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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er 2017년 9월 18일
귀찮아서 대충 제멋대로 옮긴 부분이 있어서 여러분의 정신 건강을 위하여 원본을 아래와 같이 밝혀둡니다.
다음, 혹시 돈도 안내고 보는 뉴요커 기사를 번역기 돌려서 올리면 누가 잡아갈까봐 "야망의 시대"를 읽어낸 북코 회원들 참조용임을 밝혀둡니다. (용의주도) ^^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7/09/18/the-risk-of-nuclear-war-with-north-korea
평양에서 온 편지
"북한과의 핵전쟁의 위험"
평양 현지에서 :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간의 양측의 자극이 엄청난 손상을 가져올 대결로 치닫게 될 것인가?
에반 오스노스
1. 미치광이 이론(The Madman Theory)
미국은 북한과 외교 관계가 없으므로 워싱턴에 북한 대사관은 없다. 그러나 수년 동안 양측은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인 '뉴욕 채널'에 의존하여 존재하지 않는 외교관계에서의 불가피한 부분을 처리해왔다. 뉴욕채널은 무엇보다도 억류인들의 석방을 협상하고 핵 관련 긴장에 관한 비공식적인 대화를 가져왔다. 4월에 나는 뉴욕 채널에 연락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도인 평양을 방문할 수 있는 권한을 요청했다.
뉴욕 채널은 일반적으로 상냥한 2명의 중년 남성으로 구성된다 : 희끗희끗한 머리를 짧게 자른 박성일 차석 대사와 그보다 젊고 마른 보좌관 권종건이 그들이다. 그들은 어디든 함께 간다. (북한 당국은 외교관이 쌍으로 일하게끔 하여 망명이나 정보원으로 고용되는 것을 방지한다.) 미국법에 따르면 그들은 콜럼버스 서클에서 25마일 안에서만 이동할 수 있다. 박과 권은 그들 사무실 근처, Palm Too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겸해서 나를 만났다. 그들은 여행을 준비하는 데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고 주의를 줬다. 북한은 주기적으로 퍼레이드와 특별 행사를 보여주기 위해 대규모의 미국 언론인 단체를 허용하지만, 밀접한 감시가 필요하고 핵무기 개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개별 기자들에게는 훨씬 망설인다.
미국인들은 가끔씩 벌어지는 북한과의 적대적인 관계에 익숙하지만 지난 6 개월 동안은 1953년 6 · 25 전쟁이 끝난 이래 거의 볼 수 없던 수준의 대립이었다. 위기는 양측 지도부의 근본적인 변화로 재촉되었다. 김정일이 27 세의 나이에 권력을 잡은 이래로 6년 동안, 그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테스트한 숫자의 두 배가 넘는 84개의 미사일을 시험했다.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는 취임하기 직전인 1월에 북한에 대해 '예방'전쟁을 할 수도 있음을 표명했다. 엄청난 인명 손실의 위험 때문에 전임 대통령이 가능성을 일축했던 전망이었다. 트럼프는 인수위 시절 버락 오바마와의 가진 한 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이 다른 어떤 외교 정책 과제보다도 트럼프를 시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말했다. 측근들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트럼프는 "나는 북한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의해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7월 4일, 북한은 중요한 분수령을 넘어섰다.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최초의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발사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하와이 당국은 7월 21일 냉전 시대의 사이렌 경보를 부활시켜 핵 공격시 국민들에게 경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트럼프는 미사일 방어에 대한 지출을 "수십억 달러"로 증액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9월 3일, 북한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폭탄의 7 배에 달하는 이전까지 드러났던 것보다 훨씬 큰 핵폭탄을 시험 한 후, 제임스 매티스(James Mattis) 미국 국방장관은 미국이나 동맹국에 대한 위협은 "대규모 무력 대응"을 촉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7월 4일의 미사일 시험 발사가 있은 며칠 후, 박은 내게 평양행 비행기를 예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몇몇 외교관과 김정은을 포함하여 인터뷰하고 싶은 사람들의 목록을 제출했다. 후자에 관해, 박은 그냥 웃었다. (김정은은 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다.) 박은 이윽고 웃음을 멈추고, 다른 관리들과는 인터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북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가 자주 위협하는 종류의 폭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말뿐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도대체 전쟁 발발을 어떻게 생각할까? 북한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워싱턴, 서울, 베이징에 있었다.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관해서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내가 평양을 출발하기 1주일 전쯤에 미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8월 5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미사일 시험에 대 제재 조치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어떤 나라에도 하지 않았던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북한의 수출의 3 분의 1을 차지하는 석탄, 철 및 기타 원자재 판매를 막은 것이다. 뉴저지 골프 클럽에서 즉석 발언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더 이상의 위협은 여태껏 전 세계가 보지 못했던 '화염과 분노'를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몇 시간 후 북한은 괌의 미국 영토 근처 태평양에 4기의 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위협했다. 괌은 한반도 상공을 비행하는 전투기가 출발하는 곳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북한이 현명하지 못한 행동을 취할 경우 군사 해결책은 완전히 준비되었고, 발포 준비(locked and loaded)가 되었다고 말했다.
갑자기 미국과 세계에서 가장 은둔의 권력 사이의 핵 대결에 대한 전망은 냉전시대를 연상시키는 심리적 타산의 영역에 접어들었고 생존이 달린 전략적 의사 결정을 내리는 두 사람은 존 F. 케네디와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아니라 나이 든 부동산 재벌이자 리얼리티 티브이 스타와 다른 나라 국가 원수와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젊은 3세대 독재자였다. 그들 둘 다 7년 미만의 정치적 리더십 경험을 갖고 있다.
핵억지 이론을 개척한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토마스 셸링 (Thomas Schelling)에 따르면, 벼랑 끝 전술이란 '전쟁 위험 부담을 능숙하게 조정하는' 기술이다. 1966년 그의 저서에서 그는 핵 대치 상황을 절벽 가장자리에서 한데 묶인 채로 서로 싸우는 한 쌍의 등반가로 보았다. 각각은 절벽 끝에 더 가깝게 움직일 것이고, 그래서 둘 중 하나는 미끄러져서 두 사람 다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하게 된다. 통제력을 잃지 않고 적절한 공포감을 조성하는 문제이다. 셸링은 "아무리 상대방이 합리적이라도 더 비합리적이고, 더 충동적이고, 더 고집불통으로 보이기 위해 경쟁할 수도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데다가 고집불통이라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트럼프의 "발포 준비 완료(locked and loaded)"트윗이 나온 지 사흘 후, 나는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날아갔다. 몇몇 중국 사업가와 이란 외교관들을 제외하고는 비행기가 거의 비어 있었다. 사진 작가 Max Pinckers와 그의 조수인 Victoria Gonzalez-Figueras가 나와 동행했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노트북에서 북한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삭제했다. 북한 당국은 김씨 일가의 묘사에 특히 민감하다. (김정은의 이미지가 표지에 실린 북한 신문을 살 때 보면 점원은 사진의 얼굴이 접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는다.) 공항은 조용하고 정숙했다. 세관에서 옷 가방을 열었을 때 두 권의 책을 버리는 걸 깜빡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정은의 등극을 다룬 "위대한 계승자"와 "불가사의한 국가"라는 두 권의 책이었다. 세관원은 동료를 전화로 불렀고, 그 동료가 페이지를 뒤지더니 그의 상사에게 알렸다. 나는 어떤 방으로 안내되었고 거기서 한 세관원이 그 책들이 "D.P.R.K에 대해 매우 폄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언제 어디에서 구입했는지, 그리고 내가 책을 읽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잠시 실랑이를 벌린 끝에, 나는 "다시는 그 책들을 D.P.R.K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각서를 쓰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그렇게 각서에 서명했고, 책은 압수 당했으며, 서둘러 빠져나왔다.
빳빳한 흰색 반팔 버튼 다운 셔츠에 왼쪽 가슴에 김일성(김정은의 할아버지로 북한의 첫 번째 지도자)을 닮은 사진이 있는 빨간 작은 핀을 단 웃고 있는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16세 이상의 시민들은 김씨 일가 중 한 명을 기념하는 배지를 하나 이상은 달아야 한다.) 그는 영어로 자신을 북한 외무성 미국 연구소 (Institute for American Studies)의 박이라고 소개했고 그가 내 가이드가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따라 공기가 맑고 바람 한 점 없는 바깥으로 나갔다. 박은 우리와 동행할 다른 사람들, 즉 두 명의 운전사와 내가 가끔 질문해도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군인풍의 김이라는 날씬한 젊은이를 소개했다. 박과 나는 도요타 S.U.V.에 탔다.
우연의 일치로, 그는 뉴욕 채널의 선임자인 박성일과 이름이 같았고, 35세에 짧고 숱 많은 머리카락과 차분한 몸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의 2천5백만 명의 사람들 대부분은 외국으로 여행할 수 없지만 박은 직업상 몇몇 나라를 갈 수 있었고, 그는 가본 나라들을 청결도로 묘사했다. 스위스 (매우 깨끗함), 벨기에 (그렇게 깨끗하지는 않음), 방글라데시 (전혀 깨끗하지 않음). 박은, 2015년에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교회와 관련된 민간교류로 미국 유타주(깨끗함)에 갔었다. 그 경험은 모르몬교도 들이 북한 사람들과 공통점이 많다고 느끼게 했다. 박이 내게 말하길 "말일성도교회가 시작할 무렵에, 그들은 박해를 받았죠. 그들은 광야로 보내졌었죠. 그러나 그들은 번성을 이뤄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일하고 죽는 마치 벌 군집처럼 조직됩니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결과를 낳는 거죠. 우리는(북한 사람과 모르몬교도) 서로를 아주 잘 이해합니다."
박은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 정치 및 뉴스 보도를 분석하면서 북한에 관한 미국의 의도를 간파하려는 데 보낸다.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의 선거 이후, 그 일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한다. "그가 뭐라고 말하면, 나는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지 알아내야만 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진짜 어렵습니다."
그런 사실이 아마도 트럼프를 기쁘게 할 것이다. 트럼프는 스스로를 예측할 수 없다고 자랑스러워한다. 많은 논평가들은 리처드 닉슨과 외교에 대한 닉슨의 "광인 이론"을 비교해 보았다. 닉슨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불안정하고 위험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려 했다.
나중에 나는 박에게 박 자신과 다른 북한 사람들이 트럼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가 비이성적일 수도 있고 너무 똑똑할 수도 있겠죠. 우리는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화염과 분노"에 대한 트럼프의 언급이 미묘한 전략의 일부일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중국의 '손자병법'처럼 그가 어떤 지점을 향해 몰아가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우리의 큰 의문입니다."
박과 북한의 다른 분석가들에게 있어서 미국에 관한 더 중요한 질문은 트럼프를 넘어서고 있다. "미국 대중은 전쟁 준비가 되어 있나요?"그는 물었다. "의회가 전쟁을 원하나요? 미군부가 전쟁을 원하나요? 왜냐하면, 그들이 전쟁을 원한다면, 우리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옥수수밭과 논으로 둘러싸인 평양 외곽의 자그마한 3 층 호텔 인 고방산 초대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샹들리에, 모조 다이아몬드 및 인조 가죽 소파의
저렴한 비용의 화려함을 갖추고 있다.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외무성은 이 호텔을 "미국인과 귀빈들"에 사용하고 있다고 박이 전했다. (2013 년에는 구글의 CEO였던 에릭 슈미트 (Eric Schmidt)가 묵었었다.) 북한에서는 방문자의 곁을 비우는 법이 없기에, 박은 내방 복도 끝의 방을 썼다. 1박에 141달러를 지불했는데, 이는 북한 평균 평균 시민들의 한 달 수입에 해당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외국인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통이 있습니다"라고 박은 설명했다. "간첩이나 적만 아니라면, 최우선으로 외국인을 보호하는 것이죠."
그날 밤, 우리는 50 대 중반의 외무성 관리로, 미국 연구소 (Institute for American Studies) 부소장인 리용필과 저녁 식사를 했다. 사교적이고 자신감 있는 그는 군대에서 8 년간 복무했고 영어를 배웠고 외교관이 되었다. 그는 대동강 맥주를 들고, 우리의 도착에 건배했다. 우리는 외과 수술실처럼 느껴지는 호텔 식당의 전용룸에 있었다. 조용하고, 박박 문질러 씻은 흰 벽이 밝은 빛에 휩싸인 방이었다.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두 명의 여종업원이 각각의 요리를 차려 냈다. 은행 수프, 오골계, 김치, 민물고기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맥주, 레드 와인, 소주와 함께 나왔다. (유엔에 따르면, 북한 주민의 72 %가 정부의 식량 배급에 의존하고 있으며 역사적인 가뭄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평양에서는 외국 손님이 당황할 만큼 잘 먹는다.)
리는 일련의 요점들을 만들어두고, 내가 노트에 하나씩 쓸 때까지 기다렸다.
"미국만이 예방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는 아닙니다."
"필요한 경우 3백만 명이 참전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역사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나약함 때문에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쓰라린 교훈은 우리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방어적인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인구나 국토 면적은 작지만 존엄성 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합니다. 우리는 그 존엄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죽을 것입니다. "
몇 차례 더 건배를 한 후, 리는 넥타이를 풀고 상의를 벗었다. 그는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당신네 체제에서, 대통령이 전쟁을 시작할 권한은 무엇입니까?", "의회가 결정권을 갖고 있습니까?"
대통령은 의회 없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나는 말했다. 리는 핵 암호 코드에 대해 물었다. "핵가방을 McMaster가 통제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그는 국가안보 보좌관인 H. R. McMaster를 언급했다.)
아니라고, 대통령은 대체로 스스로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신의 나라는 어떤가요?"
그의 대답도 비슷했다. "우리의 최고 지도자는 전쟁을 개시할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 방은 샴페인 색 가죽과 가장자리가 금색이 칠해진 애틀랜틱 시티를 경유한(라스베이거스 스타일의 번쩍번쩍 빛나는...) 베르사유 스타일로 꾸며져있었다. 방에는 TV가 있었지만 북한 방송 대신 아시아 위성 채널만 볼 수 있었다. 뉴스 채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기독교 복음 방송과 싱가포르 요리쇼를 넘겨보다가 스모 선수들이 맞부딪치는 것까지 보다가 잠이 들었다.
트럼프는 북한 핵문제를 끝장내겠다고 선언한 네 번째 미국 대통령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한과 유류와 민간 원자로의 대가로 핵 개발을 동결하기로 합의했지만 양 측 모두 약속을 이행하지는 않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양자 협상을 거부했다가 방침을 바꿔서 6 자 회담으로 알려진 것을 소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처음에 유인책을 제시하고 나중에 "전략적 인내"라는 대화를 거부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트럼프 대통령 하에서 미국은 유엔 안보리가 11 년 동안 북한에 취한 일련의 조치 중 8 차 북한 제재 조치를 이끌었다. 김 위원장의 핵계획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전 국무부 한국 담당이었던 에번스 리비어 (Evans Revere)는 "북한은 70 년 이상 형편없는 악수를 거듭해왔다. "라고 말했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종종 북한의 핵무기 개발 진전을 과소 평가해왔다. 그러나 이제 미국, 유럽 및 중국 정보기관의 자료를 모아보면, 기본적인 사실은 명백하다. 북한은 사용 가능한 핵탄두가 20 ~ 60 개이며 아마도, 예를 들어, 시카고처럼 멀리 떨어진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ICBM도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계획은 아직 하나의 무기로 결합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정보당국은 1 년 안에 이를 달성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은 날라오는 미사일을 격추시키는 능력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사이버 방해를 통해 북한의 무기 개발을 실패시키려 했지만 지연만 됐을 뿐이라고 전해진다. 전직 미국 관리는 "수백만 달러를 들여놓고는 '성공했나?'라고 묻는다. 대답은 '아마도'이다."
최근 회담에서 미국 측에서 경제적, 외교적 이익 또는 안보 보장의 어떠한 조합이 북한에 핵무기 포기를 유도할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대답은 여전히 '아니다'였다. 북한측은 전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 (Muammar Qaddafi)에 관해 늘 언급한다. 2003 년 카다피가 핵무기, 화학 무기 및 생물학 무기를 포기하기로 합의했을 때, 부시는 같은 행동을 할 다른 국가들도 "미국과 더 나은 관계를 가질 열린 길"을 가질 것이라고 약속했다. 8 년 후 미국과 나토는 카다피 전복을 도왔고, 결국 카다피는 반군에 의해 체포되고 굴욕 당하고 살해되었다. 당시 북한은 카다피의 몰락은 다른 나라들이 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침략 전술"이라는 "중대한 교훈"이었다고 말했다.
2014 년 평양을 방문한 전 미국 국가 정보 원장, 제임스 클래퍼 (James Clapper)는 "북한 주민들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성공할 가망이 없는 일이다.(It's a non-starter)"라고 말했다. 미국의 국가 안보 관련자 집단(American national-security community)은 이 점에 대해서 현재 거의 만장일치가 되어있지만, 정부는 그렇게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미래의 협상에서 영향력을 내주는 것이 될 것이고, 다른 나라들이 북한 사례를 모방할 위험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클래퍼는 "압력도 가하고, 협박도 해보고, 협상도 펼쳐보고, 중국을 활용하려는 시도이건, 모든 수를 써봐도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는 북한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대통령의 수석 전략가였던 스티브 배넌 (Steve Bannon)은 해고되기 직전인 8월의 한 인터뷰에서 "군사적 해결책은 없다. 완전히 당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매티스 국방장관과 맥매스터 국가 안보 보좌관은 김정은이 반드시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티스 장관은 6 월 하원 군사 위원회에서 북한을 두고 러시아를 대체하여 미국의 제1의 위협이 된다고 하면서 "평화와 안보에 가장 시급하고 위험한 위협"이라고 증언했다. 내게 보낸 이메일에서 맥매스터 보좌관은 "북한의 도발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소가 아니라 오히려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은 화학 무기와 원자로를 포함하여 지금껏 모든 생산 능력을 증대시켜왔다. 그렇다면 문제는 주변국과 다른 국가들이 불량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해 내고 무사한 것을 보고 무슨 일을 벌일 것이냐 하는 문제다."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왜 핵무기를 원하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기방어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남한에 대한 무력 통일로 한국전쟁에서 미완성된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가?
한 고위 행정부 관리는 트럼프 국가 안보팀 멤버들은 김 위원장이 자기방어에서 멈출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북한의 역량에 대한 의견 차이가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북한의 의도가 무엇이냐가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위해 핵무기를 추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 상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독재자들은 가끔씩, '이야, 한번 핵무기를 갖게 되니, 나는 천하무적이고, 이웃나라들에 대해 재래식 전쟁과 전복과 암살 운동을 맘대로 할 수 있구나'라는 착각을 한다."
미국 정부는 북한이 무기를 사용하거나 판매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을 할 수도 있고 예방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전쟁 억제는 근본적으로는 적이 자멸적이지 않다는 가정에 의존하지만, 이번 미국 정부는 김정은의 무모함이 자신의 파멸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의심한다. 이 관리는 사담 후세인은 자멸적일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목숨을 저버렸다고 했다. 2003 년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자 사담 후세인은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믿을만한 정보에서 차단이 되었다. 그는 미국이 실제로 전면전을 개시할 것인가를 의심했고, 그 결과, 자신과 자신의 정권이 자멸할 확률을 잘못 계산했다.
우리가 도착한 다음날 아침, 평양 시내를 돌아보기 위해 고봉산 초대소를 나서려고 하던 때, 평양에는 따뜻한 이슬비가 내렸다. 정치적으로 고립된 하바나, 랑군, 카라카스 등의 다른 어떤 수도들보다도 평양은 전혀 딴 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비에트 시대의 소형차 라다 (Ladas)와 오래된 시내버스가 부지런히 거리를 가로지르고, 승객들은 시원한 바람을 찾아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 건물은 국가 공식 신조인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한글 배너로 장식이 되어 있는데, 주체사상이란 자조와 충성심을 미화하는 것이다. 주요 교차로 근처의 둔덕에는 회색 작업복을 입은 작업자들이 "로켓 권력의 주체 이자 핵 강국을 세우신, 경애하는 최고 지도자 김정은 동지"를 찬양하는 엄청나게 큰 붉은 간판을 설치하고 있었다.
평양은 쓰레기나 낙서가 없는 꾸며낸 완벽 도시다. 휠체어를 탄 사람도 마찬가지로 없다. 인구는 290만 명으로 정치적 충성도와 신체 건강을 기준으로 뽑힌 사람들이다. 부적격 시민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검문소가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수십 년 동안 거리에 차가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자주 찾는 외국 방문자들의 경우에는 교통량의 증가에 놀라곤 합니다. 평양은 아시아에서 가장 사람들 왕래가 없고 조용한 수도이지만, 기근 이후로 천천히 변화하고 있다. 1994 년과 1998 년 사이에 부실관리, 가뭄과 홍수가 겹쳐 북한의 식량 생산은 마비되었고, 3백만 명이 사망했다. 수십만 명이 식량과 일자리를 찾기 위해 중국으로 갔고, 많은 사람들이 가족으로 돌아와서 더 나은 삶의 질을 보게 되었다.
다니엘 튜더 (Daniel Tudor)와 제임스 피어슨 (James Pearson)의 일종의 시장과 일상생활에 대한 연구서인 책 "조선 자본주의 공화국(North Korea Confidential"에 따르면, 기근 이후, 오늘날의 대다수의 북한 주민들은 이중 경제생활을 하는 것을 배웠다. 북한 주민들은 국가가 지정한 직업 외에 번창하는 시장에서 집에서 만든 국수를 팔고, 개인 버스를 몰고, 연인들을 위해 아파트를 시간제로 세 놓기도 한다. 중국으로부터 가정용품, 의약품, 고급 제품을 수입하던 북한 정부 내부 인사들은 '돈주'라고 알려진 엘리트 기업가가 되었다. 김 위원장은 제한된 경제 개혁을 허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윤을 축적하게 했는데, 그 결과 부동산을 포함한 암시장 성장이 촉진되었다. 공식적으로는 개인이 주택을 소유할 수 없지만, 실제로는 더 나은 집을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평양에 있는 평범한 침실 하나 짜리 아파트는 3 ~ 4천 달러 정도 한다. 가장 고급스러운 아파트는 수십만 달러까지 한다.
허술한 경제 재재와 중국과 러시아의 지속적인 수요로 북한 경제는 최근 몇 년 사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북한의 G.D.P.는 2016 년에 3.9 % 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999 년 이래 가장 빠른 속도이다. (반면, 한국은 2.8 % 성장했다.)
평양의 거리에는 유행, 심지어 스타일이 번득이는 걸 볼 수 있다. 일부 여자들은 하이힐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걸 볼 수 있지만, 노동당 규정에 의하면 무릎 위 2 인치 이상 짧을 수는 없다. (청바지는 여전히 미국이 연상된다는 이유로 사실상 금기시되고 있다.) 가끔씩,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하는 것이 보였다. 2013년부터 북한은 3G 모바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 내부 자체 인트라넷에만 접속할 수 있고, 이것을 통해 북한 내부로 전자 메일을 보내고 일부 웹 사이트만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북한 주민들은 중국, 미국 및 한국의 오락물에 어느 정도 노출이 되어 왔으며, 휴대 전화에 삽입하기에 충분히 작은 SD 카드를 통해 국경을 넘어 밀수입해왔다. (김정은은 이러한 정보가 제기할 위험을 감지하여 외국 영화와 음악을 "독초"라고 맹비난했다.) 2015년 북한 정부는 불법적인 비디오를 소지했다가 잡히면 10년의 노동 교화형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일성 종합 대학에서 석사를 취득하고 평양에서 소련 외교관을 역임 한 북한 분석가인 알렉산드르 만수로프(Alexandre Mansourov)는 "북한 정권은 국가를 뒤흔들 수 있기 때문에 생활 수준이 너무 빨리, 너무 많이 좋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기대치가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혁명입니다. 북한 정권은 이것을 관리하기를 원합니다. "김정은은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 권력을 잡은 이래로 김은 매년 평양 시내에 극장과 워터파크, 신공항을 비롯하여 새로운 주거 단지를 공개해왔다. 지난봄, 그는 '여명 거리'에 있는 3천 세대가 넘는 신축 아파트 단지 입주식에 참석했으며, 박은 그 아파트를 애써 보여주려고 했다. 70층짜리 고층 건물을 포함하는 녹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단지 건물은 원형 기둥과 돌출된 원형의 발코니가 있어 "우주 가족 젯슨Jetsons"에 나오는 아파트와 같은 모습이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속삭이는 커플과 새로 깐 아스팔트 위를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따라가는 할머니를 지나쳤다. 번쩍번쩍 광을 낸 검은 렉서스
한 대가 보행자들 사이를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공식적으로는 대부분의 개인 자동차는 최고 지도자의 선물로 제공되지만, 북한 내 주민들은 국영 기업의 이름으로 자동차를 등록한다.) 우리는 지붕에 특대 스피커가 장착된 밴을 보았다. 박은 밴에서 나오는 소리에 대해 "미국의 침략에 대한 경고"라고 설명했다. 그는 "모든 구역에 선전 부대가 있답니다"라고 설명했다. 아무도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주로 중국, 이집트, 이라크에서 외신 기자로 10 년을 보냈지만 그런 경험들은 북한에서 보도를 하는 것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요청에 따라, 북한 당국은 일정표를 주었고, 장소마다 나를 안내했다. 어느 기자라도 구금될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혹은 협조하는 북한 주민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평양 시내 또는 교외 지역을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나라는 학자와 기자들에게 점점 개방되어 가고 있다. 2000년, 마들렌 올브라이트 (Madleine Albright) 국무 장관과 함께 방북한 언론인들은 창문이 가려진 버스를 타고 다녔고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오늘은 제약 조건이 더욱 미묘했다. 나는 어떤 아파트 간에 평양 시내의 평범한 아파트를 방문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준비하기에 너무 늦었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나는 학교들도 보여달라고 요청했었는데, 그래서 '평양 중등학원'으로 안내되었다. 이 학교는 운 좋은 학생 400 명을 위해 인조 잔디가 깔린 최신식 벽돌과 강철 구조물로 지어졌다. 박영철 원장은 2016 년 7 월 2 일의 김정은의 2 시간의 학교 방문을 기념하는 1 층 상설 전시실로 나를 안내했다. 전시장 벽에는 김 위원장 사진이 늘어서 있다. 특유의 회색 양복을 김정은이 손가락에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끼고, 시설을 돌아다니는 사진들이었다. 벽에 붙은 큰 지도에는 빨간 점선으로 복도를 따라 김이 지나간 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최고 지도자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매달 이 전시실을 방문한다고 박 원장은 말했다.
나는 김정은이 붉은 털 담요를 만지는 커다란 사진 앞에 섰다. 박 원장은 옆으로 물러나서 과장된 동작으로 강화유리 속의 담요를 꺼내 보였다. "경애하는 최고 지도자 동무가 손수 만지셨습니다."고 말했다. 다른 진열품들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앉았던 하얀색으로 칠한 의자, 순시 중에 잠깐 쉬었던 어학실습실의 소박한 나무 의자들이 모두 성자의 유물과 같이 유리 안에 보존되어 있었다. 내가 박 원장에게 지도자가 방문하는 느낌이 어떤지 묻자 그의 눈이 커졌다. "잊을 수없는 순간이었습니다. 꿈도 꾸지 못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위층에서, 열 살과 열한 살의 학생들이 완벽하게 줄을 맞춰 앉은 역사 수업에 잠시 들렀다. 나는 미국인이라고 자기소개를 했고, 나한테 질문할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오랜 침묵끝에 가슴에 두 개의 메달을 단 깡마른 소년이 일어서서 "왜 미국은 우리와 전쟁을 일으키려고 합니까? 그리고 도대체 무슨 권리로 우리가 우리 핵무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막습니까? "심오한 분석이나 논쟁을 할 기회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상황이 나아질 것을 희망한다고 케케묵은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얘기했다. 질문을 했던 소년은 감흥이 없어 보였다.
II. 마르크스주의자 황제
2011 년에 김정은이 정권을 잡기 전에는 그는 북한 내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의 이름은 몇 년전에야 국영 언론에 처음 등장했다. 전 C.I.A. 한국 분석가인 수미 테리 (한국명 김수미, Sue Mi Terry)에 따르면 C.I.A.는 김정은의 11살 때 사진 한 장 달랑 외에는 아무 정보가 없었다. 2008년 김정일이 뇌졸중을 앓았을 때 랜들 필립스(Randal Phillips), C.I.A. 아시아 담당은 가끔씩 하던 대로 분석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 중국 측 인사를 만났다. 그러나 필립스는 중국 정보기관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중국 측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다른 적대국가들과 비교할 때, 북한은 "가장 어려운 목표"라고 테리는 말했다. "그런 나라는 또 없습니다."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그냥 (정보를) 조각조각 모았죠."
김정일은 심장 마비로 2011년 12월에 사망했다. 장례식에서 7명의 자녀 중 가장 어린 막내 김정은은 창백하고 어린애처럼 보였고 김정일이 관에 눕혀질 때 눈물을 흘렸다. 그 후, 그는 그보다 수십 년이 나이가 많은 정보국과 군 고위 간부들을 포함한 운구인들을 인솔했다. 일부 저명한 분석가들은 김정은은 권력에 있어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만큼 안전하지 않다고 예측했다. 김정은 정권은 쿠데타에 굴복하거나 다른 이유로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한국 담당 선임 보좌관이었던 빅터 차 Victor Cha는 타임지 기고문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은 끝났다"라고 밝힌 바 있다. 차는 최근에 내게 "저는 김정은 정권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워싱턴의 비영리 연구 단체인 미국 해군연구소(Center for Naval Analyses)의 북한 정치 전문가인 켄 가우스 (Ken Gause)에 따르면 김정은은 처음에는 "후견인"을 맡았던 3 명의 원로들의 지도 아래 일했다. 김정은과 그의 멘토들은 김정은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민한 선택을 했다. 신체적으로는 아버지 김정일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던 할아버지 김일성이 거의 환생한 수준으로 몸을 변화시켰다. 원래 자신의 할아버지를 닮았었는데, 그 점을 더 강조하기 위해 몸무게를 늘리고, 옆을 바싹 깎은
올백머리에, 뿔테 안경과 중절모를 쓰기 시작했다. (외국 언론이 더 닮아 보이게 하려고 수술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시사했을 때, 국영 통신사는 그런 추측을 "쓰레기 언론의 추악한 돈벌이 기사"라고 비난했다.)
정치적으로, 김정은은 자신을 더 솔직하고 실용적인 지도자로 내세웠다. 그의 아버지 김정일은 사회주의 낙원의 결함에 대한 논의를 절대 허용하지 않았지만 김정은은 2012 년 4 월 로켓 발사 직후 즉시 서해에 떨어진 로켓의 실패를 인정했다. 그다음 달, TV로 방영이 된 만경대 유희장 순시에서 그는 보도에서 허리를 굽혀 잡초를 뜯어내는 쇼를 보이며, 관리자들을 질책했다. "어떻게 이걸 보지 못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방치하고 안주할 수 있는가? "
김정은은 점차적으로 후견인들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를 현대적인 사회 주의자로 자처했다. 북한 언론 매체는 그가 호화롭게 설비가 된 일류신 제트기를 타고 가는 모습, 맥북을 쓰는 모습, 릉라 인민 유원지에서 놀이기구를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김정은은 2009년에 결혼한 세련된 치어리더 출신의 아내 리설주와 함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보였다. (그들 사이에는 세 자녀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선전가들은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북한의 공식 이미지들에서 Photoshop의 사용을 추적한 외국 분석가의 말로는 김정은의 공식 사진은 종종 귀 주변이 변형이 되었는데, 아마도 잡티를 가리려 한 듯하다고 한다.
김정은은 쉽게 잔인해질 수 있음을 전달하려 했고, 수십 년 만에 북한 내 가장 극심한 당 숙청에 착수했다. 아버지의 관을 메었던 7 명의 사람들 중에서 2명을 처형했다. 삼촌 장성택과 리영호 차수가 처형되었으며, 나머지 3 명을 축출했다. 그의 아버지 김정일도 권력을 잡았을 때 선임 간부들을 처형했지만, 중국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던 영향력 있는 가족인 장성택을 죽인 것은 엄청나게 대담한 행동이었다. 장성택에 대한 혐의는 반역에서부터 김정은이 방에 들어왔을 때 "마지못해서"손뼉을 쳤다는 것까지 있었다. 장성택의 자녀와 측근들도 역시 처형되었는데, 관심을 끌기 위해 고안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일부는 화염 방사기로 죽였고, 일부는 야외 관객 앞에서 대공포로 처형되었다. (장성택이 개먹이로 던져졌다는 언론 보도는 허위로 판명 났다. 장성택은 총살형을 당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담당 선임 보좌관이었던 에반 메데이로스(Evan Medeiros)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의 엘리트 관리 방식은 강압적이라기 보다 인센티브를 기반으로 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포상이나 전리품을 받았습니다. 아들 김정은의 접근 방식은 '나한테 시비를 걸면, 그냥 죽여버리겠다. 그것도 아주 고약하게 죽여버리겠다.'로 보입니다 "
이 원칙은 올해 초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대상은 김정은의 소원했던 이복형 김정남이었다. 김정남은 10년 이상 마카오에서 준 망명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최근 몇 년 전에 김정남은 일본 언론인 고미 요지 (Yoji Gomi) 기자에게 북한이 "3대째 들어서 약화 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젊은 지도자에게 비판적인 인터뷰를 했다. 치명적인 얘기로 김정남은 그의 이복동생을 그저 "명목상의 지도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정남은 2월 13일 아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마카오의 집에서는 중국 정부가 보안 요원을 붙였지만 그는 혼자 여행했다. 공항 보안 카메라가 그의 도착과 이후 동선을 잡아냈다. 그는 청바지와 여름 재킷을 입고 배낭을 맸다. 그가 체크인 키오스크 앞에 서있을 때, 두 젊은 여성이 접근했고, 그의 얼굴에 액체를 문지르고 달아났다. 흥분한 상태로, 그는 보안 요원에게 다가갔다. 그는 현기증이 생겨 공항 의무실로 옮겨졌는데 거기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사진에서, 그는 의자에 푹
쓰러져서는, 팔을 벌리고, 눈을 감고 있다. 그는 구급차에서 사망했는데, 공격을 받은 지, 20분이 채 되지 않았다. 그의 눈과 피부에서 채취한 표본을 바탕으로 말레이시아 당국은 북한이 무미 무취한 화학 무기인 신경 작용제 VX에 의한 최초의 암살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한국과 일본 언론은 김정남이 망명을 준비했거나 외국 정보기관에 협력하여 김정은을 격분시켰을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이 살인 사건으로 외교 위기가 발생했다. 북한은 시신의 반환과 몇몇 북한인의 송환을 요구했다. 이 북한인들은 경찰로부터 심문 요청을 받았었다. 요구가 거부되자, 북한은 출국하려던 말레이시아인들에 대해 국경을 봉쇄하고, 9 명의 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을 억류했다. 말레이시아는 2주 후 김정남의 시신을 인도했고 북한은 대사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출국을 허용했다. 공격에 가담한 두 명의 여성은 일급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데, 현재 말레이시아에 구금되어있다. 그들은 수사관들에게 자신들은 지역 나이트클럽에서 일했으며 몰래 TV 쇼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각자 90 달러씩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공격이 끝난 후 여성들이 손을 씻었는데, 이들이 서로 섞여야 독성을 나타내는 별개의 무해한 화학 성분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10 월에 재판을 받을 예정이다.
김정은의 집권이 6 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 몇몇 분석가들은 고위 당직자들이 김정은의 의견을 뒤집거나 그에게 지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 정보기관은 김정은이 단독으로 지휘 통솔한다고 믿는다. 이복형의 암살은 김정은의 승인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고 한국 관련 업무를 하는 한 미국 관리가 내게 말했다. "김정은이 최고 결정자라고 해도 됩니다. 김정은 만이 인정이 되죠." 많은 분석가들은 김정은이 미국과 점점 더 대립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조언자들을 두지 않는 것을 우려한다. 외교 평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북한 전문가 스콧 스나이더(Scott Snyder)는 이렇게 내게 말했다. "우리는 현재 김정은이 취하고 있는 방침의 위험에 관해 효과적으로 전달해줄 내부 혹은 외부 채널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장군이 자기 목숨까지는 아니어도, 직위를 걸고, 김정은에게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미국은 김정은의 권력 장악력 문제를 조사해 왔으며 불만에 찬 엘리트들의 잠재적인 쿠데타나 도전에 대한 증거는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다. 현재 김정은의 가장 눈에 띄는 취약성은 그의 건강이다. 그는 과체중이며, 어쩌면 당뇨병도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에서는 장수 연구소 (Longevity Research Institute)라는 기관이 지도자의 건강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다. 뜻밖의 문제만 제외하면 김정은은 북한을 수십 년 동안 통치할 수도 있다.
어느 오후 평양에서 점심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나는 최신 미국의 위협이 이미 평양 내 풍경에 새겨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총천연색 간판에는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미국 국회 의사당의 지붕에 미사일이 떨어지는 것이 묘사되어 있었다. 안내를 맡은 박의 번역에 따르면, 그 워싱턴의 잔해를 가로질러, "선제공격"과 "군사 공격 옵션"이 쓰여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장전 완료"발언 이후 며칠 동안 미국은 교착 상태에 대한 원칙에 따라 모호함을 전달하려 했다. 북한은 어떤 일이 격렬한 미국의 반응을 일으킬지 모르니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의미로써. 그러나 그 메시지는 평양으로 전달되는 중간에 왜곡이 되었다. 그날 아침, 우리는 Mattis 국방장관과 Rex Tillerson 국무 장관이 월스트리트 저널에 올린 공동 명의로 올린 기고문을 통해 그 메시지는 분명히 긴장감을 완화하려는 시도였다고 발표한 것을 알게 되었다. 기사에는 "미국은 북한의 정권 교체 나 조속한 통일에 일체의 관심이 없다"라고 되어 있었다.
북한 정부의 노련한 미국 언론 번역가 중 한 명인 박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어려워했다. 차 안에서 그는 "국무 장관과 국방 장관이 공동으로 기고문을 쓰는 것이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인가요? "라고 물었고, 매우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나는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 보았다. 그는 두 국무 위원이 어떻게 대통령과 극명하게 모순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주 다른 시간에, 박은 미국 언론에 관해 혼란스러운 세부 내용을 정리하려 했다. "그래서 월스트리트 저널은 보수적인가요?"그는 물었다. 사설은 보수적이지만 뉴스 보도는 직설적이라고 하자, 그는 받아들이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때때로 박은 먼 나라에서는 알아보기 어려운 것을 잘못 이해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미국은 분열된 나라입니다. 전쟁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미국은 의견이 분분한 나라이고, 중동과 동남아 분쟁에 지쳐있다는 점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이런 점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절대적 확신을 갖고 판단한다면 그는 틀릴 수 있다.
우리는 대동강 유역에 정박한 레스토랑 기능을 겸하는 파랗고 하얀 커다란 배 앞에 차를 세웠다. 입구 위의 간판은 최고 지도자의 두 번에 걸친 방문을 기념했다 : "종합봉사선 무지개호는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현지 지도를 받았다." 이 레스토랑의 독특한 매력은 수조에서 자신의 점심을 직접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테이블로 가는 길에, 사다리에 서서 그물을 들고 긴 수염이 달린 커다란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한 남자를 지나쳤다. 우리는 몇몇 테이블에 이미 가족들이 앉아있는 식당에 도착했다. 가족들의 나이는 마오 스타일 옷을 입은 할아버지에서부터 테이블 주위를 서로 쫓아다니는 몇 명의 아이들까지 다양했다.
우리는 쇠고기, 냉면, 떡, 회를 주문했다. 모퉁이에 있는 텔레비전은 최대 국영 방송에 맞춰져있었다.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및 교육을 담당하는 3 개의 다른 채널은 가끔씩만 방송을 하였다. 박은 우리가 "등대"라는 전통적인 북한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얘기해줬다. 그는 참을성 있게 줄거리를 설명했다. "한 남자가 등대가 있는 외딴섬에 혼자 살았다. 일제 시대에 그는 노예와 같았으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이 권력을 잡자,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했다. 그리고..."
드라마가 갑자기 끊어지고 중년의 통통한 여자 뉴스 앵커가 화면에 나타났다.
"뉴스입니다"라고 박이 말했다.
방송은 짙은 세로줄 무늬 옷을 입은 김정은이 군복을 입은 군인들에 둘러싸인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아나운서는 미사일 부대가 괌 근처 태평양 공격을 준비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사진은 괌에 있는 앤더슨 공군 기지의 위성 이미지를 비추는 스크린 옆에 서 있는 김정은의 모습을 보였다. 아나운서는 김정은이 최종 발사 명령을 내리기 전에 "어리석고 미련한 미국 놈들의 행태"를 조금 더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영상은 발사대에서 솟아오르는 미사일, 발사되는 로켓, 머리 위로 전투기가 질주하자 환호하는 군인들의 영상을 모은 것에 오케스트라 음악을 붙인 장면으로 끝났다. 나는 주위를 훑어보았고 다른 손님들은 점심 식사에 몰두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발사할 건가요? 말 건가요? "나는 물었다.
"모르겠습니다"라고 박이 말했다. "미국이 B-1B와 같은 또 다른 핵무기를 한반도에 보냈는지에 달려있지요."
"미국은 그게 발사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인지를 알고 있나요?"나는 물었다.
"우리가 말해준 적은 없죠! 그러나 더 이상의 '핵 도발'을 보내서는 안된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알아야만 합니다. "
전쟁과 무기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나 있었다. TV에, 거리의 간판에, 잘 연습된 학생들의 대화에서도. 돌고래가 뛰어올라 재롱을 부리던 평양의 릉나 돌고래 수족관에서 공연을 보았을 때, 마지막 장면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미사일이 포함된 영상이었다. 나는 돌고래와 미사일이 어떻게 연관이 되냐고 박에게 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건 뭐든 갖게 될 것입니다. 돌고래 수족관. 핵무기. 하나씩 차례로."
점심을 먹으며 박에게 물었다. "당신들의 나라가 핵전쟁으로 파괴될 수도 있는데, 어째서 그런 생각을 실제로 고려하지요?"
북한은 황폐화라면 많이 겪어보았노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이전에 두 번을 겪었지요. 한국 전쟁과 "고난의 행군" 말입니다." "고난의 행군"이란 1990 년대 중반의 기근에 대한 공식 완곡어법 표현이다. "우리는 세 번도 할 수 있죠." 그 주장은 북한인들의 자아상에 담겨있다. 그들은 고난의 역사, 적대적 고립감, 살아남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이루어낸 땅에 사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게끔 배운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말을 하기 위해, 우호적인 식사를 중간에 마칠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핵전쟁은 어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수천 명은 생존할 것"이라고 박은 말했다. "군 당국은 '상관없다. 미국이 파괴되는 한 우리 모두 다시 새로 시작하게 될 것이다'라고들 하죠. 그리고 덧붙이기를, "많은 사람들이 죽겠죠.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김정일은 "우리의 환경을 짙은 안개로 감싸야만 한다"라고 말하면서 "우리 원수가 우리에 관해 무엇인가를 배우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결과 이해 당사자들은 창조적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정보기관은 독순술사 (lip-reader)를 고용해 김 위원장이 정치 행사에서 마이크에서 떨어져서 말하는 것을 지켜보게 한다. 냉전 시대의 러시아 전문가들처럼 미국의 학자와 분석가들은 누가 권력을 장악하고 누가 권력을 잃고 있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공식 장례식의 안무를 살펴보고 사진 캡션과 선전 보고서를 분석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노력은 북한 김씨 일가를 둘러싼 안개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김씨 왕조는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 시작되었다. 성급하게 국경을 다시 그리는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은 사실상 절반씩을 관리하는 형식으로 한반도를 둘로 나눴다. 소련은 소련에 살고 있던 민족주의자 게릴라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임명했다. 일본의 점령과 한국전쟁에서 굴욕감을 느낀 김일성은 스스로를 한국인의 인종적 우월을 되살리고 제국주의자들이 절대 뚫을 수 없는 요새로 국가를 재건할 마르크스주의적 황제로 선전했다. 그는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하고 북한 주민의 여행의 자유 또는 반대 의견을 제시할 자유를 빼앗았다. 김일성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하여 스탈린과 마오의 죽음 이후의 대혼란을 막으려고 했다. 이는 공산주의 세계에서 최초의 권력 세습이었다. 그러나 1994년에 권력을 잡은 김정일은 타고난 선동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는 영화 애호가였고, 통통하고 주로 앉아 있기를 좋아했던 인물로 자신만의 "고질라"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좋아하는 영화에는 '람보'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있었다.)
김정일은 점점 고립되고 편집증이 심해졌다. 그는 자신의 육성이 공개적으로 발표되는 것을 딱 한 번만 허용했다. 1992년의 퍼레이드에서 "조선 인민군의 영웅적인 병사들에게 영광 있으라!"라고 말했을 때였다. 해외순방 때에는 그의 보좌관들은 외국 정부가 분비물을 낚아채서 그의 건강 상태를 평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배설물을 도로 가져왔다. 그는 160cm가 채 안되었는데, 키에 대해서 자신 없어했다. 1978년 그는 좋아하던 남한 여배우 최 은희의 납치를 명령한 뒤에 만나서는 "제가 난쟁이 똥자루 같지요?"라며 인사했다. (최은희는 1986년 비엔나 여행 중에 탈출하기까지 북한 영화에 강제로 출연해야 했다.) 2004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시인이자 고위 선전가인 장진성은 김정일을 만나러 갔을 때 보좌관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마시오. 깃 아래 두 번째 단추를 보시오. " "뵙기 전에 손을 닦을 물수건이 지급될 것이고, 손목시계나 혹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금속 제품은 벗어야 될 것이오."
그러나 김정일은 북한 지도자 누구보다도 미국과의 평화 관계를 구축하고, 북한의 고립을 끝내기 위해 한걸음 더 다가섰었다. 평양을 방문한 유일한 미국 국무 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Madeleine Albright)는 2000년 북한 미사일 프로그램에 관한 협상 조건을 협의하면서 김 위원장과 이틀에 걸쳐 12시간 이상을 함께 보냈다. 그녀는 김 위원장을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몸소 미국 대표단을 위해 공연된 춤을 안무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또한 현실적이고 박식하기까지 했다. 미국 대표단이 고도의 기술적인 질문을 했을 때, 그는 그중의 많은 질문을 전문가 자문 없이 직접 대답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의 방북시 동행했던 외교관 웬디 셔먼 (Wendy Sherman) 은 이후에 오바마 대통령 시절 이란 핵협상 테이블 미국 측 대표 대표가 되었는데, 방북 당시 북한이 핵무기를 획득하게끔 만드는 외골수를 감지했다. "우리는 2년, 4년, 6년의 시간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북한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김일성 시절부터 장기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그 비전을 고수했습니다 "고 말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마지막 몇 달을 남겨두고 올브라이트와 셔먼은 김 위원장이 장거리 미사일 시험 동결을 거의 받아들였다고 믿었다. 그러나 2000 년의 논란이 있는 미국 대통령 선거와 클린턴의 중동 지역 평화 협상 추구는 행정부의 마지막 몇 주를 잡아먹었다. 그들은 다시는 평양으로 돌아 가지 못했다. 셔먼은 "만약 우리 팀이 평양에 갔었더라면, 그리고, 만약 김 위원장이 우리의 조건에 동의했었더라면 미국 대통령이 방북할 날짜를 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취임을 하고 나서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의도가 없다"라고 약속한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의 공식 발표를 재확인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나서 2002년 연두 교서에서 부시는 이란과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유명한 표현인 '악의 축'에 포함시켰다. 양국 관계는 그 이후로 악화되었다. 2009년 클린턴 전 대통령이 2명의 억류된 언론인 석방을 위해 김 위원장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은 탄식했다고 한다. 부시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우리는 이전 정권과 관계를 보다 빨리 보다 좋게 만들 수 있었는데 놓쳐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추후에 위키리크스에 의해 누출된 당시의 미국 측 회의록에 따르면, 김정일은 덧붙이기를 "미국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동북아에서 새로운 친구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온갖 괴짜 같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그의 아들이 여태 하지 않는 방식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쌓았다. 제럴드 포스트 Jerrold Post는 C.I.A. 내에 심리전단을 세웠고, 이후 김정일의 의사 결정을 연구했는데, 내게 말하길, "김정일은 늘 상대방의 인내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디까지 갔다가도, 딱 제때 맞춰서 물러서곤 했습니다. 그는 아주 정교하게 조율된 정치적 촉각을 가졌었지요." 포스트는 김정은이 이러한 기술을 연마할 시간이 거의 없이 복잡한 시나리오에 던져졌다고 우려했다. "김정일은 공식적으로 정권을 계승하기에 앞서서 20년을 대기했었는데, 아들인 김정은의 경우는 2년이었습니다."라고 포스트는 말했다.
김정일의 자녀들 중에서 누가 나라를 통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전 계획이 없었다. 국무부 한국 전문가였던 에반스 리비어 Evans Revere는 김정은이 태도와 공격성에 힘입어 후계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어렸을 때, 생일날이면 소련 군복을 입곤 했다. 주석궁의 직원들은 그를 장군님이라고 불렀다. 김정일의 자녀들을 위해서 일정 시간을 놀이 상대가 돼주었던 일본인 요리사인 후지모토 겐지 (Kenji Fujimoto)에 따르면 김정은은 "정신력 inner strength"을 발휘하곤 했다. 후지모토는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회고록을 쓰기도 했는데, 어린 김정은에게 비디오 게임과 원격 조종 자동차를 선물로 주었고, 김정은이 농구를 좋아해서 여동생을 시켜 시카고 불스 농구 경기의 비디오 녹화 테이프를 보내도록 했다.
1996년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에 있던 형 김정철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당시 그들은 이모와 함께 있었다. 그곳 학교에서 김정은은 박은이라는 가명으로 다른 학생들에게는 북한 대사의 아들로 소개되었다.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학교 동기였던 조앙 미카엘로 João Micaelo가 회상하기로는 "언젠가 김정은이 나한테 '그래, 내가 북한 지도자의 아들이야.'라고 말했지만 평범한 학교였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굉장히 조용했지요. 아무하고도 말하려 하지 않았고요.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가며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운동을 할 때는 경쟁적이었죠. 우리처럼 지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죠. 그에게는 농구가 모든 것이었죠. "김정은을 돌봤던 이모 고영숙에 따르면, 김정은은 마이클 조던의 그림을 그리고, 농구공을 안고 잤다. 그녀는 알프스에서 스키를 하게 했고, 코트 다쥐르에서는 수영을, 파리의 디즈니 공원에도 데려갔다.
그는 고집이 엄청 셌다. 공부를 안 한다고 꾸지람을 들으면, 밥을 먹지 않으려 했다. 고영숙은 작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말썽꾸러기는 아니었지만 성미가 급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와 남편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현재는 가명으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
김정일이 후계자를 선출할 때가 되었을 때, 그의 네 딸은 딸이어서 성별 때문에 부적격이었다. 맞아들인 정남은 정치가보다는 플레이보이에 가까웠는데, 2001년에는 4살짜리 아들을 도쿄 디즈니랜드로 데려 가기 위해 위조된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걸리기도 했다. 2남인 정철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스위스에 있을 때, "나의 이상향"라는 시를 썼다. 시의 내용은 "내가 바라는 세상에서는 무기와 원자 폭탄은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테야. 할리우드 스타 장 클로드 반 담 (Jean-Claude Van Damme)과 함께 모든 테러리스트를 박살 낼 테야. "후지모토에 따르면 김정일이 김정철은 "어린 소녀 같기 때문에 "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현재 그는 동생의 측근으로 일하며, 김정은의 자연스러운 후계자로 여겨진다.)
그래서 김정은만 남았는데, 김일성 종합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김정은은 포병 장교로 훈련을 받았고 보안과 정치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2009 년에 북한 전문가들은 당시 25세의 김정은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리비어는 "그는 어떤 책임 있는 일을 한 적도 없었고, 일반적으로 조직에서 위로 올라갈 때 거치는 검증도 받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히 김정은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호소할만한 성격과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징 중에는 그의 아버지가 갖지 못했던 일정 수준의 권위와 적극성, 자신감 같은 것도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에 따르면, 권력을 잡기 전에 김정은은 그가 얼마나 위험을 감수해내는 지 허용치를 미리 보여준 대담한 군사 작전을 벌렸다. 2010년 3 월, 북한은 남한의 해군 함선 천안함을 어뢰로 공격하여 46명을 숨지게 했다. 연평도도 포격해 2명이 사망했다. 이러한 행동은 맹렬한 대응이 나올 수도 있었지만, 결국 남한은 보복하지 않았다.
평양에서 소비에트 외교관을 지냈던 알렉산드르 만수로프 (Alexandre Mansourov)는 김정은은 군사 공격을 통해 북한 내 엘리트들에게 그가 군사 대립을 꺼려하지 않음을 확신시켜 주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의 자리매김이었습니다."라고 만수로프는 말했다. "김정은은 북한 내 엘리트들과 아버지 김정일에게 그가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어야 했습니다." 그해 가을, 김정은은 장군의 계급으로 승진되었고 아버지 김정일의 옆에 서 공개적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으며, 세계를 향해 자신이 후계자로 선택되었음을 알렸다.
초고속 서열 상승에서, 김정은은 결정적인 습관 같은 것을 얻게 되었다. 만수로프는 "그는 누구한테도 No라는 말을 듣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누구도 금지선을 그어 놓고, '여기서부터는 절대 안 돼"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의 면상을 후려갈겨서 아프게 할 사람이 없었지요. 우리는 '어려운 일을 해봐야 성숙해진다'고 말하곤 하죠. 김정은의 경우에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하며 성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뭐든 얻기로 목표를 삼으면 손에 넣습니다.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입니다. 우리는 그의 브레이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며, 내 생각에는 김정은도 어디에서 멈출 수 있는지를 모르지 않나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III. "일편단심 통일"
평양에서 며칠이 지나자 나는 평양 바깥의 삶을 잠시라도 보고 싶어졌다. 나를 감시하던 사람들도 나들이에 동의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도요타를 타고, 남한과 국경을 이루는 비무장 지대를 향해 나아갔다. 평양을 떠나면서, 검문소를 통과했고, 부드러운 아스팔트는 결국 빗물이 가득한 움푹 들어간 웅덩이들로 바뀌었다. 북한의 부와 현대성은, 변변치 않지만, 대개 수도에 국한되어 있다. 도로에서 처음에는 차들이 사라지고, 다음은 자전거가 사라지더니, 나중에는 농부들의 무리만 지나치게 되었다. 머리에 짐을 진 여자 하나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철길을 따라 걸어갔다. 동아시아의 대부분의 하늘에 떠 있는 스모그도 없이, 북한의 풍경은 눈부시게 밝은 초록빛이다. 북한의 80 퍼센트는 산이다.(미국의 군사기획자들은 북한의 지형을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에 비유한다.)
우리는 문 닫힌 식당 옆에서 잠시 내려 쉬어가기로 하고 멈췄는데, 2대의 버스에 탄 외국인 관광객을 보게 되었다. 9월 1일부터는 미국인 관광객들은 국무부 명령에 따라 북한을 방문하는 것을 금지 당할 것이다. 이 명령은 오토 웜비어 Otto Warmbier 사망에 따른 것으로, 버지니아 주립대학교 학생이었던 웜비어는 평양의 한 호텔의 벽에서 선전 포스터를 떼려다가 "반 국가 적대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억류되었었다. 6월, 웜비어가 1년 넘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한 미국 관리들은 그의 석방을 확보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지 6일 후 사망했다.
내가 곧 있을 여행금지 명령을 언급하자, 박은 수년간 내부적으로 고민한 끝에 북한이 더 많은 외국인 관광객을 수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감이라고 말했다. "군 관계자들은 관광객들이 이곳에 오는 것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워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제 우리는 강해졌습니다."
최근 몇 개월 동안 나는 웜비어 사건에 관련된 미국 협상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왜 협상이 비극적으로 끝났는지 궁금해했다. (지난 20 년 동안, 적어도 16명의 미국인이 북한 방문 중에 억류되었지만, 그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웜비어는 2016년 1월에 체포되었다. 공개 재판이 있은 후, 15년 노동 교화형을 선고받았다. 북한 당국은 웜비어가 보툴리누스 균에 감염되어, 진정제를 투여받은 후에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석방 후에 그를 치료한 신시내티의 의사들은 보툴리눔 식중독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많은 북한 전문가들은 그가 실제로 병에 걸렸고 치명적인 수준의 과다 약물 투여를 받지는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다른 이들은 그가 구타를 당하거나 의식을 잃을 정도까지 심문을 받았지 않나 의심했지만, 그런 일은 특이한 일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북한 내 미국인 억류자들은 협상카드로 간주되기 때문에 구타 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뉴멕시코 주지사였던 빌 리처드슨 (Bill Richardson)처럼 웜비어 가족들을 위해 일했던 협상자들은 노력했지만 좌절감을 느꼈는데, 나는 박에게 왜 북한 당국이 그들을 의도적으로 피했는지 물었다. 박은 2016년 7월의 오바마 행정부의 결정 탓으로 보았다. 그 결정은 김정은과 다른 고위 관리들에 대한 개인적 제재를 가하는 것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 지도자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이름을 들먹여가며 중상모략했습니다." 박이 말했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제재를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뉴욕 채널을 차단하고 전시 조치를 채택했습니다. 이미 말했지만, 그때 이후로 상황이 현상태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나는 웜비어의 죽음이 미국 내 북한의 명성에 박이 현실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더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말했다. 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웜비어는 우리 법을 어겼고, 우리는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 들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아침 미국의 뉴스는 샬로츠빌의 인종 차별 시위에 관한 것이었고 박은 "북한 군부에서는 미국인들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미국에서 하듯이 여기 와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아직까지 3명의 미국인이 여전히 북한 내에 구금되어있다. 김동철은 간첩 혐의로 기소되어, 10년형을 복역 중이며, 김학송과 토니 김은 불특정 혐의를 받고 있다)
아침나절이 되어서,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아물지 않은 상처이자, 한국 전쟁의 잔재인 D.M.Z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은 20세기의 다른 극적인 사건들에 의해 가려져 있지만, 이 전쟁의 역사를 살펴 보아야 미국에 대한 북한의 적개심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1950년 6월, 북한은 공산주의하에 한반도 통일을 위해 남한을 침략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반대편에 서서 전쟁에 돌입했으며, 1953년이 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분쟁이 교착 상태에 이르렀다고 결론을 내렸다. 53년 7월, 4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후, 양측은 정전 협정에 서명했지만 이것은 (휴전이지) 평화 협정은 아니었다.
피해 망상과 미국에 대한 경멸을 구축하는 북한 정권의 노력은 한국 전쟁 당시의 폭탄의 규모와 황폐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 공군 역사 연구실이 1984년에 낸 자료에는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인구의 약 20%가 목숨을 잃었다."라고 한다. 휴전 협정 이후에 양측은 2 Km를 뒤로 물러나서, 2.5마일 폭의 완충 지대인 D.M.Z를 만들었다. 상당수의 군대가 양쪽에 주둔하고 있으며 수년 간의 폭력 충돌로 수백 명의 군인들이 사망했다.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 2015년 8월에 2명의 남한 군이 지뢰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조선 인민군은 안내를 위해 방명진 중좌를 배정해주었다. 30대 후반의 방 중좌는 도드라진 광대뼈에 날카로운 턱을 가졌다. 그는 초록색 제복을 입고 정찬용 접시만큼 넓은 장교모를 착용했다. 우리는 대전차 장애물과 철조망 사이의 좁은 길을 운전해 북한의 평화 박물관(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평화박물관)이 있는 숲 속의 빈터에 도착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북한의 해석은 미국이 한국 전쟁을 시작하였고, 김일성의 탁월한 리더십이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초래했으며, 이후 미국은 다시 전쟁을 도발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방 중좌는 "미국이 조선 인민에 의해 패배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한글이 새겨진 큰 비석으로 안내했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1972년 7 월 19 일을 포함하여 이 자리를 4차례에 걸쳐 방문하셨다.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는 2012 년 3 월 3 일에 방문하셨다. 두 분께서는 침략하던 미군이 인민 앞에 무릎을 꿇었던 이 역사적 유적지를 통일된 조국의 다음 세대에게 보존하고 전달해야 한다는 귀중한 가르침을 주셨다."
모든 나라는 자국의 전쟁 기록을 미화하지만, 사실 같지 않은 승리, 김씨 일가의 신이 내린 지혜, 미국의 지속적인 나약함과 적개심을 다룬 북한의 신화는 북한이 현재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나머지 세계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국교에 가깝게, 북한은 북한 주민들에게 나라는 비록 작을지라도 유례없는 "일심단결"은 사면초가에 몰린 미군을 짓부술 것이라고 말해왔다. 이것은 불안정한 개념이다. 전쟁의 기원에 대해 연구한 컬럼비아 대학교 정치학 교수 로버트 저비스 (Robert Jervis)는 "상대의 적의를 과대 평가하면서도 상대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면 전쟁 발발 가능성이 가장 높다. "라고 말했다. 북한의 몽상이 어디에서 끝나고 현실주의가 재개되는지 알기는 어려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은행나무숲 사이를 달려 도착한 남한과 접경에 걸터앉은 푸르게 칠한 오두막이었다. 헬멧을 쓴 북한 경비병들이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양측이 협상을 가질 때면, 양쪽 국경에 걸쳐 놓인 무거운 나무 테이블에서 만난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마이크들이 군사 분계선입니다." 방중좌가 말했다. 나는 잠시 동안 한국에 가 서 있으려고 오두막을 가로질러 갔다. 방은 "여기는 매우 위험한 곳이지만 군사 훈련 중에 최고 수준의 긴장 상태에서도 존경하는 지도자께서 오셨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과감하게 여기에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네, 라고 대답했다. 그는 낙담해했다.
나는 방 중좌에게 미국과 북한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전쟁을 다시 일으킬 것 같냐고 물었다. 그는 내게 김정은이 태평양에 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경고했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괌에 경고 사격을 할 것이고, 그것이 안 먹히면 미국 본토에 경고 사격을 할 것입니다. 세계 평화를 달성하기를 원하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다면 우리는 전쟁을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
괌에 발사하면 나는 미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으로 기대하는가를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매미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가 방 중좌는 최근 NBC "Today" 쇼에 출연했던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린지 그레이엄 Lindsey Graham 상원 의원의 말을 인용했다. 그레이엄 상원 의원의 말은 번역을 통했지만, 거의 그대로 방중좌에게 전달되었다. 그레이엄 상원 의원은 트럼프와의 대화에 대해 "대통령은 사상자가 "저기"에 있을 것 "이라면서 북한을 타격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고 했다.
방은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이 아닌 조선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 지 알고 있는 겁니다."
정확히 북한에 대한 미국의 선택은 무엇일까? 미국의 많은 한국 전문가들은 "전략적 옥죄기 strategic strangulation"라고 불리는 압박 전술의 대규모 강화에 찬성한다. 미국은 사이버 해킹과 다른 은밀한 방법을 사용하여 미사일 개발을 방해하고 북한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즉, 검열 받지 않은 오락 및 정보를 탑재 한 밀수입된 플래시 드라이브로 북한을 넘치게 할 것이다. 또한 선박 운항을 금지하고, 중국 회사들에 대한 제제를 확대하고, 개별 지도자들의 자산을 동결 시켜서 북한의 불법 무역망을 폐쇄시키려고 할 것이다. 에반스 리비어 (Evans Revere)는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수억 달러의 북한 예금 잔고가 사라지게 된다"라며 "이런 압박의 목표는 정권 붕괴를 일으키는 데 있지 않다. 목표는 정권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북한 주민들에게 확신시키는 것이며, 만약에 김정은이 합리적 행위자라면 그는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계획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북한은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완벽하며, 이 계획이 이전 정권에서 시도했던 것과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고 말했다.
또, 간혹 "쌍중단 freeze for freeze"으로 알려진 단기 대책인, 덜 대립적인 선택지에 대해서 지지하는 의견도 있다. 미국과 한국의 군사 훈련을 중단하거나 줄이면 북한은 무기 개발을 중단할 것이다. 지지자들은 어느 한 쪽이 속임수를 쓰면 취소할 수 있는 동결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안은 더 나쁘다고 말한다. 비평가들은 이런 종류의 선택지는 시도가 되어왔으며, 성공을 못했고, 한미 동맹을 훼손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트럼프 행정부는 전혀 관심이 없다. "소위 말하는 '쌍중단'에 대한 일부 견해는 모욕적입니다."유엔 대사 니키 헤일리 (Nikki Haley)는 9월 4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말했다. "불량 정권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ICBM을 겨냥한다면, 방어자세를 거두진 못할 것입니다."
행정부 밖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어느 정도의 외교적 접촉에 대한 강력한 논거를 듣게 되었다. 2014년 오바마 대통령이 제임스 클래퍼 (James Clapper)를 평양에 파견하여 2명의 수감자 석방을 협상 할 때, 클래퍼는 북한이 자신의 파견 목적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한 당국은 그가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한 일환으로 왔다고
추정했다. "그들은 매우 실망했다." 클래퍼 의 방문은 외교적 접촉이 없는 것이 위험한 오해의 골을 만들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나는 북한 지도층들 사이에 퍼져 있는지는 피해 망상과 같은 피포위심리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무력을 내세운 위협을 하거나, B-1과 같은 전략폭격기를 제트기로 호위해가며 남한이나 일본에서 날려 보내면 우리 기분이야 좋고, 동맹국들을 안심시키겠지만, 우리는 북한 주민들에 끼칠 영향을 감안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클래퍼는 "제 생각에는 우리는 남한 당국과 협의하여 수십 년 동안 하바나에서 했던 것처럼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정부와 일처리를 위해 평양에 이익대표부를 세우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평양에 상주기관이 있었더라면, 웜비어와 같은 비극적 결과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둘째로는 북한 안에서 실제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현장 통찰력-정보-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북한의 접촉이 얼마나 부족한지는 가장 잘 알려진 의견 전달자 중의 하나가 일명 Worm인 90년대 시카고 불스의 악동, 데니스 로드맨 (Dennis Rodman)인 것을 보면 안다. 로드맨의 대리인인 한 덩치 하는 전직 종합격투기 선수 크리스 볼로 Chris Volo가 최근 나에게 말했다. "나는 4 년 동안에 4 번 북한에 갔었습니다. 동해에도 갔었습니다. 혼자서 김정은과 제트 스키를 탔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라고 혼자 말하곤 했지요." 로드맨과 김정은의 이상한 유대 관계는 2013년에 시작되었다. 김정은의 시카고 불스에 대한 애정을 알고 있던 바이스 미디어 (Vice Media)는 미국 농구 선수들을 북한으로 데려 갈 것을 제안했다. 마이클 조던 (Michael Jordan)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아무 진전이 없었다. 나이트클럽을 돌면서 사인회를 열고 있던 로드맨은 가고 싶어 했다. 그는 평양에서의 게임을 위해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Harlem Globetrotters 농구 팀원 3명과 합류했다. 김정은이 전격 방문을 하였고, 로드맨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다음에 북한에 오면 일주일 동안 원산의 개인 해변 휴양지에서 보낼 것을 제안했다. 로드맨은 나중에 "하와이 나 스페인 이비자 섬 같지만, 온 섬에 김정은 혼자 사는 곳"이라고 말했다. 6월의 가장 최근의 여행에서, 로드맨은 김정은에게 트럼프의 1987 년 베스트셀러 "거래의 기술 The Art of the Deal"의 영문판과 한글판을 선물했다.
궁극적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은 적대적이고 신뢰할 수없는 적성국과 공존하기 위해 억제, 군축, 외교를 사용했다. 소련은 가장 많을 때에는 5만 5 천 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랜드 코퍼레이션 (Rand Corporation)에 따르면, 북한은 2020 년까지 50-100 개의 핵무기를 순조롭게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영국 핵무기 보유 규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난달 오바마 대통령의 국가 안보 보좌관을 맡았던 수잔 라이스 (Susan Rice)는 타임지 기고문에서 북한의 위협을 무력화하기 위해 미국이 '전통적인 억지력에 의지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맥매스터는 소련에 적용했던 모델이 평양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그는 "이 상황이 우리가 소련과 겪었던 상황과 다른 이유가 있다. 북한은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미국을 협박하여 남한과 동맹 관계를 포기하고 잠재적으로 또 한 번의 한국 전쟁의 길을 열려는 의도를 보였다."
미국 행정부가 예방 전쟁을 선택한다면, 한가지 옵션은 "참수 작전"으로, 대다수 분석가들은 위험을 용인할 수준을 넘어섰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고위직 지도자를 재래식 또는 핵 공격으로 죽이는 활동이 있다. 그러한 공격은 북한 정권 주변의 인구를 한데 모아서 살아남은 지휘관이 핵무기로 대응하게 할 수 있다. 또 다른 옵션은 이스라엘의 1981년 오시라크 원자로 비밀 공격과 유사한 것으로 후세인 핵무기 개발의 핵심시설이었던 오시라크 원자로를 습격하여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을 적어도 10년 후퇴시킨 사례가 있다. 한 고위 당국자는 내게 "이는 예방 전쟁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시라크와 북한의 비교는 제한적이다. 1981년에 이라크는 아직 핵폭탄을 하나도 만들지 못했고, 핵 공격 대상이 하나 밖에 없었는데, 사막에 고립되어 비교적 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북한은 이미 수십 개의 사용 가능한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몇 개인지 모를 시설에 분산되어 있으,며, 시설 중의 상당수가 지하에 숨겨져있다. 심지어 발사대의 미사일을 파괴하는 것도 훨씬 어려워졌는데, 북한이 이동 발사대와 고체 연료 미사일을 개발해서 이전의 액체 연료 미사일보다 훨씬 발사 준비 시간을 짧게 해서 배치 및 발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의 핵무기를 파괴하려는 예방 전쟁의 잠재적인 비용과 이익을 연구했다. 타임지에 실린 라이스의 기고문에 따르면 결론은 "정신 나간 짓"으로 수백만은 아니어도 족히 수십만의 수십만의 희생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서울에 대해 보복을 할 것이다. 북한은 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한국의 수도와 그 외 인구 밀집 지역을 사정거리로 수천 개의 대포와 로켓 발사대를 배치했다. (대결을 피하라는 국내 압박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한국 대통령은 사드(미국 고위험 방위 시스템 Terminal High-Altitude Area Defense, THAAD) 설치를 승인했다.)
한국에는 약 20만 명의 미국인이 살고 있다. (일본에는 4만 명의 미군 요원이 배치되어 있고, 이들 역시 공격에 취약하다. ) 노틸러스 안보 지속 가능성 연구소 (Nautilus Institute for Security and Sustainability)의 서울에 대한 북한 공격의 위험과 관련한 2012 년 연구에 따르면, 6만 5천 명의 민간인이 개전 첫날에 사망 할 것으로 추정되고, 그 뒤를 이어 수만 명 이상이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만약 김정은이 비축하고 있는 사린 가스와 생화학 무기를 사용하면 피해는 수백만 명에 이를 것이다. 미국과 한국 군대는 결국에는 북한 포병대를 압도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전쟁은 현대 최악의 대량 살상을 낳을 것이다.
금년 여름 미국과 아시아에서 수십 번의 대화를 나눴는데 정치권 전반의 전문가들은 트럼프와 맥매스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북한이 핵보유국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고, 그다음으로 김정은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사용 혹은 판매를 하면 전멸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연세대학교의 존 델러리 (John Delury) 교수는 "언젠가는 문제는 적대 관계라고 생각하는 미국 대통령이 - 트럼프 일수도 모르지만- 나타나서, 개선을 위한 조치를 밟아간다면, 비핵화로 가는 완행열차는 역을 떠나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핵보유국 북한을 관리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 것이다. 남한, 일본, 알래스카, 하와이에서보다 강력한 미사일 방어 체제가 필요하고, 북한의 무기 위치를 추적하기 위한 정보기관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서 우리가 그것들을 파괴할 수 있다는 믿을 만한 위협을 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미국 외교 협회 the Council on Foreign Realtions의 스콧 스나이더 (Scott Snyder)는 "우리는 결국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함께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겠지만,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점부터는 핵 공격 준비와 관련 될 수 있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움직임이라도 미국의 선제 대응을 촉발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런 위험이 있더라도, 거의 모든 면에서, 전쟁보다는 낫다.
IV. "혼자 죽지는 않겠다"
8월 17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realDonaldTrump에서 새로운 트윗을 발견했다. "북한의 김정은은 매우 현명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다른 결정을 내렸더라면 비극적이 고,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었다."대통령이 말하는 결정이라는 게 뭐지? 온라인을 훑어본 후, 괌으로 미사일을 발사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어리석고 미련한 미국 놈들의 행태를 조금 더 지켜볼 것"이라는 김정은의 발언을 트럼프가 골라냈다는 것을 발견했다. 트럼프에게는, 이 말이 김정은이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그는 기뻐했다. (며칠 후 트럼프는 피닉스의 집회에서 "김정은이 우리를 존중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신호를 빗보는 것처럼 보였다. "성명서의 반쪽만 읽었네요." 박은 실망해하며 말했다.
그날 아침, 나는 제네바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근무했고, 최근 미국으로 발령이 난 조철수라는 고위 외교관과 인터뷰를 할 예정이었다. 우리 호텔의 엄청나게 큰 김씨 부자의 초상화 옆 큼지막한 안락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조는 통역을 할 젊은 직원과 함께 왔고, 발언할 인쇄물 한 묶음을 들고 왔다. 그는 양국 관계의 "현재 상황과 역사에 대한 개괄"부터 시작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짧게 하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17 분 동안 최신 제재를 맹비난하는가 하면 ICBM을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갈채를 보냈다. "현재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으며 새로운 제재와 위협이 뭐라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 없습니다."
그가 발언을 끝내자 나는 밤사이에 트럼프가 김정은에 대해 트윗을 했다고 말했다. 조는 한방 먹은 것 같았다. 미리 준비한 그의 말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그는 큰 소리로 트윗 내용을 읽어달라고 부탁했고, 내가 읽는 동안, 내용을 받아 적었다. 읽기를 끝내자, 조는 나를 쳐다보며, 통역을 통해 "한 번 더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트윗 내용을 읽었다. 조는 자신이 받아 적은 종이를 쳐다 봤다. 그는 잠시 후 했던 얘기를 되풀이하다가 즉흥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고압적인 관행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 대한 일방적인 강요를 끝내야 합니다.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
조는 제대로 된 작별 인사로 인터뷰를 마무리했습니다. 통역은 "뉴요커가 매우 영향력이 있으며 오늘 대화를 통해 매우 좋은 예감을 받았습니다.당신이 공화국과 미국 사이의 양국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는 기사를 써준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셋은 로비로 걸어갔다. 조가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주문하고 내 쪽으로 돌아보더니, 거의 완벽한 영어로 "미안합니다. 커피 드실지 여쭤봐야 했었는데, 한 잔 주문해드릴까요?"
외교관은 언어를 얼마나 잘하던지 상관없이, 공식적인 경우에 종종 통역을 이용하지만, 나는 조가 그의 공식적인 가면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나는지를 보고 감탄했다. 우리는 담소를 나눴고, 나는 그가 미국에 가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한 번도 안 가봤다고 그가 말했다. 나는 트위터의 안개 속에서 미국을 경험하는 것이 어떨지 궁금해했다. 후에 그것이 정치적 선전으로 북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미국인 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느 날 아침 , 아침을 먹고, 박은 나를 평양 시내의 한 지하철역으로 데려다가 "이것은 핵 전쟁에 대비한 것"이라고 선언하듯이 말했다. 지금까지, 나는 임박한 대재앙에 대한 그의 쾌활한 표현에 익숙해졌지만, 이번 것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는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은 군수용으로 쓰일 수 있게끔 이중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교차로 밑의 아래쪽 도로를 가리키며 피난처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 블록의 뒤뜰에서 주민들은 저장고로 피난할 수 있다. 통근자에 둘러싸여, 우리는 역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70 년대에 러시아 원조로 지어 졌던 평양 지하철은 100미터 아래에 있는데, 뉴욕 지하철에서 가장 깊은 플랫폼 보다 거의 두 배 정도 아래이다. 평양의 역은 방폭문을 갖추고 있다. "한국 전쟁 중에 우리는 핵무기 위협을 받았다"라고 박은 말했다. 1950년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에서 원폭 사용 가능성을 언급했다. 박은 "그게 우리 인민의 마음에 사무쳤습니다. "라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핵무기를 가졌으니, 쉽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어디 한번 해보자." "
핵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의 전략가들은 북한이 핵무기 또는 화학 무기를 일본이나 괌의 미군 기지에 처음 발사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면 미국이 본토의 공격을 무릅쓰기보다는 화력 사용을 자제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말이다. 내가 그런 얘기를 박에게 언급하자, 박은 다른 시각으로 반박했다. "핵 전쟁의 요점은 상대방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조치고, 작전이고 없습니다. 그런 건 재래식 전쟁 때나 해당되는 거죠 "
지하철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확성기를 통해 연주되는 애국적인 선율의 오케스트라 음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열차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유리 뒤에 신문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그 장면은 베이징에서 봤던 30 년된 사진을 연상시켰다. 우리는 잠시 열차를 탔다가, 지상으로 한참을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나는 다시 바깥공기를 쐬게 되어 반가웠다. 도요타에 타고 나서, 박은 "미국이 제재와 제재, 제재와 제재를 계속하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면 우리는 공격할 것입니다. 세계 대전이 바로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그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이어서 말했다. "우리를 너무 심하게 몰아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얘기할 겁니다."
귀에 익은 상투적인 문구였다. 북한 문제에 몰두해있는 몇몇 미국 당국자들은 옛 한국 속담을 자주 언급한다. "Nuh jukgo, nah jukja!(너 죽고 나 죽자!)"는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라는 의미다. 술집에서 싸울 때나, 혹은 분통터진 배우자로부터 듣는 표현이다. 다른 쪽도 함께 떨어진다면, 한 쪽이 절벽 끝으로 갈 것이라는 개념이다. 크리스 리 Krys Lee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이자 번역가로, "우리 어머니도 나한테 그런 말했었죠!"라고 말했다. (참고로, 크리스 리는 '내가 북한인이 되기까지 How I became a North Korean', '떠도는 집 Drifting House'라는 두 권의 소설집을 낸 사람이랍니다.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 크리스 리는 한국인은 "더 추상적이고 극적이며, 감상적인 말"을 쓰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미국인과 한국인이 서로의 정확한 감정을 측정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그녀는 많은 한국 문학 전공 학생들이 미국 작가 중 가장 함축적인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 "사실적이다 못해 매우 건조하고 번역이 잘 안된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평양에서의 마지막 아침, 조국 해방 전쟁 승리기념관을 찾았다. 김정은은 집권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 기념관을 개조 보수하고 확장했다. 현재 기념관은 루브르 박물관의 거의 4 분의 3 크기이다. 조선 인민군 대위, 최은정이 나를 안내해줬다. (저자의 오류입니다. 안내원도 인민군이긴 하지만, 일반 군인과는 다른 계급으로 관리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최의 말로는, 금요일은 외국인에게만 열려 있다고 했다.) 20대 중반의 큰 키의 최는 세련된 물결 모양의 머리가 어깨에 닿을 정도였다. 그녀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오늘 박물관을 다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 보려면 3, 4일이 걸립니다."
우리는 가슴이 떡 벌어진 젊은 김일성의 3층짜리 화강암 조각상 밑에 섰다. 젊은 김일성은 손자인 김정은과 구분이 안되었다. 내가 그들의 동상을 구별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최에게 얘기하자 그녀는 신나하며 말했다. "아무런 설명이 없으면, 다들 김정은 원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시물에는 실물 크기의 왁스 인형이 사용되었는데, 숲 속에 몸을 숨긴 인민군 한 명이 있고, 죽은 미군 병사는 눈이 뒤집혀서, 까마귀가 가슴을 쪼고 있었다. 우리는 과거에 노획된 곡사포와 탱크, 그리고 "말라리아, 콜레라, 장티푸스"가 담긴 "세균 폭탄"을 배달했다고 최가 말한 미국 비행기를 지나쳤습니다. (그런 주장은 일반적으로 거짓이라고 밝혀졌다.) 최는 "조선 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라는 비디오를 보게 했는데, 비디오의 해설자는 "한국 전쟁은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던 미국의 호전적인 외교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근거 없는 믿음은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한 전시물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적나라한 암시를 담고 있었다. 박물관의 옆에서, U.S.S. 푸에블로호에 올랐다. 푸에블로호는 한국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1968 년 1 월에 나포된 해군 간첩선이다.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적대 행위가 급증한 가운데 발생한 나포는 북한 입장에서는 겁없는 도박이었다. 한 명의 미군 승무원이 사망하고, 82명이 억류되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해상 봉쇄 또는 핵 공격까지 보복을 고려했다. 그러나 그는 베트남 전쟁에 사로잡혔고, 결국 보복하지 않았다. 11개월 후, 미국은 간첩 행위에 대해 사과했고 포로 석방을 얻어냈다.
푸에블로 사건으로 거의 전쟁을 시작할 뻔했지만 김일성은 강렬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교훈을 얻었다. 루마니아의 국가 기록 보관소에 있는 문서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1971년 사적인 대화에서 루마니아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Nicolae Ceauşescu)에게 푸에블로와 그 외 교착 상태의 결과 미국이 포기하는 것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미국인들은 이런 싸움을 계속하고 싶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조선 인민과 다시 싸울 의사가 없음을 우리에게 알렸다."
2009 년부터 2014 년까지 미 국방부에서 근무한 국제 관계 학자 반 잭슨 (Van Jackson)은 푸에블로 나포를 포함해 김씨 일가의 위기 대처 방식을 수년 간 분석했다. 할아버지의 승리 이론이 여전히 북한을 도발로 몰고 간다면서 북한 정권도 이런 한계를 알고 있다고 얘기했다. 생존을 위해 폭력을 선택하지만 단계적 확대는 피하는 식이다. 그는 "남한이 D.M.Z.에서 거대한 대북 선전 스피커를 크게 틀면, 북한이 스피커 근처로 경고 사격을 하지만, 감히 스피커 자체를 공격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남한의 비정부기구들이 열기구를 이용해 북한에 선전 전단지를 보냈을 때 - 북한을 진짜 화나게 했다 - 북한은 NGO 사람들을 직접 공격할 것이라고 협박했지만, 대신해서 무인 풍선에만 발포했다." 잭슨의 견해로는 북한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미국이 북한을 그렇다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잭슨은 트럼프 행정부가 예방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잭슨은 내게 "트럼프는 과거에 전쟁을 막았던 한 가지, 즉 미국의 자제를 포기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미사여구와 근거를 수용하면서 미국은 적개심의 악순환을 무릅쓴다. 이 악순환에서는 어느 쪽도 전쟁을 시작할 의도는 없지만 위협과 협박이 더 공격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서로 자극하다가 자신들이 피하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충돌로 갈지도 모른다.
전쟁 억제 전문가인 토마스 셸링 (Thomas Schelling)은 1966년에 그의 책에서 벼랑 끝 전략은 무엇보다도 "신뢰와 기대"가 중요하다고 썼다. 우리가 이해하는 북한의 신뢰와 기대는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무엇보다도, 이 핵위기 시대에 워싱턴과 평양을 오고 가다 보면 두 나라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지 않는가에 놀라게 된다. 18 년 동안의 기자 생활에서 한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에, 외교관, 전략가 또는 그 주제에 평생을 바친 학자들 중 누구도 확신을 갖고 상대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할 수 없다는, 이 정도의 불확실성을 느껴본 적은 없다. 우리는 김정은이 실제로 자기 나라의 핵무기 사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은 북한의 고립과 근거 없는 믿음이 미국의 해법을 얼마나 왜곡 시켰는지를 그야말로 모른다. 우리는 김정은이 오히려 더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가 남한을 되찾겠다는 그의 가족의 꿈을 완수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카다피처럼 끝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인지 모른다.
트럼프 행정부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북한에 대한 우리의 지식 격차가 억제 정책을 반발한 논거가 된다. 그런 사람들은 북한이 상호 확증 파괴의 전망에 제약을 받는다고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대안이 파국을 초래할 비용의 전쟁이라면 우리 지식의 틈새가 다른 논거를 만들어야 한다. 이라크는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적과 전쟁을 치렀을 때 드는 비용을 가르쳐주었다. 우리가 아시아로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 전에, 우리는 그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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