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사회운동 및 학생운동(개략적 정리)
1. 80년대 사회운동 및 학생운동은 1980년 봄의 정치적 좌절과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적 사태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사회적 변화에 대한 소시민적 태도와 체계적이지 못한 정치적 감각이 실질적인 변혁의 흐름을 주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회운동의 실천을 지배한 사상은 사회주의였다. 특히 초반에는 정치경제학 및 물질적 기초에 대한 중요성을 자각하고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지배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에 의한 강력한 통제로 대중적인 활동은 불가능했다. 1984년 ‘학원자율화’와 같은 유화정책의 시행으로 공개적인 활동의 공간이 넓어지면서 학생운동의 질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당시 <깃발>이라는 조직은 변혁운동이 경제결정론적 유물론 편향에 빠져있음을 폭로하고 ‘자생성-목적의식성’을 가진 정치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운동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2. 80년대 초반 사회운동에 영향을 준 사상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과 휴머니즘적 마르크시즘이었다. 여기에 한국적 특수성을 이해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대 속에서 ‘종속이론’과 알튀세를 중심으로 한 구조적 마르크스에 기초한 ‘사회구성체론’에 대한 관심이 급속하게 확대되기도 하였다. 80년대 중반 이후 마르크스-레닌 저작의 대량 번역과 학습이 확산되고 그에 의거한 전략전술의 다양성이 세련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노동계급의 헤게모니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흐름과 함께 한국 사회의 ‘계급적 모순’과 함께 ‘민족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3. 진보적 사회사상의 영향과 함께 사회운동의 전술과 조직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군부에 의한 탄압 속에서 대중적이고 변혁적인 사회운동의 공간은 불가능했으며 유일하게 공개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이 한동안 한국 사회의 변혁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8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은 아직 체계적인 운동의 방향이나 전략과 전술에 대한 구체적 제시가 부족하였고 현 정세에 대한 현상적 대응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시기는 본격적인 변혁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초반 대표적인 운동조직은 <무림>과 <학림>이었다. 이들은 시위운동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학원자율화’와 같은 유화정책에 대한 대응에도 견해를 달리했다. 이후 주류 학생운동권이 중심이 된 MC그룹과 선진적 운동권이 중심이 된 MT그룹이 정치적 이슈에 대한 논쟁을 통해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1985년 총선에 대해서도 MC그룹은 운동권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둔 ‘선주체투쟁론’과 대중 활동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주장한 반면에 MT그룹은 ‘제휴투쟁론’과 함께 대중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면서 전위적 선진운동권의 주도성을 강조하였다.
4. 8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은 과학회의 활성화가 시작되었고 대자보 양식이 개발되었으며, 소규모적으로 제기되던 학생운동이 대중적, 공개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 간의 연합활동이 활발하게 모색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본격적인 학생운동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당시 운동을 주도하던 <깃발>이라는 조직에서는 학생운동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①선명한 정치투쟁의 수행 ②민중지원연대의 투쟁 ③전위배출의 주요한 보급로”
5. 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수행된 시기는 86년이다. 특히 구로동맹파업이나 건국대 사태와 같은 사회적 이슈를 통해 이론적으로 좀 더 체계적인 변혁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사회의 민주적 변혁에 대한 일명 ‘C-N-P'논쟁이다. 이들은 운동의 성격, 운동의 주체, 운동의 전략 및 전술 방향에 대한 중점을 달리했다. CDR(시민민주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노선에 가깝고 모순을 해소하는 과정을 반퍄쇼투쟁에서 반외세투쟁의 2단계로 설정했으며 반파쇼단계에서는 중간층이 그 이후 단계에서는 기층민중이 주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NDR(민족민주혁명)은 반외세와 반파쇼의 과제가 통일적으로 해결되는 민족민주운동을 주장했으며 특히 민족적 모순에 중점을 두었다. 기층민중이 주력이며 중간층은 보조역량이어야 하고 우선은 선진적 학생 및 청년이 운동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PDR(민중민주혁명)은 계급적 모순을 중시했고 ’반자본민중해방‘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기층민중이 주요 세력이며 중간층은 동요세력이므로 신뢰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기본적으로 이들 조직은 운동이 반합법적 공개 대중투쟁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였다. 이들 간에 논쟁에서 CDR은 변혁성격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일찍 운동권에서 제외되었고 ND가 주류가 되었다.
6. 8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의 주류는 민족과 계급적 모순을 통합적으로 극복하려는 목표를 가진 NL(민족해방) 세력이 되었다. NL이 보는 한국사회의 성격은 다음과 같았다. “계급적 지배는 곧 미제국주의와 일부 매판세력을 제외한 식민지 전체에 대한 민족적 지배이며 결국 민족적, 계급적 청산은 결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과제로 내세울 것은 민족적 과제의 해결을 위한 전민족의 총단결이다.” 반면 이들과 대응하던 대표적인 조직이 CA(제헌의회) 세력으로 이들은 “(한국사회를) 정치적 독립을 획득한 파쇼 정권의 주도하에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룬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본다. NL진영의 꼭두각시 정권론을 비판하면서 CA진영은 국내독점 자본을 독자적인 물적 토대를 하고 있는 파쇼정권이라는 상대적 자율성론을 펼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NL은 미제국주의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반제투쟁에 중점을 두었고, CA는 ‘권리주체 의식으로의 대중에 대한 정치교육’과 새로운 ‘제헌의회’ 소집을 운동의 목표로 삼았다.
7. 각 운동권의 사상적 관점은 정치적 사건에 대한 다른 견해로 표출되었다. 87년 민주화 혁명 이후 ‘개헌논쟁’과 ‘대선전략’에서도 NL진영은 ‘과도정부론’과 ‘비판적 지지론’을 제기한 반면에 CA 진영은 ‘임시혁명정부론’과 ‘독자후보론(민중후보)’을 주장하였다. CA진영은 NL진영의 과도정부론이 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대리통치’ 세력을 기만적인 ‘민간정부’로 교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민중의 힘과 지배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민주세력만의 정부’는 존재할 수 없는 허상으로 보았다. 반면 NL진영은 CA의 ‘혁명정부론’을 교조주의 좌익맹동주의로 비판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이 선거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무력에 의한 혁명적 방법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임시혁명정부 수립 투쟁론은 객관적 현실을 외면한 조급하고 관념적 주장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8. 하지만 87년 대선을 통한 변혁운동의 추진력을 얻으려는 시도는 노태우의 당선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대선을 둘러싼 분석과 책임 공방을 통해 운동권 세력은 다시 이합집산하게 된다. 특히 CA세력은 NL과 PD로 분열되었고 이후 운동권은 계급적 모순보다는 민족적 모순을 중시하면서 ‘북한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NL 세력과 계급적 모순의 해결에 방점을 두면서 노동자 및 기층민중과의 연대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려는 PD세력으로 양분된다. 전국적인 운동조직도 대선전 운동권을 이끌었던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과 ‘국본(국민운동본부)’이 해체되고 ‘전민련’이 수립된다. 운동권의 분열과 정치 사회의 정세에 대한 분석에 실패했다는 반성에 기초하여 ‘분열을 통한 통합’을 제기하며 시도한 운동조직은 ‘전민련’으로 재조직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운동권의 분열과 논쟁은 더욱 극력하게 진행되었고 결국은 1990년대 초 운동권 몰락이라는 비극적 결과로 끝이 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9. 1980년대 후반 진보적인 학자는 ‘과학에 근거한 대중운동’으로서의 학생운동의 발전과 승리는 필연적이라고 적고 있지만 그것은 어쩌면 공허한 목소리였는지 모른다. 그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86년 이후 학생운동의 사상이론 투쟁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민족과 민중의 온갖 고통, 구속과 예속의 뿌리를 확고하게 인식하였다는 데 있다. 즉 외세와 사대매판세력이야말로 우리가 겪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한국변혁운동 및 조국통일의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과학적 이론과 방법의 출발점이며 애국민주운동의 비약적 발전을 보장하는 기초적 문제에 대한 해결이다.”
첫댓글 - 노동운동, 사회운동, 학생운동........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몸부림인가 아니면 치졸한 한 시대의 신기루였는지....... 시간의 노래라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