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 선사께서 입적하실 때 남기신 법어다. 대중들에게 여러 각도로 회자 되고 있다. 산을 뫼 산山으로, 물을 물 수水로만 알아들으면 대사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태산 보다 큰 사람이 있고 물보다 유연한 사람이 있다. 그럴진대 산이 산 아닐 수도 있고 물이 물 아닐 수도 있다.
산과 물에 대해 읊은 시인이 또 있다. 소식蘇軾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중 한 사람이다. 적벽부赤壁賦를 발표한 후 동파거사東坡居士 라는 별호를 얻으면서 소동파蘇東坡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21세 되던 해에 급제하였으니 천재적 자질을 타고났던 것 같다.
동파거사가 고을 원으로 부임하던 날. 상총常總 이라는 소문난 대사가 인근 동인사에 객승으로 머물고 있다 하여 들리게 되었다. 대사께서 소식에게 누구시냐고 인사를 건넸다. 소식이 보기에 듣던 바와는 달리 스님은 남루한 차림새에 무척 늙어 보였다. 소식은 대사를 놀려줄 요량으로 “칭가秤家올시다.” 하고 인사를 받았다.
이런 투의 자기소개는 당신 도력이 얼마나 되는지 저울질을 한번 해 보고 싶으니 어디 한 번 보여주시오. 하는 당돌한 도전이었다. 젊은 나이에 원으로 부임하게 되어 세상을 넓게 볼 줄 몰랐다. 소식이 자기를 소개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악!” 하고 상총이 고함을 크게 지르며 “이것은 몇 근 인고?” 하고 물었다.
화두 같은 질문, 질문 같은 화두, 이 말을 들은 소식은 모든 걸 꿰뚫어 알고 있는 듯한 상총 대사의 한 마디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조금 안다고 자부했던 자신에 대해 대오각성 하였다. 그러한 자각으로 소식은 돌이 된 듯 굳어 버렸다. 소식은 여태 헛배웠다는 회한과 자신의 경망스러움에 부끄러움기 그지 없었다. 산을 내려오다가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이렇게 읊었다.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 그대로 부처님 법문이요 / 저 푸른 산빛이 어찌 부처님 육신이 아니리요 /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로다.」 상총 대사를 만나고부터 마주 보이는 산과, 발을 적시고 흘러가는 시냇물이 예전과 달라 보인다는 뜻을 술회하였다.
소식이 읊은 이 시는 거대한 산맥을 한걸음에 뛰어넘고, 대해를 단숨에 횡단하여 피안의 우주를 향해 외친 현묘한 절규였다. 일찍이 색즉시공色卽是空하고, 공즉시색空卽是色하다 하지 않았던가. 세상을 머리로만 이해할 줄 알았지 가슴으로 음미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초심자 학승에게 “눈을 감으면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공부가 경지에 이른 비구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캄캄하다.”고 대답한다. 소식은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알고 살아오다가 눈을 감아도 「캄캄한 것이 보인다」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셈이다.
들숨 날숨을 몰아쉬며 욕망으로 배를 채워 아웅다웅 살아가는 목숨 나부랭이도 다 허허로운 것이다. 욕망을 버리고자 틀고 앉아있는 그 모습도 버리고자 하는 또 하나의 욕망으로 엉켜있으니 가진다거나 버린다고 하는 그 부질없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날 이후 동파가 산과 물을 어떻게 고쳐보았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동파가 정녕 깨우친 바 있다면, 우주로서의 산과 진리로서의 물을 가슴에 안았을 것이다. 진리는 정중동靜中動이요 동중정動中靜이다. 눈을 감는다고 하여 앞을 보는 능력이 소멸 되는 것이 아니라 눈꺼풀을 보고 있음에 대해 무지했던 자신을 깨우쳤을 것이다.
성철 선사께서 입적하실 때 남기신 법문을 당연한 현실이라며 ‘평범한 법어에 매달릴 일이 아니다.’ 라는 사람이 있다. 반면 ‘비범하신 선사께서 설하신 평범한 법어 속에 무언가 중대한 내용이 있을 것.’이라는 대중도 있다. 성철 선사의 눈으로 본 산과 물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떨칠 수 없다.
대사의 법어를 머리로 해득하고자 한다면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다. 가슴으로 이해를 하고자 한다면 답답한 사람이다. 성철당의 경지에 도달한 다음 그 같은 입지에서 산과 물을 바라볼 일이다. 상좌들 또한 각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한계가 있다. 산을 산으로 본 눈, 물을 물로 본 눈. 소식이 본 산과 물은 어떤 시각이었을까.
지식이라는 범주는 유한하다. 바늘을 잘 만드는 것과 바느질을 잘하는 것. 활을 잘 만드는 것과 활을 잘 쏘는 것. 피아노 조율을 잘하는 것과 피아노 연주를 잘 하는 것은 다르다. 5급 열 사람이 5단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바둑이다. 산과 물을 보는 눈높이가 성철당과 비슷해야 말이 통하는 것이다. 유한한 지식으로 선사의 무한한 지혜를 가늠하기란 애당초 격이 맞지 않는다.
물을 물다운 본질로 알고, 산을 산이라는 근원으로 알기란 일반적 알음알이 수준으로 어렵지 않겠는가. 물을 물 아니라고 보는 그 시각이 있었기에 물을 물일 수 밖에 없노라 강조하신 것은 아닐까. 한번 부정 끝에 다시 긍정하는 시각 저편에 달관이라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음은 아닐까.
물도 산도 그대로건만 사람이 저마다 견해에 따라 물이니 아니니 산이니 아니니 한다. 성철 선사께서는 산이라는 성품으로 산을 보셨고 물이라는 성품으로 물을 보셨을 터이다. 산을 보듬을 만큼 큰 가슴을 갖지 못한 필부로서야 짐작으로만 끄덕일 뿐이다. 산은 인간의 견해와 상관없이 산이다. 물은 사람이 쓰는 용도와 상관없이 물이다.
물은 물이려니, 산은 산이려니, 사람이 인간이려니, 신이 있거나 없거나 생각 나름이려니, 각覺을 각覺 하지도 못한 채 각자覺者의 각성覺醒을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몰지각沒知覺한 소치인가. 물을 물 아니라는 시각으로도 보고, 물은 물일 수밖에 없다는 경지도 터득한다면 지식이라고 하는 한계를 초월하여 혜안이 트일 것 같다.