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곰한 여름밤
이름: 류광미
과일이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1970년대. 지금은 대구로 편입된 속칭 ‘배방골’ 인근 여섯 동네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 집은 포도 농사를 지었다.
나지막한 포도나무 거친 줄기 사이로 연둣빛 잎사귀가 나오고 새끼손가락 크기인 송이가 열리기 시작하면 엄마는 하루 종일 포도나무 아래에서 살았다. 포도가 익어 갈 무렵, 하루 사이 밭둑 근처에 사다리를 통해 올라가는 원두막이 지어졌다. 지은 집 한 채에 앉아 보이는 밑은 어린 나이로 오르내리기엔 다리가 떨릴 정도로 높았다. 한 번 오르면 무서워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어쩌다가 두 살 위의 오빠와 ‘포도 따오기’ 가위 바위 보에서 승부를 떠나 따다 주길 원했으나 오빠는 “내가 따오면 넌 먹지 마라.” 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눈물을 흘리며 떨고 내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포도가 보라색으로 익어가는 여름이면 밤에는 아빠 엄마가 원두막에서 초롱불 켜고 젖은 포도송이를 품으시고 낮에는 할머니가 포도의 안전을 살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할머니 점심을 나르던 어린 마음은 매일 불그스레하게 물들었다. 보자기에 싸인 찬합을 들고 한 손에는 주전자에 숟가락 꽂고 동네 입구에 있는 밭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할매! 하고 부르면 할머니는 한걸음에 내려오시어 도시락을 받아 주시던 다정한 손길이 좋았다.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오후 내내 우리는 하나였다.
누가 포도 사러 오면 엄마를 모시고 와야 하는데 집으로 가는 갈이 오르막이라 힘들었다. 더위에 검정고무신 신고 가다 보면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발가락 사이엔 검은 땟국물이 나와 가기 싫었지만 어쩌겠는가. 할머니 대신 다녀와야 했다. 원두막에는 시계 비슷한 똑바로 있다가 위에 뭔가를 올려놓으면 몸을 바트는 것이 있었다. 저울이었다. 손님이 오면 엄마는 포도를 따와서는 도매로는 1관 4킬로그램, 소매로는 3,750그램을 계산했다. 하지만 엄마 손저울은 언제나 덤이 얹어지고 마지막 웃음하나 보탰다.
엄마는 며칠 전부터 익은 송이는 잘 손질하였다가 일주일에 두 번 우보 정류장 근처에 있는 ‘이화상회’에 납품하였다. 어떤 날은 있어야 할 자리에 포도는 없고 잘린 흔적만 보일 때도 있어 황당해하였다. 종종 그런 일에도 의연하였던 우리 엄마. 플라스틱 고무 대야에 포도를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엄마는 오천리에서 국신여객 버스를 타면 안내양이 기꺼이 받아주었을 때는 포도송이 내밀 정도로 정이 많았다. 그 옛날 시골에서만 볼 수 있었던 훈훈한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라 미소 머금게 한다. 엉성한 포도는 집에서 먹거나 인근 동네에 리어카를 끌고 팔러 간 그날 저녁, 우리 집 처마 육십 촉 전구 아래에는 돈 대신 받아 온 보리, 콩, 쌀자루 속에서 오십 원, 십 원, 아주 가끔 천 원짜리 지폐를 찾으면 할머니를 비롯해 오남매가 소리 지르고 좋아했던 유년의 기억이 반짝인다.
엄마가 원두막에서 밤을 보내는 날에 밤손님이 온다고 했다. 큰오빠 또래의 건넛마을 중, 고등학생 둘이 두 근 정도의 포도를 사면 저 건너편에서 휘파람 소리 들렸다고 했다. 그들이 돌아간 이튿날 휘파람 소리 자리엔 뼈만 남은 송이 아래 포도 껍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고 했다. 어느 밤에는 밭 한 귀퉁이 벌어진 철조망 사이로 찍힌 발자국은 묵묵히 지난밤을 두런거리고 있었다고 했으며 며칠 후에는 동네 친구들과 놀고 늘 집으로 올라왔던 큰오빠는 그날따라 밭으로 갔는데 근처에 갈수록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고 했다. 플래시 없이 간 그 곳에는 깜깜해도 다 보이는 얼굴들, 귀에 익은 소리였다고. 마침 원두막에서 주무시다가 일어난 부모님 역시 놀라 달려왔고 불빛을 비춰보니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들은 바로 건너 동네에 사는 큰오빠 친구들이었다. 포도 농사 십여 년에 밭 한 모서리는 전유물처럼 수확철만 되면 찾아왔다가 사라진 행적이 낱낱이 드러난 밤이었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한여름 밤의 조용한 일탈에 보상 받지 못한 아버지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이튿날 “한 명에 십만 원씩 보상하라.”는 말에 고개 숙이며 손으로 비는 것은 간밤의 꾼들이고, 말로 비는 친구들 아버지와 실랑이 끝에 내미는 비밀스런 봉투에 합의를 보았다고 했다. 사연이 많은 날들이었지 싶다. 세월 흐르고 공소시효도 지난 도둑들, 문화 류가 집성촌인 우리 동네에 엄마한테 시동생뻘 되는 이들의 고백이 이어졌다. “아지매요! 우리도 포도 많이 따 먹었어요.” 친구인 큰오빠 앞세우고 따먹었다고 자백하는 전과자들 앞에서 같이 머리에 서리 내린 얼굴 마주보고 엄마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연찮게 중학교 동창이랑 통화를 하게 되었다. 오래전 기억에서 우리 동네 근처에서 일했던 엄마가 사 온 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추억에 젖은 친구 말이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렸다. “그거 우리 집 포도였다.”라는 말에 둘은 추억을 공유했고 아직도 그 맛을 떨어내지 못하는 중년들의 목소리가 가늘게 이어졌다.
찬거리 사러 간 마트에서 만난 검붉은 자태 하얀 봉투에 숨기고 박스 안에 누워있는 포도. 목젖이 달곰함에 젖어드는 오후, 그때 그 맛 그 기분으로 돌아가고 싶어 덥석 안았다. 그 여름의 오후가 붉게 달아올랐다.
첫댓글 옥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