을 가진 행정가라 보다는 선교사로서 활동하였고, 앞서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한국에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교회연합운동가 언더우드
한국에서의 언더우드의 사역에서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은 그의 초교파적인 연합정신이다. 이런 정신은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 얻은 자연스런 결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지만 회중교회적 배경에서 자랐고, 화란개혁파 교회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목사가 되었으나,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고, 감리교 선교사들과 동역한 사실이 그것이다. 그가 한국에서 일한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선교사들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고,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선교사들 간의 협력과 연합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도 서양 선교사들을 각기 다른 교파와 신학을 가진 사람들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다같은 종교를 믿는 외국인들로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파별로 각기 달리 활동한다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했고, 바람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초교파적 연합정신은 언더우드만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전체 선교사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에게는 초교파적인 연합과 협력은 그의 활동에 나타난 중요한 특징임이 분명하다.
그는 1889년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J. H. Davies)와 그의 누나가 입국했을 때 북장로교 선교부와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선교부 간의 연합을 위해 미국과 빅토리아 장로교회 연합선교회(The United Council of Missions of the American and Victorian Churches)를 조직하였다. 호주의 데이비스가 사망하자 이 연합 기구는 해산되지만, 1892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자 다시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 선교부는 1893년 1월, 장로교정치를 채용하는 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게 된다. 이런 조직의 최종목표는 한국에서 단일한 장로교회를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노력은 언더우드의 지도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장로교 선교부 간의 연합만이 아니라 감리교 선교부와도 연합을 추구했다. 1892년에는 선교지역은 분할협정을 맺었고, 비록 선교지역은 구분하되, 지역분할로 이루어진 장감교인들 상호교환을 인정하기도 했다. 또 공동으로 1890년에는 성교서회(聖敎書會)를 설립하였는데, 후일 대한기독교서회로 발전하였다. 성경번역에 있어서도 교파를 떠나 단일 위원회를 구성하고 장,감교회 선교부가 공동으로 이 일을 추진했다. 언더우드는 1887년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번역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아펜젤러, 스크랜톤 등 감리교 선교사들과 동역했다. 특히 언더우드의 연합정신은 교파를 초월한 단일교회 조직에 대한 의지 속에 잘 들러나 있다. 비록 교파나 선교부는 달라도 한국에서는 하나의 교회를 조직하고자 했는데, ‘한국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로 명칭까지 합의했으나 선교사를 파송한 본국교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도 이런 점들은 언더우드가 얼마나 연합을 강조했던가를 알 수 있다. 선교동원가이자 연합운동의 지도자였던 존 모트(John R. Mott)가 언더우드의 장례식에서 읽은 조사에서 언더우드를 “연합운동가”(Unionist)라고 불렀던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언더우드는 복음에 대한 열정이 충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내한 초기부터 순회전도를 통해 전도하려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이 문제 때문에 시기적으로 자제하고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보았던 알렌과 이견을 노출하기도 했고 두 사람간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언더우드는 신혼여행차 의주에 갔을 때인 1889년, 세례 지원자 33명에게 압록강에서 세례를 베푼 일이 있다. 흔히 ‘한국의 요단강 세례'로 알려진 이 세례는 위험한 시도였다. 왜냐하면 이 때까지 공개적인 기독교 세례는 국법이 금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서울의 헤론은 정동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한국인 신앙 공동체를 해산 시키는 조치를 취해 정부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을 피하려고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이 일에 대해서 유동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이러 점들은 언더우드의 복음적인 열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죽음과 그가 남긴 유산들
언더우드는 1885년 내한한 이래 30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일제는 음양으로 선교사업을 탄압했다. 특히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들에게도 일본어를 습득하도록 요구했다. 비록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도 관여했으나 일본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191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규과정 외에도 개인지도를 받으며 매일 9시간씩 일본어를 공부했다. 그러나 이것이 건강을 헤쳐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던 중 그해 10월 12일 애틀랜틱 시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남겼는데 그가 원한경(H. H. Underwood)이었다.
언더우드는 죽어서도 한국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1999년 미국에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묘지공원, 곧 양화진으로 이장되었다.
참고/온누리교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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