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2번지
19세기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묘역이다.
경기도기념물 제48호 흥선대원군 묘이다.
산세가 순하다. 그리고 아담한 백봉(栢峰 589.9m)이다.
한북정맥에서 갈라진 천마지맥으로 마치고개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천마산,
남쪽에는 백봉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산이다. 높이는 낮으나 소나무와 잡목 등
울창한 산림이 우거져 아름다운 산세를 보여주고 있다.
백봉은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과 와부읍 화도읍의 경계를 이룬다.
이 산에 잣나무가 많아서 평내동과 화도읍 쪽에서는 잣봉 또는 잣봉산이라고 한다.
와부읍 쪽에서는 묘적사 위에 있는 산이라고 해서 묘적산(妙寂山)이라고 한다.
이 산의 서쪽 금곡에는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있다. 영친왕의 영원과
덕혜옹주의 묘도 홍유릉 바로 옆에 있다.
금곡에서 백봉을 넘어 마석 쪽으로 달뫼산으로 이어진다. 달뫼산 끝자락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흥선군 이하응을 풍운아라고 했다. 격동의 시대를 이끌어온 이하응이다.
거칠고 힘든 세월을 아슬아슬하게 헤쳐 나갔다. 이하응은 왕손이다. 어려서부터 몸을 몹시 낮췄다.
아주 조심스럽게 살았다. 사람이 모자란 듯 ‘궁도령’ ‘상갓집 개’로 살았다. 그때는 좀 돋보이는 왕손은
외척들의 손에 죽어 나갔다. 그 공격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그는 마침내 둘째 재황을 왕위에 올렸다.
바로 고종의 ‘살아있는 아버지’ 대원군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고 10년간 집정을 했다.
순조 헌종 철종시대를 좌지우지했던 안동 김씨의 외척들과 맞섰다. 노론세력과 대항하여 국정개혁을 단행했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외세에 맞서 조선을 지켰다. 척화(斥和)로 상징하는 대원군의 폐쇄적인 대외정책이다.
그의 외가, 처가도 여흥 민씨이다. 며느리도 여흥 민씨에서 맞았다.
외척으로 왕권을 넘보지 않을 것으로 보고 며느리로 맞은 명성왕후였다.
그 며느리 명성왕후는 흥선대원군과 당당히 맞섰다. 예상 밖의 정적으로 대항하는 며느리 명성왕후와도
힘겨운 권력투쟁을 벌어야 했다. 그는 일본이 며느리 명성왕후를 살해하는 현장에서 그 참상을 지켜봐야 했다.
명성왕후가 끔직하게 살해되고 그 이듬해 부대부인 민씨가 세상을 떠났다. 흥선대원군도 곧 부인의 곁으로
떠났다. 참으로 힘들고 거친 그의 삶이었다.
묘역 입구 왼쪽에 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의 상단에는 <大韓獻懿大院王>라고 새겨져 있다.
신도비에는 총탄 흔적이 여럿 보인다. 그의 묘는 파주에 있었다.
그 파주에서 1950년 한국전쟁을 보냈다. 그때 생긴 총탄 자국으로 곳곳에 상처가 났다.
묘 입구에 예서로 쓰여진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라는 비석이 있다. 바로 대원군의 묘소라는 뜻이다.
묘로 오라가는 계단이다. 소맷돌에는 삼태극 문양을 새겼다. 삼태극은 바로 하늘이니 흥선대원군 묘의 격을 높여준다.
흥선대원군의 묘 흥원이다.
그 묘는 경기도기념물 제48호이다.
봉분은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상석 뒤쪽으로 곡장이 있다.
상석 앞 좌우로는 망주석 문인석 석마(石馬)가 들어섰다.
상석 바로 앞에는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곡장 안 봉분의 좌우에 석양이 한 마리씩 있다.
망주석도 좌우에 두었다.
사각모양의 장명등이다.
상층부에는 모란꽃을 새겼다.
하단에는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난초를 조각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추사 김정희를 존경하고 따랐다.
추사 김정희는 이하응에게 난의 그림과 학문을 가르쳤다.
작가 한승원은 장편소설 <추사>에서 이하응과 추사가
예술과 학문을 통해 서로 존경과 우정을 나누고 있는 장면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한 부문을 옮겼다.
‘하아!’
그 잎사귀를 보는 순간 추사는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다.
그것은 의기와 울분을 감추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이하응의 마음이었다.
그렇다. 절망하고 또 좌절하고 일순간 방황하지만,
그 절망과 좌절과 방황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향해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지
않고 흰 하늘을 향해 죽죽 뻗어나가야 한다. 하늘의 흰빛은 희망이다.
희망은 절망과 좌절을 먹고 산다.
이하응의 난 잎사귀들은 괴석 틈바구니에서 거듭 기어 나와서 하늘을
찌를 듯이 나아가다가 세 번 멈칫거리면서 몸을 외틀고는 허공을 찌르고 있었다.
‘이 사람이 희망인데, 이 사람이 임금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나라가 나라다워질 터인데.......‘-한승원의 장편소설 <추사>에서
장명등의 정면 원형을 통해 흥원의 조산 백봉을 끌어다(借景) 보았다.
망주석 곳곳이 총탄으로 파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당한 총탄 자국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자는 시백(時伯)이고 호는 석파(石坡)이다.
부친 남연군(1788~1836)이 인평대군의 6대 손이었다.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남연군 일가는 영조의 현손으로 종친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남연군의 4남으로 1843년(현종9)에 흥선군으로 봉해졌다.
1865년(고종2)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2남이 즉위하여 고종이 되었다.
흥선군은 대원군에 봉해지고 신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도왔다.
이 시기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쇄국정책을 단행했다.
이후 임오군란(1882)으로 청나라 톈진에서 4년간 유폐되기도 했다.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며느리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그 충격으로 부인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이 1897년에 세상을 떠났다.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1898년 부인을 따라 세상을 하직한다.
그의 묘는 고양 공덕리(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울디자인고등학교)에 처음 썼다.
1907년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리로 천장했다. 파주 흥원 일대에 미군 군사시설이
조성되면서 1966년 현재 위치인 남양주로 또다시 천장한 것이다.
이하응은 왕을 아들로 둔 살아있는 대원군이었다.
막강한 권력을 주무르며 19세기 격동의 조선을 호령하였다.
그 이하응은 쓸쓸하게 외롭게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아들 고종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내가 주상을 보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는 운현궁 노안당 속방에서 맏아들 이재면에게 간청을 하였다.
그러나 맏아들 이재면은 죄를 입을까 두려워 끝내 아뢰지 않았다.
“주상께서 거동하지 않으셨느냐?”
잠시 뒤 이렇게 묻고는 길게 한숨을 쉬고 운명하였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아들 고종을 보고 싶었다.
그 아들 고종은 끝내 임종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장례식에도 불참했다.
소설가 김동인은 그의 책 <운현궁의 봄>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운명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무술(戊戌)년 이월 초이틀이었다.
그날 운현궁(雲峴宮) 안의 공기는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무슨 커다란 수심이 있는 듯이 하인들이 동으로 서로 분주히
왕래하며 구석마다 모여서 무엇이 근심스러운 듯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문득, 안에서 곡성이 울려 나왔다.
“아이고~아이고!”
한 마디에서 시작된 그 곡성은 삽시간에 퍼졌다.
내전, 사랑할 것 없이 그 곡성은 삽시간에 전파되어 온 궁내가
곡성으로 화하였다. 궁 밖으로 모여든 많은 백성들은 궁문 밖에서
근심스러운 얼굴로 손을 읍하고 서 있었다.
궁에서 사람이 나올 때마다 백성들은 무슨 말이라도 나올까 하여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심스러운 소식, 듣기 싫은 소식, 그러나 십중팔구는 반드시 나올
소식을 그들은 겁먹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귀에도
그 궁 안에서 나오는 곡성이 들렸다.
“운명하셨다!”
누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모두들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들의 깨끗한 옷이 더럽힌다 하지 않고 땅에 꿇어앉았다.
“가셨구나!”
“대감 가셨구나!”
궁 안에서 시작된 통곡성은 밖에서도 화창되었다.
이날이 조선 근대의 괴걸(怪傑)이요, 유사 이래 어떤 제왕이든 감히
잡아 보지 못하였던 ‘절대’적 권리를 손에 잡고 이 팔도 삼백여 주를
호령하며 밖으로는 불란서 미국 청국들을 내리누르고, 안으로는 자기의
백성의 복지를 위하여 그의 일생을 바친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
이하응이 별세한 날이다.
조선 오백 년 역사에 있어서 조선을 사랑할 줄 알고 왕가와 서민,
정치와 백성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지위를 참으로 이해한 단 한 사람인
우리의 위인 이하응이 그 일생을 마친 날이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삶은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백암 박은식은 그의 책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업적을 내정개혁과 대외정책으로 나눠 이렇게 평가하였다.
“동주 철벽(銅柱鐵壁) 같이 굳어진 누세(累世)의 온갖 폐풍과 악습을
대원군은 단번에 때려 부쉈으니 그는 진실로 이 나라 정치상의 대혁명가였다.“
“대원군은 아깝게도 외교 지식을 배운 적이 없었으므로 배척을 위주하고 쇄국을
고집하다가 복심의 변란이 터지게 되어 무서운 앙화(殃禍)가 나라에 미치게
되니, 중흥의 기회를 아주 상실하고 말았다.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라 한국통사는
진실로 이에서 시작된다.“
조선을 지극히 사랑하였던 호머 헐버트도 이하응의 인물평을 남겼다.
“석파(대원군의 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항상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해 나아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호머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원 초대 제중원장 알렌의 인물평이다.
“대원군은 잔인하고 배타적이었으나, 항상 자기 나라에 대해 정의와 진실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인들과 손잡고 왕비를 시해할 때까지
그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국민 대부분은 그가 다시 권좌에
오르기 바랐습니다. 최근에 그의 부인(여흥부대부인 민씨)이 사망했는데,
이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의 국무성 보고서에서
이하응은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다.
풍수가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2명의 천자를 배출하는 명당'에
모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풍수지리에도 아주 밝았고 풍수가의 안목도 갖춘 그다.
그의 마지막 영면장소인 흥원 묘역은 좋은 묘 자리는 아닌 곳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곳은 묘자리가 아닙니다. 자, 다함께 잘 살펴봅시다.
용맥(龍脈)이 지나가는 과협(過峽)이잖습니까. 과맥(過脈)에 묘를 쓰면
후손들이 감응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어찌 두 번씩이나 천장(遷葬)을
하였으면서 이런 자리에 모시는가."-풍수학자 윤갑원 교수-
과룡처를 깍아 그럴듯하게 꾸민 자리라는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줄기를 용이라 하고 용이 지나가는 산 능선 위를
과룡처(過龍處)라고 한다. 과룡처는 산맥이 멈추지 않고 지나가기 때문에
땅의 생기가 모이지 않는 곳이다. 풍수지리 옛 책에선 과룡처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3대를 못 간다고 해서 이를 경계한다는 게 풍수가들의 설명이다.
흥선대원군 묘의 왼쪽 날에 흥선대원군 가족묘가 있다.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찾아보기 힘든 납골묘 형태의 가족묘이다.
흥선대원군의 증조부 낙천군 이온 조부 은신군 장남 이재면 손자 이문용
손자 이준용 의친왕의 둘째 아들 이우 이우의 아들 이종이 잠들어 있다.
살아있는 이우의 아들 이청도 가족묘 비에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