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은
광해임금때의 문신으로 우리에게는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지은이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문집인 '성수시화'에 보면
'홍길동전'말고도 몇개의 한문소설이 있습니다. 다만 홍길동전이 너무 유명하여 그의 한문소설도 주옥같은 명작이지만 묻혀 버리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올려 보았습니다.
학습에 도움을 주기 위해 글 말미에 한문을 첨부하였습니다.
엄처사전(嚴處士傳)
- 허균(許筠)
엄
처사(嚴處士)는 이름이 충정(忠貞), 강릉(江陵)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이 무척 가난하여 몸소 땔감과 먹을
것을 마련하였다. 그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효성을 다하여 새벽이나 저녁에는 곁에서 떠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조금만 편찮으면 마음
편하게 잠자리에 들지도 않으며, 손수 음식을 만들어 드시게 하였다. 어머니가 비둘기 고기를 즐겨하자, 그물을 짜고 간대에 갖풀을
붙여서라도 기필코 잡아다가 대접하였다
그
어머니가 글을 배워 과거를 보도록 타이르자, 더욱 열심히 글을 배우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시부(詩賦)를 아주 아건(雅健)하게
지어 내서 여러번 향시(鄕試)에 뽑혔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하였다. 책이라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유독《주역(周易)》과《중용(中庸)》에 깊이 파고들어 이치에 높고 멀리 나아가, 저술한 글들이 하도낙서와 서로 부합되는 경지였다.
어머니 병환이 위독하여 자기를 데려가고 어머니 살려 주기를 하늘에 기도했지만, 회생하지 못하자 여러날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일어날 정도였다. 3년간 여묘(廬墓) 살이에도 죽만 마셨다.
복제(服制)를 마치자, 벗들이 과거에 응하기를 권했다. 처사(處士)는 울면서. 이르기를
"나는 늙은 어머니를 위해서 과거보려 하였다. 이제 왜 과거를 보아 내 몸만 영화롭게 하고 어머니는 누릴 수 없게 하랴. 나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
하면서 목메인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남들이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만년(晩年)에
우계현으로 이사와 살며 산수(山水)가 유절(幽絶)한 곳을 택하여 띠집[茆舍]을 짓고, 거기서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 궁핍하여 제
몸을 의탁하지 못했으나 마음만은 편안하게 살았다. 사람됨이 화평하고 순수하며, 평탄하고 툭 트여 남들과 거슬리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공손하고 지성스러웠으나 고을에서의 잘잘못을 평하거나,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어야 할 것들에 있어서는 확고부동하여
범할 수가 없었고, 일체를 의(義)로만 재단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제자들을 교육시킬 때도 반드시
충효(忠孝)를 첫째로 하고 화려한 명리(名利) 따위야 완전히 벗어난 듯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었다.
사서(史書)를
읽으며 성패(成敗)ㆍ치란(治亂)ㆍ군자(君子)ㆍ소인(小人)을 구별함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강개하여 막힘이 없어 들을 만하였다.
명확히 판단하고 막힘이 없어 들을 만하였다. 두목이나 문산이 죽어간 대목에 있어서는 별안간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문장은 간결하고 절실하여 운치가 있었고, 시도 역시 장려(壯麗)하게 지어 냈다. 그래서 전해지고 외어지던 것들이 1백여
편이었는데, 모두 시작(詩作)의 규범에 합치되었으나 처사 자신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조정(朝廷)에서도 듣고, 가상히 여겨 두
번이나 재랑을 제수(除授)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고 말았다.
향년(享年)
78세였다. 생을 마치려던 무렵에 오래 전부터 출입하던 몇 사람과 학자 10여 명을 초대하였다. 주안상을 차려 대접하고는 이어서
자기 죽은 뒤의 일을 말했으니, 반드시 선산에다 장사지내 주고 그의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아끼던 도서(圖書)들을
문인(門人)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단정히 앉아 조용히 서거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평소에 알지
못하던 선비들까지도 모두 와서 조상(弔喪)해 주었다. 유문(遺文)은 흩어지고 잃어버려 모아놓지를 못했다.
외사씨(外史氏)는
논한다. 처사(處士)는 가정에서 효도를 다했고 고을에서 절도 있는 행실을 하였으니, 분명히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끝까지 궁하게 살다가 세상을 마쳐 그의 훌륭한 재능이 조금도 쓰이질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선비들이 묻혀 사는 암혈(巖穴)에는 이분처럼 이름이 인몰(湮沒)하여 전해지지 않는 선비들로는 처사 한
사람만이 아니어서, 더욱 슬퍼진다
엄처사전(嚴處士傳) 한문본-허균(許筠)
嚴處士名忠貞(엄처사명충정)
江陵人也(강릉인야) 父早卒(부조졸) 家甚貧(가심빈) 躬薪水自給(궁신수자급) 其母極孝(양기모극효) 晨夕不離側(신석불리측)
母稍恙則不解帶寢(모초양칙불해대침) 手調膳以進(수조선이진) 母嗜山雀(모기산작) 結網膠竿(결망교간) 必獲以供之(필획이공지)
其母勸令學取第(기모권령학취제)
益孜孜着力於問學(익자자착력어문학) 爲詩賦甚古(위시부심고) 屢擢鄕解(루탁향해) 得司馬以榮之(득사마이영지)
於書無所不通(어서무소불통) 而尤遂於易中庸(이우수어역중용) 理致超詣(리치초예) 所著文墨(소저문묵) 與河洛相契(여하락상계)
母病殆(모병태) 以身禱於天(이신도어천) 不獲祜(불획호) 水漿不御數旬(수장불어수순) 杖而起(장이기) 三年廬啜粥(삼년려철죽)
制訖(제흘) 朋友勸應擧(붕우권응거) 處士泣曰(처사읍왈) 吾爲老母也(오위로모야) 今奚赴爲(금해부위) 身榮而母不享(신영이모불향) 吾不忍是(오불인시) 悲咽不止(비인불지) 莫敢更言(인막감경언)
晩年移居羽溪縣(만년이거우계현)
擇山水幽絶處(택산수유절처) 構茆舍(구묘사) 將終身焉(약장종신언) 乏不自聊(궁핍불자료) 晏如也(안여야) 爲人和粹夷曠(위인화수이광)
不與人忤(불여인오) 恒居肫肫如也(항거순순여야) 及至鄕評臧否(급지향평장부) 辭受取與之間(사수취여지간) 截然不可犯(절연불가범)
一切以義裁之(일절이의재지) 鄕人皆受而敬之(향인개수이경지) 訓誨後進(훈회후진) 必以忠孝爲先(필이충효위선) 其紛誶名利(이기분수명리)
則泊然不一出諸口(칙박연불일출제구)
讀史至成敗治亂君子小人之辨(독사지성패치란군자소인지변)
必慷慨論折(필강개론절) 亹亹可聽(미미가청) 於武穆文山之死(어무목문산지사) 則輒掩卷流涕(칙첩엄권류체) 爲文簡切有致(위문간절유치)
而詩亦壯麗(이시역장려) 所傳誦者百餘篇(소전송자백여편) 皆合作家(개합작가) 處士不屑爲也(처사불설위야) 朝廷聞而嘉之(조정문이가지)
再授齋郞(재수재랑) 終不赴焉(종불부언)
年七十八(년칠십팔)
將終之日(장종지일) 招所嘗往還者數人(초소상왕환자수인) 學者十餘人(학자십여인) 設酒肴以飮之(설주효이음지)
因言身後當葬先隴(인언신후당장선롱) 而托其幼孫(이탁기유손) 以所玩圖書(이소완도서) 散給門人(산급문인) 端坐穆然而逝(단좌목연이서)
閭巷爭來哭之(려항쟁래곡지) 士夫識與不識(사부식여불식) 皆相弔于家(개상조우가) 遺文散失(유문산실) 不克集也(불극집야)
外史氏曰(외사씨왈)
處士孝於家廉於鄕(처사효어가렴어향) 固當得位(고당득위) 而以母死不賓于王(이이모사불빈우왕) 卒窮以終(졸궁이종)
其才不少售(기재불소수) 惜哉(석재) 巖穴間有士如(암혈간유사여차) 名湮沒而不傳者(명인몰이불전자) 非獨處士(비독처사) 悲夫(비부)
- 성수시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